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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반복되는 관계 요한일서 5:20 260910설교요한일서

서울강의20260910b 요한일서 5장 20절(반복되는 관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요한일서 오늘 본문 5장에 보면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예수님이 곧 영생이라는 이것도 인간으로서는… 예수님은 사람이잖아요. 예수님은 사람이니까 ‘영생을 주는 분이다’ 이렇게 하면 이해되는데 ‘예수님은 곧 영생이다’. 어떻게 예수님=영생, 이게 equal이 되고 동일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도 요한 너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이 유효한 거예요.

베드로도 그렇고 사도 요한도 그렇고 나머지 열한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이들이 예수님 십자가 질 때 현장에서 도망갔습니다. 체포될까봐 도망갔어요. 어떤 제자는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예수님 체포되고 난 뒤에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요.

그걸 일본말로 시마이(しまい)라 해요. 한때 예수님하고 잘 놀았다. 그런데 우리 창업주가 체포되어서 죽었어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과 있었던 게 한낱 추억이 되죠.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라는 거예요. 좋았지, 좋았어. 물 위를 걷고, 뭐 오병이어할 때 신났고,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진다 할 때 그때는 정말 대단했고,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열두 보좌를 다스리라 할 때 열두 보좌? 그럼 우리도 다스려? 장관쯤 되는 거야? 장관이 문제지만… 장관쯤 되는 거야? 이러면서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그런데 그게 전부다 부도수표에요. 허수였어요. 그런 게 성립되려면 우리 대장되시고 우리 교주되시는 주님은 세상에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뭐 앞서서 병 고치고 할 때 수많은 지지 세력이 있을 때는 그야말로 진짜 유다나라를 평정할 것 같은 왕으로 오셨다고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왕이에요- 우리의 왕이 될 감이 오셨다, 일종의 옛날에 궁예 비슷하죠, 그렇게 사람을 부풀게 해놓고…. 유대 당국도 참을만큼 참았죠.

언제 못 참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성전 뒤집어버릴 때 더 이상 우리의 인내심도 끝났다 해서 “즉각 체포해!” 성전을 뒤집어버렸으니까. 거기서 동전 바꿔주는 사람, 그리고 제물 파는 사람을 다 뒤집어버렸으니까. 이것은 유대나라 정체성 자체를 도전하는 것으로 봐서 ‘안 되겠다. 체포해야 되겠다. 군중들의 반란이 염려되니까 급작스럽게 체포영장 발부해서 빨리 체포해서 빠른 시일 안에 재판해서 죽여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조기에 회의 소집해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걸림돌이냐? 본디오 빌라도가 걸림돌이 되었어요.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되는데…. 그들의 인식을 한번 보세요. 그들은 여호와 믿지요, 율법 믿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다는 것을 다 믿잖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빠진 게 뭐냐 하면 이제나 저제나 어쨌거나 저 예수는 미치광이다. 왜? 우리가 건설한 이 구조, 체제를 견주어보니까 맞는 게 없어요. 출신도 갈릴리 출신이에요. 어디서 산골짜기 출신이? 덜 떨어진 사람들이 사는… 특히 혼혈아잖아요. 정통 핏줄이 아니란 말이죠. 순수 혈통이 아니고 혼혈 아들이 밀려와서 어떤 핏줄인지 구분도 안 되는 출신이 어디서 어쭙잖게 병 좀 고친다고, 그리고 확인되지 않는 기적들, 물 위를 걸었다든지 그런 기적가지고 어디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가?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 당시 유대 당국자라면 어떤 조치 내리겠습니까? 어떤 조치 내리겠어요? 당연히 진즉에 없애야죠. 국기를 흔들잖아요. 치안당국에서 가만두면 안 되지요. 자칫하면 경찰도 바뀌어야 돼요.

그러면 그 예수님한테 붙어 다니는 열두 제자는 또 뭐에요? 한패거리죠. “걔들 직업이 뭐래?” 당국에서 물으니까 “뭐 고기 잡는 어부랍니다.” “아휴, 이거 뭐 신학교 출신도 아니고.” 명문 있는 과학고 출신도 아니고, 엘리트도 아니고. 그게 뭐에요? 세리나 있고. 떨거지들이네, 떨거지들. 그런데 제자들도 그걸 알아요, 몰라요? 알죠. 그래서 제자들도 굉장히 조심했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는 그냥 말조심하고 행동 조심하는 게 최고다.

그때 사도 요한은 뭐했어요? 떨거지였습니다. 고기 잡으러 갔어요. 끝났어요. 빠이빠이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아닌데 그 두 사람이 시마이하고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이 바짝 붙어있는 걸 몰랐어요. 인간의 감각으로 예수님의 활동을 볼 수 있는 역량이 없어요.

사도 요한은 그냥 그걸로 게임 오버, 끝났습니다. 누가 찾아왔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온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를 오늘 요한일서 5장 20절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뭐를 주사?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 현장에 있어도 우리도 떨거지들이라는 거예요. 지금 정부당국자의 유치장이 더 무서워요. 이미 돌아가신 분을 찾아서 뭐 어쩌겠다는 거예요? 부활해서 나타났다는 소문은 있지만 늘 나타나야지. 들쑥날쑥하는 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시간에 하는 게 뭐냐 하면 이 사도 요한의 편지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하는 자녀가 된 자에게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예수님과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진해서 나왔기 때문에. 자진해서 예수 믿는 것을 주님께서는 거절합니다. 안 받아줍니다.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예수 믿는 이유가 있다고요.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예수 믿는데 어떤 의미를 둔 거예요. 그런데 이 의미를 누가 뒀어요? 내가요. 그러니까 이 의미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 나에서 나온 의미에요. 나는 (예수 믿어서) 의미를 계속 지속시키고 싶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결코 무의미한 존재이기를 내가 싫어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죽습니다. 의미 없습니다. 굳이 전도서 거론 안 해도 바람, 그리고 강물, 그들이 순환하며 도는데 의미 없어요. 그냥 의미 없이 돌아요, 그냥.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의미 없습니다. 안개고 의미 없어요. 의미 없는데 마귀가 딱 꼬집은 인간은 의미 없음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내가 애 키우고 취직했고 결혼했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고 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자꾸 부여하는데, 그것은 다 흘러간 과거지사입니다.

인간의 시공간이 문제가, 시간이 농축이 안 된다는 거예요. 자꾸 하나의 강물처럼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지나가보면 현재는 없는데 ‘왕년에 그랬다.’ 자꾸 왕년에, 왕년에…. “왕년에 거 한번 내봐.” “앨범?” “앨범 말고.” 지나간 앨범, 그것도 퇴색하잖아요. 지금. 과거에 뭐 어떤 일을 했든, 과거에 뭐가 좀 잘나갔든, 과거 고등학교 때 17대 1로 싸워 이겼든 간에. 맞았지, 뭘. 지금은 다 의미 없이 흘러가버린 거예요.

딱 하루치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요. 오지 않았으니까 의미 없고, 지나간 것은 의미 없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는 우리 한 날이 항상 최후의 날이에요. 하루치, 일회용이에요, 일회용. 일회용만 쓰는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되면 뭘 할지 그것은 우리 소관 아니에요. 오늘 염려는 오늘로 끝나요. 회사 직원들 마지막에 장부 정리하듯이 항상 끝내야 돼요. 하루가 지나면, 시간이 지나면 시간 속에 살았던 우리도 같이 의미 없게 무의미로 없어져요.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게 바로 요한일서 5장 20절이에요. 의미는 네가 살아있는 한 내가 계속 의미를 줄게. 의미 생겨나야 될 곳에 줄게. 그게 뭐냐?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고, 다시 찾아오고, 다시 찾아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요한일서 5장 20절을 한 번 더 읽어볼게요.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결국 영생이다 이 말이거든요.

여러분, 이 본문을 봤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본문을 보고 어떤 느낌이 옵니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착같이 야무지게 이 말씀 붙들고 살아야지!”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그럼 본인이 야무지게 붙들고 사는 게 본인한테 의미가 되어버린 거예요. 영생 얻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이용하는데, 그러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덜 야무져서 예수님 버렸습니까? 열한 제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 버린 것이 그들이 덜 야무져서 그렇습니까?

사태를 보니까, 자기 지각을 총동원해보니까 이미 이 게임은 어떤 게임이다? 끝난 게임이에요, 끝난 게임. 그래도 옛날에 했던 직업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고기 잡는 거. 고기 잡을 때 요한복음 20장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고기 잡나?” 이렇게 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야, 이거 의미심장하죠?

의미는 주님한테 온다고요. 내가 “너 사람 낚는 어부 되라.” 할 때 그때 그 멘트를 다시 날리는 거예요.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했죠. 떠나라 했는데, 어디 예수님이 우리 말 듣습니까? 안 떠납니다. 너희들이 완전히 게임 끝났을 때, 손 놓고 이제는 예수님과 빠이빠이라 할 때 그 때를 기다려서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약간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제가 뭐 하나 준비해왔는데요. 이 노래 제목은 <님 그림자>에요. 님 그림자를 이미지화 못해서 내가 chat GPT 도움을 좀 받았어요.(첨부파일 참조) 달이 떠 있는데 앞에 남자 있고 여자가 뒤따라간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사를 한번 봅시다.

님 그림자(1983)
노사연 노래 (김욱 작사, 작곡)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남자가 여자 버리고 떠날 참인 모양이죠)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뭐 앞서간다고 후딱 가니까 내 뒤에 따라오는 마음은 알 길이 없죠)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은 날 없네
(가다가 남자가 너무 빨리 가서 헤어져 갔어요.)

이걸 이제 설명합니다. 설명을 하려면 좀 길어요. 그래서 일단 노래를 들으시고…. 노래 들어야 돼요. 그냥 하면 잘 몰라. 이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고 신앙생활 어떻게 하냐,가 아니에요.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붙잡는가,가 아니라 이미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지금 성령이 찾아온다는 것은 나 이전에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첫사랑, 그 사랑의 계명 안에다 집어넣은 관계에 대해 주께서 되새겨주는 거예요. 그게 지각이에요. ‘네가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우리가 원래 이런 사이였잖아.’라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만 요한일서 5장 20절이 유효한 거예요. 그 사람에게만.

그래서 그림을 보게 되면 남자가 앞에 가고 여자가 뒤따라간단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옛날에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열두 제자가 예수님 믿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주께서 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셨죠. 돌아가시고 시마이, 끝나버렸어요.

그럼 인간의 지각의 한계, 인간의 지각의 결정은 뭐냐? 이제 예수는 옛날 추억이니까, 과거니까, 한때 좋았죠. 물 위를 걷고 뭐 오병이어할 때는 좋았는데 그건 다 지나간 거고, 지금 살아있는 내 몸은 밥 먹고 살아야겠다 해서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죠. 찾아와서 이 둘의 관계는 네가 끊는다고 끊어질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자각시키는 거예요. 이 관계는 내가 이제 예수 안 믿는다 해서 끊어질 관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소급해서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한번 선택한 사람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그 관계가 바로 영생의 관계에요, 영생의 관계. ‘예수 믿을 때 영생 받는다.’가 아니고 이것은 창세 전부터 있었던 관계가 지금 주님의 시공간과 더불어 와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 거예요.

<님 그림자> 노래에 댓글이 이런 게 있었어요. 댓글을 적어왔는데 읽어볼게요. ‘앞서 간 와이프가 간지 내일이면 49일이군요. 당신이 그리워. 아들 성민이가 많이 힘들어해.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우리 잘되도록 좀 도와줘,’ 또 그 밑에 댓글, ‘남편 보낸 지 일주일, 왜케 눈물이 나는 걸까요? 못 해준 게 생각나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아립니다.’ 이 댓글을 생각하면서 2절 가사. 댓글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가족이 죽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님 그림자 밟을 날 없어요. 없으니까. 죽었으니까. 노래 잘하죠? AI 가수입니다. 인공지능 가수에요. 영생이란 관계입니다, 관계. 이것은 창세 전부터 정해진 관계에요. 그래서 요한일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네가 왜 네 신앙에 관여해?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데, 주님이 줬는데 네가 왜 믿음이 있니 없니 제3자인 네가 왜 나서냐 이 말이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짓이 없으니”. 사도 요한이나 사도 베드로에게 이미 그들이 예수님을 버린 상태잖아요. ‘고기 잡자.’ 그런 상태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으로 찾아왔다면,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복음 전할 때 자기 자랑하겠어요? 못하죠. 왜? 자기 쪽에서는 이미 정리했잖아요. 나 예수 안 믿는다고. 이제는 내 살길만 찾겠다고. 그런 입장에서 주님이 난데없이 찾아와서 옛날의 관계를 회복할 때, 그 관계가 바로 새 계명, 곧 사랑입니다.

방금 제가 사도 요한 이야기했는데, 그럼 사도 바울은 이런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나와요. 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본문을 가지고 오늘날 전 세계 교회나 한국 교회에 전해보세요. 여기서 사람들은 시험 듭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네.’로 끝나버려요. ‘이렇게 주님 만났으면 좋겠네.’로 끝나죠. ‘그렇게 해서 만나보도록 내가 노력할게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을 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버린 적이 있어야 사랑이 내 노력이 스며들지 않는, 내 노력이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주님의 거저 찾아오심만 고스란히 남는데, 평소에 천국 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들을 해놨는지 주님을 안 떠나려고 아주 용을 썼어요. 본심은 자기 자신의 잘남과 의미 때문에 그렇게 애써놓고, 교회 가서는 대외적으로 남들에게 믿음 생활 착실히 한 걸로 이렇게, 사회생활이니까 티내려고 했단 말이죠.

그건 인간들에게는 통하는데 이 본문을 딱 대하면 대번 하는 소리가 “주님, 저 자신 없습니다. 애는 쓰겠는데 자신 없습니다.”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애쓰지 말고 나를 한번 버려봐라.” “에이, 어떻게 주님을 버립니까? 십자가 지시고 우릴 위해서…” 또 주저리주저리 자기가 아는 신학과 다 동원해서 “그렇다고 어떻게 주님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하거든요.

남은 시간은 주님의 시공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세요. 주님의 시공간은 우리를 버립니다. 버리는 식으로 작동해요, 주님의 시간과 공간은. 이 시간 공간 이야기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어려워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공간은 우리가 알아요. 내가 있는 주변 환경, 끝. 쉬운데요. 시간도 알죠. 시간은 과거 있고, 현재 있고, 미래 아는데 이 시간과 공간 둘을 겹쳐버리니까 난감한 거예요. 시간과 공간, 그걸 왜 겹쳐? 따로인데?

그러나 쉽게 말해서,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 이거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여러분 대구강의 안 들었다 치고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톰크루즈가 <미션 임파서블> 첫 번째 영화에서 컴퓨터에 손댈 때 위에서 환풍기 뚫고 내려오잖아요. 양팔 쭉 벌리고 내려오잖아요. 그때 톰크루즈하고 환풍기 사이에 뭐가 있어요? 끈이 있죠. 그 끈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

신약에 성령이 난데없이 등장해버리죠. 그런데 구약에서부터 꾸준히 성령에 대해서 소개해왔어요. 그때는 성령이 아니고 성신이에요.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성신은 하나님의 영이에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으로 구체화된 거예요. 물론 하나님 영이지만 예수님의 영으로 구체화된 게 성령입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신의 시대에서는 아직 언약이 남아있어요. 언약이 남아있는데 성령은 끝났어요. 아까 크게 쓴 게 뭡니까? ‘거짓이 없다’고 이야기했죠. 거짓이 없죠.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평할 수 없어요. 사도 바울 방식으로 하면 로마서 8장 34절,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지금 사도 바울은 그 사람 개인의 성격이나 욕심이 있다, 나쁜 짓했다, 전과 몇 범이다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어떤 시공간 속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그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누구의 평가 대상이 안 됩니다. 평가의 대상이 안돼요.

이걸 좀 더 설명하기 위해서 시편 30편 1-3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이 대목만 보면, 전쟁 중에 있는데 주님께서 특별히 나를 지목했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걸 설명하면, 나는 언약의 대상이죠. 언약의 대상일 경우에만 하나님과의 만남의 대표자기 때문에 자아라는 게 형성돼요.

따라서 여기서는 ‘다윗의 시’라 되어있죠. 다윗의 시인데 신약에 와서 설명하면 이게 예수님이 되시는 겁니다. 다윗은 선지자고. 더 해석하면 ‘다윗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 영, 하나님 영이 아니고 그리스도 영이 있어서 장차 오실 메시아가 고난 받고 영광 받는 것을 그들에게 옛날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말씀했느니라.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나와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그래서 여기 시편 30편 2절을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절이 중요해요.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되어 있죠. 자, 인간의 시공간은 죽으면 끝나요. 죽어서 어떻게 될지 그건 인간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시공간은 확장했어요. 인간이 아는, 인간의 육신이 죽고 난 뒤 죽음의 세계까지라도 누가 관여한다? 하나님의 언약이 관여하는 겁니다.

죽었으니까 ‘아이고, 나도 손 떼자.’ 이게 아니고 죽고 난 뒤에도 음부에서도 부활시키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게 인간의 시공간과 달리 하나님께서 새로 갖고 온 시공간이에요. 죽고 난 뒤에, 시간 문제죠.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는데? 공간 문제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언약 안에 품고 이 땅에 내려온 거예요.

그 때 구약 시대가 성신 시대죠. 지금 성령 시대, 아까 톰크루즈가 내려올 때 끈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오셨다는 그것은 성신 시대 설명하고 난 뒤에 설명해드릴게요. 성신 시대에 약속의 땅에 있을 때,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라 후딱 지나갑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올 때는 몰랐어요. 나올 때는 자기가 어디 가는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그들이 살던 곳은 애굽이라는, 인간들이 아는 시간과 인간들이 아는 공간이었습니다. 시간은 어렵기 때문에 시간은 빼고,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 있던 백성들이 누구 백성이냐 하면 출애굽 1장에 보면 요셉의 백성들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백성이거든요. 요셉이 창세기 끝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해골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해골을 가져가라. 해골은 하나의 물건이죠. 그런데 “해골을 가져가라. 이 해골이 계속 앞에 있는 시간까지 너희를 이끌 것이다.”(창 50:24-25)

요셉의 해골은 공간이 아니고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이 해골이 멈추는 곳에서 새로운 공간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먼저 주어지고, 시간 다음에 시간이 멈추는, 해골이 멈추는 그 세겜 땅에서, 해골이 멈추는 그 땅이 새로운 약속의 땅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430년 동안 애굽에 갔잖아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 아는 이야기할게요. 애굽에 있으면서 히브리인들이 그 애굽에서 자기가 나오려고 했습니까, 안 나오려고 했습니까? 안 나오려고 했죠. 자기가 아는 시공간이 그거거든요. 우리를 내보내려면 어디로 간다,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죠, 구체적으로.

입을 다물어요. 공간 이야기 안 해주죠. 언제쯤 도착한다 이야기해야죠. 시간 이야기 안하죠. 애굽에 사는 인간들이 흔히 아는 시간과 공간을 좌표로 표현해서 x축을 시간, y축을 공간 자체로 본다면, 이 시간과 공간 좌표계가 한 25도 회전해버릴 때 시간과 공간이 반듯하게 이해되는 사람이 어지럽겠죠. 낯설고 거부감이 나타나고. 이 두 좌표를 겹쳐버리면? 이걸 좌표계라 하고 관성계라 하는데 기존에 있는 기준, 기준계가 달라져버리니까.

내가 애굽에 살던 사람이에요. 노동하고 밥 먹고 사는 그게 전부에요. 이게 우리가 아는 이해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모세로 하여금 이 기준계를 없애버렸어요. 그 기준계 하나가 뭐냐 하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라버리니까 난데없이 종이든 왕의 아들이든 다 죽었어요. 야무지게 다 죽여버렸어요. 인간이 얼마나 착하냐 그런 건 아예 묻지도 않고. 기준이 달라졌어요, 기준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기준이 되어버린 거예요. 애굽 나올 때.

나왔어요.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 살던 사람이라서 자꾸 기억만 하고 있는 거예요. 과거의 시간에 얽매여서 기억만 한다고요. 야, 그때 참 하나님이 홍해 가를 때 신났습니다. 문제는, 신난 건 좋은데 앞으로 가면서 그들은 원망하고 있다는 거예요. 무려 몇 년 동안? 광야 40년 동안 원망했어요. 어디로 갑니까? 우리가 좋아하던 부추, 파, 수박은? 그게 먹고 싶으니까 우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정력에 좋은 부추. 부추가 정력에 좋은지 처음 알았네. 정력에 좋은 부추, 마늘 같은 게 그렇게 먹고 싶다는 거예요.

자, 따라온 히브리인들은 어디에 속한 기준계였습니까? 애굽 사람이었죠. 애굽의 삶을 그대로 유지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뀐 기준을 따라잡질 못해요. 따라잡질 못하니까 그들은 강력하게 모세에게 항의합니다. 그들이 자기가 알아서 물 찾았으면 물 찾았을 거예요. 그런데 물 찾다 찾다 못 찾으니까 모세한테 책임 전가한 거예요. 그런데 모세는 그걸 어떻게 해석했느냐?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가르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이렇게 해석해버려요.

물 없어 물 달라했고 양식 없어 양식 달라한 것이 애굽 나라에서는 도전입니까, 아니면 당연한 거예요? 당연하죠. 왜? 모세가 지도자니까. 지도자가 우리를 인도하는데 양식 없고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면, 분명한 비전과 그 이유를 제시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 본인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광야에서 나왔던 그들을 인도한 것은 모세가 아니고 누구입니까? 새로운 시공간, 누구입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 게다가 만나. 애굽에서 먹어도 보지 못한 만나. 자꾸 새로운 것이 끼어드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이에요.

성령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걸, 미리 예측한 걸 성령이 도와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기존에 이 땅에 살면서 돈 벌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어찌 그리 잘 알고 극구 그 추진과 그 계획과 목적을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성령께서 우릴 인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루라도 주께 원망안한 날이 없어요.

“우리 애가 시험 쳤는데 2등이 뭡니까? 1등 시켜주면 하나님 뭐 덧나십니까? 과외비만 해도 1등 하고도 남는데 왜 계속 2등입니까? 삐쳤습니다.” “치과를 갔는데 이번 치과는 왜 돈이 많이 듭니까?” 하나님이 “치료 잘 됐나?” “잘 된 건 맞는데 돈이 좀 비싼 거 같아요.” 우리는 도대체 원망 없이는 하루를 지나가본 적이 없어요.

누구 탓을 해야 나의 의미가 생겨요. 내가 정당화된다고요. 내 행동의 정당화의 구실을 찾는 데에 하루 종일 보냅니다. 내 탓 아니고 남 탓으로 돌리는 데에. 남 탓, 남 탓, 끝에 가면 누가 있어요? 하나님 탓이죠. 그런데 그걸 하다하다 보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이게 복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오는데, 그게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는 거예요. “너는 어제부로 죽었어야 돼. 그런데 살려주는 것은 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영생이 따로 있어.” 영생을 알려주기 위해서 계속 끈질기게 죽을 때까지 살려주시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오늘이 마지막인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죽을 때까지는 끈질기게 살려주면서 제발 자꾸 위선 떨지 말고 원망은 원망은 다 쏟아내라. 자꾸 남편보고 원망하지 말고, 나한테 직접 원망해. 자식보고 닦달내지 말고.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면서 하나님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런 짓하지 말고. 네가 지킨다고 지켜지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나는 이미 네 죄를 대신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내가 대신한 그 가치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위해서 네게 남아있는 모든 죄를 나한테 매일같이 일회용으로 쏟아내라 이 말이죠. 원망하고 불평하고.

성경에 바리새인이 왜 있어요? 네가 바리새인이라고 바리새인이 있는 거예요. 남 욕할 게 못돼요. 성경에서 하지 마라 하는 것을 우리가 하는 거예요. 그걸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걸 하게 만들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우리가 익히 안다는 요한일서로 인도해요.

여러분 요한일서 1장부터 오늘 마지막 5장까지 끝냈죠? 좀 압니까? 좀 알아요? 처음 온 사람이나 계속 들은 사람이나 이 요한일서가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니고 경험하고 체험하는데 그 체험이 뭐냐? 내 뜻대로 안 되는 가운데서 요한일서가 영생의 이름으로 살아나는 말씀이죠. 아,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고 우리 주님이 살아있구나.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실패가 곧 성공이라는 그 공식을 익혀가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내가 실패한 그것이 온전한 주님의 사랑에 내 행함이 포함되지 않는 온전한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데에 늘 주께서 성공하고 계시는 겁니다. 나는 실패하고 주님은 늘 성공하시고. 주님을 늘 떠나가고 우리는 주님의 그 님 그림자 못 밟았다고 서러워할 때 다시 한 번 말씀이 있잖아, 하고 말씀이라는 님 그림자를 찾아보죠.

시공간을 설명하면 어렵습니다. 기준계가 바뀌어요. 대표적으로 기준계가 바뀐다는 것이 사사기에 나오고요, 그 뒤에 사울 때 또 나와요.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주변에 이방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게 바로 그들이 여전히 애굽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의 뜻은 뭐냐 하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약속의 땅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어제 수요 설교한 것처럼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약속이 있는 게 아니고 약속, 말씀, 계명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관계라 했죠? 혼자 믿는 게 믿음이 아니에요. 주님과 우리 사이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성령을 주시는 그러한 관계가 바로 그게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에요. 주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어디서 왔는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오실 때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성령이 개입돼요. 성령이 개입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 거예요. 그 믿음과 소망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왜? 거짓됨이 없으니까. 수능 출제자가 문제 출제해놓고 답을 다 가르쳐주는 거예요. 아니, 답을 다 가르쳐준 정도가 아니고 우리한테 백 점이래요, 백 점. 단번에 거룩함을 입었도다. 뭐했는데? 도박했다고 거룩한 거예요? 술 먹었다고? 뭐 한 것도 없는데 거룩하대요, 우리보고. 그것은 네가 거룩하다는 게 아니라 네가 거룩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게 새로운 시공간이에요.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님 그림자 가사 내용은 사실은 성경하고 안 맞아요. 왜냐? 계속 따라 붙여야 되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동그라미를 그리면 이 동그라미가 새로운 시공간인데 성령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안에서, 새 언약 안에서, 사랑 안에서, 소망 안에서, 믿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함께 있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에게 육신이 있죠. 육신은 소재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육신은 단독자에요. 단독자의 의미를 우리가 챙기는데, 이 육신의 출신이 애굽 출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말씀 듣고 설교 들어도 ‘나는 내가 제일 소중합니다.’ 문 열고 나가면 다 그래요. 그걸 인정해야 돼요. ‘내가 너한테 질 줄 아느냐?’ 전부 이런 거예요. ‘우리 죄인입니다.’ 이런 거 없어요. ‘내가 너한테 지면 난 사람이 아니다.’ 이런 거요. 모든 것응ㄹ 비교하고 경쟁하고 다투고 스트레스 혼자 다 받고. 스트레스는 혼자 다 받는 거예요.

이게 사사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이 주위 나라만큼 잘 살게 안하니까 묻는 거예요. “너희 나라는 어떻게 잘 살았어?” “그거는 기도를 빡세게 하고 하나님께 거대한 거창한 예물을 바치니까 우리 믿는 바알신이 복을 주더라.” 복을 주더라, 하는데 진짜 복을 줘요, 안 줘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복 받게 만들어요. 왜? 이스라엘을 약 올리기 위해서. 그래야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실패를 해야 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이 압제당할 때 그들이 가만있었겠습니까? 아니면 그 주변에 압제하는 나라에게 온갖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겠어요? 다 했죠. 주께서 그걸 다 아무 소용없게 만들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애굽에 있을 때 누구 덕분으로 왔느냐?” 이걸 계속 물어요. 이걸 신약으로 하면, “네가 누구 덕분에 죄 사함 받고 영생 얻어서 천국 가느냐?”를 신약 성도한테는 성령을 통해서 계속 물어요.

누가 너보고 전도를 천 명하라 하던가? 십일조를 따박따박 하라 하던가? 봉사를 하라 하던가? 성경에서 봉사하라, 찬양하라 나오죠? 이 모든 것은 그 말씀을 내가 지키겠습니다, 하고 덥썩 무는 거예요. 주님이 쳐놓은 미끼를 이 바보 같은 인간 우리들이 이건 내가 잘 지킨다고 덥썩 무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 이런 걸 성령의 열매라 하니까 그 열매를, “야, 우리 집안은 DNA가 아버지 순하지, 엄마 순하지. 날 때부터 온유하고 양선하고… 이건 시키지 않아도 그래. 이거는 성령의 열매다.”하고 덥썩 물어요. 그런데 날 때부터 DNA가 아버지 폭력적이고 엄마 희한하고 해서 도저히 못 참아. 이런 사람한테 성령의 열매 얘기하면 짜증나요. ‘주여, 내 성격을 고쳐 주옵소서.’ 성격은 고치되 죄는 안 빠져요. 안 빠지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계명적 역할이에요. 새 계명적 역할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가 십자가의 영역으로 이 계명이 다 이루어진 그 시공간 속에 네가 이미 놓여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에요. 그 확인이 이 잘난 나 때문에 계속 막히고 있는 겁니다.

끝으로 아까 댓글에 대해서 우리가 일단은 복음적으로 비판하도록 합시다. ‘앞서간 와이프가 간 지 내일이면 49일이군요. 당신이 그리워. 아들 성민이가 많이 힘들어해.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우리 남은 가족 잘 되기 위해 도와줘.’라는 걸 들고 여러분 교회에 찾아와서 심방 부탁할 때, 여러분이 목사라면 뭐라고 설교해야 되겠어요? 갑자기 숙제가 확 들어오죠? 49일 지났는데 힘들다. 예수님 믿고 힘내세요.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은혜 주십니다. 뭐 이런 식으로 위로할까요? 제가 아는 기도원 소개해드릴까요? 뭐 이런 거.

지금 이 사람은 뭘 요구합니까? 위로를 요구하죠. 위로를 요구한다는 것은 자기한테 의미가 있어야 된다, 없어야 된다? 의미가 있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킨 거예요.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았는데 나보다 더 못된 인간들은 지금 떵떵거리며 잘 살고. 나 같이 바르게 살고 오직 아내만 챙기고 자식 잘 키운 사람이 어디 있다고.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영어로 하면 Why me?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시련이.

이런 사람에게 누가 상담해야 돼요? 이호선 교수가 상담해야 돼요? 뭐라고 상담해야 됩니까? 어떻게 상담해야겠어요? 이것밖에 없어요. 바로 그 불평, 그 불만이 가득한 이 세계, 이 공간에서 우리 주님께서 당신 때문에 희생했습니다. 당신의 그 엉뚱한 생각 때문에.

지금 세상은 내 기준대로 움직여줄 때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죠. 그건 애굽입니다. 그건 지옥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라는 시공간을 일부러 기준축을 바꾸어서 다른,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기준측, 성령이 함께하는 그 새로운 세계로 바꾸기 위해서 찾아오셨잖아요. 찾아오셨는데 맞아죽었잖아요. 주께서 채찍 맞아 죽었잖아요. 그 채찍 맞은 영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 기준으로 너를 보지 말고 십자가 기준으로 너를 봐라. 이 십자가 의미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난다. 네 아내가 죽고 아들이 힘든 것도 이 십자가를 알리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으킨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그게 우상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 왜 우리는 이 우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지. 그러나 우상을 떨치지 못한다는 이 자체가 우리의 죄라는 것을 깨닫는 기쁨과 그 고마움을 오직 주님께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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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942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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