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무덤 260916
죽음과 무덤(열왕기하 13:20-21)
죽음과 무덤
2026년 9월 16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3:20-21
(13:20)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13: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살아 있는 자’가 살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벌리는 모든 일은 천국에서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3:18-19의 원칙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곧 ‘땅의 초토화’를 나타냅니다. 땅 전체가 불나면 남는 것은 새까만 재 뿐인 것처럼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이는 ‘죽은 자’가 하는 모든 일은 생명의 나라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가 일을 한다?’ 이런 생각은 땅에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못 받아들일 현상일 겁니다.
이 땅에서는 창세기 3:18-19의 원칙은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현실일 겁니다. 단지 흙이 되기 위해서 평생을 통해 고생한다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는 참 억울하게 여겨질 겁니다. 자신이 하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단호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 24:1) 또한 시편 89:11에는,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이 의미를 확보하시는 활동에 하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용은 두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살아 있는 쪽은 모압의 도적떼입니다. 그리고 가족의 장례를 치려는 자입니다. 반면에 죽은 자의 쪽은 장례당한 시신과 그리고 엘리사의 시신입니다. 그런데 이 양쪽 모두의 일은 살아 있는 자들 쪽에서 전혀 예상 못할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이고 하셔야 할 일이 하신 겁니다. 철저히 인간들의 기대나 예상을 배제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어난 결과는 산 자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시신과 시신의 만남에서 결과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이 예상 못할 일을 굳이 일으키시는가요? 그것은 엘리야를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 말씀의 일관성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엘리야 2:11에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인 엘리야는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그냥 바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반면에 지상에서 미리 불수레와 불말을 경험했지만 스승 따라 가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서 땅의 운명에 끝까지 참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땅은 가장 위험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자기 백성을 예언의 힘으로 끄집어내어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려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된 분의 죽음과 무덤에 합류해야 하는 절차입니다. 그냥 자신이 살아 있다고 자부하고 거기에 성경 구절의 지식을 확보한다고 해서 구원되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산 자’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 자부하기에 항상 자신의 삶을 위하여 끊임없이 예상하고 기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압 도적과 그리고 자신의 가족의 징례를 치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은 의도적으로 살아 있는 자의 기대를 배제하고 예언대로 죽으신 분을 통해서 성취하시고 현실을 만들어내십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옵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17-20)
분명 중풍병자 본인과 데려온 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병을 고치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오는 과정의 난관도 그들은 과격하게 지붕을 뜷어서까지 극복할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단지 건강한 몸이 이제는 아프게 되었다는 정도로 자신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느니라”(눅 5:20) 즉 여태껏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나 움직이나 행위가 모두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이는 곧 땅에서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야를 통해 예언은 필히 죽음 속으로 들어갈 때만 하늘로 승천할 수가 있는 겁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예언의 완성으로서 그는 스승과는 달리 이 땅에서 죽게 됩니다. 다른 이들은 엘리사의 죽음으로 엘리사에게 더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횄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대를 벗어나십니다. 마태복음 27:50-53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성도는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땅 자체가 자신들의 집단 무덤인 것을 알았던 겁니다. 동시에 자신의 무덤을 소용없고 예언된 완성자의 무덤에 합류하는 것이 곧 천국의 절차에 들어서는 일인 것도 알게 된 겁니다. 고린도후서 4:10-11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 성도의 몸을 이 시대를 통해서 주님의 빈 무덤으로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 안에 완성된 예언의 자리로 비워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강-열왕기하 13장 20-21절(죽음과 무덤) 26091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3장 20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오늘 본문 보면서 우선 우리들이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압의 도적들이 들이닥친 일과, 그리고 사람을 장례하는 일과, 그다음에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을, 여기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도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뭘 하면 됩니까?’가 낄 자리가 없습니다. 예상이 되어야 내가 무엇으로 협조한다든지, 그 일의 성사에 내가 기여한다든지가 되잖아요. 어떤 죽은 사람 장례 치르겠다는 그것은 예상했겠지요. 그런데 장례를 치르는데 갑자기 모압의 도적들이 들이닥쳤을 때 장례 치르던 그 사람들은 죽을 판이고, 시체 빼앗기는 것도 당연하고. 시체야 이미 죽었으니 또 죽어도 상관없다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니 급해서 엘리사의 묘실에 시체를 던졌다 그 말이지요. 장례 치르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의 시신을 가지고 장례를 치르려 하다가 급하게 되었으니까 자기 가족의 무덤이 없어요. 아무 무덤에나, 엘리사의 무덤에다 시체를 던졌더니만 분명히 죽었는데 다시 회생해서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장례 치르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를 때 ‘이미 죽은 내 가족이 다시 살아날걸?’ 이런 것을 예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평소에 땅에서 살던 대로 장례 치렀던 거예요. 이 이야기가 상당히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신기한 이야기를 굳이 하나님의 성경에 기록해서 포함시킨 이유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일이거든요. 하나님의 일을 기록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그 취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겠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인간의 입장에서는요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을 몰랐지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겁니다. 인간은 쑥 빠지지요.
우리의 일상 전부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뭘 잘해서 이렇게 되었다, 또는 뭘 잘못했다 하는데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우리 일상에서 우리 자신을 주체 자리에서 쑥 뺍시다. 빼야 될 이유가, 시편 24편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간단하지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 여호와의 소유다 그 말입니다. 시편 89편 11절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이 본문을 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참 난데없는 일이 벌어졌네? 가족의 장례까지도 주께서 개입해서 장례식도 제대로 못 하게 만드시네.’ 약간의 불만 섞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만, 그 사람은 창세기 3장 18-19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다들 잘 아는 말씀이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것을 확보하시기 위해서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지 않는 그 일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거예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의 있어요? 불만 있습니까? 하나님 거잖아요.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인데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8-19절의 말씀대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거기에 누가 토 달고 거부하고 저항합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거예요. 똑같아요, 전부 다! 이것을 색깔로 치면 모든 인간은 새까매요. 사물이 있다가 불이 나면 시커먼 재만 남듯이 인간은 재에요. 똑같아요. 그 안에서 유난 떨면서 반짝반짝 해봐야 그것은 초토화 작업에 위반됩니다. 전부 다, 왕창 똑같아요. 왜? 하나님 거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말씀대로 하겠다는데 여기에 대들 수가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물을 것은, ‘그렇게 초토화시켜서 흙으로 돌려보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이 땅에 태어나지도 말고, 이 땅에서 활동하도록 힘을 주시지도 말지 왜 태어나게 해서 힘주시고 살도록 만들어 놓고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그렇게 뒷북을 치는, 결국 다 다 똑같이 흙이 되게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달아난 공간이 흙이잖아요. 땅이라는 말이지요. 하나의 취지는 이거예요.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곳은 땅이다.” 땅보다 더 위험한 곳이 없어요. “가장 위험한 곳이 땅이니까 내 백성은 이 땅을 떠나서 위험하지 않은 하늘로 가자.” 이게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 곧 땅에서 벗어나서 하늘로 데려가겠다는 하나님의 활동 중 하나가 인간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가게 되는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작업에 대해서 감격하고 고마워할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지도 못할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대들지요. “그러면 나는 요? 내 개성은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던 나는 요? 내 것은요?” 이런 식으로 대드는데 그런 식으로 대드는 사람은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람들의 도적 떼, 그다음에 자기 가족 장례 치르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그 시신, 또 하나는 엘리사의 시체. 인간은 땅에서는 위험하니까 땅에서 벗어나서 하늘로 가야 된다는 그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네 부류의 사람을 둘씩 두 영역으로 쪼갭니다. 한쪽은 소위 살아 있다는 사람들, 모압의 도적 떼, 살아서 펄펄 뛰지요.
“다 내놔!” 하고 칼 들고 막 달려오지요. 그다음에 장례를 치르는 죽은 자의 가족들, 비록 고인은 죽었지만 그 가족들은 살아 있지요. 모압의 도적 떼와 장례 치르는 가족들, 이 둘을 살아 있는 쪽으로 분류시켜요. 그다음에 나머지 두 존재는 뭐냐? 죽은 시체, 그리고 엘리사의 시체입니다. 이렇게 두 영역으로 나눠요.
장례 치르는 이 가족의 고인은 뭐가 없느냐 하면, 무덤이 없어요. 그래서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서 무덤을 준비해서 장례를 치르려다가 그 난리를 친 겁니다. 도적 떼가 갑자기 들이닥치니까 급하게 아무 데나 넣다 보니까 엘리사 무덤에 넣은 거예요. 그래서 무덤이 없어요. 무덤이 없는게 누구냐 하면, 그 시신도 무덤이 없을뿐더러 장례 치르는 그 가족도 무덤이 없어요. 왜?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자의 무덤을 왜 만들어요?
그다음에 또 더 펄펄하게 살아 있는 모압의 도적들도 무덤이 없어요. 여기서 무덤을 가진 분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엘리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배치를 하시는 이유는, 땅이 가장 위험한데 땅에서 예수 믿고 뭘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일단은 땅에 있는 인간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그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 천국 가려면 반드시 뭘 거쳐야 되느냐 하면, 자기 무덤이 있어야 돼요, 자기 무덤이.
무덤에 들어간 자만이 천국 가는 코스에 들어섰다고 할 수가 있어요. 무덤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마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그리고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켰듯이 하나님께서 바로 데려갈 수 있는데, 하나님의 자기 아들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것이 바로 무덤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막달라 마리아가 그 무덤에 왜 왔습니까? 그 무덤이 누가 묻힌 무덤인데요? 바로 예수님이 묻힌 무덤이에요. 예수님의 무덤이에요, 예수님의 무덤.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돌이 왜 옮겨져 있지? 누가 시체를 훔쳐 갔나?’ 하고 가보니까 시체는 보이지도 않고 천사가 턱 허니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앉아 있었어요. 요한복음 20장 12절에,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딱 보니 천사 같아요, 흰옷 입은 천사. 천사는 하나님의 일만 융통성 하나도 없이 행사하는 존재가 천사예요. 그러니까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을 뉘었던 그 무덤이 빈 무덤인 것을 강조하려고 그 현장의 머리와 발치, 위 아래에 있는 거예요.
보통 문장 쓸 때 따옴표(“”)를 쓰지요. 그 따옴표 역할이 천사 역할이에요. “날 보지 말고 우리 두 천사 사이에 누가 계셨는가를 보라. 그리고 그분이 여기 있는가를 한 번 보라.” 분명히 무덤이에요. 주님께서 무덤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갈 수가 없어요. 부활할 수도 없고 승천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곳, 땅에 머물고자 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안 받는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일깨워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기대하거나 예상도 못 한 우연적 사건, 일어나야만 되는 일, 인간들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으켜야만 될 일을 일으킨 거예요. 인간의 모든 예상과 기대가 빠진 상태에서.
그 일이 뭐냐 하면, 엘리사가 죽음으로써 실패 없는 성공적인 일이 죽은 엘리사의 무덤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방금 제가 실패 없는 선지자로 엘리사를 소개했어요. 엘리사는 성공한 선지자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와 근거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다시피 그 때는 엘리야와 함께 있던 엘리사에요.
엘리사가 주가 아니고 엘리야가 주가 되고, 엘리야가 스승이 되고 엘리사는 선지 생도로서, 보조 선지자로서 따라 붙인 거예요. 그런데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가 요단강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왕하 2:11).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역시 예상 밖이지요?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이 엘리야에게만 덮쳐서 엘리야만 데려간 것이 아니고, 여기에 두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요, 두 사람. 엘리야와 엘리사를 같이 불말들과 불수레가 덮쳐서 한 바퀴 돌고, 회리바람처럼 돌고, 그리고 두 사람 가운데서 엘리야만 불말과 불수레 태워서 휙 가버렸어요. 마차 타고 가는 그 장면은 루돌프 사슴코 생각하면 됩니다.
루돌프 사슴이 끄는 마차 타고 전 세계 어린애들에게 –그것도 울지 않는 애들- 선물을 주기 위해서 다니는데 어떤 과학자가 계산한 것을 보세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태운 루돌프가 끄는 마차의 시속을 계산해 봤어요. 계산해 보니 초속 24만 킬로인가 나왔어요. 빛의 속도가 지구를 1초에 일곱 바퀴 반을 도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지구 한 다섯 바퀴 도는 속도라는 거에요.
그 장면을 생각해 보면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하늘로 갔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올라갔는데, 그 불말과 불수레가 엘리사한테도 도달해 놓고는 왜 엘리야만 데려간 거예요? 엘리사는 엘리야가 보여줄 땅에서 하늘로의 승천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마저 마무리 지어야 할 사람으로서 엘리야의 연장선입니다. 단순한 보조가 아니라 엘리야의 분신, 엘리야의 남은 일, 쉽게 말해서 “나처럼 하늘로 가려면 엘리사 너처럼 이 땅에서 죽어야 돼. 그리고 너의 무덤을 가져야 해. 그리고 구원받는 자는 이 땅에서 자신의 무덤이 없어야 해.”
인간에게 무덤이라 하는 것은 죽을 때나 있는 무덤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무덤을 무덤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 자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 자체, 인간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새삼스럽게 자기 죽음을 기념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 땅에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너의 죽음도 나는 받지 않겠다.”
너의 무덤도 받지 않겠다는 말은 너의 죽음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가 받는 것은 바로 엘리야-엘리사, 엘리야에게 준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 땅에 생겨버린 무덤, 그 무덤을 경유하는 자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받아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지금껏 나는 예수님 모르고 살던 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 믿어서 나중에 천국 가야지’라고 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같잖지요. “어디서 삐뚤어진 욕심 가지고! 욕심도 과하다. 아주 넘치네.”
너는 믿음을 소유할 자격조차 없어요. 예수 믿고 살겠다는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비실재적인지 성경하고 전혀 안 맞습니다. 인간은 무덤조차 가질 자격이 없는 거예요. 살아도 죽은 것인데 새삼스럽게 죽었다고 알릴 필요가 뭐가 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딛고 살았던 그 땅 자체가 모든 인간을 위한 무덤이에요. 땅이 곧 자신의 무덤입니다.
그러니까 흙이니 어디로 돌아가라? 흙으로 돌아가라. “흙에서 만든 인간아! 흙 자체가 너의 죽음이고 무덤이다. 네 죽음의 표상이다.” 그래서 땅에 접촉된 자, 그게 선지자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일단 죽어야 돼요. 땅에 접촉된 자는 일단 죽어야 돼요. 그러면 에녹이나 엘리야는 안 죽고 그냥 올라갔잖아요. 엘리야가 그 몸이 연장된 것이 엘리사에요. 이미 불말과 불수레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에.
그래서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자기가 승천하고 난 뒤에도 멈추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데 그것이 바로 엘리사가 죽어서…, 보통 사람은 죽으면 자기의 업무가 끝나잖아요. 엘리사가 죽었다는 말이지요. 어떤 인간도 상상 못 했지요. 엘리사가 죽었으니까요. 요아스 왕도 마찬가지였어요. 엘리사가 죽었으니까 이제 별 볼일이 없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님 죽었다. 우리 다시 엠마오로 내려가자.” 그랬다가 두 제자가, -열두 제자는 아니지만- 예수님한테 걸려서 ‘내가 살아났다. 너희는 왜 믿지 않느냐?’(눅 24:25-27)라는 책망이 나오잖아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 하여튼 주님한테 걸리면 무조건 책망이에요.
엘리사가 죽어서 무덤이 될 때 그 땅 어느 누구도 ‘이제는 선지자 없다’고 여겼을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의 무덤에까지 하나님의 일은, 엘리야의 예언은 계속 살아있었습니다. 살아서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난 뒤에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빈 무덤, 그 무덤이 있는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엘리사가 앞당겨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엘리사는 성공한 선지자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0-53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지금 이 모든 게 인간의 예상 밖이에요.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지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러니까 휘장도 찢어졌지만 땅 자체가 터져버린 거예요. 인간을 죽게 한 땅이 더 이상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땅에 속했다는 것 때문에 인간은 필히 죽어야 되거든요. 왜? 아까 창세기 3장 18-19절처럼 땅 자체가 인간을 죽이는 곳이에요. 인간을 죽이는 그곳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나를 죽이는 그 땅도 더 이상 나를 방해할 수도 없고 막아설 수도 없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땅이 왜 터집니까? 엘리사를 통해서 땅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를 초과하는 능력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예상도 못 한 일이에요. 여러분, 힘든 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이유가 뭐냐 하면, 살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거든요.
살려고 하면 힘든데 그걸 달리하면, 더 깊게 하면 이렇습니다. 뭐든지 내가 예상한 대로 살려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이 인생 살면서 ‘나는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빗나가면서 주께서 하신 일이 뭔가?’를 한번 찾아보면서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예상도 못 한 일, 그게 기적 아닙니까?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그 예상 못 한 일의 신약 경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 17-20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여기까지만 딱 보게 되면 지금 이 사람들이 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이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중풍병 걸린 친구를 데려왔는데 난관에 부딪혔지요. 대기자가 너무 많다는 말이지요. “줄을 서세요, 줄을!”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급했지요.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아, 이것은 인간들이 지금 할 수 있어요. 안 되면 돌아서 위로 가면 되니까. 지붕 수리비는 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중풍병 들린 친구의 병을 고치러 왔어요. 인간이 예상한 거예요. 중풍‘병’을 고치러 왔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이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이것은 중풍병 걸린 그 사람도 예상 못 했고요, 중풍병 걸린 그의 친구들도 예상 못 한 거예요. 자기는 뭐 잘한 짓 했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것, 병 고치러 온 것을 뻔히 아시면서 ‘네 죄를 사한다’라는 말은, 너는 이 병 걸리기 전부터, 이곳에 오기 전부터 너는 죄인이고 그 죄는 네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되돌려주는 거예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 원칙을 하나님은 취소한 적이 없어요. ‘아, 건강한데 병 걸렸다.’ 건강한데 병 걸린 게 아니고, 애초부터 죽을병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자꾸 딴 소리하지 마시고요, 주님 앞에서. 친구들도 몰랐죠. 예수님만 알아요. 왜? 예수님은 모든 걸 만드시고, 소유자니까요.
자기 백성을 땅에서 천국으로 올리는데,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 확보하는데 조금도 양보 없습니다. 기필코 자기 백성을 건져내십니다. 건져내는데 그 과정이 뭐냐 하면, “네가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 점이에요. 너는 너의 소유가 아니니까. 너희에게는 어떤 소유권도 없어요.
엘리야가 승천했다. 그런데 엘리사는 엘리야의 할 일을 위해 남아있었고, 그때 사람들이 엘리사 죽었다고 안타까워해서, ‘이제는 엘리사와는 이별이다.’ 작별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구 마음대로 작별이에요? 그 당시 이스라엘은 완성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땅이 죽어 마땅한 땅, 이스라엘 어떤 왕이라도 살릴 수 없는 땅, 그걸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엘리야의 승천은 여전히 이 죽을 땅에서도 중단되거나 하나님이 포기한 적이 없음을 죽은 엘리사를 통해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시체가 되었다가 살아난 그 사람의 그 후의 삶은 어떻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후에(요 11:17) 그 삶은 어떠했겠어요? 땅을 떠날 생각만 하겠죠. 땅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겠죠. 엘리사가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일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선지자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실패한 –성공적인 선지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의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데, 31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열왕기상 13장, 이름 모를 하나님의 사람이 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와가지고, 여로보암에게 지적하고 예언을 합니다.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상스럽게 무엇까지 언급하느냐? “너 돌아갈 때 그곳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라고 해요.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하는 이 대목에서 여러분, 기억나는 거 없습니까?
바로 모세가 시내산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구분 짓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곳과 말씀이 없는 곳을 구분 지을 때,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왕상 13:17)라고 한 거예요.
그때 이 선지자가 “OK, 예,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했는데, 이 북쪽의 나라, 북쪽의 땅, -땅이 더러운 곳이고 위험한 곳인데- 이 북쪽의 땅에서 밥이나 먹고 살려고 하는 나이 많은 가짜 선지자가 있는데, 남쪽에서 선지자가 와서 예언했다고 하니까 이 가짜 선지자가 말씀을 전한 진짜 선지자를 꾑니다. 어떻게 꼬시는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다.” 이걸 동종업자라 합니다. 나도 같은 동종업자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그대를 데리고 가서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고 했다는 거죠. 이 사람이 이렇게 한 것이 본인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했어요. 그러니까 북쪽에 있는 선지자가 이 엉터리 땅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로보암은 자기 나라 왕이잖아요. 그러면 그 선지자가 지적해야 할 텐데 남쪽에 있는 유다 선지자가 지적했다는 말은, 그쪽 선지자가 제구실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동종업종에 계신 분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고 또 천사가 와서 이야기했다고 하니까 먹고 마셨더니만 그 남쪽 선지자가 돌아갈 때 어떻게 되었는가?
사자가 “어흥!” 나타나서 그 사람을 죽였는데, 사자가 그 시체의 살점을 뜯어먹지를 않고 멀뚱하게 바보같이 떡 서 있었습니다. 사자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해요. 왜? 세상 모든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에. 북쪽 선지자가 남쪽의 그 선지자가 죽는 걸 보고, ‘진짜 선지자’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갖고 있는 선지자를 내가 죽였다는 겁니다, 내가, 내가 죽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읽었던 열왕기상 13장 31절, ‘그 사람 장례를 잘 치러주고, 내가 죽거든 딴 데 묻지 말고 그 사람 죽은 데다, 그 뼈에 같이 나를 합장시켜 달라’라고 했어요.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이것이 바로 실패한 선지자의 하나의 사례, 하나의 경우가 되지만 오늘 엘리사 선지자는 성공한 선지자예요. 왜, 결과를 냈으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으니까.
그래서 신약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주님의 계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두 군데를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해놓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렇게 돼 있어요. 이것은 뭐냐?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됐는데, ‘나를 죽인 그 말씀이 이제는 내 안에서 살아 있다.’ 이런 뜻입니다. 내가 하나의 선지자로서 살아있는 이유는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심지어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 말이죠.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걸 사도 바울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실감 나게 합니다. 10절-11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네가 예수의 빈 무덤’이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성도의 육체를 예수님 자신이 살아있는 빈 무덤으로 이 시대에, 2026년도에 활용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 내 무덤이라는 것은 별 의미 없지요. 이미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인간이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이 하늘나라에 아무 쓰잘데기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능력으로 이 땅에 살아있습니다.
청문회를 해도 그렇고, 대통령 바뀌어도 그렇고, 기름값 올라가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말씀과 결코 견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린 하나님의, 예수님의, 성령의 능력과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영생과 도무지 바꿀 수 없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경계선이에요, 이 땅의 경계선. 이 땅이 어떤 땅인지를 모르면 안 돼요. 알아야 돼요. 이 땅이 어떤 세계인지. 그리고 승천해서 주와 합류할 천국이 어떤 세계인지, 그것을 양쪽 다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살아가면서 자꾸 사람하고 비교하고 사람하고 대조하고, 누가 더 행복한지 누가 더 잘났는지,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다고 우기는 그 엉터리 같은 사고방식, 그게 십자가로 인하여 땅이 터지고 다시 살아난 성도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 이제는 우리 자신의 육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위해서 내어주는, 살아있는 주님의 무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