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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일반] 함평 수련회 교재우리교회[수련회]

[일반] 함평 수련회 교재

이름 : 이근호(IP:)

다음의 짧은 글을 통해서 베드로전후서를 보는 관점을 점검하는 교재를 사용코자 하니 주체측에서는 인원수대로 복사해서 그날 배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화론의 문제점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막상 그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본인에게 들어왔다고 여기는 그 순간부터 인간들은 그 믿음의 ‘블가능한’ 속성을 ‘가능한 속성’인 것처럼 취급한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화론을 접해보면 그 이유가 윤곽이 드러난다. 문제는 성경에서 지시하고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하든지 맞추어나가는 것이 성도로서의 의무에 해당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관계를 나름대로 수립해놓은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로이드존스 목사의 예수님과 성도 관계가 어떠한가?

그는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영적 근육’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강해 35페이지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 활동을 하기에 앞서 생명이 있어야 하며, 근육이 있어야 하며, 기능과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상태입니다. 즉 그는 이러한 모든 것을 부여 받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로이드존스 목사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이런 것을 부여하게 된 이유가, 이것을 가지고 우리 성도가 하나님과 같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처럼 이 땅을 살라고 거기에 필요한 능력을 성도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그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가능한 믿음의 속성이 이제 인간의 것이 되고 난 뒤부터는 일종의 신처럼 마음먹은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가능한’ 속성을 변해있다. 의지만 있다면 의지의 만족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성도 안에 대기상태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안할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지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성경 말씀은 성도의 손에 의해서 성취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불가능이 가능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성도가 처음 믿음을 선물을 받았을 때,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믿게 되었다고 여길 수 있을까? 아니다. 도리어 성도는 믿음을 받게 되면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재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즉 ‘믿음의 속성=불가능성’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성도는 그 뒤로 뭐든지 믿음을 행하게 된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은 곧 늘 불가능한 속성을 달고 다닌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아내를 만나게 되면 그 아내를 찾아내고 골라낸 것이 자신의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발생케 하셨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만이 믿음이 속한 기적이 아니라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기적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로이드존스 목사의 이론에 의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의 삶은 이런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된다. 즉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기적으로 된 것이다. 나의 가능성은 전혀 동원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아내를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에게 직접 신이 되라고 넣어주신 그 능력을 활용하려는 취지에서, 나의 의지가 발동이 되었고 나는 이러한 나의 가능성을 주저없이 사용하여 현재의 나의 아내를 얻게 되었다”라는 식이 된다.

얼른 들으면 일리가 있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숫자 1를 여러 번 그려보게 해보자. 만약 10번을 그렸으면 10개의 숫자 1이 그곳에 그려져 있을 것이다. 전부 똑같은 1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릴 때의 의지가 감정은 한 순간도 동일하게 작용한 적이 없기에 10개의 1자가 다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그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처럼 하라고 해서 그런 마음으로 10번이나 아내를 사랑했다면 10번 다 ‘아내 사랑하라’는 말씀에 표준이 될 만한 사랑인가? 10번 다 그러한가? 아니면 그 중의 어느 하나인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닌가?

로이드존스의 주장에 의하면 10번 다 아내 사랑에 해당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내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주신 사랑을 능력을 활용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로이드존스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축약되는데, 즉 “내가 주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만 있다는 조건으로서도 얼마든지 신의 법을 신의 입장에서 성취한 셈이 된다”고 말이다.

(이 지점에는 칸트의 윤리적 실천 이성론과 연관한 강의가 삽일 될 것입니다. 즉 인간은 완전한 선을 행할 수는 없으나 선을 향한 선한 의지가 있는 것으로 신의 품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 )

이렇게 되면 똑같은 ‘아내 사랑’이 안 나와도 무방하다. 심지어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도에게 더 이상 ‘불가능한 기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 선에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성경 구절을 코 앞에 갔다대어도 모두다 성도 앞에서는 다 성사가능한 일이 된다.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을 지키겠노라고 선한 마음만 먹어도 이미 그 말씀은 성취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로이드존스 목사에게 있어 ‘신같은 성도’의 삶이란 “나는 신이기에 모든 말씀은 내 손으로 다 지켜지게 된다”라는 마음만 먹어도 되는 삶이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이것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도 한다. 이 ‘믿음’과 이 ‘약속’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인간적인 불가능성이나 기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성취되고 유지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성도는 곧 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이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더 이상 3위일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포함시켜서 4위일체가 되어야 할 판이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100% 기적과 인간적인 불가능성으로 되어진 믿음이 그 다음 단계에서 이 100%가 몽땅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바꿔치기 당한 것이다.(물론 애초부터 진짜 믿음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이런 발상을 여전히 고수하게 되지만)

‘믿음→ 불가능’이면서도 어떻게 곧장 ‘믿음 생활→가능’으로 전환되는가? 이는 불가능한 믿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책을 직접 보라! 거기에 쉴새없이 많은 지시와 명령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라’ 혹은 ‘하지 말라’가 성도를 독촉하고 있다. 이러한 명령들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 이제는 그 명령들을 지키는 쪽으로 나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동안 전혀 하나님의 명령들을 안 지킨 것이 된다.

즉 무슨 논리인가 하면, 내가 나의 가능성을 믿기 전에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 말씀은 나에게 성취지 않는다는 점을 철통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불가능성적인 믿음을 참 믿음으로 잠시 유지한 것은 “주님 덕분은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신나고 편한 삶을 살다”라는 꿍꿍이를 챙겼는데, 성경을 들척이면 들척일수록 도저히 부인 못할 하나님의 엄한 명령과 지시가 주어지니, “이제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다소 힘들지만 말씀을 내 힘으로 지키는 식으로 나가자” 한 것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신앙생활 하느니 차라리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그 방식이 자신의 속성에 되레 부합되고 자신을 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처음부터 전혀 믿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이란 처음부에도 인간적인 불가능성일 뿐만아니라 그 믿는 자 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일도 다 불가능적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재 아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생각해도 성도 자신의 가능성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인정하래야 인정될 수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현재 아내가 있음을 해명하고 설명하는 길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발생된 현상이라는 고백 뿐이다. 그렇다면, 기적, 즉 인간의 불가능성이란 처음 예수 믿을 때만 작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아내하고 생활하는 이 평범한 삶에도 여전히 기죽지 않고 맹렬하게 작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성도의 이러한 정황고백에 대해서 비웃고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 동안 아내와 있었던 일, 즉 아내가 보따리 싸고 친정으로 도망할 때 붙잡은 일이나, 아니면 아내의 마음을 흐뭇하게 달래기 위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비싼 식사비를 제공한 것도 모두 성도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행위들이 된다.

그런데 로이드존스의 논리에 의하면, 불가능성을 계속 믿는 자는 곧 ‘아무 것도 안하겠다’라는 다짐한 자라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편견이 작동될까? 그것은 자신의 가능성이 발휘되고 폼나는 경우에만 인간은 행동에 옮긴다고 믿는 철학적 사고에 얼굴을 파묻고 살기 때문에 생긴 발상이다.

즉 인간을 지배하는 그 어떤 힘은 따로 있을 수 없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결심이 시발점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논리에 묶여 있으니, 이 논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로이드존스는 도저히 믿고 싶지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부적 힘이라도 일단 인간 내부에 들어와서 그것이 그 인간의 개별적 소유로 전환되고 난 뒤에만(타인이 전혀 침범할 수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그 사람 고유의 행위 근거로 작용한다는 주장을 로이드존스 목사는 하고 싶은 것이다.

즉 로이드존스 목사는, 사람의 변화, 성도로의 변화에 대해서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토대를 고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축구 선수가 10년 동안 프로 경기에 나가 골대만 12번 맞히고 한 번도 골인 시키지 못하고 은퇴했다면 그 사람은 과연 10여 년 동안 그냥 놀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런데 어떤 축구선수가 비아냥거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난 프로 경기를 뛰면서 12골이나 넣고 은퇴했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지난 10년 간 열심히 살았다”라고 했다면 사실 이 축구선수가 아직도 세상살이를 모르는 사람이다. 위의 두 축구선수가 고백해야 될 복음적 신앙생활은 바로 이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것도 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지난 온 모든 세월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이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이 ‘불가능성’을 어떻게 곧 죽어도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 못하겠다고 우기는 아담 속성에서 영글어내느냐가 관권이다. 즉 “이렇게해서 이 말씀을 제 손으로 성취해 내었습니다”라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이렇게하고, 저렇게하면 얼마든지 제 힘으로도 저 정도의 성경 말씀 같으면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것 같은데 왜 저는 여전히 불가능성을 고백해야만 하는 존재입니까?”를 물어야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고,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예수님에 대한 적대심을 처음 밝혀낸 분이 바로 주님이었다는 고백이다. 사도 바울처럼 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적대심을 물러 받았다. 그런데 인간들은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것을 감추어놓고 있다. 말씀 안에서 각양 명령과 지시가 떨어지자 옳다구나 하고 더욱 더 그 말씀을 지키는데 매진하므로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더 더 깊은 곳으로 치워놓게 된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안 본다고 뭐라하면, “성경 말씀 지킬 필요 없이 구원시켜준다고 했잖아요.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이라면 꼭 볼 필요도 없는게 아닙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딴 소립니까”라고 항의하고, 성경 말씀에 철저하지 않다고 비난하면,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제 속에서 놀라운 성경 성취의 면면들이 발휘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광을 돌릴 겁니다. 지금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 애쓰고 있는 것 안 보이십니까? 열심히 살려는 이 마음 자체를 ‘거룩한 삶’이라고 칭해 주세요”라고 변명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라도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불가능성이 튀어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댐이 터지듯이 전 영역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곧 자아의 영역에 대한 재난이요 심판이요 함몰이요 파멸이다. 모든 가능성의 영토들이 불가능성에 의해서 점령된다. 어느 한 지점 남김없이 모두가 불가능성으로 뒤덮여진다.

하루 일과 뿐만 아니라 모든 사태에서 본성 속에 묻혀 있는 주님에 대한 적개심이 더 이상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표면으로 숨을 내쉬면서 돌출된다. “맞습니다. 죄인은 바로 저였군요! 이 세상에 제일 예수님을 싫어하는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놓는다.

이런 고백들의 나열이 성도의 일평생 신앙적 삶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늘 이런 불가능성의 열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자신의 성취를 위해 오늘날 성령에 의해서 성도에게 작렬된다. “이번에도 또 무얼 숨기냐? 거룩한 말씀으로 그 적개심을 찾아내봐”하는 취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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