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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높은 곳보다 더 높은 곳260930우리교회열왕기하

높은 곳보다 더 높은 곳(열왕기하 14:1-4)

높은 곳보다 더 높은 곳

2026년 9월 30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4:1-4

(14:1)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14: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14: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14:4)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표준으로 하여 계약을 하셨습니다. 그 계약이 바로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는 왕과 일대 일로 맺은 계약입니다. 이 계약의 원형은 다윗부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이 계약으로 인해 제사장도 되고 선지자도 되고 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직분들은 모두 다윗이 처절하게 망하짐을 통해서 수립되는 겁니다.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삼하 24:22-25)

시편에 나오는 모든 예언들이 다윗의 시로 대부분 채워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삼하 22:7-11) 이렇게 다윗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예언은 바로 ‘다윗의 혈통적 자손’을 통해서 완성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마샤 왕도 다윗의 12대 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다윗과 같지 않다’는 평을 받게 됩니다. 이는 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가 다윗이 내뱉은 모든 예언을 다 완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마샤를 평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거론한 것은 바로 ‘산당을 제하지 않았다’입니다.

왜 산당을 그냥 놔두면 안되지요? 산당은 산당대로 놔두고 그냥 여호와 하나님 섬기면 되지 않을까요? 다윗과 맺은 언약의 본질은,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니면 왕의 백성인가 하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굳이 왕이 있을 이유가 없게 됩니다.

왕의 존재가 도리어 하나님의, 왕되심의 본질을 가리게 될 수 있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윗은 아무 것도 아니라’ 점 때문입니다. 선악적 관점에서 왕의 우수함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체성을 왕이 제대로 드러내었느냐가 왕에게 요구하는 기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는 나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남이 나다”라고 말한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실은 이것은 일체성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엄마 몸과 자신의 몸을 분간하지 못하는 시기에 있다면 그 아이는 여전히 엄마가 자기인 겁니다. 혹은 엄마가 자신을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의 경우, 모세 율법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면, 도저히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압니다. 그저 ‘살아 있는 척’을 하면서 살 뿐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시는 곳’에 다윗 본인이 놓여 있다는 고백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3-14)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시 48:1-2) 이 시온의 높이는 전 세계의 그 어떤 것보다 높아진다는 겁니다. 산당은 원래 높은 곳에서 이방민족들이 이방신을 찾는 곳입니다.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민 22:41) 백성들은 이런 이방민족의 종교의 영향으로 그들도 산당을 찾아 기도했습니다. 이 산당과 성전의 차이점은, 산당에서 부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전은,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들은 죽은 자가 되었음을 제물을 통해서,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어줍니다. 즉 인간들이 자신의 소원이나 소망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전혀 통하지 못하는 겁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율법 계약에 준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 되는 것을 언약한 왕을 통해서 드러내는 곳입니다.

다윗의 가치에 대해서 잘 나와 있는 곳이 에스겔 34장입니다. 초반은 에스겔 선지자는 제대로 된 목자가 없이 양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고 질책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책이 바로 제대로된 목자를 세워서 양을 제대로 간수하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다윗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3-24)

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부활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바는 ‘이스라엘 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리하고 대표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즉 진정한 백성이라면 예수님께서 거치신 절차 노선을 합류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한 사람 나올 때, 제자들은 저 소경이 ‘자기 죄 때문인지 부모 죄 때문인지’를 두고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경이 진흙을 발라 눈을 뜬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점입니다. 즉 율법을 뚫고 나오지 아니하면 부활, 곧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8: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 즉 몸이 이미 죽은 몸이라는 겁니다. 이 죽은 몸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이 되셔서 죽을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통과하셨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진정한 성전입니다. 다윗의 예언이 완성될 때만 백성이 생산됩니다. 이제 그 생산된 백성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사도 바울이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성도는 자신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기에 오로지 예수님이 제공된 환경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열왕기하 14장 1-4절(높은 곳보다 더 높은 곳) 26093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4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4:1-4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왕이 등장할 때, 성경을 통해서 ‘이 왕은 잘했다.’ 또는 ‘이 왕은 못했다.’ 이런 식으로 그 왕을 판단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잘했다, 못했다’라는 그 판단기준 자체가 선과 악의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은 반칙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잘했다, 못했다’ 인간들이 보기에 행동을 잘했느냐 못했느냐, 그런 식으로의 인간 기준을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자기 자신을 ‘잘했다, 못했다’를 선악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과는 전혀 상관없는 혼자만의 착각입니다. 착각 정도가 아니고 마귀가 그런 식으로 우리 인생을 들쑤셔 놓은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드러냈느냐, 아니면 자기 주체성을 드러냈느냐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나는 나다.’ 너무나 누구도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타인이 나다. 나 말고 다른 분이 나다’라는 생각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의 아담 후손에게는 나오지를 못해요. 이게 안 나옵니다. ‘내가 나 아니고 남이 나다. 남이 내 인생 다 살아준다.’ 그런 생각을…, 아, 인간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남이 내 인생을 다 살아준다면 내가 내 인생을 두고 잘했다, 못했다는 그 부담을 전혀 가질 이유가 전혀 없지요, 전혀 없어요. 남이 나라고 말은 그렇게 못해도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갓난아이들이에요, 갓난아이들. 갓난아이들을 1년에서 1년 6개월까지를 본다면, 그 갓난아이들에게 이해 안 되는 특징이 있어요.

엄마가 아프면 본인이 울어요. 엄마가 장에 가면 본인이 존재하지 않아요. 엄마에게서 자기 몸이 떨어져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가지고 엄마가 나예요. 그리고 엄마는 없어요. ‘나’가 생기는 것은 1년에서 1년 6개월 지나서 ‘나’가 생겨요. 인간이 ‘나는 나다’라는 그것은 갓난아이에게는 안 통하고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살았을 때 그다음부터는, 엄마가 장에 가도 ‘나는 집에 있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이렇게 분리되면 자아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간 속에 담겨 있는 악마의 본성 또는 아담의 죄의 본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을 모집하기 때문에 천국 백성은 인간들이 상상도 못 하는 그것을 요구해요. “너 말고 내가 너다. 됐나, 안됐나? 네가 너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님이 너다.”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이 생뚱맞은 이야기같이 들릴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기도 가운데 정말 주님의 성령이 임하고 주님이 먼저 응답으로 찾아오신 분의 기도는 이렇게 됩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벌써 주의 응답이 먼저 나타나지요. 성도한테나 해당되는 겁니다. “하나님…”하고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나님…”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할 말 없습니다.”

왜? 응답이 먼저 와 버렸으니까요. 하나님을 불러놓고 그 뒤에 저는 이렇게 되고 싶어, 저는 이것이 어려우니 도와주세요…, 할 말이 이만큼 있어요. 그런데 주님이 나예요. 주님이 나가 되면,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되잖아요. 주님이 나니까. 주님이 뭐가 필요한지는 주께서 아버지한테 이미 응답을 다 받아버렸어요. 응답을 받고 그 받은 응답을 우리의 현재 우리의 상황으로, 우리의 현재 모습으로 답변으로서 현실화시킨 거예요.

“네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내 기도의 응답으로 그렇게 지금 주어진 것이다. 네가 악착같이 살아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기도의 응답이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뭐 어쩌라고? 지금 가장 적절한테 뭐 어쩌라고? 그만하면 되었지 뭐가 더 필요해?” 입이 쑥 들어가지요. 입이 쑥 들어간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와요. 열왕기상 14장 3절에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다윗과는 같지 아니했다. 하나님께서 후대 왕들을 비교할 때 다윗을 표준으로 삼아서 대비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어떠했고, 후대 왕들은 어떠했는가? 그게 4절에 나옵니다.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산당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다윗 때는 산당을 허락했는가? 자 여기서 다윗이 어떤 분인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다윗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왕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대표모델로 세운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왕들에게나 백성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거예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냐, 왕의 백성이냐?” 이 질문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냐, 왕의 백성이냐?’ 정답은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왕이 왜 필요한데?” 그러면 또 입이 쑥 들어가 버려요. 하나님의 백성인데 왕이 왜 필요하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왕이 필요 없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왕이라는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왕을 세운 거예요. 우리나라에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도자를 세운 거예요. 교회에 목사가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사를 세운 거예요. 그래서 목사는 설교 시간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되느냐 하면, “저는 이곳에 필요 없다는 자격으로 여기 섰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목사가 필요 없다는 것을 날마다 절실하게 느끼는 현장에 찾아오셔야 해요. 성경도 많이 알고, 말도 잘하고, 순수해 보이고, 남들 보기에는 죄 하나 안 짓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게 주님 보기에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그게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죄인이지요.

목사도 죄인 중에 하나인데 백성들은, 교인들은 죄인이라 하면서 자기 잘난 체하잖아요. 목사 만큼은 쓸모없는 것이 쓸모없다는 것을, 죄인이기 때문에 쓸모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고백하는 현장이 설교 시간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목사라는 존재가 주께서 응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양을 목사라는 위치가 가려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에요.

이 질문을 다시 하면 이렇습니다. ‘백성은 왕의 백성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정답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사실을, 다윗을 통해서 주께서는 전달하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다윗은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간음죄, 살인죄, 인구조사. 다윗을 통해서 드러낸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저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왕의 자리에 서게 하는가? 도대체 납득이 안 돼. 왕은 훌륭해야 된다는 선입감이 선악 체제를 갖고 있는 우리한테 있는데, 지도자는 남보다 우수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다윗 같은 사람을 어떻게 왕으로 세웠을까?’

왜? 왜 세우시는데? 좀 더 이야기를 이어가면,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왕은 법인체에요. 이스라엘처럼 법인체입니다. 법인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다수의 집단이지만 하나의 개인처럼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법인이에요. 이런저런 법인들, 회사도 법인이고요. 학교 재단도 법인이잖아요. 법인으로 해야 세금을 적게 내니까요.

이스라엘 왕은 법인이에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상대하는 겁니다. 다윗 계약이 그래요. 따라서 하나님은 백성을 직접 상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잖아요. 지금도 지도자고.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듯이 우리의 지도자는, 대통령은 주님밖에 없어요. 대통령 선거할 때 아무나 찍으세요. 그것은 우리의 대통령은 아니니까요. 우리 왕은 아니니까.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고 신하니까. 따라서 기대할 것도 없지요.

하나님께서 왕을 대표로 했기 때문에 왕이 잘못했으면요…, 왕이 잘못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일은 주께서 홀로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백성들에게도 같이 묻게 됩니다. 계약이니까요, 계약. 예를 들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골리앗을 이긴 그 혜택을 누가 입느냐?

이스라엘 백성 전체, 심지어 사울 왕도 혜택을 입었어요. 그게 바로 왕이예요. 혼자 했는데 효과는 여러 사람이 같이 누리는 데서 하나님께서 왕을 상대해서 효과, 은혜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통로, 하나님을 맞이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는 게 왕이라는 그 말이지요. 왕은 이미 신약 때 이미 예수님으로 굳어졌습니다. 끝났어요. 유일하신 왕이예요.

따라서 하나님은 직접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잘잘못을 탓하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일하심,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만약 강대상에서 컵을 넘어뜨려서 물이 쏟아졌다. ‘아이고, 하나님! 이 귀한 강대상에 물을 쏟아서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그만큼 칠칠치 못하다는 그것을 인정하느뇨?’

예, 그게 예수님 믿음이에요. ‘칠칠치 못하고, 뭐 하나 내 힘으로 못하고, 제대로 하는 것이 없고, 그것을 너희가 늘 유지하고 있나’라는 점을 물어요. 칠칠치 못하고 뭐 하나 제대로 못 한다고 할지라도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무슨 사업이라도 했다 하면 한 달 수입이 2천만 원, 그거 치우고 딴 거 하면 3천만 원, 주식 하니까 열 배로 올라버렸어요.

그러면 그 당사자가 “나는 얼마나 칠칠치 못한지 뭘 손만 대면 돈이 들어와서 부자가 돼. 주여,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네가 돈을 벌든 잃든 내가 묻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지? 그 정도로 너는 무능해. 한 달에 2천만 원 벌 정도로 무능해. 인정해?” “인정하고 말고요.” 다른 사람이 보고 화나 있어요. 이 논리에 대해서 화를 잔뜩 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돈을 벌든 못 벌든,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항상 칠칠치 못해요.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주께서 주신 상황 속에서 살 뿐입니다. 괜히 자기 자신을 자극시키지 마세요. 자신을 나무라지 마세요. 그래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체됨이 등장하는 거예요. 다윗은 ‘내가 왕이 아닙니다’를 위해서 왕의 자리에 간 거예요.

“그러면 왕은 누군데?”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왕인데 왜 네가 왕 하고 있어?” “내가 못남을 통해서 왕이 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통해서 계약을 맺은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다윗이 제사장도 하고, 다윗이 시편을 지었으니까 선지자지요. 다윗이 예언도 하고 또 왕도 하고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에서는 선지자 있지요, 왕 있지요, 제사장 있지요, 세 개 다 합치면 칠칠치 못함. 장차 오실 예수님이 왕이요 제사장이고 선지자입니다. 그걸 앞당겨서 그 위치가 하나님의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는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전쟁에 승리해도 하나님이 승리한 거예요. 주님이 승리했다고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이 왕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아사 왕은 뭐 한 것도 없어요. 찬양했더니만 승리했어요. 희한해요. 그게 왕의 역할입니다. 그게 다윗처럼 되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산당을 만들어놓고 백성들이 산당에 가서 섬겼다고 되어 있어요. 오늘 주제는 이거예요. 산당과 성전의 차이점이 주제입니다. 그게 제목이고요.

산당은요, 부활이 없고 성전은 부활이 있어요. 그게 차이점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십자가 속으로 살아간다, 십자가 안에서 살아간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어찌하든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나는 달려간다. 이게 무슨 말이지요?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았잖아요.

그런데 빌립보서 3장 10-1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0-1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죽은 자, 부활의 반대말입니다. 죽은 것은 죽은 거예요. 부활은 뭐예요? 죽은 데서 살아난 것이 부활이지요. 초등학교 5학년까지 공부했다고 부활됩니까? 중학교 좋은 데 간다고 부활 돼요? 카이스트 간다고 부활됩니까? 성적 좋아서 대기업 취업했다고 부활 돼요? 군대 좋은데 나왔다고 부활됩니까? 안되지요.

칠칠치 못하고 못난 존재에게 왕 되신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뭐냐? 부활에 이르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너 죽어도 좋아?” 이런 뜻이거든요. “죽음을 무서워하지 마. 나 있잖아. 왕이 있잖아.” 너는 백성이고 왕이 백성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왕, 나처럼 되는 거예요. 왕은 나의 타자예요. 나보다 타자가 나의 미래를 먼저 장악하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거예요.

그다음 차례는 뭐냐? 예수님의 백성 된 자에게 부활이 주어지는 겁니다. 저는 아시안 게임 금메달 땄다고 울고불고하고, 금메달 못 땄다고 아오지탄광에 가는 북한 선수들 보면 기가 막혀요. 지금 금메달이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잠자는 가운데서 부활시켰어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거 청문회 해야 돼요. 국회 청문회요. 우리나라에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나와보라고 하세요. 이 사람 증인 채택해 보세요.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주님이 증인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지뢰 터져서 죽어도 다시 부활하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망이 사람을 더 이상 다스릴 수 없다는 거예요. 부활이란 말은 분명히 죽었는데 분명히 살아났잖아요.

그러니까 다시는 사망이 하나님의 백성한테, 왕의 백성한테는 통치가 안 된다는 말이에요. 위협이 안 되고,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해요. 왕의 백성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23절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모든 자들이, 무덤이 열리고 부활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역할을 누가 하느냐? 왕이 해야 돼요, 왕이! 다윗처럼 왕이 해야 되는데 죽었다가 살아나는 능력이 있음을 여호와께 알려줘야 되는데, 에스겔 34장에 보면 양들의 목자 노릇을 해야 하는 게 왕들인데 목자 같은 목자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2-4절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이고, 목자 같은 목자는 언제 오십니까?” 할거잖아요. 에스겔 34장 23절에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어? 다윗은 에스겔 시대에 이미 일찌감치 돌아가신 분이거든요. 그런데 돌아가신 분 다시 태어나는가?

신약 성경에 오면 다윗이 목자가 된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이 목자가 된다는 말이에요. 다윗의 자손이 목자가 된다는 말은, 다윗이 선지자 노릇을 해서 ‘장차 내 후손이 이런 분이 온다. 어떤 분? 죽었다 살아나시는 분이 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계약을 맺은 다윗 계약이다.’ 그 말이에요. 다윗의 계약.

다윗이 다윗의 후손에 대해서, 죽어도 사는 분이 온다고 했다면, 다윗의 후손이 누구냐 하면 유대 왕이예요. 오늘 본문의 아마스 왕은 12대 왕입니다. 다윗의 후손인 12대 왕이예요. 왕이라면 다윗처럼 되어야 하는데 다윗처럼 되지를 못하고 있어요. 이유가 뭐냐? 산당을 그대로 뒀어요, 산당.

이제 설명할 것은 뭐냐 하면, 산당이 뭐냐 하는 거지요. 산당이 뭐냐? 그다음에 성전은 뭐냐, 이렇게 가야 하지요. 산당이 뭐냐? 설악산 –설악산이 1,708미터인데- 대청봉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봉정암이라고 있어요. 주상절리 같은 바위벽에 깔끔하게 봉정함이 있어서 꼭 신선들이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나는 설악산 거기에 가본 적은 없어요. 설악산에 몇 번 가본 분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 밑에 내려오면 백담사가 있습니다. 백담사 하면 생각나는 인물, 전두환. 우리나라의 지도자였던 전두환. 사람이 죽어도 살릴 수 없는 지도자. 봉정암도 마찬가지고. 이게 바로 산당이에요. 산당은 뭐냐? 높은 곳이에요. 높은 곳이니까 하늘의 응답을 보다 하늘에 가까운 곳에서 캐치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높은 곳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계속 기어 올라가는 거예요.

봉정암이나 백담사가 가을 되면 그렇게 단풍이 좋다는데 만약에 대통령이 되어서 대통령령을 내려서 봉정암과 백담사를 다 헐어버리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광화문에 한 10만 명 보여서 촛불 들고 설칠 거예요. 제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어느 왕도 산당을 없애지 못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이라면 자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신에게 빌고 싶어요. 왜? 인간의 역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내 행복을 책임질 수 있다. 그러면 기어올라가야 하잖아요. 높은 곳에 가야지요. 그게 산당입니다. 민수기 22장 41절에 보면, 가나안 땅의 이방 민족들이 산당을 지어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어요.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소서 하매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리니라”(민 22:41-23:2).

멋있잖아요, 높은 곳이. 밑에서 갓바위 같은데 보면 얼마나 멋있어요. 기독교 신앙심이 투철한 청년 같으면 갓바위 미륵보살에 시한폭탄 설치해서 터뜨려버려요. 한참 수능 앞두고 있는데 저거 터뜨려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문제 냅니다. 첫째, 다윗의 후손인 왕들은 산당을 없애지 못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 칭찬받은 여호사밧이나 아사왕도 산당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없앤 사람이 누구냐 하면, 히스기야 왕이 없앴어요. 열왕기하 18장 3-4절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문제 나갑니다. 1. 다윗의 후대 왕들이 산당을 못 없앴다. 2.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산당을 없앴다. 3. 성전을 완성했다. 셋 중에서 어느 것이 제대로 하나님의 뜻입니까? 산당을 없앤 히스기야 왕이 메시아입니까? 여기서 갓바위 폭파시켰다. 봉정암 날려버렸다. 할렐루야 기도원을 비롯해서 모든 기도원을 다 부숴버렸다. 높은 데 가서 기도하지 말라고. 그러면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합니까?

그냥 폼만 냈지요. 자기 신앙심 좋다는 티만 냈지요. 히스기야가 산당을 없앴지만 히스기야는 인간의 약점을 또 드러냈어요. 그러면 계속 실패, 실패, 실패, 그 실패를 구약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지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다윗 언약을 지킬 수 있는 분은 따로 와야 하지 그냥 혈통적인 다윗의 후손으로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을 통해서 분명히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다윗 언약이 전수된다고 하면서도 왜 혈통을 그렇게 무시하십니까? 인간의 혈통으로 안 된다면 결국 인간은 되는 게 없다는 뜻이겠네요’라고 생각하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정답이 로마서 8장 10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다. 이 몸이 죽었다, 벌써 태어날 때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바로 구약의 예언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거예요.

여러분 잘 알다시피 요한계시록 3장에 사데교회가 나오고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오는데 사데교회가 나오는 1절에 보면,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알지 못한다. 인간은 도무지 자기가 누군지를 알지 못해요. 그러면 ‘내가 안다’ 하면 나는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는 ‘나’가 아니에요. 나 말고 다른 분이 ‘나’예요. 다른 분이 말도 안 되고, 구원될 수 없는 내 인생을 이미 대신 살고 떠났고, 그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로마서에서 ‘육은 죽은 것이나 영은 산다’라고 할 때는 ‘영에 의해서만 살았다고 할 때 산다’예요. 그래서 평소에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라’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말이에요.

‘너 죽었다.’ ‘오케이, 나 죽은 거 맞아. 하지만 죽었다는 걸 알게 한 것은 영이다.’ 그 말은 맞잖아요. 그 말도 맞는 거예요. 내가 죽어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나는 살아 있다.’ 말을 약간 길게 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약간 깊게 한번 들어가 봅시다. 육이라는 것이 뭐든지 하게 되어 있고 –이거는 하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뭐든지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육의 탓을 하면 뭐든지 하지 말란 말인가. 아니면 케이블 노끈으로 묶어야 하는가? 납치당해서? 내가 이렇게 돼야 성령의 행함일까요? 하고 싶은 것도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육은 육밖에 안 나오는데 영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예언대로, 말씀대로 하시는 왕 되시는 주님이 그 자리에 끼어들어요. 그 끼어드는 예를 두 가지 들겠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9장에 소경이 한 사람 나와요. 소경이 나올 때 제자들이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예수님,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요 9:2) 아예 제자들이 예수님께 객관식으로 물었어요.

2개 항목으로 딱 끄집어서 얘기합니다.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조상 죄 때문입니까?” 그때 평소에 성경 좀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이 여기서 티가 나죠. 좀 본 사람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 죄 때문도 아니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 되어야만 했다.’

듣는 소경 섭섭하더라도 아무튼 그게 정답이에요. ‘저 사람은 손만 대면 왜 사업이 잘됩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도 아니고 부모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는 뭘 해도 사업이 번창해야 한다.’ 앞뒤가 이상하게 안 맞는 것도 같지만. 자, 여기서 바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렇다면 그 소경은 실로암 물가로 가서 진흙으로 자기 눈을 비벼서 눈을 떴잖아요. 눈 떴으면 그 사람이 부활 된 겁니까? 아, 이거 중요하지요. 주께 혜택을 입었고 감긴 눈을 떴으면, 영광을 돌렸으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주님께서는 9장 13-14절에서 이렇게 합니다.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다시 말해서 주의 뜻은 이거예요. 눈을 뜨던 감기던 관계 없이, 지금 죽은 자가 부활 되는 것은 율법을 뚫어야 돼요, 율법을! 율법을 뚫고 나가야 돼요. 율법 아래 있는 한 그 사람은 영광의 부활에 이르지 못합니다. 율법을 뚫어야 돼요. 주님께서는 소경을 의도적으로 율법을 지키게 되었다는 그들 앞에서 눈을 뜨게 했어요. 그러니까 율법을 못 뚫는 자들, 율법 지켜서 천국 간다는 유대인들이 잡아먹을 듯 달려듭니다.

“너 왜 법을 안 지켰어?”
“예수님이 눈 뜨여줬어.”
“그거는 됐고. 너 왜 안식일을 안 지켜?”

주의 뜻은 이겁니다. “안식일 지킨다고 눈 뜨냐? 아니지!” 네가 안식일 지켜도, 율법 지켜도 못 뜨는 눈을 뜨게 했다는 이유는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율법 이편으로 온 거예요. 율법 안에 인간이 갇혀있다면, 그 저주 안에 갇혀있다면 먼저 주께서는 율법을 완성한 그 바깥에, 먼저 그쪽에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소경된 자에게 “누가 눈을 뜨게 했나? 내다.” 그러고 나서 “주여,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9장에서, “보지 않은 자가 본 자를 심판한다!” 와, 무섭지요. 보지 못했던 소경이 소위 ‘나 똑똑하다, 양쪽 눈 2.0이다.’ 하는 사람을 뭐라 합니까? ‘너는 율법에 의하면 부활되지 못하고 저주받아야 될 율법안의 사람’이라고 심판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자, 아까 산당은 높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전은 뭐냐?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에요. 그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 어떻게 되느냐? 높아져요. 높은 곳보다 더 높아져요. 시편 132편 13-14절,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하나님이 영원히 쉴 곳이라 했습니다.

시편 48편 1-2절에 보면,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어떤 산보다 더 높은 산으로 이 시온산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이 본문은 대학교 때 선교단체 간사하거나 공부 좀 해본 사람은 잘 알아요- 2장에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모일 것이고 백성이 가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율법이 그 산에서부터 우리에게 길을 닦아 준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의 높은 곳에 계시는 그 하나님의 거처, 주의 이름이 계시는 거처가 이 땅의 어떤 산당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율법대로, 코스대로 살았던 주님이 거기에 귀환을 해요.

높은 하나님의 시온 산에 귀환을 하게 되면, 귀환했던 그 능력을 지상에서 하나님 자기 백성에게 강물 흐르듯이 흘러내려 버립니다. 이것이 다윗이 목자가 되어서, 양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영생을 얻는 방식이 이미 계약안에 들어와요.

저는 이 성경을 보면서 이 세상의 어떤 헌법, 어떤 인간들의 인간과 인간과의 계약에도 이러한 성경의 계약만큼, 죽었다가 살려주는 이 계약만큼 도무지 가치 있는 계약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생동안 이 계약서 들여다봐도 괜찮아요. 아까도 로마서 8장 10절에서 얘기했잖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육은 죽었고 영은 살리라.” 로마서 8장 6절에도 나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자, 끝으로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 땅에서 왕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부활의 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육신도 있어서 주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일가친척, 가족들로부터 이게 뜯겨요. ‘피라냐’ 있지요. 아마존강에서 살 뜯어 먹는 무서운 민물고기 피라냐(Piranha).

이미 영생 얻고, 부활을 담보로 얻었고,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나는 내 이름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주님의 자아로서, 주님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나에게 피라냐가 달려들어서 이걸 뜯어 먹어요. 부산에 수영로, 거기 물가에 상어 등장했지요. 사람은 구경하지만 들어갈 수 없어요. 뜯어먹힐까 싶어서.

성경의 계약에 의해서 끝났어요, 계약에 의해서 끝났다고요. ‘이것이 바보인가, 칠칠치 못한 게 너같이 돈도 없는 게, 네가 뭐 배운 게 있어?’ 이런 소리로 뜯어먹고, 저런 소리로 뜯어먹고. ‘지 밥벌이도 못한 주제에 무슨 부활을 해!’ 온갖 비난과 욕설과 시기와 질투로 뜯어먹히는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빌립보서 3장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도 뜯어먹혔어요. 4장 12-13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해야 할 일을, 왕 되신 주님의 백성 된 일을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마시고 하세요! 백성이 해야 될 일, 왕이 어떤 분이라는 걸 소개하는 일에 여러분, 망설이지 마시고 매사에 주저하지 마시고, 뜯어먹히더라도 행동과 말을 통해서 증거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세상대로 자기 행복 추구하지만 그게 부활되지 않는 한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공부를 하고, 똑똑하고, 아이큐가 높고, 세상에서 칭송받고, 메달 달고 존경을 받지만,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왕이 되셨사오니 이제는 왕의 백성답게, 세상에서 욕 얻어먹는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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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