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칭의 1-1
Re..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칭의 1-1
이름 : 이장우(IP:)
05 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 칭의1-1
05. 10. 10 강의 이근호목사
서울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중생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하고 칭의, 의로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습니다.
중생에 대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식으로 중생을 생각하신다면 혼란에 빠집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고 거듭나고 싶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은 욕망은 기독교라는 것을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파탄이 오면 다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부인들의 통계에 보니 지금 살고 있는 남편과 다시 살고 싶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80%가 다른 사람과 살고 싶다는 그런 고백, 당연한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내와 또 살겠습니까? 남자들은 반 이상이 지금 살고 있는 아내와 살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그만큼 남자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와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분들은 인생을 팔자를 다시 고치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인생의 지우개가 있다면 지우고 다시 살고 또 지우고 다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자분 들이 옷 살 때에 잘 샀다고 집에 와보니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바꾸러 가고 바꾸고 와보니 또 마음에 안 들어 바꾸러 가고 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꾸만 바꾸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바꾸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 한번 다시 살고 싶다. 한번 바꾸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욕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온 우주를 다 가진다고 할지라도 이 욕망은 흡족함이 없습니다. 계속 목마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다섯 명을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하여튼 능력이 있어요! 미모가 되니까 그렇겠지요! 보통 사람이야 엄두가 나겠습니까? 다섯 명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산다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의 삶의 모습을 어디에다가 결부를 시키는가 하면 마치 사람들이 목마를 때 우물에 와서 물을 퍼서 마시고 또 목마르면 우물에 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그런 갈증과 이 여인의 인생살이와 같이 본 것입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다시는 갈증이 없는 그런 인생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욕망입니다. 따라서 내가 거듭 태어나고 싶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입니다. 누구든지 갖고 있는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이며 사람의 뜻입니다.
이런 자신의 불타는 야망이 있는 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3:8절을 들이대면서 예수 믿으면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고 우기는 것은 성경전체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고 자기 환상에 빠진 격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거듭남의 비결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박옥수 목사입니까? 거듭나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거듭나봐야 목마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한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한 그런 수는 없겠습니까? 왜 없겠어요? 있지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으면 되지요! 목마르다고 느끼는 그 주체가 아예 사라져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오렌지 주스를 주셨는데 마셔보니 시원하고 맛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렌지 주스가 하나도 없다고 하고 제가 목마르다고 목사님 오렌지 주스가 더 있습니까? 할 때에 목사님이 권총으로 저를 쏘아 죽이면 됩니다. 아 조용하다. 오렌지 주스 마시고 맛있다고 더 달라고 하는 그 인간을 권총으로 쏘아 죽여 버리면 조용하게 됩니다. 누가 또 목마른 사람 없어요? 하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여 헉헉거릴 때에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런 인간을 제거해버리면 됩니다. 죽여 버리면 됩니다. 다시 태어나서 영생 얻고 싶다고 하면, 영생 얻고 싶다고 하는 그 인간을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것을 고상하게 성경적으로 말하면 육은 죽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육도 죽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든 세례요한이든 이 세상을 거쳐 간 것은 다 죽습니다. 이 세상을 한번 경험했다면 자 죽습니다. 이 세상의 맛을 보았다면 다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수상합니다. 재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난 작자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하냐? 직업이 무엇이냐? 와 상관없이 그들 속에는 이미 이 세상에서 형성되고 조성된 사람의 뜻 자기 뜻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자기 뜻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지 않습니다.
오래 살고 싶습니다. 생명나무열매를 따먹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영생을 얻고 싶다고 하는 이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욕심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생명의 열매를 못 따먹도록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아놓은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따 먹어도 됩니다. 하고서 나온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한번 개기는 것이며 대드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 못 따먹게 했으면 그것이 주의 뜻이라고 하면서 수용을 해 주어야지!
그러므로 사람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의 뜻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 공식을 평생토록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잊으면 크게 오해합니다.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하면서 반항하게 됩니다.
사람의 뜻을 제거하고 억압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잘 아는 주기도문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 해주옵소서! 우리는 죄가 이미 있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뜻을 뭉개버리고 우리는 하나의 죄로서 죄만 터뜨리는 환자로 간주되는 것이 주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뜻을 갖게 되면, 사람이 뜻을 품게 되는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오해하기를 이제부터는 사람의 뜻을 품지 않아야지!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이 제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요!
사람이 뜻을 품고 있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데 이 두려움은 자기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세상의 모든 변화와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의 뜻과 연결되면서 계속하여 알 수 없는 공포가 인간에게 밀려옵니다.
종교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면, 자기의 뜻이 있는데 자신의 뜻을 노리면서 자신과 사람과 세상 전체가 이 뜻과 결부 하여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자꾸 유발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 믿고 성경말씀 보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기에 알 수 없는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자기 뜻이 망가지고 훼손될 것을 걱정하여 사전을 그것을 극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로서 열심히 신의 뜻에 순종하고 순종하려는 경향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발생되는 것을 자신의 뜻을 사수하기 위하여 자기 방법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 있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좀 커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의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린 애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공부시간에 멋대로 고함지르고 기차간에서 멋대로 울고 목욕탕에 가서 때 씻는데 막 몸부림치면서 앵앵거리고 울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라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어린아이의 시절은 자꾸만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이미 자기 뜻이 생기게 되면 여기는 반드시 공포심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굴속에서 40일 금식 기도한다고 해서 이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제일 된 고민거리가 무언가 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기는데,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사람과 세상의 변화에서 오지만 특히 자기 자신의 욕망에서 이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내부에는 두개의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자아라는 것과 그 자아에게 무서움을 주는 또 다른 자아가 있어가지고 이 사이에 균열이 있는 것입니다. 한 쪽이 다른 한쪽으로 인하여 무서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무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되면 안돼!
얼마 전에 상주에서 mbc 가요 콘서트 들으려고 모였다가 네 살 일곱 살 어린애 죽고 할머니들이 죽었지요! 또 어제는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3만 명 가까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런 세상의 움직임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상주야 여기서 머니까! 상주에 혹시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 있습니까?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안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지진이 저 멀리 파키스탄이 아니라 양천구에서 터졌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두려움이 가까운 두려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누가 살고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두려움에 이유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 제공자가 나입니다. ‘나’ 때문에 ‘나’가 힘든 것입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말이지요! 어려운 말이지만!
그래서 노인들이 하는 말이 있지요! 칵 죽었으면 좋겠다. 그냥 자는 잠에 조용히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사는 것도 지겹다. 소원이 있다면 죽는 것이 제일 팔자 편하다. 자식들 애 안 먹이고 똥오줌 안 싸고 자는 잠에 갔으면 좋겠다. 옛날에서는 연탄가스가 있어서 편리하였는데 요새는 연탄가스가 없어서,,,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제일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치곤란입니다. 내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무슨 희망을 거는가 하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현재 사는 이런 식으로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열 번 다시 태어나도 열 번 다 고생할 것 무엇 하려고 태어납니까? 이런 식으로 태어나지 않고 제발 두렵지 않고 고생스럽지 않고 행복이 넘쳐나는 그러한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 모든 인류의 사는 희망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데 고생 안하는 나로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희망입니다.
어린애들은 아직 그것을 모릅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어려움을 모르기에 조금 더 살아보고 결정하겠다고 나오지만 그것이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면 그때부터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그런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희망이 생길 때에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게 해드릴까요? 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비법과 방법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 주의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 드립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그러한 의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해석한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기초부터 자리를 잘 못 잡았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런 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없습니다. 단호히 없습니다. 우리가 고생스럽습니까?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반드시 공히 가야할 고생길입니다. 이러한 법칙을 스스로 위배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어차피 고생하고 그 마지막은 흙이니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을 일단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땅의 맛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위배하려고 머리 써가면서 착각을 일으켜 아니야 그것이 아니야 다시 살수 있어! 이러한 망상은 여러분들이 아예 생각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고 여러분이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우니 여러분의 욕망이 또 다른 자아가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그 순간부터 다시 못 태어나면 안 된다는 어떤 공포심이 또 밀려옵니다. 내가 이렇게 어설프게 교회 다녀 가지고 거듭난 신자가 맞느냐는 이런 공포가 또 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듣고 다시 태어나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해결될 줄 알았는데, 어떤 방식과 공식이 나에게 유효하게 작용하는지 아니 하는지가 의심스러울 때 내가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또 생깁니다.
지옥가면 안돼! 하는 그런 공포심이죠!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것이 어떤 방식이든 성경말씀을 오해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듭남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였기 때문에 이런 혼란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여러분의 그 혼란을 말끔히 해소를 해 드리고 싶어요! 제 능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성경 말씀에 보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그러한 욕망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딴 데 있다는 것을 제가 좀 알리고 싶습니다.
성경구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열왕기 상 9:8-9절입니다. 8 이 전이 높을찌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 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이 거듭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만 나중에 성전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성전을 지어놓았는데 성전이 왜 이 모양이냐 하면서 비웃으면서 이야기 할 때 대답하기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겨서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예언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중생에 대하여 거듭남에 대하여 죽 이야기 하면서 거듭남이란 개인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 거듭나고 싶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인간 중심적이기에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거듭남에 대하여 없는가? 있지요! 있습니다. 디도서에도 있고 요한복음 3장에도 있고 다시 태어남에 대하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은 없지만 성경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열왕기 상 9장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9:9절의 말씀에 의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 낸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모조리 작살내는 것입니다. 큰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여호와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십니다. 그렇다면 거듭 태어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거듭나는 것이지, 여기 거듭나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하면서 우리에게 의사를 물어보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듭남은 우리가 거듭나고 싶다는 것과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섬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면서 인생사는 것이 힘드니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하고 외칠 때에 하나님은 이 사람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애굽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 끄집어 낼 때에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끄집어 내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어린 양의 피로서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외침과 함성은 전혀 하나님의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며 본능인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종교가 나오겠지요! 인생 팔자한번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을 끄집어내셔서 자기 아들 혹은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아들 된 사람 백성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살기 싫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싫든 좋든 간에 강제로 애굽에서 나와 이스라엘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인생이 괴롭다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요구하는 조건과 아무른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하는 요구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진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 밑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가 하면 지금 사는 것이 자기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지금 인생이 자기 욕망에 부합되지 않기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좀 나은 생활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 되려고 흉내 내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열왕기 상 9:9절을 다시 읽습니다.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그러니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이 얼마나 고생스러우냐! 죽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우냐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나서 3만 명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3만 명이 죽든 상주에서 어린애가 깔려 죽든 하나님의 관심사는 애굽에서 너희들을 이끌어낸 하나님의 취지와 사랑을 이 세상에서 누가 알아 모시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사정 알아달라고 외치지만 하나님은 엉뚱하게 내가 한 작업을 너희들이 왜 훼손하느냐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성경구절을 뽑는가 하면 거듭남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내가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에 관심이 있지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나를 만드셨나 하는 하나님의 기초적인 그 의중에는 전혀 관심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래 놓고서는 하는 말이 거듭났다고 자꾸 우기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데 동의안합니다. 동의는 안 하는데 그것이 거듭남에 대하여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아닙니다. 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 이것입니다 하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합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자기 백성 자기 마음대로 뽑아서 세우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왔을 때 예수님의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니고데모가 이해 못할 만합니다. 니고데모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찾아온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찾아온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할 때에 주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미 의도자체가 나 살려주세요! 하면서 왔기에 그런 식의 거듭남은 없다는 것입니다. 서울 강의에서 오랜만에 고함을 지르는데 중생에 대해서 너무너무 오해하고 있기에 살짝 기분 나빠지는데,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것이 거듭남이지 무슨 이 땅에서 고생된다고 살려달라고 니고데모처럼 다가오니 주님께서 너는 천 날 만날 해도 천당 못 간다는 이런 말씀밖에 더 하겠어요!
이미 의도를 가지고 예수를 찾아 왔는데, 거듭남에 대하여 처음부터 상관없는 대화가 오고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왜 다른 신을 섬기느냐? 이것뿐입니다. 하나님 배고픕니다.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너 왜 다른 신을 섬겼느냐? 하나님 제 아이가 아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믿느냐? 하나님의 관심사는 애가 아프고 배고프고의 문제가 아니라 너는 나를 아느냐? 너는 나를 믿느냐? 나는 너를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이다. 그것을 아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갈 때에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물도 없고 양식도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믿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동문서답입니다. 너는 나만을 참된 신으로 인정하겠느냐?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겠느냐?
하나님은 신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나를 알겠느냐고 하시는데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아쉬운 것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털어놓는 일에 우리는 아주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읽었던 열왕기 상 9장 9절 이후의 말씀에 그 이전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나 신약성경에 죽 오면서, 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깊어졌기에 한번 정리해봅시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중생,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나부터 생각하지 말로 구약에서 신약까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서 무엇이냐를 물어야 할 텐데, 성경의 흐름을 모르고 신약에서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니 우리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성령을 들먹이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성경전체는 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나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이것을 온 우주에 크게 드러내는데 관심이 있지 내가 거듭나서 영생 얻는 데는 하나님께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태어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 이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이 말만 구약에서 자꾸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신약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참 이스라엘이고 거듭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같이 천국가고 싶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한수 배우고자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의 관심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살고자 하는데 관심이 있기에 기초가 잘 못된 것입니다. 출발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거듭난 사람들이 있어요! -바라기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거듭난 사람들이기를 원합니다. 표정들 보니 표정이 아니라 여러분은 다 거듭난 사람들 일거예요! 저는 아니더라도- 많아요! 많은데 거듭나고 싶은 사람은 더 많아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안 거듭나게 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십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팔자 한번 고쳐보겠다고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들 지옥 갑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이 참 주시며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만 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만 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제가 고함지른다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쉽습니까!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생각하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라고 어떤 공식처럼 말하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거듭나게 됩니까? 하는데 관심을 둔다면 그 사람은 탈락이죠! 그 사람은 지금 제 말을 전혀 이해 못한 것입니다.
방금 제 말을 이해 못한 것을 가지고 일반 교인들을 나무란 것 같지만 사실은 목회자들이 거듭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어디에 관심을 두는가 하면, 예수님은 나의 주입니다. 굶어죽어도 예수님은 나의 주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데 왜 목회가 안 되지? 교회가 안 되지?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짜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아까 본 열왕기 상 9:9절의 말씀처럼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신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구약에서는 애굽에서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건져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일방적으로!
요즈음 같으면 일방적으로 저희들을 죄에서 자기 피로 건져낸 분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일방적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천당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으로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내가 오래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육입니다. 만약에 육적으로 거듭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공포가 밀려옵니다. 무슨 공포? 내가 거듭났는데 이렇게 교회 소홀히 하고 형식적으로 하다가는 거듭난 것도 취소되면 어떻게 하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만약 내가 몇 년 뒤에 내 속에 어떤 일이 발생해서 내가 죽기 전에 예수를 부인하여 버리면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느냐하는 이런 문제, 이것을 아까 무어라고 했습니까? 두 글자로 ‘공포’라고 하였지요! 이런 것이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의 공포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포가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기에 이런 공포를 자기의 노력으로 지워버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교회 충성하고 성경 열심히 보고 전도하고 헌금도 하면서 알 수 없는 공포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보고자 하는 시도로서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공포가 자신의 믿음보다 계속하여 능가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가 묻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다 이루었는데 왜 무서워합니까? 그러면 대답하기를 제가 믿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신 것을 믿습니다마는 그러나 내가 만약 그것을 믿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써볼까요? 써보고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답변한번 해보세요! 글자 쓰는 것이 시간이 아까 와서 함부로 쓰는데 용서해주세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내가 구원되었습니다. 라는 것을 내가 안 믿으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변을 하겠습니까? 이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묻는다면 여러분이 답변을 한번 해 보세요!
우리교회 어떤 분은 설교시간이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고 해야지 왜 목사님이 일방적으로 이야기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그런 권유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 질문하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본인이 아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보세요! 삼다수 물이잖아요! 누가 보아도 물임을 동의할 것입니다. 이것은 비타 파워입니다. 누구나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비타 파워라고 내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은 비타 파워가 사물이기 때문에 다 눈에 보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마음은 아는데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심은 따로 챙겨두고 남들이 내 마음을 알아줄까 아닐까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본인이 아십니다. 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십니까? 하실지 모르지만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라 바로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거듭나게 됩니까?” 의 질문을 니고데모가 예수님께서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이 기억나십니까? 그러니 네가 알잖아! 네가 믿고 안 믿고는 사실 본인이 아는데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이렇게 찾아와서 예수님께 묻는 것은 다른 사람은 지옥가도 저는 천당 가는 것 맡지요! 하면서 예수님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첫 시간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질문을 던져도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자신의 작업에만 관심 있지 그 사람 편에 서있지 않습니다.
나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한다. 어떻게? 영으로 태어난 사람만 구원된다. 라는 하나님의 자기 작업만 이야기 할 뿐이지 그 사람에 대하여 옹호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 제가 강의한 전부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싶어서 어떻게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구원받는 것은 그 사람의 요구조건에 부응하여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원하는 사람을 그냥 거듭나게 해서 백성 만들 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결과적으로 어떻게 드러납니까? 그냥 그것뿐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은 예수님입니다. 나는 다른 주는 싫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옛날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일방적이었던 것처럼 나를 죄에서 십자가로 구원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외칩니다.
다른 사람이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묻는 게 아니야! 다 알게 되어 있어!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 믿음 있다.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나 너 어떻게 그런 믿음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너 몰라도 돼! 내 마음 내가 알아! 그리고 네 마음도 네가 알아!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구세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다만 만약에 교회 다니는데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누가 전도해서 절에 갔다. 절에 가서 불자가 되고부터 돈도 잘 벌고 아이들 공부도 잘하게 되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역시 부처가 최고야! 할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전에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찾을 때부터 그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고 자기 아쉬운 것을 매 꾸어 주는 일용직 예수였던 것입니다. 일용직 예수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주님이 바뀝니다. 이렇다면 그 사람은 거듭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내가 거듭난 것은 이러이러한 축복을 주었기에 거듭난 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주신 그냥 구주십니다. 그 사람이 외국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상관없이 하여튼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야! 라는 고백, 참으로 이 고백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어떤 공포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첫 시간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만약 욥기를 보면서 공포를 느낀다. 자식이 열명이 죽었다. 아이고 나는 자식이 둘 있는데 죽으면 안 되지! 재산이 다 날아갔다. 아이고, 이 재산 날아가면 안 되지! 하나님께서 욥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게 하였다. 아 그러면 나는 미치지! 이런 식의 공포심이 성경 보면서도 찾아옵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은 욥기를 보면서, 물론 그런 공포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가끔은 특이하게도 주여! 저에게도 이런 욥과 같은 고난을 주신다고 하실지라도 저는 주님이 저의 구주이심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여러분들이 매일 아침마다 하신다면 하루가 아마 가볍고 행복하실 것입니다. 왜? 하루 중에 어떤 공포와 두려움도 여러분의 곁에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 분간 쉽시다. 녹취 051229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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