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6: 5- 8 (기도)
Re..마 6: 5- 8 (기도)
이름 : 이근호(IP:)
기도
2003년 1월 26일
본문 말씀:마태복음 6:5-8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예수님은 모두 해결해 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대단하십니다. 그런데서 예수님은 이러한 자신의 위대성을 알리기 위해 먼저 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면 예수님의 위대함도, 소중함도 모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죄는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우리들의 나쁜 습관이나 태도에 숨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에 관해서 예수님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보통 기도라고 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신앙적 자세라고 통하고 있습니다. 설마 이것조차 죄가 된다고 짐작조차 못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기에도 너무나도 고상한 행위이기에 별로 잘못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인간의 기도 행위에 대해서 다루고 계십니다. 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이런 죄악성을 지적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과의 안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위 영적인 관점이 되지 못한채 기도를 하게 되면 열이며 열, 예수님으로부터 죄악된 것이라고 지적 받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점이라는 것이 어떤 견해를 갖게 되는 겁니까?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요한복음 20:19-20을 잠시 봅시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 대목은 지금 예수님은 죽으시고 제자들만 남은 상황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현실이란 자기네 끼리만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살아 계시다는 환상이나 환각같은 것은 모조리 철거된 상태입니다. 자신들만 남아 있다는 이 사실만이 현실입니다. 예수 운동을 한 모든 것이 단지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그런 파장 분위기입니다. 이제는 스스로 자신들을 지탱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현실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예수님은 죽음조차도 벗어버리시고 다시 살아계신 모습으로 그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하라"고 말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맨처음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염두에 둔 현실과 전혀 다른 현실도 또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단지 종교계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생각한 세계관과 인생관 모두다 다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들었던 말씀들은 그저 빈 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고 난 뒤부터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앞으로 현실을 이끌 예언들이었습니다. 다른 현실성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이 사실은 모두 허구요 환상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조성한 새로운 현실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짜릿하다든지, 황홀한 것을 가지고 '영적'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신대로 곱게 믿어지는 것이 곧 영적입니다.
예를 들면, 도마라는 제자는 말하기를, 자신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재차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친히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 도마가 하는 말이, "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 속에서의 영적으로 사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다른 현실은 현실도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것만이 참 현실입니다. 바로 이런 제자들의 영적 안목과 견해를 가지고 쓴 것이 바로 마태복음을 비롯한 신약 성경입니다. 단순히 교리를 사람에게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고 생겨난 사실을 그대로 증거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영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지적하는 기도 행위의 죄악성을 같이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관점이 없이 기도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하게 될까요?
일단,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려움이 안 닥치면 기도를 안하게 됩니다. 속으로 이렇게 핑계댑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은 제가 하나님 은혜 덕분에 평안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어렵거나 괴로운 일이 생기면 그 때 대번에 기도 생활에 돌입할께요. 그래서 지금 기도 생활에 소홀히 하더라도 좀 양해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과연 괴로운 상황이 찾아들면 미루었던 기도를 한꺼번에 하는 양 기도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사람이 괴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이 우주의 순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생긴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작정 자기 뜻만 고집하다보니 현실이 자기 뜻대로 안따라 주는 괴리가 곧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이 세상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쥐고 있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걱정할 꺼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처음부터 거부하니 그 때부터 기도하는 것이 기껏해야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줄당기기 정도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 드릴 용의가 있으니 먼저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만큼 해주시면 고맙습니다"하고서 말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의도, 그리고 부활의 현실성도 모두 거부합니다. 단지 신이라면 자기의 정성에 보답해 주는 쪽으로 움직이라는 겁니다. 이것만이 그들은 현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우가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7절에 보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이란, 진정 자기가 꼭 얻고 싶은 항목을 재삼, 재사 강조해서 달라고 힘주어 신에게 요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제발 이것만은"라는 식으로 앙탈을 부리는 겁니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달라고 하는 것은 모두 결국 자신의 소유물로 변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결코 사람들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나타나시고 사라지는 예수님을 11제자들이 붙잡을 수 있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잘 안되면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자기를 반성하게 됩니다. "1. 내가 기도 생활이 부족했구나 2. 기도 생활을 충실히해도 기도 내용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아서 기도 응답이 안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둘다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8절에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즉 우리 성도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성에 대해서 믿을 생각은 안하고 도리어 다음과 같은 꿍꿍이 속셈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기복 신앙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내가 평소에 원하는 바를 제공해 주겠지"라고 말입니다. 이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뭔가를 다 알고 계시기에 그런 것을 얻고자 하는데에 있어 기도라는 것을 동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평소에 믿음은 인간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기도라는 것을 할 필요도 없고 아예 기도라는 것도 일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드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세상을 보면, 이 세상 중앙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세상을 순리대로만 움직이려고 하십니다. 세탁기에다 미리 예약 세탁을 해 놓으면 비록 잠자는 한 밤중에도 세탁기는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 세상도 또한 그러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나름대로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종들에게 기도를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자기 종들에게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는 방식으로 세상을 운영해 나가시는 겁니다. 물론 성도가 감히 예상치도 못한 기도입니다. 자신이 미리 대비해서 나올 기도가 아닙니다. 도저히 내심 자신의 소원으로는 못할 기도를 성령님은 하게 하십니다.
그렇게해서 성도로 하여금 지금도 철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절감케 합니다. 물론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야망에 따른 이방인적인 기도는 떨쳐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늘 두 가지 안목에 의한 기도가 같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충족하기 위한 기도와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살아계심으로 인해 자신이 아직도 존재함을 감사하는 기도도 같이 나옵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발생되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쪽에서 멋있는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악된 기도라는 것을 늘 통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