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인간 2002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5:27-32 5:27 또 간
Re..마 5:27-32 (죄와 인간)
이름 : 이근호(IP:)
죄와 인간
2002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5:27-32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교회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딴데서 시작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보내주신 외아들에 관심이 있어 모여든 곳이어야 합니다.
만약 외아들에게 무관심이 없는 교회라면 저절로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열심낸 것에 강조점을 갖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거론하게 됩니다. 이렇게되면 교회는 인간들의 경쟁장이 됩니다. 그런 경쟁의 끝자락에 남는 것은 자기 의로움과 자랑뿐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다니면서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신경쓰는 태도과 하나님의 외아들에게 신경쓰는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전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관심두지 않더라도 교회 운영문제나 이 세상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없는 것이 확실한데 왜 구태여 하나님의 외아들에게 관심갖겠습니까!
인간들이 재주껏 해내는 능력에 대해서 관심을 둘 때만 '자기 손으로 얻어낸 구원'이 가능한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사람들은 이런 자기 자랑으로 충만했습니다. 능력껏 하나님 말씀을 잘지켜보자고 열심히 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지켜낼 것과 같이 보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누가 하나 시비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외의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 상황을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 믿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에 옮기는 자기 자신들의 건전함이 있으면 이것으로 하나님의 뜻은 만족스럽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철통같이 단단한 사상에 훼방을 놓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실천 불가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그 어떤 인간도 원칙적으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낱낱이 보이시려고 합니다.
간음에 관한 문제도 이러합니다. 오늘 본문 27-28절에 보면,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간음죄 성사를 육체적인 관계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음에 대한 율법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게되면 간음죄의 시작이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의 환경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아예 간음죄를 짓고 싶은 의사가 없는데 단지 외부 환경에 의해 유발해서 간음이 일어난다고 핑계댈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간음죄를, 인간 본래적인 마음의 한 양상이라고 단정해 버리십니다. 예를 들면, 그 어떤 여인과의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은 남자라고해도 마음 속에 음란이 일어났다면 이미 그 사람은 간음죄를 짓게 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해석은, 행동으로 비로소 죄가 죄답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에 죄지을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아예 온전치 못한 것으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환경이 나빠서 죄를 짓는 것이라면 구태여 29절의 말씀같은 당부는 헛당부에 불과합니다.
"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예수님께서 죄지은 때문에 백체가 우리 몸을 추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 몸 자체가 죄에 푹 절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라 버려라", 혹은 "빼버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몸으로 죄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사실 자신이 죄지은 것을 알고 마치 흥부가 박을 켜듯이 톱들고 와서 팔다리를 슬근슬근 톱질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극단적인 신체의 잘라냄으로도 전적으로 해결 안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이 날 때부터 아무 것도 안 듣고 아무 것도 못보고 아무 것도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고, 또한 아무 교회나 절에도 다닌 것도 없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난생처럼 도시에 나가서 여인을 보고 음란을 품는다면 이것은 곧 음란죄란 인간 본성상의 문제라서 해결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흔히 교인들이 오해하기를, 자라온 환경이나 열악한 교육 수준이나 가정 환경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기에 앞으로 설교 말씀 잘듣고,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보다 나은 교육 수준을 갖추면 아마 죄가 줄여들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쥐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이 말씀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움텁니다. "하나님,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구원을 이제는 저에게 인수인계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말씀을 믿는 자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구원 문제를 절대로 저에게 떠넘기지 마세요. 저 스스로 노력으로 저를 구원할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계속해서 저의 구원을 주님이 쥐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대만족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믿는 쪽입니까 아니면 인수인계 받아서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쪽입니까? 예수님은 간음의 문제를 보다 확대시킵니다. 여성을 보고 개인적으로 음란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부 사이에 문제까지 파급되어 상대방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까지 변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부부란 인간에게 내장된 음란성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느냐를 보여주기 장이 됩니다. 즉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이혼증서를 써 주었다고해서 그 행동으로 음란죄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예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며 동시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죄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이 안되는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5:18에 보면, 술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처럼 술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은 상호 반대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들이 평소에는 자기 절제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만 술에 흠뻑 취하게 되면 자기 본성이 노골적으로 다 드러납니다. 이것이 술 취한 상태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저주받은 인간이 가질 본성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셨는데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게 되고 여자는 남자에 집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술취하게 되면 남자는 본성상 여자를 난폭하게 대하고 농락하고 횡포를 부리게 됩니다. 그러나 술취하지 않고 성령에 취하게 되면 남자는 여자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 자세로 나옵니다.
마치 예수님이 성도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여자가 만약 술에 취하게 되면 남자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이게 됩니다. "너는 내 것야. 내 손아귀에서 못벗어나"라는 집착 말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남자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전편을 통해 하나님은 이런 여성적인 마음으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법적으로 따지는 것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성령이 있는 사람은 왜 이런 품성을 드러낼까요? 그것은 안정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불신자들은 매사가 늘 불안정합니다. 여러분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액자가 삐뚤어져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걸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자기 마음이 불안정하기에 늘 자신의 의로움과 선행으로 악함과의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잘 균형맞추어서 제대로 산다싶으면 그 어떤 사건이나 유혹이 와버리면 모든 균형이 와르르 무너져 다시 불안해져 버립니다.
인간들이 이처럼 자신의 선행과 의로서 자기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겁니다. 불안하게 되면 이런 희생과 긍휼이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믿고 사는 사람은 애초부터 자기 행위 하나 하나에 주목하지 않기에 늘 안정감있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튼튼한 마음씨를 갖기에 여유만만하게 상대를 대할 때 희생과 자비로 대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외아들을 주목합시다. 그분이 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통해 그분 자신 안정감을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문제를 우리 스스로 힘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명심하게 날마다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이 보내신 외아들에 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