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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인내의 표현 261018우리교회야고보서

인내의 표현(야고보서 5:10-11)

인내의 표현

2026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5:10-11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야고보서 5:9에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교제해야 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심판주이십니다. 심판주는 이 세상을 심판할 이유와 정당성을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과 대화를 주고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표현’입니다. ‘표현’이라는 그 사람들이 과거에 경험했던 세계를 내어놓는 겁니다. 그런데 그 표현에는 ‘심판’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냥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런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분명히 이 세상은 심판받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한 자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5:24에서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에서 ‘사망’이 뭔지, 왜 생겨났는지를 분명히 해야 생명이 무엇이며 생명이 왜 등장하는지를 압니다. ‘사망’이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조상이 따먹고 그 후손들은 이 죽음의 저주가 반복됩니다. 문제는 생명의 등장이 도리어 신기합니다.

저주받고 죽을 것 같으면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생명’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작업에 있어 선지자들이 투입이 되고 동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작업에서 선지자들은 인내가 필요한 겁니다. 이들 선지자 중에 욥도 들어 있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노아, 다니엘, 욥의 공통점은 자기 시대에 비-심판 사고방식이 퍼져있음을 전제로 해서 심판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욥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취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욥의 인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욥이 인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본인 때문입니까 아니면 친구들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원인 유발자가 또 있는 겁니까? 착하고 점잖고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고 행동하는 친구들은 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나름 애쓴 자들입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욥 2:12-13)

나름대로 환자에게 마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한 태도로 조문 와 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욥과의 대화가 진행되면서 욥이나 친구들이나 격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과연 누가 누구로 인하여 인내를 품고 있는 걸까요? 실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악마의 시험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욥 2:6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즉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들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악마에 붙잡히는 있어 이미 무장해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본인들은 ‘살아 있다’고 여기겠지만 실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살아 있는 겁니다.

즉 욥은 그 시대에 아담의 형편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이나 모두 기존의 선악 지식에 준해서 의견들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닷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4:5-6)

그런데 욥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을 동의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2-6)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경우에는 ‘자기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원인이나 결과에서 자신을 뺄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욥기 38:1-2에서 폭풍 속에서 나타나십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이제부터 욥은 사람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욥이 보여준 것은 ‘말’이 아니라 ‘표현’이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것으로 인해 욥은 그 시대에 메시야로 나서게 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제물을 제공해야 하고 욥은 친구들의 죄를 위해 대신 기도하게됩니다. 즉 욥은 그 시대의 욥인 동시에 두 번째 아담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했던 겁니다. 욥을 위하여 인내해야 했던 그 욥의 인내는 장차 올 주님의 인내에 의해서 죄로 드러나야 했던 겁니다. 이점은 세례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5-6)

소경이 왜 눈을 뜨야 하지요? 그것은 소경으로서 ‘나’가 주님으로 인해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도 못한 나로 바뀌어지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된 것이 순교 같지도 않는 순교입니다. 이런 자의 운명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영향권 속에서 생긴 일임을 기뿜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야고보서 5장 10-11절(인내의 표현) 26101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10-11절입니다.

야고보서 5:10-11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지난 시간에 본 9절에 보면,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신다’라고 되어 있고 그다음에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예수님이 동생인 야고보, 사도행전 15장 이후에서 예루살렘의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는 이 야고보는…,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제발 좀 사람하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야기하려거든 심판자와 이야기해야지 자꾸 쓸데없이 사람과 이야기하면 얻을 게 뭐가 있겠어요? ‘심판을 면하라’라고 언급한 것은, 지금 너에게 중요한 것이 사람 만나면서 돌아다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사람들을 만나요. 만나놓고 고민은 혼자 다 하고 있어요. 걱정, 근심, ‘괜히 만났어.’ 괜히 만났다면서 왜 또 만나죠?

외로워서 만나는 거예요, 외로워서! 주님께서는, 네가 심판 대상이라는데 우리에게 그딴 이야기는 안 들어오고, 나를 좀 외롭지 않게 해 달라는 그것만 부쩍 신경 쓰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면 그것은 ‘표현과 표현의 만남’이에요.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인간이 여태껏 자기가 살아오며 경험한 것을 표현하기 마련이고, 그 표현이 그 사람의 미래와 운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는 네가 속해 있는 그 세계의 표현과, 내가 속해 있는 표현이 서로 안 맞는데 안 맞는 이유가 ‘너에게는 심판이 없잖아’, 너의 세계에는 심판이 없고 나의 세계는 심판주가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살아가는 거예요. 따라서 대화를 하게 되면 심판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심판이 있는 주님과 대화하는 식으로 남들과 만나서 자기표현을 할 때는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죠.

심판의 대상이 무슨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주인공이 안 되는 게 그게 기뻐요.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에는 반드시 그 당위성, 반드시 심판해야만 했음을 알아차렸으니까 그 희열과 기쁨이 있어요. ‘하여튼 하나님, 조지세요.’ 이런 식으로, ‘심판 참 잘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면 무엇의 당위성, ‘아, 이곳이 사망일 수밖에 없구나.’ 이 땅에서의 사망이라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이고 마땅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에 한해서만 생명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안 만날 수는 없죠. 만나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만나면서 그 사람을 보지 마시고요, 그 사람이 표현하는 것을 한 번 보시게 되면 ‘저래서 사망이구나. 저래서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하구나.’ 하는 것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본문 야고보서 5장 10절에 보면 “형제들아”, 흩어진 열두 지파입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에게 줬던 그 취지를, 비록 이스라엘은 붕괴되었지만 이젠 모여진 이스라엘이 아니라 흩어진, -성도죠- 흩어진 이스라엘에게,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들에게 지금 야고보는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형제들아”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주의 이름으로 말한…” 아, 참…, 이 대목이 엄청 어려워요.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 선지자, 또는 ‘주의 이름으로 새롭게 변화된 선지자 또는 성도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걸 투자해요. 그리고 속으로 이야기합니다. ‘난 언제나 내 이름으로 살 거야. 난 내 이름 포기할 마음은 없어.’ 그런 마음이거든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그런데 형제에 해당되는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신분이 바뀐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교회에 사람들이 오래 다니잖아요? 저한테 잘못된 성깔이 있는지 자꾸 어떤 의심이 드는 게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유아 세례받고 그런 사람이 한평생 60년, 70년 교회 다니면서 주의 이름, 주의 이름, 심지어 자빠져도 주의 이름, 어머나 주여~, 이렇게 습관처럼 나오는데요, 어떤 의심이 드느냐?

교회 50년, 60년 다녀도 결국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고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회 한 60년 다녔다. 결국 그 끝은? ‘나 교회 60년 다녔거든.’ 그게 딱 걸린 거예요. 그게 당신 이름이잖아요. 그게 당신 이름으로 불리는 거잖아요. 중간에 바뀐 적이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교회 나올 때마다 그렇게 하지만 한 번도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이젠 날 위해 살 생각이 없다’라고 내 이름을 포기한 적이 없지 아니한가 하는 의심이 들어요.

어제 토요일에 하는 《싱싱 고향별곡》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보니까 포항시 청하면 이야기가 나와요. 골목에 개가 있는데 눈썹을 누가 그려놨어요. 그래서 화를 내도 뭘 해도 항상 개가 웃는 상이에요. 교인들하고 똑같은 거 아닌가요? 전혀 주의 이름엔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 이름으로 살면서 얼굴에는 주의 이름으로 눈썹을 그려놔서 언뜻 보면 “할렐루야!” 외치는 것처럼 느껴지고, 믿는 것처럼 자꾸 인상을 그렇게 받아가지고…, 의심하는 내가 나쁘죠.

결국 저렇게 하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교회식으로 한다 해도 본인만은 자기 이름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다시 말해서 아까 이야기 한 대로 한다면, 죽을 때까지도 자기표현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나 과거에 이렇게 살았어.’ 자기 경험을 표현으로 남기는 식으로 마지막 유언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자꾸 의심하는데, 의심하는 건 자유니까요, 말리지 마세요.

주의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들 중에서 오늘 본문에는 ‘욥의 인내’가 나와요. 선지자, 인내, 그중에서 ‘욥의 인내’를 설명하기 전에 전개가 약간 복잡한 게 있어서 결론부터 먼저 내리겠습니다. 인간이 ‘사망에서 생명’이라고 할 때 사망하는 이유가 있어야 해요.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사망했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크게 나쁜짓 한게 아니에요. 그냥 선악 지식을 품었다는 이유때문에 그냥 사망이에요. 그냥 하나님의 조치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사망에서, 그다음에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자기 이름으로 또는 자기 힘으로 선악 지식을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 그걸 포기하면 뭐 바보 아닙니까?

자기는 똑똑해야 하잖아요. ‘이건 옳다, 저건 그르다.’ 기본적으로 그 정도는 알아야 똑똑한 거 아닙니까? 그래야 사람대우받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대우 받겠다는 그게 사망이에요. 사망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표현에 이르러야 되거든요? 이를 때 여기에 두 개의 절차가 필요해요. 하나는 선지자가 경험한 인내, 선지자의 인내, 참음,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선지자의 인내’가 일단 들어갑니다. 그게 1단계 인내에요.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여, 저 사람들이 노는 동네와 내가 노는 동네가 다르군요.’ 미가야 선지자 같은 경우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잖아요. “하나님, 모든 선지자 400명이 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왜? 내가 천상 회의에 참석해 보니까 거짓된 악마의 영이 목사들에게 다 들어가서 거짓말을 하는 게 보이니까요. 그래서 미가야는 주저하지 않고 외쳤죠.

지난 목요일에 서울 강의할 때 온도계 비유를 했습니다. 두 종류의 온도계가 있는데 한 종류의 온도계는 뭐냐? 온도계 주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온도계야. 오늘은 한 20도쯤 됐으면 좋겠다.” 하면 온도계가 “주인님, 제가 20도 딱 보여드릴게요. 보세요. 현재 기온 20도입니다.” “옳지. 잘했어.” 이런 온도계가 있어요.

그리고 주인이 어떤 온도를 요구하든 상관없이 그냥 현실 그대로의 온도를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온도계, 이 두 개의 온도계 가운데 어느 게 쓸모 있는 온도계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온도계 상입니까? 남들이 원하는 인생이 아니고 곧이곧대로 이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온도계,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 있는 온도계잖아요.

400명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월급 주는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온도계를 그대로 보여준 거예요. 여기에 그 수모가 어떻겠습니까? 엄청난 수모가 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 수모를 가지고 선지자의 인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주께서 옮겨주는데, 그중에서 첫 번째인 선지자의 인내가 들어갔단 말이죠. ‘맞아. 우리도 성도기 때문에 이 땅에 양보하지 말고 곧이곧대로 말씀대로 복음대로 전해야 해.’ 이렇게 하면 그게 생명입니까? 그게 생명이에요? 이게 이제 문제 큰 거예요.

선지자를 본받자, 선지자처럼 살자, 그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자, 빛과 소금이 되면 그게 생명입니까? 아니에요. 선지자가 인내를 해버리면 선지자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인내와 고통을, 고난을 받았다는 자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따라서 이 인내는 주님의 인내에 의해서 도리어 주님에게 인내를 제공하는 그러한 나만을 위한, 내 이름을 위한 인내라는 것을 경험하는 두 번째 인내를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북한에 갔다, 복음 전했다, 아오지 탄광에서 죽었다. 누가 봐도 순교자잖아요. 순교하면 영생 얻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예요. 순교한다고 영생 얻는 거 아니에요. 그냥 남들 보기에 남들은 지옥 가지만 나는 잘나 보이죠. 나는 우수한 신앙인처럼 보이잖아요. 이 시험을 어떻게 벗어나려고요? 무슨 수로 이러한 유혹을 벗어납니까?

생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주를 위해 고생한다고 생명 주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고생했다는 너 자신 때문에 주님이 도리어 인내를 받아야 될, 피해를 입어야 될 그 주님의 인내에 의해서 되치기 당해야 해요. 도로 당해야 된다고요. 그래야 자기 자리로 안 돌아와요. 자기 이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요. 영생은 주의 이름으로 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예수 믿어서 영생 얻었다고 하면, 그건 영생 얻은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안 바뀌었어요. 자기 이름이 있고, 자기 이름에 영생이 거기 꽂혔다고 믿기 때문에 이건 자기 자신을 믿는 겁니다. 교회 수십 년 다녀도 자기표현밖에 안 나와요. “내가 이 교회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이런 것밖에 안 나온다고요. 영생 아니죠.

선악 지식 빼는 거 그거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잘 안 빠져요, 그게. ‘나 잘났다’가 쉽게 빠지겠습니까, ‘나 잘났다’가! ‘주님 앞에 이만큼 충성했는데 내가 너보다 잘났어.’ 이게 빠지겠어요? 뭐 60년 교회 다닌다고 그게 빠지겠습니까? 80년 다녀보세요, 빠지는가. 안 빠지죠. 괜찮은 온도계도 영생 아니에요. 다른 조치가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내 경험으로 안 돌아오는, 내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인내가 필요한 거예요. 물리학에서 제일 작은 걸 입자라고 하는데 입자를 360도 회전하면 제자리로 안 돌아와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모든 회전하는 것은 이 땅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에너지를 얻어 회전하기 때문에 360도 돌려버리면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잖아요.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발견했어요. 입자라는 것은 360도가 아니라 720도를 돌아야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예요. 그걸 스핀이라고 해요. 여기서 다시 안 돌아와야 해요. 나와 바이바이해야 돼요. 내가 경험한 일체의 나와 바이바이를 해줘야 이게 영생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안녕, 나야!’ 나와 ‘안녕!’ 하는 거예요.

과연 그런지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한 번 답변해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합니다. “돈을 벌어야 하겠어. 나 돈 벌고 싶고 부자 되고 싶어. 그래야 내가 잘난 거니까. 난 돈 많아서 잘나고 싶어. 그래서 남한테 으스대고 싶어.”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은 “세상적인 거 봐, 저거. 복음도 모르고 말이야. 지옥 가려고 저런 소리 하는구나.”

그러면 세상 사람이 그 이야기 듣고 “네가 교회를 다닌다면 교회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돈을 벌어야 되는 이유가, 돈을 벌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봐야하기 때문에.” 우와…,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돈 앞에 초연하다고 주장하는 내가 진짜 돈을 벌었을 때, 월 200만 원 벌다가 300만 원 벌게 되었을 때 과연 내가 200만 원 벌 때의 그 인간인지, 아니면 내가 달라질 것인지 그걸 스스로 테스트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월에 한 500만 원만 벌게 해 주세요. 그래도 저는 눈 깜짝 안 하고 주님만 사랑할 겁니다. 일단 오백 주셔도 어떤 경우라도 저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정도로 믿음이 있는 것을 주께서 한 번 테스트 하는 식으로라도 저에게는 최소 500정도 고정 수입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비슷한 것을 하나님께 은근히 또 기대한다고요. 이거 맞아요, 틀려요? 첫 번째 인내입니다. 이거 안 맞아요.

그러면 세 번째가 뭐냐? ‘돈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입니다. ‘나’가 아니에요. 나에 머물면 이것은 영생 아닙니다. 내가 그동안 살았던 세상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가? 다시 말해서 이 세상 말고, 내가 어떻게 달라지는가가 아니고, 내가 돈을 벌 때 내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출현하는가, 복음의 세계가 어떻게 등장하는가를 우리가 새롭게 경험하는 거예요. 나를 무시한 세계, 나를 일거에 무시한 세계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그걸 사도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미 언급했어요. 13장 1-3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랑은 뭐냐 하면, 계속 반복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걸 이야기해요. 사랑이 운명이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안 되고, 사랑이 운명이어야 해요. 사랑은 바보가 하는 거예요. 바보가 아니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 앞에 바보가 아니면 그건 사랑 한다고 할 수가 없어요.

주님 제가 주님 곁에 있어도 돼요?
(Shall I stay)
그것조차도 죄라고 할 수 있습니까?
(Would it be a sin)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 곁에 있고 싶은데 그것도 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죄다.” 나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게 죄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왜? 주님을 사랑 안 하는 게 죄에요. 나 같은 그딴 건 생각 안 할 정도로 주님의 사랑에 매료되고 푹 빠질 때 그게 바로 영생이고 생명이고 하나가 되는 거예요.

‘Can’t help falling in love’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 노래 가사에요.

강물이 바다에 가듯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운명입니다.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things are meant to be)

“말리지 마세요. 이건 운명이에요, 운명! 강물이 바다로 가듯이.” ‘나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노래에요. 나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보가 되어버리고, 이게 운명이니까 내 가치나 위신 같은 건 생각할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그런 마음으로 남한테 나서세요. 그리고 인간 대 인간을 만나지 마세요. 표현과 표현으로 만나세요.

“너 어디 빠졌노?” 나 여기 빠졌다고 표현하는 것, 표현과 표현으로 만나라고요. 그래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표현입니다, 그 표현이. 이게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서서히 빌드업 돼요. 선지자는 고생 무지막지하게 많이 한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그들은 아직도 ‘falling in love’ 사랑에 빠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직 신약이 아니기 때문에, 구약이기 때문에요.

그중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 11절에, ‘욥의 인내를 배우라’는 거예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이제부터 욥의 인내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욥은 선지자인데 욥의 인내를 보시기 전에 에스겔 14장 14절을 일단 보겠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다 멸망한다는 뜻이에요. 20절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은, 심판 때에 주께서 건질 자만 건진다는 거예요. 욥과 다니엘 노아를 한 그룹으로 맺었다는 말은 공통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노아와 욥과 다니엘은…, 잘 들으세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서 그들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잘 들으셔야 돼요! ‘그들의 존재로 인하여 졸지에 주변 세상이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 말입니다, 심판의 대상으로! 성도가 이 험악한 세상에서 홀로 구원받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 이야기 아니에요!

그 현장에 성도가 꽂힘으로써, 성도가 낯선 표현을 함으로써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졸지에 그 동네가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표현을 하게 됐단 말이죠. 예를 한 번 들어볼게요. 애들끼리 모여서 떡볶이를 해 먹자고 했는데 어떤 애는 치즈를 넣자고 하고, 어떤 애는 빼고 하자는 거예요. 떡볶이 만드는 애가 복음을 알고 영생을 얻은 애예요.

그렇다면 ‘치즈를 넣자, 빼자.’ 거기에 논쟁할 가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지금 부활하셔서 나에게 떡볶이를 만들라고 지시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과 치즈를 넣니, 빼니, 하는 논의를 할 필요가 없죠. 주님의 부활이 연관되어 있는 거니까 빼든 안 빼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사물놀이에 박자가 안 맞는다. 박자가 맞든 안 맞든 그게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게 표현이에요. 그게 순교입니다. 순교 같지도 않은 순교예요. 뭐 목숨 바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오늘날 영생 받은 사람은 순교 같지도 않은 순교를 하셔야 해요. 밥 먹고 금식하듯이요. 다른 걸로 표현이 안 돼요, 이것은.

처음에 이 원칙을 그대로 욥에게 적용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욥으로 말미암아 인내가 발생했습니다. 자, 욥의 인내 유발자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1번, 하나님. 2번, 친구. 3번, 욥 본인이 욥의 인내를 유발케 했다. 오늘 본문은 간단하게 욥의 인내인데, 욥의 인내의 원인 제공자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구약에서 Stop! 구약에서 스톱해서 보게 되면, 누가 인내를 겪느냐 하면 욥이 아니고 욥의 친구들이 인내를 겪어요. 욥기 2장 12-13절에 보면, 친구들이 조문하러 왔어요. 욥이 죽을 때 다되었으니까 조문하러 온 거예요. 11절 끝에,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약속하고 왔다는 말이지요.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는데 일주일 동안 자기의 겉옷을 찢으면서 그 아픔에 함께 동참하면서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요. 나도 너처럼 같이 죽겠다고 하는 것처럼이요.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려 머리를 깎으니까, 친구라고 자기도 머리 깎아서 공감을 나타내는 것처럼…, 정말 친구 아닙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부조금이나 내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7일 동안이나 붙어 있으면서 이렇게 애정을 쏟는데 이거 친구 맞잖아요.

이런 친구의 애틋함과 정성 어림, 이걸 누가 화를 내게 만들었습니까? 욥이에요. 욥이 화를 만들었어요. 그들은 인내한다고 애먹었습니다. 친구 사이에 욥은 굉장히 고마워했어요. 고마워했는데 그다음부터 주고받고 대화를 한 거예요. 표현을 한 거예요. 말로서 표현하니까 그때부터 양쪽 다 서로 난리도 아니었어요. 서로 인내한다고 애를 먹어요.

네가 사는 동네하고 내가 있는 처지가 이렇게 차이 나는지를…,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해 버렸어요. “이럴 줄은 몰랐다.” 나중에 욕설 비슷한 것까지 막 나와요. 욥기 25장에 보면, 하다 하다 빌닷이 성질나서 욥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4-6절에 보면,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세상에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인간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눈에 달도 별도 깨끗지 못한데 네가 어떻게 의롭다고 하느냐?’ 빌닷이 이렇게 정말 정성 어린 충고, 진성성 있는 충고를 해 줘요.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욥이 27장 4-5절에서 하는 말이,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고집도 이런 고집이 없어요. 누가 누구보고 인내하는 겁니까? 그런데 사실은 욥의 인내를 유발케 했다, 친구들이 욥을 건드렸다, 이렇게 하지만 욥이 모르는 게 있어요. 욥기에서 욥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의도적으로 욥이 인내하게끔 하나님께서 악마를 동원했다는 사실을 욥은 몰랐습니다.

욥은, 왜 하나님이, 나와 좋게 지내는 하나님이 왜 굳이 그 일을 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거예요. 그 이유가, 욥이 아담을 대신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이 아담을 대신한다는 말은, 욥은 아담의 후손이에요.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할 때 모든 후손을 그 사망에 머물게 만들고, 못 빠져나오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뭘 지시하느냐 하면, 욥기 2장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의 그 조건에 현재 80억 인구가 다 해당됩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귀가 생명은 손을 못 대니까, 80억 이상 되는 인구가 본인들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마귀의 약속에 의해서 살아있는데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자기가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나중에 늙어서야 죽겠지.’ 지금은 살아있다고 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인간, 그걸 대표해서 누굴 소집했는가? 욥의 친구 3명이 여기 동원됩니다. 욥의 친구 3명이 누굴 만나는가? 난데없이 하나님과 악마에 의해서 인내를 받은 욥 앞에서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는 그들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상식과 정보를 총동원해서 욥으로 하여금 ‘욥이 멀쩡해야 된다. 인간은 멀쩡해야 돼. 안 죽어야 돼. 안 아파야 돼. 그런데 넌 지금 정상이 아니야. 왜? 죄가 있기 때문에’라고 욥의 앞에서 친구들이 발설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뭘 모르는가? 마귀에 의해 자기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표현을 하는 거예요.

이게 옳다고, 하나님을 믿으면 이렇게 믿어야 된다고. ‘잘 믿으면 고난이 없는데 잘못 믿으니까 병에 걸렸다.’ 이게 바로 사망에 머물게 하는 선악 체계입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팍팍 내고 있어요. 욥의 친구 세 명이요. 거기에 대해서 욥은 “이상하다, 이상하다. 나도 그 논리를 다 알고 있는데 이것은 이상한 거야. 이것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거야.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야.”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이 “거봐. 저 잘난 체하는 거 봐. 교만한 거 봐. 너는 더 맞아야 돼.”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욥과 욥의 친구들로 축소판을 만들어놨습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 구약에서 욥이 이렇게 고난받으면 욥이 영생을 얻습니까? 아닙니다. 고난받는다고 영생 얻는 게 아니에요. 욥에게 다른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뭐냐? 욥기 38장에 하나님이 찾아와요. 이제 대화는 인간하고 안 합니다. 인간하고 대화하면 안 돼요. 누구하고 하느냐?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과 욥이 대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찾아왔습니다. 대화하는데 욥이 주님 앞에서 할 말이 없어요. 그동안 나불나불나불 사람과 만나서 사람하고 대화했죠. 사람하고 대화했는데 욥이 뭘 몰랐느냐 하면, 욥은 내가 누군지를 몰랐던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제로 산부인과에서 그런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도 그런 내용의 만화를 많이 봤어요. 신생아가 태어나면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서 애를 거꾸로 매달아서 엉덩이를 간호사가 톡톡 치면 아이가 운다는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제가 그 현장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욥을 거꾸로 딱 들어요. 그동안 욥은 하나님, 곧 위를 향하여 살았어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앞에 죄짓지 말라고 자식들 위해서 기도하면서 늘 하나님과 하나가 돼서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을 털 뽑힌 통닭처럼 거꾸로 매달아서 때립니다. 땅에서 새로 시작하게 만들어요. 네가 바르게 산다고 그게 생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전히 선악과에 준해서 하나님을 파악하는 거예요.

선악과에 준해서 하나님을 파악하게 되면 하나님, 하나님, 주여, 주여, 해도 자기 이름에서 자기가 못 빠져나와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위신, 자기 자신에게 평생을 목숨 걸고 투자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신앙적으로 투자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영생 얻기 위해서요. 그것은 지금 하나님을 못 만나서 그래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니엘, 노아, 욥, 그중에 하나가 욥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욥은 하나님 만날 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욥을 그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축소판이에요, 축소판. 처음에 욥은 아담이 되고, 그다음에는 두 번째 온 아담, 예수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제물을 바치고 대신 기도함으로써 친구들이 죄 사함을 받는 그 관계로 인하여 욥기는 끝납니다.

그러니까 욥이 ‘나는 인내해서 구원받아야지.’ 이런 건 욥기에 없어요, 욥기에 없습니다. 욥이 무지할 때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정작 마지막에 하나님을 폭풍 가운데서 만날 때는 이것은 욥의 인내가 아니었고 장차 오실 주님의 인내였습니다. 주님의 존재로 인하여 여파, 파도가 일어서, 구약 때 멀쩡한 욥에게 십자가의 고난이 여파로 퍼져서 욥 시대에 욥 자신이 인내와 고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신약은 어떻습니까? 신약에 가기 전에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선지자로 오신 분의 이야기를 또 봐야 해요. 구약과 신약 사이입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세례요한입니다. 자 세례요한에 대해서 간단하게 넘어갑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아픔과 고난에 그 인내에 동참 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야말로 오실 주님을 위해서 목숨 걸고, - 실제로 목이 날아갔잖아요, 순교했잖아요- 실제로 순교할 정도로, 사람들이 원하는 온도계가 아니고 주께서 지시하는 온도계처럼 그 시대에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심판의 날이 가깝다.’ 털옷 입고 광야에서 거침없이 외쳤습니다.

그러면 누가 보더라도 ‘아, 저 세례요한은 저 외침으로, 순교로 인하여 구원받겠다’라고 생각하겠지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몰랐어요. 주님의 인내를 몰랐습니다. 첫 번째 인내뿐이었어요. 그게 마태복음 11장 2-6절에 나옵니다.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난 뒤에 제자를 보내서 의심의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

세례요한이,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는데, 분명히 메시아는 떴는데, 왔는데 불의 심판이 없어요. 불의 심판이 없다고요, 성령세례도 없고.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아직 살아있으면서 의심이 든 거예요. 그래서 제자보고 가서 물어보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4-6).

여러분, 소경이 왜 봐야 하지요? 앉은뱅이가 왜 걸어야 하지요? 문둥병자가 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까? 귀머거리가 왜 들어야 하고, 죽은 자가 왜 살아나야 합니까? 가난한 자가,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자가 영생을 얻는 그런 일은 왜 일어나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해야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자기자신의 이름을 빼지를 못하니까,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사니까,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 도로 돌아오면 천국에 못 가니까, 내가 아닌 나로 돌아가야 하니까 주께서는 이미 자기가 문둥병자고 저는 자고 소경이라고 확정이 난 자에게 예상 밖의 결과를 줘버린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효과입니다. 내가 예상한 나가 아니라 이제는 전혀 나답지 않은 나, 생각지도 못한 나, 엉뚱한 나로 변해질 때 우리는 거기에 내 행함이 끼어들 여지가,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아닌 ‘나’예요. 이제는 나와 영원히 바이바이 한 ‘나’예요. 내가 나한테 생소해요. ‘뭐야 나? 내가 왜 눈을 떠야 해? 앉은뱅이가 나인데 내가 왜 걸어야 하지? 귀머거리가 나인데 내가 왜 들어야 하지? 죽은 내가 왜 살아나야 하지?’

여러분, 죽은 내가 살아난 입장에서 떡볶이에 치즈 넣고 말고 그것 가지고 논쟁할 필요 없잖아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게 어떻게 살아도 거기에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버려야 될 나인데 거기에 왜 신경을 써요? 이미 얻어버린, 취득된 나가 있는데요. 세례요한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죽었지요. 세례요한이 구원받았는지 그것은 구약 때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 없어요.

끝으로 그러면 신약 때 성도는 주님이 어떻게 다루는가? 그게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없는 친구를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요. 친구를 만들고, 없는 데서 생긴 친구를 위해서 주님이 목숨을 바치면 주님이 목숨을 바쳤다는 그 공로가 아버지를 통해서 친구 아닌 그 친구가 주님의 친구로 등록이 되면서 같이 영원한 천국에 가는 영생의 백성이 됩니다.

요 프로젝트를 주께서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친구는 없는데 주께서 하시는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저 “주님, 우리 함께 갑시다. 주님도 있고 나도 있으면 됐잖아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네가 나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우리 같이 갑시다.” “아니! 너는 나와 떨어져야 해. 하늘나라에 네 자리 없다. 너 그거 모르지? 하늘나라에 네 자리가 없어.”

하늘나라에는 예수님 자리밖에 없어요. 예수님 자리밖에 없는데 이제는 예수님 친구의 자리를 예수님이 만들어내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도 똑같은 인내와 똑같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알려줬는데 변화산에 두 그룹이 생겼어요. 주께서 변화산에 올라갈 때 변화산에서 해처럼 빛날 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 땅에서 열두 제자 가운데서 세 제자만 뽑아서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올라가 보니 거기에 없는 데서 사람이 생겼어요. 누구냐? 모세, 엘리야, 그리고 해같이 빛나는 예수님 그 세 분이 한 그룹이 되고, 지상에서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올라온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따로 이쪽에 따로 구분된 그룹이에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함께 삽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그러니까 베드로가 두 개의 인내를 결과만 싹 먹겠다는 거예요, 결과만. 여기가 좋사오니. “좋~다, 정말! 해같이 빛난다. 눈부시다. 제가 맨션 세 개 지어드릴 테니 같이 삽시다.” 믿음 있어 보이지요? 그거 아닙니다. ‘주님이 너무 좋아요’하는 그것이 여전히 자기 이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자기표현이에요. 인내가 없어요.

그런데 같이 있던 그 엘리야, 모세는 이 땅에서 참 죽을뻔했어요, 죽을뻔했습니다. 말도 못 할 수모를 겪었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두 사람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시체가 없어요. 모세 시체 못 찾았습니다. 엘리야도 시체 없어요. 불수레 타고 하늘로 그냥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인내했던 사람들입니다.

난데없는 인내, 알 수 없는 인내, 내가 원인으로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지는 인내, 그 인내는 이거예요. ‘주님이 심판주 맞습니다. 세상 작살나야 됩니다.’ 구약 때 엘리야와 모세가 실제로 자기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 세상 좀 작살내 줬으면 좋겠다’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들이에요.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표현할 수 없는 낯선 표현이에요. 그게 선지자의 인내입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의 인내로도, 고생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모세와 엘리야가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내가 순교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 지셔야 저희들이 주님의 친구가 됩니다.” 왜? 주님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치기 위해서 이 땅에 왔거든요.

친구는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통해서 없는 친구 새로 만들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두 가지 인내를 했다는 것을 말해주면 그 성도는 이제부터 순교 같지도 않은 순교를 하게 될 겁니다. 밥 잘 먹는 순교, 장사 잘하는 순교, 잠 잘자는 순교, 농땡이 부리는 순교, 너무 순해서 순한 맛에 하는 순교.

그러면서도 그 표현은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표현들, 욥의 인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아, 대한민국은 심판받아 마땅한 세상인 것을 주저 없이 외칠 수 있는 낯선 표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의 보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여, 언제 옮겼습니까? 언제 제가 영생을 받았습니까?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십자가와 부활, 이 효과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했는데 바로 이런 사실로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 현상이 욥의 인내요 주님의 사랑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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