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당한 진실 요한이서 1:1 261015
서울강의20261015a 요한이서 1장 1절(폭로당한 진실)-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이서 1장 1절, 거기에 보면 “장로는…” 이렇게 되어 있죠.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 이 장로는 사도 요한을 이야기합니다. ‘장로’ 그다음에 나온 단어가 상당히 특수한 단어입니다.
예수님 계실 때에 예수님 위에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죠. 예수님께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가 있고, 그다음에 장로가 있고 장로가 누구한테 편지를 보내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는 당사자가 택하심을 입은 여성이에요, 부녀니까. 그리고 그 가족, 자녀들.
여기 ‘택하심’을 받았다 했으니까… 장로가 편지를 할 때 장로는 예수님의 사도잖아요. 사도니까 요한복음에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예수님과 장로 사이) 선택이 또 있겠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자여” 해서 또 선택이 있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선택, (예수님과 장로 사이에) 선택, 그리고 (부녀와 그 자녀들) 택하심.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선택이 그대로 예수님과 사도 요한 사이의 선택에 주어졌고, 그 동일한 것이 이 땅에 택하심을 받은 자로 여성들과 그 가족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1.선택을 받지 아니하면 편지받을 자격도 없다. 그 이유가, 2.선택이 모든 말씀을 해석한다. 이 ‘선택’이 해석하는 거예요.
2번의 ‘선택’과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선택이 동일한 선택이고, 예수님과 장로인 사도 요한 사이의 선택이 역시 동일한 선택이에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선택과 예수님과 장로 사이의 선택과 동일하니까요. ‘선택받았다’는 것은 ‘구원받았다’ 단순히 그런 의미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모든 것을 비로소 이해하면서 끼어들 수 있는 신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이 선택, 택함 받은 자를 다른 말로 ‘사랑받은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택함 받은 이유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사랑을 여기 택함 받은 자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선택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사랑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 제공된 사랑을 요한일서, 이서, 삼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새 계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새 계명.
6절에 보면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새 계명인데 행하는 것이라 하니까 ‘새 계명대로 행하라.’ 이게 아니고, ‘새 계명이 자체적으로 행함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죠? 이게 뭐냐 하면, 이 전체가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이유’에요. 세상에서 배제된 이유. 이게 무슨 뜻인지 제가 아주 알기 쉽게 말씀드릴게요. 슬레이트 지붕 있잖아요. 슬레이트 지붕 위에 뭐 수리한다고 올라갈 때 주의해야 돼요. 단단한 나무 뼈대를 밟아야지, 슬레이트 지붕 있으니까 똑같이 견딘다 생각하고 아무거나 밟으면 낡은 슬레이트가 무게를 못 이겨서 무너지겠죠. 그럼 추락하겠죠. ‘슬레이트 지붕이 뚫려서 추락된 자만이 선택된 자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결국 지금 이 이야기에서 마지막에 나온 결론이 뭡니까? ‘추락하지 않는 자는 성경을 이해 못한다.’ 이런 뜻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추락되지 아니하면 성경을 이해 못한다. 잘못 짚어서 뻥,하고 이 세상에서 꺼져버렸어요. 남들 사는 세상에서 홀연히 내가 쑥, 배제되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배제된 자를 통해서 세상 읽기’. 세상에서 제외된 자를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서 일관된 거예요.
“빛이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 빛이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해요. 요한복음 1장 5절인가 나와 있죠. 그럼 이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두 개의 온도계가 있다 합시다. 하나의 온도계는 그냥 온도 그대로를 나타내는 온도계이고, 또 하나의 온도계는 주인이 원하는 온도를 보여주는 온도계. 둘 중에 어느 온도계가 괜찮은 온도계죠?
“온도계야, 지금 한 25도라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노?” “주인님, 주인님 말씀대로 25도 딱 맞습니다.” 이렇게 하는 온도계가 필요 있습니까, 필요 없습니까? 하등 필요 없죠. 필요 없어요. 이 세상은 인간이 원하는 메시아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진짜 온도계는 “주인님이 뭘 원하든 지금 온도는 영하 10도입니다.” 이거는 뭐 눈치코치 안 보고 곧이곧대로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온도계가 보여주는 것은 이거예요. ‘폭로된 진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진실 있잖아요. 그거는 폭로가 안 된 거예요. 슬레이트 위에서 뭐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끼리 통용된 진실은 폭로된 게 아니에요. 아무도 그 가운데 세상 밑으로 꺼져버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그 진실이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좋게 하는 진실이죠.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서로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좋은 게 좋다는 식이죠.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 12:43) 세상은 다 그렇게 돌아가요. 각 사람은 그 세상의 일부가 되고. 그래서 배제된 자가 없고 소외된 자가 없이 인간들에게 납득되는 그 진리, 인간세계에 꼭 필요한 진리-그걸 보통 지식 또는 정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세계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굳이 누가 배제될 필요가 없어요.
아이큐가 뭐 150돼서 노벨상 받고 발명하고 하는데 일부러 죽일 이유가 없잖아요. 죽일 이유가 없잖아요. 오히려 다독거려주고 연구하라고 연구자금 대주고 거기에 합당한 권한과 자유를 보장하면서 인류에 공헌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 이게 그동안 인류가 자기를 지켜왔던 방식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그 인류에 의해서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그것도 비극적으로. 그 사라진 분에 의해서 폭로된 진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유일하게 선택된 자를 너희가 살해했다.’ 그게 바로 폭로된 진실이에요. 하나님과 유일하게 연관되어 있는 자를 죽였다. 그 분이 어떤 관계인데? 그 분은 아버지로부터 선택된 자다. 그때 나온 단어가 뭐냐 하면 ‘선택’이에요. 이 선택과 동일한 선택을 받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 요한이서에 제일 먼저 “장로는” 그다음에 나온 단어가 뭡니까?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이렇게 되어 있죠?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 이렇게 나와 있어요. 방금 했던 이 긴긴 이야기, ‘선택을 받지 아니하면 편지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에서 이 ‘선택’에 뭘 집어넣어야 되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선택했죠. 선택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배제 당했죠. 그래서 배제된 자를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해요.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폭로된 진실’이에요. 폭로된 진실. 입을 막을 수가 없어요. “입 다물어! 입 다물어! 그럼 또 죽는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을 해도 이 진실은 가릴 수 없습니다. 온도계가 주인 입맛에 맞는 온도계가 아니고, 진짜로 온도 그대로를 말해주는 온도계. 인간이 막 틀어막아도 현재 온도를 진실 그대로 나타내는 온도계.
그게 누구냐 하면 택함을 받은 부녀들이에요.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장로가 택하심을 입은 부녀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선택의 같은 연결고리가 동일하게 이 세상에서 놀랍게도 똑같이 작동 중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선택이 없이는, 다른 말로 이 세상에서 배제된 자가 아니면 이 성경을 이해 못하고 그리고 세상도 어떤 세상인지 파악할 능력은 없습니다.
여러분한테 묻습니다. 세상 제대로 파악 할래요, 아니면 세상에서 배제되기 싫어요? 어느 쪽 하실래요? 이건 뭐 여지가 없어요. 가짜 온도계 사가지고 위로 받을래요, 아니면 진짜 온도계로 살래요? 답변해보세요. 어느 쪽입니까? 진짜 온도계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이 둘을 조심하면 됩니다. 이 둘은 같은 게 아니거든요. 1.상관관계냐? 2.인과관계냐?
이 둘은 차이가 있어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는 달라요. 인과관계는 원인과 결과에요.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외치는 진리구성방식이고 논리방식이죠.
상관관계라는 것은 인과관계와 달라요. 상관관계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으면 여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특히 그 변화는 새로운 환경이 주어졌을 때 오잖아요. 주어진 이 모든 것, 변화와 환경이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에요. 원인과 결과로서 족집게처럼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다, 그건 인과관계죠. 상관관계라는 것은 내가 파악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이 환경이라는 관계에서 나는 빠져요. 빠진다는 말을 아까 했던 말로 하면 뭡니까? 나는 철저하게 배제된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일체 책임이 없다. 뭘 알아야 책임을 지죠.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게 성립 안 된다니까요.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고, 잘해서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잘하면 천국/ 못하면 지옥, 이거는 인과관계에요. 그 인과관계에서 형성된 것이 인간세계의 종교고 그게 바로 선악체계인데 그런 선악체계 말고, 상관관계라는 것은 우발적이에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내 행동과 아무 연관 없이 벌어져버린 거예요. 발생된 거예요. 그 이유는, 내가 원하는 온도를 하나님이 제공할 필요가 없고요. 내가 어떤 온도, 10도를 원하든 20도를 원하든 상관없이 주님이 알아서 우발적으로 세상의 진실과 실정과 온도를 주께서 상관관계에 의해 제공한 겁니다.
그 상관관계가 뭐냐?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선택 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이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이라는 아버지와 아들의 환경인데, 세상에서 배제된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그 환경만이, 그 상관관계만이 거기서 새로운 백성들을 모집하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함으로써 그 여파로 택함 입은 자들이 여기서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택받는다고 우리가 할 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인과관계 아니라니까요. 내가 끼어들어서 내가 하는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내가 획득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이 말이죠.
택했다는 것은… ‘택해주세요’ 하니까 선택했다, 이것은 인과관계죠. “나는 선택을 원합니다.” “그래, 선택해줄게.” 이건 인과관계를 말하는 거고요. 아버지 하나님이 택한 아들이 이 땅에 온 것은 기존의 모든 인과관계, 원인과 결과의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심판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은, 더 이상 심판받을 그러한 계명, 심판받을 그런 인과관계는 없다. 내 앞에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
마태복음 6장 13절, 주기도문에 나온 내용인데요. 13절에 예수님께서 ‘성도는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이 된다.’ 그것을 주기도문으로 설명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세계에서 모릅니다. 어떤 관계인지 인간들은 몰라요. 왜냐하면 이미 선택되지 못한 악마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선택되지 못한 관계로 인간들을 지배했기 때문에요. 선택되지 못한 인간세계에서는 상관관계는 없고 인과관계밖에 없어요. ‘바르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하면 저주 받는다’ 구약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된 거예요. 율법은 그런 뜻이 아닌데 율법에 대한 인식, 받아들이는 인식은 그랬어요. 그들은 그걸 하나님이 원하는 계명이라고 본 거예요, 계명.
그럼 그 계명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그건 옛날 계명이죠.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설교에 나오는 대목을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그 점에 대해서 한번 설명해보세요. 5장 21절,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이 틀렸다는 겁니까, 맞는다는 뜻이에요?
이거 누가 말한 거예요? 옛사람이 이야기한 거죠. 예수님이 옛사람을 거론한 것은 이게 맞단 말입니까, 틀렸단 말입니까? 틀렸다는 말이죠. 왜? 옛사람, 인간들끼리 소통하는 말이 맞아버리면 뭐가 성립 안 되느냐? ‘폭로된 진실’에서 ‘폭로’라는 의미가 없어져요. 폭로가 무슨 뜻입니까? “너희 아무도 몰랐지? 그치? 내가 발설하기 전까지 너희는 몰랐잖아.” 이게 폭로잖아요.
그런데 진실을 폭로한 분이 인간세계에서 어떻게 됐어요? 배제 당했잖아요. 십자가에서 사형당해 배제 당했잖아요. 배제당할 주님께서 일찍이 십자가 돌아가시기 전에 산에 올라가서 설교하신 내용이 이거에요. “옛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인치 말라. 누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 이 말이잖아요.
아까 제가 물었잖아요. ‘누구든지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면 심판받는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죠? 틀렸다면 정답을 이야기해보세요. 그럼 맞는 건 뭡니까? 정답 말씀드릴게요. ‘누구든지 지금 심판받을 살인자다.’ 그런 뜻이에요. 누구든지.
조건이 붙는 게 아니에요. ‘살인할 경우에만 심판받는다.’가 아니라 ‘누구든지 태어난 그 자체가 살인자요, 하나님의 지옥의 처벌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게 새로운 겁니다. 이게 새 계명이에요. 선택된 자만 파악이 돼요. 그래서 22절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누구나 어떤 자다? 살인자며 그 심판이 뭐냐? 지옥 불에 들어간다.
27절도 마찬가지에요.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잠재된 간음성이 음욕이라는 마음을 통해서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일 뿐이지, 그 사람은 한 번도 간음한 적 없다는 이야기는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33절, “또 옛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레위기 19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민수기 30장 2절에도 나오고 신명기 23장 21절에도 나오는 말씀이에요.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레위기 말씀을 그들은 봤습니다. 율법이니까. 보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뭐냐? “맹세한 것은 지키라. 이거는 눈에 흙이 들어와도 진리 맞다.” 주장했거든요.
주님께서는 “아닌데?” “왜요?!” “네가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 네가 원인으로 들어갔잖아. 인과관계잖아. 인과관계 자체가 이거는 마귀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인과관계 들어가서 율법 해석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하는,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기고 우기는 인간들, 옛사람들이 하는 주장이다. 내가 이야기할게. 인과관계를 빼는, 네가 끼어들지 않는 관계에서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너희들은 맹세에서 나가! 맹세하지 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맹세는 누가 합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상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관계에서 이미 맹세가 뭐냐, 간음이 뭐냐, 살인이 뭐냐가 다 규정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이 모든 율법을 원래부터 다 이루었어요. 그러니 사랑이 먼저 있고 율법은 나중이죠.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인간에게 배제당하고 인간에게 미움당하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그 외에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외에는 새 계명, 사랑이 아니에요.
따라서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 둘 다 세상에서 배제 당하자.’ 이런 이야기죠. “오늘 뭐 먹을래?” “돈가스 먹자.” “그래, 오늘은 돈가스 먹으면서 배제 당하자.” 내가 없어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으라.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표로. 괜히 얼쩡대지 말고, 세상에서. ‘남들이 날 어떻게 봐요, 나는 남들에게 이런 자랑거리 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그렇게 얼쩡거리지 말고 그냥 없어져요. 없어지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 대신에 누가 누구를 선택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선택해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뭐를 만드느냐? 내가 상상의 나를 만들어요. 상상의 나를. 상상의 나를 내가 선택해서 나와의 일치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기 상상의 나는 인과관계에요.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로서 이 상상의 나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능성이 높아지는 방법은 뭐냐? 내가 원하는 근사한 내가 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장점은 채우고 약점은 버리고’.
인간은 누구든지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부모가 만들어준 나의 모든 성격과 신체의 문제, 인물, 그리고 아이큐 등에 대해 자아가 점점 발전함에 따라 점검에 나서잖아요. 점검에 나서면서 부모를 원망하는 게 점점 늘어나요. 내가 보기에 내가 완벽하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니라서 내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거, 그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고 약점은 감추고 버리기로 애를 써요.
그래서 부모가 준 것을 내가 개조하죠. 내가 개조해요. 개조하는데 약점은 버리죠. 그럼 내가 버린 약점은 어디 가 있겠어요? 쓰레기장에 가겠죠. 주님은 이 쓰레기장을 뒤지고 있어요. 그러면 성도는 뭐라 합니까? “주님, 거기서 뭐하십니까?” 이렇게 되겠죠.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주님, 거기서 뭐합니까?” “네가 버린 그것이 너의 본질이다.” 인과관계, 그리고 선악관계 네가 아는 게 그런 것들밖에 없는 거예요. 그 쓰레기를 뒤져요. 인간은 버리잖아요. 주님은 그걸 받아들여요. 그걸 받아들이면서 죄 사함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나, 내가 나를 배제한 그걸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버려요.
성도가 혼자 산에 가서 도 닦으면 안돼요. 인간관계를 통해서 뭘 하느냐 하면 자기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자아를 만드는 데 있어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어요. 인간관계를 통해서. 약점은 감추고 장점은 극대화시키는 그 작업을 평생 동안 해왔거든요. 돈 없는 여자 같으면 돈 있는 남자를 만나서 내가 부잣집 마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 남자 만나기 위해 모든 헌신과 노력을 다하고 양보하고 이래요. 또는 키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 만나고, 키 큰 사람은 키 작은 사람 만나고.
어쨌든 내가 원하는 자식, 내가 원하는 가정환경을 내가 손 안대면 누가 도와주겠느냐, 하는 일념으로 자기가 자기와 투쟁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청소할 게 생기잖아요. 그래서 주께서 알아서 그 뒷청소를 해줄 때, 성도가 성령을 통해서 그걸 발견하게 되면 성도는 그 주님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더 주세요! 더 채워주세요! 도와주세요!’ 말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주님을 일대 일로 만나는 게 아니고, 내가 버린 쓰레기장을 뒤지고 있는 그 주님한테 그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거 달라고 떼를 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때 인간이 성도로 나오는 것은 뭐냐?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날 때 “주여, 누구십니까?” 달리 이야기하면 “주님 거기서 뭐하십니까?” 이런 뜻이죠. “나는 네 핍박을 받고 있는 중이지, 뭐.” 너는 잘한다는 짓이 나한테 전부 상처가 되는 짓이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할 말이 없죠.
그래서 내가 잠시 어떤 노래가사를 적어와 봤습니다. ‘당신의 고운 눈매에 할 말을 잊었지만’. 이 가사가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 하면요. ‘나는 고운 눈매를 찾고 있었어. 고운 눈매를 나 원했어.’ 이게 아니고, 그 사람을 딱 볼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학력이나 돈이나 자질이나 성격이 문제 아니고 저 고운 눈매만 있더라도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거예요. 처음 안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발견하고 성도된 사람은 뭐냐 하면 예상도 못한 사실을 접하면서 ‘아, 이게 성도구나.’라는 것을 할 말을 잊어버리면서 발견할 때,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것은 십자가로 일시에 다 알아버린 거예요. 얼마나 내가 헛된 것만 찾아다녔는지.
헛된 게 뭡니까? 우수한 내가 되는 이런 헛된 짓만 했는데, 이게 내가 원하는 건데, 주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일체 주시지 않고 생각도 못한 것을 주셨을 때 “너는 네 한 걸로 인하여 시험에 들지 말라. 네가 어떤 일을 했던 그건 너의 올무가 될 수 없는 일이다. 왜? 예상 못한 새로운 것을 내가 네 앞에 나타냈으니까.”
마귀는 시험케 합니다. 채찍 들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네가 소원하는 네 자신이 되겠어? 더 열심히 해야지!” 막 때리고 막 몰아붙이고. 마귀가 나를 몰아붙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내가 나를 몰아붙이는 거예요, 내가.
양극성 성격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좋으면 좋다 하다가 슬프면 또 흑흑흑 울고. 도대체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채찍 들고 후려치니까 무슨 짓을 해도 얻어맞게 되어 있어요, 그게. 무슨 짓을 해도. 잘하면 잘한다고 교만하지 말라고 때려버리고 못하면 못한다고 더 노력하라고 때려버리고. 겸손하라고 겸손으로 때려버리고.
이러니 현재 내 뜻, 내 성에 안 차는 내 모습 된 것의 원인이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마귀의 시험든 거예요. ‘열심히 노력해야지’만 있지, 감사와 고마움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할 말을 잊어버린 그러한 순간과 그러한 사태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계속 노력만 해요, 노력만. 열심히만 한다고요.
다시 한 번, ‘당신의 고운 눈매에 할 말을 잊었지만은~’ 끝! 그거면 충분해요. 십자가 피 흘림 앞에서 평생 할 말이 다… 우리는 할 말이 막혀버립니다. “이거였어요, 주님! 이거였군요.” 다시 말해서 ‘주님이 이런 분이군요.’도 알고, 그다음에 ‘마귀가 이걸 못 보게 해왔군요. 이 사실을 못 보게 했군요. 그동안 나는 내가 잘 되는 게 진실인 줄 알았어요. 이게 정의인 줄 알았어요. 이게 인생 잘 사는 건 줄 알았어요. 내가 훌륭하게 되는 게. 내가 행복한 게.’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해왔습니까? 내게 도움 되는 것.
그러니까 시험 든다는 것은 내가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해야 나한테 이익이 되고 어떤 행동을 조심해야 손해가 되지 않고 이익이냐, 그게 시험 든 상태에요. 주기도문에 “우리로 하여금 시험 들게 하지 마옵소서”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죠. “왕을 바라보고 왕 이야기 해야지, 너 이야기를 왜 하느냐, 내 앞에서. 네 이야기하지 마라.”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할 말을 잊어버린 그 기쁨의 순간이 그냥 스톱 되고 늘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 칠판지우개 길이가 한 20cm라 합시다. 20cm자로 재보니까 20cm에요. 지우개 길이하고 자의 20cm하고 일치되었죠. 똑같죠? 똑같으면 똑같다고 이야기하는 게 누구입니까? 나죠. 그럼 ‘지우개 이거 몇 cm일까?’하는 그 시간대의 나하고 ‘자로 재봐야지. 20cm자로 재보니 딱 맞네.’라고 했던 나가 이미 시간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차이나는 지나간 시간이죠.
나는 똑같지 않습니다. 똑같은 것은 주님만 똑같지, 건방지게 내가 주님처럼 똑같으면 안돼요. 주님이 똑같은 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들을 우리 인생에다 계속해서 유발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관계가 무슨 관계냐? 상관관계에요, 상관관계.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있을 때 예수님과 십자가 질 때 예수님이 똑같습니까? 인간들 보기에는 똑같지 않죠. 하나는 아기고 하나는 어른이잖아요.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왜? 아버지와 아들의 그 상관관계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게 바로 선택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죠. 안 변해야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변하면서 사랑이 나타나요. 사랑이 펼쳐지고 증명돼요, 변하면서. 어떤 경우라도 사랑은 한결같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변화 일어남에 여러분들이 호들갑떨고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자기가 밀어준 자기의 동질성,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의리 있는지. 한결 같이 나는 두산 야구팀을 응원한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어제 LG한테 졌는데? ‘아우, 짜증나.’ 이렇게 함으로써 ‘주여, 영광입니다.’ 이게 안 되고, 짜증난다는 말은 무엇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확정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붙들고 있는 거죠. 그게 바로 우상이잖아요.
달라져도 괜찮은데 달라지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마귀의 시험든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왜 배제하느냐 하면, 달라지지 않는 주님의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나 되기 위한 인과관계는 가차없이, 그걸 거침없이 배제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방해되니까요.
주님의 하나 됨과 변함없음에 내가 괜히 나서고 설쳐대가지고 주님이 주신 한결같은 은혜와 그 복음을 나 잘남으로 인하여 부정해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지금 방금 이야기한 이걸 지금부터 두 번째 시간 끝까지 제가 설명할 건데요. 이 설명을 위해서 요한복음 1장부터 요한복음 21장 전체가 다 필요해요. 심지어 요한계시록까지 필요해요.
오늘 본문에서 “장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장로는. 장로, 사도 요한입니다. 장로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없으면 장로가 성사 안돼요. 장로라 하는 것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있는 겁니다. 그럼 교회란 뭐냐? 교회는 여기 안 나왔지만 요한이서에서 교회는 ‘택함 받은 자의 집단’ 또는 ‘택함 받은 자 서로의 상관관계’ 이게 교회죠.
그리고 그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사람은 장로. 높은 자리라 하는 것은 힘이 세다는 게 아니라 계시를 전해야 될 위치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장로입니다. 전하는 자가 더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고 전하는 내용 그 앞에서 어떤 사람도 위대한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전하는 내용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상관관계만 고스란히 남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게 왜 남아있어야 되는가?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다 변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변하는 것이 마땅함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확고한 정체성 유지에 내가 더 이상 에너지를 소비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너는 뭐 인간이 맨날 바뀌냐?”하면 “택함 받은 건 안 바뀌었는데?” 이러면 돼요. “사랑은 안 바뀌었어.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안 바뀌었어.” “그 증거가 뭔데?”하면 “내가 바로 주님의 훼방자이고 폭행자이기 때문에.” 주님과 나를 비교해볼 때, 내가 그동안 주님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로 새롭게 나와의 상관관계가 이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나 죄인으로 인해 피해 받은 의인이고. 이 상관관계로 인하여 그것이 일치되기 때문에 충분하게 얼마든지 나는 죄인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옛날 알았던 죄를 지으면 또 나의 일치성이 되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항상 예상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해요. 시험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상 못한 일을 하게 되면 우리가 예상을 못했잖아요. 예상을 못했으니까 우리가 전에 알던 나의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어 버려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까요? 매사에 있어서 우리는 철저하게 배제당합니다. 배제당해요. 뭔가 내가 처리하려고 하면 우리는 슬레이트 밑으로 푹 꺼져서 빠지게 돼요. “빠져라, 너!”하고 우리를 빼버립니다. 그래야 우리가 시험에 안 들어요, 어떤 일에 대해서.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그랬죠.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내일이 없다,가 아니고 내일 치의 일은 또 내가 알아서 네가 예상 못한 낯선 환경을 너한테 제공해줄 테니 그 날 그 날을 주님의 그 나라 의를 드러내는 날로 생각하고 더 이상 네가 내일까지 네 가치를 이어갈 생각하지 마라. 내일이 없다,가 아니라 내일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내일까지 신경 쓸 그러한 자격 자체가 안 된다는 이야기죠.
두 번째 시간에는 제가 요한복음 1장부터 설명하면서 어떻게 요한이 배제되느냐를 알려드릴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60년 후에 쓴 책이에요. 어떤 사람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 초대교회 전승집에 보게 되면 거기서 에베소로 가서 에베소에서 복음 전했다는 그런 설도 있어요. 그건 성경에 없는 거니까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데.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서 요한이 복음의 주인공으로서 배제됨으로써 요한복음을 쓸 수 있었던 겁니다. 나를 배제함으로써 요한복음이 되는 거예요. 제대로 복음이 되죠, 제대로.
그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3절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죠.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무엇을 집어넣느냐? “나는 십자가 안 졌다. 알고 있지?” 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나는 십자가 안 진 것 알고 있지? 그 대목을 보면 13절에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물어요. 박혔어요, 안 박혔어요? 안 박혔죠.
나는 안 박혔다는 말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뭡니까?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그 구원의 능력은 나에게서 이 사도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어디서만 나온다? 출처가 십자가 지신 십자가의 능력에서만 그 출처가 나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앞에서 얼쩡거리는 것들은 다 비켜라 이 말이죠.
“비켜, 비켜, 다 비켜! 구원의 능력도 안 되는 것 다 비켜! 좀 보자.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자. 십자가만 좀 보게 하자.” 그게 바로 폭로된 진실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61015b 요한이서 1장 1절(폭로당한 진실)-이 근호 목사
‘선택이 그 사람을 그 세계에서 배제시킨다.’ 선택이 그 사람을 그 세계에서 배제시키죠. 배제시키면, 이 사람은 슬레이트 지붕 잘못 밟아서 추락하겠죠. 추락된 자만이 구원됩니다. 이 세상에서 추락된 자만이 구원돼요. 추락이 되어야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비로소 보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어떤 세상인지를 알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인간이 꾸며낸 세상이에요. 가짜입니다. 꾸며낸 거예요. 그 꾸며낸 세상의 특징은 실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세계에요, 자기가. 이왕 이 땅에 태어난 거 실패는 딱 싫고 불행도 싫고 비극도 싫고, 나는 온전해야 되고 내가 원하는 그 레벨까지 나는 나를 밀어붙여서 내가 내 모습을 보고 이 땅에 내가 성공한 자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때 누가 나타났는가? 세례 요한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의 차이점을,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살펴봐야 돼요. 세례 요한이 왔을 때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따랐어요. 너무 획기적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왜 따랐을까요? 실패하기 위해서 따라갑니까, 성공하기 위해서 따라갑니까? 성공하려고 따라가는 거예요. ‘야, 저분이 선지자 맞다.’ 이런 식으로 따라가는 거예요.
요한복음을 사도 요한이 썼잖아요. 십자가 지고 난 예수님과 헤어진 뒤 60년 후에 쓰면서… 요한복음 보기 전에 제가 먼저 이야기할게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잖아요. 요한복음 안에서 사도 본인을 어떤 식으로 규명하고 있는가 보자는 거예요. 어때요? 성공자입니까, 아니면 실패자로 보겠어요? 미리 감을 한번 잡아보세요. 자기를 성공자로 봅니까, 실패자로 봅니까? 실패자로 보죠!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수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에 보면 마지막 쿠사리, 핀잔을 누가 받느냐 하면 사도 베드로가 받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핀잔의 대상이 돼요. 베드로가 사도 요한보고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그거 뭐 관심 둘 인간도 없는데 네가 왜 관심 두냐?” 그런 이야기거든요. “나 봐, 나! 사도 요한보지 말고 나 보라고.” 그래놓고 24절,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누구라고? “이 사람이라” 나, 나. 아무것도 아닌데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야. 누구 앞에서? 주님 앞에서.
왜? 사도인데 아무것도 아닌 이유가 뭡니까? 우발적으로 모든 일, 모든 상황을 누가 직접 만듭니까? 우리 주님이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주님 일에 자기가 협조하고 이런 게 아닙니다. 주님이 상황을 만들어요.
이제 요한복음 1장을 보게 되면 1장 35절,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이 요한은 사도 요한이 아니고 세례 요한이죠. 세례 요한이 있는데 세례 요한 제자들이 있다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그 두 제자가 그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을 안 따라가고 졸지에 누구를 따라갑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예요. 교인 두 명 또 뺐겼어, 교인 두 명. 그 두 사람이 형제간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 형 안드레에요. 시몬과 안드레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베드로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시몬과 안드레가 한 동네 사람 빌립을 만나요, 44절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 지금 베드로, 안드레는 원래 누구 제자였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 되었다. 이때까지 두 제자는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망하게 된다는 생각, 이 땅에서 추락하고 배제 당한다는 생각은 꿈도 못 꾸고 도리어 ‘보다 더 똑똑하고 보다 더 확실한 분을 스승으로 모셔야 나한테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서 따라간 거예요.
그러면 이 사도 요한은 뭐냐? 사도 요한은 야고보와 형제에요. 야고보와 형제인데 우레의 아들이라고 해서(막 3:17) 성격이 뭔가 좀 급했던 모양이죠. 이 야고보와 요한은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엄마의 출세욕이 대단했나 봐요. 마태복음 20장 20절,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아주 여기서 딱 지목해서 명해달라 이 말이에요.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간인데 야고보가 형이죠. 요한은 동생이고. 그런데 둘 다 어부에요. 세베대는 그냥 보통 어부가 아니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어부. 선체, 배를 갖고 있던 사람이에요. 직원들도 있었어요. 거기 갈릴리에서 고기 잡다가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예수님을 따라와 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안드레,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고. 여기에, 세베대의 두 아들은 고기 잡다가, 자기 전문직인데 그걸 놔두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망하는 길로 간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들은 나름대로 세상에서 자기 미래를 예측한 거예요.
‘이런 일이 발생될 거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믿으니 발생될 거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나님의 일은 항상 인간의 기대와 의도를 비켜가서 일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갈대처럼 흔들려야 하니까요. 흔들리지 않는 나를 믿으면 나는 나한테 우상이 되어버려요.
절대로 내 믿음과 내 열심과 내 행동, 기대는… 이거 믿어버리면 마귀의 시험 들어요. 왜 시험 드느냐? 나를 믿으면 내가 나에게 의지할 때 이것이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잘될까, 못될까? 잘잘못을 따져버려요. 우리는 잘잘못을 따질 대상조차도 아니에요. ‘잘했다, 나. 못했다. 너는 반성해.’ 이렇게 할 대상조차도 아니에요. 그게 마귀의 시험든 거라고요.
아까 마태복음 20장을 언급한 것은 제자들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이미 예상은 했어요. 그들이 그런 말을 할 때 제자들을 딱 보고 난 뒤에 예상되는 상황이잖아요.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을.까.요. 찍으세요. 예상이 되는데, 예상 밖의 일을 주께서 일으켜요. 어린 애 하나를 데려오는 이것은 제자들에게 예상 밖의 일이에요.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간이면서 주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는데, 특히 요한 같은 경우에는 제자들 중에서도 제일 큰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요한복음 19장 26절,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있을 때, 사도 요한은 아주 허탈해가지고 십자가 근처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고 얼쩡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사도 요한이 눈에 보이잖아요. 높은 데에 매달렸으니까 아래쪽이 보이잖아요. 그 근처에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마리아보고 “보소서. 이제부터는 저 사도 요한이 아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홀로 남은 엄마를 돌봐야 될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 정도로 사도 요한에게 신경을 많이 썼어요.
특별히 또 변화산에 세 사람이 올라갔는데, 베드로와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불러서 변화산에서 변화된 천국을 보게 했고요. 또 겟세마네 동산에 갈 때 거기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갔죠. 물론 잠만 잤지만. 푹 잤죠.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예수님 주변, 가장 측근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죠. 계속 얼쩡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성만찬, 마지막 만찬할 때 예수님 품에 안긴 사람도 요한이에요. “주여, 저 가룟 유다는 지금 뭐하려고 합니까?” 묻기도 하고 대화도 했다 이 말이죠. 이런 사도 요한이 제자들 중에 제일 오래 살아남아서 요한복음을 쓰는데 그걸 쓸 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어요. 분명히 사도 요한은 자기도 귀신 쫓아내고 다 했거든요. 없어요.
그리고 다른 데 보면 나오는 “달리다 굼”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마 9:18-26, 눅 8:40-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어요. 죽었을 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 안 데려가고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 세 명만 데리고 그 현장에 갔거든요. 갔을 때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할 게 있다고 전부 다 예상도 기대도 못하고 있는데, 그 세 사람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소녀야, 일어나라.”하고 깨우니까 소녀가 죽은 데서 살아났어요.
사도 요한이 그걸 봤으면 요한복음에 그걸 적겠어요, 안 적겠어요? 적죠.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변화산 이야기도 없어요. 그것도 없어요. 자기가 돋보일 수 있는, 특별한 자라는 것을 좋은 의미에서 내세우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철저히 내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나라는 인간이… 거짓말이에요. ‘나’라고 하면 이게 독립성을 가지는 호칭이 되어버려요. 나. 이것은 잘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것이라는 뉘앙스가 있거든요. 사도 요한이 이걸 지워버리는 거예요, 이걸. 내가 독자성 가져서 뭐할 건데? 주님만 변하지 않으면 오케이지. 변하지 않는 주님이 변하지 않아야, 그리고 나는 늘 변해야 그래야 나는 누구를 안 믿어요? 나를 안 믿잖아요. 나를!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맨날 변덕쟁이인데 믿어서 뭐할 건데요? 나를 안 믿는 그게 바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낄 데 껴야지, 끼지도 못할 게 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끼어드느냐?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아버지 알고 아들 아는 게 영생이지, 나까지 거기에 집어넣으면 영생이 아니라는 거죠.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더 정확히 말해서, 알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에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리자로 나타나요. 사도 요한이 대리자가 아니에요. 마지막에 아까 봤죠? 예수님이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사도 요한하고 이야기 안 하죠. 대표자 베드로보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보고.
요한복음에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 하나도 없죠? 이미 마태, 마가, 누가복음 다 나와 있는 상태에서 90%가 그들에게 없는 이야기로 요한복음에 나와 버립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의도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의도가. 의도를 제가 적어드리겠습니다. 완료된 사랑, 또는 영생이라 할 수 있어요, 생명, 사랑에서 보면 모든 것이 ‘반복’입니다.
직선이 아니고 동그라미. 동그라미로 돌다가 또 돌다가 또 돌고 또 도는 것. 모든 것이 완성된 입장에서는 반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표적이 나와요. 반복인데, 인간은 보통 반복이라 하면 똑같은 상황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똑같지 않은 상황인데 동일한 반복성이 나타나는 거예요.
오늘날 택함을 받은 성도에게 똑같이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분명히 동일한 상황이 아닌데 똑같은 원리가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어떤 원리냐? 그걸 요한복음에서 7가지 ‘표적’이라는 말을 통해 한결같은 원리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똑같은 원리로 추출되고 표현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요한복음이에요.
예를 들면 첫 번째 표적, 여러분들 아시죠? 가나안 혼인잔치. 모든 것이 반복된다. 반복에 어떤 원칙이 있다. 원칙이 뭐냐 하면 ‘중첩’. 차이난 수준의 동시성. 하늘과 땅이 차이나잖아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니까. 하늘은 깨끗하고 땅은 더러운데 이게 동시적으로 나타나요. 이걸 중첩이라 해도 되죠. 중첩.
만원 짜리하고 오만원 짜리가 겹쳐져 있습니다. 그럼 이게 만원짜리입니까, 오만원 짜리입니까? 같이 두 장이 겹쳐있다면? 오만원 짜리는 위에 있고 만원 짜리는 아래, 세상 쪽에 있다고 간주한다면, 오만원 현상과 만원 현상이 동시성으로 같이 일어나는 게 표적이에요. 예수님이 그 현장에 계시면서 표적을 나타내거든요.
그러면 이걸 예수님께 적용시켜봅시다. 예수님은 사람이죠. 아버지는 하나님이죠. 하나님과 사람의 수준이 다르죠? 다른데 예수님이 일할 때 누가 일합니까? 아버지도 같이 일하죠. 하나니까. 이게 동시성이죠. 중첩된 거예요. 물리적으로 중첩된 겁니다. 또는 양자 얽힘. 이쪽이 정해지면 저쪽은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것. 분명히 떨어져 있는데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상관관계. 이게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아들의 선택이라는 말을 부녀, 여성들에게도 쓸 수 있는 거예요. 선택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그들은 어떤 자격을 갖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새 계명, 사랑의 세계에 같이 거기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 관계가 교회고 그 교회의 장로가 봉사자 바로 나 사도 요한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선택해서 우리가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의 할 일은 뭐냐? 세상의 허점을 찾아라. 세상의 허점이 뭐냐? 슬레이트 지붕의 허점을 찾아라. 세상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너희들은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은 정보의 바다 아닙니까. 유튜브의 세상이죠. 그렇죠? 세상 전체가 촘촘히 정보의 막으로 덮인 상태죠.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려면 이 정보를 거쳐서 이야기하게 되어 있어요. 정보 또는 다른 말로 언어의 세계, 또 다른 말로 하면 의미의 세계, 또 다른 말로 하면 개념의 세계. 인간이 인간의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제 너 그 사건 봤나?” “응. 알아.” 이런 거. 그때 서로 의미가 통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죠. “암살자들 봤어?” “나 안 봤어.” 그럼 의미가 안 통하죠. 안 통하는 거예요. 서로 의미가 통하는 자끼리 만드는 세계, 이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허상의 세계에요. 왜 허상의 세계냐? 인간들이 주인공이 되니까요.
여기에 해와 달이 끼어듭니까? 해와 달이 말합니까? 말 안 해요. 언어의 세계니까 말 할 수 있는 것에 원숭이, 코끼리 안 들어가죠. 누구끼리 이야기합니까? 누구끼리의 리그에요? 인간들끼리의 리그니까 허상의 세계, 상징의 세계, 상징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타인을 의식해서 내가 행동에 나서는 세계. 혼자 있을 때는 입 다물고 있다가 남 오면 수다를 떠는 세계.
너하고 나하고 서로 공통의 관심사가 있잖아,하고 수다 떨기 시작하는 거예요. 외롭습니까? 성조기 들고 광화문 가세요. 거기 통하는 사람 있을 거예요. 한쪽은 밉다고 태극기 거꾸로 달고 있고, 다른 한쪽은 태극기 들고 있고. 서로 대적하고 미워하다가 주식 값 내려가니까 똑같은 거예요.
아하, 인간이 시간 남아도니까 정치 이야기하는구나. 인간의 바탕은 정치가 바탕이 아니고 뭐가 바탕이다? ‘주식이 오르느냐, 펀드 오르느냐’ 이게 숨겨놓은 자신의 본심이었어요. 돈 앞에 장사가 없는 거예요. 연금 받고 할 일 없으니까 정치 이야기하더니, 나중에 프랑스처럼 연금 깎아보세요. 난리도 아닙니다. 폭동이 일어납니다. 내 돈 누가 건드려? 이렇게 되죠.
여기에 허점을 찾는 거예요, 허점을. 이 전체가 허상이라는 사실, 이게 가짜고 엉터리라는 사실. 허점을 발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슬레이트 지붕을 밟고 허점에 의해 추락된 자들의 세계, 인간들의 언어 정보로 구성된 세계 말고 따로이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중첩되어 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표적이다’. 표적이 뭐냐? 서로 수준이 다른 그것이 동시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중첩되어 있어요.
중첩되어 있을 때 땅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 요한복음 1장부터 21장이 있어요. 요한복음 1~21장 동안에 제자들의 역할은 ‘참 잘했다’ 역할입니까, ‘참 못났다’ 역할입니까? 참 못났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표적을 행하고 이적을 보여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중첩이 안 되었으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완성된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반복이 되니까요. 땅-하늘-땅-하늘-하늘-…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반복이 되는 거예요. 땅-땅-땅-…,만 있으면 이거는 성도 아니고. 땅-하늘-땅-하늘-…, 계속 도는 거예요. ‘하나님 저한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다가 ‘참, 이것도 주께서 만든 상황이고 이 상황 속에서 시험 들지 말고 주님의 사랑의 결실이 이런 상황이잖아.’ 이렇게 또 하늘의 인식을 가져요. 몇 초 가지도 않지만.
다시 또 이게 동그라미니까 미끄러져서 밑바닥으로 내려왔다가 또 올라가요.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 같아.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그런데 이게 전진하거나 발전 같은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동시성을 통해 파악되는 거예요. 아, 중첩 그 자체가 성도의 육신의 생활 전부다.
그런데 그 중첩을 누가 먼저 체험했습니까? 우리 주님이 먼저 체험을 한 거예요. 이게 표적인데 첫 번째 표적이 무슨 표적이라 했습니까? 가나안 표적. 돌 항아리. 흙 항아리 아니에요, 돌 항아리. 정결예식 때문에 깨끗한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40~50L 들어가요. 그 항아리를 가지고가서 물을 채웠습니다.
마술사라면 묻지요. “자, 여러분 이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물이요.” 자, 그걸 옮깁니다. 중간쯤 옮기다가 한 텀 쉽니다. “자, 이 독 안에 무엇이 들어있어야 마땅합니까?” “물이요.” “맞아요.” 그리고 갑니다. 드디어 도착해서 뚜껑 열기 전입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물입니다.” “네, 퍼주세요.” 뭐가 되었습니까? 포도주 되었죠.
그러면 결과가 포도주 되었잖아요.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처음으로 와보는 거예요. 그럼 처음부터 물을 부은 자는 누굽니까? 하인들이죠. 그런데 포도주를 부은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이 동그라미 끝나는 때의 관점에서 이게 물이 아니고 포도주라는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는데, 아직까지 성령을 받지 않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때 예수님께서 자기 피가 포도주처럼 쏟아지는 그 십자가의 때를 모르기 때문에 물은 물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물은 어디까지나 물이에요.
그런데 지금 마리아는 물이 없어서 고민이 아니라 무엇이 없어요? 포도주가 없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포도주가 없다. 그러면 마리아가 포도주를 원했던 것은 어떤 수준이냐 하면, 이 혼인잔치가 화기애애하고 나중에 후기 평이 별 다섯 개 정도, 그런 평이 나오는 혼인잔치이길 원했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이 상관없는 것이 표적의 재료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뭐 대단합니까, 아무것도 아닙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표적의 재료가 되죠. 아무것도 아닌데 영생을 얻었어요. 세상에 이런 표적이 어디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너 뭐였어?”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 뭐 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어?” 선택이죠. 택함을 받은 부녀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나 이거 이거 했다’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한테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거예요. 어떤 일? 표적이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표적의 주인공은 나가 아니고 표적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 예수님 수준하고 우리 수준이 중첩되어 있으니까 이게 동시적으로 움직이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게 요한복음 식으로 하면 표적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원형이 되어서 그 원형에서 표적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표적이니까 교회를 무시하지 않고 사도 요한이라는 장로를 보내어서 “장로의 편지를 네가 해석할 능력이 있느냐?” 해석하면 성도고, 해석 못하면 이건 나가리 되는 거죠. 해석 못하면 그건 사랑도 못 받은 자고 선택받지 않은 자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도 해석하고 싶어요!” 또 막 다급해서 해석하고 싶다고 나오죠. 해석은 뭐로 나오느냐 하면 말씀 그대로 나와요, 말씀 그대로. ‘나는 믿는다’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가 되는 게 해석이에요. 해석은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다,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나 대신 주인공이 되죠. 나 대신.
내 대신 주인공이 된다면 나의 이름은 수준이 낮은 땅의 이름과 수준 높은 주의 이름이 나한테 어떻게 돼요? 중첩이 되면서 이름은 기능, 활동이에요. 지금 내가 하는 활동은 내 활동이 아니고 나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드는 활동이고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활동으로서 우리를 표적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두 번째 요한복음의 표적은 시간에 대한 표적이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두 번째 표적이 나오거든요. 4장 43절 쭉 보게 되면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 아들이 죽게 되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방금 공부한 대로 왕의 신하는 뭐가 소원이에요? 구원받고 영생 얻는 게 소원입니까, 뭐가 소원이에요? 아들이 멀쩡하다 아프잖아요. 죽게 되었잖아요. 그럼 빨리 죽은 애가 살아날 때 자기가 기대하고 의도했던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죠. 그럼 아들 나으면 구원 받습니까? 영생 얻어요? 영생 안 얻죠. 만두 먹고 싶어서 만두 샀는데 만두 먹고 산다고 영생 얻고 하늘나라 갑니까? 아니죠. 우리가 노는 수준이 그런 수준이에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시다. ‘표본의 크기가 다르다.’ 실험실에 실험할 때 표본이 있잖아요. 그 크기가 달라요. 주님께서는 우주 전체를 완성된 표본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의미를 두지만, 우리는 ‘내 아들 병 나으면 더할 것 없이 나는 행복하고 그걸로 족합니다.’는 것이 표본이 돼요. 모델이 돼요. 항상 모델은 코앞에 있는 ‘나만 행복하면 돼’라는 간사하기 짝이 없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내가 뭐가 되고 대단한 존재 되기를 노리고 늘 생각하는 우리의 소박한 행복들, 그 수준이죠.
그 수준을 주님이 덮어버리니까 표적이 되어버린 거예요. ‘우리 애 병 나으려면 주께서 오셔서 안수하면 좋겠다.’ 이런 나름대로의 계산을 했는데, 주께서 그런 인간의 의도와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고 “네 아들 나았다.”고 해버린 거예요. 가지도 않아요. 나아만 장군을 만나지도 않고 엘리사가 “나 만날 필요 없다. 만나거든 요단강 일곱 번 들어가라고 하라.”는 것과 똑같아요. 그것도 표적이에요. 전부 다.
상대방을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야 표적이 완성돼요. 주님만이 유일하게 모든 것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그 주님 증거에 지장이 되지 않게 해야 표적이 되거든요. 모든 원인의 중심, 센터는 주님한테 있지, 인간한테 있지 않습니다. 그걸 방해하지 않길 원하는 거예요. 그게 두 번째 표적이에요.
그래서 신하 종이 와서 “아드님 살아났습니다.” 그때 신하가 물어요. “그때가 언제냐?” 갑자기 시간을 묻는다고요. 그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니까 주께서 말씀하신 그때라. 따라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으로 나은 게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내 아들은 잠시 죽을 병에 걸린 거예요.
주님한테 이용당한 거예요. 마리아 친척의 혼인잔치도 이용당한 거고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이 다시 등장하는 그 현장에는 전부 다 이용당할 대상들만 있는 겁니다. 뭐 이 시간 다 할 수는 없고 몇 개만 더한다면 오병이어. 오병이어는 정말 할 말이 많습니다. 아까 그 원칙은 중첩입니다. 오병이어도 뭐에요? 오병이어도 중첩된 것의 동시성을 보여주고 있죠. 동시성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수준을 같이 한꺼번에 나타내는 걸 동시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게 뭐냐? 표적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너희가 떡을 먹고 배불렀잖아. 오병이어 때.” 내가 표적을 보라 한 것인데 너희들은 표적은 도무지 보지 못하고 ‘배부르다’ 이것만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현장에 우리가 있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떡을 먹고 배부른 것이 육적인 떡만 챙기는 이러한 헛짓이라면 그러면 그 표적을 우리한테 보여주세요.” 단박에 그런 요구사항이 나오겠죠. 그 표적이 뭐냐 하면 ‘내가 떡’이라는 거죠. ‘예수님이 만나고,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게 표적이에요.
쉽게 갑니다. 지금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떡을 먹고 배불렀죠. 왜 그러느냐 하면 그들은 배고파했으니까. 자기들이 기대하고 의도했던 것을 누가 소원 성취해줬어요? 예수님이 소원 성취해줬어요. 소원 성취를 해버리면 예수님께 떡 얻어먹은 이들은 본인이 가치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니까 가치 있잖아요.
오늘날 교회가 우상이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 있죠. 하나님의 기적을 안 받았으면 괜찮은데 받았으니까 교회가 우상이 된 거예요. 기적 받고 난 뒤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적어도 나 이 정도야. 너 기도해봤어? 응답받아봤어? 방언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줬더니 방언 터졌다. 봐. 하나님이 날 도와주고 있잖아. 어디 네 까짓 것 응답도 못 받은 게… 좀 가라. 나 응답 있어.” 얼마나 으스댈 만한 요소가 됩니까.
그들은 떡을 주니까 임금 삼으려고 붙들기 위해서 온 거예요. 주님께 그만큼 호감이 간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호감 가는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배불렀기 때문에 뭐를 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표적으로 일하시는 주님의 표적을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도 하나님께서 먹이시듯이 주님이여, 우리를 먹이소서.” 계속해서 그들은 자기가 뭔가 된 줄 알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줘야 하나님답다고 그렇게 일방적인 다른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러면 그들은 뭐라 하겠어요?
“잘됐네요. 그 생명의 떡 먹고 우리도 영생 얻읍시다.”
“떡 줄까?”
“주세요. 떡 주세요. 떡이라면서요? 떡 주세요.”
“줄게.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그때 다 나자빠져버렸어요. 식인종도 아니고… 우리를 뭐로 보고. 도대체 우리를 뭐로 보고! ‘살과 피를 먹으려면 당신이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뜻인 거예요. 여러분, 이 상징 질서에서, 이 언어의 질서에서 죽은 사람하고 이야기를 합니까, 안 합니까? 안하죠.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추락하지 않는 이유는 죽은 사람과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사람은 무당밖에 없어요. 살아있는 사람과 이야기해야 본인의 살아있음을 더 돈독히 할 수 있잖아요. 살아있음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 내가 안 죽고 살아있으니까 난 가치 있는 인간 맞다는 것, 그거 우기면서 이 가치를 더욱 더 길게 늘어뜨리기 위해서 난 더 열심히 살아야지. 자식보고 “너도 열심히 살아서 오래오래 살아남아라. 잘 살아야 돼. 훌륭하게 살아야 돼. 그래야 오래 살아남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표적이 뭐냐? 주님의 죽으심이 표적입니다. 지금 인간은 살고 싶어 하는데 주님은 죽고 싶어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과 제자들은 죽을 사람 따라가면 같이 죽으니 안 되잖아요. 살 사람은 살자 하고 도망치듯 가버렸어요.
그때 제자들보고 “너희도 갈래?” 하니까 제자들이 본인도 무슨 말하는지 몰라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누가 주님을 떠나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주께서 “너희들 중에 하나는 사탄인데? 악만데? 악마야. 내가 악마를 제자로 뽑았어.” 왜? 악마가 있어야 뭐가 성사돼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살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죽기 위해서 왔다는 그것이 악마의 협조 하에 구현되는 거예요.
따라서 어떤 인간도 어떤 제자도 예수님 따라서 천국 갈 그러한 괜찮은 사람은 있다, 없다? 없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13장에서 “내가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올 필요 없다.” 이어서 아주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이겁니다. “천국에는 너의 자리가 없다.”
이게 왜 충격이냐 하면, 천국에는 누구 자리만 있냐? 예수님만 자리가 있어요. 예수님 외에는 자리가 없어요. 자리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제자들 자리를 주신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준비한 자리는 예수님 자리 뿐이에요. 그게 아까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상관관계. 이게 복음이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이것이니” 그다음 네모에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죠. 거기서 누가 빠져요? 인간은 알면 안돼요.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그 택한 관계로 이제는 예수님이 처소에서 아버지와 나(예수님) 관계로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버려요. 성령을 줌으로써 없던 자리가 새로 생겨요. 성령을 줌으로써 자기가 끝까지 사랑한 제자들을 그 자리에다 집어넣습니다. 따라서 처소가 마련되게 되면 내가 다시 올게. 성령을 통해서 오시는 거예요. 내가 다시 올게.
여러분 이제 감이 잡혀요? 인간은 애초에 구원이 안 됩니다. 창세기 3장 27절에, 이미 아담을 추방했잖아요. 구원이 안 된다고요. 그런데 추방 자체가 예수님 앞에서 표적 밑에 있는 낮은 수준의 표적 거리, 요소로 들어가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동시성, 낮은 것과 높은 것을 중첩해서 동시성으로 보여주니까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주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모든 심판 권한을, 본인이 선택 때문에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릴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던 겁니다.
요한복음 5장 봅시다.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우리의 소원은 낄 자리가 있다, 없다? 나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낄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 우리는 구원해달라고 할 정도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자만이 이걸 흔쾌히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고운 일에 우리가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이제 내 인생에서 내 일은 없고, 주님께서 중첩한 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내 일은 없고 전부 다 누구 일이에요? 주의 일입니다. 어제 수요일 기도 제목이 그거였어요.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럼 뻔해요. 뻔하죠. 누굴 위한 세상이에요? 주님을 위한 세상이에요. 주님을 위한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 가치 있다고 자기의 허구적인 언어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게 슬레이트 지붕이죠. 그 세계에서 주의 성령으로 인하여 발을 잘못 디뎌가지고 그 세계에 합류되지 못하고 배제 당하고 빠져버린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이고, 그리고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택함 받은 사랑하는 여성들이죠. 부녀들.
“너희에게 문안한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편지 이해되나? 이 편지 이해되겠어? 택했다는 말이 이해돼? 주께서 너를 표적으로 다룬다든지,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을 위하여 네가 초청받았고 다루어진다는 그 말을 네가 이해하냐? 이해한다면 너는 사랑의 새 계명 안에 이미 놓여있는 사람이다.” 사도 요한의 요한이서, 이렇게 시작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성경에 이렇게 적혀있었는데 그동안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성경을 읽었습니까? 모든 것에 내 일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있고 언젠가는 주님 만난다는 이 일관된 주의 일에 대해서 토 달지 않고 의심할 필요 없음을 다시 한번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