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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썩는 기쁨 260913우리교회야고보서

썩는 기쁨(야고보서 5:2-3)

썩는 기쁨

2026년 9월 13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5:2-3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재물은 인간의 노동의 대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노동했으면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은 내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창세기 3:17-19의 원칙에서 못벗어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하지만 이 원칙이 유지되어야 할 그 근본적인 원칙은 창세기 3:15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즉 여기서 인간들은 주님과 악마의 싸움에 끼어들 위치에 있지 아니합니다. 인간들은 기껏 자기 옷이나 챙깁니다.

그런데 원래 옷이란 없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깨서 인간을 만들 때 ‘옷’없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마귀와 한 통속이 되고 난 뒤, 인간들은 옷을 걸치면서 그 옷으로 자신이 살 근거와 이유를 찾으려 합니다. 재물이 바로 그 옷의 기능을 합니다. 이 인간 대 인간만으로 구성되는 세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옷으로 자신을 커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사 3:23024)

유대민족의 고관대작의 부인들이 고급진 옷을 입고 그 옷을 정성드려서 장식합니다.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말입니다. 그런데 더 덮어쓴 옷 사이에는 썩은 냄새가 나옵니다. 즉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의 말씀을 창세기 3:17의 환경 속에서 실현하시는 방법입니다. 즉 ‘노동하라, 비로소 썩은 냄새가 날 것이다’임니다.

마태복음 6:19-21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말씀은, 어떻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느냐 하는 겁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려면 일단 썩어야 합니다. 재물이 썩는다는 것은 곧 자아가 썩는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자아의 수고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썩는 자아를 대체할 자아를 이미 하나님께서는 마련해 두셨습니다. 즉 ‘자아 교체시키기 작업’입니다. 그 교체된 자아를 하늘에서 이미 말씀에 입각해서 만들어 놓으시겠다는 겁니다.

자아가 교체되려면 일단 썩는 자아와 새로운 자아가 혼재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이 내용이 잘 나옵니다. 요한복음 11:14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이유를 모릅니다.

즉 나사로가 죽기 전부터 이미 나사로는 죽음과 삶이 혼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들은 일단 이 세상에서 죽어야 합니다. 인간 대 인간의 세계에서 사는 수는 없습니다. 썩어야 합니다. 썩는다는 것은 외부에서 공격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썩음에 대해서 인간들은 개인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자기 상실’정도로 자기선에서 무마하려 하고 받아들이려 합니다. ‘상실’은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나사로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사로의 존재보다 우선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4-25)

이 말씀 자체를 인간의 개입없이 실현하시기 위해 나사로가 죽음을 기다렸던 겁니다. 과연 죽은 나사로 시신에 가보니 죽은지 나흘이 지나 썩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썩음’에서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는 사실은 ‘분명히 죽어야 비로소 분명한 부활’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 대 인간의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세계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양식’이라고 하시면서 주십니다. 그것이 만나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너의 열조가 알지 못하던’ 만나입니다.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만나를 먹는다는 것은 ‘알지 못함’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천국 백성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늘에게 쌓는 새로운 재물이 되는 겁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이 내용이 나옵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요 6:12)

배부르는데 관심두는 자가 기존의 자아라면, 주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신 그 떡(=만나=예수님의 떡)에 관심 있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에게는 더는 옥에 갇힘이나 배고픔이나 병든 것이나 나그네된 것에 대해서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라도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다윗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영으로 인해, 다윗은 시편 16에서, 비록 자신은 썩어도 기어이 주님께서 살려주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예언의 먼저 실현될 말씀인 것이 시범 보이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행 2:26-33)

따라서 진리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은 매순간 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사가 나를 썩어 없애고 말씀으로 미리 준비된 영광된 새 사람을 만드는 작업이기를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야고보서 5장 2-3절(썩는 기쁨) 26091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2-3절입니다.

야고보서 5:2-3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이 ‘썩는다’라는 경우, 구약 신명기에 보면 구체적으로 그 썪는 부위를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3장 23-24절에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여기에 ‘썩은 냄새’가 나옵니다.

유대 나라에서 귀족층에 속한 여인네들이 남편이 주는 막대한 재물을 가지고 자기 몸을 치장할 때 그들이 입고 있는 옷과 옷에 걸쳐있는 장식에서 무슨 냄새가 나느냐 하면, 썩는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여기서 주께서 언급하는 것은 ‘옷을 입기는 왜 입었느냐?’ 하는 거지요.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에게는 옷이 없었습니다. 옷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인간이 자기의 가치와 체면을 방비하기 위해서,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게 옷입니다. 자아 지키는 옷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옷에다 훈장 같은 것을 막 덕지덕지 갖다 붙이는 거죠. 계급화, 내가 이런 계급이라는 것, 자기에게 권력이 있다는 것을 옷을 통해서 티 내는 식으로 이 땅에서 아담의 자손은 시작이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간단해요. 그 옷을 벗기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노력과 결과와 자기 영광이 옷에 붙어 있으니까 그 옷을 벗겨보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썩은 게 나오죠, 썩은 게. 야고보서 5장 1절에, “들으라 부한 자들아” 할 때 부한 자들의 자아는 뭐로 대변해 주느냐 하면, 재물과 돈으로 대변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부한 자들의 문제점은 뭐냐? 자기 부정이,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노력의 열매가 재물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다는 건 힘이 많다는 것이고,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힘 있는 자가 남한테 잔소리 들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명령하는 자이지 힘 있는 자가 조언을 받을 입장은 아니에요. 누구한테 지시하는 입장이죠.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들으라!”하고 명령을 하는 겁니다. 그 부한 자들의 재물은 부한 자의 자아가 되고, 그 자아는 위세를 떨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재물은 어디서 생겼는가?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재물이 발생돼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재물이 형성됩니다. 재물이 많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대단한 자아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재물을 통해서 부자들은, 인간세계에서 돈이 신을 대신한다는 것을 간파했죠.

어제 금요일 밤에 지묘동에서 ‘왕건 축제’가 있었어요. 1년에 한 번씩 하는 그 축제에서 이번엔 특이하게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장항준 감독, 2026). 죽은 단종 이야기죠. 그 영화를 틀어줬어요. 영화 중간인데 스크린에 굵은 선이 막 나오고 그랬어요. 그래도 보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 안 했어요. 왜? 공짜니까, 돈 내고 본 게 아니니까요.

그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린 단종이 유배되어 죽는데, 한명회라는 권력자가 “당신은 더 이상 왕이 아니야.” 해서 사약을 먹여 죽이도록 조치합니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또다시 확인되는 게 있어요. 인간과 인간세계에서 돈을 버는 방법은…, 양반이니까 글자를 알잖아요. 언어를 안다고요. 글자가 권력이 되고, 그 글자에 정보가 실리고, 그 정보를 많이 아는 자만이 돈을 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서양의 중세 때나 우리나라 중세 때 일반 서민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서 돈 버는 방법을 몰라요. 돈 가진 사람들의 그 말의 지시에 따라 살아야 겨우 빌어먹는 수준이에요. 글자를 모르니까 일반 서민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왕도 사정없이 처단되는 겁니다. 그러면 글자를 아는 방법은? 돈을 벌어야죠. 교육받는 데 돈 들잖아요. 그러면 돈 버는 자만이 돈을 번다? 딩동! 바로 그거죠.

인간 사회에서 돈을 버는 자만이 계속해서 대를 이어 돈을 벌 가능성이, 확률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그걸 알면서도 “부한 자들아, 들으라!”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는 인간만 알았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인간만 알았다는 거예요. 당연한 이야기 아니에요? 인간세계에서 태어나서 인간만 아는 것이 마땅하고 그게 전부가 아닐까요?

야고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만 만나면 자기 자신이 썩는 존재인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네가 갖고 있는 재물로 해 입은 –옷이 재물이다- 그 옷을 벗겨서 속에 썩는 냄새를 네 코로 맡게 해주겠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순간 파악되는 사실입니다. 정리하면, 부자는 재물을 가졌다. 부자의 자아는 재물로 말한다. 재물로 말해요.

그런데 야고보는, 그 재물을 썩게 했다. 이걸 거꾸로 돌리면 “네가 썩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넌 그걸 알게 될 것이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라.” 그다음에 야고보서 5장 3절에,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이 녹이라고 하는 것이 은이나 금이나 그런 물질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신체까지 공격해서 썩게 만든다. 어차피 인간은 늙어 죽으면 썩는다. 그 썩는 과정속에서 넌 재물 쌓았잖아. 재물이 썩는 것을 통해서 이젠 네 몸이 썩는 것을 알아야지.’ 이런 뜻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재물이야’라는 거예요. 네가 재물이야. ‘네가 재물이야’라고 재물로 우리 자신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야고보가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그 전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약간 긴데요, 후딱 읽겠습니다.

6장 19-21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러분들이 익히 아는 이 말씀에서 제일 난제가 뭐냐? 도대체 예수님이 이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이유가 뭐냐? 재물이 썩는다는 것은 오케이, 그건 이해해요. 그런데 재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이 없다니까요. 재물을 하늘로 던지면 도로 내려오는데요? 재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이 없어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재물을 쌓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일단 우리 자신이 재물을 쌓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재물로 바뀝니다. 재물로 바뀌면, 우리는 이 땅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영역의 이유 때문에 돈도 썩고 나도 썩어요. 썩죠? 그다음에, 내가 재물이 되고 그 재물이 썩는 원칙에 의해서 내가 썩게 되면 썩은 이 재물을, “네가 썩으리라”하는 그 말씀이 우리를 새 백성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에 두게 만듭니다.

그게 절차에요. 참 간단하고 쉽지요! 굉장히 쉽죠? ‘썩어라, 인간아.’ 이런 뜻이에요. “제발 좀 썩어라.” 자꾸 안 썩을 것으로, 재물로 이렇게 이해하니까 하나님과 인간 너 자신과의 만남에 장애가 되는 거예요. 재물이 자꾸 장애가 되니까 재물을 치워버리면 그다음에 썩는 내가 발각되고, 썩는 나는 제대로 썩어야 돼요. 그게 주께서 원하시는 양식입니다, 구약 레위기에 의하면.

전라도 음식 가운데 묘한 풍미가 나는 음식이 있어요. 삼합인데 썩은 홍어하고, 돼지고기 수육, 그리고 오래된 신김치하고 쌈 싸서 먹으면 오묘한 맛이 나는데 역시 주인공은 썩은 홍어죠. 썩은 홍어가 주인공입니다. 주께서는 이 음식을 좋아하시네요! 자기가 썩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을 그렇게 주께서는 맛있게 드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 같은 성경을 보면서 많은 설교자들이, 그리고 교인들도 오해하고 있는 게 본문 보니까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네 재물은 썩었다. 금과 은도 녹슬었다. 이 녹이 증거가 된다.” 이렇게 들으니까 움찔합니다. 또는 아까 마태복음 6장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라고 하니까 갑자기 움찔, 긴장이 되면서 “그렇다면 목사님(하나님)! 성도로서 바른 재물관은 무엇입니까? 성도로서 재물을 어떻게 어떻게 벌고,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소비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기 마련이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간단하게 답변합니다. “천국 가기 싫죠, 그렇죠? 솔직하게 이야기하세요. 천국 가기 싫지요?” 어떤 목사는 1년 52주를 성도의 재물관, 성도의 신앙관, 성도의 기도관, 성도의 헌금관, 성도의 찬양관, 성도의 가정생활, 성도의 자녀 교육, 성도의 부모 효도하기…, 이걸로 다 채우는 사람이 있는데 정답은 이거에요.

“그냥 썩어.”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썩으면 돼요. 자꾸 꼼수를 쓰면 안 돼요. 주께서 썩게 하시면 그냥 썩으면 되잖아요. 그냥 썩자. 지난 수요설교의 제목은 “그냥 타”지만 오늘은 “그냥 썩자.” 그냥 썩으면 돼요. 썩는 기쁨, 썩는 감격, 썩게 해주시는 고마움, 스스로 썩을 수 없는 것을 주께서 매일 같이 하루하루 썩게 해줘서 푹 삭아서 주께서, 천국에서 받아주시는 맛있는 양식이 된다는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누가 이걸 알겠어요.

그렇다고 또 썩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마세요. 가만히 살아도 여러분 썩어요. “목사님, 저는 한 달 수입이 2천여만 원 되는데 이것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바른 데에 소비하고, 어떻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어떤 식으로 구제하고, 어떤 식으로 보탬이 될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제 답변은 “그냥 썩으세요. 이천만 원 따박따박 들어오는 것은 감사하시고!”

간단하잖아요. 이천만 원 들어오는 것에 감사하고, 하고 싶은 대로 쓰세요. 쓰는데 돈 잘 써서 감사하지 마시고 돈 있어도 썩는다는 점에서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는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천만 원씩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수입이 없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잖아요, 간단한 문제. 자꾸 이 땅에서 살려고 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희망과 꿈, 이런 걸 자꾸 끄집어내고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뜻은 이거에요. ‘네가 사라져도 내가 있잖아.’ 이거에요. ‘네가 사라져도 내가 일하고 있잖아. 사라질 때 되거든 좀 사라져 줘.’ 그리고 사라지기 전이라도 나만 일하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고맙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우리한테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다는 자체가 이상해요. 고민과 걱정거리가 새삼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썩어가는 인간이 썩는 것을 거부하고 돈 모아서 자기 버티기 들어가는 것, 자기 가치로 들어가는 것 여기에 대한 주님의 금융 치료입니다. “돈이 다 날아가 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리지?” 이거거든요. 여러분, 돈을 버는 것은 인간과 인간관계에요.

그걸 알기 쉽게 말해서 옛날에는 돈이요, 그냥 금 조각 은 조각 자체였어요, 지폐가 아니고. 그래서 그걸 누가 발행하느냐? 국가에서 발행하는데 국가가 전쟁하는데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금으로 화폐를 만들 때 원래의 가치만큼의 금이 실제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 금을 빼돌리기를 하는 거예요. 한 돈짜리라고 해놓고는 한 돈이 아니라 불순물을 섞어 넣어서 제대로 금화가 아니에요.

나중에 백성들이 그걸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진짜 금화는 시장에 유통을 안 시키고, 진짜 금화는 녹여서 금으로 팔고 가짜 돈을 시장에 유통시킨 거예요. 이게 나쁜 돈이 되는 거예요. 악화(惡貨)에요. 좋은 돈은 시장에서 점점 사라지는 거예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악화가 양화를 쫒아낸다는 그리샴(Thomas Gresham, 1519-1579)의 법칙이 거기서 나와요. 16세기 영국의 이야기입니다. ‘돈인데 액면가 그대로 돈이 아니고 가치가 반토막이 났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돈의 가치는 노동을 해서 노동 값을 얻는 것에 돈의 가치, 재물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니고, 시장에서 발생된다는 거예요. 그게 시장 가치에요. 아무리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가정에서 뭘 해도 남들이 내 물건을 안 사주면 내 노동의 가치는 반토막이 아니라 없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물건이 얼마냐?’가 아니고 ‘내가 얼마냐?’ 나 자체도, 우리 존재 자체의 가치도 시장에 휩쓸려 소용돌이치는 겁니다. 다 말려들어요.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 말하는 세상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에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씀이요. 시장에서 돈의 가치를 내니까 그러면 시장은 뭐냐? 시장은 서로의 탐심과 욕심이 집결되는 곳이 시장이에요. 시장에서 추방되어 버리면 돈을 못 벌어요. 지리산에 들어가서 자연인이 된다든지, 혼자 산속에 살면 돈이 안 돼요. 자급자족은 될지 모르지만 돈은 안 돼요.

여분의 돈이 되려면 내가 노동한 그 이상의 잉여 가치를 남들이 사줘야 돼요. 그래야 나한테 돈이 생긴다고요. 미사일 쏴서 이란을 치고, 어떻게 해서 북한을 치고…, 그런 것은 별 효과가 없어요. 제일 큰 효과는 북한이나 이란을 세계 시장에서 추방시키는 거예요. 국민들 다 굶어 죽기 직전이에요, 지금. 왜? 세계 시장에서 기름을 안 사주니까 돈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가 대학 졸업하고 집구석에 앉아 있으면 됩니까? 쫓아내면서 “나가서 돈 벌어 와라.” 그 나가는 곳이 어딜까요? 거기가 바로 시장입니다. 시장의 원리에요. 이게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라고요. 그러니 태어나기를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출생했거든요.

출생할 때부터 그다음부터는 남이 구매할 만한 욕심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하면서 수학 배우고, 영어 배우고, 국어 배우고, -가정교사를 들이든, 아니면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배우든지 배워서- 상품 가치가 될 만한 자식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녀 교육입니다. 서울 강남의 교회 같으면 얼마나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신경 쓰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 자녀가 미국 아이비리그, 하버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나?’ 어렸을 때부터 영어 유치원 보내는 부모들, 그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는 뭐냐? 속으로 이렇게 하죠. ‘목사님, 어떻게 하면 제 자녀를 신앙인으로 잘 키우겠습니까?’ 본인이 신앙인이 아닌데 무슨 신앙인으로 잘 키워요? 본인이 신앙인이 아니면서 뭘 신앙으로 잘 키웁니까!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내 자식이 어떻게 하면 성공하겠습니까?”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무슨 자녀 교육이 있어요? 신앙적인 자녀 교육 없습니다. 그저 부모 썩듯이 자식도 같이 썩어 가면 돼요. 최고죠. 태어날 때부터 욕심을 갖고 태어난 거예요. 욕심을 갖고 태어났으니까 자기 욕심을 남들이 사줄 때 자기의 존재 의미가 생겨요. 아주 쉽게 이렇게 합시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가 없어요. 무의미해요.

무의미한데 인간과 인간이 만나니까 없는 의미가 생겨버렸어요. ‘나 가치 있어.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해.’ 어제 왕건 축제하는데 가수 최수호가 왔어요. 나는 우리 동네 축제인 줄 알았어요. 온 동네에서 빨간 옷 입고, 반짝반짝 별빛이 나오는 것을 들고…, 그래서 60 넘은 아주머니들이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나중에 들어보니까 –저는 말씀 준비하느라 참석 못 했지요- 어린 애들까지, 초등학교 3학년들까지 다 춤을 췄다는 거예요.

최수호 보러 사람들이 엄청나게 왔어요. 상품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출세했잖아요. 그게 돈이 되는 거예요. 인기 있는 것, 이게 인간 대 인간의 만남과 소통, 세상이 더욱더 세상답게 되어가는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원리고 원칙입니다. 거기서 썩는 거 외에는 발을 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썩는 기쁨과 감격보다는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 가려고 이 말씀을 한 번 지켜보려는 부질없는 짓을 해요. 본인이 의미가 없고 무의미한데, 자꾸 자기 행함으로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본문을 보면 어떤 느낌이 오느냐? ‘아, 썩는구나. 그러면 썩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그래, 돈을 잊어버리자. 돈을 잊고 주님만 생각하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썩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상실이에요. 그것은 성공 못 합니다. 썩는다는 것은, 여러분, 썩는다는 것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이고, 내가 ‘허무하다. 아, 상실이다.’ 이것은 자아가 포기를 못 하고 자아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보자. 내가 신앙이 있나 없나? 내가 스스로 한번 평가해 보자. 말씀대로 살아야지.’

그래 놓고는 말씀에 대해서 ‘지금 신앙이 있는 거다.’ 아니면 ‘없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하는 그것은 자기 영광 아닙니까? 자기 단도리 아니에요? 이게 뭐 썩겠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주께서 경고했으니까 그 경고에 잘 대비해서 내가 내 자신을 사수하고 지켜내는 종교적인, 신앙적인 노력을 해보겠다는 거예요. 참 인간들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방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인간들이 스스로 썩는 것을 거부하면서, 신앙인이라고 꾸밀 수 있는 것, 모든 성경 기준을 참고해서 ‘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이 정도 하면 신앙이겠지.’ 하고 꾸미는 모든 작업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결론은 나왔습니다. “그냥 썩으세요.” 그게 결론입니다. 그것도 감사하면서 썩으시면 됩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의 아이디어가 물리학에 보면 나와요. 우리가 전기를 측정하는 것은 전자의 움직임이 아니고, 전자와 전자가 일으키는 전기장의 상호작용의 ‘세기’가 전기에요. 저울이 측정하는 것은 질량 자체가 아니라, 그 물질과 지구와의 중력의 상호작용으로 생기는 ‘세기’입니다. “너 몇 킬로 나가?” “50킬로 나가?” 그것은 지구와 우리 사이 중력의 작용입니다.

또 온도를 측정한다는 것은 온도가 있는 게 아니고 수은의 부피가 팽창하는 것을 측정한 게 온도라고 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측정하는 것, 질량이든 전기든 온도든 뭐든 인간이 측정하는 간접적인 측정의 효과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한참 달리다가 앞에 전봇대가 있는 걸 모르고 실수로 박았다, 아프죠. “아야” 하잖아요.

그게 ‘관성의 질량으로 측정된 아야, 하는 나’, 이렇게 되죠. 그다음에 어떤 무거운 것을 들 때 ‘내가 오십견인데 이것은 내가 못 들겠다. 팔이 아프다.’ 한다든지, 내가 침대에 누울 때 침대가 쑥 들어가면서 ‘편하다’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중력 질량’의 뜻입니다.

방금 이런 물리학 이야기를 한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실 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상호작용의 간접적 측정 결과가 바로 인간이고 인간은 곧 측정값이 되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물어도 그것은 질문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네가 왜 그걸 물어?”
“저 인간이거든요.”
“입 다물고 있어. 그냥 썩기만 해.”

인간이 인간으로 등장했고, 인간이 인간으로 활동하고, 인간이 썩고, 인간이 이렇게 돈 벌고 뭘 하든 간에 이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악마와의 상호작용이 바깥으로 나온 그 효과입니다. 아까 질량 이야기하고, 온도 이야기하고, 전기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상호작용이에요.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뭐냐? “인간아, 네 문제에 대해 네가 끼어들 잽이 못 된다.” “인생이 어디 있어요?” “인생은 없어.” 그것은 측정된 것, 나타난 거라니까요. 네 눈에 보이지만 나타난 것과 보이는 것이 달라요.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게 아니에요. 히브리서 11장 3절의 말씀처럼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울증 걸렸습니다.” 우울증이라고 표현하는 그것, 그 우울증이라는 것은 네 탓이 아니고, 네가 책임질 문제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예수님과 마귀가 싸운 흔적들이에요, 흔적들. 그게 우울증으로 나타난 거예요. 걸릴 만해서 걸렸죠. 날씨가 가을이 오니까요.

“목사님, 어떤 사람은 진짜 수입이 한 달에 오천만 원, 1억이 된답니다.” “부러워요?” “아, 부럽습니다.” 그 사람이 오천만 원 번 것은 예수님과 악마의 상호작용, 다툼의 그 결과가 오천만 원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오천만 원을 가진 게 아니에요. 오천만 원짜리 썩어질 거예요. 오천만 원짜리 썩는 거예요.

이걸 몰랐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미련한 사람, 미련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이름이 나발(미련한 자)이에요. 사무엘상 25장 2-3절에 보면,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런데 그 나발의 부인은 아주 총명하고, 예쁘고, 총기 있고, 믿음도 있어요. 하나님께 이미 왕으로 지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기존의 권력, -한 명회의 권력이죠, 세조의 권력- 그 권력에 밀려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떠돌아다니는 그게 다윗의 모습이었어요. 그 다윗이 시편을 대부분 지었어요.

사무엘상 25장 3절에,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나발과 다윗이 맞닥뜨렸어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처럼 보이죠? 아닙니다. 인간 대 하나님과의 만남이에요. 왜? 다윗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다윗은 선지자예요. 다윗의 말하는 그 안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영이 함께 있어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자기가 썩는 것을, 자기가 미련한 걸 모른다고요. 다윗이 나발에게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요새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인간들이 왜 이리 많지? 내가 돈 있다고 해서 네가 찾아왔구나. 난 너 같은 인간에게 돈 안 준다”라고 했어요.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삼상 25:10-11).

그때는 거기 아내가 없었어요.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아, 이 사람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구나.’ 후딱 총명한 그 아름다운 여인이 남편을 버리고, 남편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윗에게 먼저 찾아가서 미리 방어를 합니다. 사무엘상 25장 25절에,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남편을 그런 식으로 불러요.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하면서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 사람이 너무 미련해서 ‘이 사람이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 했기 때문에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이랬어요.

사무엘상 25장 38절에,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잘 들어보세요. 다윗이 움직일 때 사람들은 다윗이라는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하겠죠. 물리학에서 전자가 움직이면 여러분들은 전자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죠? 전자는 속도가 굼벵이 속도예요. 전기의 흐름이 1초에 30만km라고 하는 것은 전자장의 속도가 그렇게 센 거예요.

전자가 움직일 때 전자장이라는 환경, field가 함께 있듯이 다윗이 움직일 때 다윗이 움직인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함께 움직인 거예요. 이걸 누가 아느냐? 총명한 나발의 부인이, 아비가일이 그걸 눈치채서 다윗을 대접했더니만 남편을 10일 후에 치는데 누가 쳤는가? 다윗이 안 쳤어요.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생각하기를, 그 다윗을 하나님이 지켜준다고 생각하죠? 아닙니다. 시편 16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는가? 썩어 죽게 하십니다. 썩어서 죽게 해요. 16장 8-10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썩지 않게 한다는 것은, 썩어서 음부에 가더라도 주께서 음부까지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주께서 따라와요. 왜? 그 따라온다는 근거는, 말씀이 따라오니까요. 말씀이 따라오니까.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썩는 재물과 같이 재물도 썩고, 나도 썩고, 자아도 썩고, 다 썩는데 썩는다는 그 내용은 나를 떠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썩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에 나와요.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가지고 사람들을 먹인다고 할 때 사람들은 ‘배고픈데 잘됐다. 실컷 먹자.’ 어디에 관심 있느냐 하면, ‘주께서 은혜 주셔서 실컷 떡과 고기를 먹었습니다’ 하는 거기에 관심을 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관심을 두느냐? 요한복음 6장 12절,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남은 조각을 거두라는 거예요. 왜? 신명기 8장에 나오는 만나기 때문에, 만나.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무엇이냐’(출 16:15), 만나의 뜻이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거예요.

인간이 만나를 주워 먹으면 ‘이것이 무엇이냐?’의 그 ‘무엇’, 그 무엇이 인간세계,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시장에서 나오지 않는 상품인 그 무엇이 내 속에 들어와 버리면 나는 그때부터 무엇으로 바뀌느냐? 만나라는 재물로 바뀝니다, 만나라는 물체로 바뀌어요. 내가 모르는 자아, 내가 나를 보면서 ‘내가 누구지? 내가 무엇이지? 내가 어떤 존재지?’ 이게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아는 ‘나’는 썩게 하고 내가 모르는 “나”로 바꿔버리는 거예요.

이것을 ‘혼재성’이라 합니다. 혼재, 나라는 존재 말고 하늘의 존재가 섞여 있는 거예요. 섞여 있는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 14절입니다. 강의 시간 같으면 듣는 사람 중에 누가 읽어 보라고 하고 싶은데 강의 시간이 아니니까 제가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이게 요한복음 11장 14절입니다. 나사로는 아직 안 죽었어요. 나사로 안 죽었습니다. 병들었지 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했어요.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움직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즉 나사로가 죽기 전부터 이미 나사로는 죽음과 삶이 혼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혼재성이에요, 혼재성. 내가 아는 존재와 주님 말씀 안에 품어 있는 내 존재, 이게 나사로라는 육체에 섞여 있는 거예요, 혼재되어 있는 거예요. 그 주의 말씀이 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진짜 성령 받은 그 관심사는요,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이 말씀 안에 있는 “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아는 그 ‘나’하고는 별개로 주께서 말씀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주님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나”예요. 이 말씀 자체를 인간의 개입 없이 실현하신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던 겁니다.

어디서 만들어내느냐? 악마하고 상호작용 해서, 악마에 있던 그 나를 썩게 하는 방식으로 나를 끄집어내서 창세 전에 나를 만드신 그 말씀 안의 나로 천국에 가게 하시는 주님의 일관된 작업입니다. 내가 관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신앙에서 내가 관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평생 썩으세요. 나이 들어 썩고, 어떤 사람은 나이 안 들어도 썩고, 썩으세요.

이것을 다윗은 믿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썩는다는 것을 믿었고, 썩게 하시는 그분이 나를 부활시킨다는 그것을 믿었어요. 이 사실을 성령 받은 베드로가 이야기해요. 사도행전 2장에서. 시편 16편의 이야기를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2장 26절부터 죽 보게 되면, 주의 거룩한 자가 썩지 않는다는 것을 다윗이 이야기했을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한 다윗은 썩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아, 다윗이 뭔가 착각했나?’라고 할만해요. “‘나는 썩지 않고 부활의 영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갑니다’라는 이야기를 다윗이 했습니까?”라고 베드로가 물어요. ‘그것은 시편 16편이 다윗의 시니까 다윗이 그렇게 했겠지요.’ “아닙니다! 다윗이 한 것이 아니고 다윗의 허가 없이 다윗 속에 먼저 침투한 주님의 말씀이 다윗을 통해서 발현되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행 2:30-31).

“따라서 성령 받은 성도들이여, 여러분도 다윗처럼 사세요. 말씀이 여러분을 썩게 하실 거예요.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앙에 개입하지 못하게 막을 겁니다.” 뭐 전도를 어떻게 하고, 선교를 어떻게 하고…, 그런 것 다 치우고 그냥 썩으세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것은 말씀 속에 들어 있지를 않아요. 썩는 주제에 뭘 해요? 썩기만 하면 되지 새삼스럽게 뭘 해요?

성도 가정의 바른 자녀 교육, 그런 것 없어요. 다윗이 전한 그 말씀대로 예수님만이 안 썩어요. 안 썩고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뭐냐? 아프기 전에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죽은 것을 확인하고 “거봐, 내 말 맞지? 내가 죽었다고 했잖아.” 제자들은 “나사로가 그냥 아픈 줄로만 알았는데요?” “아니야! 아픈 것이 아니고 죽었어!”

그래서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가자! 나사로는 죽었는데 ‘나사로가 죽었다’라는 그 내 말은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보여줄게.” 주님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요 11:39)고 하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사로는 이미 썩었습니다” 한 거예요. 썩어야 부활되지요. 썩지도 않았는데 무슨 부활이 있습니까? 썩은 척? 죽은 척? 안 돼요! 주의 말씀은 주의 말씀만 해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만 뱀의 후손과, 악마와 싸우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뭘 싸워요? 못 싸웁니다. 뱀의 후손과 싸우는 상호작용, 악마와의 상호작용은 예수님의 몫이에요, 다른 몫은 없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요한복음 12장 43절에 보면 인간들은 자꾸 자기 영광만 취한다는 거예요.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얼마나 정확하게 봅니까? 자기 영광만 챙긴다는 거예요. 자아의 영광. 이 말은,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교회 백날 다녀보세요. 은혜받았다고 우기지 마세요. 은혜받았다는 것은 ‘아, 못 나가는구나.’ 그것을 아는 게 은혜받은 것이지 은혜받았다고 으스대는 게 아니에요.

디모데후서 2장 9절에서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나는 옥에 갇혔는데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 “여러분 보기에 내가 막 전해야 복음이 전파되는 줄로 알지요? 아니에요. 나는 옥에 갇혔는데 복음은 나처럼 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이 말이 진짜라면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금 이해해야 해요. 마태복음 25장 35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내가’라고 했거든요.

그렇다면 성도의 특징은 뭐냐? “성도가 주릴 때에 주님은 주리지 아니하고, 성도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네가 나그네 되든 말든 외롭든 말든 주님은 나그네가 아니고, 성도가 벗었을 때 주님은 옷을 입었고, 성도가 병들었을 때 주님은 병들지 않았고, 성도가 옥에 갇혔을 때 주님은 옥에 안 갇혔잖아.” 그러면 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왜 걱정합니까? 병들었다고, 돈 없다고 왜 걱정합니까? 옥에 갇히고 병들어도 그리고 목말라해도, 그게 주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현장인데요. 진리 앞에서 모든 인간은 사라져야 됩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사라지는데 사라지도록 해줘요. 썩어서 썩은 홍어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 썩게 하시는 이것이 “아이고, 살다 보면 다 썩는데 허무하다.” 이것은 상실이고, 내가 살아 있으면서 내 감각으로 측정하는 상실이고 주께서는 외부에서 말씀으로 우리를 공격해요. 우리가 썩는다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지 이것은 내가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파악하나 안 하나 어쨌든 썩어요. 이것은 ‘be동사+~ing’ 그냥 진행형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이 말씀이 살아 있는 거예요. 야고보의 이 말씀이 살아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요한복음의 이 말씀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 말씀 안에 우리가 몰랐던 미지의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창세 전에 이미 구원받은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모습은 나사로처럼 두 개의 존재가 우리 안에 혼재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아는 ‘나’와, 그리고 말씀 안에 있는 “나”가 같이 겹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령께서!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다음과같이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그전에 베드로가 뭐라고 했느냐? 21절에,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니까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거든요.

베드로가 ‘우리가 있는데 주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주님께서는 주저하지 않아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게 앞뒤가 맞아요?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네 존재는 지금 악마와 혼재되어 있다.’ 너는 말씀이 오기 전에 그걸 몰랐지요. 착하고 바르게 살면, 말씀대로 살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성도 되는 줄로 알았어요. 성도는 주님의 효과에요. 십자가의 효과에요.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싸운 그 효과가 성도지 내가 노력한다고 성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말조차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다음 단어는 더 충격적입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람 자체가, 사람 덩어리 자체가 전부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이 만든 재물의 가치는 전부 다 어디서 구현된다? 시장에서요, 시장에서, 마켙에서 구현돼요, 인간의 가치라는 것은. 나의 가치는 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아무도 나를 취직시켜 주지 않으면 나는 가치 없는 거예요, 무가치에요. 인간은 그걸 의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말씀을 봐도 그 말씀 가지고 자꾸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썼지 말씀 속으로, 주님이 살아 있고 나는 그 앞에서 사라진 존재, 이미 나사로처럼 죽은 존재로 주께서 다루신다는 것을 몰랐는데 이제는 말씀을 통해서 아시는 그러한 감격과 고마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어떤 자세와 태도로 대합니까? 착하고 바른 신앙인 되려 하는 그것이 마귀 짓이라는 것을, 그게 사탄의 짓인 것을, 사탄이 원래 원하고 있었던 것임을, 사탄이 사주하는 종의 모습이 그 모습인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기쁨과 고마움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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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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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