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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행 23" 6-10(바울의 부활관)우리교회사도행전

Re..행 23: 6-10(바울의 부활관)

이름 : 이근호(IP:)

바울의 부활관
2005년 7월 20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3:6-10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23: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23:9 크게 훤화가 일어날쌔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23: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사도 바울로 인해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사상 문제가 아닙니다. 전라도니 경상도니 하는 지역 감정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 때문에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믿을 것이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늘, 어느 때나, 어디서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 조정사의 실력을 믿고 비행기를 탑니다만, 일단 지상에 내려와서 그 비행사와 지속적인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딴 문제입니다. 그 비행사나 나의 돈을 갈취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비행기 조정 능력이 탁월할 수 있어도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면에 있어, 그 어떤 경우에 있어도 믿을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안심하고 전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분을 찾는 문제만큼 인생에서 더 크게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제일 중요한 문제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소동의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활에 대해서 세 가지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진 집단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두개인들이요,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입니다. 우선 사두개인의 의견부터 알아봅시다. 이들은 부활도 인정하지 않고, 천사도, 악마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가볍게 보면,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가장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부합되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명백하게 확보되어 있다면 이 후의 이 땅에 이상적인 세상이 건설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이 해결해야 될 숙제요 몫이라는 겁니다.

즉 사람의 능력과 지혜란 부족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신께서 이 땅에 건설하라고 주신 완벽한 법이 있다면 그 법이 요구하고 최고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진격해 나가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신이 내려주신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태어 천사의 도움 같은 것은 이 땅에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의 과오나 실수같은 것이 튀어나왔다고해서 금방 낙담해서 신의 능력이나 행운이나 빌고 있으면 어떻게 자체적으로 세상을 바꿀 능력이 배양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잘못이 있으면 재차 시도해서 그 허점과 약점을 보완해나가면 얼마든지 인간의 능력으로도 완전한 신적 사회로 점차 진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이런 판국에 신을 찾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잠재력을 스스로 썩혀 버리는 오류가 된다는 겁니다. 조금 시도해보다가 마음에 안들면 곧장 자기 능력을 불신하고 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천사와 와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나약한 쫄장부 같은 모습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책하여 신의 은총과 능력을 받을 만한 겸손한 마음 자세를 구비하는 것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처럼 완벽한 경지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전히 완벽한 최고의 선과 진리를 추구하는 그 마음씨만큼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을 만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사람이란 어느 정도 착한 것으로 멈추는 자들이 아닙니다. 스스로 착한다고 간주하면 반드시 그 착함보다 더 착한 그것은 과연 어떤 착함인가를 염두에 두고 궁금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까지 점령하고 싶어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최고의 착함을 바라보고 늘 유혹받고 싶어합니다.

유혹도 없다면 현재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가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착함을 바라보며 사는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자비와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바탕을 구비하는 것이 된다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은 구약 전체를 해석합니다.

즉 구약에 예언된 부활이란 스스로 겸비하여 신의 자비를 한껏 갈구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비푸시는 신의 최후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사두개인보다 바리새인이 오늘날 성도의 눈으로 볼 때 더 영적으로 위험스러운 부류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에 나와있는 부활 예언이 자기 자신에게 해당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마음을 낮춘다고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착한 마음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을 가질 자격도 못되면서 죄를 가진 자아를 영원불멸하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태가 그렇게 되다면 이는 곧 '죄의 영원불멸'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천국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가 있는 인간은 아예 부활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가는 것이 합당한 자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부활 내용은 우리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말씀들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를 겨냥한 부활의 예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부활이란, 본인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에 치중하게 됩니다. 이렇게되면 본인만 사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메시야에게 부활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메시야 본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해놓으신 하나님의 자녀까지 기어이 부활시켜내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 자리에 앉으셨는데 그 자리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능력이 뿜어져 나오는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예수님의 공로를 가로채는 악마 짓을 한 당사지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막상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자신은 예수님의. 부활없이는 결코 부활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일생은 그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성도'라고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고, 하나님도 속이지 말고 예수님의 공로만 생각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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