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만드는 인내 261004
현실을 만드는 인내(야고보서 5:7-8)
현실을 만드는 인내
2026년 10월 4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5:7-8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하나님의 일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청을 거부하고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벌써부터 마음 먹으신 대로 밀어붙이십니다. 그리고 그 끝은 영생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긁어모아 자아라는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90:10에서는 그 결말을 다음과 같이 밝혀주십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인간은 자신이 없어짐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 몸에서 송장 썩는 냄새가 피어나는 것을 모릅니다. 인간의 구성을 오래가지 못하는 것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저주’라고 말합니다. 영생이 아니니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저주의 반대편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복이 있습니다. 복은 중도에 사라지는 것으로 짜여져 있지 않습니다. 오래가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가는 것들만 채워져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저주에서 복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첫째 국가로부터 심문받습니다. 즉 영원한 것이 허망한 것들에게 심문을 당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22:17:21에 보면,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 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그 심문하는 자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 나를 심문하는지 그 정체가 들키게 마련입니다. 황제(가이사)의 형성이 새겨진 동전은 그저 황에게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는 자는 그냥 하나님께 드리면 그만인 겁니다.
오늘날도 성도는 이런 차원에서 늘 세상으로부터 심문받고 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이러한 특이성은, 그 특이성을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 심판이 합당함을 보이게 됩니다. 신약에서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 성신받은 자들이 나옵니다. 다윗입니다. 그리고 악신받은 자도 나옵니다. 사울왕입니다.
성신을 입은 다윗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어떤 차원에서 참고 또 참았는지를 그 시대에 미리 알려집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에,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환호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삼상 21:11) 이럴 때, 사울왕은 참지 못하고 다윗을 이미 죽은 자로 선언해놓고서는 색출 작전에 돌입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사무엘상 23장에서, 그일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군인들에 의해 침노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과 공조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다윗은 결코 자기 일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성신이 임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전의 사람으로 그냥 그렇게 두게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렛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삼상 23:3-4)
성도는 홀로 참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심과 동참에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집요하게 쫓겨다니는 이유는 그래야 진정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봐야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승리하는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전에 써먹었던 방식을 또 다시 활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로부터 심문 다음에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자신을 심문하는 절차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사무엘하 5장에서 하나님께서 또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게 하십니다. 전에 썼던 방식을 또 써먹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코 자신을 믿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다윗은 새로운 방식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삼하 5:22-25)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인내심’에 동조하는 모습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의 지배자 앞에 심문받을 때의 그 고초와 인내를 다윗으로 하여금 미리 겪게 하는 겁니다. 단지 국가로부터 심문받았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적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 자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대표해서 주님은 12제자를 뽑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 사단, 곧 가룟 유다입니다. 그의 자살은 순간적으로 욱해서 죽은 죽음이 아닙니다. 이모저모 꼼꼼히 따져 볼 때에 그는 도저히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손으로 자기를 처분했습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받은 저주는 최후의 적인 사망(고전 15:26)을 장악하므로서 더는 예수 안에서 사망이 왕노릇을 못하게 하시려는 처방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 마저도 자기 자신 앞에서 심문받아야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에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이것이 바로 인내가 갖는 사실성이요 현실성입니다. 이 주님의 인내에 의해서 진정 이 세상은 이런 환경과 현실을 갖게 된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으로 구성되는 새로운 성도는 이런 환경 조성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인내하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내에 합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야고보서 5장 7-8절(현실을 만드는 인내) 26100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8절입니다.
야고보서 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오늘 본문에서 주가 강림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하면, ‘그냥 참아라’와 연관시킵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이, 복음을 대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얼추 이해한다. 하나님이시니까 부활도 이해한다. 그런데 일이 다 끝났고, 다 이뤘는데 굳이 강림하실 것까지는, 다시 오실 이유는 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이 십자가를 안다, 부활도 안다. 그런데 재림은 잘 모르겠다.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재림의 연관이 끊어져 버렸어요. 왜 주께서 다시 방문할 필요가 있는지, 여기에 대해서 사도 야고보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안다, 부활을 안다. 그런 사람에게 사도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참았느냐?”라고 이야기해요.
“기뻐하면 되지 참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하고 우리는 답변할 텐데 사도 야고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절차가 만들어졌고, 그 절차에 가담되게 거기에 끌려간 사람, -성도죠- 주님의 절차에 끌려간 사람에게만 비로소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아, 이제 재림도 알았다’라고 재림마저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재림은 놔둬 버리면 이건 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으로 티가 나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참으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예수님께서 어떻게 참았느냐, 예수님과 동일한 인내심을 갖고 있느냐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예수님이, 메시아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를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성신께서, 구약의 성신께서 특별한 역할을 맡긴 사람에게 임하여 예수님에 대해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어떻게 참았느냐는 거예요.
구약의 성신 받은 성도들, 선지자들 그들은 어떻게 참았느냐는 거예요. 여러분, 참으려면 상대가 있어야 해요. 그냥 혼자서 변비 걸려 참는 게 아니잖아요. 상대가 있는 거예요, 상대가. 상대가 있는데 그 상대에 대해 구약에서 언급하는 것은 ‘국가’였습니다. 인간들의 집합체, 인간들의 집합체 거기에 성신이 와버리니까 성신을 받은 사람은 독특해요, 특이해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신 받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도 화끈하게 띄는 거예요. ‘저거 뭐야, 저거 왜 우리랑 달라? 자기가 뭔데 우리와 달라?’ 성신을 안 받은 사람은 무엇과 더불어 살아가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요. 자연, 자기 생존의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성신 받은 사람은 미래의 하나님, 지속성을 가진 일관된 하나님의 일을 미리 당겨서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방금 제가 ‘일관성’이라고 했는데 하나님 입장에서 일관성이 맞아요. 일관성이 있는데 그러나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일관성을 넘어서서 일방성이에요.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이걸 성신 받은 구약의 성도들이 벌써 맛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참았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거든요?
그 감정의 문제가 그냥 기분이라고 끝나면 안 돼요. 반드시 사실성에 근거가 있어야 해요. ‘현실이 이러이러하기때문에 그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구약의 성신이 없어도 자연을 상대로 해서 참을 수 있어요. 하나님의 영이 없어도 참을 수 있어요. 가뭄이 들었다. ‘참지, 뭐.’ 비가 많이 왔다. ‘참지, 뭐.’
지금 일본 도쿄는 한 달 넘게 비가 오고 있어요. 도쿄 사람들이 회개합니까? 140년 만의 기록이라면서 이렇게 비가 오고 있는데 도쿄 시민들이 “우리 하나님께 대들자. 반항하자.” 이러지 않아요. ‘참지, 뭐.’ 태풍이 온다, ‘참지, 뭐.’ 토네이도가 온다, 참아야죠. ‘자연을 상대로, 우리가 할 게 뭐가 있냐?’ 그냥 참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면서 기존의 국가, 인간들이 모여 사는 기존의 국가 말고, 인간 나라 말고 하늘나라의 그 소식, 거기 사는 분들인 천사, 하나님의 요소가 성신을 통해 와버리면 이건 어떤 것인가? 장차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날 때 우리 주님은 어떤 식으로 참았고, 인내심을 가졌느냐는 것을 미리 알려줘요.
지금 구약 이야기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평소에 어떨 때 참았습니까? ‘안 돼. 참아야지.’ 어떨 때입니까? 가뭄입니까? 돈 없는 겁니까? 그런 것 때문에 참는 거예요? 여러분, 국가 때문에 참아본 적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한 경로가 있는데 그 길에서 세 가지를 경험했습니다. 세 가지의 심문을 당했어요. 첫 번째는, 국가로부터 심문당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심문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17절에,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런 말이지요. ‘당신이 자꾸 하늘나라니 하나님나라니 하는데, 현재 이 유다는 로마 제국에게 세금을 바칩니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우리를 압제하는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칠까요, 세금을 바치지 말고 로마 제국에 대들어서 디비 버릴까요?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 당신 생각은 어때요?’ 국가가 예수님한테 물은 그 질문을 국가가 지금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정체를 밝혀라. 네 정체가 뭐꼬?’
국가편이면 국가편에 서든지, 그게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설 거면 국가를 완전히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라고 여러분에게 심문 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변해야겠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동전을 가져오너라.” 동전을 가져오니까 “이 동전에 누구의 형상이 있느냐?” “황제의 형상이 있습니다.” “줘라.” 누구한테? “이 형상대로 황제한테 줘 버려. 그리고 너 이리 와. 너 인간의 형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어? 가이사의 형상이야, 하나님의 형상이야?” 만약 답변하기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거야. 문제가 뭐 어렵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19-21).
우리 몸에 새겨진 형상이 대통령 겁니까? 누가 새긴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우리 몸을 점점 더 둘러싸는 이 사실성, 그 사실성은 두 가지가 분명히 우리 속에 느껴져야 돼요. 하나님의 이런 일관성이 있다는 것, -우리가 방해하지 못한다는 뜻이죠- 일관성이 있다. 두 번째, 일방적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님의 뜻대로 나를 후려치고 있다는 거예요. 일방성, 거부하거나 거역할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인생 사는 거 참 쉽죠? 굉장히 쉬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국가로부터 심문을 받으면서, 인간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평소에 살아가는지를 노출시키는 계기로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국가로부터 심문 받으세요, 판사로부터.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너희가 판사마저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네가 왜 세상일로 고민하느냐’ 하는 그런 대목이 나와요. 성도가 됐으면 천사도 판단하고 세상도 판단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 재판정에 어떻게 성도들끼리 소송을 넣는지 책망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를 듭시다. 여러분이 북한에서 몰래 지하조직 목사로 활동한다고 칩시다. 미국에서 돈 대줘서 북한에 몰래 들어가서 선교하는데 북한 당국에 걸렸어요. 걸렸을 때 그 북한 경찰이 잡아가 심문합니다. “너 이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을 위해 살 거야, 아니면 네가 믿는 하나님을 위해 살 거야?” 하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한번 답변해 보세요. 뭐라고 답변해야겠어요?
이렇게 답변해야 합니다. 북한 당국자에게 “넌? 넌 무슨 기준으로 사느냐?” 이 점이 중요해요. 누가 나한테 질문할 때 너의 기준부터 까라는 거예요.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네 기준부터 까봐라, 그 기준에 대해서 내가 판정을 내려줄게.” 누가 심문하는지 분간 못 하게 만들어야죠. 누가 누굴 심문하는지 분간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은 결과물이 있어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복 받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냐면요, 저주받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게 저주를 받아요. 가다가 뚝 끊어지는 것, 가다가 사라지는 것, 이게 저주받아요.
시편 90편 10절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가 날아간다. 우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뭡니까? 내가 뭐예요? 내 안에 없어질 것들만 소복하게 끌어모아 있는 거예요. 없어진다는 것은 끝이 있다는 말이고, 끝이 있으면 없어지는 것이고, 없어지면 우리는 애닳아 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절망하고 애통하고 좌절하고, 이게 우리 인생입니다.
‘아이고, 그게 왜 없어졌지?’ 집에서 강아지가 죽어도 ‘왜 죽었지?’ 강아지는 없어질 거예요. 나 자신도 마찬가지로 없어질 거예요. 내가 나 자신한테 애통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얼마나 무식한지요. 자기 몸의 냄새도 몰라요. 특히 나이 많은 사람. 우리 밑 동에 나이 90이 다 되는 할머니가 사시는데 뭐 거의 다른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갈 일은 없어요.
그러나 문만 열어도 노인 냄새가 1층부터 4층까지 올라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계단 타고 다 올라와요. 본인은 몰라요. 자기의 죽음이 뿜어내는 냄새에 익숙해졌으니까. 이게 노인만 그럴까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냄새난다는 것은, 네가 곧 없어진다는 뜻이에요.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소망했습니까? 끊어질 것을 소망했죠. 애통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애석하게 슬퍼할 그런 마음 자세를 안 가지면서도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냄새나는 쓰레기를 끌어모으는 데 온 평생을 다 보냈습니다. 평생 헛짓한 거예요. 헛수고 한 거예요. 헛세월 보낸 겁니다. 그게 저주에요. 복은 뭐냐? 복은 영구적인 겁니다. 끊어짐이 없어요. 오래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라지지 않아요.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출애굽기 19장 4절에 생뚱맞은 표현이 나와요.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스라엘아, 너희들을 내가 건졌는데 독수리 날개에 실어서 건졌다’라는 거예요. 이 얼마나 생뚱맞아요. 독수리 날개 위에 실었다는 것은, 율법은 영원히 간다는 것이고 율법이 완성된 상태가 복의 상태며, 그것은 영원히 영속되는 거예요. 영생이지요, 중간에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불신자라는 것은 독수리 날개 위에 타다 털어진 사람이 아니고, 아예 독수리 날개 위에 앉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불신자예요. 한 번도 복의 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불신자예요.
인간은 70이든 80이든 그 자체가 이미 저주받은 겁니다. 허무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허무하면서도 허무하게 된 근거를 찾지 못하고, 그걸 생각을 못 하고 ‘왜 이리 허무하지, 왜 이리 허무하지?’ 맨날 이런 생각, 이런 기분에 빠집니다. 특히 가을 됐잖아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 외로운 것은 싫어해요. 이게 무슨 내면의 모순입니까?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 외로운 것은 싫다, 뭐 어쩌라고?
왜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 혼자 있으면 외로운 이유가 뭡니까? 기분상, 기분상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 기분이 드는 근거는요? 몰라요. 인간은 몰라요. 왜 가을 되면 쓸쓸한지 몰라요. 혼자 있고 싶은 이유를 모르고, 혼자 있으면 외로운 것도 싫다는 이유를 몰라요. 자기 냄새나는 이유를 모르듯이요. 그러니까 인간은 살고 있으면서 전혀 살아있지 않아요. 그리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근거, 사실성이 바닥났어요. 없어요. 왜? 왜? 그걸 몰라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표해 열두 제자를 뽑았는데 그 열두 제자 중, 인간이 저주받았다는 증거를 사실성에 근거해서 보여준 제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 제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하게 되는데요, 가룟 유다의 자살은 일시적으로 순간적인 욱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자살했어요.
그게 뭐냐? 메시아 앞에서 나의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저주의 값을 한다고, 이럴 것 같으면 내가 내 손으로 죽는 게 낫다고 하고 죽었어요. 요모조모 따져볼 때 인간은 메시아 앞에서 저주만이 인간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끝장내고 싶다, 그래서 자살한 거예요.
나머지 열한 제자는, 왜 사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인류를 대표한 거예요, 가룟 유다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통과하잖아요? 통과하면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국가로부터 심문을 받았습니다. 국가로부터 심문을 받으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가 나를 심문하는데 심문하는 너는 어떤 기준에서 살아가고 있느냐고 되물어요.
그들은 왜 사는지 몰라요. 왜 사는지, 국가 당국자들은 모릅니다. 현재 대통령부터 해서 국가 관료들은 왜 사는지 몰라요. 너도 모르고 우리도 몰라요. 모르면서 뭐만 느끼느냐 하면, 뭔가를 느끼는 그 힘을 느껴서 예수님 당시에 포로 교환을 시도했습니다. 유월절 그 전에 사형시켜야 할 사형수가 2명 있었어요. 한 명이 바라바였어요.
바라바는 그 당시 유다 국가 당국자의 몫으로 동의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바라바를 사형시킬 그 시간에 생뚱맞게 유대교 당국자들이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죄수를 강제로 집어넣었어요.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당시 통치권이 있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뭘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냥 “죽여주세요.” “응 죽여줄게.” 이러면 행정 최고 책임자가 아니잖아요.
예수님께 요모조모 개인적으로 심문을 해봤어요. 심문한 내용이 요한복음에 나와요(18장). “내가 놓아줄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되받아칩니다. “내 나라는 따로 있다. 내가 지금 힘이 없어서 잡혀있는 줄 아느냐?” “그러면 왜 일을 복잡하게 해?” “진리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그제야 “진리가 뭔데?”(요 18:38) “네가 두고 보면 알아. 진리가 뭔지, 네가 왜 비진리에 속하는지를 두고 보면 알 거야. 비진리에 속한 인간이 감히 진리를 상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상대로 심문을 해?”
마태복음 7장 1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네가 비판하는 그대로 비판받을 것이다. 주님의 심판은 이미 구약에 나왔어요. 일시적이고 한시적이고 끝나고 사라지고 날아가 버릴 것은 저주요, 영원한 것은 하늘에서 오신 영생외에는 없어요. 말씀 외엔 없습니다.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끌어모은 인간과, -그건 없어질 저주받을 인간이죠- 하나님의 것,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말씀에 의해서 구성된 사람, 그 사람은 영생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에요. 그 둘을 구분 짓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심문받는 거예요. 국가로부터의 심문이 끝나고 난 뒤에 그다음의 심문이 뭐냐?
예수님께서 국가 심문 받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심문을 해요. 이 절차도 예수님의 절차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통과하고 겪는 절차에요. 예수님이 자신을 심문해요.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눅 22:42). 그때 ‘아버지’라고 해요. 하나님이 아버지에요. ‘아버지여, 저 아들입니다. 아시죠?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아들의 말을 들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건의하겠습니다. 제게 올 저주라는 것이 없어지면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은 이거였습니다. 저주마저 장악해야 저주를 심판할 심판주가 된다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설교도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왜 음부로 내려갔을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척만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죽어야 되느냐?
인간들이 벌벌 떨면서 꼼짝 못 하는, 마지막 장악해야 할 사망이, 멸망이 원수이기 때문에 그 사망마저 장악해버리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사망에 대해 겁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 마지막 임무를 수행해야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죽음 안까지 들어가서 죽음의 그 무거운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한테 짊어지운 그 죽음을 주님만이 이겼다는 것을 공표하고, 그걸 자랑하고 떠벌이기 위해 성도 된 거예요. 나에게 죽음이 없다는 거예요. 왜? 잘나서? 아니죠, 아니죠. 예수님 때문에!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 자신이 죄가 없어요. 저주받을 일이 없어요. 그러니 이것은 자기와의 싸움인 거예요. 땀방울이 핏방울 되기까지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 번씩이나 이야기했어요. “안 된다고요? 그러면 제가 이 잔을 마시겠습니다.”
예수님께 이런 절차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이 절차가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거예요. ‘나는 국가가 뭐라고 해도, 김정은 정권이 뭐라고 해도 나는 교회에서 말씀 공부하겠다.’ 이건 누구를 상대하는 거냐 하면, 국가를 상대하는 거예요. ‘국가야, 뭐라고 해도 난 예수를 믿겠다.’ 아, 얼마나 배포가 셉니까? “목을 쳐라. 이것이 주를 위해 영광된 순교의 모습이다.” 이슬람교, 이슬람교에 미친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정작 적은 아직 남아있어요. 국가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에요. ‘그동안 교회 많이 다녔잖아. 복음 많이 들었잖아. 누군가 복음이 뭐냐고 물으면 얼추 근사하게 답변도 할 수 있잖아.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말씀 많이 들었으니까 그만 들어도 되고. 그동안 교회 짓는다고 내가 헌금 많이 했죠? 목사 사택 한다고 목돈 내놨잖아요? 그동안 십일조 한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이젠 헌금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요? 내가 안 해도 자식이 대신 해 주니까 대신 하면 되고요. 교회 참기름 산다고 하면 그때는 참기름값 내면 되고. 많이 했잖아. 이젠 인생 놀듯이 대충 즐기면 되잖아’라는 생각을 하루에 백 번도 넘게 하죠.
성경에서 ‘참아라’의 반대말이 뭐냐? ‘놀자’입니다. 놀자, 예요. ‘이쯤 했으면 놀아도 되잖아요.’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있는데. ‘그냥 놀면 되잖아. 집에 돈도 있는데 놀면 좀 어때?’ 내가 나를 변호하고 나를 지키는 거예요. 이게 사실성, 예수님이 유일하게 보여준 사실성에 근거하지 않고 기분이 업, 되는 거예요. 자기 감정과 기분에 말려들어서 ‘목사님, 나 이제 기분 따라 살렵니다. 말씀이 뭔지는 나도 대충 아니까 기분 따라 살렵니다. 난 나하고 의논하겠습니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요, 그리고 예레미야도 있는데 시간이 가더라도 세 군데 금방 찾아보겠어요. 첫 번째 시편 118편 8-9절,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시편 146편 3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예레미야 17장 5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인간은 사라지는 거예요. 인간은 사라지는 겁니다. 뭐 독수리 날개 타고 날면 ‘아이고, 높은 데라 현기증 나겠는데?’ 현기증이 아니고 구약에서는 모르지만, 신약에서는 ‘참아라’예요. 사실 구약도 ‘참아라’예요. 영생을 안에서 타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관적으로 우리를 주님 품안에 태워서 천국까지 간다면 이 땅에서 세상 구경하면서 현기증이 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현기증이라는 그 말 대신에 “참아야 하느니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왜? 주님의 인내성에 같이 동조해야 하기 때문에. 동조를 해야 돼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이 일관적이지 못해요. 사람은 소멸할 거예요. 그런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람 중에 누가 있는가? 사람 중에 내가 있잖아요. 나도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누구를 의지하지 말라? ‘나를 의지하지 말라, 나를 지킬 생각하지 말라. 나를 행복하게 만들 생각하지 말라, 참아라. 너 자신과 너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 애쓰지 말라. 내가 나를 믿을 구석은 전혀 없다. 나는 내가 붙들고 있을 대상이 아니다.’
붙드는 대상이 아니에요. 너는 너 자신을 실망하게 만들 거예요. 하나님 믿는다는 핑계 대고, 그런 식으로 위선을 떨면서 결국은 말씀 앞에서 나는 나 외에 아무도 믿은 사람이 없다는 게 들통날 시기가 오면 그때 하늘나라의 냉혹한 포로 교환이 일어나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사형당할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뭐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삼고 싶었던 거예요. 심지어 빌라도의 부인이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오늘 당신 할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정신 바짝 차려. 함부로 재판하면 안 돼. 예수라는 분이 보통 분이 아니야. 내가 잠을 못 잤다니까?” “그래. 당신 말이 최고야. 당신 말대로 할게.”
그러나 사실성, 현실성, 실재성, 마귀가 지배하는 실재성, 이 안에서 본디오 빌라도마저 마귀를 무슨 힘으로 이깁니까? 마귀를 못 이깁니다. 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 때문에 자기 인생이 치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날 믿는다, 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다”라고 백 번을 이야기해요, 천 번을 이야기해요. 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만 번을 이야기해 봐요. 그 인간은 하나님의 포로가 아니고 악마의 포로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이렇게 저렇게 해도 마지막은 포로 교환을 요청하는 겁니다. “너희들 유월절 되면 죽을 죄인도 풀어주는 관행이 있잖아. 어때?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나는 예수 편이다. 예수 좀 풀어줘. 나도 권위가 있는데 예수를 풀어줘.”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총독 권위? 지금 우리는 당신이 말 안 들어주면 황제한테 이야기할 건데? 당신보다 더 센 사람한테 이야기 할 건데?”
본디오 빌라도가 속으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예수를 죽이는 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진지해? 그게 그들이 어떤 손해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어?’ 본디오 빌라도는 율법을 몰라요. 이방인이에요. 마귀 들려도 제대로 들린 자들이 아니라고요.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요한복음 8장에, 마귀의 자식이에요. 일을 제대로 해요. 모든 걸 용납해도 절대 예수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
결국 예수님은 인간에게 심문받은 것이 아니라 마귀한테 심문받은 거예요. 마귀의 뜻이었어요. 이걸 예수님이 알았습니다. 알고 가룟 유다에게 너는 마귀라고 이야기하고 제자로 삼았는데, 주님은 타이밍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타이밍이냐? “마지막 적 나와. 자꾸 인간 뒤에 숨지 말고 인간을 조종하는 그 존재 나와! 너 나올 때까지 그 타이밍 기다릴 거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가룟 유다가 움직일 때 그 타이밍에 맞춰서 주님께서는 흔쾌히 체포되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정 가운데 영원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방적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관성을 알았기 때문에 그 세 가지가 그냥 추상적인 게 아니에요. 기분이 아니에요. feeling이 아니라니까요. 감정이 아니라니까요.
사실이에요. 국가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현실 그 자체에요. 주님은 현실 그 자체를 기준으로 “참아라”라고 하는 겁니다. 기분상 참으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감정상 참으라는 게 아니에요. 현실을 똑바로 보라는 게 성경 내용입니다. 이 현실성, 사실성을 참았던 구약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참았느냐 하는 거예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현실성이 있죠. 골리앗을 이겨서 그 효과를, 그 혜택을 이스라엘 전체가 다 누렸습니다. 백성들은 소년 다윗이 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사울 열 명 와도 다윗하고 안 바꾼다’는 이런 뜻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삐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악신 들린 사람, 사울 왕이었습니다. 악신이 들렸는데 왕이에요. 권력자예요.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악신이 들렸어요. 성들은 혜택받은 것만 댔다 좋아하고 왕에게 마귀 들린 것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원수가, 현재 이스라엘의 원수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심문을 받게 하고, 그리고 이미 사형을 언도받은 상태에서 도망자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도망자 신세로.
실질적으로 왕인데, 기름 부음 받은 왕인데 왕이 어떤 왕이냐 하면, 쫓겨 다니는 왕이에요. 어디에서 쫓겨 다닌다? 인간세계,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기는 그 인간세계에서 숨을 곳을 찾아서 정처없이 쫓겨다니고 사울, 마귀는 정신 없이 ‘하나만 잡아라. 한 놈만 잡아라’ 해서 다윗만 노리면서 추격하는 그런 신scene을 사무엘상 17-27장에까지 연출하신 거예요.
영화라고 해서 다 같은 영화 아니잖아요. 사실성에 근거해서, 사실성에 근거해서 영화를 찍어야지요. 주님께서 지금 예술하고 계십니까? 아니지요. 사무엘상 23장에 그일라 전투라는 게 나와요. 다윗이 어떤 식으로 참는가가 사무엘상 23장 3-4절에 나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지금 악신 들린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에서 처음에 4백 명이 모였거든요. 나중에 6백 명이 모입니다. 그렇게 쫓겨 다니는 신세인 다윗에게 어떤 소식이 들렸느냐 하면, ‘그일라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블레셋이라는 이방 민족한테 침노를 당했습니다. 쫓겨다니는 입장이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은 실질적으로 다윗 본인이잖아요. 어떻게 좀 해보세요’라고 한 겁니다.
다윗이 어떻게 참느냐 하면, ‘그래. 참자.’ 이게 참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 물어요. 하나님께 묻는다고요. 왜? 하나님의 인내심과 동조해야 되기 때문에, 동조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출애굽기 19장 16절에,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든 백성이 다 떨었어요. 땅 자체가 진동했어요. 히브리서 12장에도 이 대목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때 모세의 산 전체가 흔들렸다는 겁니다. 주님이 계셔서 흔들리니까 시내산 아래 있던 모든 백성도 같이 흔들렸습니다. 이게 주님이 참음, 주님의 인내함에 같이 동조해서 인내하는 성도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적군을 치기 위해서 진동한다면 이쪽도 같이 진동해야 하나님과 보조를 맞춰서 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무엘상 23장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요. “어떻게 할까요?” 다윗은 하나님과 공조하고 있어요. 일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공감하고 있습니다. 내 일은 없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를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자기의 감정, 자기의 의지, 이성도 믿어서는 안 돼요. 중요한 것은 사실성입니다. 인생 살면서 환경이 우리를 구원해요.
환경에 주의 일이 있거든요. 환경, 그 주의 일로 만들어진 현실과 환경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다고요? 그 나는 나에게서 나온 나인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온 나인지 우리가 분간할 길이 없습니다. 그때는 환경이 그것을 분간해 줘요. ‘예수 믿는다더니 꼬라지 하고는! 입만 벌리면 예수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막상 현실은 이게 뭐냐, 현실은?’
어떤 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굽어진 강물의 바깥쪽과 안쪽에서 유속이 어느 쪽이 빠른지의 실험입니다. 보통 릴레이 달리기할 때 바깥쪽이 빨리 가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강물도 바깥쪽이 빨리 흐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실제로는 안쪽이 빨리 가요. 왜? 바깥쪽이 압력이 세니까 그 압력 때문에, 저항 때문에 속도가 늘어나요. 실제로 눈에 보이게 종이 같은 것 뿌려놓으면 그렇게 돼요.
우리가 왜 이 성경 말씀을 못 느낍니까? 세상 압력과 너무 가까워서 그래요. 왜 성령의 탄식을 우리가 못 느끼고, 성령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를 왜 못 느낍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세게 작용해 달라’ 하는데 압력의 세기가 우리의 현실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세기의 차이, 서로 다른 힘과 힘의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밀도를 느끼는 겁니다.
이게 유체역학에 나와요. 압력의 차이, 그러니까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우리가 못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과 한패가 되어서 그냥 편안히 노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면서 그런 식으로 인생을 꾸려나가기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주님이 얼마나 참았는지, 성령이 얼마나 탄식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몸 간수 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 끌어모으는데 정신이 팔려서, 내 거 내 것만 지키는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계속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다윗은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삼상 23:9). 그런 식으로 여호와께 늘 물어봤어요. 지금 사무엘상 23장에서 다윗이 참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도할 때 어떤 인내로 동조하기를 원하는지를 그런 식으로 파악해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삼상 23:3-4).
그러면 여기서 승리하는 방법을 또 써먹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지요. 인간은 반복하는 데서 실패한다고요. 인간은 반복하면 실패해요, 무조건. 상황이 다른데 똑같은 것을 적용하려고 해요. 사무엘하 5장 22절에, 블레셋 사람이 또 쳐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같으면,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해요?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고 나를 믿는구나. 하나님, 전에 이렇게 해서 우리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번에도 에봇 가져오라 해서 묻고 제가 나서서 승리하겠습니다.’ 결과부터 먼저 예상해서 매료되어 가지고 묻지도 않고 가요.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시 계속 참습니다. 블레셋 국가를 참는 것보다도 누구를 참는가? 내가 내 뜻대로 하는 나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내 뜻은 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께 물어보고 할래. 나는 나한테 안 물어볼래. 나야, 꺼져라.’ 하고 자기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내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희한하게 22-24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 이 ‘나’라는 것, 독수리 날개 위에 업혀서 일방적으로 천국으로 슉~ 가고 있는, 주의 재림 때로 슉~ 가고 있는 우리, 이 우리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미리 전에 경험했다고, 안다고 우쭐대면서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사무엘상 23장 24절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주께서 나보다 앞서서 상황 저질러 놓으시고 그 속에서 ‘네가 너 자신을 믿는가, 아니면 주님을 믿는다는 그 참음이 있는가?’
주님의 인내에 같이 동조할 수 있는 –공명이라 하지요. 파동에서 벌벌 떨 때 같이 떠는 것- 주님의 떨림에 같이 떨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너 자신을 각인하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을 묻는 거예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이것이 주의 다시 오심으로 우리가 나 자신을 구성합시다. 주께서 오신다는 그것이 나의 나 됨의 구성요소로서 들어가야 돼요.
주께서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관성과 일방성 속에서 주의 뜻을 따르는 참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이것이 바로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일 같이 누굴 상대로, 누굴 앞에 두고 감히 심문을 합니까? 매일 같이 기도한다는 핑계를 대고 주님 붙들고 ‘주님, 저에게 왜 이래요?’ 하고 따지고 심문하는 유대 지도자 같은 심중의 자아라 하는 것을, 사망을 통해서 우리가 믿을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아서 주의 인내에 같이 실려서 주의 오심을 바라보는 행복과 기쁨이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