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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name="[문서의 처음]"A 하나님의 아들설교히브리서

Re..마 27:50-54 (하나님의 아들)

이름 : 이근호(IP:)

하나님의 아들

2006년 1월 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7:50-54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과감하게 지신 것은 말씀을 의식해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죽고 말씀에 의해 살았습니다. 말씀 성취는 오로지 예수님 본인만이 달성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성취란 죽었다고 도로 사는 이 방식 외에는 없기에 예수님은 십자가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셨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말씀에 죽고 말씀에 사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죽고 사람에 의해 사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의식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제시한 말씀 성취와 인간들이 알고 있는 말씀 성취가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차이집니다.

예를 들면 49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들은 엘리야를 고대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구절은 말라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 엘리야를 고대하는 것으로 말씀 성취가 달성되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도리어 십자가 나무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죽으신 그 방식이 바로 말라기를 포함한 모든 예언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예수님의 방식을 자기 능력으로 알아낼 재간이 없는 겁니다.

만약 제가 세상에 등장하면 대자연이 떠들썩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자연은 저를 압니다. 제가 구세주가 아닌 것을 아닙니다. 제가 십자가 달려봤자, 바위는 갈라지지 않고 무덤도 열리지 않습니다. 대자연은 오로지 예수님이 벌리신 ‘말씀 성취’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일어난 법칙이 곧 대 자연을 운행하는 법칙과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대자연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를 아는 것은 대자연을 과학적으로 탐색한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굴절 만원경으로 목성의 4 개의 위성을 알아내었다고해서 그가 대자연의 원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만원경으로 가지고 아무리 십자가를 관찰해도 거기서는 ‘말씀 성취’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을 입은 사람에 한해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미 말씀을 성취했음을 압니다.

노아 홍수 때, 아무리 큰 방주가 준비되어 있어도 그 안에 들어가서 구원받은 사람은 기껏 한 식구인 8명 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긴장케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많아도 십자가에 담긴 대자연의 숨은 법칙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죽이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날마다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말씀에 죽지 아니하는 자는 말씀에 의해 산다는 것도 의심할 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말씀에 의해서 죽는 줄 아는 자만이 사는 것도 말씀 성취에 담긴 능력으로만 산다는 것도 아는 자입니다. 늘 말씀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늘 죽는 자만이 사실 늘 사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성취’의 표준적인 방식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 때문에 죽고, 말씀으로 인해 부활되는 것을 손수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말씀 성취’의 진수를 거부하고 나름대로 말씀 성취의 기본형을 짜기에 급급합니다. 소위 성경을 보고 스스로 자기 규칙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이러이러한 법들을 준수해야 한다기에 그 법을 지키기 위한 규칙들을 나름대로 정해보았습니다. 내가 정해놓은 이 원칙과 규칙을은 잘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는데 무용지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자연은 나의 행위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에만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리에 들어가는 마늘이란 자근자근 부서져야 제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통마늘 그대로 들어가면 아무런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마늘 으깨듯이 우리를 으깨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간에 말씀성취의 면면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그러면 부활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까? 히브리서 9장과 10장에 보면 성소 휘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휘장이 없는 곳은 더 이상 성전으로나 가치가 소멸되었다는 뜻입니다. 원래 휘장이란 거룩한 세계와 그렇지 못하고 더러운 세계를 확연하게 갈라놓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그 휘장이 손상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인간쪽에서 시도된 방식으로 구원이 성사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선한 행위로서 휘장을 통과해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원래부터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였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구원이 된다면 그동안 휘장으로 가리워진 하늘의 거룩한 능력의 빛이 휘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와 닿아므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5:14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빛이 와 닿은 자만이 빛의 자녀들입니다. 하늘의 빛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것입니다. “일어나 일어나 그만 자고 일어나란 말이야!”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능력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입법자가 되어 스스로 법체계 안에 갇혀서 지내는 일이 구원되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 식으로 달성한 ‘말씀 성취 틀’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의 일상성을 폭격해버립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모든 일상성 속에서 나름대로 규칙과 법을 성경을 토대하여 제정해도 하나님께서는 일절 인정해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주체는 둘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법을 지키고 싶어하는 자아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자아도 있는데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자아가 우세합니다.

이로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는 구원되지 못함을 아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의 죄를 정죄치 않게 하셨습니다. 이러서 우리는 법으로 사는 대상자가 아니라 사랑에 묶여 있는 상대자가 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본연의 우리 자리인 죽음의 자리를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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