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속의 난쟁이 시편 73:2 261012
20261012a 부산강의 : [시편]89(73:2)-인간 속의 난쟁이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시편 73편. 시편 전체가 복과 저주에 관하여 양분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되지요. 그다음에 시편 1편 끝에 보면, “악인의 길은 망한다.” 복과 저주 두 편으로 나누어서, 시편 전체가 복과 저주로 예리하게 나누는 거예요. 저주는 망한다. ‘망한다’ 앞에 붙는 게 있어요. ‘결국’에는 망한다. 오늘 시편 73편과 관련돼 있어요. 결국에는 망한다. 기필코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그래서 복과 저주 해놓고 제가 이렇게 결국에는 망한다, 기필코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고 돼 있지요. 그럼 이 두 개(복/저주)를 지워보겠습니다. 이 자리에 두 사람을 놓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경계선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경계선을 임의로 그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도 아담의 자손, 나도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똑같이 아담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너와 나는 달라, 라는 말을 감히 어느 인간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3절에 사도 바울이 말한 게 있어요. “내가 십자가 졌어, 안 졌어?” 물어요. 내가 십자가 졌냐고? 나 십자가 안 졌어. 이 말은 사도 입장이라고 해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이 세상에 인간에게는 일체 없습니다. 인간은 똑같아요. 차이가 없어요. 틀린 그림 찾기, 이런 것 없어요. 똑같아. 둘 다 아담의 자손으로 똑같아요.
문제는 이거에요. 어느 쪽인지는 몰라요. 그런데 한쪽은 망한다. 결국에는 망한다. 기필코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이렇게 나왔다고요. 사다리타기 할 때 위에서부터 내려오잖아요. 시편은 뭐냐? 밑에서 올라가자는 이야기에요. 왜? 둘 다 구분이 안 되니까. 다들 자신만만해 하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망한다. 기필코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이것부터 출발해서 거꾸로 사다리타기를 올라가는 거예요. 인간들 군상에다가 이것이 거꾸로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가게 되면 여기에 해당되는 자가 악인인데 시편 1편에서는 악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돼 있어요. 오만한 자라고 해요. 오만한 자는 무슨 말이냐 하면 ‘건방진 자’죠. 시편에서 기필코 망하는 자는 어떤 자다? 오만한 자에요. 그러면 오만한 자가 망한다고 하니까, 시편 1편이 그러니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절)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걸 잣대로 해서 오만한 자만 망한다는 결과를 가지고 찾아가면 되지요.
찾아가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나 망하기 싫어. 따라서 난 오만한 자가 아니야. 나 건방진 자가 아니야.”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오만한 자가 망한다는 이것을 빨간 걸로 테두리 쳐봅시다. 빨간 걸로 테두리 치면 이게 기준입니다. 오만한 자는 망한다. 그런데 나 오만한 자 아니야, 나 건방진 자 아니야,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결정한 기준 자체에 대해서 어떻게 돼요? 반발하지요. 그게 오만한 자에요. 쉬워 보이지만 굉장히 이상야릇하게 어려워요.
오만한 자는 망한다. 이건 누구의 결정이냐 하면 하나님이 결정을 내린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 결정이죠. 결정된 심판 기준이죠. 그러면 이 앞에서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기준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이 기준이 최종적으로 확립이 되었잖아요. 오만한 자는 망한다, 결정됐지요. 그러면 이 기준 말고 인간이 나름대로 자기를 위한 기준이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없어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이 기준을 딱 보고 하는 말이, 본인이 선택을 해버려요. “아 오만한 자가 망하는구나. 나 오만한 자 안 될래.” 이렇게 선택을 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서 이 기준이 오만한 자한테는 적용되는 기준이지만 감히 나한테는 적용이 안 되는 기준이라고 내세우는 게 되는 겁니다. 초반부터 복잡하지요, 지금 이야기가.
“나, 하나님이 아니야. 나는 기준이 없어. 하지만 난 오만한 자는 되기 싫어.” 이게 기준이에요. 요게 딱 걸려들었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람에게 의견을 수집해서 어떻게 구원할지 의논한 적이 없어요. 구원에 대해서 사전에 인간과 의논한 적이 없습니다. 일방적이에요. 이게 얼마나 인간들로 하여금 당황스럽고 굉장히 난처하게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 교인이 있는데 교인이 시편 1편에서 오만한 자는 망한다는 이 기준을 알았다고 칩시다. 그 기준을 혼자 알고 있으면 되는데 이 기준을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가요. “목사님, 우리 교회는 이 기준으로 설교하시고 목회하실 거죠”라고 하면 목사님이 그 사람을 반길까요, 극도로 기피할까요? 기피하지요. 왜냐하면 이 기준대로 해버리면 목사가 자기 할 몫이 날아가 버려요. 왜냐하면 기준이 정해져 있잖아요.
기준이 정해져 있으면 목사가, “나는 이렇게 목회할 거야” 그 기준이 이 기준에 합치됩니까, 합치 안 됩니까? 합치가 안 되겠지요. 아까 이 기준을 뭐라고 했습니까? 따라해 보세요. 잊어버리겠다. ‘일방적이다’ 일방적이에요. 일방적이라 하는 것은 또 이야기할게요. 이건 인간에게 물어봤다, 안 물어봤다? 인간에게 안 물어본 거예요. 목사나 장로, 집사한테도 안 물어본 거예요.
그러니까 그 목사는 주저할 이유가 없지요. 맞다, 그다음에 뭡니까? 게보린. “맞다. 그거다.” 이렇게 동의하면 되잖아요. 뭐 어렵습니까? 시편 1편에 나오잖아요. 맞다. 그렇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지요. “가만있어보자. 내 자식에게 그 기준을 들이대면 미국에 유학 가 있는 내 자식은 이 기준에 위배되는데…? 안 되지, 안 되지.” 속으로 본인만 알고 있는 상황 있잖아요. 거기에 인상이 확 달라지면서 집사 나부랭이가 나한테 들이대지 말고 내가 알아서 목회할 테니까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런 식으로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기준을 세운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 구원받는데 구원받는 당사자와 사전에 조율이나 의논조차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한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아까 아담의 자손이라 했잖아요. 아담의 자손 맞지요. 문제는 본성에 대해서 언급할 겁니다. 아담의 자손의 본성은 이렇습니다. “날 건드리지 말라.”
이거는 시대를 막론하고 어떠한 상황을 막론하고 어떤 공간과 시간과 관계없이 결혼생활 십 년 했느냐, 이십 년 했느냐 그런 시간 조건도 다 무시하고 오직 영원히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든 요소에 남녀노소 관계없이 적용되는 것, 인간의 본성이 뭐냐? 날 건드리지 말라.
묻지요. ‘왜 건드리면 안 되는데?’ 묻는 거예요, 왜, 왜? 답은 뭐냐? 몰라. 그냥 그래. 본성이기 때문에 서술어가 필요 없어요. 요렇게 조렇게 이게 필요 없어요. 기분상. 남녀가 연애했다. 한 오 년 했다. 알 것 다 안다. 그래도 여전히, 알 것 다 알고 이해를 하고 백날 뭐 해도 여전히 제일 바닥에 깔려있는 건 뭐냐 하면 다 안다고 해서 함부로 날 건드리지 마라.
그러면 묻지요. 왜? 우리 이렇게 친한 사인데 왜? 답변은 뭡니까? 몰라. 다시 말해서 모른다는 말은 나도 나를 몰라. 몰라 알 수가 없어. 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정답을 알려줍니다. 이 문장, 이 순서 기억하면 좋겠는데. 인간은 모른다고 했잖아요. 하나님께선 정답을 알려줍니다. “네가 마귀니까.” 마귀의 특징은 ‘나 건드리지 말라’에요. 안에 마귀가 들어있어요.
서양장기, 체스지요. 안에 들어있는 난쟁이. 어떤 철학자가 상상을 해보았어요. 체스 할 때 체스 기계가 있잖아요. 기계 안에 인간은 그냥 폼으로 앉아있고 체스를 두는데 각자 기계 안에 뭔가 난쟁이가 들어있는 거예요. 본인은 다음에 이걸 어디에 놓을까, 하고 체크하고 있는데 밑에서 다 시켜주는 거죠. 좌로 두 번하고, 다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도 어디 할까, 어디 할까 빨리 이야기해라. 어디하면 되지? 여기. 그래 여기.
인간 속에 양쪽 다 뭐가 들어있어요? 양쪽 다 둘 다 마귀가 들어있어서 누가 이기든, 누가 지든 누구의 작품이야, 누구의 결과물이냐? 마귀의 결과물이에요. 축구 일본이 이기든 한국이 이기든 관계없이 둘 다 마귀가 한 거예요. 여기서 체스 기계 안에 들어있는 난쟁이, 안 보이죠. 바깥에선 안 보이는데 안에는 마귀가 들어있는 거예요.
마귀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 어떤 좋은 파티고, 뭐 사랑해요, 고마워요 하면서도 여전히 난쟁이는 뭡니까? 난쟁이는 안에서 뭡니까? “내가 너한테 잘해줄게. 앞으로 섭섭하지 않게 해줄게. 원하는 것 다 이야기해. 이런 손자 낳아줬으니까 손자 다 키워줄게.” 하면서도 그 속에 마지막엔 뭡니까? 그러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 우애적인 것, 호의적인 것 많은 말 하지만 결국 날 건드리지 말라. 우리 선 지키자. 왜? 몰라. 그냥이에요. 그냥 그래. 기분이 그래. 기분 상 그래.
따라서 이렇게 되면 인간과 인간, 개별자와 개별자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나 진정한 우애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래요? 난쟁이 때문에, 안에 마귀 때문에. 마귀는 우리를 신으로 만들었거든요. 네가 최고야. 누구한테 양보할 필요 없어. 너는 자체가 신이야. 그래서 너는 마귀야, 하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의 기준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반발하는 식으로 악마가 인간을 묘사합니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야.’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이 말을 ‘왜’에서 안 나오고 마귀라고 하니까 그때 나온 거예요. 그럼 주님은 뭘 건드려요? 주님은 인간 속의 뭘 건드려요? 난쟁이를 악마를 건드리죠. 그게 바로 창세기 8장 21절에 나옵니다. 그 대목을 적어볼게요.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기억 안 나면 사진으로 찍든지. 평생 갑니다, 이거. 심리학 박사, 뭐 필요 없어요. 이거에요. 심리학 박사 뭐가 필요해요. 이게 인간의 심리인데 본심인데. 자꾸 걱정된다.
제일 마지막에 인간을 뭐라고 했어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야, 마귀가 그런 소리하는 거예요. 두 번째에 왜 안 나오지요? 날 건드리지 말라. 왜? 몰라. 몰라 할 게 아니고 왜 진즉에 이야기 안 했느냐? 말씀으로 쓰시니까 악마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야, 이렇게 된 거예요.
창세기 8장 21절,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여러분,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악하면 저주를 해야 될 게 아닙니까? 이 말, 너희들은 악하기 때문에 저주할 거야, 이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흐름이 앞뒤가 자연스럽잖아요.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들은 착하거든, 이래야 또 말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인간은 원래 착해. 그래서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이래야 말이 되는데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그다음에 나오는 말, 강조점이 너희는 모든 게 악함이라. 따라서 이 저주의 이유가 인간으로부터 저주는 없다는 거예요. 그럼 뭐가 저주겠습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 뭐예요? 난쟁이.
그다음부터는 물의 심판은 인간을 향하여, 불의 심판은 인간 속의 악마, 너 나와. 악마 너 나와. 악마를 보고 불 심판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을 대표로 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누굴 만나야 되겠어요? 인간을 상대해야 되겠어요? 인간은 말해도 못 알아들어요. 마태복음 4장에서 성령께서 사람 만나기 전에 누굴 만나게 했어요? 세례 요한 말고 광야에서 누굴 만납니까? 인간을 지배하는 마귀와 만나서 시험하잖아요.
인간이 말을 못 알아듣는 이유가 로마서 8장 9절에 나와요. 누가 읽어보세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야아 사도 바울의 표현이 얼마나, 무엇이 없으면 무엇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외적으로 볼 때에 현상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뭘 전했어요? 복음을 전하고 말을 했지요. 말을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말을 했다면 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만 가능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만 그 말귀를 알아먹는단 말이에요.
이걸 사도 바울은 이렇게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사도 말이든 주님의 말이든 어느 누구도 성경을 백독 천 독을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신약이에요. 그럼 구약은 이걸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오만한 자는 망하기로 돼 있다는 이 기준을 안 받은 자가 뭐다? 오만한 자가 되는 거예요. 구약의 방식, 신약의 방식 동일하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의 일방성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사전에 의논한 적 없어요. “내가 이쯤 기준 세우면 네가 이 문제 풀겠지, 그지?” 이런 것 없어요. 지금 의논 상대가 안 된다니까. 하나님은 인간과 의논 상대를 안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상대는 진정한 사람,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간의 대표 예수님과 이야기해서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복제된 사람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복제된 것 이야기할게요. 오늘 본문 들어가려면 멀었어요, 기다려 봐요. 본문 들어가기 전에 사전에 프레임을 설정해봅시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복제 또는 복사라 했어요. 베낀다. Ctrl+v 베껴서, 이 이야기를 한 달 전에 한 느낌이 드네? 하면 안 된다,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면 복사하고 복제 이 내용이 어떤 절차, 어떤 과정이 관계가 있느냐? 이게 바로 히브리서 2장에 나와요.
이 히브리서 2장 이야기가 되어야 오늘 본문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안 그러면 본문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본문에 좀 어려운 게 있어요. 2장 6절에 보면,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사람은 대단한 존재도 아닌데 이렇게 대단하게 해주십니까? 이런 뜻이잖아요. 이거 시편 8편 4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다윗이 했어요.
그런데 이 말도 이상해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이러면 이 말 뒤의 말이 어떻게 돼야 돼요? 사람을 이렇게 신경 써주고 있다면 그냥 인간이란 이유 때문에 모두 다 내가 건져줄게, 이 말이 뒤에 나와야 앞뒤가 맞아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일부러 신경을 쓰셨습니까, 이래 된다면 사람이란 이유 때문에 구원에서 탈락될 자는 아무도 없어야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기까지는 사람을 높이 떠받들고 높이는 것처럼 돼 있는데,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왜, 왜, 왜? 이 절차가 왜 필요한 데요? 사람을 생각한다면 어떤 짓을 해도 그냥 받아주고 천국 가야지요. 그런데 천사보다 못하게 하신다. 누구를? 인자를. 진짜 인간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인자를, 제대로 된 사람의 아들을, 사람으로 오신 아드님,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드님을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서는 모든 인간은 천사보다 못해요. 천사의 지배를 받으니까. 그런데 천사에 지배받는 그 인간 부류에 인자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신 분이 거기에 끼어드신 거예요. 왜? 문제는 그거에요. 왜 굳이 그래야 되는가? 왜 그것 없이는 구원이 안 되는가? 왜? 이유를 설명해드릴게요. 왜 그래야 되는가?
자, 인간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 계십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에,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 계신데 그 나라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 사는 거예요. 모든 종교에요. 이슬람부터 불교, 모든 종교가 이거에요. 미륵의 나라. 미륵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요, 불교에서. 전 우주를 통치하는 미륵에 소속돼 사는 것.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 이거 인간의 소원입니다. 인간의 희망이고. 살면서 힘들었는데 죽어서라도 낙원 봐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다음 고생한 것 만회하고. 찌질이 인생, 희망은 있어야. 찌질이 인생인데 희망마저 없으면 진짜 찌질이잖아요. 찌질이라도 뭔가 참고 견딜만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그래야 힘들지만 끝내 이기리라. 끝내 이기겠다는 그런 희망이 우리에게 삶의 활력소를 주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릴 좌절시켜버려요. 어떻게 좌절시키느냐 하면, “나 너하고 상대 안 한다. 내가 상대할 사람은 따로 내가 땅에 보내겠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분을 지목해서 응집되게 돼 있어요. 성경해석 어떻게 하는가? 목사님,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걸 잘 보여주는 것이 달고나에요. 연탄불에다가 설탕덩어리 넣고 쪽자에다 하면 사각형 각설탕이지만 열을 가하면 녹아버리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농축이라 합니다. 농축되고 물기는 증발되고.
성경해석은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나 여기 있다. 우리 부모님 계시다. 내 자식 있다. 내 남편, 아내 있다. 그리고 내 교회 있다. 내 사업체 있고 내 인생이 있고 내 과거 있다. 이걸 전부 다 쪽자에다 담고 농축시켜버려요. 농축시키면 남는 게 뭐냐? 이거 남아요. 죄, 아니면 의. 시간을 휘발해버려요. 시간과 공간을 농축해서 날려 보내면 남는 것은 ‘나’가 없어요. 내가 남는 게 아니고 죄의 재료로서의 나냐, 아니면 의의 재료로서의 나냐 그것만 남아요.
그게 로마서 6장입니다. 너는 죄의 종이었다 이 말이죠. 죄의 종인데 의의종이 될 수 없잖아요. 그럼 죄의 종에다가 누구를 해야 돼요? 달고나에 뭘 집어넣어야 돼요? 달고나에 소다 넣어야 부풀어 오르잖아요. 달고나 안 해 봤네. 형질이 변질되죠. 로마서 6장에서 내가 너와 함께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가요. 소다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가면 그 죽음으로 인하여 죄의 종이 뭐로 바뀌느냐? 의의 종으로 바꿔집니다.
그러니까 종이라는 것은 자기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안 되는 걸 종이라 해요. 주인의 이름으로만 있으면 주인 이름에 달려가는 것이지 따로 내 이름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내 이름을 안 가진다는 말은, 내가 개별자 입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나를 대표할 자격이 없다. 내 대표자는 따로 있다.
BTS입니까? 방탄소년단 좋아하는 외국의 아가씨들에게 이 목걸이를 당신이 할까요. BTS 정국이 목에다가 걸까요? 이 목걸이를 네가 찰래, BTS 정국이 목에다가 걸래,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낌없이 귀한 것을 누구한테 줍니까? BTS에게 주겠지요. 나 없어도 괜찮아.
그래서 구원이란 자기 소멸이에요. 이게 구원의 과정입니다. 자기가 소실되고 소멸돼요. 증발되니까 없어진다고요.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구원받았다, 그것 절대로 지옥 갑니다. 내가 아우라라 할까? 그것 물리학적으로선 field 장, 자기장. 전자가 부피도 없고 질량도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힘이 있어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물리학에서 그걸 질문하는 물리학과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전자 주위에 전기장이 형성돼 있다는, 물리학에선 그렇게 이야기해요. 전자에너지가 광자가 되고, 광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거기에 힘이 생긴다.
성도는 구원 못 받아요. 구원 못 받고 성도 아우라 속에 주와 함께 하는 공통의 장이 형성돼요. field가. field 장. 그 field 장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 뭘 할까’를 완전히 묵살해버려요. 왜냐하면 내 대신 인자되시는 분이 시편 8편의 예언대로 이 땅에 와서 바로 이 세상에서 고난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2장 봅시다.
히브리서 2장 9절,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한 게 진짜 조금만 못한 게 아니에요. 그게 뭐냐 하면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봤잖아요. 맛보고 난 뒤에 그다음에 11절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어디서 낳았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 하나를 하나님께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 하나, 나 하나 합해서 둘. 이걸 거부하는 거예요. 예수님 하나, 그다음에 그 하나에 끼어든 우리도 하나, 이래서 형제는 하나. 어떤 형제? 거룩한 형제 하나. 이 작업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인자, 고난 받는 과업을 작업을 했잖아요. 이것을 알아먹을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안에 누가 있기 때문에? 난쟁이들이 있기 때문에. 난쟁이들은 이걸 몰라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그다음에 작업이 그리스도의 영을 주는 거예요. 그걸 세례라 합니다. 성령세례를 줌으로써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어놓은 그 완료된 작업에다가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 거예요. 달고나 원칙, 시공간에서 자아라 하는 것은 농축해서 휘발성, 날려 보내고 이제는 네가 굳이 너라는 이름으로 살 이유가 없어졌다.
그럼 그동안 인간들이 살면서 힘들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어디서 발생된 겁니까? 아까 했잖아요. 처음에 대화,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제일 처음에 뭡니까? ‘날 건드리지 마.’ 나가 있었던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성령 받으면 뭡니까? ‘주님 건드리지 마.’ 다시 보겠습니다. 처음의 그림 보겠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둘 다 아담의 자손이에요. 아담의 자손에서 둘 다 네가 낫다, 내가 낫다 맨날 이 싸움하고 있어요. 너는 나 건드리지 마. 맨날 ‘나’ 또는 ‘날’ 건드리지 말라 합니다. 그런데 밑에서 하나님께서 기준을 만들지요. 오만한 자는 어떻게 된다? 기어이 망한다. 이게 올라갑니다. 올라가면 인간이 이 말을 알아먹을 인간 자체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왜 없느냐? 각자 악마가 난쟁이처럼 들어있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전부 다 난쟁이가 한 거예요.
디모데전서 6장 7절에서 10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무슨 뜻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성령 받았지요? 무슨 뜻인지 아셔야 되겠지요? 어떤 뜻입니까?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임시 거처라는 거예요. 살 곳이 아니다. 살만 데도 아니고 살 곳이 아니라는 거예요. 잠시 머물다 가는 휴게소 같은 마귀의 집에 우리가 잠시 태어나서 그동안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올 때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잠시 남의 집에 왔기 때문에 갈 때도 아무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은 뭐냐? 그것은 그냥 하나님이 주신 형편이고 은혜지요. 개인택시 하는 사람이 그 힘 어디서 나왔습니까? 주님의 은혜로 개인택시해서 밥벌이하고 있는 거예요. 배달의 민족인가 하고 하듯이 그런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죠.
그런데 그 뒤에 오만한 자 뭡니까? 부하려 하는 자 그다음에 뭡니까?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뭐가 있다는 거예요? 함정이 있다는 거예요. 늪이, 빠질 덫이 있다는 거예요. 덫은 어떤 사람을 모집하느냐 하면 이렇게 전봇대에 모집하고 있지요. 부자 되고 싶은 사람은 오세요, 이런 것.
대구 칠곡에 할머니들 모아 놓고 부자 되려하는 물건 팔다가 천정 내려앉아서 수십 명 부상당했잖아요. 부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부하려 시동하는 자, 나 진짜 부자 한 번 되고 싶다. 통장 60개 만들고. 부자 된 것도 아니고 부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이 세상을 조금도 추호도 떠날 마음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방금 7절에서 10절 봤잖아요. 여기서 핵심적인 해석은 우리가 보는 눈에 보이는 세계는 우리가 발을 빼야 될 세계다. 이게 머물면 안 되는 세계다. 거기에 손자가 있든 관계없어요. 지는 지 인생 살 거고. 세상 사람들은 말해요. 남편 있고 아내 있고 자식 있고 나 있고, 이게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보통 사람들 그래 이야기하잖아요. 인터뷰할 때나.
뭐가 운명이냐 하면 예언이 운명이에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우리한테 허가도 없이 허락도 없이 상의도 없이 그냥 주어진 그게 운명이지 요 내 새끼들, 이건 내 것, 이건 운명이 아니에요. 그거는 늪에 빠진 유혹에 빠진 거예요. 말씀이 나보다 더 세요. 더 세다고요.
자, 이래 알았으니까 내가 노래 가사 하나 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답변해보세요. 이 가사에 뭐가 문제인지. 현제명 작사, 작곡, 제목은 <고향 생각>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이 가사에 문제점이 뭡니까? 너무 빨랐나? 머물고자 하잖아요, 머물고자. 친구 없고 동무 없으면 달만 있으면 떠나면 될 것 아닙니까? 친구 없다고 보고 싶다고 이것저것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이래 되는 거예요.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나이가 칠십 넘은 모양이라. 자식도 안 찾아오고. 달은 왜 그리 밝은지. 밝은 달만 쳐다보니. 그런데 성경대로 보면 이 밝은 달이 그게 밝으냐 하면 자기 노동시간이었어요. 주께서 일 시킨 거예요, 달에게. 인간만 놀고 있어요. 떠날 자리에요. 외롭기 한이 없다.
이런 노래 보면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아서 처량한 가사들이 많은 데요 그중에 탑 중의 탑은,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탑은 뭐냐 하면 <산장의 여인>이에요. 그 노래는 제가 아무리 불러도 가사가…. 산장의 여인 불렀던 권혜경(1931~2008) 중 됐잖아요, 불교신자인지. 죽었어요. 남자한테 버림받고 신경질 나서 산장에 혼자 사는 그 내용이라고요. 그러니까 이것을 합해서 이야기하면 뭐를 건드리지 마라? 나를. 하나님이든 예수든 자연이든 나 건드리지 마라. 왜?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안에 난쟁이 들어있는데요.
이게 시편 73편 봅시다. 시편 73편 14절에서 16절까지 제가 읽어볼게요.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이 내용, 이게 아까 무슨 내용인지 여러분 확 안 와 닿지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자가 잠시 천사보다 못한 처참한 대우를 받는 그 대목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봐도 오만한 자가, 오만한 자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3절에 나옵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그다음에 무슨 자가 나와요? 오만한 자를 뭐다? 질투했다, 질시했다. 오만한 자 나오지요. 아까 시편 1편에도 나오잖아요. 여기 시편 73편 3절에 나오고.
오만한 자를 보고 누가 낙담을 하느냐 하면 실망을 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성도가 실망을 한 거예요. 그래서 실망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바른 소리하다가 오히려 욕만 된통 얻어먹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재앙이라 합니다. 14절에,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이걸 설명해줘야 되는데, 이것 잠언 1장과 함께 설명해드릴게요.
악은 집단적입니다. 이것 놓치면 안 돼요. 개인의 악은 없어요. 집단의 악이에요. 왜? 난쟁이와 똑같으니까. 똑같은 난쟁이 들어있으니까. 어떤 깡패가 있다. 사람 때렸다. 악하다. 그럼 그 깡패의 사고방식은 어디서 온 거죠? 때리고 돈 빼앗겠다는 것, 그 사고방식 어디서 나옵니까? 이미 그 상황 속에 사회 속에 집단화돼 있어요.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허세 떠는 것, 그걸 보면서 거기서 야아 저 정도 돼야 사람들이 함부로 날 안 건드리겠다. 나를 안 건드리는 자체적인 어떤 무장한다고 할까, 힘을 기른다 할까 그런 것을 학교에서 공부를 안 배우고 그런 것만 배우는 거예요. 어떤 집단에 속에서 나를 지키는 안전빵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함부로 나를 안 건드린다. 안 건드리면 나는 뭡니까? 나는 계속해서 존귀한 존엄한 존재가 되겠지요.
그 집단적으로 린치를 당한 거예요. 이 시편에 나오는 아삽이란 이분이. 그래서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집단이 그렇게 린치를 가하니까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15절) 뭐냐 하면 내가 뭔가 잘못되어서 그렇다든지 내가 잘못 살아서 그렇다든지 나는 여기에 대해서 그들이 과연 자꾸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들고 세상은 원래 그래야 힘 가진 자가 살아남아야 그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지금 내가 사는 이 시대에 많은 신앙인들에게 내가 심각한 누를 끼쳤다, 이래 이야기해요.
여러분, 외로운 예수님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 알아준 사람 아무도 없었지요. 근데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 갔잖아요. 가면서 시편 73편에 이 오만한 자에 의해서 피해보고 압박 받고 고난당하는 이 심정을 그대로 품고 가시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니까요. 그런데 그 때문에 심란했다 이 말이에요. 마음이 곤란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남들이 내가 고통 받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아무도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은 거예요. 왜? 악은 집단적이니까. 이미 그게 대세고 그게 옳다고 진리라고 간주된 상태니까요. 그런데 17절에 해답이 나와요. 다 같이 시작,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결국 마지막을 내가 깨달았도다. 10분 쉽시다.
20261012b 부산강의 : [시편]89(73:2)-인간 속의 난쟁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그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저런 고민들이 있어요. 분명히 내가 옳은데 세상에 사회에서 자기편이 없잖아요. 꼭 예수님 같아요, 지금 이 신앙이. 그렇다면 여기 17절이 오늘 핵심인데,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도대체 성소 그게 뭔데 거기 뭐 있어요? 해답이 거기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떤 해답이 있었기에 이제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성소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었는가, 이 점을 우리가 알아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전에는 물로써 심판받는다 했거든요. 물이 됐든 불이 됐든 심판은 심판이에요. 심판은 물 심판으로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심판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지요. 물로써 심판받는다? 아이고 다 죽었다. “아직 멀었어. 야들이 왜 이래. 심판 안 끝났어. 엄살떨지 마.” 전에는 물로 심판했지만 앞으로 뭐로 한다? 불로써 심판한다. 이게 끝이야, 라고 하는 거예요.
불로써 심판한다는 것을 마지막에 하늘이 어떻게 불바다 되는지 지켜볼까요? 아니 성경에는 그럴 필요 없어요. 마지막 오기 전에 미리 불의 심판의 장소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소에요. 그게 성소입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번에 겨울수련회에 레위기 하잖아요. 레위기 10장에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 이건 다 같이 보셔야 돼요. 할 말이 좀 있어서 그래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1절) 자, 여러분 묻습니다. 차근차근 묻습니다. 이때 불은 어디에만 어떤 지점에만 불이 있었나요? 향로 안에만 불이 있지요. 답변을 해야 진도가 나가는데. 자, 요때 성소입니다. 이 성소에 불이 어디에만 있었어요, 한정돼 있던가요? 향로에 있었지요. 향로 안에만. 분명히 맞지요.
그런데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절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자, 이 불이 향로에만 있는 불이 될까요, 안 그러면 그 두 사람이 있는 장소, 성소 전체로 불이 덮었습니까? 전체에 불이 덮었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잠재된 불 심판, 잠복된 불 심판. 유황불이 떨어져야 그래서 불 심판이 아니고 이 세상 성소가 떴다, 성소가 만들어졌다. 성소가 분명히 이스라엘에 실증적으로 실제로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은 이미 바닥에 뭐가 깔려있다? 불 심판의 요소가 카펫처럼 깔려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이 일어나는 걸 보고 작은 아버지 되는 사람, 모세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이구 건져내라. 빨리 소방서 119 전화해라” 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했어요.
누가 이야기해보세요. 어떻게 했던가요? 3절 누가 읽어보세요.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스톱. 그 뒤에 죽은 아들의 아버지는 뭐라고 합니까? 성경에 뭐라고 돼 있지요? “아론이 잠잠하니” 자기 자식 아니라고 막 신학적으로 큰 아버지가 이야기해요. (작은 아버지입니다) 작은 아버지다. 아론이 형이고 모세가 동생이니까.
모세는 자기 자식 아니라고 어떻게 돼요? 담담하게 신학적으로 정답을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거룩한 줄 알았지, 그지?” 이런 심판으로 말미암아 누가 거룩해졌다? 하나님의 거룩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형님 되는 아론은 어떻게 돼요? 동의해야 돼요, 동의 안 해야 돼요? 잠잠하면 안 되지요. 할렐루야, 뭐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 둘이 죽었는데요. 그 죽은 시체를 두 사람이 못 끌어냅니다. 다른 사람한테 지시해서 시체를 끌고 나와야 돼요. 이거는 사람이 함부로 살 수 없는 공간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래서 거룩이 있다는 말은 심판이 개시됐다는 뜻이에요. 뭘 개시한다? 거룩이 누굴 심판한다? 속된 것을 심판한다. 그러니까 그 속됨의 요소는 어디한테 있어요? 속됨의 요소는 심지어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는 잠재돼 있는 인간 안에 불 심판받을 만한 잠재된 요소가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인간을 구원하느냐, 안 하느냐 관심 없고 하나님은 뭐냐 하면 성소의 거룩성을 거룩되게 유지 보존하는 게 주님의 관심사에요. 누가 구원받았고 구원 안 받았는지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 거룩한 곳이 거룩한 곳으로 계속 지속되는 데 하나님은 일을 하십니다. 방법은 거룩하지 않은 곳과 거룩한 곳을 두고 어떻게 거룩을 드러내는가? 거룩하지 않은 것이 끼어들면 가차 없이 불로써 심판함으로서 이제 알았냐? 이곳이 거룩한 것을, 라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게 성소잖아요. 구약이잖아요. 성소가 인격화되면, 인격자가 되면 이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신약에서.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막 만지고 욕하고 뺨까지 때리고 옷 벗기고 이랬는데요? 왜 그들은 안 죽지요? 뭐 향로 불만 잘못해도 갑자기 불 심판 나타나서 급살 하는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돌로 쳐 죽이고 있잖아요. 아간, 하나님의 물건 좀 빼냈다고 집단적으로 돌로 쳐 죽이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한테는 함부로 해도 아무 탈이 없는 겁니까? 73편 봅시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2절, “나는 거의 실족할 뻔”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타고난 것은 실족해야 그게 마땅하고 당연한데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예언자잖아요. 말씀이 함께 있으니까 실족도 경험하게 하고, 실족도 경험하지만 결국 마지막은 ‘실족할 뻔했다’를 남기는 거예요. ‘미끄러질 뻔했다’의 삶.
그러면 미끄러지고 안 지고는 미끄러지는 건 우리밖에 없는데 미끄러질 뻔했다는 ‘뻔’자가 성립될 수 있도록 누가 인도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대로 붙잡아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이 오늘날 신약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우리의 일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뭡니까? 뻔-뻔-뻔-뻔, 실족할 뻔, 미끄러질 뻔, 뻔-뻔-뻔-뻔.
그러면 실족할 뻔했을 수밖에 없던 원인 제공하는 그런 쪽이 성립돼야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오만한 자들의 집단성. 대규모적으로 오만해서 그들이 오만한 줄 몰라요. 아주 특이한 성도만이 신약으로 이야기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뻔을 알지 대부분 사람은 이게 정로, 인생이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다 가는 거야. 그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거고 그게 진리라는 거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그다음에 대학 들어가서 공부하고 졸업해서 그다음에 취직하고 취업해서 청년에게 혜택주는 적금 넣어서 십 년 뒤에 이자 많이 주는 것 하고 알뜰살뜰하게 모아 아파트 청약해서 아파트 장만했다고 여자 꼬셔서 같이 살고 아이 낳고 그 뒤에 시어머니나 친정엄마 불러서 아이 키우고 자기는 둘 다 맞벌이하고 그러다 살림 조금씩 이루고 빚 갚아 나가고….
이게 실족의 길입니까? 오늘 제목 나왔다. 실족의 길, 안 그러면 제목 뭐로 할까 자꾸 신경 쓰였는데. 어떻습니까? 대부분이 이 길을 선호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한 번 봅시다. 도대체 신앙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뻔’할 수 있는 환경, 실족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줬는지 나옵니다. 4절부터 그 항목이 나와요.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건강한데 왜 죽지?)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갑자기 김정은이 생각나네)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뭐냐 하면 내가 소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희망은 돈이다. 내 마음은 돈에 다 가 있다. 더, 더, 더, 더 하는 것처럼.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이래 했는데 이 8절, 9절, 저희는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말한다 했잖아요. 이게 거만한 겁니까? 집에 돈 있어 돈 있다 했고, 병원에 안 가 본지 오래돼서 건강하다 했고, 요양병원은 나와 상관없다고 했고, 자식 잘 돼서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게 거만한 거예요?
이건 일체 거만한 것이 아니고 그쪽 세계에서는 자랑거리죠. 거만하다고 생각하면 그런 말을 안 할 거예요. “내가 이런 소리하다니 나 욕 얻어먹을 만 해.” 그럴 것 같으면 말을 안 해요. 그런데 주위에서 “어서 자랑해 봐. 어서 말을 해. 자랑할 거리를 끄집어내놔 봐. 칭찬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 주위가 전부 다 한 통속들이에요. 분위기가 이미 그쪽 분위기에요. 그러니까 시편 73편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가 과연 뻔-뻔-뻔-뻔, 미끄러질 뻔한 사람인지 안 그러면 남을 미끄러지게 만드는 사람인지 구분을 하셔야 돼요, 여기서.
마태복음 27장 24절, 특이성이 하나 나옵니다. 이게 예수님이 뭐냐 하면 성소에요. 아까 불 심판의 근거, 불 심판의 기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말씀이죠. 그 기준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성소. 성소 됨에 대해서 마태복음 27장 24절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자기 눈에 누굴 만났느냐 하면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런데 시편 전체, 또는 구약 전체에 의하면 본디오 빌라도는 누굴 만났느냐 하면 거룩한 성소, 또는 성전을 만났어요. 성전을 만났을 때 본디오 빌라도가 뭐 했습니까? 그 대목을 봅시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는데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재판하고 있는데 그 군중들이 뭘 요구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요구를 해요. 그래서 어느 강의나 설교 때 포로교환이란 말을 했어요. 너희들은 바라바 갖고 있고 나는 예수님 갖고 있는데 우리 포로교환하자. 그렇게 하니까 민중들이 반대했지요. 우리는 차라리 살인강도를 풀어주는 게 낫지 예수는 반드시 죽여야 된다, 이렇게 나왔지요. 그래서 포로교환에 실패했어요. 바라바 이야기고 그다음에 봅시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한다 했지요. 나는 무죄하다. 그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19절에,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상당히 특이점이 발생됐지요.
여러분 한 번 상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합니다. “아직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믿나?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 뭐 예수 믿는다고 해서 특별한 기적을 받았어? 안 받았잖아. 그러면 예수 안 믿고 딴 일해도 네가 원하는 돈 벌고 자식 잘 돼”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를 안 믿게 되었을 때의 낭패를 내가 감지가 됐다는 거예요.
어제 오후 설교 때 기도제목이 그거였어요. 어떻게 하면 천국 가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이걸 물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까?’ 여기에 관심을 둬야 돼요. 천국에 어떻게 갑니까, 하는 것은 바쁘다보면 교회 못 나올 수도 있고 나이 많아서 그때 교회 잘 다니고 예수 믿지, 이렇게 여유를 부릴 만한데 그때 나오는 질문이 뭡니까? “목사님,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방법은 알아두고 나이 칠십 넘으면 그때 내가 알아서 자진해서 교회 올게요.” 이런 여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질문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까, 하는 이 말은 지금 미래까지 밀어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아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까? 더불어 살다가 천국 있으면 가지, 이게 아니라 천국에 못 갈 경우에 현재 내가 했던 모든 것이 모조리 다 나가리 되는 거예요. 인생 헛발질하는 것예요, 헛수고하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 받기 때문에.
당신 교회 다니고 어떤 기적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보다 당신이 예수를 안 믿었을 때에 당신은 도저히 못 견딜 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이게 빌라도의 아내가 어젯밤에 하필 당신이 재판한다는 예수님 재판에 내가 잠을 못 잤다. 그러면 보통 남편 같으면, 수면제 먹지.
이게 수면제 먹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수면제 먹고 잠 잘 자면 되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존재의 영향력이 재판하는 당신과 우리 가정까지 이미 도달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재판을 할 때 심사숙고해서 재판을 해라. 심사숙고 정도가 아니네요. 저분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마세요. 마누라 말 들을 때가 있거든요.
이게 마누라도 그렇고 본디오 빌라도도 그렇게 안에 난쟁이 들어있어서 안 돼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안 팔려고 해도 팔수밖에 없어요. 안에 사탄이 들어있으니까. 예수를 믿고 싶어도 못 믿게 돼 있어요. 안에 난쟁이가 들어있어서. 그래서 여보 제발 교회 나와서 나랑 같이 복음 듣고 예수 믿고 복음 알아서 천국 가자, 이렇게 할 게 아니고 ‘여보’도 아니고 ‘마귀야’ 교회 가서 복음 듣고 구원받자.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어차피 좋게 이야기해도 안 믿을 것 어쩌란 말입니까.
예수님이 잡혀 있어도 성소의 기능은 제대로 다 해요.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게 오만한 자가 되는 새로운 기준이 성립된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모조리 다 오만한 자들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구약에 있는 말씀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를 죽여라, 하는 유대인만 나쁜 게 아니에요. 예수님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그 아내도 마찬가지고 본디오 빌라도도 마찬가지고 똑같아 전부 다. 예수님 사면되도록 애썼다고 그 공로를 인정해주고 이런 건 없어요. 거룩하지 않으면 모조리 속된 거고 속된 거라면 거룩의 자리에 같이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자,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점을 정리한다면 감히 인간이, 인간이 본디오 빌라도에요. 감히 빌라도가 인간이 성소를 만났다. 어떤 성소? 거룩한 성소를 인간적으로 만난 거예요. 인격적으로. 뭐 성소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만났지만 결과는 뭐냐 하면 아까 처음에 나왔던 오만한 자는 기어이 결국 망한다. 이 공식을 내는 기능은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악이라는 것이 개인적이 아니라 했지요. 악은 뭡니까? 집단적이죠. 시편 73편을 잠깐 보고 잠언서 보겠습니다. 73편 13절 봅시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그걸 그 사람한테 먹히질 않는 거예요. 그리고 11절,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는 사람은 악인일까요, 의인일까요? 어느 쪽입니까? 여기 12절에 의하면 의인이 아니고 뭡니까? 악인이죠. 그럼 의인은 어디서 생겨요? 이는 악인 때문에 미끄러질 뻔한 사람이 뭐다? 의인인 거예요. 나도 휘말려가서 나도 저렇게 예수도 믿었지만 돈도 잘 벌면 좋겠다. 미끄러질 뻔, 그걸 부러워할 뻔했다.
그런데 그 악인들이 돈만 많고 평안한 게 아니고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게 오만한 건데 자신감이 뭐냐 하면 세상 지식은 하나님보다 우리 인간들의 지식이 월등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뭘 알아요. 우리 인간의 삶은 인간의 노력과 지혜의 결실이기 때문에 인간 선에서 다뤄야지 하나님 수능 한 번 칠까 몇 점 나오는지, 이런 식이라요. AI가 수능 치니까 백점 만점에 85점 나왔다는. 그것도 점점 점수가 높아질 거예요.
이제 여러분 뻔이라는 말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 줄 아시겠지요. 미끄러질 뻔한 사람은 특이성이에요.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미끄러질 뻔한 사람도 정말 본인의 자질과 능력이라고 할 수 없어요. 아주 특이하게 주께서 붙잡아준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소의 거룩이 그 사람이 인격화되는 거룩까지 연결됐고 퍼져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제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악이 집단적이라 하는 이 점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잠언 1장 10절부터 보면,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 이 아들은 누구 아들이냐? 다윗의 아들의, 다윗의 아들, 줄줄이 아들이니까 다윗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 다윗언약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메시아 올 때까지 예수님 올 때까지 전달, 전달, 전달해야 될 핏줄로 전달해야 될 그 사람, 아드님.
이 잠언의 말은 누가 들어야 돼요? 유다 왕이 들어야 되겠지요. 다윗의 자손이니까 혈통적으로 왕이니까. 그런데 뭐 왕자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 되잖아요. 이건 좀 어렵더라도 여러분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어렵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우선 질문부터 먼저 할게요.
왕이 계급입니까? 왕이 계급이다, 계급 아니다? 계급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상병 있고 일병이 있다면 계급이 돼버리면 일병은 뭐로 올라갈 여지가 있습니까? 상병 될 여지가 있지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계급이거든요. 부르주아 계급이잖아요. 노동자 프롤레타리아가 뭘 해야 될 희망이 있어요? 자본가를 정복해서 자본가가 가진 모든 잉여소득을 원래 자기 것으로 가져올 투쟁의 명분이 생기죠. 이거는 계급이죠.
왕은 계급이 아닙니다. 뭐냐? 공백이에요. 없어요. 자리가 없어요. 왜 없느냐?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거든요. 이게 언약의 자리잖아요. 언약의 자리인데 언약은 누가 창시했어요,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이 안 만들었지요. 인간이 만든 건 사적 계약이기 때문에 이거는 인정 안 돼요. 언약은 누구냐? 하나님이 언약을 만들었잖아요.
언약이 이 땅에 오면 어떤 자리가 있어야 되잖아요. 다윗 같은 경우에 그 자리가 왕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는 하나님 자리입니다. 계급이 아니에요. 타고 올라가고 사다리로 올라가는 이게 안 돼요. 공백, 빈자리에요. 빈자리는 이 땅에서 없음이 되지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까 이 땅에는 없어요. 없음이 뭘 지배하는 방식이에요? 모든 있는 존재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이 바로 다윗 왕 계약입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 자리가 왕이라 하면 자꾸 있음이 되잖아요. 그러면 왕이 내가 있다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나는 없다고 하면 안 되고 내 자리에 누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해야 돼요. 천주교에서 누가 제일 높아요? 종교의 황제 있잖아요. 교황. 교황이 왜 있어요? 뭐를 차지하고 교황은 그 자리에 앉은 거예요? 뭐를 버리고? 말씀을 버리고, 복음을 버리고, 십자가 버리고 그 자리에 앉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천주교에서는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하죠. 그건 뭘 목적으로 한 거예요? 교황이 우두머리로 앉아 있는 천주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말씀이 수단이 돼버린 거예요. 복음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된 거예요. 교회가 있어줘야 있는 인간세계에 먹힌다는 거예요. 집에 있다가 성당 가야지, 이게 성립이 된다는 거예요. 그냥 있으면 성당 없이 신앙생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신부가 있을 이유 없고, 수녀 있을 이유 없지요. 없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해체돼버리잖아요. 말씀만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베드로 머리 위에 교회 세웠으니까 교회라는 그런 행정적인 조직체가 실체가 있어야 이게 하나님이 비로소 원하는 거란 말이죠. 그리고 거기서 뭐하냐? 정기적으로 떡/카스텔라와 포도주 먹으면서 내 살이요 이거는 피요, 뭐 이래 해줘야 그들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등록이 된다는 겁니다. 참. 여러분 보기에는 그거 미친 짓인데 그 미친 짓을 원하고 있다니까. 전부 다 난쟁이 들어있어 가지고.
잠언은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솔로몬은 예언자에요. 계시를 줘요. 예언을 줍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잠언은 뭐냐 하면 오만한 자가 어떤 자인지 보여주는 게 솔로몬의 잠언이에요. 여기에 보면 심판을 하는데요. 잠언 19장 29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감사합니다.
거만한 자=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사리분별도 못하는 상황파악 안 되는 인간을 거만한 자다. 상황파악 안 되면 말씀 알고 아무리 온순하고 겸손해도 그게 오만하고 거만한 자에요. 왜? 있음을 계속 있음을 붙들고 있으니까. 왕의 자리는 없음이에요. 없음이 잠언을 통해서 각 사람 마음속에 심어놓으면 그 있음이라는 껍데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다. 그게 잠언이에요.
근데 그 말씀을 줍니다. 내 아들아, 해놓고 그다음에 잠언 1장 11절, 그들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복수죠. 다수죠.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벌써 우리라는 게 형성돼 있고 하나 꼬시는 거예요.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 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라고 악한 자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전대가 뭐냐 하면 공동기금 마련하는 거예요. 또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만큼 기본적인 자금이 필요하잖아요. 전대, 이거는 공통의 돈으로 해서 누구 개인 돈 말고 나머지는 나눠가지자, 하는 거예요. 조직범죄단체가 되는 거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찌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이렇게 돼 있다고요.
자, 여기서 성경에서 이렇게 예언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냐 하면 있음에는 보화, 그리고 재물, 돈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예요. 있음을 유지하려면. 따라서 있음을 위해서 더 많은 보화와 재물, 돈을 위해서 타인들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이 이만큼 있다면 우리끼리는 제대로 사는 것처럼 살고, 우리를 위하여 이쪽을 죽임으로써 우리가 사는 이 일을 인간세계는 있음의 세계는 계속 영원토록 도모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악인이 있어야 의인이 생기죠. 오만한 자가 있어야 겸손한 자가 누군지 티가 나지요. 이미 인간집단은 저주 아니면 복이에요. 복 아니면 저주고. 이거는 인간들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확고한 기준에 들어오게 되면 오만한 자는 필히 어떻게 된다? 망하게 돼 있다. 어떤 자가 오만한 자냐? 그거는 인간끼리는 알 수 없고 솔로몬의 잠언의 예언에 의해서만 비로소 그게 밝혀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할 거예요. 그러면 오만하지 않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사람입니까, 뭐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마땅히 그 질문이 나와야 되겠지요. 한참 잠 올 땐데 이 질문해야 돼요. 잠언 16장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하아 참 이거 진짜, 참 어렵지요.
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5절) 필히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잠언 16장 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다음에 33절 다 같이 시작,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이 사람만이 오만한 자가 아니에요. 이거 미치는 거예요. 이거는 도대체 인간으로선 가당치도 않은 거예요. 그 대목이 잠언에 여러 군데 나와요. 아까 16장 33절 있잖아요. 그 취지, 사람이 계획을 할지라도 성취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성취하신다. 16장 9절 시작,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주님께서 이걸 보고 맞느냐, 틀리느냐를 묻는 게 아닙니다. 난쟁이 들어있는 우리한테 묻지도 않아. 필히 이렇게 되는 사람은 내가 만들고야 말리라. 이거는 인간이 솜씨 부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제사장 되어 성소에 들어가 봐야 얼마 안 가서 나답과 아비후 꼴 납니다. “아이고 하나님, 대충 어느 불이 중요합니까? 불붙여서 향 나면 되지.”
기존에 우리의 사는 방식이 우리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대충 우리 하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이것 밖에 못합니다, 그렇게 내놓는데 그건 거룩이 아니래. 그러니까 우리는 산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있을 수가 없어요. 자, 잠언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계획 세워 봐도, 계획을 세우지 말란 말이 아니에요. 계획 세우지 말라가 아니고 계획 세우게 하는 것도 누구 지시다? 주님의 지시인 거예요.
오늘 저녁에는 갈비 먹자. 이것도 뭡니까? 아니야. 겸손해야 돼. 콩나물 먹자. 콩나물도 요새 비싸. 그런 것 하란 말이 아니고 먹든지 마시든지 이거는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느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미리 그렇게 행한 사람은 없고요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사후에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뒤늦게 성도는 이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그제야 알아요.
전에 설교에서 했지만 아시안게임에서 양궁, 양궁 할 것 뭐 있어. 한국이 싹쓸이하지, 라고 했는데 여자양궁단체에서 슈슈슛 쏘니 8점, 쏘니 8점, 8점, 7점. 인도가 우승해버렸어요. 그거 은혜입니까, 은혜 아닙니까? 은혜지요. 그 은혜가 독특한 은혜에요. 그동안 10점, 10점 날린 게 누구 덕이다? 주님 덕인 거예요. 그때 얼마나 오만했습니까? 이제 금메달이다, 연금 탄다. 여자는 연금, 남자는 어디 안 간다? 군에 안 간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그러나 항상 뒤늦게 알아요. 근데 뒤늦게 아는 게 어딥니까? 그게 회개인데요. 회개한 자만이 구원받잖아요. 구원받기 위해서 회개란 것이 성립되는 상황을 악한 자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맨날 돌아서면 미끄러질 뻔하고, 또 미끄러질 뻔했어요.
시편 73편 22절 봅시다. 이제는 여러분 쉬울 거예요.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이제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미리 아는 수가 없어요. 맨날 뻔, 뻔하지 미리 아는 수가 없어요. 마음이 혹하니까요. “주의 앞에” 뭐 같아오니? 짐승. 아아,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오늘 결론은 이거에요. 짐승 됨을 즐겨라.
더 노골적으로 해서 매일같이 날마다 허무하잖아요. 이제는 허무 안 한다가 아니라 허무함을, 그다음에 뭡니까? 즐기세요. 역시 더 살아봤자 허무한데 아이고 신난다, 이런 거. 밝은 달보고 친구 안 온다고 눈물 흘리면서 뻔했는데 돌아서서는 주여 이것도 이게 바로 내가 있을 시간이 아니냐고 꼭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주인공이 안 되거든요. 그래야 구원이 책임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그때 아니까요.
25절 여기서부터는 한 소리로 해도 괜찮아요. 왜? 다 같이 기쁘니까. 시작,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뭐요?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반석이라는 이것이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 마지막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기초를 본다 했지요. 집을 짓되 반석 위에.
근데 이 반석은 우리가 반석을 끌어당겨 된 게 아니고 항상 실패하고 난 뒤에 반석이 보이게 돼 있어요. 뻔하면서 나를 붙드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결심이 아니고 나의 신앙이 아니라 주께서 목자 돼서 나를 붙들고 있구나.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아니지요. 주님을 위해서. 나는 있음이니까 없음, 말씀을 위해서 붙들어주신다 이 말입니다.
27절,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뭐하고? 망하리니. 그러니까 안 믿는 가족, 자식들, 배우자들끼리 이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잘해주세요. 어차피 사형수는 마지막에 사형 날 맛있는 것 해주잖아요. 어차피 망할 것, “엄마 나 또 돈 벌었어. 엄마 나 건강해졌어.” “혹시 너 자랑할 것 그것 말고 또 있나?” “없어.” “그러면 성경 시편 73편에 보면 그거는 망하게 돼 있는데….” 그러면 자식은 뭐라는지 알아요? “엄마가 그렇게 시범 보였잖아. 그렇게 나한테 가르쳤잖아.”
자수성가해야 사람 인정받는다고. 자수성가해야 사람이 성공하잖아요. 그런데 아까 22절에 뭡니까? 나는 주님 앞에 뭐다? 짐승이죠. 짐승을 어떻게 하라? 즐겨라. 사람 취급 못 받는 걸 즐겨라 이 말이죠.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여기 음녀가 나오는데, 음녀는 끝으로 이것만 보겠습니다. 잠언에 나와요. 아까 1장에.
잠언서도 시편도 지혜서입니다. 1장이 아니고 5장 20절,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느냐?” 이 음녀가 이방 계집인데 그 음녀가 여기 잠언 어디에 보면 제공하는 이불이 애굽 이불이에요. 애굽 침낭이에요.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잠7:16) 자체로 거룩하지 못하고 속한 더러운 민족 애굽. 애굽 민족의 사고방식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거는 뭡니까? 하나님의 거룩하고 더러운 거예요.
잠언 2장 16~19절,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자, 이제 결론 맺겠습니다. 길은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인생은 노정의 인생이에요. 길 위의 인생이에요. 머물 필요 없어요. 가기는 가요. 근데 둘 중에 하나에요. 한쪽은 천국 가고, 한쪽은 지옥 갑니다. 이거 우리가 정했어요? 하나님이 우리와 의논해서 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주님이 정했기 때문에 우리도 일방적으로 주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지옥 가고 있는 것을 방향을 계속 주님께서 천국 가도록 틀어주는 그 특이성, 당신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못하겠다는 것처럼 우리도 이 특이성, 십자가 생각하니까 갑자기 내가 세상 밝힌 것이 너무 부끄럽다 하는 그런 특이성이 우리에게 좀 자주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우리를 대신한다는 것을 우리가 깜빡했습니다. 내가 말씀을 이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용하여 말씀의 세계로 강제로 이끌 때에 세상보다 말씀의 살아 있는 능력을 늘 느끼고 늘 기쁨으로 다가오는 그런 계기로서 이 세상을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