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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행 20"33-35(주는 것이 복이 있다)우리교회사도행전

Re..행 20:33-35(주는 것이 복이 있다)

이름 : 이근호(IP:)

주는 것이 복이 있다

2005년 5월 18일본문 말씀: 사도행전 20:33-35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20: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고방식을 바꿀 것을 촉구하십니다. '받는 것이 복 있다'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고방식 전환이 가능한 것입니까? 설사 이 사고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슨 수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런 복음을 전하기까지는 사도 바울 자신도 사고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는 영원히 머물 장소를 주시지 않습니다. 영원한 본향이 없게 만드십니다. 원래 명절날 되면 숱한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기를 쓰고 여정에 나섭니다. 고향에서는 모든 것이 정겹고 반가운 얼굴들 뿐입니다. 모든 것이 용서되고 무슨 행동을 해도 귀염받고 사랑받는 곳이 유일하게 고향 뿐입니다. 정색을 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 어리광을 부려도 그 다 큰 자식의 응석을 받아주는 곳이 고향 동네입니다.

사람들은 고향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습니다. 여기에 비해 객지 생활이란 늘 정신차려야 버틸 수 있는 곳입니다. 마음이 편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어떤 것도 용납해주지 않고 사늘하게 감시받는 곳이 객지입니다. 그러니까 늘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안절부절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성도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랍니다. 제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참 이상하게 느낀 것은, 세상 본향이란 일단 어릴 적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공간인데 비해서 하늘 나라의 본향으로 여긴다는 것은 역시 전에 하늘 나라에 한 번은 살아 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실제로 이 세상에 어느 인간에 하늘 나라를 미리 맛 본 자들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점이 참 이상스럽게 느껴지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죽어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마지못해 들어가는 곳이 하늘나라 인 것처럼 여기게 될 것이 뻔합니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하늘 나라는 고대하는 본향이 아니라 객지에 불과합니다. 간곡히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가 아니라 할 수 없이 마감처리가 시행되는 곳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은 예수님이 요청한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죽음을 얼마나 단촐하게 간주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쉽게 말해서 '거추장스러운 무거운 옷을 훌렁덩 벗어버리자'하는 식으로 죽음을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밖에서 할동할 때는 온갖 격식을 차리다가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옷부터 벗지요. 이처럼 사도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묵은 옷을 벗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전제되어 있기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라는 의식을 표출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경쟁이나 시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이 세상의 생활이란 상투적인 윤리나 도덕의 잣대로서 자신을 측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어 던지듯이 언제고 저 하늘 나라의 본향을 향하여 훌쩍 떠날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도 바울에 어떤 마음이 들어있기에 이런 자유스러움이 배겨나올까요? 고린도전서 9:4-8에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오로지 그 복음을 위해서 남들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당연히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에 봐도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쒸우지 말라'라는 말씀을 사도는 자식의 복음 전파에다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그 권한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사도의 권리 행사가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란 것이 무어길래 정당한 권리마저 장애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복음에 담긴 그 내용은, 사도가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돈이나 아내와의 삶도 충분히 마다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나아가서 사도는 이 복음 전파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바쳐서라도 증거할 넉넉한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이 가치성이 사도가 받는 생활비나 아내와의 정겨운 가정 생활에 가리움을 당하기에는 너무 고귀하고 아깝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성령님을 통해서 사도바울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면서 각가지 걱정과 근심에 휩싸이는 것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너무 좁고 바로 코앞에 있는 일만 몰두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세상 사람과 경쟁할 하등의 이유도 성도에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은 이러합니다. "당신의 집에는 얼마나 많는 은 금이 있느냐?"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고방식은 "나는 은 금을 탐하지 아니하고"입니다. 떠나야 될 세상의 사고방식에 스스로 동조 못한다고 안절부절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하늘나라가 가깝다면 마치 오랜간만에 찾아든 고향동네처럼 반갑고 마음이 두근두근해야 합니다.

흔히들 기독교 윤리라는 것을 통해 자신을 좀 더 고결한 자로 만들어보겠다고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는 분들이 계신데, 이러한 사고방식 안에는, 하나님에게 잘보이면 잘보일수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챙겨주신다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있다'가 아니라 반대로 '어떤 수법을 쓰더라도 받아챙겨야 성공한 인생이 된다'는 사고방식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늘에게 새롭게 알려주신 '그 예수님의 사고방식을 이제부터 받아드리겠습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안믿겠다는 것은 '나는 세상 사고방식을 그냥 그대로 고수하겠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결코 성도의 본향을 분명히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공연히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 아님을 우리가 직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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