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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나무 전쟁 261014우리교회열왕기하

나무 전쟁(열왕기하 14:8-12)

나무 전쟁

2026년 10월 14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4:8-12

(14:8)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14:9)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14:10)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14:11)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14: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4: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14)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왕과 욍 사이의 전쟁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의 왕이란 나라를 대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계약 형식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이전에는 하나님과 제사장과의 과의 관계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운명이 결정났습니다. 이것이 모세 언약입니다. 모세 언약의 취지가 그대로 다윗 언약의 내용으로 스며들어 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는 왕이 필요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왕이 있다”는 식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개인 자격으로 하나님에 나서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왕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레위언약의 취지가 왕에게 계속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왕은 하나님과의 계약이 유지가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레위지파의 제사의 취지에 흡수 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기 시작할 때부터 레위지파의 취지가 붕괴돠었습니다.

즉 레위 언약을 거치지 않는 왕을 이스라엘이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 언약의 취지가 누락된 채 그냥 백성을 초과하는 권력의 소지자를 원했던 겁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나를 버렸다’고 규정하셨습니다. 제사 취지가 누락되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는 누가 갈라지게 하셨지?”라는 대답을 하나님게서 요청한다면, 그냥 “하나님이 하셨어요!”가 답변이 아니라 “어린 양의 희생의 효과였습니다”라고 답변되어야 합니다. 즉 ‘희생’의 취지가 늘 이스라엘에 남아 있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3개월 만에 시내산에서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을 계속 반복하는 가운데 비로소 이스라엘은 진정한 왕과 더불어 생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희생’이라는 것은 뭘까요? 희생에는 가해자로 야기된 결과입니다. 피해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희생받고 있음을 어린양 제물로 통해서 나타내시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의 무슨 태도가 하나님을 희생되고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악마와 전쟁을 하시는데, 인간들은 악마의 존재는 잊고 오로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위한 전쟁을 위해 평생을 소모하고 몰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근원적인 경향성을 겨냥해서 율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레위기 19:27-2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런 말씀을 인간이 대하는 순간, 왈깍 하나님에 대해서 반발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이 신체는 내 것인데 내 것에 문신을 하고 내 머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과연 처벌 거리인가”라는 불쾌하게 여깁니다. 인간은 무심코 자기 전쟁을 하고 살아온 겁니다. 자율성이 기초한 싸움입니다. 자기도 얼마든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식 정도로 본성적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쪽 왕 아마샤는 왕으로서 땅을 넓히는 전쟁으로 백성들로부터 진정 가치 있는 왕이라는 칭송을 받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아마샤가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조 다윗이 하나님과 계약 맺은 조건이 살아 있어야 할 약속의 땅에서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과연 다윗은 자기 힘으로 골리앗을 이긴 걸까요?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통해서 골리앗을 이긴 겁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이 개입하신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다윗 이전에 이스라엘에 왕들이 없어서 본인들 소견대로 300년-350년 동안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였습니다. 기드온이라는 극히 평범한 농부에 천사가 찾아와서 제사를 요구했고 그 제사 현장에서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그저 죽은 자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삿 6:22) 바로 그 마음 자세로 기드온과 동원된 300명은 미디안의 압제해서 해방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알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만이 왕이고 그 왕은 인간들의 자기 소견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동생들을 거의 다 죽이고 왕으로 자처했을 때, 유일하게 살아 남은 요담이라는 형제는 인간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즉 나무는 결코 자율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땅, 즉 하나님이 주신 토지에 꽂혀 있는 비-자율적 존재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븍쪽 왕인 요아스가 남쪽인 왕이 아마샤에게 같은 취지로 모독합니다. 감히 아무 쓸모없는 가시나무 주제에, 자기 같이 쓸모 있는 백향목과 견주겠다는 자체가 건방진 자율성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신약에서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자가 될까요?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32장) 그는 자신의 자율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이 하나님과 싸우는 원수의 자리에서나 나올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거기서 야곱은 자신의 본질이 하나님을 대적한 죽어 마땅한 악마의 앞잡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야곱의 후손들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이 요소가 들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시편 68: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인간은 감히 하나님의 편에 섰다고 할 수 없고 도리어 자신의 전쟁에 몰두한 결과로 하나님을 더욱 더 희생토록 한 장본인인 것을 자인합니다. 그래서 시편 68:18은 예수님에 의해서 신약에서는 이렇게 바뀐 상태에서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십자가 현장에서 주님이 악마와 전쟁하신 진정한 왕이심을 간파하게 된 자는 성도로서 알아야 모든 것을 알아버린 자입니다. 주님께서 악마에게 승리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거기서 내려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이 비로소 성도는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된 겁니다. 즉 ‘왕의 희생으로만 백성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를 바라보지 말고 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주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7강-열왕기하 14장 8-12절(나무 전쟁) 26101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4장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4:8-12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하고 있지요. 무슨 전쟁? 명분이 뭔가요? 꼭 해야만 하는 전쟁입니까? 아니면 엉뚱한 생각 때문에 전쟁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각기 왕이 있습니다. 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시대 이후에는 백성의 팔자, 백성의 처지에 대해서 백성 개인에게 묻지 않는 시대로 돌입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잘할게요.”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이야기해도 하나님은 백성들의 말을 듣지 않고 “너희를 지배하는 왕이 어떤 왕이냐를 보라. 너 자신을 가지고 나오지 말고 현재 너를 통치하고 있는 왕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라. 그 왕이 제대로 하면 너도 복을 받고, 만약 왕이 엉뚱한 짓을 하고 하나님께 옳지 않으면 네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바르게 살아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환경이냐? 다윗 언약의 환경, 하나님은 왕만 상대해서 결과를 백성에게 제공하는 그러한 시대에 돌입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 나라한테는 적용이 안 되고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약속의 땅에서 거하는 백성과 왕에 대해서만 하나님이 언약적으로, 다윗과 맺은 계약에 준해서 이스라엘의 상황을 조정하고 계시는 겁니다.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는 소용없는 이러한 환경은 나중에 신약에 와서 우리가 ‘하나님, 저 바르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받습니다. 듣지도 않고 받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네가 어떻게 바르게 했는가, 네가 얼마나 훌륭한가, 그런 것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너의 왕이 누구지? 현재 너를 일거수일투족 지배하고 있는 왕이 누구지?” 이걸 물어요.

우리는 “내 왕은 모르겠고 바르게 살려고 믿음대로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 계약에 그런 계약은 없다. 내 앞에 네 왕이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해라.” “우리 왕은 예수님입니다.” “그런 식으로 아는 지식으로 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지배하고, 삶의 현장 안에서 어떤 식으로 어떤 환경으로 너를 인도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해라. 너의 이야기 하지 말고, 너를 통치하고 있는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 보고하라.” 그게 바로 다윗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 하나님께서 왕과 상대하지 백성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북이스라엘이나 남이스라엘 왕들이 알고 있어요. 다윗 언약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각자 나라의 왕들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 왕으로 칭송받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는데 그 노력이 뭐냐? 보다 많은 영토, 땅을 차지해서 백성들 앞에서 ‘이 넓은 땅을 차지할 정도로 자질이 되고, 능력이 있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왕’이라는 이미지를 백성들에게 보이려고 왕들이 나름 애쓰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왕 보고 ‘하나님이 세운 왕이라고 우기면서 사는 이 꼴은 뭐냐? 영토도 좁아터졌다. 곡식 잘 되는 땅은 다른 나라가 다 차지해 버리고, 이 땅은 농사지어도 곡식 잘 영글지도 않는데 왕은 뭐하나? 좀 좋은 땅 차지해서 백성들 잘 먹여 살리면 존경하지 말래도 존경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정치나 그때 정치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예요. 잘 먹고 잘살게 해주면 최고입니다. 백성들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존경을 강요하지 말라. 존경은 우러나야 한다.’ 이게 인간의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왕 입장에서는, 특히 남쪽 유다 아마샤 왕은 에돔이라는 나라를 이겼거든요. ‘아, 이거 일 된다. 일 되네 이거.’

에돔을 이겼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내 편에 서서 유다 나라를 강성하게 하려는 낌새로 여기면 된다.’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남북으로 갈라질 이유가 없잖아요. 다 같이 열두지파라는 말이지요. 남쪽 아마샤가 에돔을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팍팍 밀어준다는 신호로 알고 ‘하나님이 힘 줄 때,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식으로 하나님이 도와줄 때 사업 확장하자.’ 한 겁니다.

그래서 북쪽에 사자를 보내서 “어이, 북쪽 왕! 왕대 왕으로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이잖아. 이참에 그냥 쇼부(승부)를 보자. 정말 어느 쪽이 하나님 편에 섰는지 승부를 내자”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북쪽 왕, 요새 말로 하면 김 여정이죠, “네가 에돔 한번 이겼다고 어디서 깝죽대? 하여튼 인간쓰레기들이 말을 안 들어.” 이런 식으로죠. 아주 굉장히 조롱하듯이 이야기를 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조롱하느냐? 왕대 왕의 싸움을 뭐로 비유하느냐? 나무와 나무의 싸움으로 비유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 열왕기하 14장 9절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여기 레바논은 남쪽이 아니고 북쪽이에요. 북쪽에는 백향목이 많이 자라고 남쪽에는 백향목이 없어요. 백향목은 귀해서 수출용 나무에요. 우리나라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일대에서 나는 춘양목이 있어요. 임금님께 진상하는 목재로서 금강송이라 합니다.

“그 춘양목 같은 나무가 백향목인데 이게 에돔 한 번 이겼다고 깝죽대면서 아무 쓰잘데기없는 가시나무가 쓸모 있기로 유명한 백향목하고 사돈을 맺는다고? ‘어이 북쪽 왕! 우리한테 당신 딸 시집보내. 그러면 내 아들 당신 쪽에 장가보낼게’하는 식이구나. 건방져도 보통 건방진 게 아니구나. 가르쳐서 고칠 것도 아니고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너의 집(궁)에나 가만히 있거라, 이 가시나무야! 어딜 감히 가시나무가 백향목을 건드리려고?”

열왕기하 14장 10절에,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9절에는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까불면 짓밟아버린다고 모독을 한 겁니다. 그 말을 남쪽 아마샤가 안 들었어요. 말 안 듣고 전쟁했는데 과연 레바논 들짐승한테 가시나무가 밟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게 단순히 남쪽 왕 아마샤의 객기냐? 우쭐댐에서 나온 객기에 불과한가? 오늘 본문에 보면 ‘까불다 당했구나.’ 이렇게 되는데 역대하 25장 20-24절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쪽 아마샤가 에돔 한 번 이겼다고 까불다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여호아하스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180미터)을 헐고 또 하나님의 전 안에 오벧에돔의 지키는 모든 금은과 기명과 왕궁의 재물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북쪽 들짐승처럼 쳐들어와서 밟아버렸어요. 이게 왜냐? 아마샤가 에돔의 신을 섬겼다는 거예요. 여호와를 버리고 에돔신에게 기도하고 에돔신을 섬겼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떤 객기나 오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된통으로 당하도록 하기 위함인데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따로 있습니다. 그냥 교만하다고 친 것이 아니고 교만하게 된 이유가, ‘이 정도면 내 힘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여호와를 버리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북쪽 왕 요아스가 나무 이야기를 끄집어낸 그 이유가 뭐냐? 이걸 생각해 봅시다. “야, 너무 우쭐대지 말라. 그리고 싸우지 말자.” 이러면 끝날 문제인데 의도적으로 나무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가 있어요. 북쪽 이스라엘의 나무 이야기는, 왕이라는 것이 이방 나라 왕이 아니고 약속의 땅의 왕은 어떤 존재냐 하면, 나무 같은 존재예요.

나무는 특징이 뭐냐 하면, 땅에 대해서, 대지에 대해서 극히 의존적입니다. 나무는 땅에 꽂혀있어요. 그만큼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이 땅이 어떤 땅이냐?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에 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것은 사람 하나하나가, 왕 하나하나가 나무에 해당된다면 그 나무가 나무답게 되는 그 토대, 받침은 약속에 준해야 나무가 약속의 가치를 발산할 수 있는 겁니다.

땅 없는데 나무 있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우리의 기초는 뭐예요? 우리 존재의 바탕은 뭡니까? 약속입니까? 아니면 우리 본인이 나무가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까? 북이스라엘 왕이 “야, 나무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둘 다 우리는 자율성이 제한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너도 나무고 나도 나무인데 나는 나무라도 괜찮은 나무 백향목이고, 너는 나보다 영 후진, 나무기는 하지만 나무라고 할 수도 없고 가시만 있어서 남에게 해만 끼치는 하찮은 나무다. 제발 네 자리나 좀 지켜라, 인간아!’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오늘날 세상 사는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인간들의 자율성, 무한의 자율성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겁니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레위기 19장 27-2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내 몸에 문신 새기는데 왜 하나님이 관여합니까? 내 몸을 좀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문신 새기는데 그것도 처벌받을 행위에요? 어제 인천의 한 상가건물에서 관심 끌겠다고 전과자가 쌍칼 들고 설치다가 9명이 다쳤는데 그중 한 명은 중상이라는 거예요. 그때 어떤 용감한 청년이 의자 들고 맞서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20명이라도 다쳤을 참이에요.

그 청년이 인터뷰를 하면서 팔을 들 때 소매가 내려갔는데 보니까 팔에 문신이 가득 있어요. 문신한 사람이 되게 착한 일을 했어요. 만약에 내가 그 청년보고 “니 와 문신했노?” 하면 “내 몸 내가 문신하는데 그것도 죄인가?” 그러면 레위기는요? 레위기 19장 27, 28절은 뭐예요? 하나님이 뭔데 조목조목 인간에게 간섭합니까? 왜 간섭하는데요?

자, 지금 누가 봐도 이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잖아요. 약속의 땅의 전쟁은요, 인간 전쟁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창세기 3장 15절 말씀처럼 악마와의 전쟁입니다.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끼어들면 안 됩니다. 인간이 인간과 전쟁하는 것은 “나는 백향목이고 너는 가시나무다.” “아니, 내가 백향목이고 네가 가시나무다.” 인간 대 인간의 자존심 가지고 싸우기 때문에 그 전쟁은 필히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구현하는 하나님의 악마와의 예언적 전쟁에서 하나님에게 피해를 줘요.

인간의 자율성에 준한 인간의 전쟁은 하나님께 가해자가 되고요, 가해자가 있으면 반드시 피해자가 생기는데 그 피해자가 마귀하고 싸우는 우리 주님이 피해자가 됩니다. 피해를 봤기 때문에 몸에 문신하는 것도 처벌 대상이 돼요. 왜? 피해 입은 분이 있기에. 따라서 율법을 생각할 때는 ‘내 몸인데 내 몸에 문신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적 전쟁에 피해를 입히는 요소가 되는가?’ 그것을 규명해야 돼요. 그 관계를 알아야 됩니다.

어디서 문제가 되었느냐 하면, 내 몸이 내 몸입니까? 내 신체가 내 신체입니까? 이걸 다시 한번 질문해 봐야 해요. 약속의 땅에 사는 백성의 모든 신체는요, 자율권이 없습니다. 그냥 나무에요. 각자 심긴 그 땅에 꽂혀서 자라나는 나무에 불과해요. 나무의 소유권은 하나님한테 있는 거예요.

사사기 9장 7-16절에 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드온의 아들이 70명이에요. 아들 중에 아비멜렉이라는 나쁜 아들이 하나 있어요. 지금 아버지 기드온이 왕으로서 존경을 받습니다. 지금 시대가 사사기거든요. 왕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왕이란 ‘내가 전쟁을 하지 않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전쟁에 끼어들 자격이 없습니다’를 나타내는 자가 왕이예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다윗보고 물어보세요. “네가 골리앗을 이겼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이런 식, 이런 식이에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에이 다윗, 네가 골리앗을 이겼잖아.” 이렇게 한다면 제가 만약 다윗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내가 골리앗을 이겼다고 하는 사람은 잠깐 와 보세요. 제가 묻겠습니다. 홍해 건널 때 애굽 군사들 다 빠져 죽었지요? 우리가 애굽 군사들을 벗어나서 무사히 홍해 건넜습니다. 홍해 누가 갈라지게 했습니까?”

홍해 누가 갈라지게 했지요? 인간 아니지요? 이게 약속의 땅 이스라엘이 특이성으로 유지되어야 해요. ‘홍해 누가 갈라지게 했습니까?’의 정답은 어린양의 희생 덕분입니다. 나중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데 제사법을 받아요. 제사법이 뭐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어린양의 그 희생의 효과를 계속 살아있도록 하는 제사를 통해서 그 취지가 반복되는 조건하에 이스라엘은 엄연히 기존에 땅 주인인 이방인들이 있는데, 다 쫓아내고 그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있는 약속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전쟁은 하나님이 한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왜 있느냐? 하나님의 전쟁의 효과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인간은 이겨요. 인간은 이기는데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를 인간은 못 이겨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기지 못하는 악마마저 이겨서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 남겨준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약속의 백성이 되려면 우리 힘으로는 못 이겼지만, 하나님의 자체적인 희생 덕분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해야 될 임무를 갖고 있는, 그래서 남아있는 자들이 백성이에요. 그 일을 하는 가운데서 기드온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에 나갈 때 3백 명과 함께 나갔잖아요. 그 3백 명의 특징이 뭐냐?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런 무기가 없었어요. 그러면 기드온은 무기가 있었는가? 기드온도 역시 무기가 없어요. 무기가 없으면서 미디안과 전쟁할 때는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삿 7:20)라고 했어요. 무기도 없는 주제에. 그러면 무기가 뭐냐? 사사기 6장에 보면 기드온은 이미 전쟁을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앞에 희생제물을,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천사와 만나게 됩니다.

중요하니까 여기서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희생 앞에서 –천사가 와서 기드온에게 제사를 드리게 했어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내가 하나님 앞에 가해자고, 피해자는 하나님 쪽이 피해자라는 것을 미리 만난자,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만나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 하는 그 사실을, 내 정체를 내가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적을 내가 만나는 겁니다.

딴 게 아니라, 나는 내 자율성으로 살아가겠다는 것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마귀의 종으로 자율성을 발휘하잖아요- 나는 내 것만 챙기면 되니까 내 것만 챙기면 된다는 이 사실이 그동안 내가 몰랐던,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나라는 하나님의 원수를 내가 만날 때 그게 복이에요, 그게 백성입니다.

어떻게 만나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나랑 전쟁할 때, 그렇게 나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죽은 자같이 되어버려요.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사기 6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죽은 자같이 되었다는 겁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삿 6:22-23).

뭐 방앗간 주인이고, 전쟁이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진짜 전쟁은요, 인간이 그동안 못 느꼈던 전쟁이 뭐냐? 하나님은 악마와 싸운다. 하나님은 적이 있는데 그게 악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적인 악마를 왜 몰랐어요? 악마 편에 서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자기 싸움을 하니 악마의 존재를 몰랐던 거지요.

자기 싸움이에요, 자기 자존심 싸움. “너는 백향목이냐? 나는 가시나무다!” 이런 거요. 노래에 그런 것이 있어요.

자가용 타고 가는 너 너만 잘났냐
버스 타고 가는 나 나도 잘났다
젠-젠- 젠틀맨이다

이런 노래(젠틀맨이다, 김수미, 2005)가 있어요.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거 누구 전쟁이에요? 본인이 본인을 모르는 무식한 가운데 나타나는 자기의 전쟁이지요. 그걸 평생 합니다. 피곤해 미쳐요. 이것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전쟁이.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 만날 때 야곱의 전쟁은 끝났어요.

하나님과 맞짱 뜬 내가 바로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 순간 ‘내가, 이 야곱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희생하도록 했다. 그 원인 제공이 바로 야곱이라는, 그 욕심꾸러기가 나’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 전쟁에서 끝나고 이제 영적 전쟁의 일원이 된 겁니다. 그게 약속의 백성이에요.

그 야곱의 후손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줄줄이 왕들이 나와요. 하나님이 다윗하고 계약한다고 했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하고 계약했습니다. 다윗이 누구를 이겼습니까? 다윗은 아무도 이긴 적 없어요. 골리앗을 이긴 것은, ‘나’와 계약 맺은 하나님이 ‘나’를 그냥 무기 없이 사용한 것뿐이에요, 무기 없이.

골리앗을 죽이기 위해서 평생 물맷돌 던진 게 아니에요. 물맷돌은 양치기 위해서, 짐승하고 싸우기 위해 한 거예요. 그걸 하나님이 그냥 살짝 얹어서 이용한 것뿐이었습니다. 골리앗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을 뻔해서 다시 깨어났다면 골리앗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 꼬마 다윗! 한 판 더 붙자!” 하고 이마를 두껍게 덮는 투구를 썼을 거예요.

그 순간에 개입한 것은 하나님이지 이 물맷돌 날아가는 가속도, 속도 문제가 아닙니다. 속도 문제가 아니에요.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겁도 없이 죄인의 입장에서 감히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에 증인으로서 간택되었다는 사실만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자기 전쟁 없어요. 모든 게 주님 전쟁뿐이에요. 자기 전쟁 없습니다.

기드온의 그 300명이 무기 없이 덤벼들어서 이겼거든요. 그런데 사사기 8장 22-23절에 보면,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그런데 그 아들들 가운데 아까 말한 아비멜렉이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존경받으니까, 그 존경이 권력으로 탐이 나니까 자기가 동생들 68명을 다 죽여버리고, 한 명 남은 요담은 도망쳤어요. 그 도망친 요담이 하는 말이, 나무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삿 9:8-15).

이렇게 해서 그 가시로 사람들을 괴롭히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요담이 이야기하는 것은, “왕이 있잖아”라는 겁니다. “왕이 어딨는데?” 악마를 이겨야 왕이 돼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악마가 없어요. 본인이에요, 본인, ‘본인 전쟁’을 하고 있다고요. 본인 전쟁을 하고 있으니까 맨날 싸워도 본인의 자율성을 더 증강시키는 전쟁, 나의 가치를 증강시키는 전쟁, 그 전쟁 말고 다른 전쟁, 이 땅을 살면서 구경해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못난 것 때문에 주님께서 피해를 봤다. 그래서 비로소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악마의 앞잡이였던 것이 탄로 났다. 누구누구 탓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다. 하나님의 적이 되었던 당사자가 내 자신이다’라는 말을 혹시 누구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기드온은 그리고 300명은 이걸 실감했어요. 13만 5천 명 대군 앞에 300명이 말이 돼요? 도저히 상대가 안 돼죠.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죽여버려요.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인에게 행한 포학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삿 9:23-24). 악신이 들려서 같이 동조했던 사람과 함께 이 아비멜렉이 죽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사기 전체가 이야기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 대목이 사사기에 네 번(17:6, 18:1, 19:1, 21:25) 나오는데 두 번은 뭐냐 하면, 레위 지파의 취지, 그 레위 지파가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레위 지파는 제사를 담당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자율성을, –아까 그 나무 이야기 있죠- 자율성을 주장하다 보니까 자기가 스스로 왕이예요. 왕이 없으니까 본인이 왕이예요. 이걸 네 자로 ‘민주주의’라 합니다.

자기 자율성 싸움 외에는 다른 싸움이 없어요. 자기 자율성 싸움 때문에 뭐가 가려지느냐? 주님과 악마의 전쟁이 어떤 취지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요. 사람들은 자꾸 ‘나’를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 말고 왕이 누군데?” 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물어요.

자, 하나님은 우리한테 “너, 왕이 있나? 있으면 그 왕이 무슨 일을 했지?”라고 질문합니다. 그 질문을 들을 때, 답변은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 대목이에요.

우리 왕이 계시는데, 그 왕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에게 희생을 당하고, 피해를 입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피해 입은 아들을 하늘로 높여가셔서 그다음에 하나님이 홀로 이룬 그 공로를 성령으로 주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에 의해서 ‘사로잡힌 자’가 되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이분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다른 왕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시편 68편 17-18절에 보면,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구약 시편 68편에서 ‘주께 사로잡힌 자’가 누구냐? ‘적’이에요. 적을 사로잡고 그다음에 백성에게 ‘선물’을, 전리품을 준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조리 다, 이스라엘마저 전부다 하나님의 가해자입니다.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로 하여금,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싸움에 평생을 몸 바치게 만들었어요.

아무도 나보다 왕이신 주님을 더 생각하는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걸 증명한 게 구약이에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아무도 관심 없는 그 분이, 주께서 홀로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선물로 주니까 비로소 인간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와 한통속’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줘요.

그렇게 보면 이 영적 전쟁은 누가 홀로 했는가? 우리 주님께서 홀로 하셔서 이제야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쟁에 눈을 떠서 나로 인하여 피해받은 그분으로 인하여, 어린 양의 희생의 효과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을 얻는 참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의 전쟁에서 벗어나 이제는 사로잡혔다는 그 기쁨, 주님 앞에 사로잡힌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진짜 제대로 된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는 사람, 성도! 이것이 신약입니다. 성도란, 이 땅에 진정으로 살 가치는 우리 주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그분만이 피해자거든요.

그분만이 피해를 입었으니까, ‘주님의 나라’라는, 주님의 왕되심의 아버지와의 계약에 의해서 그 결과를 우리가 듬뿍 받았을 때 그것을 가지고 이제는 영적 전쟁에 눈이 떠버린, 더 이상 나로 인하여 걱정하거나 염려할 게 남아있지 않는 진정한 희생의 덕분을 아는 성도,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보겠다고 아는 그 순간은, 하나님이 희생으로 나타난 그 지점에서, 그 장소에서 비로소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말도 안 되는 원수이면서도, 왜 하나님은 내 인생을 안 도와주느냐고 윽박지르는 이 모습 자체가 영적 전쟁은 안중에 없고, 내 영광과 내 자존심 전쟁을 했던 철딱서니 없는 짓인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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