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출 23:18-19 (희생의 피)우리교회출애굽기

희생의 피
2005년 6월 12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23:18-19
23:18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희생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찌니라23:19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
이스라엘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장치들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축에 종사한다고해서 양이나 염소를 자기 소유로 여기고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약속의 땅'이라는 공통된 거룩의 영역 안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지, 제사, 염소는 염소 그든 것에 하나님은 관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법이지, 오늘날 우리 이방인보고 지키라고 주신 법이 아닙니다. 즉 그 당시 목축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부합되도록 주신 법이지 오늘날 우리가 생활 환경을 고려해서 주신 법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신 법은 오직 '사랑의 법'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무엇을 지켜서 구원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이 확보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때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도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용을 내용으로 담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법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담아내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율법을 해석하는데 있어 그 율법 안에 담긴 메시야의 사랑을 발췌해내면 율법 해석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으로 인해 구원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만 율법을 지킨 것으로 구원의 담보로 여길려고 합니다. 이러한 오류가 나올 소지가 큰 법이 오늘 본문 19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염소와 그리고 젖과 염소 새끼가 나옵니다. 염소 새끼를 어미 젖으로 삶지 말라는 겁니다. 이 법은 마치 염소와 젖과 새끼만 있으면 어느 인간도 다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미 젖으로 안 삶으면 법 지킨 것으로 간주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율법 속에서도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사랑의 법을 발췌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들의 선에서 이 법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 일 수입니다. 어미염소나 새끼 염소나 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에서 난 풀을 먹고 태어난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성이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젖이란 새끼는 없는 마당에서는 생겨나는 않습니다. 젖이란 순전히 새끼를 위함이고 그렇게 해서 새끼와 어미는 생명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 3자가 끼어 들 경우에 그 생명의 관계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습니다.
즉 젖은 새끼에게는 죽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미와 상관없는 제 3자가 여기에 끼어 들면 생명의 수단으로서 젖의 가치가 무색해지고 하나의 양식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미의 젖을 사람들이 맛있게 배불리 먹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새끼에 있어서 어미의 젖은 단지 인간을 위한 양식으로 돌아오기 이전에 인간에게 뭔가를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속성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죠. 즉 그동안 새끼에게 생명의 수단이 되었던 그 젖이 단지 인간에게 양식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새끼를 죽이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전환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에 잠겨 있는생명의 가치가 무의미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약속의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위함인지 인간들이 허겁지겁 자신의 생존 욕구를 채우기 위한 용도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 이삭은 생명과 같은 자식입니다. 그런데 제 3자 아닌 3자인 하나님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드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도리어 제 3자로 만들어버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식을 아브라함의 죄 용서를 위한 제사 제물로 삼아버립니다. 이것은 이삭이라는 자식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식복을 충족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자식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법을 위해서 움직여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 자체를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이같은 취지에 따라서 18절에 나오는 '희생의 피'와 '유교병'을 같이 드리지 말라는 법과 그리고 제사에 쓰이는 기름을 그 다음 용도로 남겨두지 말라는 것도 같이 해석됩니다. 피란 어떤 누구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죽음은 억울한 죽음입니다. 정작 죽어야 될 죄인은 죽지 않고 되레 죽지 말아야 될 애매한 타인이 죽임을 당하면서 발생되는 것이 '희생의 피'입니다.
따라서 이 '억울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그 희생의 피 앞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생존 위주로 태도를 보여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유교병이란 부드러운 빵을 말합니다. 먹기 좋은 빵입니다. 즉 생존을 위해 꼭 동원되는 빵을 말합니다. 그런데 희생의 피 앞에서 자기 생존에 연연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무교병을 드려야 합니다. 무교병이란 '고난의 떡'을 말합니다.
씹어 먹으면 아품을 느낍니다. 이 고통은 우리 대신 죽은 제물의 억울함을 공유하는데서 오는 아품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 약속의 땅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 외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거룩이 유지됩니다.
피를 무시하지 않고 피 중심으로, 피를 엄중히 다루면서 살아야만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남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희생이 우선이 아니라 생존이 우선이 되었습니다. 메시야의 억울함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마치 조상에게 제사 드리면서 문어가 비싸니까 작년 제사에 썼던 문어를 잘 보관해 놨다가 다시 제삿상에 얹는 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매일같이 기름과 피가 교체시킬 것을 당부합니다. 과거의 십자가 피로만 만족할 것이라 오늘도 용서의 피에 의존해야하고 그 주님의 억울함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이처럼 죽음이 와서 매일같이 지워나가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런 판국에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란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사랑보다 그리고 우리의 죄보다 예수님의 희생과 의로움이 더 강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7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