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24: 3- 9 (종말의 징조)
Re..마 24: 3- 9 (종말의 징조)
이름 : 이근호(IP:)
종말의 징조
2005년 5월 29일본문 말씀: 마태복음 24:3-9
24:2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24: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이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준비하신 계획이요, 그 어떤 저항에 굴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이겠다고 통보하시는 겁니다.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는다는 계획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나 교회 안에서 가부를 물어 받아드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동의하든 하지않든지 상관없이 일을 벌써 진척이 되고 있습니다.
종말이 온다니 하니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숨어들어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마치 방공호 같은 구실을 할 수 있으니라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베드로전서 4:17에 보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교회 해체'에 들어가는 것이 역시 예수님의 종말 프로그램 사업의 일환입니다.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분류작업을 빠트리지 않고 시도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분류 작업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 이름, 즉 예수님께서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애매하게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만이 이 종말 프로그램에 의하면 구원받을 자라는 겁니다. 우리가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 하는 면을 확인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여럿 사랑의 대상들을 깔아놓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가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자신의 몸뚱아리를 제거해 나가십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는 오로지 자기만을 최종 사랑의 대상으로 하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작업으로 만들어질 속성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조국과 사업체와 사랑하는 교회가 해체되고 무너질 때, 만약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던 자라면 그 사람 입에서는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심사이 나타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그러한 것들이 하나 둘씩 무너진다해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엄청남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애인과 나란히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 스크린에 나타나는 각가지 파괴 장면을 구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집이 무너지고, 인생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진다고해도 여전히 자기 곁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애인이 있는데 무엇이 더 염려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곁에 있는 것들을 하나 둘 씩 지워나가시면서 진정 성도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예수님 뿐임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십자군 운동에 관한 영화인 '킹덤 오브 해븐'이라는 영화를 보면, 어떤 군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그 언덕에 올라가서 그 적막감과 삭막감에 실망을 하고 "신을 나를 버렸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맞습니다. 신으로부터 어떤 힘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이 사람은 당연히 허망과 허탈과 허구의 느낌을 당연히 받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여주시는 시건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실제 자신이 아닌 자아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해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의 모양으로 된 육신을 입으셔서 죄의 진정한 양상과 결과를 일시에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즉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당연하게 지옥가야만 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신앙 전체가 당연히 허탈해야하고 허망해야 합니다. 종말과 심판의 시기에 베푸어주시는 사랑은 늘 이 자리로 되돌리셔서 시작을 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을 간절함으로 무장시켜 교회 부흥을 꾀합니다. 기도를 해도 간절히, 헌금을 해도 간절히, 예배를 드려도 간절히, 목사 섬겨도 간절히, 봉사를 해도 간절히 하면 뭐든지 만사형통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간절함이 만사를 뜷는 힘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상으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내용은 바로, 환란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혹은 어떤 악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 안에서 부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진정 자기 백성들이 깨닫기 바라는 간절함입니다.
이 주님 사랑의 간절함은 이 세상의 파괴와 무너짐을 배경으로해야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이 아깝고 자기 것이 아깝다고 그 무너지는 세상에 같이 뛰어들어가 파멸시키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종말을 시도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부로 벌려놓으신 그 전쟁의 결과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아모리 종족 5종족이 뭉쳐서 침범해 들어오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가나안의 땅의 원주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로 애굽 나라에서 땅도 없는 민족을 구성하셔서 이곳 가나안까지 진격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 아모리 족속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태양까지 멈추게 하시면서 기어이 멸망되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조치가 곧 '붙이시는' 조치입니다.
종말이 진행될 때 적용되는 원리는 다음의 원리입니다. 즉 여호수아 11:20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은총이며 긍휼임을 보이기 위해 꼭 저주받아야 될 자에게 저주가 떨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조화입니까! 사랑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심판과 종말과 저주를 언급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원래 하나님의 원수된 자에게 십자가로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뒤처리를 다해놓았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