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21" 7-14 (성령님의 통보)
Re..행 21: 7-14 (성령님의 통보)
이름 : 이근호(IP:)
성령님의 통보
2005년 6월 1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1:7-14
21: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 와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나옵니다. 그런 기적들을 대하면 왠지 신나고 통쾌한 기분까지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인간 본인들에게 유리하다고 느껴지는 기적만 통쾌해하고 반면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망해버린 사태에 대해서는 통쾌함을 안 느끼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살아 계신다는 사실만 놓고서도 이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습니다. 즉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복음을 위하여 죽어야 될 운명으로 통보받는다면, 자신이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비탄해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처럼 복음의 일에 본인을 참여시키고 계신다는 것만으로 신나야 하고 통쾌해야하고 상쾌해야 하고 유쾌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이 명백하게 믿어지기만 한다면 설사 비참한 최후의 죽음을 맞이한다할지라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성도는 성도되었다는 그 자체만해도 영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천사도 부러워해야 될 신분 인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항상 세상을 볼 때 복음 전파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보기에 늘 사도 바울같이 신나고 고맙고 유쾌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는 표현 배후에는 각가지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접어들이는 식이 아닌 상태에서의 '주의 뜻'이란 곡해된 '주의 뜻'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을 꺾으시는데 목표를 두면서 진행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은 나름대로 따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 바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하신 바에 의해서 성령이 움직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이름으로 예언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면 엉터리 해석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해석되어야 할까요?
우선 마태복음 16:18-19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열쇠'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열쇠란 닫힌 문을 여는데 쓰여지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저만치 천국 문이 보입니다. 무엇을 더 주저하겠습니까! "야호, 우후, 땡큐"라는 말을 연발해도 모자랄 신나는 일입니다. 설사 자신의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아무에게도 없는 그 귀한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자의 자긍심을 그 어떤 고생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는 천국 길을 여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증거하는 참으로 천사도 흠모할 만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상황가운데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변 사람들의 기분은 사도바울을 못 따라갑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단순히 체포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기를 느끼고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께서 일부로 아가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통보해 주는 것은 분명히 이러한 위기를 사전에 '피하라'하는 식으로 해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 전파의 영광스러움을 빼놓고 생각한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뜻을 듣고서도 걱정과 기우와 불안에 빠져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편 8:1-4에 보면,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음이 분명히 없다는 상태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먼저 선수치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가 바로 어린 어이와 다윗은 자신을 동일시 하는데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입도 낼 수 없는 어린 아이를 통해서도 원수를 이긴다는 것은, 모든 것이 주님의 그 고유한 능력으로만 가능함을 이런 식으로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바로 이런 다윗의 심정으로 자기 백성을 평정하시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의 전체적인 윤곽과 핵심을 알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복음 전달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자신의 신상에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은 결코 복음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바는, '고생이 되고 죽음이 올 때는 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차라리 그런 쪽으로 가더라도 용감하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도로서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은 복음의 내막이 성도로 하여금 고난의 길로 내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복음이 어떤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두웠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하나님도 산다는 의식은 도무지 복음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원리는 사도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안겨주실 권한이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어떤 형편에 쳐있든지 간에 자신을 젖먹이나 어린아이가 같이 여기시기 바랍니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저 무한한 하나님께서 이 미천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하나님을 알게 하실까!"라는 점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늘 우리 자신을 너무 높게 책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늘 낮추어주시는 하나님의 고마운 뜻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