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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행 20"22-24 (사도의 각오)우리교회사도행전

Re..행 20:22-24 (사도의 각오)

이름 : 이근호(IP:)

사도 바울의 각오
2005년 5월 4일본문 말씀: 사도행전 20:22-24

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복음은, 그저 세상 지혜나 챙기고 완벽한 인격을 갖추기 위한 교양을 쌓기 위한 근거가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복음이란 곧 생명입니다. 그에게 있어 생명이란 자기 목숨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언제고 목숨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복음은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스스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을 쌓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라는 바탕이 무너져도 상관없이 생명 안에 놓이게 된 상황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죽음'과 '삶'이 연이어 교체되어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란 곧 죽음마저 그뜬하게 극복해 버린 사건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습니까?"라는 말은 곧 "이제 우리들의 목숨도 별게 아니지요, 그렇지요?"라는 말과 같은 질의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되는 순간부터 반드시 고백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5:15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말씀에 유념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십자가에서 비롯된 생명의 능력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미 십자가 복음 앞에서 모두 헛된 짓거리로 들통이 나버렸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자기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하여 진력을 다해온 사람들에게 있어 어느날 그 목숨을 버려야 할 시점이 오게 되면 참으로 깊은 절망을 갖게 됩니다. 그동안 자기 자신의 목숨에 투자한 돈이 얼마며 정성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헬스클럽에 가보면, 자건거 페달을 밟아서 다리 근력 운동을 하게 하는 기구가 있습니다.

열심히 그 자건거 페달을 힘차게 밟아도 결국 그 자전거는 1m도 앞으로 전진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게 됩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걸쳐 자기 목숨에다 모든 것을 집중 투자하고 각양 맛있는 음식을 퍼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시신 뿐입니다. 한 발자국도 생명의 세계로 나아간 적이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서도 소용없는 세월을 다 보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알았기에 이제 거추장스러운 자기 목숨 따위는 버려도 좋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대단한 신앙인의 말이니까 당연한 진리라고 여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 바울이 낯선 인물로서 우리 곁에서 오늘 본문과 같은 고백을 했다면 우리는 그 낯선 인물에 대해서 매우 측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즉 "사람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하니 주님의 복음으로 위로 삼고자 억지를 부리는구나. 휴유∼나는 저 낯선 사람같은 더러운 팔자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라는 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을 결국 여전히 우리 내부에는 알 수 없은 무거운 공포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어 계속해서 자기 목숨 부지에 매진하고 싶어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이란 어떤 위기감이나 공포심이 찾아들면 본능상 도로 자기 목숨을 붙잡게 마련입니다. 결코 오늘 본문처럼 '나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단호함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즉 아무리 망해도 자기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낭패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공포심에 근거를 둔 심정으로나 자연스럽게 사도바울의 복음을 곡해하기 마련입니다.

디모데후서 2:9에 보면,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신의 생명조차 귀하게 생각들지 않을 신앙심과 능력을 받은 것은 모두 다 매이지 않는 말씀의 덕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자신은 죄인취급 당하여 옥에 묶이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런 일로 인해 말씀마저 매이지는 않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왕 복음을 알게 된 것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서 심한 고생을 시키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늘나라와는 거꾸로된 천국관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셔서 신앙인이 생기도록 하시고 그 생겨난 신앙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인식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고 방식으로 표출하도록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 상태를 두고 말입니다. 현재 자신들이 세상 삶이 고달프니 좀 형편이 나아지는 것을 천국의 복을 일부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서러움 받고 묶이고, 힘들게 사는 것은 실패한 인생살이인 것처럼 간주합니다. 이로 인해 이 세상 사람들은 엉뚱한 천국관을 마음속에 가득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관과 전혀 딴 판인 천국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흔히 세상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부인하고 싶은 상황 속에 자기 백성들을 일부로 집어넣어서 그들은 그 험한 상황 속에서도 얼마나 복음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지 보게 합니다. 이러한 형편은 예수님 때나 지금 때는 변동이 없습니다.

즉 삶의 고달픔 때문에 낙담하거나 슬퍼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우선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들입니다. 복음의 위력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자기 목숨 연장에만 모든 관심을 쏟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 안에서 예수님은 서럽게 대우받으시고 결국 묵숨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서 사도 바울은 도리어 '복음의 위력'을 만끽하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잃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복음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너무나도 평범해서 차라리 무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미미한 그런 사람들의 모습으로 성도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더라도 도리어 복음의 능력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알 수 없는 공포로 피어올라오더라도 다 그런 것들은 몽상에 불과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범을 무서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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