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생명수 261004
성전의 생명수(요한계시록 7:13-17)
성전의 생명수
2026년 10월 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7:13-17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인간 세계에 생명, 즉 영생이 없다는 점을 평소에 우리 인간들은 중요시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원하는 바에만 관심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에게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포자기하듯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영생의 생명수도 없는데 과연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생이 없는 것은 ‘살았다’ 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죽었다’ 고 단정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이 말에 흔쾌히 동의할 마음이 없는 것은 결국 영생 얻은 자에게 구박하고 핍박하고 모멸하는 이유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로와 사도 요한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서 심한 모욕을 받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 공통점은 모든 믿음의 계열에 속한 전체에 해당됩니다. “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성경에 이런 본문이 나왔다고 해서 기존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사모하거나 흉내 내거나 연출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에 해당됩니다. 즉 신앙인 본인도 세상에 속했지만 그 세상에 속해서 본인들이 가진 기대치로 자신을 신앙적 삶을 형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고생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이 전혀 없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요소가 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배 신앙인이 사도 요한에 천국 입성이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된 사람’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올 수 있는 현상일까요?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 안에서 이런 능력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계 7:15) 구약에서 성전은 기도가 향하는 곳입니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6)
즉 성전의 존재 가치를 위해 인간들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생명이나 영생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영생이 나오는 이 제단, 곧 성전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지상의 누구를 상대해서요? 성막은 모세를 통해서 만들었지만 성전은 다윗을 통해서 만들었습니다.
단, 다윗 본인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후손을 통해서 성전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자리에 있는 다윗이 보여줄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은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삼하 12:24-25)
즉 ‘죄인의 자손’에서 ‘사랑’이 나와 버린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기능입니다. 이와같은 사례는 신약에도 나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 7:37-39)
이 죄 많은 여인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죄많은 자신의 몸체가 직접 주님 몸에 닿는 것을 마다하고 머리털로 예수님을 발을 울면서 씻었습니다. 그녀는 막대한 향수를 들고 한꺼번에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전부를 드려서 예수님의 몸 자체를 향기나게 했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향수는 주님 자체가 뿜어내는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선전 기능에서 나오는 ‘사랑의 일관성’은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인 솔로몬에서 맡기면서 역사 속에 노골화됩니다.
요나의 경우를 봅시다. 요나는 스스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쫓겨난 그 죽음의 공간에서 성소를 바라보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시편 18:6의 원칙이 여전히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6)
오늘 본문에 보면, ‘생명수’가 나옵니다. 과연 구약의 성전이 생명수‘를 유발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올까요? 이점에 대해서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에 나옵니다. 솔로몬은 술라미 여인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전신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가 생명으로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이 생명의 충만의 바탕과 근원은 인간 자체의 생명수의 터전이 된다는 겁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아 4:11-15)
즉 솔로몬은 자신의 여인에게서 사랑에서 나온 생명의 넘쳐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가 8장에서 이 사랑을 막아설 그 어떤 지옥의 불도 없다는 겁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인간 세상에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바가 ’사랑의 시작‘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요한계시록 7장 13~17절(성전의 생명수)26100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7장 13~17절입니다. 신약성경 381페이지입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아멘.
선배가 있었어요. 장로라고 돼 있죠. 후배가 나오는데, 후배는 사도 요한입니다. 선배와 후배가, 둘 다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그 공통점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의도나 자기의 기대치와 전혀 상관없이 주님한테 일방적으로 이끌림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끌림을 받았는지는 히브리서 11장 36~37절에 보면 나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고 이렇게 돼있요. 이것을 본인들이 의도해서 이런 인생을 힘들게 살아온 게 결코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이걸 기대하고, 이걸 원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렇게 몰아세웠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바로 히브리서 11장 3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세상이 감당한다고 말하는 본인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본인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본인하고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그런 식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그런데 39절에 보니까,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라고 되어있어요. 결국 성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 나쁘겠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시련받고, 인간에게 밉상 받고, 처참하게 인간에게 도외시 되었는가를,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증거를 두 번째, 세 번째, 각 시대마다, 자기 사람에게 증거로 도장을 찍어버린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감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 증거를 받은 사람은 그 증거의 힘 때문에, 본인의 의지가 아니고 그 증거가 있음에, 그 증거로 인하여, 이 사람들도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서 굳이 악행을 받고, 굳이 희롱과 채찍을 받고자 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의도적으로 연출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난받는 연출, 주님 가신 길을 의도적으로 가고자 애쓰지 마세요.
가만히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도대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인간이다” 그러면 우리는, ‘제가 뭘 했다고요?’ 네가 한 게 없으니까, 감당을 못하지. 세상이 감당을 못하지. 세상 사람들을 한번 봐라. 전부 다 조금만 해도 자기가 노동한 거, 애쓴 거, 인생 살면서 누구를 도와줬던 거, 그거 하나하나 전부 다 끌어 끌어모아 놓고, 간당간당하면서 그것 가지고, ‘나는 너한테 이렇게, 이렇게 해줬잖아. 내가 이만큼 공들였잖아. 그러니까 내가 기대한 것처럼 너도 나한테 원하는 대로 해줘’라는 그런 초조와 불안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불신자들이에요.
쪼금 뭐 해 놓고, 그걸 떠버리고, 광고하고 하는 그 사람들. 그런데 성도는 ‘제가 뭘 했는데요, 제가 뭘?’ 이런 식이에요. ‘제가 뭘 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소문이 좋지 않게 난 어떤 여자가 예수님 발 앞에 엎어져서, 비싼 향수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전신에다가 바르고, 발에다가 바르고, 차마 자기 손으로 씻지를 못하고, 죄 많은 자기 손이 접근하는 거, 접촉하는 것조차도 이거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해서, 자기 머리카락 가지고 예수님의 발을 씻으니까, 그 여인의 향수가 그 집 안에, 그 시몬, 바리새인 집 안에 환하게 다 퍼졌어요.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 7:37-39)
그것을 예수님은 사랑의 표현, 사랑의 향기라고 본 겁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7:47~48)
어느 인간이 예수를 봐도, 예수님의 사랑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어요. 거의 없어요.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사랑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기가 향수를 드렸지만, 이거는 주님 자체가 향기예요. 주님 자체가 샤넬 넘버 파이브(CHANEL NO.5)예요. 주님 자체의 향기에 내가 끌어모은 향수는 향기 근처도 안 갔어요. 아주 흉한 냄새죠. 아까 낮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요. 내가 하는 모든 노동과 성실함, 열성은 죽음의 냄새일 뿐이에요.
하늘나라에 통하지를 않죠. 안 통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많이 사랑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주님 빼고, 나 빼면, 남는 것은 사랑밖에 없어요. 사랑밖에 난 몰라. 사랑만 남는 거예요. 한 번은 용서해 주시고, 한 번은 용서해 주시는 사랑과 그리고 그것이 도달해서 용서받게 된 결과물, 그것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고, 사랑이야 뭐 기분상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의 사실성, 실제성은 오늘 본문에 피로 나와요. 피. 말로만 사랑, 사랑이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잖아요. 말로만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귀한 목숨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악마가 다스리는 인간 세계에서 어떤 아이큐(IQ) 높은 사람, 어떤 지혜 지식에서도 끄집어 나올 수 없는 개념이 하나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죽는 하나님’ 개념이에요. 죽는 하나님 외에는 다 가짜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어떻고, 사랑이 넘치고 뭐고 다 치우고, 우리가 우리에게 실제로 도달된 것은 죄 씻을 때 피로써 씻었다는, 죽는 하나님에서 나온 그 피로만 접착제가 되는, 피로만 본드가 되어 만남이 되는 그 관계, 그 관계를 여기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고생했죠.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선배들, 장로들 고생했죠. 순교자들이니까 고생했지요. 고생했지만, 어느 누구도 내가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그 피 앞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살려줬는데, 뭐 고생한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건데, ‘하나님, 고생했다고 구원 안 되는 거 맞지요?’ “맞지” 그거 알면 되잖아요. 내가 고생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피 때문에, 나의 고생과 피는 견줄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도 살면서 참, 고생 많이 합니다. 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을 것인가, 칼국수를 먹을 것인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저 옷을 입을 것인가, 40만 원짜리 입을 것인가, 50만 원짜리 살까, 옷 사러 가서 30분 동안 고생, 고생. 인간은 본인이 고생 아니라고 느낀 적이 없어요. 전부 다 고생이에요. 편의점에 알바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뒤에서 담배 피우고 하는 고생, 그걸 보면서 또 속 터지는 고생.
‘내가 사는데 이렇게 고생합니다’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죽으시게 하는 이유가 된 거예요. 내 생각, 내 노동의 가치, 그런 것들이 주님을 또 고생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피를 흘렸다. 그러면 주께서 피를 흘렸는데, 어떻게 죄 사함이 되느냐, 이것이 구약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를 이렇게 따져볼 수 있어요.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 대목, 이 대목은 예언이 돼 있어요. 시편 18편 6절에 예언돼 있습니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성전에서 비로소 듣는 거예요. 그래서 성전에서 사람들은 부르짖습니다.
그 예시 중 하나가 요나입니다. 요나의 사실성 현실성은 요나가 물에 빠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요나가 원래 물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부산에 나타난 상어가 아닙니다. 이건 바다로 가라 해도 안 가요. 그냥 인간은 뭍에서 사는 존재지, 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의 환경이에요.
그 환경 속에서 요나는 기도를 이렇게 합니다. ‘나는 죽어도 성전은 멀쩡하잖아요’라는 그런 식이죠. 요나 2장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알아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쫓겨난 자기와 성전을 바꿔버립니다. 성전의 범위가 쫓겨난 내 자리까지, 성전의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거예요.
뭐 대단한 고무줄이죠. 대단한 고무줄. 아마 지옥 가도 튕겨서 하늘나라 갈 거예요. 마치 주님처럼, 음부에 갔더라도 사흘 만에 살아날걸요.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이 악한 세대가 배울 것은 뭐냐, 나에게서 발견할 것은, 나를 나로 보지 말고 요나로 보아라. 요나, 요나의 표적을 보아라. 요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 내가 지금 그 요나의 예언대로 갈 참이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요나나 예수님이나 그리고 이 다윗의 시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성전의 효과입니다. 성전의 능력. 인간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예외 없습니다. ‘나 대통령은...’ 이렇게 기자회견 하면 안 되죠. ‘나, 곧 죽을 나 이재명은...’ 이렇게 돼야죠. 이렇게 돼야죠. 또 이러면 우파라고 하니까, 좌파를 또 편들어야죠.
‘나 대법원장은...’ 이러면 안 돼요. ‘나, 곧 죽을 대법원장이요. 나, 곧 죽을 한동훈이요’라고 이렇게 돼야죠. 자기를 표현할 때, 쫓겨날지라도 성전을 바라본다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기자회견을 해야지요. 정치인한테 그런 거는 기대하지 맙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궁금한 것은, 도대체 성전은 누가 만들었고, 성전에는 뭐가 있기에, 죽을 수 있는 자도 성전에서 영생을 얻는 이유가 뭐냐.
성전을 누가 만들었냐? 성전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거는 뻔한 이야기고, 성전을 하나님이 만든 거는 아는데, 이 땅에서 누구하고 짝해서 만들었냐. 그게 누구냐면, 다윗입니다. 다윗 이전에는 성전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성전 만들기를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만들 때 조건이, 다윗이 성전을 만들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다윗과 성전을 맺은 거예요.
다윗이 성전을 만들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러면 누가 만듭니까?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성전을 만든다. 그러면 다윗이 죄인이라면, 죄인의 자손은 죄인이잖아요. 죄인의 자손에서 무슨 거룩한 성전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다윗은 죄인 맞아요. 그러나 그 죄인에서 뭐가 나오냐? 하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그 사랑으로 낳은 자식 이름이 여디디야(Jedidah)예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 그게 누구냐? 바로 솔로몬이에요. 사무엘하 12장 24~25절에,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솔로몬이라는 이름 따로 있고, 선지자를 보내서, 그 선지자 이름은 나단 선지자,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여디디야’라는, 인간의 죽을 이름 위에 생명의, 사랑의 이름으로 덮쳐놨어요. 생명의 이름으로 덮쳐 놓으니까 그게 뭐냐. 바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 성전, 그 자체입니다. 여기 다윗이 밧세바와 다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밧세바가 있어 줘야, 자기가 이 성전 세울 때, 자기가 죄인이며, 자기 노동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밧세바를 통해서 드러나는 거죠.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면서, 인간을 배제해야 사랑이 남지요. 아까 그 죄 많은 여인이 향수를 뿌리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성전은 뭐냐? 죄인이 들어가서 용서받아서 영생을 얻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 이거는 모세 때는 이게 단위적으로, 집단적인 단위적으로, 그때 그 시대에, 다윗 오기 전에, 그 시대의 언약에서는 장막이라고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그렇다 치고, 과연 이 성전에서, 과연, 과연 거기서 생명이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16절에 이래 돼 있어요.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생명수 샘으로 인도한다. 어디서? 성전이 있는 곳이 생명수 샘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구약에서, 이미 예언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미리 해 주셨어요? 하나님께 이렇게 물으면, 하나님께서 미리 해 주셨어요. 누구를 통해서? 솔로몬을 통해서요. 솔로몬은 그냥 성전 세웠지, 거기에 뭐 생명수 샘이 없지 않습니까? 그 솔로몬에게 생명수 샘이 있습니다. 어딘데요? 사람이에요. 누구? 술람미 여인. 아가서에 나옵니다.
사람이, 생명수를 듬뿍 먹은 사람이 다윗의 자손의 대표자인 솔로몬의 아내가 돼요. 사랑하는 아내가 됩니다. 그리고 가족이 돼요. “내 사랑하는 비둘기야” 그리고 “나의 누이야” 원래부터 한 가족이라는 거예요. 그냥 비둘기가 아니고 삐둘기. 이 ‘삐’자를 강조해서, “나의 사랑하는 삐둘기야” 아가서 4장 12~15절에 보면, 자기의 사랑하는 여인의 벌거벗은 신체 구조를 통해서, 거기에 생명이, 생명 샘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4장 3절부터 보면,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왕이 보기에 반할 만하고 다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의 원천은 뭐냐?
생명수에서 나와요. 생명수에서. 거기 12~15절에 나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생명수를 먹었던 솔로몬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서, 솔로몬이 갖고 있던 성전의 효과가 어디까지 번진다. 솔로몬과 혼인한 자기 신부한테 효과가 번진다. 따라서 신약에 오면 “너희가 나의 성전이다”라고 했어요. 너희가.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고린도후서 6장 16절 너희는 나의 성전이고, 나의 신부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6:16)
곧, 내가 준 생명수가 펄펄 나오는 나의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해줄 샘터가 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떡을 주옵소서’라고 하니까, 그 떡을, 영생을 주는 떡을 주옵소서 하니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은 “떡을 먹는다”라고 나오는데, 아가서에서는 “네가 생수가 펄펄 넘치는, 바로 나의 우물이다. 생명수다” 이 관계를 아가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끝으로, 그러면 아가서에서 이 사랑은 무엇을 이기는가? 아가서 8장 6절에 보면,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절에,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게 바로 피로 우리에게 죄 사해 주고, 우리를 사랑이라고 받아주신 그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계약적 위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관찰하는 현실이 아니라, 이 세상 현실의 본질이 말씀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이고, 끝까지 사랑이고, 영원한 사랑, 그 사랑으로 인하여 생명수에서 24 장로와 더불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날을 감사히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