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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심판의 물결 261011우리교회야고보서

심판의 물결(야고보서 5:9)

심판의 물결

2026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5:9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한적하고 고요한 미국 대저택에 있는 수영장 물 가에 한 벌레가 가만히 있다고 해봅시다. 그 벌레에게 와서 적시고 빠지는 잔물결에 대해서 벌레는 그 방향과 이유를 알 이유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길 겁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무심코 살아가는 일반인들에 삶에 왔다가 사라지는 온갖 종류의 경우들에 대해서 인간들은 일일이 그 내력을 알지 못합니다.

벌레는 수영장의 크기나 비용에 대해서 알 필요없이 그저 자기 생존에 열중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기 삶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이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준비된 최후 심판에서 밀려나온 파장이요 잔잔한 물결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성질나면 원망하기 마련일 겁니다. 그리고 평소에 자신의 선함과 착함과 유지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거기서 생겨난 것이 바로 ‘나 가치 인정해 달라’는 의식입니다. 이로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원망이 발생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원망으로 인해 천국에서 안 받아준다면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는 소위 성도라고 우기면서 발생되는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께 방관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참으로 성도라면 서로 원망할 건덕지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지혜’를 받은 자가 바로 성도이기 때문이랍니다. 여기서 사도 야고보는 땅의 속성과 하늘의 지혜를 주저없이 대립시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4-18)

즉 하늘의 지혜를 실질적으로 인간 자체에 변화를 주게 된다는 겁니다. 변화없는 하늘의 지혜는 없다는 겁니다. 이 하늘의 지혜로 인한 변화 여부를 따져서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늘 세상 바깥에서 대기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옛 이스라엘의 실패성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에게 분명 율법을 ‘하늘의 지혜’로 주셨지만 그들은 실패했고 흩어져 버렸습니다.

과연 율법의 용도는 무엇인가를 이제 신약에 와서 우리 주님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모아진 ‘흩어진 12지파’에서는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겁니다. 율법의 용도는, 바로 인간들이 무슨 죄를 지을지를 미리 아는 내용이 담긴 겁니다. 인간들은 율법 안에서 다양한 죄를 아담의 속성에 준해서 펼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이 아무리 율법을 준수해도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제대로 지킬 분이 율법 안까지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의 율법을 지상에 보내시고 그 율법 속으로 죄없으신 아드님까지 들어가시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율법 안에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누구나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고 그 지식을 함유한 자아로서 저주를 이겨보려고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악한 자가 아니라 선한 자로 유지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그런 자아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입니다. 이런 자아를 가지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안에 들어오셔서 율법의 저주를 몸소 받으신 분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한 자’들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고 있기에 진정으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는 율법 안에서 대신 고난당하시고 저주받으신 예수님을 안에 자신이 미처 몰랐던 자아의 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선악 지식으로 무장한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가짜 나가 되는 겁니다. 원망이란 이처럼 자신이 기대한 자아에 대한 본인의 원망을 타인에게 터뜨리면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즉 인간은 본인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불만이고 짜증이 나고 실망스러운 겁니다. 살아도 또 살아도 자꾸만 허망한 겁니다.

이미 술에 취한 상태가 되면 한 잔에, 또 한 자를 먹어도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입니다. 가짜 나가 선악 지식으로 만족하는 이상적인 가짜 나를 성정하고 그 자아와 일치되기를 시도해보지만 목표에 도달해도 또 실망을 느끼고 허무를 느낍니다. 이런 존재를 천국에 넣어주기를 만무합니다.

천국은, 선악적으로 탁월하고 만족스러운 자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늘의 지혜가 주어지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을 받아 예언을 완수하셨습니다. 이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 어떤 원망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39)

자, 주님은 어떤 식으로 선악지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기 백성을 ‘주를 위해 사는 자’는 전환시킬까요? 그것은 예언입니다. 인간의 소원이 아닙니다. 예언은 인간의 소원을 비켜 갑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독보적이고 타협없는 단호함은 여호수아 11:20에 나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은혜되기 위해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게 만나를 내려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단지 자기를 위한 생존 차원에서 이 양식을 이해했습니다. 요호수아 5:12에 보면,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위한 양식이 아니라 만나 자체를 위해 어제부로 죽어야 될 자를 계속 살려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주어지는 젖과 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을 ‘약속’답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온 겁니다.

신약에 와서 그 최종 내막은 다 나옵니다.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4-35) 즉 주를 위해 사는 자가 곧 천국이 필요한 새로운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의 지혜가 우리들을 가만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야고보서 5장 9절(심판의 물결) 26101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9절입니다.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심판받는다.’ 무슨 그런 기준이 다 있느냐? 야고보가 너무 극단적으로 심하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알고 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서로 원망했다고 지옥이나 가라? 어떻게 극단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냔 말이죠.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그것 가지고는 구원이 안 되고, 10년째 20년째 30년째 계속 하늘에서 원망 하나 안 하나 지켜보다가 한 번 원망했다. “지옥이나 가라.” 그런 뜻인지, 야고보 사도가 어떤 취지에서 ‘원망하는 자, 형제끼리 서로 원망하는 자는 상호 심판을 받는다’라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원래 있던 열두 지파는 망했죠. 망했던 열두 지파 자신들이 회개하고 자신들이 알아서 정신 차려서 열두 지파가 다시 모인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모이도록 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렇게 모이도록 했는데 그 모이도록 하게 된 야고보서 내용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으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제공한 자에게만 율법의 온전함을 근거로 ‘그들은 천국 백성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을 완성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야고보서에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인데 노골적으로 사랑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야고보서 4장 11절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상대방에게 율법의 완성 자체가 있는데, 율법적으로 너는 이렇다 저렇다 비방해버리면 율법의 완성에 대한 공격이 되고, 율법의 완성에 대한 공격은 율법에 대한 공격이 되고, 그러면 율법의 완성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되니까 하나님을 공격하는 자가 천국에 갈 리 만무하다는 거죠. 율법 안에 있는 자를 비방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것이라면, 천국을 왜 가는데요? 천국 가서 뭐 데모할 일 있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 천국에 간다고 주장한다, 합시다. 그런데 서로 원망해요. 둘 다 천국 간다면 이 두 사람은 천국 가서도 멱살 잡을 사이에요, 천국 가서도! 그런 두 사람에게 천국에서 비자 안 나옵니다, 미국 가는 것도 비자 받아야 가듯이 천국에서 안 받아줘요.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을 안 받느냐 하면, 자기 위해 사는 사람 안 받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 사람만 받아요.

그래야 천국 가서도 주님을 위한 그 생활이 지속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심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천국 가서도 주를 위해서 살지 못할 사람을 아쌀하게 이 지상에서 판별해서 제거하겠다는 뜻이에요, 심판주가! 구분 짓겠다는 겁니다. 구분 짓는데 어떤 기준이냐? 율법을 가지고 심판할 때 어떻게 기준이 되느냐 하면, 형제간에 서로 싸우는지 안 싸우는지 그거 가지고 판정하겠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2장 4절에 보면, “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하고 또 책망을 하죠. 야고보서 3장 14-17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그런데 위로부터 온 지혜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2절에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서로 싸우는 이유가, 바로 같은 지체가 아니기 때문에 싸운다는 거예요. 둘 다 주님의 지체가 아닐 가능성이 높죠.

야고보의 이러한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았던 사람들은 바짝 긴장이 되는 거예요. ‘아, 천국을 너무 쉽게 봤구나. 너무 쉽게 봤어. 너무 안일하게 구원을 생각했지. 내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생각 못 했구나.’

예수 믿었으니까 내 욕심대로 그냥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고 생각했지 내 속의 어떤 변화, 주께서 내 내부 속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적어도 서로 원망하지 않는 사이처럼 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원망하는 것, 그거 야고보에게 딱 걸렸죠. 딱 걸린 거예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신다.’ 심판주가 문밖에 섰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땅 안에, 율법안에 여전히 속해 있다는 겁니다. 율법안에 속해 있는 거예요. 야고보가 자꾸 율법을 거론하는 이유는, 구약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만 율법이 왔거든요. 그걸 그대로 이어가는 거예요.

흩어진 열두 지파지만 이스라엘이기는 마찬가지 아니냐 하는 거예요. ‘율법의 효과, 효능은 여전히 지금도 살아있어야 하는데, 완성된 상태에서 살아있다면 너희들 가운데 서로 원망하는 것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되죠.

‘그러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평생 다하도록 두 번 다시 원망이 없으려 한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떤 율법을 지키면 두 번 다시 내 입에서 원망이 안 나오고, 그런 겁니까?’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원망하면 심판받는다고 하니까 원망을 안 해야 하잖아요. 안 하려면 ‘말씀이 우리를 원망 안 하는 자로 어떻게 전환 시키느냐?’가 초점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야고보는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라고 되어 있죠. 주의 강림, 그러니까 다시 오신다는 겁니다. 다시 오셔서 서로 원망하는 사람은 천국 가는 것에서 제거해 버리죠. “넌 천국 못 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무슨 취지로 다시 오시냐 하는 말이죠. 갔으면 갔지, 왜 또 오시는데요? 뭐 놔두고 가신 거 있어요? 분실물 있습니까?

가셨잖아요. 인간이 죽여서 죽으셨고, 부활 돼서 저쪽 하늘나라로 가셨잖아요. 무슨 볼일이 있어서 또 오시는 겁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가셨다가 또 오신다는 게! “왜 오십니까?” 막 묻고 싶어요. “주님, 왜 오시는데요? 단답형으로 답변해 주세요. ‘이것 때문에 온다.’ 이렇게 답변해 주세요. 왜 오십니까?”

주님의 답변은 이래요. “나의 일은 십자가와 부활이고, 아버지의 일은 나를 다시 이 땅에 재림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구원이 예수님 혼자 이루시는 일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이에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특징이 뭐냐? 원망이 없어요. 아버지와 인자, -인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아버지와 인자 사이에 상호 원망하는 게 없어요.

요한복음 6장 37-39절에 보면,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대해서 그걸 총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총괄하셔서 일을 다 마무리 지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점을 아셔야 되는데, 교회 오래 다니면서 사람들이 늘 궁금해하면서도 목사님에게는 이걸 묻지를 못 해요. 왜? 무식하다고 할까 봐. 그래서 묻지를 못하는데 또 염려하기는 ‘답변하는 목사도 또 무식해서 답변을 못 하면 우리 사이가 서먹해질까 봐’ 못 묻는 구절이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24장 35-36절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을 하나로 하지 않고 자기를 빼시고 아버지에게만 남아있는 일을 제시합니다. 그 일이 뭐냐? 그게 예수님 재림 날짜, 예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날짜에요. 천사도 몰라요. 재림하는 이 날짜는 예수님 소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아들 사이는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이 땅에 다시 오는 강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왜 예수님에게 숨기시는가, 왜 아버지만 알고 있느냐?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서로 원망이 없는데 그 원망 없다는 관계가 예수님이 어떤 자리에 오느냐 하면, 인간 세계, 이 세상에 오시는 그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원망이 없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원망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들께서 이 땅에 오셨어요.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죄 가운데 오신 거거든요? 고생고생하잖아요. 이 땅에 와서 죄 가운데, 지옥 가운데 고생고생하시면서 그 예수님은 아버지와 사이에 원망이 없었다, 이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이었어요. 바로 그 사람만 천국 간다는 거예요, 그 사람만! 그 사람만!! 인간은 이래야 한다고 대표 모델로 이 땅의 인간을 뽑는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곁에 계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냄으로써 인간다운 인간,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내 사랑하는 자, 오직 인자되시는 예수님만 주목하고 계신 거예요.

그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어떤 원망이 없어요. 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기 때문에 틱틱거리는게 없다, 이 말입니다. 불평함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 이유는 뭐냐? 오직 하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원망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되죠.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천국 못 가는 거예요. 뭔가 바뀌어져야 해요. 누구처럼? 이 땅에 태어난 내가 예수님처럼 바뀌어져야 해요.

바뀌는 방법은 뭐냐? 율법을 주면서 바꾸게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취지가 뭐냐 하면, 인간이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서 이 땅을 경영할 때 하나님은 그걸 다 아시고, 범죄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아시고 율법을 줬어요. 율법을 줌으로써 인간이 어떤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께서 다 아셨습니다. 율법을 만날 때 인간이 그걸 지키는 것이 아니고, 범죄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딱 하나 있어요. 그것은 따먹지 말라는 선악 지식을 따먹어서 그렇습니다. 선악 지식을 따먹어서.

따먹은 선악 지식을 누가 보유하고 있느냐? 본인이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된 거예요. 자기가 알고 있던 선과 악을 통해서 선과 악의 지식을 안고 있다는 이 자체를 자기에게 매우 가치 있고 존귀하게 여기는 겁니다. 왜 원망이 생기는가? ‘네가 뭔데 내 가치와 네가 뭔데 내 영광을 모독해?’ 이래서 원망이 생기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 삶이 엉망진창이 됐어. 물어내!” 이거 때문에 원망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데? 난 선도 알고 악도 알아. 거기에 준해서 난 바르게 살아왔어. 열심히 살아왔다고. 그런데 네가 뭔데 내 가치를 그렇게 훼손해?”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고 상대방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수준이 똑같아요. 둘 다 선악 기준에서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나 잘났거든?” “무슨 기준에 의해서?” “난 선과 악이 뭔지를 안다고. 선과 악, 선을 알고 악을 아니까 나 잘났잖아.” 저쪽에서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너만 잘났어? 나도 선과 악이 뭔지 알아.” 평생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어요.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요.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한잔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 건 마찬가지지
이 밤도 외로움에 잠 못 이루고 홀로이 별을 헨다네

<별이여 사랑이여>(사랑의 하모니, 1981)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첫 줄에 나오는 가사가 굉장히 의미심장하죠? “한 잔 또 한 잔을 마셔도 취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이걸 복음으로 번역하면 ‘하루 살고 또 살아도 허무하긴 마찬가지’예요.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왜? 오늘도 나를 위해 살고 내일도 나를 위해 살 건데, 어차피 천국에서 비자 안 나옵니다. 비자를 내줘야 가지요.

그래서 천국 가봐야 하루하루 또 자기를 위해 살 건데요? 하나님께서 헛장사 하겠어요? 천국에 가서 또 만나면 멱살 쥐고 싸울 건데요, 천국에서요? 천국에서 데모할 건데요? 교육환경 개선하라고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들 데모하듯이요. 문제는 뭐냐 하면, 자기 주제를, 선악을 이미 알았다는 이 자체를, 선악 지식을 내 손으로 나에게서 뽑아낼 재주가 없다는 거예요.

이걸 뽑아낼 재주가 없으니까 평생 살아도 날 위해 사는 것을 포기할 재주가 없어요. 치매 보험? 소용없어요. 보험 드는 것도 다 나를 위한 거 아닙니까, 나를 위함. “그러면 목사님 뭐 어떡하란 말입니까?” 자,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미국에 수영장이 있는 대저택이 있다고 해봅시다. 어떤 벌레가 물이 찰랑이는 수영장 가에 앉았다고 봅시다.

가만 앉아 있는데 바람 불 때 수영장 물결이 벌레를 적셨다가 빠졌다가 찰랑찰랑합니다. 그 벌레는 이 물결이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동쪽에서 오는지 서쪽에서 오는지, 남쪽 바람에 의한 물결인지를 알 길이 없어요. 이게 인간의 신세입니다. 인간은 가만있어도 심판의 물결이 찰랑찰랑 옵니다.

그 심판은 바로 최후의 심판, 그리고 주님이 강림하실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마무리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다시 이 땅에 다시 강림하게 하셔서 모조리 심판하는 그때의 여파, 그때의 사건에 준해서 미리 출렁이고 밀려오는 심판의 물결을 그 벌레는 원인도 모르고 뜻도 모르고 찰랑찰랑 자신의 삶 속에 접수하게 됩니다.

<터미네이터Ⅱ> 영화 보면 핵미사일이 LA 주택가에 떨어져요. 핵이 떨어지기 전인데도 젊은 엄마는 애들 데리고 놀이터에서 놀고, 평범하게 자기 아이 데리고 유치원에 데려갑니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가는 것은 일상생활 중에 하나에요. 마지막 지구 종말을 향해서 핵폭탄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자기는 애를 데리고 –방과후에 다시 만난다, 하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거예요.

최후의 심판이 들이닥치는 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하루 살고, 또 하루의 일상생활을 해요. 그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심판하기 위해서 오는 찰랑대는 파동의 여파에요. 그 파동의 여파의 출처를 우리는 알 길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일 빼놓고는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어요. 이 세상 자체가 그 전체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심판주가 지금 이 세상 바깥에 서 있다.’ 심판주가 바깥에 서 있다는 말은, ‘너희는 일상의 일 가지고 짜증내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면서, 걱정하면서 염려하면서 살 자격이나 주제가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을 통해서 그걸 미리 알면 되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을 통해 그걸 미리 알아채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뭐냐? 율법은, 인간들이 어떤 범죄를 저지를 줄 미리 아시고 주신 게 율법이에요. 율법을 줌으로써 인간이 하는 모든 것, -애 데리고 유치원에 데리고 가는 그 모든 것까지도- 율법의 촉수가 퍼져 버리면 그 어느 것 하나 심판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어요. 다 심판의 대상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그 심판의 대상에 우리 주님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에요. 주님마저 율법의 저주를 받았어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예수님이 저주받았다고 하니까 그걸 안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께서 저주를 받았다,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 같은 분도 율법에 의해 저주를 받았기에 어떤 인간도 율법에 의해서 나 잘났다, 나는 선악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애썼다는 그런 군소리가 다 저주의 대상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율법을 통해서 끽, 소리도 못 하게 만듭니다. 율법을 통해서 ‘나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데 주께서는 왜 날 안 도와줘요?’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도 죽었는데 네가 뭔데? 예수님도 저주받았는데 네가 뭔데 저주에서 빼달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율법안에서 비로소 인간은 타인과 다투는 가운데서 타인과 다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괜찮은 존재, 내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근거해서 그렇게 되지 못한 나에 대한 나의 원망, 타인에 대한 원망이 아니고 내가 나에 대한 원망, 내 모습에 대한 불평, 나에 대한 실망감, 그걸 탓하기 위해서 괜한 남을 들쑤시고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내가 안 되니까 그 탓을 남에게 분풀이하듯이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게!

날씨가 더워 보세요. “날씨가 왜 덥지?” 주님은 더운 날씨에도 오셨어요. 우리가 뭔데 날씨가 덥다고 해요? 주님도 더운 날씨에 돌아가셨는데요, 땡볕에. ‘나는 더우면 안 돼. 시원해야 해.’ 근거는? 무슨 근거에서? ‘나는 선악을 아는 기준에서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더우면 안 돼.’ 이게 바로 천국에서 비자 안 나오는 모습이에요. 그래? 너대로 너 자신을 위해 사는 것에 준비된 게 있어요. 지옥이에요, 지옥.

야고보서에서 주께서 율법으로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율법에서 의롭다 할 인간이 없어요. 야고보서 2장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쉽게 말해서 ‘율법안에서 똑같은 인간들끼리 경쟁하고 비교하지 마.’ 인간들은 이래요. 어떤 법이 있으면요, 그 법안에서 자기의 대립자를, 대립물을 만들어요.

‘나는 저 법을 지켰는데 나와 같지 않은 저 인간은 이 법을 어겼습니다’ 하고 대립물, 대립자를 만들어서 나와 저 사람의 차이를 율법을 가지고 만들어내요. 그런데 그 율법 속으로 예수님이 와버렸어요. 예수님이 옴으로서 야고보는 율법을 통해서 율법안에 너희보다 먼저 들어와 저주받으신 분을 만나라, 찾으라는 그 말입니다.

왜 찾아야 됩니까? 그분이 진짜 내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분이 진짜 내 모습이에요. 왜? 나의 죄를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그분이 나예요. 나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죄가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가짜 나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나는 가짜 나예요. 가짜 나를 진짜 나로 생각하면서 살다 보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이 진짜 나와 가짜 나 사이의 균열 때문에 열심히 하는데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돼요.

그리고 뭔가 잘 돼도 한 번 따져보세요. 따져보면 우리는 사는 게 허무해요. 못 돼도 허무하고 잘 돼도 허무하고요. “할머니! 수학 백 점 맞았어!” “그래, 백점 맞았구나. 다음에는 국어도 백 점 맞아야지?” 허무가 멈출 생각을 안 해요. 다음에 백 점 안 맞으면 또 허무할 거예요. 실패가 주는 실망감이 항상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나에 대해서 실망할 마음 태세가 준비되어 있어요. 감사? 기쁨? 그거 누구 이야기에요? 인간하고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어요. 뭐 작은 것에 감사? 우리 입장에서는 안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렇게 만든 것은 그 심판의 출렁이는 수영장의 물결이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코앞도 모르는 벌레 같은 우리에게 주의 마지막 심판은, 주님의 십자가 심판은, 주님의 영원한 저주는 이미 우리 피부 살갗에 와닿아 우리를 간질이고 있어요. 우리에게 늘 쉬지 않고 조석으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에 눈을 뜨질 못합니다. ‘율법? 안 보면 되지. 성경? 안 보면 되지.’ 이런 식이에요.

율법을 통해서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서 우리 주님을 만나라는 거예요. 주님을 만나면 주께서 우리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을 마주하는 내가 진짜 내가 아니고, 율법안에 들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 바로 바뀌어져야 할 진짜 내 모습은 이미 율법안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있다는 거예요.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은 네가 아니고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고 함께 있기 때문에, 대신한 분이 대신한 상대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이 말은 십자가 안에 있는 새로운 나와, 또 십자가 안에 있는 형제 새로운 나 둘이 만난다면 그 만남의 주선은 유일하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선하기 때문에 둘이 만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용서하심의 장field, 그 장을 형성하며 만나기 때문에 원망할 일이 없고 “반갑다, 친구야”가 되겠죠.

“반갑다, 친구야. 너도 그런 기적 받았어? 나도 그런 기적 받았는데 이 세상에 주께서 아직 일하시는 모양이다. 이런 기적이 이렇게 생기다니. 너나 나나 이렇게 죄인 됨에도 불구하고 구원되는 것은 다 주님의 덕분이잖아.” “그렇지!” 그게 바로 주를 위한 일이에요. 그게 주를 위한 일이에요! 그 순간이 계속 하루하루고, 하루 또 살고 하루 또 살면 그게 그대로 비자 받고 천국 가면 천국에서 맨 그 생활 하는 거예요.

‘천국 가서 본격적으로 뭘 하겠다’라는 그런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나는 가짜였다’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작업, 그 작업을 주님께서 하나님의 은사를 통해서, –야고보서에서는 은사라고 해요. 야고보서 1장에도 나와요. 위에서 오는 은사라고. 3장에서도 그랬고- 오직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통해서 하시는데 이런 지혜가 어디서 오는가?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지혜를 왜 주는데요? 주님께서 이 땅에 있다가 주께서 율법을 완성한 것을 지혜라고 하고, 위로 올라가서 그 지혜를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시면 우리는 낯선 것, 이 땅에서 찾을 수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 말씀처럼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잉여라고 해요- 잉여, 덤, 여분의 것, 내가 행함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여분의 것이 하늘의 지혜로서 이 땅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야고보서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가 이미 구약 때부터도 분명하게 있었을 거예요. 그래야 일관성이, 연속성이 있으니까요. 구약에서의 그 이스라엘 내부에서 원망이 있었을 건데 그 원망의 이유가 뭐냐? 그 원망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동일한 생존 환경을 선점하려는 투쟁.’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일한 생존 환경을 선점하려는 투쟁, 이것 때문에 서로 원망했던 거예요.

같은 기수로 대학에 입학한 동창생이 둘 다 군에 다녀오고 복학해서 3학년, 4학년을 다 마치고 졸업 날이 가까이 왔어요. 공과 대학인데 둘이 너무 친하게 잘 지낸 거예요. 졸업할 때가 되니 집안에서 잔뜩 기대하잖아요. ‘공납금 대는 것도 이제 부담스럽다. 네가 취직해서 돈 모아서 장가가라.’ 이런 기대가 가족에게서 오지요.

교수님이 “석유 공사에서 한 자리 나왔는데 둘이 친하니 알아서 하나 정해서 가라. 추천장이면 그냥 들어간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에요. 군대까지 하면 6년 간의 우정, 한 방에 다 날아갑니다. 의리? 소용없습니다. 동일한 생존 환경을 선점, 먼저 쥐는 게 임자잖아요. 투쟁할 수밖에 없어요. 친구 보고 “내가 집안 사정이 안 좋다. 다음에 더 좋은 자리 나올 테니까 나에게 양보해라, 친구야!”

먼저 선방 딱 때리니까 저쪽에서는 “사실은 나도 형편이…” 이런 말이 차마 안 나오죠. “그래 너 해라. 다음에 좋은 기회 있겠지.” 여기에 대해서 선방 날린 친구는 간단하죠. “친구야, 고맙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렇게 그 친구는 취직해서 들어가고, 그다음에 좋은 자리가 또 날 줄 알았더니 석유 파동 오더니 좋은 자리에 취직 못 했어요. 평생 고생해요.

자, 어느 쪽이 원망하겠어요? 이 이야기가 민수기 32장에 나옵니다. 1절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되는데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약속의 땅 근처에 가보니까 야~, 목초지가 좋거든요. 사막에서 고생고생하면서 기어 올라오다가 갑자기 “저 푸른 초원 위에~”하고 목초지가 나오니까 “나 안 갈래, 안 갈래! 굳이 거기 들어갈 필요 없어. 여기서 좋사오니~” 거기에 그만 눌러앉겠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예요.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래서는 안 돼요. 왜 이스라엘은 그래서는 안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예언이 있습니다.

아까 집사님 기도하신 내용대로 하나님의 언약, 예언이 있어요, 예언이! 그 예언을 정확하게, 정말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딱 찍어서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 여호수아 11장 20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생존이 급해서 목초지 좋~다고 그걸 먼저 선점했던 루우벤과 갓 자손, 그다음에 므낫세 반 지파, 이들 제일 먼저 잘렸습니다. 제일 먼저 잘렸어요. 쉽게 생각하면 이래요. “하나님이여, 저의 소원 들어주세요”라고 교회 나오잖아요. 답변은 뭐냐 하면, “나는 예언대로 한다.” 이게 답변이에요. “예언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아까 여호수아 11장 20절의 말씀처럼 “은혜받을 자는 은혜받게 하되 은혜받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은혜를 못 받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를 구원할 생각이 없어요. 참 야박하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 이 말씀은 외워도 괜찮아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가진 믿음을 공유해야 해요. 이것은 하늘에서 온 믿음이에요.

선악을 아는 지식에서 나온 믿음은 하늘나라 비자가 안 나옵니다. 오늘 비자 안 나온다는 말을 왜 이리 자주 하는지 모르겠다. 비자가 안 나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미국 문화원을 불 지른 인간은 미국에서 안 받아주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 교회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수천수만의 교회가 전부 다 자기의 소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데 그 교회에 비자 한 장이라도 오겠습니까? 한 장도 안 오지요, 그 교회에는.

살아 있을 때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 안 바뀌었으니까, 비자가 안 나오는 거예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 믿음 나한테 가져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네가 만들어낸 믿음이잖아요, 나 위주로 네가! ‘나는 선악 지식으로 착하고 싶어서 환장했어. 나는 너무너무 착해. 나는 나쁜 짓 안 하고 착한 일만 했어. 그러니까 이런 나를 나는 믿어야 해.’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율법 속에 저주받는 주님을 만나 본 적이 있나? 그 주님하고 너하고 바꿀 생각이 없지, 그치? 죄 없는 주님은 율법안에서 저주받았는데 네가 뭔데 율법 앞에서 ‘나는 저주받으면 안 돼요.’ 그렇게 우기기 있어, 없어? 그렇게 우기면 안 되잖아. 그것은 가짜잖아. 너는 가짜야. 네가 생각하는 너는 가짜야. 태어날 때부터 너는 너밖에 몰랐어. 그래가지고 천국을 가? 누구 맘대로?”

여러분, 타인에 대한 원망은 나에 대한 원망이고, 나에 대한 원망은 가룟유다의 원망이고 가룟유다의 원망은 누구에 대한 원망이냐? 주님한테 원망하는 거예요. 하나님한테 원망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천국 간다? 그것은 앞뒤가 안 맞지요. 이제 남은 문제는 딱 하나에요. 뭐냐 하면, 인간은 고집이 있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현재의 자기를 못 버립니다. 이거 안 버려져요. 허무해도 자기는 그 허무를 감수하고 살겠다는 거예요.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을 마셔도 아까 취한 것과 똑같이 취해요. 이 세상에 푹 취해 있어요. 늘 세상은 이 세상에 취해 있습니다. 유튜브에 취해 있고, 뉴스에 취해 있고, 펀드에 취해 있고, 세상 밥 먹고 사는 데 취해 있어서 이 취함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책도 없고 그냥 늘 세상 유혹에 취하면서 ‘그게 인생이지 뭐. 무슨 대수 있어?’ 이런 식으로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해결책이 없어요.

해결책은 없는데 주님께서는 이 율법을 통해서 해결책을 주십니다. 그 경로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40년 동안 만나가 내려왔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에 애굽과 약속의 땅의 그 사이에 있던 사막, 광야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줬어요.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어려울 때 만나를 주셨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가도 만나를 계속 주셨으면 참 좋겠다.’ 그런데 여호수아 5장 12절에 가니까 어? 약속의 땅에 왔을 그때 갑자기 늘 새벽마다 오던 만나가 없어졌어요. 오지를 않아요. 만나가 없어요.

그러면 만나가 뭐로 변했느냐? 만나가 뭐로 변했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나는 젖과 꿀로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아, 전에는 만나를 먹고 살았는데 이제는 젖과 꿀을 먹고 살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이게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그 만나는 이미 인간이 죽었다고 치고 주는 만나에요. 죽었다고 치고 주는 겁니다. 어제부로 죽었어요.

그리고 오늘 보니까 만나가 먼저 있고 만나 먹을 우리가 만나 먹으라고 오늘 하루치 생명을 부여받은 거예요. 만나는 생명이에요. 말씀입니다. 만나 먹고 살아 있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만나가 살아 있기 위해서 죽어야 될 우리가 오늘 새로 태어난 거예요. 새로 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약속의 땅에 가면, 약속을 살리기 위해서, -약속이 살면 젖과 꿀이 계속 유지되니까, 약속이 없으면 젖과 꿀도 없으니까- 약속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하루치의 삶을 보장받는 거예요. 약속을 위해서입니다.

약속은 뭐냐? 예언입니다. “너희들만큼은 은혜를 입었고, 그렇지 않고 약속의 땅에 살던 이 원래의 거주민들은 은혜를 입지 못하고 절멸, 멸절되어야 해.” 하나님의 그 작업에 너희가 참여되고 동참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 가나안땅의 족속들은 왜 죽습니까? 죄가 관영해서 죽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안 죽습니까? 약속을 살리기 위해서 진즉에 죽어야 할 너희를 ‘약속이 살아있지, 네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도 살려주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약속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와서 유대인들은 역시 생존, 생존! 석유공사, 석유공사! 의리고 뭐고 없어요. 친구고 뭐고 간에 내가 살고 보는 것이 우선이지요. 살아봤자 허무한데 허무해도 살고 싶은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떡 떼는데 따라온 사람들과 제자들이 이야기해요. “우리에게 만나를 주옵소서”(요 6:34). 또 자기 살게 해달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31-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하늘에서 주는 참 떡은 내가 떡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야. 나를 먹으면 살고 나 없으면 죽어.” 이런 거예요. “어떻게 떡이 우리에게 옵니까?” “내가 내 살을 쪼개서 내가 피를 흘려서 생명의 떡이 너희 속에 들어가도록 해 줄게.” 그 대신 내가 죽었을 때 과거의 너는 죽었고, 내가 살아 있을 때 너는 너 대신, 죄인 대신이라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너는 죄인의 자격으로 죄인 대신이라는 말씀에 끼어들어야 해요. 기입이 되어야 해요. 주께서 우리를 ‘죄인 대신’으로 받아줬다는 그 말씀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심판주가 강림하신다는 그 말씀을 위해서 너는 원망하지 말고, 주님의 재림의 날, 강림의 날을 위해서 이 세상이 떠나야 될 곳인 것을 아셔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자가 뭐냐? 신자는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짐 싸서 떠나는 거예요. 정치를 누가 하든지, 민주당이 하든지 국민의 힘이 하든지 그냥 놔두고 우리는 이삿짐 싸서 ‘나 여기 안 산다. 우리는 떠난다.’ 하면서 늘 떠날 준비 하는 그 기쁨과 감사로 서로 원망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우리가 아는 선악 지식으로 파악하지 말고, 예수님의 생명 앞에서 왜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는지 그 사실이 우리 몸속에 들어올 때 우리가 주님의 속죄를 위해서 죄인으로 부름받은 천국 백성인 것을 새삼 감사하면서 살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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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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