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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출 33: 7-11 (친구같이)우리교회출애굽기

Re..출 33: 7-11 (친구같이)

이름 : 이근호(IP:)

127강-출33장,7-11(친구같이)-exo060108

친구 같이

2006년 1월 8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3:7-11

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33: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33: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33: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구약 성경에서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나니까 오늘날 우리들 마음 속에서 이 신비로움과 동일한 신비로움을 체험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모세와 더불어 있을 때에 ‘구름 기둥’이 등장하여 백성쪽과 모세쪽으로 예리하게 구분시키고 있습니다. 이 구름 기둥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나타났으면 얼마나 신날까 하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진정한 신비로움과 기적이란 구름 기둥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야기하면서 마치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처럼 상대하고 계시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막을 가지고 백성과 차별되는 대우를 모세에게 퍼붓고 계십니다.

모세는 진 중에 성막을 치는 것이 아니라 성막을 거두어서 무리 지워진 진영에서 훨씬 떨어진 자리에다 성막을 칩니다. 그것을 모세는 ‘회막’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회집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홀로 그곳에 가게 되면 백성들은 뒤따라갑니다. 그리고 모세가 성막 안으로 사라져버리고 구름기둥이 백성들을 가로막아 서게 되면 백성들은 일제히 하나님 나타나심에 대해서 엎드리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서 모세만큼은 하나님과 친구 사이처럼 대화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만큼 모세가 대단해서 그러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놀라운 저자세로 낮아졌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비요 기적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찾고자 할 때는, 무엇이 나를 지금보다 현저히 마음을 낮추게 하는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 높아지려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력으로 인간들은 낮아지지 않습니다. 설사 낮아졌다고 여길 때에도, 그 '낮아짐‘을 함유하고 있는 자신의 본성은 상대적으로 안 낮아진 이들보다 높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필히 안 낮아진 것이 됩니다. 되레 ’낮아짐‘을 빌미로 ’높아짐‘을 시도한 바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 대 인간이라든지 인간 대 하나님 사이에는 분쟁과 경쟁과 시기와 다툼의 관계로 엮여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친구’라는 뉘앙스로 모세에게 다가오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 친구라는 말은 다툼이 성사될 수 없는 사이라는 말입니다. 즉 더 이상 허물이 없기에 자신을 더 이상 위장하거나 가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대인관계에서는 하나님 관계에서 제일 피곤한 일은 자아를 새삼 좋게 다듬어서 진열하는 태도로 나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친구 사이에는 그런 일들이 소용없습니다. 다듬으나 아니 다듬으나 벌써 다 내막을 알고 있는 입장이 친구 사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를 친구처럼 상대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그 인간들에게 뭔가 바라고서 접근하시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 친구 사이에 수립되는 것은 바로 ‘화목제물’이라는 겁니다.

‘화목제물’이란 한 쪽에서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상대의 허물을 다 수용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는 쪽은 더 이상 자신을 위장할 이유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신을 가식적으로 재조정해서 꾸미고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화목’의 의미가 모독당합니다.

그러니까 막 먹어도 되는 사이가 아니라 되레 황공스러운 사이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모세를 친구같이 상대해주시는 겁니까? 그 깊은 취지는 신약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성경을 볼 때는 문자로 이해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인간의 육적인 자질이나 능력으로 해석은 불가능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적인 자질로서 성경이 가능치 아니하면 인간의 육적인 지식이나 능력을 부정당해야 하고 부인당해야 마땅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자기 부인’은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 변동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정부에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불만을 늘어놓다가도 우리 나라보다 훨씬 못사는 인도의 비참한 경제 사정을 알고 나면, 우리는 저절도 우리 나라의 처지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이러한 감사란 자신의 위치에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모세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모세보다 더 못한 자리까지 친히 낮아지셨기에 모세로 하여금 자기 권리나 자기 체면이나 자존심을 생각할 필요를 못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경우에는 여전히 하나님과 모세 사이는 서로 다는 신체와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만, 신약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영께서는 더럽고 추한 우리 인간의 신체를 자신의 궁전으로 삼으시고 들어오십니다. 이 낮아짐을 쉽게 이해코자 하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현 깨끗한 자신의 신체를 아주 더럽게 살아가는 노숙자의 신체와 바꾼다고 한다면 기겁을 할 것입니다. 이왕 바꾼다면 현재 나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신체를 찾게 될 것입니다. 얼굴도 미남에다가, 신체나 내부장기까지 건강하고, 허우대까지 늘씬하여 만인으로부터 흠모 대상이 되는 신체를 고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깨끗한 신체 안에 계셨던 그 성령님께서, 죄 투성이인 우리의 신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성큼 들어셔서서 자신의 안방으로 삼으시고 더러운 우리를 거룩한 나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연유는. 그만큼 성령님께서 낮아지셔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성령님의 낮아지심 덕분은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주특기나 장기나 자랑거리들만 골라서 하나님에게 내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친구처럼 이미 우리의 사정을 훤히 다 꿰뚫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리나 창녀나 강도의 신체도 마다하시지 않고 찾아드셔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정신을 마주대하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마음이 낮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낮아짐에서 우리 보다 더 낮게 오신 하나님의 ‘친구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장할 필요가 없는 진정한 자유의 생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낮아지신 주님의 낮아진 위치를 놓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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