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출 22:25-31 (자비의 하나님)우리교회출애굽기

자비의 하나님2005년 5월 8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22:25-31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22: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찌니라22:29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22:30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만에 내게 줄찌니라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찌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찌니라
구약의 말씀은 이미 출애굽이란 구원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이미 죽음을 이긴 사람이지요. 사람들이 제일 이기기 곤란한 것이 죽음입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죽음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앞두고서도 죽음이 쏘는 공포를 맞이해야만 합니다. 즉 "이러다가 죽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한시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이기 "나는 죽음을 이겼다"라고 나서면 불신자들 눈에는 대단히 건방지게 보일 것입니다. 아무나 이기지 못한 죽음을 무슨 수로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경우 같은 것도 이미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에게 준 말씀입니다. 홍해 바다의 갈라짐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치 인간의 힘으로 죽음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 홍해바다 건넘은 마치 죽음을 통과한 경험입니다.
이렇듯 죽음을 통과한 사람에 한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죽음도 통과하지 못한 주제에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준수하고 있다고 자부해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간주해주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홍해를 건너옴이 곧 죽음을 통과함에 해당된다면 신약에서는 형편이 어떠합니까?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들이 곧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56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망이 표적으로 삼기 위해 사람을 찾아 다닙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있어 표적이 될 만한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죽었고 예수님 안에서 부활될 자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의 저촉을 받지 아니하니 죽음조차도 성도에게는 공격할 건덕지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율법에 해당됩니다. 홍해를 통과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게 되면 겁이 날 것입니다. 돈을 빌려줘놓고 채권자처럼 굴지 말라고 하니 기가 막일 노릇일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지옥가는 사람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 말씀은 안 듣고 안본 것으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죽음을 통과한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 통과되어야 될 죽음의 일부로 간주해서 이미 자기 자신마저 극복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사람은 환상을 만들어내며 삽니다. 늘 그러합니다. 일종의 소설을 쓰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소설은 과거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이지 실제 상황은 아닙니다. 실제 상황이란 항상 과거 사실이 되어 시간 뒤로 사라져버린 후입니다.
즉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만든 소설과 실제 상황과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란 자기 백성들에게는 이런 '소설 쓰기'를 그냥 방치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현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현실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은 말씀 중심인지 결코 인간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40:6-8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죽음을 통과한 자들에게는 멀리 있는 환상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로 다가오게 되고 그 안에 녹아지게 됩니다. 즉 복음과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 위주로 돌아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자기 중심적 현실관을 제거시키기 됩니다.
이렇게 되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완벽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숨어있는 죄가 더욱 더 까발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인간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자기는 늘 아름답고 곱게 살고 싶은 쪽으로 생각이 돌아갑니다.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매일 같이 소설을 쓰는 식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들의 풀 같이 사그라들고 시들어야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이런 자기 중심적 현실관이 죄악된 것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다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 처해있는 신약에서도 성도가 되어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숨어있는 죄성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여기에 그 동네에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고 들고 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행여 발에 상처 날까봐 부드러운 머리털로 씻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도 참으로 원초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위에 둘러섰는 신사분들은 이런 천박한 여인의 천박하고 노골적인 행위를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즉 누가 예수님 앞에서 죽음을 품고 행동하고 살아가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자신을 죽음을 그 내용으로 하여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중심주의'로 행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족합니다. 자기 죽음을 지당하고 마땅한 현실로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온갖 변화를 겪습니다. 그 때 그때마다 자신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들에게 짐승에게 찢힌 고기도 발견될 것이고 때로는 이웃집에서 돈이 궁해 자기에게 급전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왜 상대방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게 해주셨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가지고 자신의 자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만나는 각가지 상황에서 성도는 자신이 그 자리에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그 분은 돈 갚아 줄 주인님도 없는 겁니다. 돈 받을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들에서 짐승이 고기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먹을 사람이 없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비'라는 표현을 사랑하십니다. 자비가 알고 있을 때에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행위는 그 행위가 어떤 행위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나 자비라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법과 말씀에만 들어있지 결코 인간 속에는 나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만든 엉뚱한 현실을 버리고 말씀 중심의 현실을 참된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7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