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대로 260923
언약대로(열왕기하 13:22-25)
언약대로
2026년 9월 23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3:22-25
(13:22)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13: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긍휼히 여기시며 권고하사 멸하기를 즐겨 아니하시고 이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13:24)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그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13:25)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하나님의 맹세’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이 맹세를 전달하는 형식은 ‘〇〇의 하나님’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간접적으로 끌어당겨서 하나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채택된 인간은 다른 인간과는 달리 특별한 인생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출 6:2-8)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살다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빠져 나오는 원리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신 원칙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내부에 지닌 본질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라는 절차가 전개됩니다. 이러한 현실 절차는 그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 이후에 이삭과 야곱과의 관계가 어떠했을까요? 일단 우리는 여기서 인간 자체가 이 땅에서 비정상인 모습으로 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아담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치고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드릴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비정상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본질보다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으로 신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신의 참모습을 담아서 보여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들을 잃게 됩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땅에서 잃어버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서는, 아버지로서 따로 사랑했던 에서에게 저주가 돌아가는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게 저주받게 하신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야곱에게는 직접 야곱을 하나님께서 죽이십니다.
그리고 죽은 야곱을 이름을 바꾸어서 ‘이스라엘’로 살게 하십니다. 이는 ‘죽음을 거쳐서 비로소 영생이 있는 천국에 갈 수 있음’ 보여주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먼저 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땅은 일단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적이지 않고 집단적입니다.
이 집단들에게 어떻게 개인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맹세가 적용될까요? 오늘 본문, 열왕기하 13:2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같은 인간들 끼리 이 요아스 왕이 한 것을 보면 참으로 대견스럽고 대단하게 볼 겁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약속의 성읍을 세 번의 전쟁을 통해서 찾아와서니 큰 일한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비정상입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3:19과 비교해보세요.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약속의 땅에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덕을 보는 겁니다. 그 예언의 덕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맹세’에서 나온 겁니다. 즉 비정상적 인간과 하나님 맹세의 만남이 영생이라는 혜택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습니다.
마치 엘리베이터에 그냥 타고만 있으면 위에 도착해보면 천국입니다. ‘예수 안’의 효과이지요. 이런 효과가 결코 비정상적인 인간의 성의와 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예언과 만나면 철저히 수동적입니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무능하니까요. 하지만 이 비정상임을 수용하게 되면 이것처럼 자유로운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신이 아픈 것과 신경씁니다. 이는 근원적으로 자신이 무가치함을 모르고 마치 당연히 안 아파야하고 안 다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맹세는 멈출 줄을 모르고 그 완성을 향해 달려 갑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맹세의 원리가 예레미야 31장에 나옵니다.
그 내용은 ‘애굽에 맺은 언약 내용과 다른 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1-34)
특히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니라’가 되기 위한 그 맹세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3:10에 보면, “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기 기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에 반대하는 논리까지 복음 안으로 끌어서 담아 버립니다.
즉 율법을 지켜서 구원이 되겠다는 자들의 꼼수까지 고발할 수 있는 근거를 복음 안에 담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죄지은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여했으니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한다는 논리 같은 겁니다. 여기에 준비된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 외 한 복음’입니다.(롬 3:21)
홀로 율법을 이루셔서 마련된 ‘예수님 안’에서 성도는 부르심을 입어 구원받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무능함을 도리어 감사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열왕기하 13장 22-25절(언약대로) 26092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3장 22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3:22-25
“여호아하스왕의 시대에 아람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긍휼히 여기시며 권고하사 멸하기를 즐겨 아니하시고 이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 하셨더라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그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준다는 그 근거가 여기 나옵니다. 23절에, “내가 너를 지켜줄게.” 지켜주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입니다. 여호아하스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혜택을 입는데, 그 위쪽에 있는 나라가 아람 나라거든요. 그 아람 나라의 왕 하사엘이 계속 수시로 걸핏하면 와서 북이스라엘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아람 나라한테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또 지켜주시고 지켜주시는 그 이유가 뭐냐? 여호아하스 왕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때 그 당시 백성들이 예뻐서도 아니고, 여기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거론하셔요.
지금 혜택 입은 것은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왕, 그리고 그 시대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아브라함 아니에요. 이삭도 아니에요. 야곱도 아니에요. 그런데 아브라함도 아니고, 이삭도 아니고, 야곱도 아닌 사람들이 옛날 선조 되는, 이미 돌아가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혜택을 입는 이유가 뭐냐?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여기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 혜택을 입는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바르게 살면 혜택 입고, 내가 바르게 못살면 하나님께 징계를 받든지 벌받는다.’ 이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 있고 나 있고, 여기서 하나님께서 나를 치워버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여기에 박아 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맺은 맹세로 인하여 너희가 혜택을 입는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거예요.
하나님 계시고 우리 있다. 그런데 우리 자리를 “비켜!” 해놓고는 이미 돌아가신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그 십자가 사건을 여기다 꽂아버린 거예요. 여기에 꽂아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말고, 네가 행한 것 말고,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던 그 일로 인하여 네가 혜택을 받고 죄사함을 받는다.” 이거 기뻐하고 감동해야 해요, 아니면 슬슬 오기가 올라오고 짜증 낼 이야기입니까?
내가 여기 있는데, 잘난 내가 있는데 왜 나를 개무시하고, 나를 빼고, 밀어내고 다른 사람을 여기에 꽂아 넣느냐? 꽂아 넣는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우리가 오늘 죽어도 천국 GO, GO! 천국에 도착. 예수 안에서 구원. 저는 ‘예수 안에서’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엘리베이터를 생각해요. 엘리베이터 앞 입구에 “예수 안에서”라고 있고, 그 안에 타면 엘리베이터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요.
바라기는 온 식구가 다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든, 5학년이 되었든 엘리베이터가 비좁을 일은 없으니까 다 들어가서, 가만있으면 중력을 이기는 거예요. 죄의 중력을 이기고 위로 솟구쳐서 “다 왔습니다.” 천사가 안내하는데 문이 열리니까 천국. 종교랄 것도 없어요, 이것은. 뭘 해야 종교지요. 뭘 하는데요? 엘리베이터가 다 했는데요. ‘예수 안, 그리스도 안’에서 다 했는데요.
그러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도리어 이렇게 해야 해요. ‘왜? 잘난 내가 있는데 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나를 왜 제쳐두고 나의 열심과 나의 착함은 빵점 처리하고 왜 예수님뿐인가?’ 이 사실은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방금 이야기한 엘리베이터 이야기, 엘리베이터를 성령으로 하면 딱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구약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구약을 보면서 신약에 이미 확정된 그 결론을 구약 오늘 본문이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뭐냐? 신약에서는 예수님 한 분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열왕기상 13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이에요.
여기에 왜 세분이 나옵니까? “아브라함 때문에” 이러면 좋겠는데 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분이냐 하는 거예요. 왜 세분이냐 하면, 장차 예수님한테 종합되고 할당될 그 업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일부씩 떨어져서 각자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에게 일어날 일, 이삭에게 일어날 일, 야곱에게 일어날 일을 합해서 그 셋이 모여버리면 예수님 한 분이 하는 일로 종합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게 나눠지는 거예요. 나눠진다면 아브라함 따로 이삭 따로 야곱 따로 그렇게 나눠지면서 아브라함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 아들이 야곱이니까 분명히 나뉘어졌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 일 전체를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할당받은 그 인생에서만 하나의 역할로서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세 분을 한번 연결해 보자는 거예요. 아브라함-이삭-야곱,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 이삭은 어떤 일, 야곱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삭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야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없어요. 그것은 로마서 4장에 나옵니다. 아들이 없는 데서 생겼는데 그 생긴 아들이 없어져요. 죽습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역할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는데 그 절차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등분으로 나눠서 이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올 때 하나님 됨을 떼고 그 뗀 자리에 인간을 집어넣어서 그 인간에게 일어난 일과 그리고 하나님이 택했던 인간 말고 다른 인간에게 일어난 일과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가운데서 진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짜 모습을 다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줘.’ 이런 식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아무리 찾고자 해도 응답이 없었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은 없다. 일단 보이지 않으니까 없고, 내가 기도해도 그 기도에 응답이 없으니까, 하나님은 없다. 고로 하나님은 없다.’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뭐냐? 그것은 있다고 칠 때 혹시 진짜 하나님이 있으면 손해 보기 때문에 여분으로 하나 걸쳐놓는 거예요. 그 물건을 찾는 손님이 없더라도 가게 열 때는 구색 맞추기 위해서 그 물건을 들여놓듯이 ‘없다고 여기는데, 행여나 있을 때를 대비해서 있다고 치고 믿자. 그러나 우리의 본심은 없다. 누가? 하나님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런 것을 연구해요. 참 희한한 연구인데 ‘왜 없는 하나님을 인간들은 억지로 만들어서 섬기느냐? 그 의도가 뭐냐?’ 이걸 또 연구하는 사람이 있어요. 신은 없는데 없는 신을 굳이 만들어서 섬기고자 하는 인간의 그 심보, 심리가 뭐냐? 그걸 연구하는 학자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노리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먹는 그런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헤어진 적이 있어요.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지만, 그 뒤에 헤어졌어요.
헤어졌기 때문에 ‘헤어졌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올 수 없다, 이제는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를 분명히 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춰내고, ‘네가 그런 쪽으로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쪽으로, 하나님 쪽에서 –일종의 변장이죠- 사람으로 오시는 이유가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 믿는다고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이 저렇구나, 하고 아는 사람 같으면 내가 받아줄게.’ 이 작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기 자리에다 아브라함 집어넣고, 이삭 집어넣고, 야곱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른 인간과는 달리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어떤 특이성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 특이성을 나타내는 인간존재를 신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 자 성도의 특징이 뭐냐? 내가 태어날 때부터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안 돼요. 주의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첫째, 인간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비정상적이다. 이것은 다윗이 이미 고백했잖아요(시 51:5).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비정상적이다.
같은 말로 ‘나는 논한 가치도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실 가치조차 없다.’ 그런 겁니다. 비정상적인 인간이다, 라고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아는 순간, 그걸 자유라고 합니다. 더 이상 비정상적인 나에게 기대를 걸거나, 희망하거나, 나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는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 예가 오늘 본문 열왕기상 13장 25절에 나옵니다.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그다음에 보면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요 대목, 25절의 끝 대목, 요아스 왕이 아람 왕하고 싸워서 세 번 쳐서 파하고 그동안 빼앗겼었던 성읍들을 다시 가져왔다.
이 대목만 딱 보면요, ‘오, 요아스 가치 있네. 요아스 쓸모 있네. 대단한 사람이네. 자기 아버지가 빼앗겼던 것을 도로 찾았으니 어찌 그렇게 능력이 있느냐. 아, 이런 정상적인 인간, 대단하다.’ 이렇게 하겠는데 그게 아닌 것이, 열왕기상 1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죽기 전에 숨을 몰아쉬면서 하는 이야기에요.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라고 선지자가 예언을 했지요. 그러면 뭐합니까? 25절에서 요아스 왕이 아람 왕 그 강대국을 세 번이나 쳤다는 이것을 가지고, 요아스 왕이 그만큼 능력이나 재주가 있고 쓸모 있는 정상적인 왕이다, 할 잽이 못되지요.
왜냐하면 얼마나 무능하고 얼마나 자기 자신이 무엇도 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인간이었으면, 하나님의 예언이 따박따박 예언대로 딱 세 번만 아람 왕을 이겼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의 반응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해요. 1번, 속상하다. 하나님이 날 사람 취급 안 해서 나는 속상하다. 2번, 나는 나로부터 벗어난 자유다. 둘 중 어느 쪽입니까? 아, 내가 해도 의미 없고 안 해도 의미 없으니, 이래도 의미 없고 저래도 의미 없으니 세상에 free, 이런 자유가 또 어디 있어요?
말씀이 다 해주는데. 왜? 워낙 못났거든요, 우리가. 그것도 나쁜 짓을 해서 못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못난 존재예요, 태어날 때부터. 말씀이 알아서 다 이끌고 인도해요. 어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너는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 알겠어?’라고 하면서 주께서 이끌어주는 거예요. 얼마나 무능합니까? 딱 세 번만 이긴 것.
내가 이겼다 한다면 그것은 진짜 바보 같은 짓이지요. 제가 성도들 만나보면 주님께서 예언이 나를 덮쳐서 이제 내가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말씀대로 되는 것을 본인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말은 뭐냐? ‘내 시대는 이미 끝났다. 말씀이 오면, 주님이 오면 내 시대는 끝났고 나는 끝났다.’ 나는 끝났는데 세상은 안 끝났잖아요. 말씀은 안 끝났고 주님의 나라는 멀쩡하잖아요. 다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되었잖아요. 그러면 기쁘잖아요.
왜 내 꿈이 꼭 이루어져야 해요? 그런 고집을 왜 부립니까? 이게 분명히 성경적으로 맞는데, 맞는데 우리 성도님들 만나보면 이런 복음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부 다 자기 아픈 것 이야기하고 있어요. 내 딸자식이 어떻고, 누가 수술을 했고…, 자기 아픈 것을 이야기한다고요. 그 아픈 것을 이야기하니까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아프면 안 되는데. 왜? 나는 정상이니까. 나는 잘났으니까. 나는 내가 꿈꾸는 것을 따로 꼬불쳐서 챙겨놨기 때문에. 나는 다치면 안 되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는 다치면 안 돼.’ 짜증을 내고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왜 기뻐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개하는 대목이 아주 구체적으로 두 군데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6장 2-5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 본질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걸 보면서 ‘히브리인들은 좋겠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아, 히브리인들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구나.’ 이렇게 해석을 해줘야 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왜 저의 인생을 이렇게 끌고 가십니까?’라고 따지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의 정체를, 비정상이고 무능하고 수에 칠 가지도 없는 우리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질, 본색이 드러나는 식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걸쳐서 주께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뭐냐? 아브라함은 자식을 잃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낼 때, 독생자를 보낼 때 그 독생자가 죽으러 오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이삭은, 사랑하는 아들, 자기가 밀어붙이고 자기가 그렇게 좋아했던 아들 맏이인 에서를 잃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아들인 야곱의 거짓말로 인하여 자기가 밀어붙이고 좋아했던 큰아들에게 저주가 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주를 느끼게 만들었어요. 내가 싫어한 아들에게 저주가 임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기분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밀어주고 내가 좋아하고 기대를 건 큰아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거예요. 그럴 때 살아있는 아버지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저주받는 게 낫지. 하나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실망했겠어요?
하늘에서 온 독생자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대단한 일을 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송하고 찬양해서 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듯이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대우받으면 좋겠는데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이 저주받고 미움받는 거예요.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심정과 감정이 어땠겠습니까? 그게 두 번째 단계, 이삭의 하나님을 보여주고 담당할 부분이에요.
세 번째가 뭐냐? 야곱은 아예 본인이 죽어요. 첫 번째 아브라함은 아들이 죽고, 두 번째 이삭은 자기가 밀었던 아들에게 실망 당하고, 그냥 실망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받는 사달이 났고, 세 번째는 언약을 받은 야곱 당사자를,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죽여 버려요.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뜻이지요. 죽었는데 주께서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조건하에 죽은 데서 살아나요. 그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기 싫어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여러분이 죽기 싫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그 자아가 죽기 싫은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나라는 이름을 걸고 살았던 내가 죽기 싫은 거예요,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언약 속의 내가 죽었다가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품고 살아나는 것, 어느 것이 싫습니까? 또 어느 것이 좋습니까?
야곱의 하나님은 ‘너를 죽임으로써, 준비된 너를 죽은 데서 살려내는 식으로 이제는 너의 사람에서 언약의 사람으로, 언약이 듬뿍 담긴 사람으로 바꾸어줄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 자기의 본질을 소개하는 대상으로서 다루기, 이런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 하나님이다’가 아니라 사람을 집어넣어서 사람은 사람인데 특이성이 있는 사람,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런 뜻을 갖고 이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의 맹세가 뭉쳐지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개인적이에요, 개인적인데- 그게 집단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곧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버려요.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게 창세기 17장 7-8절에 나와요.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약속을 줄 때 아브라함이 기거했던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이니까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많이 낳게 해서 그 땅에서 그대로 하늘의 별만큼 자손이 많게 되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야곱 때 가뭄을 일으켜서 아브라함 자손을 그 땅에서 추방하듯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해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번창한 것은 가나안 땅에서 번창한 것이 아니고, 남의 나라 애굽 땅에서 번창한 거예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애굽 땅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 대한민국, 이 땅을 애굽 땅으로 보면 돼요. 왜? 이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되시지요? 이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요, 뭘 거쳐야 돼요. 뭘 거치느냐 하면, 내가 태어난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내가 되려면 약속의 땅에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라는 사실을 애굽을 경유하면서 그것을 집단적으로 알려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애굽을 경유해서.
‘그러면 애굽에서 살다가 우르르 나오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요. 애굽에서 살 때 히브리인들은 살던 정이 있어가지고 안 나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서 천국 가자” 하면 그것은 장례식장에서나 들릴 이야기지 평소에 살면서 “이 땅을 떠나자” 하면 ‘미쳤나? 멀쩡하게 잘 사는데 왜 이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애굽 땅에 살아서 번창케 함으로써 뭘 경험하게 하느냐? 네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다, 라는 사실을 같은 비정상인 인간끼리는 몰라요, 모릅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떠나버려요.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정답게 살면 그것으로 오케이! 추석이다. 송편 빚고, 지짐이 굽고, 동그랑땡도 해서 추석 좀 즐기면서 살면 되지 뭘 복잡하게 살아요?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고, 굳이 그걸 왜 내가 알아야 되는데?
이유는 단 한 가지, 네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생각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어느 인간이, ‘내가 비정상이다’라는 것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사람 봤습니까? 제가 강남 강의 가니까 미국에서 오신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책을 줬어요. 전도서에 나오는 내용인데 잘 쓰셨어요. 우리는 성경의 전도서 그 내용을 왜 봅니까?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전도서라는 성경책을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데 평소에 정상인데 왜 성경을 우리가 굳이 볼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요아서 왕은 ‘아람 나라를 대비해서 빨리 잃어버린 내 국토를 되찾아야 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이미 그 전에 엘리사 선지자가 ‘너는 세 번만 아람을 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딱 들어맞았잖아요. 세 번만 쳤잖아요. 이게 우리 신세예요. 피조물의 신세가 이런 신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애굽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올 때 그들을 우르르 데려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그렇게 했어요. 어린양을 잡으라 했어요.
그러면 누가 봐도 그 피는 누구 피냐? 어린양의 피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내가 나를 정상으로 볼 때, ‘이번에 애굽에서 나오면서 손해 본 게 있는데 뭘 손해 봤느냐 하면, 집에서 잘 키우던 어린양 한 마리, 그거 희생되어서 손해 봤다. 뭐 양 한 마리 손해 보고, 우리가 애굽에서 쭈루루 나오고 약속의 땅에 가면 되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인간이라면.
그런데 그게 유월절은 어린양 한 마리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애굽에 살던 본인들이 지금 잃어버릴 차례다,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물 없고 양식 없는 광야를 통과하게 한 겁니다. 살아 있는 것은 죽었던 어린양이 살아있고, 모세로부터 내려온 율법의 제사 제도가 살아있고, 정작 그 어린양의 제사에서 죽어야 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구원이 아니라, 바로 율법을 통과해야 구원이다.
율법을 마주해서, 율법 앞에서 내가 마땅히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천국의 엘리베이터 속에 들어온 기분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구약에서 있었던 순서, 먼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아직 하나님의 정체는 사람으로 다 나타나지 않아요. 대리 인간을 통해서 자기를 간접적으로 나타냈으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본질이,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옮기는 이 예시, 이 사례를 통해서 약속의 땅에 누가 들어갈 것인가를 미리 이야기 해놓고 그 예언이 신약 성경에서 완성이 돼버립니다. 아까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는 거, 예수 안. 그러면 애굽에서 나왔던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망했죠, 이스라엘 땅에서 그들은 망했습니다. 망하고 난 뒤에 구약에 있던 이 원칙이 그대로 신약까지 이어지기 위해서 하나의 예언을 중간에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그 절차 말씀드리고 완성된 말씀을 로마서에서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34절까지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그동안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은 폐기하고 새 언약을 세우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같지 아니하니, 같지 아니하니.
인간들을 간접적으로 집어넣어서 했던 그 간접이, 이제 새언약에서는 인간 빼고 –인간은 이제 믿을 게 없으니까 빼고- 인간 자리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직접 그 자리에 박혀 들어가서 그래서 아버지하고 1:1로 계약을 맺게 된다 이 말입니다. 계약을 맺게 되면, 그 계약이 실제 현실적으로 어떤 효과를 내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33-34에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마음속에 기록하여.
“이 비정상적이고 바보 같은 이 엉터리야,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뭘 해드릴까요?”
“‘뭘 해드릴까요.’ 그거는 선배들이 이미 실패했어. 이리 와! 그리고 네 마음, 나한테 가져와.”
내가 그 마음속에다가 이미 다 이루어진 법을, -모나미 볼펜 갖고 와- 주님께서 필기도구 가지고 그 마음에다가, 성도 마음에다가 직접 새언약의 내용을 적어버리면, 그 사람은 말씀을 운반하는 새로운 인격체가 되죠. 안에 주께서 새겨준 말씀이 들어오니까.
뭐 프로포폴(Propofol)인가 있잖아요. 마취 주사, 주사액이 들어와요, 주사액이. 하나님의 주사액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뭐 지키고 자시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다 이루어진 말씀의 완성이 주사액처럼 우리 안에서 필기도구로 주께서 쓰시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쓰시는 그림책, 또는 노트예요, 빈 노트.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걸 새겼다, 안 새겼다를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게 34절이에요.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인간아!
아…, 이래도 우리가 정상이라고 우깁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체가 정상이 아니에요. 지가 뭐 싸대고 열심히 한다고 구원되는 거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의 하나님이 실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십자가 사건이라는 새언약의 사건을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과연 구약의 이 예언이 신약에 완성이 되었을까? 그렇게 한다고 해놓고 끝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부도수표 아닙니까?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완성된 것이 로마서 3장 3-8절까지인데 제가 한 번 후루룩 읽을 테니까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요, 인간이 어떤 박사 학위…, 이거는 인공지능도 모를 거예요, 너무 어려워서. 인간의 어떤 박사 학위로도 어려워요. 한 번 읽어볼게요.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게 성경에 적혀 있어요. 한글로 적혀 있으니까 줄줄 한글 읽으면 이해되는 걸까요, 내용이? 설명 들어갑니다. 인간에게는 그 출발점에 어떤 중립성도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어떤 중립성도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 속에, 구약 말고 신약에 오면 이제 인간 속에 누가 있느냐? 악마가 있는 거예요. 내 속에 나 말고 다른 게 들어있어요. 악이 들어있어요. 로마서 7장에, 악마가 들어있어요.
악마가 들어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출발점을 뭐로 보느냐 하면, ‘나는 정상이다. 나는 정당하다.’ 이게 출발점이에요. 인간이 자기가 정당함을 자기 자신이 그걸 극구 부정을 못 해요. 그 정도로 우리는 무능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비정상이라고 보는데, 우리 속에 있는 악마는 우리를 정상이라 보라고 하고, ‘네가 정상이라고 간주하고 매사에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라!’라고 우리를 윽박지릅니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떤 논리를 펴느냐 하면, 복음을 반대하는 논리도 복음 안으로 품어버려요. 끌어당겨 버립니다. 이건 참 어렵죠.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니까 “어, 반대야? 저리가!” 이게 아니고, 복음을 반대하는 것을 가지고 복음의 내용으로 삼아서 복음을 복음답게 구축해 버려요.
그러니까 복음에 반대하는 게 뭐냐면, 나쁜 짓을 하고 그런 게 아니고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상인이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아프면 안 되고, 어떤 경우라도 집안에 우환 있으면 안 되고, 내 인생에 장애가 있으면 안 된다. 왜? 나는 항상 정상적이고 옳은생각만 하. 기. 때. 문. 에!’ 그래서 어느 정도로 정당하냐.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여, 저한테 지옥과 천국을 보여주소서. 지옥은 나쁜 일 하는 사람, 천국은 좋은 일 하는 사람. 그렇다면 하나님, 제가 율법대로 착하게 되어서 천국 가겠습니다’라는 그 악마적인 사고방식을, 사도바울은 그걸 복음 안에 품어버렸다는 거예요. ‘나는 바르게 살아서 천국 가겠다’라는 그런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로마서 3장의 그런 자들.
그런 자들이 어떤 꼼수를 쓰는지, 이거는 어렵더라도 약간 더 설명할게요. 로마서 3장에서 그런 자들이 어떤 꼼수를 부리느냐 하면, ‘그래, 맞아. 당신 말이 맞아. 나는 죄인이야. 율법을 다 못 지키니까. 하지만 내가 율법을 다 못 지켜서 죄인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뭔가 보상을 주셔야만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돋보이지 아니하냐?’ 이 말이에요.
누가? 지옥 갈 자들의 논리입니다. 머리를 굴리는 거예요. 꼼수를 쓰는 겁니다. 그게 바로 8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무슨 말입니까? ‘나는 악이니까 좋아, 악 하자. 그런데 그 악을 해서 하나님께 선이 된다면 나도 기여도가 있잖아. 내 지분도 있잖아.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지옥으로 내쳐버리면, -나는 하나님께 도움이 됐는데 내쳐버리면- 이건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정당성에 모순이 되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를 내치지 않을 거다.’ 그런 꼼수를 부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내용마저도 “저리 가!”가 아니라, 그 내용마저도 ‘복음 안에 품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 품은 원리가 뭐냐, 품었다는 근거가 뭐냐? 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에 해당되는 목소리가 방금 네가 한 그 목소리, 방금 네가 한 목소리다. 이 말은…, 아주 쉽게 간단히 말합니다.
주께서 십자가는 졌는데 십자가를 믿을 위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 성령이 오기 전에 악령이 인간을 쥐고 있기 때문에, 복음에 반대하는 원수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로마서 3장 21절, 강의 시간 같으면 다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데요, 마음속으로 읽으세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 그래 율법, 율법 하는데, ‘율법 외에’. 비켜라, 인간아. 비정상 인간아. ‘율법 외에.’ 따라서 율법 지키면 되겠다고 호소하는 인간들아, ‘율법 외에’라는 말을 하면서 율법에 대해서 지켰다는 인간들은 다 제외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제외하고 들어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걸 그냥 공짜로 새 언약의 성령을 받은, 마음속에 그 은혜를 새겨버린 자만이 천국 백성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인간을 대리해서 하나님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방식입니다.
요아스 왕이 아람을 세 번 쳤다. 이것이 예언대로 되듯이 오늘날 우리가 천국 가는 것도 우리의 잘남과 똑똑함이 아니라, 주님의 예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에 가게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무슨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봐야 할 것을 다시 한번 가르쳐 주옵소서. ‘나 잘났다, 이해한다, 똑똑하다’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유를 전제로 이 자유함에 오로지 말씀만 가득 차는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