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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행 22" 5-11 (빛)우리교회사도행전

Re..행 22: 5-11 (빛)

이름 : 이근호(IP:)

빛

2005년 6월 29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2:5-11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자들은 교회 다니고 난 뒤에 좀 더 향상되었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남들에게 과시하기 마련입니다. 보다 더 훌륭해지고 보다 더 성숙해졌다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것은 여전히 진리를 놓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는 인간의 내적 달라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문 하심'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만난 누군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외출했다가 특별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외출 중 가장 큰 일이 되는 법입니다. 산책 도중에 중요한 정치인을 만나게 되면, 그 산책길에 보았던 나무나 하늘이나 돌멩이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 특정인을 만난 기억이 오래갑니다.

이처럼 참된 기독교란,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종합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세상 살이하면서 나름대로 겪은 시련같은 것을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만난 살아 계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마치 비행기 타고 가다가 비행기 바깥에 사람이 창문을 바깥에서 두드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인간들이 사는 세상 위에는 그 어떤 분들이 살고 있으리라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 위에는 빛의 세계가 있고 그 빛되신 분이 직접 사울의 존재를 익히 아시고 이름까지 부르시면서 친히 찾아오신 겁니다. 이 때부터 사도바울은 예수께 미쳐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는 빌립보서 1:21에 잘 나와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세상에, 얼마나 예수님에게 미쳐 있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을 다 하겠습니까! 즉 좀 더 세상을 더 살면서 인격수양에 나서보겠다는 그런 생각마저 다 부질없는 겁니다. 그냥 빛되신 분을 빛 속에서 빛으로 만난 그것으로 곧장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인격적으로 완성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빛 되신 분을 만난 것, 그것으로 완료돤 상태입니다. 서서히 새로운 피조물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쪽에서 가상스럽고 피나는 노고가 추가되어야 그제사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인간 쪽에서 신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 떠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이 와서 찾아준 그 사실로만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그 누구도 합리적으로 납득이나 설득이 될 수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아무도 인간적인 이성으로 깨닫지 못하는 말을 해야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사도 바울이 이점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때부터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수님의 생애를 이 '빛의 찾아오심' 사건으로 다시금 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해석은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4-5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예 이 세상 자체를 '어두움'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왜 어두움인가 하는 것은 빛의 세계에서 빛 자체가 되신 분이 이 땅에 오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철저하게 규정짓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이 사실을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은 이 어두운 세상의 한 일원으로서 철저하게 어두운 자라는 점을 자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무엇하며 살았든지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빛되신 분은 이처럼 자신이 어두움임을 자인하게 되는 자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이 빛되심을 인정케 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려고 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고, 빛이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난 자만이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흔히 어두움 속에 자들이 자신의 어두움을 깨닫지 못하고 대단한 권력이나 권세가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이 보기에는 그저 짚으로 만든 인형에 불과합니다. r,들이 아무리 세도를 부려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는 이 자유함이 있는 이상은 그들의 존재나 활동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는 지푸라기 같은 존재에 해당됩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 뿐만아니라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7:55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 집사님의 주변에서 집사님을 살해할 의지가 충만한 다급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살해 당사자인 스데반 집사님은 조금도 다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즉 자신들이 어둠에 속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신세를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빛의 자녀가 된 이상 더 이상 자신을 우수하게 만들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다 부질없는 짓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신앙도 없는 주제에 억지로 신앙이라는 것을 만들어보기 위해 자기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정결한 품성을 갖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것, 그것도 어두움일 뿐입니다. 짙은 어두움이나 옅은 어두움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빛의 자녀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러한 짓들이 예수님의 빛의 영광성을 모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는 결코 우리 인간이 할 일도 아니며 해야 할 일도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안될 일도 아닙니다. 순전히 빛 되시는 예수님의 할 일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어두움으로서 그 어두움의 생리가 빛 되시는 주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 당할 뿐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이 사울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을 그동안 핍박해 왔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런 자가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제로 살아 계신 주님을 가상의 인물로 여기기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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