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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일한 근원260927우리교회요한계시록

유일한 근원(요한계시록 7:9-12)

유일한 근원

2026년 9월 27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7:9-12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천국의 광경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거기에 참여한 인간들이 있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고 부럽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합격자입니다. 그들의 신분과 운명은 이제 요지부동입니다. 이런 호사에 대해서 같은 인간으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은 속히 등장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가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인간의 행함에다 기대거는 식으로 답변이 주어지면 아니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 같은 겁니다. “해는 왜 거기에 있는가?” 해가 어떻게 운행하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 중에 아무도 만들지 않은, 인간의 손을 떠난 물체가 왜 하늘 거기에 있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만들지 않는 것이 거기에 있다면, 이는 유령과 같은 품목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이 제작하고 만든 것들로 전환시켜서 의미와 가치를 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히’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이 왜 인간 눈에 뜨여서 인간으로 하여금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나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위협감을 짊어지게 하느냐 말입니다.

태양을 누가 만들고 왜 인간들 눈에 보란 듯이 눈에 뜨이게 했는지 모른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인간이 그 근원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몸무게 70kg 나가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3kg정도의 무게의 재만 남기도 유족들에게 함에 담겨 돌아왔다면 나머지 67kg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주로요? 우주는 어디로 어떻게 사라질까요? 잠시 내가 살던 땅은 결국 사라지고 지옥과 천국으로 양분됩니다. 이는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에는 천국의 조건에 맞추어서 들어갑니다. 그 조건은 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과 비거룩, 즉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으로 갈라섭니다.

이 기준은 구약 율법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모든 기는 것 중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무릇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목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라 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그 같은 그릇의 마실 만한 마실 것도 부정할 것이며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주검에 다닥치는 것만 부정하여질 것이요 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질지라도 그것이 정하거니와 종자에 물을 더할 때에 그것이 그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그 사체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레 11:31-40)

왜 율법이 주어져야 우리 자신의 더러움과 깨끗함이 구분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 자체가 이미 더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언한 그 처소에 들어가는 자들인데 그들조차 사전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깨끗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처소’가 구원을 결정하는 겁니다. 거룩한 처소가 죄인을 깨끗게 하는 겁니다.

그 처소는 구약의 야곱과 그 12아들을 묶어서 동일하게 단일 처소, 곧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아래서 불리워지고 다루어지는 원칙으로 작용합니다. 144,000은 ‘12’라는 숫자의 결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에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야곱의 혈육 자식 전부를 언약 안으로 다루어질 것을 ‘복’으로 규정짓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6-28)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일 이름이 지닌 위력입니다. 이 단일 이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각 이름을 삭제되고 대신 ‘12계열’의 연관된 숫자로 불리워집니다. 인간의 숫자 카운터는 자기 존재의 ‘1’로 시작되지만 천국의 숫자는 예수님 ‘1’로 시작됩니다. 이는 인간은 자신을 믿을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광경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죽음 이후의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이미 죽은 자들의 집단과 모임으로 여겨질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2:13의 모습은 죽은 후의 모습이 아닙니다.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부분의 가치는 날아가고 단일 전체로서 부분에게 본질을 제공하는 바는 이미 인간들의 형편 이 전체 죽음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으로 인해 새로운 전체에 소속되는 자만이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식빵 한 덩어리를 칼로 썰어서 여러 조각이 된다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개인으로 사는 자가 전체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9에서는 인간 내부의 퍼지고 번져나가는 ‘누룩’으로 죄를 묘사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율법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 번짐을 겨냥하면서 작용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왜 인간은 바르고 살고 죄를 짓는 않는 것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겁니까?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8-12)

종려나무란, 허다한 모든 이들이 단 한 분에만 관심 고 쳐다보면서 살 가치가 있는 분임을 나타내는 본질의 표현 방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요한계시록 7장 9~12절(유일한 근원)26092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7장 9~12절입니다. 신약성경 381페이지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아멘.

천국의 웅장한 광경을,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 내부까지 전달 해 주셔서,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인간은 여기, 천국에 살 수 없는데, 이렇게 천국까지 들어와서 영원히 살게 된 그 합격자 명단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갖게 되죠. 이 합격자 명단은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이름이 아니고 숫자로 나와 있어요.

십사만 사천. 십사만 사천을 지상에 있는 수학 시간에 배우는 숫자로 생각한다면, 십사만 사천은 그야말로 지상에서는 십사만 사천일(144,001)도 아니고, 십사만 구천구백구십구(139,999)도 아니에요. 딱 144,000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천국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석해요. 오늘 본문 9절에,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셀 수 없는 큰 무리.

인간의 숫자 배열에서 카운트(Count)는 자기를 숫자 1로 보고 시작하는 카운트예요. ‘나 하나, 별 하나’, ‘별 하나, 별 둘’ 이런 것처럼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숫자 카운트 방식은 하늘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숫자 개념, ‘1’은 예수님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확대되고, 확대되고, 확대되고, 확장되는 거.

어떻게? 지상에서는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숫자로 번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번져봤자, 그 많은 숫자가 딱 하나를 지목하고, 주목하게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관심사가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관심사는 오직 어린양, 어린양에게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관심이 모여져요. 그 관심이 모여지면서 그 많은 숫자들이 손에 손에 뭘 들고 있느냐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지금 천국 생중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야, 이게 몇 명이야’라는 것이 아니라, 이 결과물이 누구에게서 시작되고, 누구에게서 번져 나왔느냐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거예요. 그 관심을 둘 때, 그 관심을 두는 새로운 노선, 그 노선의 결이 나와요. 나무의 결이 있는 것처럼. 결이 바로 요한계시록 7장 5~9절에 나와 있는데, 그건 숫자 12로 표현되는 결이 나와요.

일만 이천에 곱하기 12, 12*12의 결이 나오죠. 거기에 곱하기 1000. 그러면 144,000. 그러면 십사만 사천의 많은 무리,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무리, 그 숫자 안에 결을 조사해 보니까,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에 따라서 예수님도 제자를 뽑을 때, 13명도 아니고 11명도 아니에요. 딱 12명이었습니다.

언약에 맞춰서, 언약이라는 하나님이 마련한 좌석, 좌석의 성질과 질에 따라서 그 좌석을 앉을 수가 있습니다. 장례식 때, 흔히 많이 하는 성경 구절인, 요한복음 14장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예비한다고 할 때, 그 처소, 그 처소가 좌석이 앞좌석인지 뒷좌석인지, 그게 굉장히 궁금할 수 있는데, 극장에 예약된 좌석, KTX에 예약된 좌석, 그런 걸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자리가 왜 주님이 십자가에 죽지 아니하면, 이 자리가 왜 마련되지 않는가에 관심을 두셔야 합니다. 이 좌석은 죽은 자만 앉을 수 있는 좌석이기 때문에. 죽어서 죽는 거 말고, 살아 있으면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인정한 사람만이 그 좌석을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기 싫은데,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죽기 싫을 때는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는 이유는 창세기 2장 17절에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만든 선악과를 누가 따 먹었느냐. 따먹지 말라고 당부했잖아요. 이 선악과나 생명나무는 놀랍게도 인간이 만든 게 아니에요.

이게 왜 놀라워야 하냐면, 해와 달과 별이 인간이 만든 게 아닙니다. 해와 달이 어떻게 운영되는가는 인간들이 관찰하는 범위 내에서 알고 있어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왜 굳이 해와 달, 별을 만들었냐. 달리 말해서 사람은 왜 만들었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해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군지, 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고 그냥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출발점도 몰라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뭐냐 하면, 네가 네 근원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의 지은 집, 두 개의 집을 준비해 놓았어요.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노선 말고, 낯선 세계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낯선 세계의 노선에서 등장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종려나무를 들고서 새로운 대열을 이룬다는 거예요. 종려나무 들고.

예수님에 대해서 종려나무를 들고 예루살렘의 성전에 갈 때 반겼던 그 광경은, 요한복음 12장 12~15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걸 보면, 그 당시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실체를 몰라도, 약속은 계속해서 유지된다는 그것은 그들이 인정했어요.

약속대로 오십니다. 약속대로. 어떻게? ‘주’라 하는 것은 구원자거든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오실 겁니다. 그렇거든요. 그 말은 우리는 아무리 싸대고 몸부림쳐도, 우리 자신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근원에 대해서 알 길이 없기 때문에. 해와 달과 별이 왜 거기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말하는 게 아니고, 왜 그것들이 거기 있는지를 모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세계에 있는 어떤 존재며, 어느 정도로 근원에 대해서 모르는지, 제가 잠시 실례지만 여러분을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습니다. ‘뭘 먹습니까?’라고 물어요. 뭘 먹습니까? ‘나는 이거 반찬 깍두기하고 곰탕하고 먹습니다’라고 이렇게 답해요.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누가요? ‘내가 먹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 결국 당신은 자기를 믿는 자군요.

자기를 믿는 자. 이 말은 인간은 먹든지 마시든지, 자기의 믿음에서 출발하고, 자기 믿음을 어떻게 포기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내가 나를 믿는 한, 우리는 주께서 시작한 근원을 우리가 틀어막고 있어요. 우리가 막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일을 가로막는 자예요. 제가 문제를 하나 더 낼 테니까, 오늘 문제가 몇 개 있어요, 하나 더 있습니다.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하늘에 있는 공은 떨어지면, 나중에 땅에 떨어질 때,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빠르게 더 세차게 떨어지는데, 왜 하늘에 빗방울은 그렇게 떨어져서 지면에 도달할수록 속도가 그대로입니까? 속도가 왜 증가하지 않습니까? 비 올 때 한번 맞아 보세요. 산 위에서 맞는 거나, 땅 위에서 맞는 거나, 속도가 별 차이 없지요.

왜 그럴까? 내려가면서 가속도가 붙어야지. mgh=1/2mv2(제곱) 가속도가 붙어서 더 따가워야 하는데, 우박 맞고 죽은 사람은 있어도, 비 맞고 죽은 사람은 없잖아요. 왜 속도가 붙지 않을까? 그거는 공기가 저항이 있기 때문이에요. 저항을 마주치면서 오기 때문에, 그렇게 속도가 붙지 않는 거예요. 물방울 보고, ‘야, 이거는 세다. 너무 위험하다’라고 생각 안 하고, 하찮게 여겨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이 시답지 않은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으로 왔으면 우리는 눈부셔서 못 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40일 동안 있다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도, 인간은 눈이 부셔서 마주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앞에, 코앞에 등장한 그 당시에 예수님은, 그 당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주 시시하게 봤어요.

뺨을 치지를 않나, 떠밀지를 않나, 욕하지를 않나, 비웃지를 않나. 그 현장에 우리가 있어도 우리와 마찬가지예요.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강력한 저항 노릇을 하라고, 배후에 마귀가 그렇게 우리 보고 시켰던 겁니다. 성경? 말씀? 복음? 웃기고 있네. 내 삶이 더 중요해! 내 삶이 더 중요하다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자식이나, 내 가진 재산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 내부에서 마귀가 우리한테 우렁차게 그걸 이야기하고 있어요. 지금 한가롭게 주님 생각이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거 지금 돌아볼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한가롭게. 그렇게 시간 있으면 추석 때 해외 놀러 가지, 뭐 교회 나올 일이 있습니까? 그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막고 있습니다. 종려나무? 미쳤어요? 그걸 왜 들고 다닙니까? 내 살기 바쁜데, 내가 할 일이 많은데.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 쪽이었습니다. 시편 113편 5절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우리 하나님 같은 분, 그런 분이 어디 있겠느냐는 식으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렇지. 최고지. 전지전능하시고, 만사형통...’ 그게 아니고, “하나님 같은 분이 누구냐” 왜? 높은 곳에 계시면서 스스로 낮추신 그런 하나님이 누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6~8절) 스스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누군 인지를 들춰 주시는 그 세밀한 작업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또 어디 있겠냐, 이 세상에. “너 방해자지? 네가 방해한 이유가, 너는 너만 믿잖아”라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문장을 하나 말합니다.

[천국의 기준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고 저항적 개념이다]

천국에 못 가는 것은 주님의 일을 저항해서 그래요.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저항해서 그래요. 레위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의 취지가 뭐냐? 이번 겨울철 수련회에서 레위기 할 거예요. 레위기의 율법은 뭐냐 하면, 얼마나 착하냐 안 착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추접하고 더러우냐, 정결하냐를 구분하는 겁니다.

시간 관계상 제가 많은 대목은 읽어드리지 않겠습니다마는, 레위기 22장 4~9절까지, 그냥 이거는 시간 관계상 후딱 읽겠습니다.“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자나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만한 자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라고 되어있어요.(4~6절)

이것은 레기 11장 31~40절에 나오는데, “그것에 접촉된 자는 부정하다” 여기 레위기 11장 32절에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목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33절에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 이렇게 하면 부정하고, 이렇게 하면 부정한 이야기를 계속 깔아놓는 이유가 뭐냐 하면, 출발을 하나님의 계시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이 오기 전에, 그냥 무심코 살았다는 그 전체가 부정했었다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이걸 율법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에게만, 너희들만 특별히 그걸 알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자기 자신의 근원을 안다는 게, 얼마나 이게 복된 자입니까? 그러면 그 질문을 가지고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해는 왜 만들었는가, 별은 왜 만들었는가, 달은 왜 만들었는가? 부정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서 그런 걸 만들어놓은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이 결국은 예수님이, 진짜 근원적으로 거룩하신 분이 오게 되면, 그것들은 자기 역할을 이제 끝내고 은퇴해야 합니다. 사라져야 해요. 불로 다 태워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은, 인간은요? 여기서 질문 하나 또 들어가지요. 70kg 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화장터에서 나오는 것은 몇 킬로입니까? 3kg. 재의 무게가 3kg 정도 돼요.

그럼 ‘70-3’, 나머지 67kg은 어디로 갔어요? 67kg이 어디로 갔습니까? 전혀 궁금하지 않았죠. 그 3kg이 나의 전부가 아닌데, 67kg까지 포함해야 나인데, 그 67kg에 해당하는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우주로 흩어졌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물리학자들이. 우주는 어디로 갔을까요?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부정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더러운 것은 지옥의 몸으로, 깨끗한 것은 천국의 몸으로, 주께서 깔끔하게 두 노선 정해서 거기다가 쓸어 담았습니다. 이런 겁니다. 아침에 밥 대신 식빵을 먹는 가정도 있지 않습니까? 식빵을 먹을 때, 이건 신기한 건 아니고 당연한 건데, 식빵을 칼로 슬라이스(얇게) 해서 썰어요.

썰면 그 슬라이스 된 식빵 하나하나가 전체 식빵하고 본질이 동일합니다.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이나, 갈라디아서 5장 9절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식빵이 만약에 썰어도 식빵이라면, 죽어야 되고, 썩어야 되고, 부정한 것의 어떤 것을 잘라내고, 부분으로 어떤 것을 한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착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뭐냐. 안 착하다가 아니라 더럽다가 돼요.

거룩하지 않은 더러움이 돼요. 이게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고, 보는 관점이고 방식이에요. 근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깨끗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딱 비쳐요. 왜? 선과 악, 이거는 나 하기 나름이다. 나 착하잖아. 아, 이건 나쁜 거니까, 이걸 착한 데서 벌충하게 되면 나쁜 것에서 다시 착하게 된다는 이런 식이에요.

야고보서 2장 10절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 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이게 야고보가 무리한 해석을 내렸다는 식으로 결론 내립니다. 이게 레위기와 연결하게 되면 너무나 간단한 문제인데, 자꾸 내가 나를 보는 거예요. ‘내가 뭐 완전할 수는 없지. 하지만 바르게 살려고 최소한의 노력을 하게 되면, 그 노력이 가상하다고 주께서 천국 갈 때, 나를 배려해 주겠지’라는 맨날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 9절에서, 사도바울은 레위기와 관련해서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9절에,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돼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처음 할 때는 내가 바르게 살았잖아. 최선, 최선을 다했잖아’라고 했는데, 작은 것 하나, ‘아이고 그거 뭐 조그마한 잘못인데, 전기세 이틀 늦게 냈다고 그거 가지고 지옥 가나’라고 이러거든요.

지금 전기세 이틀 늦게 낸 게 문제가 아니고, 과태료 한 달 늦춰 낸 게 문제가 아니라, 냉장고 냉동실에 문 열어놔서, 전기세가 52원 더 늘어난 그게 잘못이 아니라,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게, 그게 바로 근본적으로 이게 더러운 것이에요. 믿을 것이 나밖에 없다는 게. 교회 가 보세요. 다 그렇지. 그래서 끝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9~11절,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5천 명 먹이고 배부르다 하지 말고 남은 게 있다는 거예요.

남은 게 전체를 대변한다는 거예요. 5천 명 먹이고 남은 12 광주리, 남아 있는 걸 주목하라는 거예요. 그 남아 있는 거. 그 남아 있는 게 뭐냐? 사람은 떡만 있으면, 자기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인간이 출발을 죄에서 출발한 거라는 겁니다. 죄에서. 나 잘되기 위해서 율법을 사용하는 거, 해석하는 거, 그 인간의 본질은, 자기 믿음은 믿음을 바꾸어 내지를 못합니다.

주님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 때, 그 사람들은 당국자가 어떤 법을 내세우는지, 예수님에 대해서 선동질하지 말라는 그런 법들, 그런 법을 그들은 초월했습니다. 왜? 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아니면 나를 구원할 수 없는, 내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메시아를 보면서, “호산나, 구원자로 오셨군요”라고 외치듯이, 우리의 매일의 삶이 ‘구원자가 이미 이 땅에 오셨군요’를 생각하면서 주님만 믿는, 나를 믿지 않는 삶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손에 종려나무 들게 하옵소서. 그리고 모든 관심사가 주께서 뭘 하셨는가, 주께서 어떻게 나의 모든 죄를 들추어내는가, 그것에 관심을 두면서, 들추어질 때마다, 또 주님만 믿고 주님만 믿는 기쁨과 감격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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