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2월 26일 인간은왜행동하는가 3 화이트헤드
대구 12월 26일 인간은왜행동하는가 3 화이트헤드
이름 : 이근호(IP:)
우리교회(IP:220.♡.176.141)
07-12-09 11:11
daegu051226
인간은 왜 행동하는가 3 - 라이프니츠의 형상철학2, 화이트헤드
05,12,2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라이프니츠 - 하나님의 우발성 !!
먼저 지난번에 강의한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에서 '라이프니츠'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하겠는데, 철학자들이 관심이 있는 부분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은 과학시대이기에 그렇지 않은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모두 신의 존재에서 나왔기에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우연한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신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면 신은 왜 우연한 일을 만드시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교재 18페이지 중간에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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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유, 또는 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서 '우발성'을 언급한다.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신이 바로 이것을 선택했다는 논리이다. 그러니까 신이 이렇게 밖에는 창조할 수 없어서 이렇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신이 전능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신이 이렇게 할 수도 있었고 저렇게 할 수 있었는데, 신이 선하고 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최선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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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지금 라이프니츠는 "선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전능한 하나님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 둘이 서로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하나님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평소에 많이 하고 겪는 것인데 말이다.
소위 그래도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에 뒤이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의문사항이나 궁금한 점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계획하시고 일을 진행하신다면, 당연히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신자의 생각인데,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방해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만 하나님은 '우발적'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들이 예상한데로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을 하시면, 자기가 미리 계획한 것이 전혀 소용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이 '툭' 하고 튀어나오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신자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합리적으로 생각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최선의 방책으로서 이것을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선한 것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라이프니츠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못해서 아니라 이것이 더 옳고 낫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렇게 해도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여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잘되지 않아서 서울의 창조과학회의 사무실에 간사로 있는데, 월급을 80만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용돈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연세대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여학생이고, 여학생의 부모의 입장이라면, 그들이 모두가 다 신자라고 하면, 그 여학생은 오죽이나 기도를 하겠는가? 그래도 믿음이 있으니 그런 곳에 간사로 있고 말이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시험을 쳤는데 자꾸 떨어지니 오죽이나 마음에 상처가 되겠는가? 그 부모의 마음도 그렇고 말이다. 그럴 때에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붙게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떨어지게 하는 것이 최선의 역할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인가?
◈ 스피노자 - 우연은 없고 모든 것은 필연이다 !!
여기에 대해서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스피노자' 라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주장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그 여학생을 시험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르는 하나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연은 없고 필연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필연이 있고 우연이 있다고, 이렇게 양쪽을 다 말하는데, 만약에 인간이 점점 더 지식이 상승해서 나중에 신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되면, 모든 것은 다 필연이고 우연은 없다는 것이다.
◈ 욥기가 말하는 '지혜'의 의미는?
구약성경 욥기를 보면, 이것을 '지혜서' 라고 하는데, 약간(?) 유명한 욥기 28장을 보면, 욥의 친구와 욥이 서로 다툼을 벌이는데, 그 논쟁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해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 세상을 지혜로 다스리는데 무엇이 포함되는고 하니, 욥의 고난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욥의 고난이 필연적인가? 아니면 욥의 죄로 인하여 발생된 우연적인가?" 라는 것인데, 즉 "지금 당하는 이 고난이 욥에게만 해당되는 징벌인가? 아니면 욥에게 고난이 와야만 하는가?" 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친구들은, "욥인 니가 착한 일을 하면 철회될 수 있는 우연적인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욥이 나쁜 일을 해서 일어난 일이기에, 욥이 마음을 돌이키면 건강도 회복되고 모두 다 정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지혜가 있는데, 선인과 악인을 나누어서 따로 다르신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관인데, 지금 욥기에 대한 제대로 된 주석이 없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욥기도 제대로 해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성경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감히 손도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 동안 말이다.
◈ 욥도 지혜에 관해서는 'F' !!
아무튼 여기에 대해서 욥도 친구들에게 "선과 악은 그렇게 구별해서 하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하면 될텐데, 사실 욥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욥도 선과 악을 따로 따로 나누어서 하나님이 처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28장에 들어가면 욥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알겠습니까? 금과 은의 경우에는 그것들이 나는 광(鑛)이 있는데, 도대체 그 지혜가 나는 곳은 어디입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욥기 28장을 한번 보자.
(욥 28:1)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욥 28:2)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
(욥 28:19)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욥 28:20)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
(욥 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여기 1절에선 "금과 은이 나는 곳이 있다" 라고 하면서, 20절에 보면, "지혜가 어디에서 오고 명철의 곳이 어디인지" 라고 하면서, 자꾸만 장소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데, 장소를 두고 말이다. 그리고 28절에 와서는 여기에 대해 대답하기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이고,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고,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이다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실 사람들이 금과 은을 찾기 이전에 이미 금광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우연히 놀러갔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노다지를 마구 캔다는 것이다. 즉 금광이 이미 있기는 있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욥과 욥의 친구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분명 하나님의 지혜는 있는데, 욥의 고난을 두고 볼 때, 욥의 친구들이 알고 있는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친구들이 알고 있는 지혜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엉뚱한 지혜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면서 이 세상에다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고 하니, "지혜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금광이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 쪽으로 가기만 하면 금이 알아서 "여기 있습니다" 하고 알아서 나오는 게 아니듯이, 이 지혜라는 것도 우리 쪽에서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이미 주어진 사건이 있다면, 지혜도 이미 와 있기에 그 지혜를 통해서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라고 욥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고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이다" 라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악은 윤리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말이다.
지금 이 문제하고, 여기에 대한 해답은 조금 있다가 하고, 여기서 교재 18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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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비해서 스피노자는 우발성이나 가능과 관계가 없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세계 자체가 신이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 신의 본질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끝없이 내재적으로 변양되어 나간다고 논리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 …
그런데 우발적 진리들은 '적합' 또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원리에 의거한다. 이로서 신은 매순간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계를 계속 지탱시켜 주는 것이다. 세계가 진행된 도안은 이미 모나들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라는 용어가 아니라 '밝힘'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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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지막에서 "창조라는 용어가 아니라 밝힘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피조물인 인간에게 알려주는 것이지, 없는데서 있게 하는 창조는 아니란 말이다. 이게 라이프니츠의 주장인데,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보지 않고, 마치 큰그릇에 국자를 가지고 물을 떠내고 다시 떠놓고 한다면,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큰그릇에 담긴 물을 국자를 가지고 떠내고 넣고 하는 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신의 지혜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가?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계시하는 것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섭리인가?
◈ 계속 창조인가? 아니면 이미 창조된 것을 계시하는가?
다시 정리해보면, 이것이 참 어려운 내용으로 중세 철학자들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는데, 천지창조는 모두가 다 인정하는데, 그렇게 창조해서 섭리하는 과정에 있어서, "계속 창조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으로 이 세상이 지탱하는가?" 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대학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진 아가씨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남이 시험에 떨어지게 되면 묘한 쾌감을 느끼는데, 그 부모는 여기 하양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열을 받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 다음에 이 아가씨는 무슨 행동을 할 것이냐는 것이다.
만약에 아가씨가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신다면, 그것은 하나의 계시가 되지만, 그런데 앞으로의 일을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만들었다면 그것은 창조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성경에는 이것이 둘 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로마서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도 있고, 또 골로새서 4장에 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골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골 4: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골 4:5)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여기 3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비밀이 나오고, 또 5절에는 지혜로 행하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감추어진 비밀을 노출시키는 방향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도 여기에 해당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새롭게 일을 만들어나가는 입장으로 이해해도 되고 말이다. 이 지혜는 결국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우리가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교재 20페이지를 보자. 거기에 더 골치 아픈 내용들이 나오는데, 이런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논쟁거리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실생활에 그대로 다 해당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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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내부에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게 되면 인간은 '역설'이라는 국면에 직면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곧 자기를 사고의 '주체'로 삼는 동시에 '객체'로 삼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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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기를, 사고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로 삼는다 !!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인간의 행동 양식'에 나오는 부분인데, 인간에게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를 사고의 "주체로 삼는 동시에 객체로 삼는다"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난로가 있다 한다면 이 난로는 객체인데, "이것이 난로이다" 라는 이 문장을 누구나 다 어떻게 이해하는고 하니, "나는 이것을 난로인 것으로 안다" 라고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주장을 절대화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있다 !!
지금 욥기에 있어서 욥이나 욥의 친구들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을 자꾸만 절대적 진리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자기 주장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자기 주장을 절대적 진리로 말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인간이 바로 이렇게 자기 주장을 절대화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고 했을 때 무엇이 생략되었는가? "나는 예수님이 주님인 것을 믿는다, 혹은 안다" 라는 것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니가 그렇게 백 날을 이야기해도 예수님이 주님이 아닌 것을 안다" 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이다. 즉 "나는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라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기에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렇게 '믿습니다' 라고 할 때에는 논리는 그만 철수되는데, 즉 절대자가 누구이냐는 것인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절대자가 누구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절대자로서 인정하고 난 다음에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 산상설교 - 인간에게는 해당사항 없음 !!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자기 눈의 들보를 빼지 아니하고 어떻게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산상설교가 어려운데,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할 때, 자기 눈의 들보를 빼려고 하면 어떤 눈을 가져야 하는고 하니, 들보가 없는 또 다른 자기의 눈을 가질 때에만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를 들어서, 연세가 60이 된 부모가 20살이 된 아들에게 "네가 잘못했다" 라고 하면, 그 아들은 세대차이가 어떻고 하면서 우기지만, 그러나 나이가 들면 부모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단치는 그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 인간은 죽어도 타인을 알 수 없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눈에 들보를 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들보가 들어있지 않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자기 눈을 볼 때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지 없는지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과 같은데, 즉 인간들이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확대가 되면, "나는 어떤 경우에도 타인을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알 수가 있는 것은 내 입장에서 보고 있는 그 사람만 아는 것이지, 진짜 그 사람의 입장은 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마치 교인들을 다 아는 것처럼 설쳐대고 하는데,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목사는 교인들의 생각을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임무는 주님의 뜻을 선포하는데 있는 것이지, 자기가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감동을 받을 것이라는 착각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비실용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가만히 연결해보면 진짜 우리가 감추어놓고 있고 우리가 아닌 척 하는 것들을, 철학자들이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집어서 다 드러내어 밝힌다는 것이다. 대충 대충 넘어가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의 특징 - 자기 반성 !!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이것이 난로이다" 라고 하면 주체가 되지만, 그러나 이것을 난로라고 하지만 그 자기 자신은 정작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난로가 아닌데도 난로라고 우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피히테는 '자기 반성' 이라고 했는데, 물론 칸트에게서 나왔고 말이다. 이런 자기 반성, 혹은 자기 점검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로마서 7장에서는 사도바울이 두 개의 자아를 이야기했는데, 즉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자아와 악마의 법을 따르는 자아가 있다고 말이다. 이 두 개의 자아가 서로 경쟁을 하는데, 라캉은 이것을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보지 않고, 하나의 자아가 다른 자아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자아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는 미지의 'X' 인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힘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자아가 힘을 작용시켜서 변동사항이 많은 자아를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이 자아는 세월을 따라서 자꾸만 변한다는 것이다.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어제 오전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25세에 알았던 예수님에 대한 개념은 나이가 40이 되면 그때 그런 생각은 착각이었고 지금의 예수 개념이 맞다고 한다면, 15년이 지나서 그렇게 생각이 변하게 되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15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본인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라캉의 미지의 X !!
이렇게 자꾸만 변동하는 자아를 두고서, 라캉은 진짜 보이지 않는 자아가 세월을 따라 이렇게 변동하는 자아를 생산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이렇게 변하는 것은 믿을 것이 못되니, 숨어있는 미지의 'X' 라는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힘에 의해서 자아가 되기 때문에 이런 숨겨진 자아를 찾는 작업을 말이다.
여기서 라캉은 이 미지의 'X'를 찾는 작업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미지의 'X'가 늘 미지의 'X'로 숨겨져 있도록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자아'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자아로 하여금 허풍스러운 자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데, 이것이 윤리이고 도덕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절대선' 이라고 했고 말이다.
칸트도 인간은 결코 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인간은 착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을 봐서, 인간은 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착하지는 않지만 착해지려고 노력하는 그것을 봐서 충분히 착하다고 봐주자는 것이다. 칸트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라캉은, 미지의 'X'가 초자아에 의해서 자꾸 허세를 떠는 그런 자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중간에 이것이 숨어있어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에 접근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주변만 맴돌 뿐이라는 것이다. 즉 변죽만 울린다는 말이다.
◈ 라캉 - 인간은 아무리 살아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
그러므로 라캉의 결론은, 인간의 순수한 자아라는 것은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말의 뜻은, 결국 인간은 사나죽으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양반이 굉장히 똑똑한데,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헛살았다는 말이다.
그 초자아가 자아를 만들 때에 어떻게 만드는고 하니, '상징'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상징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징은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상징은 "나, 그렇게 되고파"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조금 전에 예를 들은 그 아가씨가, 자꾸 시험에 떨어진 아가씨를 재미있게(?) 말하는 것이 죄송한데, 그 아가씨가 앞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시집을 갈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 시험을 3번 칠 것인가, 80만원을 받고 그대로 있을 것인가, 아니면 100만원 주는 직장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하양으로 내려와서 농사를 지을 것인가,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열거한 하나 하나가 초자아가 만들어낸 상징이라는 것이다. 즉 허풍이라는 말이다. 상징이 허풍이란 것인데, 아가씨가 말하기를, "나는 앞으로 죽을 거야"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집어넣으면 되지만 말이다. 물론 그것은 다 허풍이고 상징이라는 것이다.
◈ 모든 학문은 거짓말로 이루어진다 !!
라캉인지 니체인지 잘 모르겠는데, "모든 학문은 거짓말로 이루어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100년 전의 이야기인데, 얼마나 기가 찬지 말이다. 물론 신학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왜 모든 학문이 거짓말로 이루어지는고 하니, 학문은 상징으로 이루어지니 말이다. 이 상징에는 은유와 환유가 있는데, 은유는 성격이 비슷한 것을 대체하는 의미하고, 환유는 전체 가운데서 일부를 뽑아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환유가 많은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뭐라고 하셨는가? 발만 씻기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다 씻긴다는 것이다. 환유는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말하는 것이니, 예수님이 발을 씻기면서 몸 전체를 이야기하니 제대로 된 환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했는데, 물론 이것은 속성을 말하기에 비유에 해당되고 말이다.
그러니 환유나 비유라는 것은, 실체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그러니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언어에는 실체가 없는데, 유사한 말을 가지고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실체를 근접해서 묘사하는 것뿐이지, 확실하게 그 단어를 맞출 수는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오늘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것인데, 하나님은 이름 자체가 '창조하심' 인데,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인간의 이름은 창조된 것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근접성으로 나타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개가 어떻게 짓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멍멍' 이지만, 미국에서는 '와우바우' 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가? 둘 다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묘사할 뿐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멍멍한다고 개가 한 마리 생기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생긴다는 것이다. '아담아' 라고 하니, 아담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누구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TV드라마에서 본 것인데, 시골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지 싶은데, 어떤 총각이 아가씨를 엄청 좋아하는데, 그래서 이 총각이 아가씨 이름을 항상 부르면서 다니는데, '애자, 애자, 애자, 애자'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야, 그렇게 너무 부르지마. 이름 닳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아주머니는 이름을 하나의 물건으로 봐서 닳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닳아서 없어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 미국 인디언은 이름이 없다 !!
이러한 사고방식이 어디에서 생겼는고 하니까,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미국의 인디언에게서 매우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디언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름은 없다는 것이다. '늑대와 춤을' 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름은 신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름이 있어서 그 이름을 자구 부르게 되면, 원래 이름은 하나님 소유인데, 그런데 인간이 자꾸만 불러버리면 그 이름의 운명이 바뀌고 팔자가 바뀐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에 의하면 말이다.
그래서 서구의 사람들이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얼마나 무시했는지,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최진실이나 황우석 교수를 마구 씹어대는데, 즉 이들의 이름을 말이다. 이러한 대중들의 그들의 대한 태도는 그들의 삶을 얼마나 제한적이고 속박으로 내모느냐는 것이다.
연예인들이 돈을 많이 받는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이들이 TV에 얼굴을 한번 비추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공중목욕탕에도 제대로 못 가고, 돈이 없어도 택시를 타야 하고, 영화배우인 이영애가 어디에 살겠는가? 자기가 선전하는 '자이' 라는 아파트에 살겠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아파트 같은 곳에 살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사생활이 다 드러나고 말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불편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름이 돈도 되지만, 그 사람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상징이고 허풍이라면, 모든 학문은 거짓말로 이루어진다면,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한 시간에 거짓말을 4번인가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뭔가 되고싶어하는 상징으로 인하여 자아가 허풍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20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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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내부에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게 되면 인간은 '역설'이라는 국면에 직면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곧 자기를 사고의 '주체'로 삼는 동시에 '객체'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 언급(자기 되먹임)'을 거쳐서 역설에 도달된다. 이 역설이라야 말로 진정 진리에 이르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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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인간은 객체가 된 동시에 주체가 되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된 것을 인간은 도저히 메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 간격을 전혀 메울 수가 없어서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정신적으로는 신에 속하고 물질적으로는 물질에 속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0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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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역설적인 표현인 "너 자신을 알라"를 자기 언급을 자기 논리학의 핵심인 모순율·배중률·동일률을 가지고 파괴시키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과 배중률은 다름 아닌 이런 역설을 배제하는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 '나의 삶은 너의 죽음과 같다'는 논리이다. 즉 'A는 A이고 A 아닐 수 없다'는 것은 모순율이고 'A는 A이든지 A 아니든지 이다'는 배중률이다. 그리고 동일률은 'A는 A 뿐이다'라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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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누구라도 부인하지 못하는 진리로 통하는 논리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는, 모순율과 배중률과 동일률을 가지고서, 무슨 짓을 했는고 하니까, 자기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그 유명한 역설적 표현인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하는, 즉 그 누가 들어도 진리라고 생각했던 자기 언급을 와장창 파괴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라는 것이 맞는가? 분명히 맞다는 것이다. "나가 너일 수 없고, 너가 나일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이게 모순율인데, 그리고 "나는 나이든지 나가 아니든지 이다" 라는 것도 맞는데, 이것이 배중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뿐이다" 라는 것도 맞는데, 이것은 동일률이고 말이다.
이렇게 누가 들어도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 즉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이런 것이 바로 욥의 친구들이 주장한 바로 그러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욥의 친구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인간이 상징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인간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초로 그 다음의 옳은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왜 죽는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철학을 제 아무리 공부해도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니, 십자가 옆의 강도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죄인인 것도 전혀 모르고 말이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계속해서 교재 20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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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연안의 한 조그마한 섬 크레타에는 에피메니데스라는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크레타 섬 사람이면서도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모든 크레타 사람들'이라는 말 속에 '에피메니데스' 자신도 포함시킨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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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는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러면 성경 어디에 있는가? 디도서에 나오는데, 1장 12절을 보자.
(딛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 모든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
여기 어떤 선지자는 아마도 에피메니데스로 보이는데, 그가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런 말을 한 자신도 거짓말쟁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우리가 이런 논리들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우리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자꾸만 꾸미는 경향이 있기에 말이다. 여기 전체가 그레데 섬이라고 한다면, 여기 섬 전체에서 나오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 섬밖에 있는 사람, 즉 객체가 그레데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말이 되는데, 그런데 그레데 사람, 즉 주체가 그런 말을 한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마치 무엇과도 닮아있는고 하니, 마치 우리 속에 있는 자아와 그 모습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아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가? 자꾸만 무엇이라고 군지렁 군지렁 거린다는 것이다. "아쿠, 노무현은 엉터리야, 황우석은 구라꾼이야, 전두환 시절이 좋았어" 라고 말이다. 자꾸만 뭔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속에 있는 자기 자아가 주체가 되면서 객체가 되니까, 같은 그레데 사람이면서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까 이야기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라고 하는 모순율과 배중률과 동일률은 다 허풍이 지나지 않고, 진짜로 남는 것은 '역설'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 소돔과 고모라 - 역설의 심판 !!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런 역설에 의해서 창세기 19장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의인의 숫자가 50명에서 40명으로, 30명으로, 20명으로, 10명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이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떨어지기 위해서는 이 소돔과 고모라 전체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하고, 그 전체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범죄인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구원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냥 심판해버리면 되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 뒤따라 불심판을 내려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역사의 후손들을 죽여버리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내신다는 것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이것도 성립이 되어야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구원이 될 자도 있다는 것이 같이 성립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고 하는 모순율과 배중률과 동일률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역설의 따봉 - 인간은 죄인이며, 인간은 의인이다 !!
그렇다면 무엇이 성립되는가? '역설'이 성립되는데, 루터는 이런 역설을 두고서 '십자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은 죄인이며, 인간은 의인이다" 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한 역설이 이 세상에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루터의 이런 주장을 차원을 달리해서 설명하면 되는데, "인간은 죄인이다" 라고 하는 차원을 일단 따로 만들어두고, 그보다 더 올라가서, 이것을 '메타논리' 라고 하는데, "인간은 의인이다" 라고 하는 논리를 따로 만들어 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외부에서 볼 때, 성도 안에는 이렇게 두 가지 차원이 따로 들어있는데,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해도 되고 말이다. 즉 아담 안에서는 죄인이고, 예수 안에서는 의인이라고 해도 되고 말이다. 물론 불신자에게는 '예수님 안' 이라고 하는 차원이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불신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고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면, 이렇게 두 차원이 들어있음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로마군인들은 십자가를 한 차원으로 생각했는데, 즉 "너는 정치적으로 까불다가 죽었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부활을 시킴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정치적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즉 말씀을 응하게 하는 예언성취의 차원에서 이것을 끄집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이 두 가지 차원을 다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여러분, 죄를 지었습니까?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충성하면 됩니다" 라는 식으로, 마치 무당이 하는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그분의 용서하심의 차원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무시하고 용서하심을 빼버리는가? 신자들이 별로 없으니 장사가 안 될까 싶어서 미리 선수를 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데로 말이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럴 때 사용하는 용어가 바로 '허풍스러움' 이라는 것이다.
아까 말한 아가씨를 또 울겨먹어야 하겠는데, 대학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또 교회에는 나간다는 것이다. 명색이 창조과학회 소속이니 말이다. 기도를 하면서 "주여, 십자가에 죽게 하소서" 라고 하면 천만다행인데, 하지만 그렇게 하겠는가? 그럴 것 같으면 창조과학회에 다니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하나님이여, 새로운 길을 열어주소서" 라고 할 것이 분명한데, 그러나 백날 새로운 길을 열어달라고 해도, 그것은 또 하나의 상징물이고, 또 하나의 허풍으로 기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기도 - 언어의 집 속에서 떠는 허풍 !!
이것을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사람은 이렇게 초자아가 만든 상징물 속에 들어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마치 캡슐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의 집을 짓는데, 이것을 하이데거는 언어의 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언어의 집을 짓는데, 여기에서 언어를 통해서 기도함으로 말미암아서 합쳐질 때, 그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를 언어학적으로 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엉터리라는 것인데, 진짜 기도응답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이런 주님의 뜻은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의미하고 말이다.
◈ 간음한 여인 - 상상도 못할 용서를 받음 !!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두고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라고 했을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 간음한 여자를 내가 용서했는데 니까지 것이 뭔데 그렇게 까부느냐?"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용서한 것을 인간들이 간섭할 바가 전혀 못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용서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자유하게 했으면, 그 여인의 예수님의 자유 안에 포함되는 것이기에, 외부에 있는 그 어떤 인간들이라고 해도 그 여인을 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죄할 수도, 고소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용서가 이 여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기에 말이다. 이것은 성령소관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간음한 여인이 생각하기를, "야, 드디어 주님이 용서할 시점이 되었는데"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야, 내가 기대한 상징물, 즉 허풍에 내 요구가 반영이 되어서 주께서 내 허풍에 일치시켜 되었구나" 라는 것인데, 그러나 이렇게 용서함을 받은 것은 여인이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마 온 우주의 대 심판자인 그분께서, 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대 심판자께서 자기를 용서해줄 줄은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하시는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에게 중풍병자가 왔을 때, 이 병자가 노린 것이 무엇인가? 자기의 상징물이고 허풍, 즉 자기의 중풍병이 낫기를 바랬는데, 여기서 허풍이라고 하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폼잡는 허풍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다 허풍이다" 라는 의미에서의 허풍인데, 그래서 사실 허풍이 아닌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허풍이 안 되려고 하면, "이것이 난로이다" 라고 했을 때, 그 난로가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난로야 있어라" 라고 한다고 해서 난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허풍이고 상징이라는 것이다. 즉 기존의 있는 것에다가 이름을 건드려서 묘사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중풍병자가 소원하는 것은 자기 병이 낫는 것인데, 정작 자기 죄를 용서함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막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막 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렇게 되면 누군가가 질문하기를,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받기를 원해서 주님께 나와서 용서받는다면, 그것은 주님이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것을 채워주신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할 마음이 전혀 없다구요?)
왜 그런고 하니, 만약 25살 때에 자기가 지은 죄가 있다고 한다면, 사람은 죄를 자기 나름대로 율법을 해석해서 끄집어내는데, 자기는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그 용서가 어떤 것인고 하니, 자기가 알고 있는 수준의 상징물에 대해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30살 때 이보다 더 지독한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의 십자가가 용서한 그 죄가, 자기가 전혀 경험도 하지 못한 죄까지도 용서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상상치도, 예상치도 못한 것까지 말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세례에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기대하지도 못한 그 고난의 길을 다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의인이면서 죄인의 길어 뛰어들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용서라는 것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
그러므로 용서라는 것은 이쪽 차원에서 저쪽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인데, 이동하고 개입하고 삽입되고 침투되는 것인데, 어떤 행동을 보고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복음적인 용서관은 기존의 이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에서의 용서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청년이 예수님에게 자기 죄를 용서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야, 나는 죄 용서함을 받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사람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아직도 인생을 더 살아가면서 그 어떤 지독한 죄를 더 지을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도대체 죄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여기 계신 박 목사님이 테니스를 잘 친다고 하는데, 그 소문이 맞나요? 만약 큰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때 얼마나 주께 영광을 돌렸겠는가? 그런데 몇 년 뒤에 테니스를 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의미 없음을 알았을 때, 그때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감사한 그 자체가 바로 상징이며 허풍이 만들어낸 죄라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가 교인이 100명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주의 은혜라고 마구 까불어대었는데, 그런데 나중에 죽음을 앞두고 천 명을 목회하고 만 명을 목회해도 그것이 결단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그렇게 천 명이나 만 명을 모아서 목회를 했다고 자랑함으로, 다른 목회자들에게 상처를 준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지울 수가 없는 죄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것을 알게 되는데 오직 자랑할 것은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정말 안다면, 오늘날 목사들이 교인들을 그야말로 씨잘데기 없는 것을 가지고 유인하는 그런 유인책을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무슨 원숭이도 아니고 말이다.)
◈ 화이트헤드 - 동일률이 지배하는 현실은 참된 현실이 아니다 !!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역설이 지혜이고,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즉 자기 중심의 개체가 다 깨어지는데,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은 다 상징이고 허풍이고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 세상은 "A는 A이다" 라고 하는 동일률이 지배하는 것이 제대로 된 현실이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니다" 라는 것이 지배하는데, 이것이 참된 현실이란 것인데, 이것을 백두선생(?)이 발견했다는 말이다.
이제 어려운 이야기를 좀 해야 되는데, 교재 20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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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률과 모순율로 중무장한 철학계에는 이런 주장을 궤변 정도로 간단히 다루었다.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경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역설은 계속해서 가시처럼 기존 철학과 신학계를 괴롭혀 왔다. 예를 들어, 기독교 창조론에 따르면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인간은 신에 의해 '포섭'되는 존재이다. 여기서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의 정의로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즉 인간이 신에 포섭된다면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신을 거역할 수 있느냐와, 전능한 신이 어떻게 인간의 거역을 막을 수 없었느냐는 것이다. 또 선하신 신이 어떻게 인간이 저지르는 악을 만들었느냐의 문제가 제기 된다. 그렇다면 과연 신은 전지전능하며 선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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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이것을 해결할 수가 없는데, 굳이 이야기한다면, 인간이 범죄한 것도 최선이었다고 말이다. 즉 범죄를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최선이기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어떤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한 것이 아니라, 일이 일어나고 난 뒤에 이것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판사가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가난한 사람이 빵집에서 빵을 훔치다 잡혀서 재판을 받는데, 검사가 이런 극악한 자를 엄중히 처벌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판사가 왜 그런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물으니, 집에는 늙은 노모가 계시고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은데, 그래서 판사가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는데, 하지만 판사가 자기 월급을 털어서 가게를 차려주던지 해서, 그 사람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도록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디 그런 사람이 한 두 명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이런 판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처음부터 이 사람이 가난하지 않도록 해서 빵을 훔치지 않도록 할 수는 없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나 정통신학에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통신학은 일이 터지면 해명하고 설명하는 차원이지,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모르니 그렇게 하는데,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는가? 이것을 6페이지인가 하기는 했는데 말이다.
이제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 21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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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론의 문제는) 신이 전체이고 인간과 자연은 신의 부분이라는 집합론적 논리 구조 속에서 자연히 발생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정론적 질문에 대하여 전통신학에서의 대답은 너무나도 궁색했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했다는 것이 구차한 대답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자유의지는 왜 주었으며 자유의지를 준 책임을 신이 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또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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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正論 - 자유의지로 해결 ???
신정론(神正論), 즉 신이 과연 정의로우냐는 것인데, 악의 동조자는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창조주인 신은 이렇게 크고 피조물인 인간은 그 안에서 작은 범위를 차지하는데, 이것을 포섭된다고 하는데, 인간이 이렇게 종속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정통신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들고 나왔는데, 이것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서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루터 등이 자 주장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먼저 주장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의지를 왜 인간에게 주었는지를 물어버리면, 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전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칼을 다룰 줄 모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아이에게 칼을 주어서, 그래서 그 아이가 사고를 다쳤다고 해서 그 아이를 야단친다면 되겠는가? 자유의지도 이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칼에 베어서 손해보고, 또 엄마에게 얻어맞아서 손해라는 것이다.
선악과도 죽음도 뭔지 모르는데,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먹어서 경험을 해봐야지 죽음이든 뭐든 아는 것이지 말이다. 그런데 막상 따먹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쫓아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횡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말 이런 의미 같으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지혜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1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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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설의 논리로 보면 이 신정론 문제는 문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세기 수학자 프레게는 '포섭'은 되나 '종속'은 안 된다는 사실을 논리학을 통해 발견했다.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진화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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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게 - 종속이 아닌 포섭 !!
여기서 프레게는 '포섭'은 되나 '종속'은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만약에 '종속'이 되어버리면 인간에게 일어난 그 어떤 일도 인간은 그냥 신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 책임은 종속을 시킨 넓은 범위를 가진 신 쪽에, 즉 그렇게 책임이 소급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종속'이 아니라 '포섭'이 되어버리면, 인간의 범죄는 신의 범죄와는 달리 따로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즉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신께서 이것을 무관심하게 보지 않고, 나중에 와서 돌보고 거들어줌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책임져야 할 일을 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범죄한 그 책임은 인간이 지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용서해주는 자비는, 포섭해주고 용납해주는 주님의 사랑의 몫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고 범죄는 인간이 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맞지만, 신 안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이 하나 뚝 떨어져서, 즉 사건이 하나 생겨서 여기서 창조가 일어날 때, 신은 신의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 밖에서 하나의 창조가 신의 능력으로 일어날 때, 이것은 고유의 자기 책임 아래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신의 죄에 대한 책임까지도 추궁하려고 한다면, 그러나 신은 죄에 대한 책임은 없고 그것마저도 사랑했다고 하는, 즉 사랑이 부각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포섭' 이라고 하는 것인데, 말 그대로 안아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낳지만 늘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이가 놀다가 다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때 부모가 되어서 "니가 그렇게 다쳤으니 니가 알아서 해라"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쿠, 이런 피가 나네. 내가 싸매어 줄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아기가 잘못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을 감싸주고 거두어 주는 것은 부모가 사랑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랑과 공의가 함께 다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뭔가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속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것은 창조를 했는데 왜 떨어지느냐는 문제인데, 아니 창조를 했다면 안에서 함께 공존을 하고 있어야지 어떻게 창조를 해놓고 떨어지게 되느냐는 것이다.
◈ 화이트헤드 - 존재론적이 아닌 생성론적으로 !!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신의 존재, 인간의 존재,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생성론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즉 새로운 것을 유발시키는 사건으로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걱정도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황우석 교수가 논문을 조작했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인데, 그것이 전라도의 폭설피해를 입은 농부가 무슨 책임이 있는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폭설 때문에 열을 받아서 "에라이 될 대로 되라" 라고 하면서 홧김에 뉴우질랜드에 놀러갔다가 황우석 때문에 욕을 들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열을 식히러 갔다가 오히려 더 열만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황우석 교수가 그 폭설 피해를 입은 전라도 농부를 창조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 문제는 같은 영역 내에서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즉 사건에 의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을 들어먹는다는 것이다.
◈ 동일한 사건이 공유되는 영역 !!
그런데 우리는 창조를 어떻게 보는고 하니, 신을 사건이 아닌 존재로 보기 때문에, 즉 존재에서 존재가 나왔기 때문에 신이 창조를 했으면 반드시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모든 잘못의 기초적인 오류였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주장에 의하면 말이다.
지금 제가 강의하는 내용이 너무 어려운가요? 아니 황우석 교수가 그 농부를 낳은 것이 아닌데, 왜 그 농부가 욕을 들어먹느냐는 것이다. 그 양반의 자식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같은 사건이 공유되는 영역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볼 때, 왜 자꾸만 신을 존재론적으로 보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를 존재론적으로 보니 신마저 자기 앞에 있는 존재로 보니까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신도 자기처럼 존재이고 인격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을 존재로 보게 되면 신정론(神正論)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하지만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그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함께 공유되어있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 사건의 발생과 해결만이 있다 !!
여기서 잠시 스피노자를 이야기해보면, 전체가 사건이고 사건이 신인데, 그 사건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과 사건의 만남에서는, 어떤 특정 존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이 이렇게 해결되었다" 라는 것만 있다는 것이다. "니가 잘했나, 내가 잘했나" 라는 것이 아니고, 즉 사건의 발생과 해결만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 책임자는 당사자인 인간이 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서 입을 벌리게 해서 아담이 따먹게 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발생된 지점이 아담과 하와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건의 책임자인 여자와 아담과 뱀에게 형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켜서,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책임지고 인간을 용서하는 식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구원시켜 달라고 해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이 지었고, 용서는 주님이 하신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양수겸장(兩手兼將)으로, 즉 양쪽이 다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이런 "존재론적으로 볼 것인가, 생성론적으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십자가를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뜻이 등장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