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42강(덮쳐진 공간), 복음이냐 교회나 12강(변화) 260921
대전-신명기(42강) 19장 2절(덮쳐진 공간) 260921-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9장 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열국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필경 그것을 얻고 그들의 각 성읍과 각 가옥에 거할 때에.” 그렇게 되어 있죠. 땅을 빈 땅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살고 있는 민족들이 있는데 그 민족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멸절, 멸절시키신다, 멸절시키시고 멸절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그 토대 위에 이스라엘이 들어가는 겁니다.
보통 그 과수 농사 할 때에 과수가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밑에 짚을 깔아놓는다고 하죠. 하나님께서 까는 그 바닥까지, 바닥재까지 주께서 친절하게 아주 세밀하게 약속의 땅을 깔아놓았습니다. 그 바닥재가 뭐냐 하면은 언약이 없는 민족들의 시체를 인테리어 바닥재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땅은 뭐냐? 멸절의 땅이죠. 조기, 일찍 실행된 심판, 멸절. 멸절이죠. 이걸 누가 눈치챘느냐 하면 기생 라합이 눈치를 챈 거예요. 똑똑하죠. 아주 지혜로운 여인이 기생 라합이에요. 지금 자기 직업이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 연금이 얼마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뭐가 온다는 거예요.
한번 적어볼게요. 외부에서 큰 게 온다. 바닷가에서 평화롭게 해수욕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해수욕장 수영객을 보호하는, 지켜주는 해경 경찰이 뭔가 쌍안경을 보다가 “오오, 저거 큰 거 온다.” 동해안 같으면 갑자기 일본에서 지진이 나면 해일이 일어나죠. 집채보다 큰 파도가 하늘의 반을 가리면서 이렇게 다가올 때 외부에서 큰 게 온다고 할 수 있어요. 또는 상어가 온다. 보통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올 때 이런 표현을 써요. 큰 게 온다. 태풍 같은 것이 올 때도.
기생 라합이 이걸 파악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 애굽에서 나온 그 민족이 절도, 집도 없는 그 민족이 가는 곳마다 모든 민족을 멸절시켰어요. 그다음 차례는 누구다? 그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예요. 파도가 넘치듯이 그다음 차례는 자기 차례예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밥 먹고 사는 거, 그것 가지고 내가 산다고 규정했던 그 삶은, 이것은 기준점이 달라져요. 이거는 너무 좁게 생각한 거예요, 세상을.
큰 게 왔을 때, 그리고 그 큰 것은 내가 정하거나 내가 오지 말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기생 라합이 대처하는 것은 그냥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이스라엘의 본대가 오기 전에 정탐꾼 두 사람이 와서 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딨냐, 미리 항복!” 미리 항복하고 그러는 거죠. “저를 당신 민족에 항복한 한 민족이라고 간주해 주세요. 미리 손 들고 항복합니다. 우리 가족 살려주세요. 그 대신 다치지 않도록 숨겨줄 테니까.”
그걸 야고보 2장에서, 또는 여러 성경에서 그걸 뭐라고 하냐면 구원을 받는 바른 마음 자세, 구원을 대하는 바른 마음 자세. 그래서 이렇게 봅시다. <구원은 덮쳐지는 것이다.> 이게 신약에서의 사도 바울의 구원론이에요. ‘구원은 덮쳐지는 것이다.’ 이 덮쳐지는 걸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니까 로마서 4장에서는 이거는 덮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뭐가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냐? 나의 행함, 나의 행함으로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공식 하나 적어보겠습니다. <내가 평생에 행한 그 무엇도 내 구원에 끼어들지 못한다.>
여러분, 슬퍼요, 기뻐요? 이 이야기가. 내 평생에, 내 평생에 행한 그 무엇도, –추석 앞두고 썰고 볶고 수육하고 지짐이하고- 그 어떤 것도 내 구원의 요소로 끼어들지 못하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마 11:28) 이 말이죠.
촌에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녔거든요. 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은 가난에서 면제될 수 있고, 부자 됩니다.’ 이렇게 설교하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들었겠어요. 다 듣고 난 뒤에, 부자 안 되고 난 뒤에 칼 들고 그 목사를 찔러버렸어요. 설교하다가 허리끈 질끈 잡혔다는 이야기는 내가 일찌감치 들었지만, 칼 들고 죽으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이 근래 처음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 목사가 지혜롭지 못한 거죠.
어떻게 해야 되냐면 이렇게 해야 돼요. “제 하는 대로 하면 여러분은 부자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가 부자 안 됐다고 칼 들고 오시면 안 됩니다.” 그 이야기를 미리 삽입을 해야죠. 그 이야기를 미리 삽입을 해야죠. 그 듣는 사람이 얼마나 순진합니까. 부자에 꽂혀 있는데 부자 된다고 했으니까.
내가 어떤 것을 기대하고 또 어떤 것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 덮쳐진 구원을 취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취소가 안 돼요. 담 걸렸다 해도 구원이 취소가 되지 않아요. 그 외 어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게 굉장히 기쁜 소식이잖아요.
기쁜 소식이라면 이 기쁜 소식을, 기쁨을 유지하는 방법은 뭐냐? <멸절>이에요. 멸절되는 겁니다, 내가. 내가 구원이 되려면, ‘내가 멀쩡해야 된다?’ 아니요! 나는 주님의 구원을 영접하기 위해서 주께서 깔아놓은 바닥재 안에 내가 섞여 들어가야 돼요. 멸절 할 때 같이 멸절해야 돼죠. 놀라운 사실은 그 멸절에 하나님의 독생자도 끼어들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죽음의 두 가지 개념이 나옵니다. 미리 이야기합니다. 이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신명기 19장, 20장, 21장 설명, 해석이 하나도 안 돼요. 성경을 볼 때는 ‘나는 죽었다! 죽은 자다’라는 그걸 전재로 해서 죽은 자라야, 내 쪽에서 “목사님, 주님, 하나님, 제가 뭘 할까요?” 이런 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안 죽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죽어버리면 이 죽어있는 자는 그냥 뻗어있는데, 하기는 뭘 해요? 뻗은 상태에서 신명기 19장을 봐야 이해가 되고, 신명기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가 돼요. 자꾸 뭘 할라고 하는 것은, 그 행함은 사실은 행함이 아니고 손에 칼 들고 있는 거예요. ‘내가 행했는데, 안 해주기만 해봐라.’ 목사 죽으라고 달려들었지만, 하나님 계시면 하나님 찔러 죽일 사람이에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죽음은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있는데, 첫 번째는 뭐냐? 숨 끊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이해합니다. 육적인 사람들. ‘두 번째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죄인인 것, 죄인임을 아는 것. 내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어요.
어제 낮 설교 때 언약의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약간 언급했거든요. 그때 제가 물었잖아요. 약속의 땅의 주인이 누구냐고. 약속의 땅의 주인이 누구냐고 해놓고 제가 답변을 했어요. 약속, 약속이 주인이에요. 물론 ‘주님이 주인’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말을 할 때는요, 인간들이 이미 ‘나는 주인공이고, 내가 살아있고, 나는 뭘 할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과 틀어지게 주께서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삯을 받지 못한 자가 부르짖는다.’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인간인데. 삯이 부르짖는다, ‘이건 무슨 소리냐?’ 이 말입니다. 땅이 하늘에 호소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는 거예요, 땅이! 죽어있는 땅이 왜 고자질해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은 땅이 죽었단 말인가, 안 죽었다는 거예요. 땅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약속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본 적도 없고 생전 금시초문이에요, 우리는.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고 동물이 살아있지, 땅이, 무생물이 살아있다는 말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잖아요. 그만큼 이 육적인 인간들이 생각하는 폭이 그렇게 좁아요. 육적인 인간들이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 이렇게 생각해요.
인간의 두뇌 가운데 미세소관(미소세관 Microtubule)이 있어요. 두뇌의 아주 좁은 미세소관에서 양자적 작용을 일으키게 되면 나오는 것이 뭐냐, <자아>예요.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양자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자아’예요. 그러면 ‘자아’에게 죽는다는 게 있느냐, 없느냐? 양자물리학은 없다고 봐요. 왜 없느냐.
여러분, 잉크를 바다에 뿌리면 잉크가 죽습니까, 흩어집니까? 잉크가 흩어지죠. 던진 쪽의 위치에서 보면 그냥 사라지죠. 그러나 잉크는 그냥 흩어집니다. 그런데 바다를 잉크라고 하지는 않아요. 섞여 들어갔으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있는 이 입자, 작은 입자가 우주를 이루거든요. 그러면 인간은 잉크고, 인간을 둘러싼 이 우주는 뭐냐면 입자들의 바다가 돼요.
인간이 죽는다는 말은 인간이 입자로 분해되어서 어디로 가느냐? 우주 배경 속으로 흩어지죠. 단지 고요한 형태는 이제는 사라집니다, 고요한 형태는 사라져요. 그래서 두뇌 안에 있는 미세소관에서 그동안 자아가 구축한 게 있는데 그걸 정보라고 합니다. information, 정보. 개인의 정보는 우주로 흩어져 남들 보기에 죽는다고 하지만 그 정보는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따라서 어디로 가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에서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먼저, 질문이 뭐냐 하면은 ‘왜 죽은 자는 많은데 돌아오는 사람은 없느냐.’ ‘왜 죽은 자는 많은데 왜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없느냐?’ 하는 거예요.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정답을 내리면 이게 형태를 이루다가 고요 형태가 되면,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들어가는 우주의 법칙 때문에 다시 무질서가 하나로 합쳐서 옛날 내 모습으로 같이 모아지는 경우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몰랐던 명리학, -사주팔자, 주역 보는- 그리고 점성학과 서양의 점성학, 성경에도 나오죠. 하늘 성신을 보고 별을 관찰하고. 예례미야 때 그때 여인들이 그걸 보고 한 거예요. 별 볼 때 그걸 구경하려고 온 줄 알아요? 별을 보아야 자기 운명을 미리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뭐냐 하면, 초기 조건(Initial Conditions: 시작점의 천문학적 배치)이 자기 운명을 결정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운명’이라는 거, 거기서 나온 거예요. 초기 조건. 사주 보는 거예요. 태어날 날짜, 월, 시간, 시점. 이런 걸 따지게 되면, 그 초기 조건이 확정이 되면 운명도 거기에 맞춰서 확정이 된다는 거예요. 타로점, 이런 거.
그것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엉터리냐? 미신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면 초기 조건을 이룰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그 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관찰하는 본인이 관찰 지점에 와서 마주치면 그게 바로 ‘너’라는 거예요. ‘나’, 자아라는 거. ‘나’가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의 수가 우연히 마주쳐서 ‘나’가 된다면 이 경우의 수는 ‘나’한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 경우의 수가 지나가다가, 과거시험 치러 가다가 ‘어이구, 주모. 여기에 국밥 하나 주소.’ 하면 그 주모하고 살 거예요? 살림살이하고 살 거 아니잖아요. 또 지나가던지, 과거시험 보던지 계속 가잖아요.
나한테 부딪치는 모든 경우의 수가, 나한테 왔다가 흩어지는 이 경우의 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세 살 때, 네 살 때, 다섯 살 때, 일곱 살 때 어떻게 엎어지고 자빠지고 손목 다치고 하는 경우의 수들이 있잖아요. 내가 초기 조건에서 예상도 못한 경우의 수들에 의해서, 그들이, 그 ‘경우의 수’가 알아서 우연과 우연을 계속 생산해 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주팔자가 전부 다 사기라는 거예요. 왜 초기 조건을 네 맘대로 정하느냐, 이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를 않아요. 이게 과학에서,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이란 흩어진다. 나는 흩어지고, 이 땅의 우주 사회에서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없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인간에게는 뭐가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내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뭐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이 아니고 우주의 운명에 인간이 부분으로 예속되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인간의 죽음을. 그러니까 1번, 인간은 왜 죽는가? 정답은 ‘이게 우주의 운명이다.’ 우주의 정보에 들쭉날쭉 섞이니까. 그런 아이디어는 화엄경에, 금강경에 이미 나와요. 불경에 나온다고요. 모든 것이 찰나와 찰나의 만남으로 우리가 되었다.
들어보니 어때요? 죽음이 없다 하니까 기분이 좋지만 뭔가 허전하고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두 번째, 이 과학의 문제점을 얘기해야 돼요. 과학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문제점 자체가, 이거 딱 하나예요. 과학의, 또는 이 종교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내가 살아있다’라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말하는 이 죽음의 전제가 뭡니까? ‘나 지금 안 죽었다.’ 이겁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말하는 이 죽음의 논리를 더 밀고 나가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안 죽은 게 아니고 죽음의 어떤 형태가 되는 거죠. 죽음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브라만교, 힌두 철학의 말이 맞는 게 돼요.
한때 고양이었지만 새로운 또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서 지금은 내가 인간이 되었다가 죽으면 개가 되었다가…, 어차피 정보의 바다니까, 정보의 물결이니까. 뭐 토끼가 됐던, 뭐가 됐던 그거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죠.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 이러면 끝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 하는 본인은 뭐란 말입니까? 지금 내가 살아있어서 그걸 관찰 또는 측정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관찰하고 측정하고 있다.
그래서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는 1번에서 다 끄집어냈어요. 물리학, 불교, 점성학 그리고 명리학, –사주팔자 보는 거- 동양철학, 모든 철학을 1번으로 해서 다 설명을 했습니다. 산다는 것도 죽음이 잠시 머무는 것에 불과하다.
자, 그러면 이게 인간에게서 알 수 있는 죽음의 끝인데, 2번 죽음, 그러니까 두 번째 죽음에 있어서 성경에서의 죽음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성경에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의 여파, <물결>입니다, 물결. ‘십자가’가 중심이에요. 왜냐하면 창세 전에, 예수님의 죽음의 내용에 포함시켜서 천지창조를 했기 때문이에요.
이게 말씀으로, -말씀이 예수님이잖아요- 말씀으로 천지창조를 한 거예요. 천지창조 안에는 무슨 내용이 핵심으로 되어 있느냐? 십자가 내용이 천지창조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죽음이고, 인간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얼마나 <결>이 어긋나 있느냐, 맞아 있느냐? 맞아 있으면 천국, 어긋나 있으면 지옥이에요. 왜냐하면 온통 전부가 예수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이 이야기가 성경의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천사들이죠. ‘천사들이나 세상의 모든 것이나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를 위하여’라 하면 예수님은 그냥 계시고 다른 것들이 그리스도에게 모인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했어요. ‘말미암아’라는 것은, ‘내가 의도했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했다.’ 누구에게 포함해서? 내가 이 땅에서 해야 될 일을 포함해서 이 우주를 펼쳤다.
펼친 우주는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천국이고 하나는 지옥. 그래서 시편에 보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주님께 경배하고 굴복한다고 되어 있어요(시 66:3-4). 희한하지요. 구원이 안 된 상태인데, 주의 이름을, 주의 이름께 경배한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의 상식은 천국에 가야 경배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지옥 간 사람은 씩씩거리고.
그런데 빌립보서에 그런 구절이 있는데, 구원되지 못한 자도 주님께 찬양하지는 않지만, 주님을 인정하는 거예요. 마땅히 행하실 것을 마땅히 행하시는데 그 일이 뭐냐? 지옥을 만들어서 지옥에 우리를 쳐 넣는 것도 주께서 마땅히 하실 일이라고 뒤늦게 인정하는 거예요.
빌립보서 한 번 볼까요? 2장 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죠? “땅 아래 있는 자들”, 이미 죽었던 자들도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땅 아래 모든 죽은 자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로 이런 것을 사도바울이 알기 때문에 로마서 11장 마지막에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5-36). 이 말은 뭐냐, 그동안 인간세계에서 마귀들 때문에 세상의 중심이 빠져있었던 거예요. 그 중심을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은 자는 그 모르는, 비어 있는 지점에다가 예수님을 딱 집어넣고 ‘모든 것은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라고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주님을 모르니까 그냥 ‘여호와로 말미암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여호와가 육신이 되어서 예수님으로 구체화 된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시대에 주께서 보여줄 거 다 보여준 거예요. 뭔가를 보여준다고 해서 조금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다 보여준 거예요.
어제 낮 설교하면서 저도 충격을 받은 것은 빌립의 그 질문이었어요. “예수님, 예수님의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요 14:8). 그 질문을 할 때 자신의 연금이 얼마고, 애가 공부를 잘하고…, 아예 그런 생각은 없죠.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 맞죠. 이거는 뭐 진리를 다 털어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 참, 진짜 예수님께서 어렵게 얘기했습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한 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극구 인간의 이해로는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게 저지하는지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이렇게 하거든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할 때 이걸 제자들이 듣고 있잖아요. 그럼 제자들이 눈이 있죠. 눈이 있으니까 앞에서 말씀하신 누구를 보겠어요? 예수님을 보죠. 안 보이는데요, 뭐.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합니까, 안 보이는데. 성령이 와야 보여요. 앞에 있는 예수님은 내가 이해하는 타자이고 남이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전제로 해서 보는 거거든요. ‘내가 죽었다.’ 해서, 그제사 보이는 예수는 아닌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곧 내가 죽었을 때 보는 예수님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나와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것이요.’ 이 몸을 떠나서 직접 볼 것이요. 이 몸을 떠났다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입니다. 그야말로 절멸될 죽음에 합세한 거지요. 모든 인간이 죽었다, 죽었다…, 거기에 합세해서 같이 엎드려 있는 거예요. 예수님도 합세했고요. 아, 이 몸은 죽음을 향하여 치닫고 있으니까 결국은 “엎드려!” 경상도 말로는 “수그리! 납작 엎드려. 자꾸 고개 들지 말고.” 고개 들면 총으로 쏴버려요.
그걸 몇 주 전에 이야기한, 제목으로 한다면 “빈 노트에~” 텅텅 비어 있는. 열심히 살았는데 주께서 일체 인정 안 해요. 내가 한 것은 내 구원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냥 멸절하기 위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잘 안 떨어져요. 늘 고개를 쳐들고 빌립처럼, “하나님 있으면 보여주세요.” 이런 식이죠. 아버지를 보이라는 이런 질문.
주께서 얼마나 같잖겠습니까? ‘요게 살았구나, 요게! 고개 쳐들고 질문하는 거 보니까.’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다니까요. 주님께서 엎드리게 하는 방법이 시편 90편에 나옵니다. 신명기 19장은 조금 있다 들어가야 돼요. 아직 좀 멀었어요. 더 해야 해요. 그냥은 못 들어가요. 시편 90편 5절부터 보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쓸어간다는 표현이 참 적당하네요. 덮치니까 확 쓸려버리지요. <평탄화> 작업이 되는 겁니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풀은 아침에 피어서 자라다가 저녁이 되면 벤 바 되어서 말라버리지요. 언제 풀이 있었나 하는 것처럼.
그다음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소멸되는데 소멸되는 원인이 뭐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시 90:7). 아까 말한 1번, 과학자들이 말하는 죽는 것은 내가 관찰하잖아요. 죽음이 뭘까, 자아는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이게 우주로 흩어지는구나….
1번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본인이 관찰자이기 때문에 뭐가 막히느냐 하면,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나를 관찰 대상이 되게 했던, 나 말고 다른 ‘그분의 시선과 관점’을 과학자들은 몰라요. 인간들은 모른다고요. 그런데 그분이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분노>를 품고 우리를 보니까 9절에 시편 90편 9절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고 되어 있어요. 어제 낮 설교 초반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순간 구원’ 아니고 <흐름 구원>이라 했어요. ‘순간적으로 나 구원받았다.’ 이것은 왜 안 되느냐 하면, 이렇게 흐름이 있어서 길쭉하게 되어야 여기에 예수님의 행적이 안에 다 들어가니까요, 예수님의 행적이. ‘나 구원’이 뭐로 바뀌어야 되냐면, ‘예수님의 구원’으로 일단 바뀌고, 예수님 구원의 효과로서 ‘없는 데서 내가 새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는 절차가 구원입니다.
내가 있다는 그 자리에 주님이 오셔서, 하늘에 계신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온갖 서러움과 오해와 곡해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다음에 사흘 만에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귀환하는 이 절차, 이 <바닥>이 바로 구원을 보장하는 바닥이 되지요. 그러니까 여기 갈빗대에 담 걸렸다. 파스 한 장 가지고는 안되지요. 길다란 파스를 한 석 장 정도 붙여야지요.
주님께서는 매일 같이 파스를 붙여요. 주의 분노의 파스에 연결, 연결. 매일 같이. 시편 90편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주께서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그러한 징후와 징조를 평생동안 뿜어내면서 살아오고 있었어요. 전부 다 내 원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아요. 누구 뜻대로 되어야 하는데요? 일단은 내 뜻대로는 안 돼요.
그다음에 “…신속히 가니…” 어떻다?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래서 어떤 데에 보면 화살같이 날아간다고 해요. 슈슈슈~! 우리는 멈춤이 없이 흐름을 형성하는 인생입니다. 흐름을 형성하는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 주님 가신 길의 그 코스대로 화살이 날아가는 거예요. 그게 넓은 길이 아니고 주님이 먼저 닦아놓은 좁은 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 14:7) 하시는 거죠.
‘자꾸 아버지를,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식으로 하지 말라. 내가 진리다. 알아야 할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 그 전부가 내 행함이다.’ 그래서 모든 말씀, 성경을 자기가 자기에게 다 쏟게 만들어서 다 이뤘잖아요. 이뤄놓고 이제 성도로 하여금 주님의 절차를 반복시키기 위해서 아직 우리가 이 땅에 뭉그적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때 갔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어슬렁거리면서. 별 할 일도 없어요, 탁구나 치고. 별로 할 일도 없는데 계속 어슬렁거리고…. 이러고 있다고요.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꾸역꾸역 자꾸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라고 우리로 하여금 매일 같이 <신속하게> 살게 하십니다. 시편 90편 12절에 보면, 활주로 같은 그 절차, 이게 구약이기 때문에 아직 신약이 아니잖아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계수함’은 숫자를 카운트하는 것인데 이게 내 숫자가 아니에요. “주님, 언제 오십니까?”
시편 90편 13절,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언제 돌아오십니까? 약속의 땅으로 언제 오십니까? 메시아가 언제 옵니까?’ 유대인들도 기다렸지요. 그런데 초라한 모습으로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요. ‘당신 말고, 우리가 아는 당신 같은 사람 말고’ 메시아를 기다렸다고요. 그런데 “시편 90편 13절의 그 약속대로 내가 왔는데? 내가 왔잖아, 여기에. 내가 왔잖아.” 당신은 아니라는 거예요. 와도 문제예요, 와도 문제. 어쩌라고요 그러면? 말씀대로 왔는데.
이제 신명기 19장을 봅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①새로운 영역이 주어진다. ②기존의 영역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집니다. 그러면 새로운 영역은 뭐고 기존의 영역은 뭐냐? 새로운 영역은 오늘 이야기하게 될 <도피성>, 교재를 만들다 보니 영어가 뽑혀왔어요. 위에서부터 번역합니다.
The City of Refuge(도피하는 성, 도시), Joshua 20, 여호수아 20장입니다.
[첨부파일 '도피성' 지도 참고]
Naphtali(납달리), 그 옆에 Asher(아셀), 납달리 밑에 Kedesh(게데스), 오른쪽에 East Manasseh(동므낫세), 바로 그 아래 괄호 안에는 Bashan(바산), 그다음에 납달리 밑에 Zebulun(스블론), 스블론 밑에 Issachar(잇사갈), 옆으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Golan(골란), ‘골란’ 하면 뭡니까? 고원(高原)이지요. 뉴스에서 봤지요? 골란고원.
그다음에 Sea of Galilee(갈릴리 바다), 그 밑으로 내려가면 West Manasseh(서므낫세), 거기서 오른쪽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도피성 Ramoth Gilead(길르앗 라못), 거기서 대각선으로 내려오면 Ephraim(에브라임), 그 바로 밑에 도피성 Shechem(세겜), 다시 요단강 너머에 Gad(갓), 왼쪽으로 지중해까지 가서 Dan(단), 바로 옆에 Benjamin(베냐민), 거기서 맨 오른쪽 끝에 East Manasseh(동므낫세), 므낫세 땅이 굉장히 크지요?
그 밑에 Reuben(르우벤), Bezer(베셀), 왼쪽으로 Dead sea(사해) 나오고, 왼쪽으로 Judah(유다), Hebron(헤브론), Philistia(블레셋), 그 밑에 Simeon(시므온), 오른쪽 옆에 Moab(모압), 밑에는 Edom,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수아 20장 7-9절 내용입니다.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또 여리고 동 요단 저편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택하였으니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자, 여기서 도피처에 대해서 신명기 19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세 성읍’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교재로 보니까 세 개가 아니고 여섯 개인데요?
하나님께서 초반에 갈릴리 바다하고 사해의 서쪽만 무슨 땅? 약속의 땅이 되고, 동쪽의 땅은 약속의 땅도 아닌데 ‘야, 땅 좋다. 들이 넓다.’ 한다고 해서 거기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조건으로, 약속의 땅은 ‘갈리리 바다와 요단강 사해를 기준으로 해서 서쪽 지중해 닿는 곳’까지의 폭을 약속의 땅이라고 한 겁니다.
에스겔에는 미래의 약속의 땅, 천국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겔 47:13-20). 새로운 지도에는 이것이 약속의 땅이라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19장 9절에 보면,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신명기 19장 2절의 그 세 개, 9절이 세 개, 토탈 6개입니다. 그러면 덤으로 주는 것이 뭐냐? 요단강 동쪽은 약속의 땅은 아닌데 덤으로 줘버리니까 약속의 백성은 여기서 살게 돼요. 이게 원래 약속의 땅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이들이 이 땅에서 살다가 잘못 되었을 경우에는 어느 곳부터 먼저 날아가느냐 하면, 동쪽의 땅부터 신속하게 다 빼앗기고 먼저 날아갑니다.
자, 그렇다면 도피처가 뭐냐? 도피처는 죽음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거예요. 1번에서 2번으로, 또는 육적인 죽음에서 영적 죽음으로 옮겨가는 절차에 관한 것이 도피성이다. 육적으로 이해한 죽음, -인간의 죽음은 육적이기 때문에 이런 죽음만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신 19:5)이 도끼질하다가 도끼날이 쑥 빠져서 공중에서 세 바퀴 반 돌아서 엉뚱한 사람이 맞아서 죽었다. 이게 인간들이 아는 죽음이에요.
1번, 육적인 것은 인간에 의해서 죽는 죽음, 이게 인간들이 아는 육적인 죽음이에요. 이것은 백날 알아봐야 약속의 나라에 못 들어가지요. 2번은 뭐냐? <제사장의 죽음>이 죽은 우리를 살리고, 죄사함 주고, 영생 준다. 이 세 가지. 이것은 어떤 공간에서냐 하면, 여섯 개의 도피성 안에서만 유용한 공간이에요. 그래서 1번에서 사람 죽이고, 사람에게 쫓기면서 복수 당할 것을 염려해서 빨리 가까운 도피성으로 피신해야 하는데 길을 닦아놔야 해요.
왜 길을 닦아야 하느냐? 빨리 갈 수 있도록. 길이 안 좋아서 머뭇거리거나 지체되어서 맞아 죽으면 안 되니까. 그렇다면 본문에서 도끼질하던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거지요. 뭐냐 하면, 메시아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너, 나와.” –군대에서 아무나 나오게 해서 일 시키듯이- “너 잠깐 보자. 메시아 죽음의 효능, 효과에 대해서 나는 너를 사용해야 하겠다.”
나중에는 알게 되겠지요. “일단은 도끼질은 하되 도끼 점검하지 마. 그냥 쓰던 도끼 들고 가서 벌목해.” 그래서 일하다가 도끼날이 빠져서 날아갈 때, 그냥 땅에 떨어져도 무방한데 하필 타이밍 맞춰서 마침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있어서 정통으로 –팔이나 이런데 맞으면 기브스나 하면 되는데- 맞아서 죽었다. 죽었는데 그 사실을 가족들이 알았다. 사람들이 죽어라고 달려들 때 빨리 도망가라. 도피성으로 가라.
<새로운 공간>이에요. 영적인 죽음이 유일하게 작용하는 공간이 <도피성>이에요. 만약에 도피성에 들어갔던 사람이 옛날 자기 살던 가락이 생각나서 도피성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죽어요, 안 죽어요? 이것은 1번 죽음으로 맞아 죽고, 2번 죽음으로 잘리고 그래요. 1번 죽음은,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께서는 사람 죽인 살인자도 정당하게 의인이 될 수 있고, 그리고 제사장의 제사와 관련한 그 죽음이 살인한 자라고 할지라도 죄사함을 얻게 한다는 겁니다.
‘네가 살인 안 했다’가 아니라 ‘살인한 그것마저도 메시아와 연관 되어 있는 하나님의 일이었다’라고 이해를 하게 만들어요. ‘내가 가난한 것도, 심지어 내가 떼부자 된 이것도 내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막대한 수백억 재산이 되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권 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카지노 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카지노 꼭 가야 할 것 같으면 주께서 가게 하셔요. 가게 하셔서, 있는 돈도 있는데 잭팟 Jackpot이 터져서 돈 더 벌게 해요.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도피성을 둔 겁니다. 도피성은 처음에 세 개라고 했고, 나중에 또 세 개 추가되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가 살던 땅에서 이방 민족에게 완전히 작살날 때 너희 땅 빼앗겼다 생각하지 말고 도피성이 철수했다고 봐라.’ 도피성이 철수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1번 죽음이 영생과 통하는데…, 제사장의 죽음이 영생과 통하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제사장으로 오셨잖아요.
제사장으로 오셨는데 제사장의 죽음과 연합되지 않으면 제사장을 죽게 한 그 지옥은 하나님의 분노의 영역에 속하겠지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토록 작렬하는 그것으로 빠지게 된다는 말이지요. 인간의 죽음은 잘 모르겠다느니, 우주로 퍼진다느니, 그런 되도
않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첫째 시간 마치면서 누가 요한복음 11장 26절을 읽어보세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이게 지금 1번, 내 목숨이 끊어지느냐 마느냐,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는 자는 살아도 함께 있고, 죽어도 함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간파하지 못한 <생명 환경>입니다. 그곳은 죽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오케이?!
십분 쉽시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2강) 요13:36(변화) 20260921 (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148페이지 처음에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6~3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죠.
이걸 나눠보겠어요.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베드로 질문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을 보면서 주님을 보는 게 아니고 주님의 목적지가 궁금한 거예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목적지를 알면 베드로 자신이 주와 함께 동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미리 말씀해주세요. 어디로 갑니까? 제가 졸졸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뭐냐?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동행이 불가하다.
주님 답변 : 동행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디냐?’ 할 때 인간이 딱딱 좌표로 이야기해서 어디쯤 몇 km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목적지가 어디냐?’ 하면 동행이 안 되는 곳에 내가 간다는 겁니다. 네가 올 수 없는 곳에 내가 간다.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내가 간다.
그럼 여기서 베드로는 그 예수님 말씀을 곧이 들으면 “끝났네, 끝났어. 그럼 주님 여기서 헤어집시다. 나도 쿨합니다.” 뭐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 뒤에 말씀이 뭐냐 하면 후에는 따라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이 동행이 가능한 것을 실선으로 본다면, 실선으로 봤다가 실선의 구간은 끝났고 점선 구간인데 이 점선은 ‘예수님은 가시는데 인간은 못 가는 곳’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첫 번째 대답이에요. (답변 1. -------------- 실선-점선)
두 번째 대답은 뭐냐? 점선인데 갈 수 없는데, 네가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야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할 수 있다, 동행이 가능한 것은 실선. 동행할 수 없는 것은 점선. 그럼 베드로 입장에서는 이 점선이 뭐로 바뀐다는 말입니까? 실선으로 바뀐다는 이야기잖아요. (답변 2. ------ 점선-실선)
‘지금은 점선이라서 못 가지만 동행이 가능한 것은 실선이기 때문에, 나중에 점선이 실선으로 바뀌면 그때 나와 같이 가면 된다.’ 이렇게 이해될 거죠? 그 이해가 잘못된 이해에요. 지금은 실선으로 올 수 있는데 점선 부분은 못 오잖아요. 그런데 나중에는 점선 부분을 네가 오게 된다는 거예요. 점선이 실선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
이건 베드로가 바닷물 위를 걸었을 때 이미 눈치 챘어야 돼요. 바다인지 육지인지 분간도 못하고 주님만 쳐다보고 가다보니까 땅 부위가 끝났어. 그다음부턴 갈릴리 바다인데, 주님 앞에서는 이게 육지고 이게 바다라는 구분 자체가 의미 없이 된 거예요, 주님만 쳐다보고 가니까.
그런데 가다보니까 발바닥 감각이 이상한지 물 위를 본 순간 그는 물에 빠졌습니다. ‘감히 점선인데 내가 실선처럼 까불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이미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또다시 베드로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베드로가 제자의 대표자니까 인간 구원은 대표자 베드로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인간 쪽에서 하는 모든 것은 단절되어 있다는 겁니다. 끊어져 있다고 보는 거예요.
네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주님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마음 단단히 먹어라.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욕심이다. 나라는 인간 존재에게 천국은 아예 애초부터 해당사항이 없다는 그 점을 분명히 해야 돼요.
인간은 할 수 없으되. 부자가 천국 가는 법은 없습니다. 안돼요. 더 추가한다면, 부자 아니라 할지라도 부자 되려고 부자를 희망하는 인간도 천국에 못 갑니다. 방향이 그쪽 방향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천국은 뭐냐? 예수님 가시는 그쪽이 천국이에요.
‘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따지지 마세요. ‘할 수 없다’도 말하지 마세요. 주님 가신 쪽이 천국인데, 그쪽은 인간 눈에는 없는 쪽이에요. 자기가 고난 받는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노력한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희생한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인간 나부터 출발하는 어떤 쪽도 천국 쪽은 아닙니다. 출발이 주님 쪽에서 방향이 주어져서 주께서 우리 인간을 그쪽 방향으로 몰아세워야 되겠죠.
여러분, 시편 23편 잘 외우고 있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 했어요. 졸지에 다윗은 뭐가 돼요? 목자가 등장했다는 말은, 양 없는 목자가 없잖아요, 나는 졸지에 양이 되어버린 거예요. 내가 양이 될 경우에만 주님은 주님의 목자 기능이 나한테 살아있는 게 돼요. 주님이 살아있는 방법은, 내가 양일 때 주님이 살아있어요.
양의 특징은 이사야 53장에 잘 나와요. 양이란 제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게 양이에요. 제 갈 길을 알지 못하면, 가만 서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개코도 모르는 게 평생을 설쳐요. 이것 해보다가 때려치우고, 저 사업하다가 때려치우고, 취직하면 간섭한다고 싫다고 치우고, 개인 카페 하다가 말아먹고,… 가만있지 못하고 항상 싸대요, 양은.
그 특징이 목자 없는 양의 특징이에요. 목자가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다 교회 오면 양이 감히 목자를 믿으려고 해요. 감히. 영어로 dare.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양이 목자 믿어서 뭐할 건데요? 또 목자한테 자기가 시키려고? “주님 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 내 인생 그렇게 몰아넣으면 안돼요, 주님. 주님이 지금 착오 일으켰는데… 제가 평소에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주님도 한번 해볼래요? 얼마나 답답한지? 잠도 못 자겠어요. 괴로워서… 몇 개월째야, 도대체.”
양이 목자를 결정해버렸어요. 그것은 가짜죠. 양이 목자를 믿고 따르는 게 아니고, 목자로서 주님이 나타날 경우에만 우리가 진짜 양이 됩니다.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 10장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요. 목자가 “양아, 이리 오너라.” 이렇게 하지 않아요. 목자는 그냥 죽어요. 죽는데, 진짜 양은 “이 분이 왜 죽었지? 이 분이 뭐 때문에 죽었지?” 관심을 보이게 되는 그들이 바로 양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말을 양이 알아듣고, 양의 말을 목자가 알아듣는 것은 성령이 왔을 때나 성립해요. 성령이 안 오고, 제목이 <신학의 허점>이잖아요, 그냥 신학만 대따 하는 것은 이건 아무 소용없어요. 양의 입장에서 목자를 자기가 막 만들어내요. 만들어낸 의도는 괜찮은 인도자 만나서 천국 한번 가보겠다는 구원 탐심, 구원 욕구가 넘쳐서 그래요.
배후에 누가 그런 짓하겠어요? 악마가 그런 짓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이점에 너는 성공해야 돼. 실패하면 안돼. 너 구원받아야지.” 계속 우리 자신의 가치를 일체 놓치지 않는 상태에서 제대로 성경을 보고, 제대로 신학을 하고, 제대로 큐티를 해서 너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성공해야 되지 않겠냐고 마귀가 자꾸 배후에서 부추겨줘요. 그거는 구원이 아닙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구원은 덮치는 것’이었잖아요. 신약에 오면 구원의 내용이 넓어지고 폭이 깊어져요. ‘구원은 변화’입니다. 변화, revolution, 혁명 같은 거예요. 구원은 변화되는 거예요.
내가 변화? 아니요. 이건 육적인 인간들이 철학이나 이런 걸 통해서 ‘내가 새 사람 되어야 천국 가지 않겠느냐?’ 자기 변화를 자기가 도모하는데, 이것은 탈락입니다. ‘구원이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말씀이 주인공이 되는 변화’ 이게 구원 상태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친히 활동할 때, 그래서 구원의 영역을 만들고 구원의 장(場)을 만들 때, 누가 지독하게 누가 끈질기게 방해하겠어요?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나~ 내가 그렇게 지독하게 끈질기게 방해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안 믿는 가정입니다. 추석 되었습니다. 제사 다 지내잖아요. 그런데 새로 시집 온 새댁이 장담합니다. “어머니, 차례상 손대지 마세요. 제가 차례상 다 책임지고 푸짐하게 장만하겠습니다.” 분명히 약속하기를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한다’는 조건이었어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변화할 줄을 몰라. 구원될 줄을 모르고 구원을 해야 되는데, 자기가 생각했던 차례상의 메뉴 있잖아요, 음식 메뉴, 그걸 생각한 거죠. 배도 머리 날려서, 사과도 깎아놓고, 밤도 층층이 놓고, 지짐하고, 흔히 제사 음식 하는 거 있잖아요. 오징어 간장 쳐서 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음식들, 고사리 볶고 그걸 푸짐하게 하는 걸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새댁은 아무 일도 없이 쿠팡에다 주문해서 피자, 햄버거 이런 퓨전 음식으로 푸짐~하게 차려가지고 그 앞에서 제사하랍니다. 초도 그냥 큰 초가 아니고, ‘생일 축하합니다’ 그 초로 ‘조상님, 생일 축하합니다’ 이런 식으로 했단 말이죠.
성질이 아주 대쪽 같은 시어머니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돈이 몇십만 원 하는지 그건 나중 문제고, 우리 집안의 기강을 잡을 절호의 찬스가 온 거예요. 말로 해서 될 새댁이 아니잖아요. 뭔가를 보여줘야 돼요. 진짜 이제 보여줘야 돼요. 상을 뒤집어버린 거죠. “네가 지금 장난치나? 네가 이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 맞아? 기강이 있어! 우리 전통이 있다고!” 확 뒤집어버렸어요. 그때 그걸 보고 며느리도 안 지고 “어머니는 변화를 무서워하는군요.”
바로 변화를 무서워하는 우리 자신들이 구원을 방해하는 거예요. 내 지식으로 내 상식으로 납득되는 이야기로만 한 상 차리기를 원하는 거예요.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요, 진짜 말씀하신 게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답을 원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고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라.’
답은 나왔어요. ‘십자가. 성령. 삼위일체.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 이게 답이잖아요. 그게 답 같으면 에스겔 빼고 사사기, 시편 다 빼고, 열왕기하 14장 1절에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이런 거 다 치우고. 열왕기하 14장,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 15장,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 16장, ‘예수의 피로 구원 받는다.’ 17장, ‘성령이 와야 깨닫는다.’ 왜 이걸로 안 채워져 있느냐?
답을 구한다는 것은 뭐냐? 중간 과정에 변화되는 환경 있잖아요. ‘새로운 환경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그 환경은 짜증나서 다 치워버리고 “나 여기 있습니다. 답 주세요. 그 답으로 나를 구원해주세요. 나는 그 답을 원합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주께서, “네가 뭔데?” “저 잘 압니다. 저 죄인입니다.” 그래! 그 죄가 변화되어야 될 죄하고 지금 틀어진, 잘못된 죄인 거예요, 그게.
어제 오후 설교에 제가 이렇게 기도했어요. 기도 제목이 뭐였느냐? “일상을 살아가면서 말씀이 즙처럼, 팍팍 터지면서 즙이 나오는 것처럼 그걸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랬거든요. 아니, 성경이 답이잖아요. 성경 보면 안 됩니까? 왜 살아야 되죠? 왜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되고. 왜 갖가지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왜 그런 거예요?
인간인 우리가 답을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말씀은 “네가 답을 요구할 그런 잽이 되냐?”는 말이죠. “내가 주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네가 나와 동행할 잽이 되냐 이 말이죠. 예? 잽도 아니란 노래가 있어요. 잽도 아니지~
어떻게 자꾸 예수를 이용하려 해요? “주여, 저와 동행해주옵소서.” “네가 뭔데?” “저는 답을 원합니다.” 그때는 말로 하는 것보다도 누구 하나 나와서 시범을 보이면 좋겠습니다만 이건 너무 실례가 되기 때문에 여러분 상상만 하세요. 손가락으로 이마 있잖아요, 이마를 밀면서, “네가 뭔데? 네가? 네가 뭔데 동행을 원하고,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답을 줘야 돼? 너 정말 답도 없다, 너. 너 하는 꼴을 보니까 정말 답도 없어.” 답도 아까워요. “뭔데 네가 하나님을 왜 알아야 되는데?” “예수여,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네가 뭔데 보여줘야 돼?”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생각할 때, 메시아가 오면 정답이라 생각하고 그들은 모든 율법을 메시아 오심에 초점 맞추어서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41장, 42장, 43장 같이 한번 봅시다. 보게 되면 ‘아, 옛날에 내가 참 좋아했던 구절이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이건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 부분을 채택해서 한번 읽어볼게요. 이사야 41장 13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절,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그렇게 나와 있죠?
이 본문을 보고 있는 사람이 마침 일주일 전에 부도나서 집 압류 당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압류 당했는데 이사야 41장 13절, 14절 봤다. 무슨 생각 들겠습니까? 부도나기 전에, 투자했는데 투자가 대박 났을 때 기뻐했던 그때를 기억하겠죠? 그럼 그때 그 마음가짐이 변화됩니까? 부도나기 전에 그 마음이 달라지겠어요? 그때 그 마음과 동일한 마음가지고 무슨 구원이에요? 안 달라졌는데.
42장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다음 3절, 이거는 대예배에서 장로님들이 대표 기도할 때 상투적으로 나오는 멘트 아닙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뭡니까? 공장 새로 달라 이 말 아닙니까, 공장. 꺼져가는 공장 살려주시고, 그런 뜻 아닙니까.
43장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장 1절 이 말씀이 대학교 선교단체에서 그렇게 유행되는 이유를 아시겠죠?
일단은 대학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 되고, 취직하고 난 뒤에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살 아파트가 없다는 거 아니에요, 아파트가. 아파트 전세값도 없다는 말 아니에요. 보증금에 월세 주고 나면 나중에 월급 300만원 받고 남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럴 때 간사나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이 그 청년회 모임 때 어떤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희망을 줘야 돼요? 이사야 43장 1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그다음에 “내가 너를 (딱)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네 미래 정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책임 안 지겠나.
그 전에 목사, 특히 부목사가 물어보겠죠. “너를 구속하였고” 이 대목가지고 “그런데 우리 이 청년, 김 청년. 십자가는 믿나?” “믿습니다.” “그럼 구원 받았네! 그럼 이제 너는 내 것이네! 주께서 책임질 거네! 다 같이 기도합시다.” 이렇게 끝나버린 거예요. 그럼 뭐가 남겠어요? 이사야 43장 1절이 오랫동안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잠복되어 가겠죠. 이게 변화된 겁니까? 변화된 것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이 가지 못할 곳에 주님이 가신 겁니다. 그럼 주님 가신 길은 인간에게는 못 가는 곳이 아니고요, 가서는 절대 안 되는 곳입니다. ‘절대 안 되는 곳’을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이게 바로 ‘천국’이라는 거예요. 천국에 때 묻으면 안 되니까. 천국에 들어갈 존재가 아닌데 들어가면 천국 전체의 가치가 훼손되니까 주께서 전력을 다하여 천국에 못 오도록 막습니다. 천국은 천국다워야 되니까요.
그러면 인간이 갈 곳은 뭐냐? 천국 아니면 지옥이죠. 그래서 지옥은 더욱더 지옥다워야 되겠죠. 하나님의 뜻은 요지부동입니다. 딱 정해졌어요. 천국은 천국답고, 지옥은 지옥다워야 된다. 따라서 ‘천국은 인간이 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못 박아버렸어요.
그리고, 못 가는 정도가 아니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이 ‘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를 어떤 사람이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천국 백성입니다. 말을 할 때 꼭 그렇게 말하더라, 또 이렇게 말해가지고….
오늘 아침 해외토픽에 개가 나왔어요. 집안에 CCTV 있고, 주인은 나가고 개만 혼자 있었어요. 개만 혼자 있었는데 도둑이 몰래 들어왔어요. 그런데 개가 외로웠던지 도둑이라 생각 안하고 사람이라 생각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 입에 물고 꼬리를 막 부러지도록 흔들어대면서 도둑을 반겼어요. 도둑은 일단 마음에 안심이 되었어요. 안심이 돼서 훔칠 거 훔치고 살피고 있는데, 마침 그때 그걸 바깥에서 알게 된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이 왔어요. 경찰이 도착해서 문 열고 들어오려고 하니까 역시 또 장난감 물고 경찰 온다고 막 꼬리를 흔들며 반겼어요.
그게 뉴스에 나왔는데, 그걸 보고 사람들은 ‘천사 반려견이다.’ 도둑도 환영하고 경찰도 환영하고. 두 성질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개는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개는 사람을 반기는 자기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인간 같아요. 이게 지옥 가는 건지, 천국 가는 건지 관심도 없고 자기 행복하면 끝나요. 내 가족, 내 새끼, 내 자식, 내 가정만 행복하면 나머지는 문제거리도 안돼요. 이건 전혀 변화가 안 되겠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못 가는 곳에 내 피를 대신해서 가는 정도가 아니라,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주께서 데려감으로써 구원 받은 인간은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인식을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하게 만들어버려요. 이게 바로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성령님, 고맙습니다. 절 구원하러 데리러 왔군요.” 손잡으려고 하는데, “치워라!” 동행하는 성령님께서 항상 한숨 푹- 쉬고, 탄식하고 이래요.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 저거 언제 변화될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는 또 천국 간다고 “주여!” 기도한다고요. “저봐. 기도할 줄도 모르잖아.” 갈 바도 모르고 기도할 줄도 모르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면서 우리 대신 탄식하면서 한 기도 덕분에 그 기도가 응답되어서 우리는 꾸역꾸역 갈 수 없는 곳으로 기어이 가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내가 모르는 죽음으로 인도하고, 내가 모르는 주님이 죽으신 그 낯선 죽음으로 집어넣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너희 죽을 몸도”. 죽을 몸의 특징이 뭐냐? 자아가 이 죽을 몸을 살아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거리에 가면 가족사진 찍는 데 있잖아요. 거기 들어가서 토끼 귀 모자 쓰고 고개 돌리면서 ‘오빠!’하고 찍은 사진 있죠? 있어요, 오빠 사진. 왜 그런 짓합니까? 본인이 살아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게 죽을 몸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죽을 몸이에요.
목자도 없고 자긴 양도 아니에요. 자꾸 주님하고 거래해요. “얼마면 돼? 얼마면 돼? 당신 사랑하려면 얼마면 돼?” 이런 식으로. 그래서 자기 뜻대로 안되면 “가, 가란 말이야!” 낙엽 같은 거 막 집어던지고.
이러한 처지에 있는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가? 그 방식에 있어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성경책은 내가 그동안 뭘 오해했고, 뭘 오산했고, 나에 대해서 뭐라고 착각하고 있으며, 내가 어떤 점을 몰랐는가를 별 할 일도 없으면서 살아있는 이 기간 가운데 느끼게 할 때, 그걸 가지고 말씀의 즙이 터진다는 거예요.
머루포도 보면서 알알이 있는 이걸 만나로 보자는 거예요. 왜? 양식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식사 전에 기도하잖아요. 하나의 양식일 때 광야 때 주께서 친히, 익히 애굽에서 먹었던 양식이 아니고 모르는 양식을 줬다는 것은 네 몸은 모르는 양식으로 만들어진 몸이 되어야 천국 가는 거예요. 약속의 몸이 되어야 돼요. 약속으로 꽉 차있는 몸이 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달리 하면, 말씀으로 꽉 차있는 몸으로 변화되는 그것이 벌써 구원 작업이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문장으로 한번 써볼게요. ‘말씀으로 만든 현실로 Go! Go!’ 모든 현실은 말씀에 입각해서 조성되어 나가는 거예요. 그 중에 우리도 포함되고요. 말씀으로 만들어졌거든요.
야곱은 하나님 사자를 만나고 난 뒤에 그걸 알았어요. 나는 그동안 야곱으로 살았잖아요. 이게 변화되어야 돼요. 어떻게 변화되어야 됩니까? 이스라엘로 변화되어야 돼요. 내 소유화된 나가 예수님 소유화된 나로 바뀐 인생노선을, 주께서 밤중에 찾아와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조건이 뭐냐? 너는 죽어야 된다는 거죠. 야곱은 죽어야 그게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만든 연속이죠. 그럼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말씀으로 만든 현실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변화하기 싫어요. 나는 나입니다. 나는 나라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밀어붙이려고 애를 쓰거든요. ‘내가 만든 현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이 문제. 이걸 알아야 변화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확인이 될 거 아닙니까.
“말씀으로 된 현실이다, 아 믿습니다!” “그럼 너는?” “나는 모르죠.”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평소에 현실로 여기는 것은 어떤 식으로 현실이냐? 그 점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만든 또는 내가 생각한 현실. 지난 울산강의 때 최유나 노래 <흔적>을 얘기했었죠. 그때 가사를 적었잖아요. 가사 중에 ‘내가 만든 과거’라는 말이 나와요. 딱 그게 현실이에요. 내가 만든 과거.
흔적 (1992)
노래 최유나 (김순곤 작사, 방기남 작곡)
이제는 가도 되는 건가요 어두워진 거리로
오늘만은 왠지 당신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내가 만든 과거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절반의 책임마저 당신은 모르겠지요
지나간 날을 추억이라며 당신이 미소 지을 때
기억해요 슬픈 여자 마음에 상처뿐인 흔적을
어차피 내가 만든 과거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절반의 책임마저 당신은 모르겠지요
지나간 날을 추억이라며 당신이 미소 지을 때
기억해요 슬픈 여자 마음에 상처뿐인 흔적을
기억해요 슬픈 여자 마음에 상처뿐인 흔적을
우리는 현실을 누가 만들어요? 내가 추려서 만들었어요. 저 사람은 만날 사람, 저 사람은 안 만나야 될 사람. 이런 것을 그때그때마다 선택했고 내가 마음속으로 야무지게 결정한 거예요. 시집가기 전에 나 좋다는 남자가 열 명 정도 됐잖아요. 그 중에 뭐 잘못 집었는지 잘 집었는지 모르겠지만, 아홉을 쳐내고 한 명과 혼인을 했을 때 그거 누가 만든 과거에요? 내가 만든 과거잖아요.
그러니까 현실이라는 것은 항상 주인공이 나의 흔적을 지울 길 없는 나의 흔적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말씀으로 꽉 차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흔적으로 꽉 차 있는 것이 이 현실이에요. 그럼 사람이 열 명이라면 열 명의 현실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 다르죠. 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광주강의 때 그림을 하나 그렸잖아요. 집합으로 설명했는데요. ‘나’ 동그라미, ‘너’ 동그라미에서 ‘내가 너를 사랑해.’ 할 때, 너와 내가 이제는 하나가 되기 때문에 공통분모가 성립된다. 동그라미 두 개가 겹쳐진 부분이 생겼다.
“너는 내 남편으로 집었어. 그러니 나와 결혼해줘. 내가 보통 마음 단단히 먹고 하는 게 아니야. 내 모든 자존심 다 버리고 너를 집었어. 보통 남자가 먼저 프로포즈 하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내가 한다. 그만큼 나는 너를 진중하게 진지하게 생각한다.”하니까 남자가 뭐라고 해요? “오케이.” 했죠.
나중에 보니까 남자가 겹친 동그라미가 한두 개가 아니에요. 옆에 걸치고 있는 동그라미가 한두 개가 아니었던 거예요. 여자가 시집와서 남자를 집었다. 이제는 넌 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집오고 나서 옆에 있는 시어머니가 “너 우리 집에 와줘서 고맙다.” 고맙다 할 때, ‘아, 남편 아내해주니 고맙구나.’ 또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참 고맙다. 너한테 아직 공부도 못 마치고 취직도 안 된 시동생 다섯 명 있는데, 나는 관절이 안 좋다. 네가 와서 시동생 도시락 다 챙겨라.” 사전에 그런 조건이 없었다니까요! 그런 조건이 없었어요.
또는 반대로, 남자 쪽에서 여자가 마음에 들어 결혼하기로 다 했는데, 결혼식 전날 시어머니 될 사람이 와서 “나중에 들어보니까 너희 친정에 빚이 1억이 있다면서? 1억 갚고 시집와라. 1억 안 갚고 오면 내 아들 월급이 그리로 다 넘어가기 때문에.” 파혼할까요, 말까요? 이런 거. 이호선 교수한테 물을 거예요. 상담하면서 물을 겁니다. 그럼 그 교수 답변은 똑같아요. “너 자신을 아끼세요.” 끝.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건 이거에요. 이 현실에서 여러분 발을 뺄 수 있습니까? 못 빼죠. 여러분이 만든 과거에서 자기 자신의 과거를 툴툴 털고 나올 수 있습니까? 말은 거창하게 ‘과거는 사라졌다’ 하는데 과연 과거가 내 마음대로 사라질 수 있을까요?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목자의 양으로 가면서 뭐를 갖고 갑니까? 나의 현실을 몽땅 다 본인이 갖고 가는 게 아니고, 자연적으로 내가 만든 현실을 가지고 주님께서 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솔을 가지고 뭔가 털어내야 되겠죠. 뭘 털어냅니까? 내가 만든 현실을 털어내죠. 털어내면서 변화, 내가 만든 현실에 있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만든 현실에 있다는 그 변화가 되어야 되겠죠. 그것 털어내면서 얼마나 아프게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부르짖음이 두 가지라 했습니다. 부르짖음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나에게서 떨어지는 아픔. 이거 내 건데.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니까 사람들이 부르짖었죠. 이 애굽 땅에서 살고 싶은데 바로 왕이 압제하니까 히브리인들이 부르짖었다 했잖아요.
‘이거 내 환경인데, 과거에 너무 좋았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너 나를 너무 배신했다. 너는 사람도 아니다, 정말.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너를 얼마나 보살폈는데 네가 여기서 이렇게 나오느냐?’ 이게 뭡니까? 부르짖음이죠.
“네가 뭔데 내 현실을 이렇게 뭉개버려? 네가 뭔데? 헤어지자? 헤어지자 하는데 내 손에 죽어라! 네 마음대로 못 헤어져. 나는 너를 죽이고 너도 죽자.” 이래서 정지칼 -경상도 말로 정지칼이고, 표준말로 부엌칼- 들고 달려들죠.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식으로.
결국 이건 뭡니까? 내가 만든 현실은 나 위주의 계산적인 것이었다. 주께서는 참 가혹합니다. 변화되기 위해서는 내가 만든 내 현실의 이러한 진짜 모습을 까발리는 과정을 거쳐서 말씀의 세계로 옮겨놓습니다. 아, 이거 미칠 일이에요. 그래서 기도 안 할 수 없어요. 그런데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내 것, 과거에 내가 익히 알던 친숙한 삶의 불편이 없었던 그 현실을 도로 내놓으라고 부르짖는 그 기도를 하게 만들어요. 응답되겠습니다, 응답 안 되겠습니까? 응답 턱도 없죠.
두 번째 부르짖음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떨어져 나오면서 이 땅이라는 공간, 하늘의 공간을 버리고 이 땅의 공간으로 오면서 있었던 그 아픔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부르짖음입니다. 이게 주님의 눈물로 나와요. 그 대목을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1장. 하여튼 우리 자신이 우리의 원수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 구원을 방해해요. 아주 끈질기게 방해해요,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이.
요한복음 11장 보면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장 1-3절 보면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가 아프다고 해요. 얼마나 친근하게 잘 했던 관계입니까. 오빠 아프다고 전갈을 보냈는데, 그다음에 보면 예수께서 기다리라 해요. 아파서 구원하게 되면 변화가 없어요.
지금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착각하기를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 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랑에 보답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줄 알았어요. 그러면 누구보다도 깊은 사랑의 관계잖아요. 그럼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든 이 사랑하는 오빠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니까 후딱 예수님께서 그 길로 즉시 달려와서 고치고 다른 쪽을 고쳐주는 것이 인지상정, 인간 대 인간의 의리 아닙니까.
그래서 보냈는데 주께서는 계속 죽기를 기다리죠.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절) 하니까 “가자.” 그때 마중 나온 마르다, 마리아가 난리난 거예요. 멱살까지는 안 쥐었어요. 멱살까진 안 쥐었는데 말로써는 참을 수 없어서 예수님을 튕겨냅니다. 그게 마리아인데요.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하는 가정에서 기둥 같은 오빠를 죽게 하셨습니까? 자기가 가짜고 주님이 함께 동행하는 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믿고 진정으로 위하니 그걸로 됐지 않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기둥 같은, 사랑하는 오빠를 죽여줘야 비로소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믿은 게 아니고 주님을 이용했다’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본색, 자기만이 만든 현실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보여주는 그것이 사랑 아니에요? 그것이 주님의 돌보심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네가 오지 못하는 곳에 간다 했잖아요. 그러면 주께서는 뭐냐? 오지 못하는 그 점선이 어떻게 베드로에게 도달되어야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천국에 함께 살 수 있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베드로 자기의 진짜 진면모를 보여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세 번 배신하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많이 배신하고 있죠? 나의 진면모. 내가 이만큼 안 살았으면 몰랐을 뻔했던 나의 이기주의, 이기성, 자기 의. 그게 들통 나는 작업을 밀도 있게 심사숙고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그렇게 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마리아가 닦달 냅니다. “오빠가 죽었는데 왜 옵니까?” 그러니까 일가친척 유대인들이 막 조롱을 합니다. “아이고, 이제 다 늦었는데 끝났는데 왜 오냐? 차라리 오질 말지. 여기서 뭘 더 하는데? 죽어버렸는데 뭘 더해?”
그런데 25절에 보면 주께서 미리 알고 그랬어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죽어도 산다’는 이 대목을 위해서 나사로 무덤까지 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빈정대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39절, “돌을 옮겨 놓으라.” 그다음에 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이 대목이 아주 하이라이트죠.
여러분, 죽은 자가 사람 말 듣습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죽은 자는 못 알아듣잖아요. 그게 상식이죠. 그런데 아까 26절에 보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했죠. 그러니까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은 사람들 보기에는 분명히 죽어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살아있는 거예요.
산 사람끼리 대화 못합니까? 기도 안돼요? 기도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할 때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소유권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네가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개차반 짓을 하든지 간에 내가 보기에 너는 살아있는 거다. 왜? 네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 오늘 제목 바뀌려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한두 번 들은 게 아닙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아, 본인이 성령 안 받았다 소리 안하고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거예요. 주의 뜻은 뭡니까? “알게 되어 있어! 왜? 성령이 있으면 알아, 성령이 있으면. 왜? 성령이 없으면 모르게 되어 있는 말을 내가 했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은 데서 나왔는데 주위에서 말립니다. 39절에, 말려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냄새 납니다.” 여러분, 죽은 지 나흘 되면 믿는 자가 주님 말 못 알아듣습니까? 그럼 죽은 지 400년 되면요? 무덤에서 안 나와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이미 먼저 죽은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주께 이끌려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되어 있어요. 휴거 아닙니까. 그게 휴거거든요.
휴거 믿습니까? ‘휴거 믿습니까?’라는 말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만든 현실 안에서 나는 항상 죽은 자로 드러나라고 내가 만든 현실을 아직도 주께서는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수긍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거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발을 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현실에 대해 우리가 무관심한 것도 싫어요. 내가 만든 기억이고 이 기억은 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간직해야 남한테 자랑거리가 되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게 하신 것이 주님의 더 깊은, 더 넓은, 범위가 큰 사랑에 속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천국 갈 자격조차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말씀을 대할 자격조차 없는 우리들. 자기 자랑거리와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나 안 죽었다고 남들에게 외치고 다니는 저희들. 이러한 지옥 갈 패역한 일까지라도 주님의 사랑의 재료로 삼아주시는 그 큰 사랑을 잊지 말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