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나팔 261011
일곱 나팔(요한계시록 8:1-2)
일곱 나팔
2026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8:1-2
(8: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8: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봉인된 계시를 뗀다는 것은 원래 세상을 계획하신 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뭘 봉인했을까요? 그것은 악마에 관한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악마를 만드셨을까요? 이 질문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인간은 아예 악마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8:21에 보면,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작 노리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악마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서만 악마가 보이지 인간에게는 악마라는 존재는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마음에 생각이나 계획하는 바가 다 악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악마 빼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들은 ’악‘, 혹은 ’악마‘를 만들어냅니다. 인간 세계의 안정성을 파괴하는 무리는 악의 무리요 악마적 존재로 간주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 가치가 엄연히 있는 존재인 줄 압니다. 하지만 노아 홍수를 그것을 거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3-7)
즉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악마의 앞잡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악마를 만드신 이유는 ’결핍을 느끼는 천사‘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주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일곱 나팔에서 7은 창조, 혹은 창조 원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나팔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여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는 뜻입니다. 즉 창조가 훼손된 것, 파괴된 창조 세계에 하나님께서 출몰하고 활동에 나서시는 것을 알리는 것이 나팔입니다. 하나님께서 방관하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시겠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창조가 훼손된 이유와 원인을 추적하시겠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의 피곤함과 우울에 대해서 표현합니다. 썩어져가는 사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등장‘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이 해방이 나타날 때 나팔을 붑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신 결과라는 겁니다. 시내산에서는 천사가 불지만 그 이후에는 이스라엘 제사장이 붑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출 19:16-17)
악마는 인간 세계를 접수하고,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결핍, 곧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메워주는 일꾼으로 부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 악마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쪽에서 뭔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나팔 소리를 나오는 곳을 찾아가 봅시다. 먼저 레위기 25:8-10를 봅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8-10)
기존 창조 세계는 악마의 지배력으로 인해 사람들이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당하신 토지를 상실하고 몸도 남의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날, 즉 49년+1년이 되는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되고 처음 창조했던 피조물 모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 피조세계가 썩어짐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희년말고 더 핵심적인 일에 전체가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궤의 출현과 관련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나팔을 붑니다. 악마에 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창조 원리로 해결에 나서십니다.
그 해결책이 보다 근원적으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궤의 등장입니다.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삼하 6:12-17) 7월 10일 대속죄일날 제사장은 옷단에 방울을 달고 휘장 속에 있는 언약궤로 홀로 다가갑니다.
염소나 소의 피를 담고 가서, 그 피를 언약궤 뚜껑에 바르게 됩니다. 그 작업을 하는 동안, 성막 바깥에서 온 백성들이 결과를 기다립니다. 만약에 대제사장이 성공적으로 작업을 마치고 무사히 다시 성막 밖으로 나온다면 온 백성은 환호성을 울립니다. 왜냐하면 1년 모든 죄에 대해서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해방이란 이런 겁니다. 마음의 무거운 책임감을 짐을 드는 겁니다. 교회는 안 빠지고 나오는데 왜 내 삶은 나아진 것이 없느냐고 스스로 의문을 던질 때에, 그것이 악마가 심어준 심보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에 드는 자세입니다. 해방이란 일체 하나님에게 더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대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덮어쒸움을 당한 상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에 쒸움을 당한 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죄사함의 혜택으로 인하여 모든 마음 짐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요한계시록 8장 1~2절(일곱 나팔)26101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8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382페이지입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아멘.
뭘 뗀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떼지를 못하고, 하나님 쪽은 다 아시는데, 전혀 인간 쪽은 눈치채지 못하는 어떤 비밀. 그것은 말씀의 비밀, 예언의 비밀, 계시의 비밀인데, 이것은 그 봉인된 비밀을 떼시는 분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계획했다는 뜻입니다. 원래 집에 현관 번호를 주인이 와서 눌러야, ‘삐비비빅~’ 하고 이렇게 열리듯이, 이 세상은 우리가 설계한 게 아니에요.
인간이 설계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 주님이 설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설계하시면서 인간 입장에서는 난해하고,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납득하기 어려운 창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사단입니다. 악마를 왜 만들었을까? 악마를 왜 만들었을까? 악마, 마귀를 왜 만들었을까? 왜 마귀의 활동을 허용하시는지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마귀를 뚫어내는 비밀이, 십자가의 비밀 못지않게 난해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먼저 악마를 왜 만드셨는가? 그것은 악마가 이루지 못한, 결핍이 돼 있는 피조물로써 악마를 만들었습니다. 악마는 천사인데요, 천사는 만들어진 자체 그걸로 족하고, 그걸로 충분하고, 그걸로 하나님께 영광이 돼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악마를 만드신 이유는 만들어진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결핍을 갖는 피조물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악마는 자기에게 마저 채우지 못한 그 미비한 것을 인간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가서 아담과 하와를 꼬셨습니다. 악마에게 결핍된 게 뭐냐? 선악과를, 하나님이 만든 선악과를 자기 것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그렇게 돌림으로써 비로소 나도 심판할 권한이 있는 하나님처럼 된다는 악마의 자기 본래 의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그 앞잡이 되어서 협조하고 종이 되었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이 악마이기 때문에, 굳이 악마라는 것을 인간은 의식을 못 해요. 악마와 함께 살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신이고, 선악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고 여기서, 그다음부터는 이 선악 지식을 가지고 신의 세계까지 설명하려고 그렇게 시도를 한 겁니다. 십자가 마을에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한 게 있어서 제가 답변을 했어요.
어떤 질문이냐 하면,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 ~ 1945년 4월 9일:독일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라는 신학자가 에덴동산에 대해서 설명한 것에 대해,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길기도 길어요. 하여튼 4용지 서너 장 되는 거 같아요. 쭉 설명을 해놨는데, 제가 답변하기를 창세기 8장 21절을 가지고 답변했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물로써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러니까 홍수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 홍수 이전에 대해서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이미 태어나면서 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냥 악한 것이 아니고, 악을 계획해요.
악을 계획하고, 그 계획한 것을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책이 있는가. 그 대책이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에 보면,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이게 대책이에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지금 인간이 생각하는 이것이 마귀의 설계이고 마귀의 계획이라는 거, 마귀가 스스로 자충만(自充滿), 완전히 스스로 충전(充塡), 완전하기를 시도하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새로 등장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게 되면, 이 피조물이 썩어짐에서 벗어나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21절까지 나와 있는데, 이미 홍수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6장에서 홍수를 통해 사람을 죽일 때, 하나님은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면, 그들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육체를 죽이는 거예요. 마귀와 함께 있는 육체를 이렇게 청소하고 죽여줘야, 하나님께서는 사람 아닌 건 사람 아닌 걸로 취급한다는 하나님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동원하는 것은 뭐냐. 창조 때, 악마가 인간에 관여해서 선악과를 탈취하기 이전에, 그 창조의 원리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동원하는데, 그게 숫자로 하면 7이에요. 7.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 보면, 나팔이 몇 개냐 하면, 일곱 나팔, 일곱 나팔을 받았다. 누가? 천사가. 악마는 안 받았어요. 악마는 분명히 여기서 안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13장 27절에 보면, 가롯유다에게 떡을 주니까 사탄이 들어갔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르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7)] 그러면 악마는 악마의 일을 속히 해요. 하고, 거기에 따라서 주님에게 준비된 주님의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거 뭐냐? 악마가 되지 않은 천사, 하나님께 대들지 않는 천사, 이 천사에게 일곱 나팔을 주었습니다. 일곱은 뭐냐? 창조의 원리를 하나님께서 악마가 대적하기에 창조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그겁니다. 나팔은 뭐냐? 여러분이 동상 제막식 하는 거 보면, 제막식 하기 전에 천으로 동상을 덮어놨어요. 지나가는 사람마다 막 궁금해 죽죠.
도대체 동상이 어떻게 생겼기에, 이렇게 사람 애간장을 녹이느냐, 뭘 이렇게 긴장하게 하느냐? 드디어 제막식이 됩니다. 거기 밧줄을 스르르 잡아당기면, 제막식 천이 흘러 내려가면서 본래, 본모습이 나오죠. 그때 만약에 축제를 신나게 하려면, 옆에서 뭘 불어주느냐 하면, 빰빠라밤빠빰!! 나팔을 불어주는 거예요. 나팔. 나팔을 부는 거예요. 그러면 실상이 드러납니다.
이 나팔은 뭐냐 하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신다는 선언적 기능을 갖고 있는 게 나팔이에요. “이제 손 좀 볼까? 이 창조의 원리가 그렇게 만만해? 창조의 원리로 딱 기다려. 이 악마야. 그리고 악마의 종들아. 내가 너희들이 악마인 것을 들춰내는 작업에 나설 게”라고 하면서, 빰빠라밤~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까지 들으면 우리가 궁금한 게, 악마가 이 세상 권세를 다 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악마의 권세를 분쇄하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창조의 원리에 준해서, 일곱 나팔을 불면서 일을 개시한다는데, 그렇다면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서 주께서 준비한 건 뭐가 되겠습니까? 그 점을, 여러분들이 그 점에 관심을 둬야 해요.
어떤 것을 준비하면 악마가 ‘졌다’ 하고 이 땅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쥐고 있다가, ‘안 되겠다. 우리는 졌다. 손 놓자’ 하고, 자기 백성을 놔주고 자기들은 지옥에 곱게 갈 수밖에 없는 그 내용이 뭐냐? 그때 뭐를 불러줘야 해요? 나팔을 불어줘야 이게 딱 그 상황에 맞잖아요. 빰빠바밤빰빰!! 악마 은퇴! 이렇게 된다는 거죠.
도대체 뭘 준비했기에, 나팔 불만해서 나팔을 준비했느냐. 그것이 레위기 25장 9절에 보면 나옵니다. 8절부터 보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여기에 또 일곱 나옵니다. 창조의 원리예요.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나팔을 분다는 것은 그동안에 채무 관계에 있어서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그 채무, 채권 관계 때문에 남의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은 이 사십구 년째가 되는 이날, 그리고 오십 년째 오는 이날, 그 7월 10일 날, 나팔을 크게 붑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어디에 예속되어 있다가 ‘꼼짝 마라’하고 있다가, 더 이상 기존에 있던 우리의, 나를 옥죄이고 얽매던 사슬이 모두 풀려날 때, 나팔을 부는 거예요.
그러면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부는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나팔 소리입니다. 해방시키는 나팔 소리. 그러면 그 나팔을 어디서 부느냐. 부는 장소도 나와 있어요. 출애굽기 19장 16~19절에 보게 되면,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19절에,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 나팔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고 하는 것은, 나팔 소리가 울리는 그 원래 지점에, 그 본래 지점에,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옆에 누가 있다? 천사가 있다. 그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분다. 그러면 그 일곱 나팔을 부는 그 현장에 누가 계시다?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단 말은, 하나님이 계시는 그 효과가, ‘모든 빚진 사람들은 이제 빚이 없습니다. 각자 자신에게 하나님이 나눠 준 자기 본토,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농사짓고 원래대로 자유인으로 사세요’라고 하나님께서 혜택을 주는 겁니다. 어떤 것도 빚지지 말라는 거죠. 어떤 것에서도 탕감되었기 때문에, 더 쉽게 말해서 그 누구에게도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건져주셨기 때문에, 건져주신 분에게 책임을 지면 안 됩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죠. 주님이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이제는 충성을 다하자는 그런 책임감은 전혀 창조의 원리와 다릅니다. 창조는, 여러분, 없는 데서 만들었어요. 없는 데서 만들었다고요. 그러면 어디로 가요? 없다고 여기고 살아야지요. 내가 없었는데, 없는 데서 생겼고, 죽었다고 여겨야죠. 죽은 데서 살았잖아요.
무슨 책임감을 해요. 계산 끝나버렸는데요. 처음부터 창조된 그대로 하는데, 무슨 부담을 가집니까. 그냥 나팔 소리 들으면 되죠. 그냥 계속 나팔 소리 들으면 돼요. 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나팔 소리와 더불어 시작된 이스라엘, 또 시내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출발해서, 아까 레위기 25장 9절에 나오는 희년까지의 모든 율법이 계속 이렇게 퍼져나가요.
산에서 빙하가 녹으면 홍수가 되어서 아래로 퍼지듯이, 산 위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서 역사에 전부 다 퍼지면서, 농사짓고, 빚지고, 가뭄 들어서, 남에게 아버지가 몸이 팔려 가고 하는 그런 상황까지 다 고려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해방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애초부터 빚을 지지 말아야지, 왜 또 하나님은 빚지게 해놓고, 힘들게 49년 동안 일하게 해놓고, 49년 지나서 50년 때 해방시키면, 그러면 49년 동안 고생한 것은 하나님께서 고생하게 만든 하나님 책임이 아니냐고 이런 식으로 따질 수가 있어요. 그냥 해방하고 나팔 불면 되지, 왜 49년 지나서 50년째, 나팔을 불고, 그때야 해방이라고 이렇게 하시는가.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건져주면,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사고방식이 작용해요. 그 점에 대해서 희년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서 누가복음 4장을 보셔야 합니다. 4장 18~20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희년에 해당하는 말씀을 전파하면서, 여기에 “눌린 자, 눈먼 자, 포로 된 자”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49년의 시간이 지나서 50년째 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뭘 설명하느냐 하면, 네가 어디에 눌려있고, 어떤 사고방식에 포로 되어있고, 어떤 것 때문에 하루하루 힘들게, 힘든 마음으로 살아가는가를, 그것을 숙성시키는데 49년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것을 아까 로마서 8장에 보면, 신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피조물 모두가 고난 속에 힘들게 보내는 세월이 그만큼 필요한 겁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0~22)
이스라엘이 힘들다고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잊을 때 힘들었느냐 하면, 사사기 2장에 이런 말씀 나와요. 10~12절에,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이제 이야기를 다 이렇게 꿰어 봤습니다. 꿰어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악마에 의해서 훼손되었을 때, 하나님의 원래 창조의 해방된 피조물로 오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고, 우상을 섬기고 죄의 포로가 된 게, 얼마나 자기 처지가 비참하게 된 사실을 몸소 체험해야 해요.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면 뭐, 여호와 모르지 뭐’
이런 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그 실생활에서 어디에 얽매어있는가를 알아야 해요. 로마서 8장 21절에서는 아까 그것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썩어가면서 고통하는 것도 그들을 자유에 이르게 해야 하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또 할 말이 생깁니다.
‘하나님 알면 되지 뭐. 나는 하나님 잘 아는데요. 예수님 잘 아는데요. 근데 삶은 나아지는 게 없는데요’ 교회는 다니는데, 교회 다니면서 복음은 아는데, 일상생활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고, 계속 매일 매일의 삶에 찌들린 압박감에서 몸부림치고 있고, 어떻게 해결책도 없어요. 그걸 간단한 말로, ‘교회 가도 나아진 것이 없다. 교회 가도 형편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유가 뭐냐? 그 이유 설명하고 설교 마치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13절부터 보면,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가지고 갑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그러니까 언약궤를 멜 때, 제사장들이 여섯 걸음 하고 스톱하고, 여섯 걸음 하고 스톱하고.
마치 함 짊어지고 신부의 집으로 오는 것과 비슷하지요. 여섯 걸음 하고 일곱 번째 멈추고, 여섯 걸음 하고 일곱 번째 멈추고, 이게 마치 옛날 찜질방에서, ‘불가마 들어갑니다’라고 하지요. 돈 내고, 잠옷 비슷한 거 입고, 불가마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는데, 벌건 불이 들어올 때, ‘아이고, 시원하다’라고 하잖아요. 창조가 들어오잖아요.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해명할, 완성 시킬 어떤 분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언약궤가 들어오는 겁니다. 약속의 상자가 들어와요. 약속의 상자가. 약속의 상자는 뭐냐. 7월 10일 날, 그때, 빰빠라~나팔 부는 그날, 7월 10일 날에 제사장이 그 염소의 피, 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 피를 언약궤 뚜껑에 발라버리면, 방울을 달고 들어가는데, 안에 들어가서 활동하면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소리가 나다가, 소리가 나다가, 드디어 일을 마치고, 딱 일을 마치고 제사장은 우리의 죄를 사했다는 것을 본인이 발견하고, 휘장을 열고 나오면 밖에서 백성들이, 관중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제사장이 나오게 되면 그걸 본 관중들이 ‘야호!!’라고 나팔을 불면서 환호해요. 왜냐 하면, 드디어 1년 치의 죄는 다 날라갔어요. 다 날라갔어요.
하나님 앞에 죄 없는 피조물이 돼요. 하나님 앞에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피조물이 된다고요. 1년 치. 이건 1년 치면 그렇게 돼요. 그걸 히브리서에 보면, 이걸 영원히 그렇게 해준 건, 예수님께서 제사장 대신 자신의 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는 영원히 죄가 없어요.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그런데 당시 레위기에, 이번 겨울 수련회에서 레위기 하는데, 레위기에서는 그 1년 치의 죄는 다 없어져요.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받아주겠다는 겁니다. 백성들은 좋아서 난리가 나죠. 그때, 왕이 된 다윗이 에봇을 입고, 춤을 추고, 15절에 보면, 나팔을 붑니다. 불가마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차요, 우리를 용서하실 분인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를 용서하실 하나님으로 우리 앞에, 여기에 현존하십니다.
여기 계십니다. 계실 뿐만 아니라, 일하십니다. 언약궤에서 자기 백성의 죄만 그냥 다 씻어줍니다. 더 이상 우리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스스로 옥죄고, 죄로 인하여 주눅들고, 돈 없다고, 몸 아프다고, 이렇게 어떤 마음에 심적 부담을 느끼지 마세요. 여러분은 몸이 아프든, 눈이 멀든, 다리를 절든, 여러분은 죄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악마의 세계에서 주께서 일을 개시하시고 완성했다는 그런 신호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 그게 나팔의 의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현장이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활동하는, 주님이 살아계시는 현장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말씀대로, 계획대로, 계획 짜진 대로, 모든 것이 자기 백성 건지는데 하등의 하자가 없음을 다시금 하나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