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24:14-24 (큰 환란)
Re..마 24:14-24 (큰 환란)
이름 : 이근호(IP:)
큰 환란
2005년 6월 12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4:15-24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4: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인간들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모릅니다. 그냥 그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너무 착하지도 말고, 악마처럼 일관되게 악한 생각도 갖지 말고 순수한 착한 마음을 될 수 있대로 많이 가지되 가끔 악한 짓을 하는 것도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 아니냐고 스스로 위로하게 됩니다.
이런 판국에 예수님은 인류를 종말을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인간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종말 선언은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성인의 몸체를 하늘에서 뚝 떨어지신 분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오셔서 약함이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위험도 받으시고 위협도 줄곧 이어져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생은 절대악에 대해서 아직 인간들이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제가 사람들은 절대저주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그 전차로 세상 종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세상가 멸망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퍼붓지만 그 자체로는 왜 세상이 멸망당해야 하는 이유도 다 드러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직 절대적인 악이 나타난 사건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절대저주가 비로소 공개되는 하늘과 땅의 틈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비록 죄 지으신 적은 없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져서 죄가 발생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단호하게 버림받게 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바로 이 외침은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구박을 받게 되느냐를 최종적으로 보여주신 일입니다.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지간에 죄가 띠끌 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분이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저주요, 하나님과 죄인의 분리입니다. 이런 절대저주를 인간들이 알 길이 없기에 그들은 허급지급 마냥 이 세상을 영원히 끌어안고 살 궁리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절대저주성에 비해서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을 잃는 정도가 아예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된다는 것이 절대저주입니다. 이 절대저주가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이러한 절대저주 뿐만 아니라 절대선, 절대 사랑, 절대 축복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되살아나셔서 승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합니다. 죽어 마땅한 자에 대해 조건없는 사랑을 퍼부어주시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이것을 '죄값을 대신 치뤄주었다'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 교회법 위반으로 벌금을 내게 되었는데 그것을 전혀 상관없는 분이 와서 대신 벌금을 갚아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따라와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 벌금을 대신 지불해주다면 참으로 죄송스러기도 하고 고마운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이런 대납 제도가 자리잡아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고개 끄덕이고는 곧장 예수님을 떠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은 성도는, 자신도 억울하게 자기가 짓지도 않는 죄에 대해서 죄벌을 당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즉 잘못은 남이 해놓고서도 그 벌은 자기에게 쏟아지는 경우 속을 내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 하면, 그런 정황 속에서 비로서 성도는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을 깊이 고마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 속에 갇혀 지내야 될 대상으로 자신들이 뽑혔음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사도들이 고백한 것처럼, 모진 고생은 자신들이 하고 그 덕분으로 남들이 행복하고 구원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사도들 안에 작렬하고 생명은 성도들 안에 작렬합니다. 이로서 사도들은 절대사랑 속에 있음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이러한 절대저주와 절대사랑의 안목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의 예언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라는 사람들은 사도들과 같이 타인의 죄벌로 인해 수난 속에 있는 대행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속에는 실존하는 나라들이 나옵니다. 동시에 그 나라들의 멸망도 나옵니다. 이로서 그 나라들의 역사만 따로 챙기고 나머지 멸망 소식을 떼어내버릴 입장이 못됩니다. 나라의 존재 뿐만아니라 나라의 운명까지 다 접수해야 합니다. 문제는 왜 그 제국들이 멸망해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 제국들이 장차 나타날 인자의 나라, 즉 천국에 비해서 절대적 선을 갖춘 나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절대적인 저주의 대상이 되는 나라입니다. 금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대제국인 바벨론, 하지만 그의 발은 조잡합니다. 그 발등상에 왜 하늘에서 날라온 시시해보이는 돌멩이로 인하여 대제국의 꿈은 박살납니다.
이 지구상에 출몰한 국가가 숱하게 많다해도 다니엘의 예언에 의하면 한탄 '바벨론류'에 해당되는 불실한 국가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불실한 국가에서 파생된 나라인 헬라나라 중에서 어떤 왕은 감히 여호와의 성전을 파괴하고 거기에다 제우스라는 이방 제물의 더러운 피를 묻힙니다. 그러한 거룩에 대한 도발은 단지 한 경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저주의 날이 올 때까지 되풀이되어 적용됩니다.
즉 다니엘의 예언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끌어놓고 영원까지 지속시키려는 그러한 시도는 필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라는 이름의 절대저주, 절대선을 모독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을 갖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은 악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변화들이 모두 다니엘 예언대로 적극적으로 적용시켜 나가시는 예수님의 일관된 작업의 열매라는 점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도 다 하늘에 어떤 분이 계셔서 비를 내리는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모두 예언따라 일하시는 분의 열심 때문에 생긴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언의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모든 악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배경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