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21"23-26(사도바울의 처신)
Re..행 21:23-26(사도바울의 처신)
이름 : 이근호(IP:)
사도 바울의 처신
2005년 6월 8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1:23-26
21: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1: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것을 고하니라
사도 바울의 마음 가짐이 어떠한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신앙과 동일한 신앙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유사 신앙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흔히 유통되는 가짜 신앙과 사도 바울의 신앙이 어떻게 틀린 지 탐색해 봅시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유'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진 것은 모두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사도 바울을 찾아오셔서 호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정인을 호명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넓은 운동장에 숱하게 많은 아동들이 집합해 있는데 연단에 선 교장 선생님께서 특정 아이의 이름을 불러 줄 때에 그 이름이 불리어진 아이가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라겠습니까. "아, 교장 선생님께서 나를 아시고 내 사정을 아시는구나"하고 거의 충격에 가까운 감격과 감동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에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심정이 이러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에 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찾아주셨다는 사실이 사도의 신앙고백의 바탕이 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처지는 사도 바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 또한 놀라운 일은, 자신에게 찾아온 예수님께서 자기 시대에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사도 바울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그 사람도 믿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희안하고 놀라운 일인지 한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장난삼아 남들에게 장난삼아 "나는 대구 중심가에 이미 25년 죽은 박정희 대통령을 산 채로 만났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제가 장난삼아 던지는 농담인줄 다 압니다.
그런데 저의 이 거짓말과 농담을 듣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얼마 전에 박정희 대통령을 우리 동네에서 만났다"라고 진지하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필히 정신이상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진지하게 예수님께서 죽지 않고 살아 계시고 활동하심을 고백하는데 이 소리를 듣고서, 농담삼아 '나도 예수 믿어볼까'라는 가짜들이 마구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정말로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반가워서 달려가서 얼싸 안을 지경에 이릅니다. 여러분 이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진짜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곧 예수님이 아직도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가짜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진짜로 예수 믿는 자들이 있다면 그 사람이 수 백 km에 있던, 수 천 km에 있던 상관없이 단숨에 달려가서 반가움과 놀라움에 얼싸안고 간 떼 주고 쓸개 떼 주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진짜로 예수 믿는 환희로 사는 사람들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처럼 자기의 이득이나 생존에 별 관심두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마치 변화산에 올라간 베드로 같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해같이 빛나는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를 보고서 다음과 같이 감격스러운 제안을 합니다.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자기를 위한 초막을 아에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데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정황이 너무나 황홀하고 감격스러워서 전혀 자기를 위한 생각은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현재 생각이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 마음도 이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이 베드로처럼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2:1-4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가만히 보면, 사도 바울 본인이 경험담임에도 불구하고 환상 속에 있는 인물을 지칭할 때, '나'라고 하지 않고 마치 별개의 인물처럼 '그'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성도가 환상 속에 있으면 더 이상 자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그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성도라는 것은 육적인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17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이 사람들과의 육적인 교제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그런 인간대 인간들의 교제와 친목에서 유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예 사람과 사귀지 말라가 아니라 영적인 자유함이 전제되어야 진정한 천국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비로서 만끽되는 예수님의 의로움과 평화와 즐거움이 넘쳐서 그것으로 진짜 예수 믿는 형제를 향하여 퍼부을 때 이것이 바로 천국 안에서 진정한 교제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여전히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 '약한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은 행위는 예수 믿는 자라면 뭐든지 해 줄 수 있다는 자유함에서 나온 행위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 되었든 헬라인이 되었던 예수 믿는 자가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먼저 찾아오심을 불행이라 여기지 말고 행복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