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행 23"11-14(담대하라)우리교회사도행전

Re..행 23:11-14(담대하라)

이름 : 이근호(IP:)

담대하라

2005년 7월 27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3:11-14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23: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23:13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23: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성경을 펼치게 되면 거기에서는 하나님만이 대단하고 인간들은 별 볼일없는 소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이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성경을 펼칠 때마다 신납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덮고 세상 쪽으로 나오게 되면, 성경에서 그렇게 시시해 보이는 사람들이 참으로 위협이 되는 힘과 권세를 휘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조금 전까지 보았던 성경 속의 세계나 하나의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신의 말씀이라고 외치는 것은 옛적 할아버지들의 잔소리에 지나지 않고 지금 사회에 적용하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허구적인 내용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갈등을 느낍니다. 과연 성경 속의 현실이 진실인가 아니면 성경 밖에서 만나는 이 인간들만의 세상이 현실이 참 실제하는 현실인가 하고 말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말씀과 세상에서 통하는 원칙이 같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만, 성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따르게 되면 이 세상을 부정해야 하는 부담이 짊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억지로 성경의 내용과 세상 사람들의 상식과 관련지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13-14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서 어느 인간이 스스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여기는 그 문은 필시 넓은 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문은 본인에게는 여전히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이 됩니다.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좁은 문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고 나중에 우루루 거리로 몰려오면 필시 그 길은 넓은 길이 될 것이 뻔합니다.

처음에는 가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자꾸 반복하다보면 얼마든지 수월한 길로 변해버립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꾸만 본인이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집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짜증낸다면 필시 사도 바울은 나름대로 따로 자기가 염두에 둔 운명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운명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로마길은 사도 바울 본인의 결심과 각오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마치 좁은 길을 가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으로는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는 길입니다.

바로 이어 나오는 구절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들의 각오가 장난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설교한 것처럼 우리가 성경책을 덮어버리면 참으로 실감나는 현실이 인간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포착됩니다. 생생한 현실입니다. 눈을 감는다고 사라질 그런 허구적 현실이 아닙니다. 폭도들 40여명이 다짐을 하면서 사도 바울 한 사람을 죽이고자 노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폭력을 벗어나고 로마길로 접어드는 것은 결코 사도 바울의 아이디어나 용기에 의해서 실현될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항상 인간의 능력조차 무능하게 만드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8:30절에 나오는 말씀,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주님의 입에서 나왔을 때, 이 말씀을 달성하고 성취시킬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서 떠나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내리신 자신의 이러한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35-36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 못할 상황을 맞닥뜨리게 해놓고서는 그 난관을 극복하면서 기어이 미리 아신 자를 영화롭게 해내고야 맙니다.

이처럼 주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내시는데 있어 죽음과 죽음의 사슬로 잇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들이닥친 죽음을 자기 힘으로 도저히 극복해 낼 수가 없습니다. 담대한다고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질 때도 그저 아브라함의 결심이나 용기가 하등의 도움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와같은 경우가 구약 시편 23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담대하라 너는 로마에서 나 주님을 증거해야 돼"라는 말씀과 같은 능력으로 성취될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냉혹한 성경 바깥의 현실에 주눅들어 있습니다. 또한 거기서 날아오는 죽음의 위력에 스스로 힘으로 피해볼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도 바울이 로마에 서서 주님을 증거하게 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곧 그 나머지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같은 맥락에 준해서 성취가 됨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못하고 지켜내지 못하는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열심은 조금도 멈추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조카의 도움으로 일단 즉사하는 위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디어조차 사도 바울에게는 나오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결국 주님은 자신의 말씀 성취 능력을 만천하에 보여주기 위해 사도바울의 운명을 선택하신 겁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신 분이 "담대하라"고 격려하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다가 진짜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던져주신 "아버지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약석 성취는 방해 받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성실하심을 우리 생명의 위기 상황으로 인해 부정하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7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