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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위 아래 역대상 21:1 260918설교역대상

광주강의20260918a 역대상 21장 1절(위 아래)-이 근호 목사

오늘은『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73페이지, [40. 다윗의 인구조사]. 왕이 자기 백성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행정 정책을 세우는 데에 기조가 되죠. 바탕이 돼요. 왜냐하면 자기가 백성이 아니고 왕이니까요. 그게 너무나 당연한 정책이죠.

그러나 다윗이 인구 조사할 때 뭐를 몰랐는가 하면, 백성들이 ‘왕국’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윗은 까마득히 몰랐어요. ‘백성들이 왕국을 원한다.’ 왕국이니까 요새 말로 하면 ‘나라’가 되겠죠.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나라에요. 그러나 현재 백성들이 나라를 원해서는 안 되고, 이 백성들이 원해야 될 것은 왕을 원해야 돼요, 왕.

‘왕’은 신약으로 번역하면 ‘그리스도’ 아닙니까. 이 ‘나라’를 번역한다면 ‘천국’이 되겠죠. 하나의 인간이 천국이 좋아요, 예수님이 좋아요? ‘둘 다 좋아요.’ 할 수 없는 게 다윗이 인구 조사했다고 하나님이 다윗을 치는 이유입니다. 같이 겹쳐서 좋아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 안목에.

그런데 인간들은 ‘괜찮은 왕, 훌륭한 왕이 나타나셔서 내가 살 만한 세계를 이루어주신다면 우리들은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뽑을 때, 제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고 있지, 제자들이 나를 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셨어요.

그래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고, 또 다윗 본인도 자기 나라, 왕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마귀도 그걸 알아요. 그래서 사탄이 격동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숫자를 카운트, 헤아리게 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다윗을 비롯해 요압도 마찬가지고요, 다윗의 인구 조사의 취지, 그 결말에 대해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임금님이여, 인구 조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다 지켜줍니다.”라고 요압이 다윗 왕한테 이야기했잖아요. 요압이 이야기할 때 그거 알았겠어요? 인구 조사하면 작살난다는 걸 알았겠어요? 요압은 그것까지는 몰랐어요. 인구 조사하는데 한 칠만 명 죽었죠. 죽었잖아요.

그러면 초반부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역대상 21장이 나오는데 잠시 볼까요? 1절,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1절 이 말씀에 대해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과 악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데 인간이 거기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어요, 없어요? 그 싸움에 인간이 뭘 알아야 끼어들죠. 왜 싸우는지 모르잖아요, 인간은. 인간은 이미 마귀 편이기 때문에 왜 싸우는지를 모른다고요.

인간이 마귀 편이라 해서 마귀를 숭상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숭상하지요. ‘자기한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익으로 돌아올 것인가, 내 것에 대한 손해를 줄 것인가’ 인간들은 평생 동안 거기에 바짝 신경 쓰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세상 모든 일에서 그렇게 걱정하는 내가 빠진다는 그 점에 대해 인간들 중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죠.

얼마 전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이걸 굳이 이야기 안 해도 사람들이 사느냐 죽느냐는 궁극적으로… 주인공이 누구죠? ‘내가 사느냐, 내가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되잖아요. 얼마 전 강의할 때 내가 이걸 수정했죠. 사느냐 죽느냐 이 문제보다 더 큰 심각한 문제가 선택과 결정의 문제라 했습니다. 선택과 결정의 문제.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것은 결과에요. 결정이 아니고 결과의 문제죠.

인간은 결과에 대해서 바짝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네가 무슨 수를 쓰든 서울 가서 성공만 해라. 다 용서해줄게.’ 그래서 돈이 많이 생긴다면 그 전에 어떤 일을 했더라도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요. 이야기가 이걸로 끝난다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돈을 잃는다든지 돈이 없어진다면 용서가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 간다고 돈을 못 벌었습니다. 헌금한다고 거기다 다 바쳤습니다.’ 이게 주위 사람들한테는 용납과 용서가 되지 않죠.

‘사느냐 죽느냐’ 인간들은 이것을 문제라 하는데, 문제를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인생의 짐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정작 짐은요, 내가 매순간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게 짐이 되는 거예요. 차이가 뭐냐 하면, ‘사느냐 죽느냐’는 목숨이 달린 거잖아요. 목숨이 달렸죠? ‘선택과 결정’은 뭐가 달려 있느냐? 목숨보다 인간에게 더 소중한 게 있습니다.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

타짜, 도박하는 인간들은 돈 벌기 위해서 도박한다? 아닙니다. 자기 결정과 선택에 자기가 도박을 건 거예요. 참 묘하죠. 도박하는 사람들이 귀신들린 이유를 알겠죠? 어지간히 돈 벌었으면 털고 일어날 것 같잖아요.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내 운을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에 도박을 건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도박을 건 거예요.

그래서 도박판은 모든 인생의 선택과 결정이 응축된 지점이에요. 응축된 지점이니까 우리가 여기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마귀는 □를 발명했다.’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갈까요? ‘마귀는 게임을 발명했다.’ 게임. 정치, 전쟁, 김정은, 시진핑, 트럼프. 범위가 큰 게임과 시커먼 지하실에 앉아가지고 경찰 오는지 감시하면서 화투장 벌이는 게임과 성격이 똑같아요.

밥을 못 먹는다? 우리 집이 사흘을 굶었어요? 그래서 도박해요? 그럼 편의점에 가서 샌드위치 훔치죠. 도박이라 하는 것은 돈이 없어 하는 게 아니에요. 돈이 없어서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누군가, 내가 어느 정도로 나의 운을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감이 안 잡혀서 도박을 하는 거예요.

도박과 정치, 정권 잡은 사람들이 정치하는 것, 기자회견하고 어떻다, 어떻다 하는 그 사이에 주식투자가 있습니다. 이거는 서민들 하는 거. 개미들 하는 거. 도박은 경찰이 무섭지만 주식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망가질까를 대비해서 월급 가지고는 메꿀 수 없다는 자기 미래가 겁나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정치는 뭡니까? 제일 윗자리에서 하는 정치는 뭡니까? 뭐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건 미쳐서 하는 거죠. 자기의 가치와 의미에 돌아버린 거예요. 정신병자들이에요. 그러니 국회의원들 하는 얘기는 아무말 잔치에요.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말 잔치에요. 그래서 할 일 없고 나이 70 넘어서 은퇴한 사람들은 맨날 그거만 보고 있어요. 누가 이기나?

‘누가 이기나?’ 이게 뭡니까? 누가 게임을 만들었어요? 마귀가 게임을 만들었죠. 그럼 마귀가 인간에게 준 것은 게임입니다. 무슨 게임? 자기의 의와 자존심이 어느 정도 먹히느냐? 어느 정도 통하는가를 실험하는 장소로서 이 땅의 삶을 거기다 비춰보죠.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뭐죠? 실컷 세상 이야기했는데 이제 하나님 이야기해야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 뭡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선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이죠. 도박을 하든, 강도가 되든, 창기가 되든, 세리가 되든, 강도로서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히든 내 인생 자체가 내가 시험하거나 측정할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시간, 세월입니다. 거저 주신 거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뭐가 빠져야 되겠죠? 은혜를 안다면 뭐가 빠져야 되죠? 칠판에 쓴 것 중에 무엇을 빠뜨려야 됩니까? 선택과 결정의 문제, 이걸 빼야 돼요. 이거 스트레스 받거든요. 이걸 뺀다는 건 뭐를 빼는 겁니까? 자기 의를 빼는 거예요. 자기 의를 빼면 나는 이러나 저러나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엄청 받은 사람이에요.

지금 다윗 왕은 자기의 게임을 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누구 나라다? 내 거다. 내 건데 내 것이기 때문에 자기 도박판의 판돈이 되는 거예요. 이 판돈을 어디까지 키울 것인가? 내 거니까 어디까지 내 나라를 굳건하고 창대하게 할 것인가, 도박을 한 겁니다. 도박하게 한 것은 사탄이 그렇게 해서 도박케 했죠.

선택과 결정이죠. 선택과 결정,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쉬는 법이 없어요. 집에서 놀아도 선택과 결정은 쉬지 않습니다. 집에서 한가하게 놀아도. 이게 밤인지 밤 아닌지 그 선택과 결정은 쉬지 않는 법이에요. “저게 밤나무 같은데?” 밤 아니었어요.

우리에게 눈이 있고 코가 있고 듣는 귀가 있으면요, 한순간도 선택과 결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상을 두 자로 설명해드릴게요. 일상의 기분을. ‘초조’입니다. 초조, 다른 말로 ‘불안’이에요. 초조, 불안은 뭐가 누락이 되었느냐? 이것은 은혜로 주신 기쁨이 누락된 거예요. 기쁨이 누락되면 초조와 불안이 자연적으로 찾아오게 되어 있죠.

그래서 여기서 내가 일방적으로 만들었지만, 공식 하나 적어볼게요. ‘기쁨이 없는 이유는 자기를 버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기쁨이 없는 이유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빡빡해요. 초조, 불안 이것은 쫓기는 상태.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자꾸 쫓기는 거예요. 쫓기는 것 역시 자기 가치, 자기 의미, 자기 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이렇게 부지런히 쫓깁니다.

쫓기는 장(場), 영역, field가 ‘게임의 장(場)’이죠. 타짜, 화투 손에 안 쥐어도 인간은 평생을 게임하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 여러분들이 기분 나쁘던가요? 게임에 질 때. 아, 그때 자존심 상해요. 자기가 뭐 하는데 누가 지적할 때, 자존심 상하죠. 자존심 상합니다.

이 다윗의 심보를 다윗 혼자만의 잘못이라 하고 다윗에게 모든 짐을 지우면 안돼요. 사실은 짐 지워야 되겠지만. 왜냐하면 나중에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자기를 포함한 백성들의 잘못을 자기가 대신 짊어지고 제사장으로서 제물을 바치게 되니까요. 그게 역대상 21장 21절에는 오르난 타작마당으로 나왔죠.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모리아 산에서 번제를 드리는데 여기에 제가 아주 간단한 쉬운 질문을 한다면 ‘다윗으로 하여금 오르난 타작마당에 올라가서 번제를 드리도록 유도한 분이 누구죠? 유도한 분? 살살 유도해서 다윗이 거기에 서게 만든 분이 누구죠?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죠.

그러면 2026년 현재 우리의 사는 삶에서 역대상 21장 다윗의 행적이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여러분들이 가지셔야 돼요. 아침에 눈 뜨면 게임하죠. 게임하다가 속상하죠. 게임부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오늘 하루 일과에 뭐 하면 안 되는데. 누구 만나면 어떻게 하지?’ 그게 바로 초조와 불안이죠. 뭐가 날아갔어요? 기쁨, 은혜 다 날아갔죠. 그게 다 날아간 이유가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유.

여유가 없다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면 극구 안돼!’ 이런 뜻이거든요. 내가 잘나야 되는데 내가 흠집나면 안되잖아요. 여러분, 새 차 타보세요. 신경 되게 쓰입니다. 그런데 중고 타보세요. 그것도 탄 지 3년 된 중고 말고, 25년 된 중고 타보세요. 비가 오든 서리가 오든 그거 뭐 신경 씁니까. 안 쓰죠. 어차피 거의 헐값에 샀는데 뭐 좀 고장 나면 어때. 있어도 없는 요량으로 해야지.

차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어린아이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죠.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하늘나라 좋아하지 마세요. 본인부터 달라져야 돼요, 본인부터.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냐?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내가 만들 자격 없다.’ 이겁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내가 만들 자격도 없었다.

여자 같으면 여러분들이 네 살, 다섯 살, 일곱 살 때, 또 남자도 마찬가지로 일곱 살, 여덟 살 때, 어릴 때로 잠시 돌아가 보세요. 일곱, 여덟 살 때 살던 동네 있죠? 그 동네에 기억나는 대로 전경이라든지 주변 어른들, 일가친척, 그리고 동네에서 좀 놀던 형뻘, 언니들 그들이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사는 행복을 느꼈어요, 안 느꼈어요? 느꼈지요.

나 이전에 여러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 그리고 형들 노는 거, 말하는 거보면 어떻게 그렇게 재밌고 웃기는지. 까르르 까르륵. 언니가 입은 모든 옷, 그리고 행동. 언니 책상에 있는 책받침부터 해서 모든 게 어쩌면 그렇게 내가 갖고 싶은 걸 다 갖고 있는지. 그래서 언니 많이 따라다닌 거 아닙니까.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언니, 나하고 놀아줘.” 또는 “형, 나하고 놀아줘.” 형하고 놀고. 또 일가친척 오게 되면 이쁘다고 용돈, 그때는 50원만 해도 큰돈이잖아요, 용돈 줄 때, 야, 기존 세계가 있다는 게… 나한테는 이 모든 것이 은혜로 다가온 그때 그 시절.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상처받는 일이 하나, 둘 퍽퍽 터지죠. 예를 들어서 그렇게 잘 크다가, 우리 집 얘기는 아니고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할아버지하고 김구하고 놀다가 좌파 되어가지고 애가 취직도 못하고 이렇다면 그때는 어린 시절이 지옥 같죠. 어쨌든 간에 대부분 어린 시절은 그리워요. 지난 날 모든 것이 그리워요. 지금은 그리워해도 뭐 없어요. 그 배역, 역할 맡은 사람 다 늙어죽었어요. 이제는 고향가도 내가 놀던 곳 다 개발했어요. 개발해서 거기 펜션 들어서고 하니까 재미 하나도 없어요.

어린아이 특징은 뭐라고 했어요? 나를 둘러싼 환경은 다 거저 주어진 거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환경에 의해서 내가 나 됨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그런 방법이 아니고,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생각하는 환경 속으로 다윗을 밀어붙이는 것. 이건 새로 제가 지어낸 용어지만 ‘환경치료’.

언뜻 생각나는 비슷한 용어로 ‘금융치료’와 비슷하죠. 금융치료 말고, 돈 날려서 인간되는 거 말고, 환경치료. 이 환경치료의 목표는 내가 뭐 되는 겁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고요? 단언컨대 못가요. 주님께서 ‘결단코’라고 했어요. 결단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 수 없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주 마음 단단히 잡수시고 자기 제자들을 어린아이 만드는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환경치료를 시작하는 겁니다. 병 고치는 치료 말고, 환경 자체를 바꾸는 거예요. 그 환경이 요한복음 21장에서는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에게 어떤 환경이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휴대폰 녹음기가 있으면 녹음 딱 해놓고 그걸 무한 반복하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따르르릉~’ 이렇게 알람하지 말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전화 오면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해? 네가 나를 사랑해?’ 이런 전화벨 소리로. 그게 바로 환경치료입니다.

환경치료의 목적은 뭡니까? ‘너는 나에게 아직도 어린애 맞지?’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거예요. 너 어린아이지? 내가 이때까지 장가가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 키우고 한 모든 것이 환경치료에 해당되죠.

환경치료라 하면 무엇에서 벗어나야 돼요? 육으로 살던 육으로 조성된 환경 있잖아요. 아까 했죠? 동네 어른들 다 보고 싶고 그 때 친구들 좋았고 냇가에 다슬기 잡고 학원도 없이 막 뛰어놀고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밥 먹으라 할 때나 집에 가고 하는 그 육, 그 알던 사람들, 친구들, 이런 사람들이 늙어죽거나 내 돈 떼먹고 도망가거나 나를 욕하고 가거나 하여튼 어떤 식으로든지 이 하나하나가 육적인 내가 알던 것들이 날아가면서 나도 동시에 안개처럼 같이 날아가죠.

여기에 대한 또 다른 공식이 하나 나오죠. 인간은 나 위주로부터 시작해요. 나 위주→타인 위주. 내가 기뻐하고 원했고 내가 요구했던 그 타인의 영역에 이게 나라고 같이 끼어드는 식으로 타인 위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 위주는 철딱서니 없는 철없는 아이 시절이고, 사회 생활할 때는 타인 위주에요.

재밌는 현상은요, 우리 딸이 지금 사위와 알고 지내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안사돈, 바깥사돈을 내가 만나볼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재밌지 않습니까? 나만 재밌는가? 저 사람을 내가 왜 알아야 되죠? 뭔가 징검다리 하나 건너왔잖아요. 딸이 결혼 안 했으면 만나지 못할 뻔했잖아요. 히틀러라고 했든 욕을 하든 뭐하든 어쨌든 간에 내가 그 사람을 일부러 만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사돈하고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사돈 좋아서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에요. 그 사돈을 알도록 한 징검다리 되는 아들, 딸 삶에 행복이 깨어지지 않도록, 흠집나지 않기 위해서 친하지도 않은데 친한 척을 하죠. 그런데 둘이 싸워서 이혼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언제 봤냐, 너?’ 하죠.

어떤 집안은 서로 좋게 지내다가 신혼 초에 헤어졌는데 사돈 쪽에서 ‘1억 내놔.’ 했다는 거예요. 마지막은 뭐로 끝나요? 돈 문제로 정리돼요. 돈을 상실하지 않아야 내 인생, 내 게임에서 나는 패배자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제일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짓이 자기 자존심은 세우고 돈은 잃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돈을 잃음은 전부를 잃음이에요. 세상에서는 이걸 거꾸로 알고 ‘돈을 잃는 것은 일부를 잃은 것이지만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건 바보 같은 소리에요.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인간은 죽어도 결국 끝까지 쥐고 있는 건 돈인데, 왜냐하면 돈 지폐 하나하나에 자기의 평생 살아온 수고와 땀과 자존심이 거기에 녹아져있기 때문에. 자식일 경우에만 유산을 남기지, 자식 아니라면 유산 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철저하게 인간은 자기 위주인데 자기 위주가 타인 위주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거예요. 생물학의 진화론에서 이런 주장을 해요. ‘세포 안에 미토콘드리아가 들어있는 것은 미토콘드리아라는 독립된 미생물이 세포 안에서 기생해서 그렇다.’ 이렇게 주장해요. 왜냐하면 핵 속에만 DNA가 있어야 되는데 미토콘드리아 안에 DNA가 있어요. 그게 여자 쪽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그처럼 내가 누구 안에 들어가는 것은 나를 잃어버려서 들어가는 겁니까, 나를 안 잃어버리고 들어가는 겁니까?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나의 타인이라는 장을 형성하는 거죠. 다윗이 인구 조사할 때 나 위주에서 타인 위주, 이것까지 왔어요. 하나님께서는 타인 위주를 어떻게 이동시키느냐? 나 위주→ 타인 위주→?, 남은 것은 무엇이게요? 누구 위주입니까? 누구 위주겠어요? 하나님 위주. 나 위주→ 타인 위주→ 하나님 위주. 다윗 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는 이 절차를 겪어야 합니다. 겪어야 해요.

그럼 나 위주→ 타인 위주 할 때 나는 안 죽죠, 진화론의 주장에 의하면 미토콘드리아처럼. ‘세포 안에 다른 미생물이 들어가서 세포 미토콘드리아를 이루었다. 진화의 과정이 그렇다.’하는데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이 한꺼번에 창조하지. 하루 만에 창조하는데 그런 쓸데없는 기간이 필요 없잖아요.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듯이 살아있다고 하지만….

그럼 ‘하나님 위주’ 안에 나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죽어서 들어갈까요, 생생하게 살아서 들어갈까요? 문항은 두 개인데 되게 어려워요. 죽느냐 사느냐보다 더 힘든 것은 무엇을 선택할지지요.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 어렵죠.

정답을 말씀드리면, 나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타인도 같이 살아가요. 내가 살아온 환경이니까. 아까 어떤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고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죠. 그러면 하나님 위주의 공간, 장은 목표가 있어요. ‘자기 잘난 체하는 인간을 어린아이같이.’

그러니까 ‘하나님 위주’ 자체를 뭐로 만듭니까? 값없는 은혜의 장, 사랑의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주께서 하실 때 이걸 안 죽여요. 그대로 집어넣습니다. 그대로. 나로 둘러싸여있는 동심원, 타인, 나와 타인을 함께 둘러싼 것은 바로 하나님.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주님 안. 주님 안을 하나님 안이 둘러싼다면 원이 네 개나 되죠.

어쨌든 간에 이럴 때 주님께서는 나, 타인 위주로 만들고 이것을 어린아이로 만들 때, 어린아이로 만든다는 것은 나 위주와 타인 위주를 부정하는 작업을 하나님 위주 공간에서 행한다 이 말이죠. 행할 때 여기서 역대상 21장에서 이스라엘 인구가 몇 명 죽었죠? 칠만 명 죽었죠. 칠만 명 죽었잖아요.

빨간 걸로 해볼게요. ‘나 위주’가 다윗이죠. 그럼 타인은? 다윗에게 타인은 누구냐? 백성들이죠. 우리가 편하게 생각해서,
“한 평생은 무엇입니까?”
“한 평생은 살기 위해서 삽니다.”
“그래요? 살기 위해서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한 평생을 뭐하며 살았습니까?”
“돈 버는 걸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죠.

“그럼 돈 벌고 난 뒤에 뭐하십니까? 먹을 만큼 먹고 입을 만큼 입고 살 만큼 살고 누구한테 손 안 벌리고 죽을 때까지 병원비는 있다. 그럼 뭐할 거예요? 그걸로 행복하십니까?”
“아니요.” 단호히, 아니요.
“그러면 처음에 돈 없을 때 돈 있으면 행복하죠. 그게 오래갑니까?”
“아니요.”
“그럼 그렇게 귀한 돈이 생겼으면 계속 행복, 행복, 행복해야지, 또 뭐가 그리 결핍이 생겼습니까? 뭡니까?”
그럼 당장 답변을 못해요. 그걸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이 돈 얼추 있을 때 찾는 것은 ‘대화 상대’에요. 대화 상대. 나 위주에서 타인 위주로 올라갈 때…. 어린애가 자기 혼자 놀면 이건 뭔가 병 있는 거죠. 애가 방학하면 골방에 가서 오빠, 언니, 친구하고 밥 먹을 시간도 잊어버리고 놀잖아요. 노는 게 뭡니까? 혼자 놉니까? 혼자서는 집에 가서 놀죠. 누구를 만나요? 대화 상대죠. 학교 갔다 와서 어린애들이 엄마한테 털어놓는 불만이 뭐냐? “애들이 나하고 안 놀아줘.” “그럼 너 혼자 놀면 되지 않나?” “싫어!” 애들은 이유를 몰라요.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지점을 주목합니다. 먹을 것도 있고 집도 있는데 왜 자살하느냐? 먹을 거 있으면 살이 쪄야 되는데 왜 바짝바짝 말라가느냐? 안 놀아줘. 그럼 너 혼자 놀면 되지 않느냐? 안돼. 왜? 이유를 몰라요. 정신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왜 고독하냐?’ 이것이 정신분석학에서 굉장히 비중 있는 주제가 돼요. 인간은 왜 고독한가? 사람을 안 만나서요? 그럼 군중 속에 있으면 외로움을 안 탑니까? 사람이 있어도, 야구장에 가서 백날 외치며 응원해도 외로워요. 끝나면 외로워요. 자꾸 외로움을 타면서 이것저것 다 해요. 꽃꽂이 모임에도 참석했다가 독서모임도 갔다가. 이건 어릴 때도 마찬가지고요. 학교 가는 것인지 외로움을 덜기 위해 가는 것인지. 학원 가는 것인지 놀 상대를 찾기 위해서 태권도 학원을 가는 것인지. 어린애는 그걸 구분 못하는데, 외로워요.

결혼했다고 안 외롭습니까? 제가 어느 날 사위하고 딸한테 이야기했어요. “아, 너희들 보면 참 신기하다.” 결혼한 지 10년 됐잖아요. “10년 됐는데 아직 둘이 이야기를 하네? 결혼한 지 10년 됐으면 이야기가 다 없어야 되는데.” 이야기 안하고 ‘밥 묵자. 애는?’ 그걸로 끝나야 되잖아요. 아직 이야기를 해요. “야, 신기하다. 이야기할 게 아직도 남아있나?” 잔소리 말고. 잔소리는 일방적이기 때문에 그건 대화라 하지 않고. 아직 이야기를 하네? 참 신기한 일도 다 보겠다.

사람이 행동하는 것, 누굴 만나고 교회 다니고 하는 것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은 뭐냐? 인간의 자기 잘남과 자기 존재 의미와 가치는 혼자서 ‘난 잘났다.’ 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성립 안 되고 그 말을 누가 들어줘야 돼요. 이것저것 대화 상대가 없으면 기도해요. 철야 기도해요. 하나님, 이 원통함을 들어주소서.

그래서 학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뭐냐? ‘나는 타자, 남을 원한다.’가 아니라 ‘남이 있기 때문에 남과 대화되는 조건 하에 그게 나다.’ 그게 나에요. 왜 남을 찾느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그래요.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내가 다시 그 타인에게 가서 “드디어 여러분들이 원하는 그런 내가 되었지롱? 그러니 놀아줘요.” 어른들 노는 것도 노는 거잖아요. “같이 이 모임에 끼워줘요. 놀아줘요.”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 합기도 학원을 하든 뭘 하든 간에 무조건 칭찬해야 되지, 애를 거꾸로 세워서 죽으라고 군기 잡고 그러면 안돼요. 다른 애들 질서 잡으려고 애를 본보기 삼으면 안 되고, 칭찬을 해줘서 애가 집에 책가방 던져두고 학원으로 쫓아오도록 해야 장사가 되는 거예요. 존재감이 나타나니까요. 나를 알아주는 것, 나는 나의 장, 나의 field를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과 못 떨어지게 해요.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사실은 백성 다치지 말라는…, 내 대화 상대, 왕으로서의 내 입지를 알아줘야 될 타인이 있어야 내 존재가 각인되고 확인되잖아요. 나를 알아줘야 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갔을 때, 주님께서는 이 둘 다, 나와 타인을 제거해버리는 거예요. 둘 다를 제거해버립니다.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둘 다를 제거하죠.

제단을 쌓을 때, 역대상 21장 23절에 “오르난이 다윗에게 고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이렇게 했죠. 그럼 소는 무슨 죄가 있어요?

하나님의 장은 교체 작업이죠. 소위 기존의 세상, 육의 세계에서 구성된 나를 없애버리고 하나님을 대화 상대로 삼는…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믿어요. 요압도 믿고, 다 믿어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왕이고 하나님 백성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거고. 하나님 쪽에서의 대화 상대는 아니에요. 하나님의 대화 상대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듯이 일의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경로가.

야곱이 밤에 잘 때 꿈에 사다리가 나타났죠. 사다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존재가 누구죠? 야곱입니까? 야, 재밌겠다,하고 자기가 놉니까? 하나님 쪽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잖아요. 그리고 야곱이 얍복 강가에 있을 때 야곱이 ‘야, 천사 만나야 되는데.’ 이랬습니까? 천사가 알아서 찾아왔고,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타자, 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밀어내려고 했죠.

‘이건 나를 죽이는 게 분명하다.’ 좀 죽으면 어때서 그렇게 안 죽으려고 야곱이 애쓰다가 결국은 죽었다는 표시로 절뚝거리는 다리로서 ‘나는 이미 야곱으로서는 죽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으로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작동하고 작용하는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이렇게 죽은 데서 살려냈다.’ 그런 식으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주님께서는 소를 죽임으로써 결국 누구를 죽인다? 소를 죽인다는 말은 “다윗아, 너를 죽인다.” 그러니까 간단한 문제에요. 내가 죽으니까 그동안 내가 의존했고 나를 외롭지 않게 했다는 이 타자도 어떻게 돼요? 내가 죽으니까 타자, 이것도 같이 일종의 환상처럼 날아가버리죠. 환상.

‘아, 내가 나 되기 위해서 환상들을, 유령들을 끌어 모았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는 게, 그 형들, 오빠, 누나들, 그리고 내 친구들 전부다 자기 인생 바빠요. 괜히 ‘저 사람들은 나를 도와줄 거야. 저 분은 나와 친하게 지냈어.’ 그건 일방적인 자기 생각이고. 그들은 그들의 또 다른 여집합(餘集合, complementary set)이 있다고요. 집합(set).

여기 ‘나’가 있으면 나에 동그라미를 치잖아요. 그러면 어떤 남이 있다. 나는 이 사람과 함께 했다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그 형은 다른 동그라미와 겹치는데요? 나만 챙긴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죠. 자기가 태어나고 난 뒤에 엄마가 임신해서 동생 낳으면 형이 화를 내는 이유가 뭡니까? 화를 내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왜 내 허락도 없이 동생을 갖느냐?” 내 허락도 없이. 동생 낳는 것은 투표해서 낳자는 거예요.

나폴레옹이 처음 전쟁할 때, 귀족 장교들이 다 죽어서 없는 상태였어요. 프랑스 혁명 때문에 장교들이 많이 죽었거든요.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휘관이 있어 전쟁하는 게 아니고 군사들이 거수로 투표해서 전쟁하는 거예요. 전쟁이 될 리가 있습니까? 초장에 대패했죠.

이제 나라에 대통령이 있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죠? 맨날 투표하다가 볼 일 다 볼 수 없잖아요. 대구서 광주까지 기차 놓을까요? 투표합시다, 전국민 투표. 그 권한은 누구한테 위임하잖아요. 바로 그게 인간이 주님을 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살던 국가를 원하는 거예요. 왕을 원한 게 아니고 왕국, 천국을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천국은 어때요? 환상이에요. 내 위주로 되는 가짜에요.

그런 내 위주를 주께서는 번제물로, 천국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식으로. 천국이 찾아오니까 십자가가 찾아온 거예요. 십자가하고 만나니까 누가 기다려요? 천국이 기다리는 거예요.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돼요? 이미 나는, 가치 있는 나는 죽은 자가 되고, 모든 것이 은혜가 되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아는 어린아이같이 되죠.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을 연재로 해서 주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60918b 역대상 21장 1절(위 아래)-이 근호 목사

76페이지, [41. 에덴과 천국]. 에덴은 인간이 추방된 곳입니다. 추방된 곳이기 때문에 인간은 들어갈 수 없어요. 그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지키는 천사가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가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드디어 (에덴에) 없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가 에덴동산에 있거든요. 에덴동산에 인간이 접근 안 되니까 인간에게 영생은 물 건너 간 거예요. 빠이빠이에요. 끝났어요. 인간은 영생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 인간을 만들 생각입니다. 새 인간을. 새 인간을 만들 때 영생을 집어넣은 상태에서 영생이 있는 환경 조성을 하면서 새 인간을 만든다면, 영생 자체 쪽에서 움직여야 되죠.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으니까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천국 백성으로 삼겠다는데 그 원형, 모델이 있어요.

그 모델이 바로 이겁니다. 이건 인간들이 상상도 못한 건데요. ‘하나님께서 사람 되다.’에요. ‘창조주가 피조물 되다.’ 아, 이거는 그냥 하나님이 만들면 되는데, 안 만들어요. 하나님이 사람 되게 하시는 거예요.

창조주가 굳이 피조물 될 이유가 없다고 이미 마귀와 한 패가 된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될 필요가 없다는 그것을 구약에서는 ‘우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요한일서에서는 이걸 굉장히 강조해요. 하나님이 사람 될 필요 없다는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적그리스도’라 해요.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의 그 정의(개념)는 “하나님이 사람 된 것을 부정하는 자는 모조리 다 적그리스도다.” 그렇게 말합니다.

인간 입장에서 죽어서 구원 받아 천국 가면 되지, 이런 복잡한 내력까지 굳이 알아야 되냐, 뭐 이런 생각 들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뭘 하든 사랑의 하나님이 날 구원하면 나는 그것만 원한다.’ 이런 조로 나간단 말이죠, 인간들은. ‘하나님 내부에서 무슨 일을 하든 난 모르겠고. 나 천국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분명히 얘기해주세요!’ 그것만 생각한다고요, 그것만.

그것만 생각한다는 것은 제가 아까 처음에 얘기한 인간에겐 영생이 물 건너갔다는 사실, 인간은 넘봐선 안 된다는 것,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안 된다는 거요. 인간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 그걸 의도적으로 자꾸 반박하는 게 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마귀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어요. ‘나 천국 보내줄 거예요, 안 보내줄 거예요?’ 이런 소리하는 게 바로 마귀 생각이에요.

안 된다니까! 몇 번 이야기해요? 안 된대요! 안 되는 거예요. 영생은 없는 거예요. 영생은 없어요. 영생이 뭐냐? 영생이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창세기 2장 말고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영생이란 인간을 내어 쫓은 상황’. 이것이 영생이죠. 내어 쫓은 상황이 영생이에요. 이러면 좀 분명하죠. ‘아, 내가 빠져야 영생이 영생답게 되는구나.’ 딩동댕! 전국 노래자랑은 아니지만. 영생에서 내가 빠져야 영생이 영생으로 빛이 나는 거예요. 그 고유의 값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를 만듭니까? 루터라는 영국 성공회, 합동측, 침례, 합신, 뭐 많죠. 고신측, ‘정동수 목사는 이단이다’ 결의하고, 합동측도 결의하고 이렇게 하는 것. 그게 막 유튜브에 올라와 있거든요. ‘JYP 박진영은 이단이다. 집회할 때마다 무려 3천 명이 모이는데 박진영은 이단이니까 가지 마라.’ 이거 뭐 제2의 김성수 목사인가? 지금까지 강의를 3천 회 했대요. 모인 숫자가 3천 명씩 모인다는 거예요. 이단이다, 뭐 삼위일체에 문제가 있다, 뭐 어떻다 저떻다,… 그런 비판을 왜 합니까? 어차피 못 갈 거.

어차피 천국이란 뭐다? 영생이란 뭐다? 천국은 인간을 내어 쫓은 상황이 천국이에요. 인간을 내어 쫓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말씀에 의하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인간에게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 된 그 분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신 그 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있지, 나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에요.

그 쉬운 예가 바로 노아 홍수 아닙니까. 제가 부산강의에서 했죠. 부산강의 때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홍수 날 때 노아 텃밭 어디 갔냐고 물었죠. 노아 텃밭하고 텃밭의 채소가 홍수 날 때 어디 갔습니까? 물에 쓸려갔죠. 없죠. 텃밭이 없다는 말은 노아도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다고 치고 방주 안에 들어간 거예요. 방주. 방주 안, 요새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

신약에 ‘성령 안’이란 육이 없으면 설명이 안돼요, 설명이. 인간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한다,가 아니라 인간이 없으면 설명이 안 된다니까요. 반드시 인간은 끝까지 마귀 편이 되어줘야, 악령 편이 되어줘야, 악령이 있어줘야 성령의 세계가 설명이 된다고요. 주께서 그렇게 하세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육신이 그냥 멀쩡한 육신이 아니고 뭡니까? 죄 있는 육신이라고 규정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8장 한번 봅시다. 로마서 8장을 보고 고린도후서 5장도 한번 보고요. 8장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죠.

인간은 죄를 몰라요. 인간은 자기 정당성을 끝까지 사수하기 때문에, 잘못한 것은 인정해도 내 자체가 죄라는 것은 때려죽여도 인정 못해요. 죄가 되어버리면 무엇이 합당하냐? 주의 저주가 정당화되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죄인이 되어버리면 우리를 지옥에 보내고 나를 지옥에 보내는 주님 하시는 일이 정당해져요.

그러면 그걸 찬미하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피조물의 도리 아닙니까. ‘피조물 된 내가 어떻게 되느냐?’하는 그것은요, 신경 뚝 끊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그걸로 족하면 안 되겠어요?

제가 지난 주일 낮 설교에서 했죠. 임금님의 혼인 잔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임금님과 아들이에요. 그러면 ‘하필 시간 타이밍이 내 장가가는 날과 딱 겹쳤다. 그래서 참석 못한다.’ 그게 정당합니까? 예를 들어 기린 예식장 11시 예식인데, 자기도 그때 3층에서 결혼식이에요. 3층에서 식 시작하자마자 “나 오늘 장가 안 간다. 우리 임금님 아들 장가가는 날이야.”하고 내려오겠어요? 안 내려오죠.

주님께서 왜 그렇게 비유를 드셨을까요? 과연 인간이 자기 정당함을 가질 가치가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에서 ‘나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걸 요구할 권리조차 인간에게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지옥 보내는 그것도 주께 정당하고, 나를 천국 보낸다는 그것도 주님이 정당하다면, 그 정당하신 분의 고유 선택과 고유의 결정을 우리는 찬미해야 돼요. 존중해야 되고. 주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야죠. 그게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되죠.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팔순 잔치다. 팔순 잔치에 “어머니, 오래 사세요.”하고 맛있는 음식 준비했는데, 철없는 손자가 “엄마, 왜 소고기 갈비는 맛이 없어?” 이렇게 할 정당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지금 거기 차린 모든 음식은 누구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어머님 생신을 위해서 준비된 건데, 왜 자기가 맛이 있고 없고 끼어드냔 말이죠. 우리 인생이 맨날 그래요. 철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우리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든 어떻게 파괴되든 그것마저 주님의 소유기 때문에 주께서 알아서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찬미해야 되잖아요. 지난 수요설교에서 시편에 나온 것처럼. 시편 24편 1절,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모든 것은 누구 소유라 했습니까? 우리 주님의 소유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게 틀린 거예요?

왜 자꾸 살면서 딴 생각, 특히 내 생각을 왜 그리 자꾸 하는지요. 그럴 때는 다시 근원부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어떻게 시작했는가 처음 자리로 다시 돌아가 봐야 돼요. 죄라는 것은 인간이 죄 속에 있지, 인간이 죄를 아는 게 아니에요. 그냥 죄가 인간을 붙들고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 못 죽여서 환장한 게 아니에요. 죄가 그렇게 한 거예요, 죄가.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한 것은 누가 했다? 죄가 했고. 사도 바울이 행동한 것도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자기 안에 죄가 그렇게 행동을 했다는 겁니다.

죄라고 하니 뭐 나쁜 짓한 것만 생각해요? 아니에요. 아까 무화과 열매주시고 껍질째 잡수라 했는데, 무화과 열매보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주께서 시장해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했는데 아직 때가 안 된 거예요. 그러면 잘못은 누가 했습니까? 때를 잘못 고른 우리 주님이 잘못 아닙니까. “아이고, 참 내 정신 봐.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아니구나.” 이래야 되는데, 아니 때도 아닌데 무화과나무 열매 없다고 누구를 저주해요? “너는 영원토록 열매 맺지 마라!”

이거는 꼭 그거 같아요. 아브라함 아내 사라를 건드렸다가 아비멜렉 추장의 온 집안이 임신 못하게 된 거랑 똑같은 거잖아요. 그때 제자들이 놀랐어요. 누구 잘못이냐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피조물은 잘잘못을 요구할 어떠한 입장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주께서 열매 구할 때 열매 없으면 열매 없다고 저주를 내리는 것도 주님 자신의 몫입니다.

여러분 이제 부자들이 지옥 가는 이유를 아시겠죠? 이제 부자들한테 기죽지 않을 이유가 생긴 겁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렵잖아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바늘구멍보다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거예요. 자기 몸집은 낙타보다 더 커서 다이어트 안 한 몸집 큰 낙타가 되어가고.

그러니까 이 부자를 보고 부러워해야 돼요, 측은히 여겨야 돼요? ‘아이고, 저리 망가지는구나. 세상에, 이혼하면서 2조 5천억이 뭐야?’ 이런 거. ‘세상에, 위자료만 2조 5천억이다. 세상에.’ 못다 쓴다,가 문제가 아니고, 관심사가 거기 있다는 자체가 자기 운명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죄를 짓지 말라는 것도 지옥 가는 거예요. 죄가 나를 자꾸 죄짓게 하는 게 아니고, 죄가 나로 하여금 자기 의를 지키게 해요. 자기 의를 못 놓게 만들게 하죠. 이게 죄죠. 나는 뭐 교회 안 나가도 죄 안 짓는다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게 있다는 것이, 죄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죄가.

자, 고린도후서 5장 한번 봅시다.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되어 있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이 어떤 형상이냐? 그걸 이번 창세기 수련회할 때 했어요. 고린도후서 3장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여기 ‘저’가 누굽니까? 주님이죠.

모세가 이미 한번 보여준 그 영광, 해같이 빛나는 모세 얼굴. 그 영광. 수건 가리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잖아요. 변화산에서의 모세, 엘리야도 해같이 빛났잖아요. 그거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왜? 우리가 지금 안 죽고 있기 때문에 썩은 육신 가운데 그걸 못 보고 있는데 나중에 육신을 벗어버리면 곧장 우리는 해같이 빛날 겁니다. 해같이 빛날 거예요.

문제는 그 전에 조건이 새로운 피조물 되었느냐는 거죠. 새로운 피조물 되었느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새로운 피조물 되고 싶어요!” 이렇게 나오겠죠. “그 새로운 피조물 되고 싶어요. 어떤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조건을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다 들어줄게요. 무화과나무 뿐 아니라 뭐든 다 할 테니까 그저 새로운 피조물, 해같이 빛나는 피조물 되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그런 것들 기대하겠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냐? 두 개를 구분하면 돼요.
1.열심히 살자. 이거 아닙니다.
2.위-아래 보고 살자.
‘위 아래, 위 위 아래’ 하는 노래 있잖아요. 위 아래, 위 위 아래. 다윗부터, 모세부터 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인들의 특징이 뭡니까? 위 아래, 위 위 아래. 전부다 두 층을 보고 살잖아요. 두 층을.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위는 뭐 죽어봐야 알지, 이게 아니고 벌써부터 위 아래인데,이 위가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씀의 세계. 말씀을 지키는 세계가 아니고, 말씀으로 완성된 세계에요.

위 아래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서술, 또는 계시 구조에요. 요한계시록 1장부터 끝장까지 위 아래, 위 위 아래, 자꾸 바꾸어서 이야기해요. 그것과 비슷한 것이 뭐냐 하면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인데요. 성경 좀 보겠다고 마음먹고 보면 초장부터 짜증이 확 올라오죠. 아니, 남쪽 왕 이야기 쭉 하고 북쪽 이야기 따로 하면 되는데, 북쪽 갔다가 남쪽 갔다가 위 아래, 위 위 아래 자꾸 대비를 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지식으로 좀 알아서 구원받으려는 사람은 이거 뭐 남쪽 왕 외워야 되고 북쪽 왕 외워야 되고. 그리고 또 북쪽 왕 이름은 왜 동일한 게 많은지. 요아스도 두 명이고 여로보암도 두 명이고. 왕 이름이야 얼마나 은혜롭게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했는데 하는 행동 보면 완전히 엉망이죠.

왜 자꾸 교체가 되느냐. 요한계시록에서 ‘천국 이렇습니다. 지옥 이렇습니다. 끝냅시다.’ 이렇게 하고 지옥 편, 천국 편 나누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자꾸 교체를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육이 된 우리가 국어 시간처럼 이 땅에서 언어를 대하고 언어생활하면서 익혀왔던 시간 구조를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고, 삽입시키기 때문이에요.

위에서 위 아래, 위 위 아래 하면서 끊어내요. 우리의 시간 흐름, 이해의 흐름을 끊는 이유가 우리의 이해는 내 자아라는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 이렇게 스케줄 잡아서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 이 말이죠?’ 그것을 위 아래가 끊어버려요. 사실은 매일같이 반복돼요, 위 아래가.

이것은 광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도 마찬가지고요. 이 땅에서 실컷 고난 받고 “나 안 해. 안 해.” 이러고 있으면 하늘에서 또 계시 보여주고. 위 아래, 위 위 아래 계속 되잖아요.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계시죠? 아래 아래 아래 아래…, 하다가 3년 있다 위. 아래 아래 아래 아래…, 하다가 수련회 때 위. 또다시 수련회 마치고 아래 아래 아래 아래… 그래도 괜찮아요. 어쨌든 위가 안 빠지면 돼요.

자, 아래를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1번, 2번 할 때? 1.열심히 사는 것. 참 위험한 일이에요. 열심히 사는 위험한 일이 어디 나오느냐? 바로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못가에서 진짜 열심히 산 사람 나옵니다. 그것도 38년 동안 열심히 산 사람 나와요. 누구게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동안 1순위로 물 위에 뛰어들려고 애썼던 병자. 병든 사람. 38년 된 병자에요.

그 세계는 아예 양보도 없어. 덜 아픈 사람이 도리어 먼저 나아버려요. 자기는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베데스다는 자비의 못이죠. 예수님께서 그 말씀할 때… 주의 자비죠, 거저 주신 은혜, 공짜로 병 낫게 하는 자비. 사람들은 여기다가 뭐를 덧붙입니까? 자비 플러스(+) 먼저 뛰어든다는 행함.

내가 남보다 먼저 뛰어드는 게임이 여기 또 나오네. 마귀가 만들어준 게임. 경쟁이 또 나와요. 행함. 행할 때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자처해서 뭘 집어넣어요? ‘연못이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 것을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믿음을 이 행함 속에 집어넣어서 뛰어드는 이런 구조로 병 낫는다. 열심히 산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결과로 왔을 때, 이 38년 된 병자가 나았잖아요. 그래서 이야기 끝났어요? 38년 된 병이 나았으니까 거기서 이야기 끝났습니까, 더 이야기가 남아있습니까? 남아있죠. ‘병 나으니 뭐하냐. 율법 자체에서 벗어나야 되지.’ 그게 바로 뭐냐? 병 나은 사람에게 뭐를 들고 가라 했어요? 담요. 어떤 날에? 안식일 날.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자가 되고 몸 건강한들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율법은 우리에게 뭘 주는데?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가 주어지는데요. 주님께서 우리를 다 생각해서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신 거예요, 생각해서.

우리는 병 낫고 돈 있으면요, 여기 성경 모임 안 옵니다. 지금 보세요. 우리만 있잖아요. 광주 시민 안 오잖아요. 안 온다고요. 안 오는 게 아니고 못 오죠. 마귀가 놉니까? 마귀가 안 놀거든요. 주님과 마귀의 싸움 중에 마귀는 주님을 알아요. 못 오게 만들어요.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마귀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마귀 본인은 이미 버린 몸이고. 따라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이미 인간의 정신을 쥐고 있는 마귀가 이 복음을 듣게 할 리 있겠어요? 그 대신 종교를 만들죠. ‘믿음으로 열심히 행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풉니다.’ 이렇게 연결 짓도록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38년 된 병자가 먼저 못 들어가서 병 못 고쳤는데, 들어가면 자비를 받아 병 고침 받습니다. 여기서 결과가 나왔는데, 병이 나으면 누가 나았다는 말입니까? 누가? 누가 나았어요? 내가 나았죠. 나는 이런 서클, 이러한 구조에서 사라졌습니까, 그대로 있습니까? 그대로 있잖아요.

자기 부인 안 되잖아요. 안 되죠.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거 없어요.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고, 의도적으로 그 당시 안식일에 노동하면 저주받는다는 그런 인간들의 장에서 담요 들고 달려가게 만들었죠. 요즘 말로 하면 발가벗고 담요 하나 걸치고 달려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얼레리 꼴레리, 하죠. 저 봐, 저 봐, 저 죄인 봐! 안식일에 노동하면 안 된댔는데 저거 봐. 저주받기로 작정했잖아.

여러분, 예수님 알아서 이미 영생 얻었으면 저주 좀 받으면 어때요? 그래도 남는 장사 아닙니까? 남는 장사잖아요. 이미 새로운 피조물 되었으면 옛 육신이 좀 망가지면 어때요? 아프죠? 참, 아프면 안 되겠다. 그때는 대일밴드 붙이고 후시딘 바르세요. 자꾸 나를 살리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자꾸 내가 열심히 살 필요 없고요. 위 아래, 하지 말고 위를 한 번 더 넣읍시다. 위 위 아래, 위 아래, 위 위 아래. ‘참, 나 살았잖아.’ ‘나 엉망이다, 인생.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참, 나 살았잖아.’ ‘아이고,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 미친 것도 아니고. 맨날 왔다갔다 해요. 맨날. 맨날 왔다갔다 하는 것만 해도 세상에, 그게 어딘데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어떤 자인가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옵니다. 6장 2절은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중요하기 때문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올려야 돼요, 물음이니까.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이거 딱 하고 유튜브 보세요. 이재명 기자회견하는 거 보고. 한동훈 하는 것도 보고. 새로운 피조물의 안목을 가지고 알아야 육이 보이는 거예요. 아까 제가 설명했습니까. 영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영을 설명한다? 육을 통해서 설명하죠. 육과 견주어서 영을 설명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은 다 망상이니까. 아까 망상이라는 이야기했죠.

여기서 공식 하나 들어갑니다. 크게 써야지. 크게 쓴다고 안 잊어버리는 건 아니겠다만. ‘말씀이 빠져버리면 내가 들어간다.’ 말씀이 빠져버리면 거기에 내가 들어가요. 말씀이 빠지면. 거기에 나만 달랑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초조와 불안, 염려, 걱정을 몰고 들어가요.

아까 배운 것 복습하듯이 해봅시다. 내가 들어가면 초조, 불안, 염려, 걱정 같은 것들이 들어오죠. 내가 들어갔다는 말은 타인, 나를 인정해줄 타인들을 실망시키거나 섭섭하게 하면 나는 이 땅에서 외로워 못 산다는 고독 문제. 아까 제가 설명을 안 드렸구나. 고독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나를 나라고 하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제공할 타인이 내 곁을 떠날까 싶어서 붙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타인은 망상이다. 왜냐하면 타인이 있다면 아까 동그라미, 집합 이야기했죠. 타인이 있을 때 내가 원하는 타인은 나와 동그라미가 걸쳐 있는데, 이 사람은 다른 친구도 많다고요. 인간은 내가 그 타인을 볼 때, 내가 준 것, 내가 친절했던 것, 내가 잘해준 것만 회수하는 식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곡해해서 타인을 이해해요. 곡해해서 타인을 이해합니다.

세계 정치사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요.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주변에 영국이라든지 독일에서 프랑스 영웅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특히 베토벤 교향곡 제5번 <황제>. 원래 제목이 ‘황제’가 아니고 ‘황제 나폴레옹’이에요. 그런데 나폴레옹이 베토벤 나라에 쳐들어오니까 실망해서 원본을 지우는데 ‘나폴레옹’이 안 보이도록 지우고 ‘황제’라는 것으로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나 BTS 좋아해.’, ‘나는 화사를 좋아해.’, ‘어떤 가수를 좋아해.’, ‘배우를 좋아해.’ 할 때, 그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그것을 박아놓고 그걸 회수하면서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당신은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면 안 돼.’ 이 원칙이 부모 자식 간에도 여지없이 공식처럼 작동합니다.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경상도 말로 하면 “너 키운다고 반티 장사했어. 비바람 부는 데도 하고 노점상한다고 발로 차이면서도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키우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내가 그렇게 싫다고 하는 그 여자하고 결혼해야겠나?” 그래서 김장할 때면 김장 김치 싸대기 날리죠. 김치가 휙 날아가서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얼굴을 감고 벌겋게 된다고요. 철썩!

그래서 누가 그걸 죄라고 하면 “뭐 죄야? 내가 자식 키우기 위해 이만큼 애썼는데. 그것도 네 아버지 죽고 나 홀로 키운다고 얼마나 애썼는데 이만한 권한 있지.” 이러는 거예요. 그런 거 보면 유튜브에 ‘혼인하고 시어머니 만난 지 사흘 만에 이혼했습니다.’ 이런 게 막 떠오르는 거예요.

자, ‘에덴과 천국’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천국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 그림은 로마서 14장에 나옵니다.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아멘.

성령,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 같기 때문에. 성령이 기체라면 우리는 고체기 때문에 기체를 소유화시킬 수 없어요. 성령의 영향은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령을 내 소유물로 붙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활동하지만, 성령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죠. 탄식하면서 우리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언급할 때 ‘내가 성령을 떠나지 않는 방법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떠나고 자시고 할 권한이 성령 앞에서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고 베드로, 요한 제자들에게 찾아오는 그 찾아옴을 제자들이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게 사랑의 위력이죠. 그냥 덮치니까. 눈이 오는데 눈 오지 마라 한다고 함박눈이 “알았어요.”하고 다시 돌아가는 법 없잖아요. 사랑은 그냥 찾아오는 거예요. 찾아왔기 때문에 ‘사랑을 가졌다. 사랑을 소유했다.’가 안 되고 ‘사랑이 나를 소유했다.’ 이렇게 돼요. ‘사랑이 나를 덮쳤다.’ 이렇게 되어야 돼요.

성령이,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 나를 덮친 거예요. 덮치면 그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성령이 덮칠 때는 말씀의 세계를 가지고 덮치거든요. 말씀의 세계로 덮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난 모든 것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기록된 성경말씀과 연관해서 우리에게 일이 일어나요. 그게 아주 신기해요.

그 신기한 것이 아까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성도는 세상 일을 판단한다. 천사조차도 판단할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판단을 어떻게 하는지 한번 해볼까요? 고린도전서 7장, 이 판단은 좀 주저되지만 그래도 성령께서 성경대로 판단하니까 어떻게 판단하면 되느냐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대로 판단한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안 되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7장 29절에서 32절까지.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리나라 판소리에서 중요한 것 끝나면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북을 쿵, 탁 치면서, 얼쑤! 또는, 그렇지! ‘얼쑤!’ 이렇게 고수가 장단을 맞춰주잖아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얼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얼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얼쑤!

이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세상 보기에요. 세상은 이렇게 봐야 됩니다. 타락은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질문에서 ‘타락’했다고 했는데(p.76 [그러니까 타락하기 전의 인간과 에덴동산과 그리고 타락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인간과 그들이 상속받을 천국과의 비교를 부탁드립니다.…]) 77페이지 답변에 보면 타락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표현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장(場) 개념이기 때문에, 어떤 영역, 필드 개념이기 때문에요. 한 공간에서 한 공간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영생이 있는 생명나무 공간에서 바깥 공간으로 나와버리는 거예요. 바깥 공간으로 나와버렸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요. 타락이란 떨어지는 거잖아요.

개인적으로 뭐 질이 좀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수준 떨어진다, 그건 개인문제인데 개인은 무슨, 아예 죽은 자인데요. 죽은 자가 인물 좀 잘 생기고 덜 생기고 못 생기고 그게 무슨 문제가 돼요? 좀 착하고 안 착하고가 무슨 의미 있어요? 공간 자체가 다르면 돼요, 공간 자체가.

아까 로마서 14장 17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그러면 끝났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그 다음에 먹고 마시든 주식을 하든, 뭐 노름은 하면 안 되겠지만, 뭘 하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성령 안에서 주께서 그렇게 자기 백성을 하게 하는 겁니다.

세상이 보는 눈과 전혀 다른 위 아래, 위 위 아래. 위에서 내려다보는 주님의 안목을 가지고, 성령이 주님의 영이니까 그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해요. 어떤 사람은 그게 오래 안 간다는데, 오래 안 가야 그게 돼요.

이게 시간상 오래가게 되면요, 시간이 자아에게 속한 게 돼요. 위 아래, 위 아래 하잖아요. 위는 시간이 없어요. 이미 완성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아래로 내려오면 아직 우리 육신에는 시간이 있잖아요. 나이는 몇 살이고, 아프면 죽는다는 시간 의식이 있잖아요. 시간 의식 속에 ‘내가 성령 받았다’가 들어와버리면, 이건 성령이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고 성령 받은 나, 자아가 또다시 살아나서 내가 주인공이 돼요.

내가 주인공이 되게 되면, 여기에 집 나간 귀신들 다 달라붙어요. “더 제대로 해야지. 신앙생활 오래 해야지. 복음의 기쁨을 조기에 날려 보내느냐? 더 신앙생활해서 신앙의 기쁨을 지속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손해야. 너는 천국 가다가 중간에 지옥으로 탈락하는 수가 있어.” 탈락이 막 나오고 손해, 이익 나오고.

부산강의에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사적 계약은 계산적이라 했잖아요. 자아가 있기 때문에 계산적인 거예요. 자기를 평가하고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난 어느 정도의 신앙인일까?’ 죄인인데 죄인이 그걸 왜 따집니까? 몸 벗을 생각만 하지. 이 더러운 육신 빨리 벗어서 사도 바울처럼 영광된 몸으로, 해같이 빛난 몸으로 빨리 되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서 주님 만나고 모세와 엘리야 왔을 때, 그들은 육신적 몸이 있기 때문에 “눈 부셔.” 이러고 있단 말이죠. 모세도 마찬가지고.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은 눈이 부셔서 못 봤잖아요. 그럼 이 땅에 성도와 성도가 둘이 카페에 가서 잡담하고 커피 마신다. 그럼 눈부시다고 못 쳐다보고 이럴까요? “널 보니까 눈부셔.” “내가 오늘 화장이 잘됐나?” 이런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요. 둘 다 죄인이거든요. 죄인이기 때문에 눈부실 필요조차 못 느낍니다. 뭐 연예인 만났습니까, 눈부시게? 둘 다 썩은 껍데기를 걸치고 온 거예요.

그래서 <개그콘서트>처럼 <웃으면 복이 와요> 프로그램에서 양반집 상견례 할 때 사돈끼리 만났는데 처음에 -이 예화도 열 번 넘게 했어요. 나도 하기 싫어요.- ‘어험’으로부터 시작해서 기침부터 합니다. “어험, 부족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뭐 이럴까요? 이렇게 하면 돼요, 성도끼리? 커피 시켜놓고. ‘어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제가 죄인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더 죄인입니다.” 벌써 한 시간 지났는데, 이러다 헤어질까요?

그냥 육신의 생각 있잖아요. 위 아래 위 위 아래잖아요. 위에 가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내가 자아 중심으로 했던 것을 풀어야 돼요. “우리 애가, 공부 하지 말라고 말라고 했는데 또 1등 했다. 나 진짜 미치겠다. 집에 돈도 없는데, 1등, 1등, 걔는 어쩌려고 엄마를 속 썩이는지.” 그런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얘가 태권도를 하는데 또 상을 타가지고. 몸조심하라 했는데 또 상을 탔네.”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 잘 할 수 있는 이야기. 건드리면 나오는 이야기 있잖아요. 그 썰을 풀고 그걸 밥상머리로 적든 말든 그렇게 그걸 두 시간 하든 그런 이야기하면 돼요.

그리고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늘도 망상, 환상 잘 풀었나?” “예. 환상 잘~ 풀었습니다.” “그래. 그게 바로 살아가면서 네 할 일이다.” 이게 뭡니까? 이게 위잖아요. 우리는 아래만 했는데, 거기에 대한 모든 평가는 그게 바로 위가 있기 때문에 그걸 느끼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그 자유를 이제는 여러분, 빼앗기지 않을 거죠? 서울말입니다. 그 기쁨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지껄이는 이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거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천국에 왔는데 다만 몸만 살짝 힘들고 병들 뿐인데 천국의 관점으로 마음 놓고 세상을 평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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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942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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