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Re..마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름 : 이근호(IP:)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2005년 5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3:37-39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은 낯선 세계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도저히 오리라고 예상 못하고 있던 세계가 등장되어 이 세상 속에 함께 섞여 있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이 세상 속에 있는 낯선 세계와 이 세계와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서로 배격하고 차버리기 일 수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계를 순전히 인간들만의 세계라는 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세계가 여기에 잠입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5:2에 보면,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왕인 바로는 솔직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관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신이 뭐가 되었던 자신은 그 지시에 따를 하등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이러한 견해를 은연중에 오늘날 교인들도 다들 갖고 있는 듯합니다.
즉 교회 다니면서도 교회의 존재는 인정하되 하나님의 존재는 곧이곧대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계와 당연히 하나가 뭉쳐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여러 선지자들 통해서 이 하나됨에 균열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바로 왕 앞에는 모세가 있어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는 낯선 나라의 존재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자신이 예상치도 못한 자식, 이삭을 그의 부인이 임신케 하므로서 낯선 세계의 존재를 느끼게 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삭같은 자들만을 자기 백성으로 간주하십니다. 성도는 이미 이 지상 세계에 잠입해 있는 낯선 세계에 소속된 자들입니다, 이들의 눈에서만, 인간 세계라는 것은 그저 파멸의 나라에 불과함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두 번씩이나 연이어 부르시면서 파멸을 예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 지구상에 많은 도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예루살렘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모든 종교적 여망이 집대성되어 드러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인간들은 낯선 세계와 인간 세계에는 접촉점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그 접촉점은 하나님을 위해 지어놓은 성전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과연 이 구원방식이 하나님으로부터로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성령님은 일부로 예수님으로부터 하여금 악마가 만나도록 해줍니다. 이 대목에서 악마가 실제로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정체에 대해서 제대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즉 악마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야지만 이 세상의 정체는 제대로 밝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아니됩니다.
마귀가 있기에 종교라는 것도 있고 거룩한 공간이라고 여기는 예배당도 있게 마련입니다.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이 지상의 구획 가운데 특별히 거룩한 차별화되는 공간이 따로 있다고 믿게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자리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제 악마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성전 꼭대기에다 세웁니다. 거기서 뛰어내려보라는 겁니다. 만약 이 테스트가 성공하면 덩달아 그 뛰어내린 성전의 존재도 역시 거룩한 영역에 해당됨이 증명되리라 보았습니다.
성전은 이처럼 인간이 총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교적 성품이 집대성 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장소마저 사실 악마가 주선해서 만들어진 거룩한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간 세계에서 하늘 나라와 접촉될 있는 지점은 그 어느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명확해졌습니다. 인간들의 종교적 습성 가운데는 헌금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보잘 것 없는 액수의 헌금을 크게 칭찬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닏자.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헌금을 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내민 돈 액수를 하나님이 헤아려 보시는 걸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졸라 죽이듯이 서서히 지금도 매일같이 조금씩 죽여나가십니다. 따라서 이 점을 바로 안다면 자기 인생을 이처럼 망쳐 그 하나님에게 한 푼의 헌금도 아까울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을 많이 한다는 것은 제대로 하나님을 몰라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차원에서 헌금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부의 헌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과부의 신세란 지금이나 그 당시이나 망쳐버린 팔자된 처지입니다. 그 과부가 새시집 가겠다고 하나님께 헌금한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자기 인생을 더 이상 자신이 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 살기 좋다는 에덴에서 쫓아낸 것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 생명나무란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알리기 위함으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결코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이 계신 것도 아니요 생명나무가 에덴 동산에 심겨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들이 십자가를 피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도 같은 차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쫓겨난 인간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뜻을 철회하고 우리 인간보고 사과하고 난 뒤로 다시 우리를 받아주시고자 일 하신 결과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솜씨나 능력을 드높이기 위한 일환일 뿐입니다. 즉 구원될 자들은 이삭처럼 없는데서 새로 생긴 존재들입니다.
구원될 자들은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드님이 합의하신 대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요량으로 없는데서 새로 생긴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을 조으실 때, 우리는 차라리 원없이 신나야되고 즐거워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신의 구원욕심 때문에 가리웠던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과 사랑이 비로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처음 알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그 순간임을 알고 즐겁고 기뻐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한해서 예수님은 고대하시는 대상이 됩니다.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하기에 오직 구름 타고 오실 주님만 고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39절에 보면 '주여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들의 분위기에 화제거리로 인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아직도 자신의 구원방식을 고집하시지 않습니까? 자기 쪽에서 내민 그 어떤 작업에 무용지물이요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근거한 예수님쪽에서 자발적으로 내민 자비와 용서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과 하나님을 속이지 않고 신나게 스스로 절망하는 기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