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르짖음 260920
예수님의 부르짖음(야고보서 5:4)
예수님의 부르짖음
2026년 9월 20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5:4
(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이 생기면 일단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이 할 수 계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왜 사전에 조치해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해주시지 않으신 것은 모든 인간들이 죄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하나님보고 이래라 저래나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이 삯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은 비록 그 삯을 받는다고 해서 인간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세계가 벌써 저주로 가득 차 있고 그 저주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세계임을 알려주십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아벨은 이미 죽어서 끽소리하나 내지 못하는 처지에서 아벨의 피를 머금은 땅이 하나님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땅이 저주를 낸다?’ 이것 과학적으로 규명이 될까요? 단위 면적당 저주의 양이 측정이 가능할까요?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삯을 못받은 인간이 부르짖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삯이 소리지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굳이 이런 표현을 해야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 자체가 이 땅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사람이 부딛히면 이는 ‘물체에 물체’가 부딪힌 겁니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모두 다같이 땅의 일부인 흙이며 결국 흙으로 환원됩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19-20)
이는 곧 인간이나 인간을 둘러쓴 환경이나 모두 같은 형편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저주받은 형편입니다. 그래서 다같이 썩습니다. 단지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땅이란 피조물의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즉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저주 안에서 만들어내시려고 합니다. 그 최종 방법은 요한복음 1:12-13에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은 따지고 보면 내부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영접한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13절에 의할 것 같으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는 결코 예수님의 영접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권세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찾아주실 때 어떤 식으로 찾아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땅에서 인간 대 인간의 일과 그 가운데 개입하시는 율법과의 만남에서 윤곽이 드러납니다. 레위기 25:55에 보면, “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에서의 땅 주인은 ‘약속’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그저 배역을 맡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부자라는 배역이요 다른 이는 가난이라는 배역을 맡은 자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자는 밭 소유자로 나타납니다. 밭 소유자로 자처하게 되면 그 밭에서 나온 모든 곡물은 자신의 것이라고 오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땅 없는 자에게 돌아갈 몫을 너는 어떤 식으로 전달할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9-10)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하십니다.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땅 없는 자’에게도 곡물이 돌아가도록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맺게하시고 추수가 가능토록 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악마가 집어넣은 독한 마음씨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와 존재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욥기에 나옵니다. 욥기에 나오는 악마는 인간에게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자고 자부합니다. 인간의 ‘자기 있음’은 ‘자기 것’이 있음을 근거로 이해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욥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 있는 것은 일단 ‘내 것’이 있다는 소유에 근거하기에 그 소유만 없애버리면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고 장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재산이 다 날아가도록 악마의 조치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23)
그러자 악마는 욥이 말한 것, 즉 출생할 때의 그 벌거벗은 몸을 공격합니다. 즉 몸이 아프면 제 아무리 욥이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욥이 육신이 해체 절차에 들어가지 그 썩어감에 대해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마귀에 시험들게 허락하신 이유는, 결코 인간의 부르짖음을 인간을 구원해 내지 못함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짖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 23:46) 예수님께서 이 말씀 이전에 자기를 위하여 울부짖는 울음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7-28)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독하게 자기 소유를 붙들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자기 존재와 소유가 벌어지는 것 가지고 울부짖습니다. 그 소유가 돈 일수도 있지만 명예, 지식, 가족, 자기 의로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입니다. 성도는 오직 주님의 울부짖음의 대역자로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는 체념하거나 절망할 권리조차 없음을 알게 하옵시고 주님의 권세의 일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2강-야고보서 5장 4절(예수님의 부르짖음) 26092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4절입니다.
야고보서 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 밭”이라는 것은 부자의 밭입니다. 오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이 부자란 토지 소유자를 가지고 부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토지 소유자에게서 곡물이 생산되겠지요. 그 토지가 자기 거고, 거기서 나오는 곡물이 있으면 그것도 자기 것이라는 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끼어듭니다. “그러면 그 곡물이 다 너의 것이냐? 수고한 품꾼의 삯은 그 곡물 중에서 어느 정도로 차지하느냐?” 그걸 묻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라고 그렇게 되어 있죠? 보통 소리는 사람이 지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삯이 소리를 지른다.’ 어떤 비용이, 값이 소리를 지른다는 표현은 좀 낯설게 보이고 이상하게 보이죠. 사람이 소리 지른다고 해야 하는데 삯이, 돈이 왜 품삯이 소리를 지르느냔 말이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뭔지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뭔가 접근하려고 하니까 튕기는 요소가 우리에게 있죠.
비슷한 예가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서 죽이고 난 뒤 하나님이 뒤늦게 나타나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가인이 “제가 동생이나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니까 10절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한다. 동생 아벨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끽소리도 못 하고 그냥 잠잠히 죽어있죠. 그런데 잠잠히 죽어있는 동생, 말할 능력도 없는 동생을 대신해서 핏소리가 하늘까지 도달된다, 이런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핏소리가 어디에 있는 핏소리냐 하면 바로 땅에 묻어진 그 핏소리에요. 방금 이 대목도 이상하죠? 땅에 있는 핏소리가 왜 하나님과 상통하고 대화가 가능한지 인간에겐 좀 낯설죠.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대목에서 ‘땅이 저주받는다.’ 땅이 저주받는다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이상한 표현인 거예요. 우리가 아는 땅은 SiO₂에요. 그냥 유기물질 또는 무기물이 섞인 거예요.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땅이 그래요. 예를 들어서 흙을 캐서 국립과학원 분석실에서 분석해 보면 “실장님, 분석해 보니까 여기서 저주가 2킬로그램 나오네요.” 이게 가능합니까? “뭐 저주가 나왔다고? 빨리 저주를 측량해라.” “예. 한 2킬로그램 됩니다.” “빨리 없애.” 이런 대화가 현재 인간 사회에서, 현대뿐만이 아니고 과거에도 과연 성립되느냐, 이 말입니다.
과학적 인식, 저는 과학을 종교로 보거든요, 이런 새로운 종교, 과학이라는 종교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땅이 저주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 저주라고 하는 것은 장희빈이 왕후 죽이려고 짚으로 인형 만들어서 활 쏘고 할 때 그게 저주 아니에요? 또 무당이 하는 저주, 저주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느끼고 또 인간이 해소하고 그게 저주인데, 인간이 아닌 땅 자체가 저주를 발산한다?
그걸 측량하고 측정할 수가 있습니까? 어떤 부피로요?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슨 세계에 살고 있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납득이 되고 과학적으로 수긍이 되는 그러한 생활 공간 안에서 ‘이게 진리고, 이게 지식이고, 정보고 이게 전부다. 이것만 하면 충분해’라고, 이렇게 충분하다고 느끼는 우리가 과연 성경의 이 말씀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뭔가 막혀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대해 뭔가 잘못 보고 있고, 안다고 아는 것이 엉터리고 가짜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학적으로 죽고 난 뒤의 삶, 전혀 지금 설명 못 하고 있고요. 그걸 과학적으로 시도한 논문들도 많이 나와 있어요. 나와 있는데 참 가치 없는 것들이에요. 인간의 의식은 죽지 않는다…, 뭐가 어떻고 설명한 글들이 많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왜 죽어요? 죽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뭐 텔로미어 세포가 어떻고…, 뭐든지 과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물체와 인간이 다 같이 똑같은 물체다.’ 간단하죠. 물체, 물질, 이건 인간이나 짐승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19-20).
짐승이나 인간이나 다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에도 나오는 말이잖아요.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흙 자체가 땅이잖아요. 인간이고, 짐승이고, 코스모스고, 해바라기고, 코끼리고, 기린이고, 모조리 다 땅의 일부가 되고 구성요소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길 가다가 가로등에 부딪혔다. 가로등 보고 “너 오늘 나랑 한판 할까?” 이런 돈키호테 같은 사람 봤습니까?
나무도 물질이고 나도 물질인데 물질과 물질의 만남이에요. 관성과 질량에 의해 부딪혀서 혹뿔 난 거예요.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은, 바로 부르짖음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 점이 짐승이나 여타 코스모스나 해바라기와의 차이점이에요. 부르짖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르짖음은 인간으로 유발해서 저주를 뿜어내는 땅에서 –참 신기해요- 억울한 인간의 피가 묻어서 그 피를 보고 -뭐 땅에 눈이 있는지 귀가 있는지- 땅이 그걸 보고 하나님께 대표해서 부르짖는 거예요. “하나님, 이렇게 억울한 피가 흘렀으니 특별한 조치가 있기를 바랍니다.” 뭐 이런 식으로요. 방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좀 이상하게 들릴 텐데요. 이상하게 들리는 이 이야기가 로마서 8장 20-26절까지 쭉 나와 있어요.
그 내용이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묶어요. 하나로 묶으면서 뭐라고 단정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 21절에 썩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모든 것은 동일하게 썩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썩어지고 있는데, 썩어 마땅한데, 썩어야 당연한데 -이것은 과학적으로 누구나 동의하는 거예요- 썩는 게 맞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떤 출현을 하게 되면 썩어짐에서 해방되는 그런 경우가 발생된다는 거예요.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0-26).
인간도 썩어요. 인간도 썩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다가 성령을 부여하게 되면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서 썩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영광스럽게 변환시키는 작업을 썩는 이 땅의 운명 속에 그 작업을 개시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설교의 처음 출발은 뭐냐? 땅! 그 땅 소유주가 과연 누구냐 하는 거예요.
부자는 이 땅, 밭의 소유자가 자기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은 그 인간이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주보를 보면,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나오죠. 그중에 사무엘상 2장 7절에,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땅을 향하여 하나님이 다가오시면서 하실 일을 드러내기 위해 역할을 맡기는데 어떤 사람은 부하게 어떤 사람은 가난한 역할을 맡기는 거예요. 그래서 역할이기 때문에 부자가 밭을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맡은 역할이 그 역할인 거예요.
그래서 주보 뒤에 출애굽기 30장 15절에 보면,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어떻습니까?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할 때 나오는 아이디어와 정의, 합리성,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죠? ‘부자들이니까 더 내야지. 형편 어려우면 안 내도 되고.’ 이런 인간들의 논점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여기서 ‘반세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 보수하고 관리하는 그 당시의 세금 종류인데 쉽게 말해서 성전 앞에서는 가난한 자, 부한 자, 아픈 자, 건강한 자, 어린이나 어른,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왜? 똑같이 죄인이기 때문에요. 오늘 본문을 야고보서 5장 4절을 다시 한번 읽어볼게요.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라는 본문을 대할 때 여기서 한 10명 중 8명은 –그것도 많이 쳐준 것인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억울한 사람이 있구나. 부자가 돈을 떼먹었구나. 일했는데 품삯을 안 주니까 호소할 데가 없어 하나님께 호소하는구나. 그 호소를 하나님이 들었구나.’ 본문을 가지고 전부 다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이 본문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잠복되어 있는 심정이 어떤 심정이냐 하면 이런 심정이에요. ‘하나님 뭐하시노, 도대체. 부자가 노동자의 월급을 떼먹고 안 줄 때 억울한 그 하소연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하신다면 사전에 미리 조치하고 일하시면 왜 안 되는가?’ 10이면 8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안 줬다-억울했다-호소했다, 이렇게 긴 복잡한 절차로 할 것이 아니고, 임금을 떼먹으려고 한다면 꿈에 찾아가든지 천사가 찾아가든지 ‘노동자의 돈 떼먹을 생각했지? 내가 다 보고 있다! 월급이랑 보너스 떼먹지 말고 제때 줘라!’ 그렇게 하나님이 하실 수 있잖아요. 왜 하나님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뒤늦게 찾아오십니까?”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10명 중에 한 2명?
인간은 하나님께 원망하려고 계속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요. 자기가 늦잠 잔 거, 어젯 밤에 잠 오지 않은 것도 다 주님 탓이고, 하나님이 알아서 잠 잘 자게 하면 되는데 왜 잠이 안 오게 만드는지, 관절이 안 좋은 것도 다 하나님 탓이고, 엎어져서 손목 부러진 것도 다 하나님 탓이고, 전부 다 하나님 탓입니다. 그래 놓고는 말합니다.
“도대체 모르겠다, 왜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는지? 왜 능력 있는 슈퍼맨처럼 -바지 위에 팬티 입은- 나타나서 범죄 일어나기 전에 조치하면 될 것을.” 하나님은 슈퍼맨 보다 못하고 뽀빠이보다 못해요. 도대체 일을 왜 그렇게 하는지 교회 50년 다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성경 봐도 모르겠고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거론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요. 죄인 주제에 죄인답게 원망과 불평만 평생토록 하늘 향해 쏘아댈 뿐이지, 따질 그런 자격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조치해 주시는데 어떤 조치를 하느냐 하면요, 그의 육 됨, 그의 죄악 됨을 들춰내는 계기를 만들어요.
죄악 됨을 들춰내는 계기를 만들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서 본인들이 아쉽다고 해서 아쉬운 것만 해결하는 하나님은 우상의 하나님이고,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육에서 영으로 바꿔주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끄집어내도록 유도해 주시는 겁니다.
그게 ‘순간 구원’이 아니고 ‘흐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순간적으로 구원받았다, 땡잡았다, 내 마음대로 살자’가 아니라 흐름을 만들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회개하게 해서 추수한 품꾼에게 “내가 얼마 못 줬지? 미안해. 위로금으로 2만 원 더 쳐줄게.” 해서 삯을 받으면 돈 떼먹은 부자도 지옥 가고, 삯 못 받았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다가 하나님께서 부자를 통해서 삯을 받게 한 그 품꾼도 지옥 가고, 돈은 받았는데 마지막엔 지옥으로 풍덩!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까? 아니죠.
야고보서 5장 4절에, 임금을 받지 못한 억울한 자의 등장에 대해서 이미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복지 기금을 마련합니다. 그래서 사장에게 돈 못 받은 억울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제도를 18세기, 본격적으로는 19세기부터 해왔어요.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영국 등등.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도부터 ‘임금 채권 보장법’이 공표되어 있고요. 2005년도에 무료 법률 구조사업 했고요. 2010년도에 ‘체불청산지원 사업주 융자제도’ 시행했고요. 2015년 소액 체당금 제도 했고요. 2021년도에 체당금 제도가 대지급금 제도로 개편되었습니다. 대지급금이라는 건, 국가가 노동자가 받지 못한 임금을 먼저 주고 나중에 공장 사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법이에요.
순서를 말하면 이렇습니다. 국가가 공장 회계 장부에 임금(賃金) 계정을 따로 설정해서 은행에 예치하도록 만들어요. 임금에 쓸 것을 일반적인 운영 자금으로 쓰지 못하도록 회계 감사를 하는 겁니다. 은행이 협조해서 임금 전용 신용 계정을 만들고 정부는 임금 채권 보장 기금으로 딱 잡아서 먼저 임금을 보장하고, 임금 채권이라고 해서 회사가 부도가 난다든지 문제가 생겨도 임금을 먼저 변제하는 선 변제 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 못 받아요. 내 배 째라고 하면 못 받아요. 그때는 할 수 없죠. 어쨌든 간에 국가와 은행이 협조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체불 임금 없이 추석 보너스도 다 나오게 하면, 국가 도움으로 월급 받은 노동자도 지옥 가고, 국가도 지옥 가고, 은행도 지옥 가고, 꼴 좋죠. 이게 해결책입니까? 오늘 본문 야고보서 5장 4절의 해결책이 그것뿐이겠어요?
하나님의 율법이 어떻게 육적인 인간들, 육적으로 이렇게 억울한 노동자가 없게 하는 조치와 율법적인 조치가 어떻게 다른지를 지금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율법 차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돈 못 받고 있었는데 돈 받고 헤헤거렸다? 안 돼요. 뭐냐 하면, 이 일을 통해서 내가 과연 돈으로 사는 인간인지, 아니면 돈 말고 다른 것으로 사는 인간인지를 분명히 해야 돼요.
여기서 율법을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슬슬 졸음이 오면 곤란하잖아요- 미리 정답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돈 못 받았다. 그런데 돈 받게 되었다.’ 돈을 못 받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돈이 내게 왔다면 그 사람은 육에서 육으로 끝나요. 영이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했던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신약에 있어요. 예수님이 왔을 때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구약 때 율법에서 어떻게 육이, 돈밖에 모르는 육이 –부자뿐만 아니고 노동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영적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율법이 개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어떤 식으로 개입되는지 그걸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구약에 율법을 줬던 그 관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간에게 땅이 있는데 그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벌써 말부터 다르죠? 땅의 주인이 약속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땅의 주인이 약속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레위기 28장에 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품꾼이에요. 땅 주인은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은 전체가 하나님의 품꾼이 되는 겁니다. 25장 55절에 나와 있어요.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벌써 출발점이 딱 정해져 있죠? ‘땅 주인은 하나님이다. 너희는 품꾼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주보 뒤에 나온 말씀처럼, 어쩌다 보니까 어떤 사람은 부자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배역 맡은 거라고 했죠? 그것은 하나의 역할입니다. 부자 되고 가난한 거 전부다 운빨이에요. 하나님이 다 관여하신 겁니다. 돈 번다고 설쳐봐야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 약속의 땅에 땅 주인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으니까요. 땅 주인에게서 생산된 그 곡물에, 육에서 영의 존재로 변하는 요소가 율법으로 개입해요. 개입하게 되면 땅 없는, -품꾼이죠. 일꾼입니다. 땅 주인이 아닌 사람을 말하지요- 땅이 없는 자가 어떤 식으로 순전히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만 소득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땅 주인한테.
땅이 없는데 그냥 노동력으로만 참여해서 곡물이 나왔을 때, 그리고 아예 땅이 없는 사람이 그 부자의 땅에서 생산된 곡물에 접근할 때 그들에게 어떻게 양식이 돌아갔는지를 가진 자들이여, 네가 증명해 보라는 겁니다. 이제 율법이 슬슬 시작됩니다. 이런 율법을 볼 때 여러분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해요.
레위기 19장 9-10절 제가 읽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땅이 없는 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돋보기를 들고 딱 지켜보고 있습니다. 원래 이 세상의 땅 주인은 하나님밖에 없으니까요. 하나님이 땅 주인인데 부자들이 부자 되게 해서 땅을 갖게 만들어놓고, 그 부자의 땅에서 많은 생산물을 추수하게 만들어놓고 그 추수한 것에 대해서 정말 땅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땅에서 생산된 곡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자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실 때 머리 둘 곳 없는 땅 없는 분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 보면, 모든 인간들의 움직임과 질문 자체를 완전히 뭉개버리는, 과학적 질문이나 철학적 질문이나 이 모든 질문을 완전히 뭉개버리고 무의미하게 부정하고 짓밟아버리는 질문을 빌립이 해요.
빌립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질문을 한 번 들어보세요. 요한복음 14장 8절,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경제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하면 잘 산다, 이렇게 해야 좋은 나라 된다, 이렇게 해야 메달 딴다…, 그런 것은 시끄럽고 다 치우고, “우리가 정말 보고 싶고 궁금한 것은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옵소서.” 아주 도발적인 아주 대담한 질문을 해요.
여러분들도 가끔은 그런 질문 해본 적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질문은, 지금 내가 수입이 얼마며, 일가친척이 몇 명이고, 자식이 얼마나 잘 됐으며, 나에게 남에게 내놓을 자랑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일체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빌립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냐’를 찢어버리고 나온 질문이에요. 나는 이렇게 되고 싶습니다, 나는 저렇게 되고 싶습니다, 하는 내가 나를 완전히 박살 내고 하는 질문이에요.
나에게는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 얼마나 착하냐, 얼마나 완벽하냐, 얼마나 잘될 것인가, 행복할 것인가,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거리조차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질문하는 거예요. “하나님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어요, 하나님. 세상에 지진이 나고 태풍이 나고 그런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부도가 나든 관계없고 내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보고 싶습니다. 보여주세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보았나이다”(요 14:9). 이 도발적인 질문, 우리가 성도라면 살아생전 계속해서 이 도발적인 질문을 하고 또 답하고, 또 그 질문이 살아나고 또 답하고,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야 돼요. 만약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요, 내 생각을 해요. 생활이 너무 어렵습니다, 내 몸이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좀 살려만 주신다면…, 이게 전부다 ‘하나님 난 하나님 보고 싶지도 않고요. 잘난 내가 보고 싶습니다. 어서 잘난 나로 바꿔주세요.’ 이런 기도, 이런 부르짖음 외에는 안 나온다는 거예요. ‘내가 투자한 주식이 올라가는 거 보고 죽겠습니다.’ 이런 식으로요.
거기에 대한 답변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요한복음 1장 12-13절입니다. 그러니까 이 답변이 얼마나 어려운 답변이에요?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못 알아봤으면 끝났죠. 다 저주받아야 되는데 12절에 “영접하는자”, ‘사람들이 다 못 알아봐서 영접이 안 되는데 영접한 자가 왜 생기지?’
여기서 질문이 또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돼도 인간은 못 알아봐요. 그냥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하나님이 이 땅을 방문했다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영접지 아니했는데 영접이 돼요. 영접이 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각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내가 하나님의 권세를 가졌다,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권세의 일부다. 하나님 권세 안에 하나의 모퉁이가 나로 새로 지정받았다. 내가 가난하든 부하든 그건 상관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권세다.’ 어떤 권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힘, 권세.
그렇게 하나님이 보고 싶었는데 이미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그러한 행운을 가진 사람, 하나님 안에서 – 우리 자신 이야기에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 힘을 가진 자, 이미 하나님의 권세기 때문에 내 힘이나 내 행함으로는 이 천국 가는 권세에서 발을 뺄 수가 없는 행복, 기쁨.
이 권세가 내 힘으로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 권세기 때문에 사람의 뜻, 그리고 구원 받은 나의 뜻, 나의 행함, 나의 어떤 움직임도 이 권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떤 몸부림을 쳐도 지옥으로 갈 수가 없어요. 이 권세에 사로잡혀서, 이 권세의 일부가 되어서.
지금 돈 몇 푼 못 받고, 이게 문제가 아니에요. “억울합니다. 한 달 월급 못 받았습니다.” 이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육적이에요. 그러면 이게 해답이라면 우리가 부르짖고, 기도하고 호소하는 것은 뭐냐? 영적인 내용을 부르짖는 거예요. “그 영적인 내용을 어떤 내용으로 부르짖어야 됩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모르고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떨어질 때 그 부르짖음이 있어요. 그 고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버리심의 절차, 떨어지는 절차, 그때 부르짖음이 발생하고 그 부르짖음을 경유해서 예수님은 다시 아버지와 합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부르짖음에 초점을 맞춰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떨어졌을 때의 그 부르짖음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집어넣어 주게 되면 그것이 육적인 부르짖음이 아니고 영적인 사람이 부르짖는 부르짖음인 거예요.
그리고 누가복음 23장 46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라고 되어 있어요. 떠날 때 그 부르짖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며 아픔을 갖는 그 아픔 말고 주님이 아버지와 떨어지고 죄인 된 우리와 하나 되어서 도킹할 때 오는 그 부르짖음과 아픔, 그 아픔이 우리 속에 성령을 통해 들어와 버려요.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도대체 뭘 구해질지를 모르죠.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복제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왕의 백성이 되고, 백성이 될 때 그 복제된 관계로 인해 천국 백성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지난 부산 강의에서 제가 했어요. Ctrl-V라 했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언약을 복제해서 그걸 예수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 복제해버리면 동일한 성질의 언약으로 예수님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연결이 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양자됨으로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저주받은 우리의 움직임이나 속성이나 본능은 다 삭제되어야겠죠. 아까 레위기 19장 했잖아요? 아까는 레위기 19장 했잖아요. 이번에는 레위기 23장 22절 보겠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만약에 땅에 떨어진 곡물을 두고 땅 가진 자가 ‘내 것이다, 내 것이다’하고 다 거두고, 그래서 땅 없는 자, 가난한 자에게 몫이 돌아가지 않을 경우에는 율법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부자를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땅 가진 자, 여유 있는 자,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공격하는 하나님의 근거가 나옵니다.
“돈 좀 있다고 하나님이 공격하시면 안 되잖아요”라는 식으로 나올 때 거기에 대해서 공격하는 근거가 욥기에 나옵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복잡해요, 이게! 육에서 영으로 옮기는데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주님께서 일을 복잡하게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께서!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육적인 인간은 도대체 못 알아들어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만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지만, 사람이 제대로 죽을 때는 종교가 방해되고 복음이 필요해요. 복음만이 우리를 제대로 죽게 만들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전부 다 살고자 하니까 성경이 보기도 싫고, 읽기도 싫고, 나한테 별로 필요하지도 않다고 여기는 거예요. ‘내가 요령껏 살면 되지.’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욥기에 보면 욥은 모르고 사탄하고 하나님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와요. 욥기 1장 6-11절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디 갔다 왔나?” “땅을 두루 다녀왔습니다.” “욥 있지? 욥이 믿음이 좋다.” 그 말에 사탄이 싱긋이 웃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 인간에 대해서 제가 잘 알거든요. 인간의 자기 존재는 자기의 소유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사탄이 자신만만하게 인간을 겨냥하면서 규정해요. “인간은 자기의 소유를 통해서 자기를 결정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하나님!”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 소유를 못 버립니다. 이 악마가 악마의 이름을 걸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악마 본인이 말하기를 “내가 인간에 대해서 너무 잘 알거든요!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 있다, 존재 아닙니까. ‘내가 여기 있다, 살고 있다.’ 이게 존재거든요.
“…이 존재는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를 근거해서 ‘내가 지금 살아 있다’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게 인간입니다. 욥이 현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지금 자기 존재가 돈푼이나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존재가 단단하기 때문에 그 여분의 것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나오는 것이 바로 욥입니다, 하나님!”라고 사탄이 하나님을 한 수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보세요. 참 얼마나 이게 영적입니까? 욥이 부자인 것을 다 알잖아요. ‘욥은 부자다. 그런데 때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아이고 훌륭하구나. 복 받아서 더 부자 되었겠지.’ 보통은 이 정도로 끝나는데 욥은 그게 아니고 ‘그것조차 악마가 노리고 있고, 악마가 주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기껏 나오는 그 상황이 부자는 복 받아서 부자 되었다고 하는 그 논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가 알고 있는 한계가 곧 인간이 알고 있는 한계입니다. ‘인간은 착하면 부자 되고 나쁜 짓을 하면 가난하게 된다.’ 이것이 악마의 기준입니다. ‘이것이 악마의 기준이다.’ 그것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그 악마의 기준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평생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 배웠어요.
내가 그냥 있다는 것은 소용없어요. 뭔가 풍성하게 가지고 난 뒤에 ‘내가 있다’가 제대로 실감 난다는 겁니다. ‘내가 가진 게 없으면 이것은 있어도 있으나 마나 하다’는 그게 우리의 본심입니다. 이게 마귀가 설정해 놓은 박스 안에 갇혀 있는 형국입니다. 이게 악마의 생각이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기 소유가 아직까지 그다지 흠집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라는 뜻이에요.
욥기에 그게 나오는 겁니다. 욥이 소유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욥기 1장 16절,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게 1회전입니다. 1회전에서 욥의 이런 고백,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이 내 소유가 아니고, 자식도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이 정도 했으면 마귀가 “졌다, 욥아!” 하고 물러나야 하잖아요. 이게 소설이라면.
마귀가 어딜 겨냥하느냐 하면, ‘내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왔사오니’ 그걸 콕 공격합니다. ‘아, 욥이 아는 게 저게 다 구나. 저게 한계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욥의 그걸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진짜 사는 게 괴롭고 미칠 정도로 육신을 치세요”(욥 2:4-5).
아까 욥이 뭐라고 했느냐? “적신, 벌거벗은 몸” 다른 말로 하면 ‘정상적인 몸으로, 옷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벌거벗었지만 그 몸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기에, 이 몸만 있으면 소유는 까짓거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악마는 ‘걸려들었어, 욥, 걸려들었어’하고 욥의 그 벌거벗은 몸을 공격합니다.
몸이 썩어가요. 그 몸이 썩어갑니다. 아까 본 로마서 8장에서 땅부터 해서 땅의 그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전략, 작전에 의하면 썩어짐에서 해방된다고 했잖아요. 그 기초가 뭐냐? 필히 땅에서 나온 모든 인간은 썩어야 하고 썩는 그것이 내 자리에요. 욥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나왔다는 그것, 아니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에요. 더 내려가야 돼요. 그것은 0이에요. 0보다 -(마이너스)로 내려가야 돼요. 썩어질 몸으로 내려가야 돼요.
욥은 거기까지 못 나갔어요. 악마는 그 약점을 노리고 공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좋아! 욥의 몸을 썩게 해. 하지만 그 목숨은 나한테 달렸다. 너 알지? 목숨만큼은 네 맘대로 못 한다.” 그렇게 하자 드디어 욥기 3장에 보면 욥의 입에서 원망, 원망,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욥 3:1).
‘하나님, 이럴 것 같으면 왜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우리 엄마가 나를 태어나게 할 그때 안 되겠다, 해서 나를 버리게 하지 않고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그동안 욥은 돈으로도 부자지만 정신적으로도 부자였고요, 자기 의(義)도 부자였고요, 지식의 면에서도 부자였고, 건강 면에서도 부자였습니다. 그걸 자기 소유화했습니다.
존재와 소유, 인간은 이것 떨어지면 부르짖습니다. 미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떨어질 때 부르짖었는데 그것은 영적인 떨어짐이고 부르짖음이지만 인간은 내 것, 그게 건강이든 지식이든 자기 의든 자기 체면이든 내 것에서 내 것, 내 존재가 떨어지면 우리는 거침없이 본능적으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영적으로 남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나의 부르짖음을 주의 부르짖음으로 전환되는 방식, 그게 누가복음 23장에 나옵니다. 강의 시간이라면 이 본문은 다 같이 읽어보자 할 텐데 저 혼자 읽어볼게요. 27-28절입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썩어가는 땅의 운명과 함께 너도 썩어야 돼. 안 썩는 것을 왜 당연시하고, 자기가 착한 일 하고 하나님 잘 섬기기 때문에 안 썩는다고 일방적으로 엉터리 해석을 하면서 자기 위로, 자기방어 하면서 살아가느냐, 인간들아! 나 이 예수가 죽었다는 것은 너희 다 죽었어. 너희는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렸어.” 네가 너를 지킬 어떤 권한도 없어요.
더 나아가서 인간은 체념할 권리도 없습니다. 인간은 실망할 권한도 없어요. 시편 42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네 몸이 네 거냐? 아니잖아. 그런데 네가 왜 네 인생에 대해서 체념하고 절망하고 낙망해, 네 것도 아니면서.’
또 소유, 소유. 내 존재는 내 것이라고? 아니지요. ‘썩어야 마땅함, 썩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차다.’ 이거 보여주는 역할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 죽여놓고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시름시름 앓아 죽어갑니다.
“하나님이여, 용서해 주옵소서. 내 죄를 압니다.” ‘내가 후보 사퇴하겠습니다.’와 비슷한 이야기지요. ‘그러나 고자질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하지만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내 죄 때문에 죽어가는 이 아이만큼은 살려주옵소서.” 간절히 금식하면서 기도했어요(삼하 12:15-16).
주님께서 그 부르짖음 들어주지 않습니다. 싹 죽였어요. 아이가 죽고 난 뒤에 다윗이 표정이 싹 바뀌었어요. 아, 하나님의 그 Ctrl-V, 복제가 되는 언약은 내가 회개하고 우는 것으로 끼어들 문제가 아니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그러고 난 뒤에 나의 죄를 알게 한 그 밧세바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밧세바와 다시 관계 맺어서 낳은 아이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의 이름이 ‘여디디아’입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삼하 12:24-25).
이게 바로 나를 썩게 하고 부질없게 만들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그 의를, 장차 올 메시아의 죄사함을 드러내게 하시는 이 절차에 집어넣어 준 이것이 사랑이라 해서 솔로몬의 이름이 여디디아, ‘하나님의 사랑하심,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그 가운데서 이제는 우리 자신이 자꾸 잘남과 내 소유와 나의 우수함이 올라올 때마다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를 위해서 울라’는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늘 현실로 바꾸어지게 하옵소서.” 그런 예수님의 부르짖음이 여러분 속에도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할 맡은 주제에 이것은 내 거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그러한 따짐이 얼마나 마귀적이고 영적으로 문제 있는 것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거저 주신, 어떤 인생이든 하나님의 소유임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