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22" 1- 5 (바울의 간증)
Re..행 22: 1- 5 (바울의 간증)
이름 : 이근호(IP:)
바울의 간증
2005년 6월 22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2:1-5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고백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 믿는 자라면 예수님 안믿던 과거 시절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보았는지 지금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에는 이렇게 보고 있다는 식으로 서로 상반된 세계관을 서슴없이 이야기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대한 관점이 별반 차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정말 수상합니다. 예수님 알기 전에나 알고 난 이후의 차이가 단지 술이나 담배 습관에 관한 것이라면 여전히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기가 알고 있었던 세상관에 추호의 의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당시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살아있음'을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자에게도 '눈에 보임'은 '살아있음'을 유지하는 당연한 조건이었습니다. 만약에 죽어도 눈에 보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세대에 '살아있음'과 '활동하고 있음'을 말한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불경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 예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이 내려주신 진리의 법칙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되는 겁니다. 이 원칙은 자연적으로 인간들로 하여금 경쟁에 돌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이미 정확하게 확정된 신의 법이 제공된 이상, 신이 보시기에 누가 위대하냐 라는 문제는 이제 인간의 능력으로 넘어와 버렸습니다. 인간대 인간대 경쟁이 가능해졌다는 말입니다.
이 경쟁에 대해서 사울은 남에게 뒤지기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인간들이 내리는 평가가 아니라 신이 지켜보는 평가이기에 여기에 목숨을 걸만도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치를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이 사도 바울을 누가 전도했습니까? 인간입니까 아니면 주님이십니까?
창세기 4:23-24에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멕은 자기 선배 가인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자기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지독한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을 전도해서 구원할 방책이 과연 인간의 지혜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은 이 라멕 못지 않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이 지켜보는 마당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일 기회를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이미 하나로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울은 자신의 인생관에 더욱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 세대에 일개 비천한 목수의 자식이라는 작자가 등장해서 자신이 메시야라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 예수라는 자는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더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랍니다. 참으로 터무니 없는 무리하고 무모한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성직자들도 다들 점잖은 사람들이라 미친소리 하는 것까지 강제로 막지는 앟았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라는 자는 갈수록 도가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무가내 추종자들이 12제자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자 국가 질서 차원에서 로마군이 더욱 압정을 가해올 빌미를 예수라는 자의 무리가 제공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성직자들은 결단을 내리기를, 한 사람이 죽여서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행정적 절차에 의거하여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예수라는 자는 죽었습니다. 일시적 종교 해프닝은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죽은 예수의 11제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소문내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있고 자기네들 같이 40일동안 같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구름타고 승천하여 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겁니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입니다. 특히 사울에게는 더욱 더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시한 공식은 오직 하나, 누구 누가 율법을 더 완벽하게 지키느냐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이참에 하나님의 법에 더욱 충실히 하겠다는 차원에서 예수 믿는 이단들을 소탕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는 사람들도 죽였습니다. 남자 뿐만아니라 부녀자까지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자 과연 이런 인간을 누가 전도해서 새사람 되기 할까요? 인간의 전도,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전도'를 봅니다. 사람의 전도가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열심히 일하시는 주님의 전도 솜씨를 보고 있습니다. 그토록 예수를 미워했던 그가 벨립보서 4:1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지금 과연 오늘날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우리도 이와같은 고백을 하고들 계십니까? 풍부할 때만 주님이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궁핍할 때도 주님이 함께 있다는 그 삶의 비결을 몸소 체험하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은 결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전에 너무 애꿎은 사람들을 많이 죽여서 양심이 가책이 되어 지금이라도 그들이 믿던 신에게 미안한 생각으로 굴복해야 나의 죄업보가 상쇄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추호도 이런 생각을 가질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의 구원 원리는 결코 둘(2)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버리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뵙고 난 뒤 둘 다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던 그 하나님도 아니요 그 율법 지키기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죄인 위한 대신 죽으심이 자신에게 영생을 안겨다 준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을 스스로 정리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구원받은 것을 새삼스럽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