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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무저항의 저항260927우리교회야고보서

무저항의 저항(야고보서 5:5-6)

무저항의 저항

2026년 9월 27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5:5-6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5: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대항한다’와 ‘대항하지 않는다’를 통해서 이미 대항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편에 서서 이방민족과 대항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12지파이고 신약에 와서 야고보 사도는 ‘흩어진 12지파’라고 말합니다.(약 1:1) 따라서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이로서 인류 전체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힘으로 그들은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몸짓과 생각에 ‘하나님을 대적함’을 빼놓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경향을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무의미가 유일한 의미에게 대들기’인간들에게 기본적으로 대드는 경향이 있음을 하나의 ‘계시’로 채택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민족들의, 성향을 발췌하셨습니다.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고난 여정과 삶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삿 6:1-6)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저항적 저항’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조치는 하나님께서는 부응하시는데 그 방식에 필수 절차가 담기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를 치고 난 뒤에 그 남겨진 것을 재료로 한 제사를 나에게 드려라’는 순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삿 6:25-26)

이러한 제사 절차는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의미에서 나타난 종교하고는 차원이 다름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이란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인간 본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빚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계십니다.

왜 하나님 본인만으로 천지 창조나 구원이 안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그냥 살아계신 신에게 경배하고 제사드리고 말씀으로 바르게 되면 안되는 이유가 뭐지요? 그것은 하나님과 관심사가 오로지 아들에게 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에덴에서 강제 추방되고 난 뒤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사명은 여전합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천국을 떠나서 온통 무의미만 가득 찬 세상에서 천국에 갈 사람을 모집하셨습니다. 천국이 있다할지라도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구원이란 천국의 의미로서만 성립합니다. 즉 ‘그 나라와 그의 의’만 천국에서 받습니다. 인간은 출발부터가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무의미로 의미를 공격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께서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활약을 보여, ‘하나님의 양자 만들기’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 겁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런데 과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전체 일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여기에 선지자들이 나서서 죽으라고 외칩니다. 에스겔은 20살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만 26살 때, 자신이 근무할 성전이 불타고 자신은 바벨론에 포로잡혀 갑니다. 그리고 포로잡혀서 그 바벨론 나라에는 그는 30세에 벙어리가 됩니다. 단 하나님의 계시가 내릴 때는 벙어리가 풀려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7년 반을 지내다가 어느날 아내가 죽습니다. 그는 제자장형 선지자입니다. 아내가 죽어도 슬퍼하거나 울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겔 24:15-16)

하지만 그는 나이 50에 새성전 건립에 관한 예언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는 사사기에 기드온에게 찾아든 천사의 지시와 절차도 동일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노골적으로 하나님에게 탄식하면서 대듭니다. ‘왜 악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있던 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파괴하게 만드냐고’불만을 보이면서 달려듭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 이상으로 악에 의한 의를 지배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의미 있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들게 하므로서 그들의 무의미와 그것으로 멸절되어야 마땅함을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살의 날’입니다.(약 5:5)

즉 모든 인류를 ‘도살의 날’을 따로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놓으셨습니다. 인간은 끝났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대책은 ‘믿으라’입니다. “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3-4)

이런 선지자들의 체험은 다음의 예수님의 체험에서 완성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이런 응답을 받고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감격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나님으로부터 양자함을 받는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 성도는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거저 붙어다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 3:35-38)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거짓된 하나님을 찾는 우리 자신이 곧 아무런 의미 없음을 도리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강-야고보서 5장 5-6절(무저항의 저항) 26092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5-6절입니다.

야고보서 5:5-6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에 ‘도살할 그날이 온다’는 겁니다. 이걸 쉽게 하면 이런 뜻이죠. ‘인간아, 너희는 끝났다. 인간 세계 자체가 아무리 애써도 도살의 대상일 뿐이다.’ ‘도살의 날’이라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 정했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관계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얼마나 의미 없는, 무의미만나온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야고보서 1장 1절에 보면 흩어진 열두 지파라고 되어 있어요.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것은 흩어지기 전에 열두 지파가 있었고, 그 열두 지파에게만 하나님의 진짜 뜻을 알려줬는데 구약 때 열두 지파에게 주어진 계시가 이제 본격적으로 신약에 완성이 돼요. 완성됨으로써 완성되었다는 그 사실을 흩어진 열두 지파, 다시 말해서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가 그걸 주저없이 전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들아, 너희들 끝났다.’에요. “뭐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한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끝났어요. 그러니까 엄살 피우지 마세요. 이 세상은 ‘나’라는 걸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이건 끝난 겁니다. 천국이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천국은 있는데 구원이 없습니다. 천국 갈 사람이 아무도 없죠. 끝났으니까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인간은 끝장이 났다는 이런 사실을 전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 바로 흩어진 열두 지파에요. “인간은 끝났는데 당신이 뭔데? 이 세상은 도살될 날이 온다. 말로만 끝난 게 아니라 진짜 끝났다. 그동안 인간들이 구시렁대는 소리는 다 엄살이었고 핑계에 불과했다. 소용없다.” 이렇게 하는 거죠.

어떤 분들은 교회 다니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이제 교회 다니니까 천국 백성이다, 죽으면 천국 간다’라고 그렇게 자부하는데 툭 건드리면 그 나라 의가 나와야죠. 천국은 그의 나라잖아요. 우리나라가 아니에요. 인간은 끝났어요. 인간은 끝났다고요. 끝났으니까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에요. 우리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에요. 예수님이 꼭 집어서 넣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은 끝났으니까요. 인간은 도살의 대상이니까요.

이걸 구약 때 이스라엘이 몰랐어요. 말씀을 줘도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신약에 와서 흩어진 열두 지파,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교회는 바로 이 점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진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버리는 것이고, 그 결과로써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의 나라만 사랑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구약 때 열두 지파를 거둬주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에요. 열두 아들은 야곱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을 누가 언약의 백성으로 거둬주었느냐 하면, 야곱에게 밤에 찾아온 하나님이 열두 아들을 거둬줌으로써 이름이 바뀌어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뀝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등장해요. 야곱의 후손들로 구성된 열두 지파, 나라, 민족.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그 사람을 받아줬다는 흔적이 그들 안에서 계속해서 피어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너의 의 말고 나의 의, 그 나라 의죠, 그 하나님의 의를 유일하게 드러내는, 나타내는 민족이 열두 지파입니다. 따라서 열두 지파에게 할 일이 있는데 그게 뭐냐?

아까 우리 장로님 기도에서 ‘주를 증거해야 한다’라고 했는데 증거하기 굉장히 쉬워요. “너 끝났어. 왜? 의미가 없어.” 왜 의미가 없는데요? 의미는 예수님의 나라에게만 있고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인간 나라에게는 어떤 의미도 하나님이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뭐 아시안 게임을 하든 메달을 따든 상관없어요. 어떤 의미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너는 도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흩어진 열두 지파가 아주 신나게 증거해야 돼요.

시편 37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입장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유일하게 받은 입장에서 말하는 겁니다. 잠시 후에 악인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없다. 왜? 주께서 치워버렸으니까요.

어디로 치웠을까요? 분명히 악인이 설쳐댔는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없어요. 어딜 갔을까요? 여기 ‘악인 보존의 법칙’이 등장합니다. 악인을 치웠는데 어디로 가느냐? 지옥으로 치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의인은? 의인도 역시 없어요. 땅이 없어지니까 의인도 없어지는데 의인은 어디로 갔죠? ‘의인 보존의 법칙’, 의인은 주께서 딱 집어서 천국으로 치워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천국은 뭐냐? 아들의 나라죠.

그러면 이 이야기가 맞죠. 하나님의 모든 의미와 하나님이 인정하는 모든 의는 천국에 있는데 천국은 누구의 나라냐 하면, 아들의 나라. 따라서 천국이 있다는 것은 이 지상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어떤 가치도 없고, 이 땅에 태어난 인간들은 도살할 대상이고, 모조리 다 악인에 해당되는 겁니다. 시편 37편 10절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언급을 하셨다는 것은, 이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줌으로써 뭐가 진실인지를 다 보여줬어요.

저는 며칠 전에 다시 한번 전율을 느낄 정도로 마음 정리가 된 게 있어요. 지금껏 수십년 동안 하나님 말씀 전하고 했지만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께 자식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 자식이 왜 있어야 되죠? 그냥 하나님이면 되잖아요. 땅에는 우리 인간이 인간이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면 되잖아요.

왜 하나님에게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우리에게 알리는 이유가 뭐냐? 인간들은 하나님을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인간들은 타고난 거예요. ‘나를 구원할 하나님은 저기 계시다, 끝. 하나님 저기 있고 나 여기 있다, 끝.’

그런데 하나님에겐 독생자 아들이 있다. 아들이 거기서 왜 나와야 되죠?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이게 바로 우상이라는 거예요. 이게 우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거기 계시죠? 오겡끼데스까, 거기 잘 계십니까? 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게 왜 우상이고, 이게 왜 마귀 짓일까요?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말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해도 의미 없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걸 의미 없는 것으로 칩니다. 받지를 않아요. 간주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요.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바로 자기가 무의미한 것에 대해서 자기로부터 의미를 따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 계신 곳에 간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교회다. 교회 좀 다니다가 이제 안 나온다? 왜? 교회 안 나와도 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엔 의미가 없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열심히 살고자 노력함에 이것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기도하실 때 성경 구절이 하나 나왔어요. 그 구절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평생 그 말씀을 다 알지만 그 오른손의 의미를 처음 알았어요. 오른손은 주께서만 하는 일이에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오른편은 주님의 아들 예수님만 하는 일이 오른손으로 나타나 있어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유일하게 천국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절대 무의미한 인간이 알려고 하지를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열심히 살아서 일하기 때문에 그 일한 양만큼, 비축한 만큼 이만큼 나는 가치 있게 살았고 의미 있게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걸 거부당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말 나와요. 6절에, “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 대항했다, 는 저항했다는 뜻입니다. ‘저항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왜 하느냐? 열두 지파를 통해서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인간들은 인간 세계 나름의 관계 속에서 의미 없는 것에서 자꾸 의미를 만들어내는데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에 취해있어요. 거기에 취해서 하나님의 백성, 성도가 바라보는, 성도가 갖고 있는 그 나라 의가 개무시를 당하는 거예요.

인간들의 노동의 결실에 의해서 아주 하찮은 것으로 거부당하고 무시당할 때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들을 대항치 말라.” 저항하지 말라는 거예요. 분류가, 계급이 다르니까요. 저항하지 않는다는 말은 저항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거예요. 저항이 없다, 대항이 없다는 게 아니라 저항이 있고 대항이 있는데, 저항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는 방식의 저항이에요, 이게.

인간들은 자기가 열심히 살고 노력하기 때문에, 자기 의미가 쌓여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를 무의미하다고 보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인간은 정말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계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천국이 성립되고 의미가 성립되는데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애틋한 관계가 있는지 그걸 제가 쉽게 설명해 보려고 노래가 가사를 가져와 봤어요.

오 대니! 피리 소리가 들리는구나
산골짜기마다 울려퍼지는구나

여름은 가고 모든 잎들은 떨어지는데
너는 떠나고 나는 여기 머물러있구나

하지만 저 초원에 여름이 오면 네가 돌아올까
저 산골짜기에 흰 눈이 덮이면 네가 돌아올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여기서 기다리마
오 대니, 내 사랑하는 아들 대니야

하지만 모든 꽃들이 시들어 죽고 나 또한 죽어 땅에 묻히면
너는 내가 누워있는 곳으로 찾아와 무릎꿇고 나에게 작별 인사라도 해주면

내 무덤위에 네 고운 목소리가 들리면
내 무덤은 더 따뜻해지고 달콤해지겠지

네가 날 변함없이 사랑해 준다면
나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평화롭게 여기서 잠들거야

‘Oh Danny boy’라는 아일랜드 민요인데요. 농사짓던 아들이 영국과 전쟁하려고 떠났어요. 그런데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돌아와 주면 좋겠는데 이미 전사했는지 세월이 가도 소식이 없어요. ‘네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젠 기다리고 기다려도 네가 돌아오지 않으니 내가 여기서 죽는다. 내가 죽더라도 내 무덤에 와서 네 목소리라도 들려주면 내 마음이 만족하겠다’라는 그런 가사에요.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지금도 이 대니 엄마의 무덤에 악단을 보내 정기적으로 음악을 틀어준다는 거예요. 우리말로 현제명씨가 번역한 ‘아 목동아’라는 노래에요.

이 가사에 보면, 아들만 사랑해요. 그 아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아들만 사랑합니다. 인간은 도살 대상이에요. 의미 없어요. 선악과 따먹고 이미 떠났어요. 그 의미 없는 사람들의 세계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서 아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절차가 있을 것이고 그 절차를 통해서 의미 없는 사람을 자기 양자로 받아주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게 성경 내용의 전체입니다. 이게 하나님이에요. 왜 아들이 있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자식이 아니에요. 인간은 지옥 가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등장시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들을 보내요. 죽으라고 보냅니다. 땅에 가서 죽어야 돼요. 왜?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항하는 악마의 앞잡이들이 인간 세상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요. 인간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 -그게 추석이죠- 추석 때 그들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자기 의미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살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 도살할 그날에 인간들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친구끼리 만나서 누가 이야기하던가요? 아무도 안 해요. 전부다 의미 있다, 수고했다, 욕봤다…, 전부 그 이야기라고요. “추석 하니 뭐하겠노? 의미 없어. 메달 따니 뭐하겠노? 의미 없다.” 이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사람 만나면 대화가 되고 그 대화 안에서 의미를 주고받고, 그 의미를 주고받는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손 들고 ‘우리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이 무의미함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이 세계에 저항케 했다는 것, 저항하지 않는 저항을 나타냈다’라는 것을 누가 말하겠습니까? 누가 알겠습니까?

자기한테 관심이 있으면 성경을 안 보게 되어 있어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으면 성경에 관심 없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성경에 관심이 있으면 자기한테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나는 뭘 해도, 앞으로 어떤 성공을 해도 그게 의미 없고 그냥 도살할 대상의 내용만 쌓고 쌓을 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대니 보이는 오직 자기 아들 예수님밖에 없어요. ‘네가 다시 와서 이 지상에서 했던 성과를 나에게 풀면, 네 성과 안에 천국에 오지 못하는 양자들을 끌고 온다면 너의 공로로 인하여 네가 끌고 온 그 양자들, 그 하나님의 흩어진 열두 지파를 이 아버지인 내가 흔쾌히 받아주겠다.’ 이게 바로 진리에요. 이게 진리입니다. 이거 외에 다른 진리는 없어요.

인간은 날 때부터 마귀 종이기 때문에 우상을 섬겨요. 의미가 없으면서 자꾸 의미를 만들기 때문에 가짜 신을 만들었어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무의미란 말이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말을 해요.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 거예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래. 나도 아무것도 아닌 걸 알아. 허무해.’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우상을 만들어낸…, 이게 이사야 46장 6-7절에 있는데요.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상을 만들고 신을 만들면 만들어진 네 사고방식이 바로 그 신과 똑같다는 거예요. ‘허무한 우상을 만들어놓고도 허무하다고 인간들이 이야기 하지, 그렇지? 네가 바로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아무것도 아닌 이유가, 본인을 무의미하고 맛이 갔다, 나 끝났어, 라는 그 생각이 없는 한 넌 우상 숭배자다’라는 말입니다.

뭘 해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식 낳고 키워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관심사가 그게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이건 이방 민족은 전혀 알 수가 없고요,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을 충실하게 반복해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이야기를 해줬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 별겁니까? 우리와 똑같이 자기 잘난체하고 자기 자랑하는 똑같은 인간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진짜 하나님 뜻은 모르고 자기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게 아니야.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고!”라고 외쳤던 자들이 출몰해요. 그들이 선지자입니다. 목숨 바치면서 외쳤습니다, 목숨 바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안 들었습니다. 듣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부터 잠시 무대를 구약으로 돌려봅시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 두 명을 제가 제시하겠습니다. 하나는 제사장 형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선지자인데 제사장 같은 선지자 한 사람 에스겔. 또 한 사람은 예레미야처럼 너무 속이 상해서 이젠 하나님께 저항하고 달려드는 선지자 하박국.

이 두 사람의 예를 들면, 에스겔 선지자는 스무 살 때까지 성전에서 제사장 하겠다는 포부로 설레면서 열심히 모든 율법을 연구했는데 스물여섯 살 때 갑자기 바빌론이 쳐들어와서 포로가 돼 잡혀갑니다. 그리고 잡혀간지 4년 만에 서른 살 때 벙어리가 됩니다. 벙어리가 된 이유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만 목소리가 나와요. 그 외에는 일체 벙어리가 됩니다. 말이 안 나와요. 글로 쓰고 하지 말을 못 해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만 입을 벙끗 하면서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7년 반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자기 아내를 잃었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내를 잃었으니 슬퍼해라. 슬퍼는 하되 울지는 말라.” 참 이게 가혹한 거예요. 에스겔 24장 15-18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에스겔이 아내를 보고 굉장히 기뻐한 거예요. 서로 부부의 정이 너무 좋았어요.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장례식 때 먹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백성이 와서 “이상하다, 왜 울지를 않느냐? 왜 슬퍼하질 않느냐?” 에스겔이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아내가 죽는 것조차도 의미 없고, 인간이 죽는 것도 의미 없고, 살아 있는 것도 의미 없고, 인간은 뭘 해도 의미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자, 자기를 희생하는 제사장형 선지자로서 자기의 가정에 아내가 죽는 것을 통해서 비로서 하나님이 이와 같이 나처럼, -인자니까, 에스겔이 인자거든요. 예수님도 인자잖아요- 장차 올 나 같은 인자가 이와 같이 인간들의 저항에 부딪혀서 맥없이 고통을 당한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깨나 죽으나 평생 살아도 모르고, 도대체 인간이라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선지자를 통해서만, 비로소 의미 없음, 끝났음, 이제는 도살할 날만 기다리고 있음이 그들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겁니다.

여러분,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의미도 없는데 뭐 때문에 평생 동안 그렇게 고민하고 염려하고 걱정을 늘어지게 해요, 의미도 없는데요.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래놓고 성경 좀 안다고? 알기는 뭘 알아요? 어떤 큰 교회 장로 수가 24 장로예요. 장로 숫자가 24명이 되는 그 교회가, 자기들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을 받으려면 주님의 의가 나와야죠, 주님의 의가! 왜? 그 나라는 주님의 의만 받아주는 나라에요, 주님의 의! 그러면 우리 생각에 ‘주님의 의를 말하면 되지.’ 여러분 주님의 의는요, 말씀 지킨다고 주님의 의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수요일 제가 언급을 했습니다만, 로마서 3장 21절에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어요, 율법 외에 한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그 의만 천국에서 받고 나머지 의는 안 받아요. 인간은 교회 나오면 자꾸 의미도 없는 게 ‘오늘도 말씀 지켜서 교회 나왔어.’ 매일 자기 의를 쌓아요. 그걸 잊지를 못해요. 잊지를 못하니까 그래서 자기 의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사람은 자랑할 거리가 없으면요, 입을 다물어요. 안 그러면 집구석에 혼자 있든지. 자랑할 거리가 없으면 밖에 기어나오지를 않아요. 명절이고 뭐고 누구 안 만나요, 자랑할 게 없으면. 자랑할 게 있으면 ‘어서 오너라. 손님아.’ 이러는 거예요. 의미도 없으면서 자랑질은 하고요.

주님께서는 유대인 보고 이야기하거든요. 그 당시 유대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예요. ‘율법 지켰다. 이만큼 열심히 지켰다. 생생하게 지켰고 열심히 지켰고 진정으로 지켰고 나를 희생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지켰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의는 너한테서 안 나오는데? 하나님 의는 율법 외에서 나오는데?” 율법 외가 뭐냐? 선지자와 율법의 증거를 받아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에서만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외엔 아무것도 자랑하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너의 무의미 외에는 입 떼지 말아라. 나 의미 없음 외에는 입을 떼지 말라.’ 시편 109편에 이 말씀이 나오는데요. 제가 바라기는 저나 여러분들이 시편 109편에 나오는 말을 주저없이 외칠 수 있을 때 그게 하나님의 의가 주저없이 막 터져 나오는 순간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시편 109편 7절부터, 길지 않아요, 7절부터 20절까지 제가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일찍 죽게 하라는 뜻, 객사하게 만들라는 뜻이지요.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빌어먹게 하소서’가 성경에 나옵니다. 욕이 아닙니다.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보이스피싱 걸렸다 그 말입니다.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저주가 그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이렇게 쭉 나와요. 이건 독하게 독하게 남을 저주하는 대목이에요. 누가? 시편 109편 7절부터 20절까지. 누가요? 성도가, 성도가! 성도 입에서 저주, 저주가 따발총처럼 튀어나와요. 여러분들이 시편 109편에 나오는 이 저주를 남을 향해 발사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까? 무엇이 무서워서 이런 저주를 못합니까? 무엇이 무서워서, 무엇이 겁나서?

이게 바로 인간대 인간관계를 겁내서 그래요. 무의미하고 무의미한 인간관계뿐인데 ‘그래도 남한테 잘 보여야지. 남한테 좋게 해야 내가 살기 편하지’ 자꾸 자기 의미를 도모하기 때문에 이런 시편 109편에 나오는 저주를 주저없이 남에게 퍼붓지 못하고 있단 말이죠. 이걸 퍼붓는 자유가 있어야 되는데요.

이런 걸 퍼부으려면 어떤 경험을 해야 할까요? 바로 시편 109편에 나오는 모든 저주가 바로 나에게 도달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왜? 나는 무의미하면서도 의미 있는 척을 하면서 지금껏 살아왔기 때문에. 내 노력으로 내 이 의미를 누가 뜯어갈 수가 없어요. 나는 안 뜯기고 싶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저주를 우리에게 퍼부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나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합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이 점잖고 착하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 저주를 퍼붓습니까? 우리가 주님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주님에게 대항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대항합니까? 주님만 의미가 있는데 나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주님을 공격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받아주신다면 비로소 여러분들은 십자가에 접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그 의미가,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그 감추어진 의미가 이사야 53장 7절에서 9절에 나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누가, 누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눈치챘으리오?’ 그래 놓고 예수를 믿어요? 그래 놓고 십자가를 알아요? 그래 놓고 천국을 가요? 그래 놓고 자기한테 의미가 있다고 우깁니까? 전부다 끝나 버린 인간들이 발작하는 거죠. 도살할 날의 대기 상태인 대기자가 발작하는 겁니다. “주여, 주여…” 하루에도 백 번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게 주님을 핍박하는 짓이라는 것을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알겠습니까?

주님은 대항치 않는 방법으로 대항했어요, 대항치 않는 방법으로. 자, 그렇다면 구약에 한 군데를 더 보겠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뭐래도 우리는 악인에 해당 돼서 지옥으로 가야 돼요.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 37:10) 지옥 갔으니 안 보이죠. 지옥 갈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을 어떤 식으로…, 없는데, 천국은 있으나 구원은 없어요.

구원받을 자는 없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일부러 찾아오심으로서 거기서 구원받을 자가 나타나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무의미한 존재가 어떤 식으로 의미 있음으로 판정받아서 천국에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가? 누가 ‘대니 보이’냐? 누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느냐? 그 대목에 대해서 사사기 6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사기 6장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사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독하게 말 안 듣죠. 이스라엘 정말 독하게 말 안 듣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없는, 여호와를 욕하는 이방 민족으로 하여금 ‘너나 나나 똑같아.’ 그 똑같다는 뜻으로 핍박을 해요, 이스라엘을. 핍박을 하니까 이스라엘이 너무 핍박을 많이 받으면서 다 해봤잖아요. 다 소용없어요. 핍박을 너무 받아서 이제 피할 곳은 부르짖음밖에 없어요. 부르짖을 때 어떻게 부르짖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부르짖어요.

요새 말로 쉽게 하면 “주여, 십자가 있잖아요. 십자가의 의미가 있잖아요. 나한테 의미는 없지만 십자가는 의미가 있잖아요. 그 의미가 저한테 당도하게 하옵소서. 저 못 살겠습니다.” 이런 식이지요. 부르짖었더니 거기에 응답이 왔습니다. 사사기 6장 22절에 나와요.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방앗간이나 하고 농사짓는 사람에게 천사가 갑자기 와요. 선지자나 제사장에게 온 게 아니에요. 그냥 아무나 딱 집어서 천사가 와서 “나 천사인데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게 25-26절에 나옵니다.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이 지시였습니다. ‘나를 믿으라’ 이게 아니고 기드온이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 해야 될 일이 뭐냐? 기존에 있던 신을 찍고 –도끼로 찍는다는 뜻이에요- 찍어서 나온 그 나무 재료, 우상을 만들었던 그 나무, 아세라 목상을 만든 그 나무 있잖아요, 그 나무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려라. 순서가 그렇습니다. ‘기존에 있는 신을 도끼로 찍고, 그렇게 찍어서 나온 나무로 나에게 제사를 드려라. 딴 나무로 하지 말고 도끼로 찍힌 그 나뭇가지고 제사를 드려라.’

이걸 신약적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도끼로 너를 치고 죽었던 너를 제물로 바쳐서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라.’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상을 찍으라 했어요.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공격하는 파괴자를 내가 파괴하겠다는 거예요. 여호와를 공격하는 게 우상이거든요. 이방 민족이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인간 내부에 들어있는 악마예요. 구약에서는 우상이고 이방 민족입니다. 이방 민족을 치고 그 이방 민족에 대해서 믿었던 너 자신을 번제로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네 안에서 발생시키겠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절차입니다. 무서워서 낮에는 그 일을 못 하고 밤중에 한다는 이것이 기드온 이야기인데, 구약을 끝내면서 거의 마지막 선지자에 해당하는 하박국 선지자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합니다.

하박국 선지서 1장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하박국은 에스겔하고 달라요. 아주 고래고래 고함을 지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지만 하박국은 자기 할말 다해요.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2절에,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하나님이 계시는 이스라엘이 강포를 당해도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이방 민족 바벨론한테 당해놓고 그 탓을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대듭니다. 하나님께 저항하고 반항해요. 바벨론한테는 반항 못 해요, 너무 힘이 세서. 하박국 1장 3절에,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대체 언제까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실행하지 않고 있겠습니까?’

4절에,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저 이방민족인 악인들이 이스라엘을 포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이걸 방치하실겁니까?’라고 대들고 따집니다. 12절도 마찬가지에요.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이렇게 또 대들어요.

도저히 못 참아서 울분 가운데서 달려듭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선지자가 감히 하나님께 달려드는 거예요. 하박국 2장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응답이 주어집니다. 3-4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진짜 의인이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내가 일할 타이밍이 온다. 도살할 때가 온다. 정말 의미도 없는 것들이 의미 있는체 하는 것들을 내가 악인이 있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싹쓸이할 그날이 온다. 그것을 믿으라. 내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 난 뒤에 하박국 3장에 가면, 비로소 마지막 때 도살할 날을 주께서 영화처럼 보여주십니다. 보여주고 난 뒤에 하박국이 감격하면서 하는 고백이 하박국 3장 17-18절에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돈이 없으며, 돈이 떨어졌으며, 의미 없는 내가 무의미가 된다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왼손 주제에 왜 오른손이 하시는 일에 대듭니까? 지가 뭐 안다고요? 지가 뭐 안다고 대듭니까? 무의미한,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의미 있다고 우기는 그 교만한 세상을 우리가 하박국처럼 지금 목격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하박국처럼 대들고, 또 대들고 ‘이러기예요?’ 하는 식으로 대듭니다.

이제 끝으로, 오늘날 성도는 어떤 사람을 성도, 어떤 사람이 진짜 대니 보이처럼 주께서 기다리고, 주께서 찾고 있고, 주께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대상이 되느냐? 히브리서 11장 3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딱 한 마디로 정리가 되었지요. 갉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지만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층이 이미 갈렸다는 그 증거를 안에 품고 있다는 거지요. 히브리서 11장 36-38절에 보면, “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비록 나한테 어떤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조차 의미 없는 거예요. 그것조차 의미 없는 겁니다. 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본인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정했기 때문에. 저주가 주어져야 되는데 저주받는다는 말씀이 주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일찍부터 주의 말씀이 오니까 말씀이 오니까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말씀이 이 안에서 작동하니까요.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너무 처참하게 이야기했잖아요. ‘목사님, 좀 부드럽게, 쉽게 성도는 이렇다, 라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4장에 나와요. 거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부드러운 말씀이 나와요. 36-38절까지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상당히 즐겁지요?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그것도 거저 참여하였으니라. 아까 히브리서에 나온 말씀, 고난받는다는 그 내용보다 훨씬 편하지요. 거저 살지요. 거저 살아요.

나로 봐서는 나는 이 땅에서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 힘들게 살지만 주님의 안목에서 봐서는 네가 힘들다, 하는 그것도 내가 거저 준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끝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을 보겠습니다. 거기에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기준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주님께서 다 해주시고, 주님께서 다 해주신 그 열매로서 갖다 붙이고 붙여서 붙어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 혹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의 기준이 되는 특징이 나옵니다. 4-5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5절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관심이 자기한테 없어요. 잘했다, 못했다, 도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무의미하니까. 그런데 나한테 관심이 없는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관계로 봐서는 이게 의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미에 사로잡힌 자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천국의 그 나라 의에 관한 의미만 계속해서 생산되는 겁니다.

그것을 흩어진 열두 지파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보다 넓게 보게 하옵소서. 자기한테 정신 팔리지 말고, 자기한테 기대 걸지 말고 보다 넓은 안목으로, 주님의 안목으로 우리를 다시 보게 하옵소서. 구애받지 말고, 거침없이 세상이 악한 것을 악하다고 저주까지 할 수 있는 그러한 주의 종의 자유로움이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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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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