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를 위한 선지자 예레미야 31:33 260910
수요설교요약음성
안양20260910a렘31장33절(보호를 위한 선지자)-이 근호 목사
오늘은 146페이지 예레미야와 함께. 교재를 함께 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고민하는 선지자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레미야 선지자하고 다른 선지자하고 차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느냐 하면, 예레미야는 고민하는 선지자에요. 선지자가 고민한다는 게 좀 낯설지요.
어떤 점에서 고민하느냐 하면, 여기 이스라엘 땅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약속의 땅이지요. 약속의 땅이고, 홍해가 이리 있고, 여기 애굽입니다. 애굽, 홍해, 약속의 땅.
그리고 여기에 티그리스강, 유브라데스강 근처 바벨론. 바벨론이 있다 말이지요. 어떤 점에서 고민을 하고 있느냐 하면,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잖아요.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면 되든 안되든 간에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뜻에 의해서 메시아의 약속에 의해서, 여기서 완성을 본다. 기존의 예언을 이런 식으로 해석들을 해왔어요.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석을 해왔다 이 말이지요.
땅을 떠나지는 않는 상태에서 이 약속의 땅에서 시련과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기어이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본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 이게 기존의 생각들이었어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말은 이 약속에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취소가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여기서 고민과 갈등을 하는 이유가 지금 이 땅을 그냥 떠나버리게 되면 뭐가 이게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온다는 이 약속.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까지 올 때 그냥 왔습니까? 약속하고, 약속하고, 약속하고, 약속으로 이끌어왔잖아요. 이 약속이 완전히 공중으로 무산되고 날아가버린 거예요.
하나님은 약속을 변치 않는 분이라고 철석같이 알고 있는데 이 약속의 땅에 왔는데 백성들이 좀 문제 있다고 해서 이 땅을 포기해 버리면 그러면 요 애굽의 땅에서 약속의 땅까지 오는 1번. 이 1번의 절차가 순서가 이게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이게 헛말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약속했는데 백성들이 약속을 안 받아줘서 약속은 무효가 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건 약속이 아니지요.
약속은 어느 정도로 되어야 하느냐 하면 니가 허술하고 못났고 무능하고 죄를 짓는다, 그것을 충분히 감안해서 미리 약속을 준다. 이게 약속이잖아요. 니가 약속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이야기를 먼저 꺼낸 쪽은 하나님이 먼저 꺼냈잖아요. “그러면 너가 그렇게 허술한 거 내가 다 알지. 알고말고. 그래서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나는 너를 구원하겠다.” 이게 견고한 약속 아니에요? 약속이다 말이지요.
결혼식에서 주례 앞에서 약속을 합니다. 약속을 하는데, 그 신랑에게 묻습니다. “아내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오고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너는 이 여자를 사랑하겠느뇨?” 그러면 신랑되는 사람이 총각 때 결혼식에 많아 가봤잖아요. 뭐라합니까? “예!!” 이렇게 하지요. 많이 가봤으니까. 씩씩한 면을 보여주는 남편은.
“아내된 자는 남편이 교통사고 나가지고 엎어있어도 지켜줄 거예요?” 여자는 또 왈가닥이다가도 그 때는 다소곳하게 조심스럽게 “예~~” 일단 안 들리게. 여성스러움을 보이지요. 그런데 주례가 철딱서니 없어가지고 “뭐라고요? 잘 안 들린다고요. 야, 이 결혼 파기입니다.” 이런 결혼식 봤어요?
“어떤 경우라도 어떤 인생의 험하고 어려운 경우라도 이 여자만을 사랑하겠느뇨?” “예”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남편에게 어떤 경우라도 이 남자를 사랑하겠느뇨?” “예” 그러면 부부됨을 선언합니다. 이리 된다 말이지요. 인간들의 결혼식이라도.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한 거예요. 그것도 일방적으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사랑. 그런데 여기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어떻게 하느냐, “포기하라. 이 땅을 포기하라.” 할 때 예레미야는 고민에 빠졌지요.
내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놓치고 있는 게 뭘까, 뭘 놓치고 있을까?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어요. 바벨론의 포로 잡혀가거라. 몇 년 동안? 70년 동안. 70년동안 가거라. 지금 애굽에서 노예생활했잖아요. 종노릇 했다 말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몰랐던 것은 뭐냐 하면, 이 바벨론은 분명히 포로 잡혀 가요. 옛날에 경험했던 애굽의 포로 그건 줄 알았어요. 바벨론은 종이 아니고 보호라는 사실을. 보호. 보호라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그걸 수긍하는데 상당히 내적으로 갈등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보호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약속의 땅을 반드시 떠나라는 거예요. 이 땅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언급해도. 적어볼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사이에 어떠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 사이에서 “바르게 살면 복 줄게. 못 살면 너는 저주받는다.” 어떤 추가적인 보호장치가 없었어요. 추가적인 보호장치가.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올 때.
그런데 여기 바벨론에 가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이스라엘 사이에 보호막을 받는 자에게 내가 구원할게. 보호막 안에 있는 자에게 내가 구원할게.” 새로운 계약이 주어집니다. 이게 바로 예레미야 31장에 나와요. 내가 새로운 계약을 맺겠다. 새로운 계약을. 어떤 계약? 보호해 줄게.
이 “보호해 줄게” 가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이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 영어로 하면 in. 예수 그리스도 안이에요. 너라는 공간. 니가 만들어낸 공간. 니가 평생 만들어낸 공간. 너라는 공간. 나가 있다면 나라는 공간이 있잖아요. 이 공간보다 더 큰 공간. 더 큰 공간을 예수님이 만들어주는데 예수님 사이와 우리 성도 사이에는 성도가 저지른 모든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책임졌다. 책임진다는 조건하에 새로운 계약이 주어지는 겁니다. 새로운 계약이.
예레미야가 처음에는 상당히 주저했는데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아, 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약에 이러한 새로운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 새로운 내용의 그 해결은 자기 대에 말고 다른 오실 분에게 이게 넘겨야 될 문제지. 내가 끝까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짐작합니다.
나한테 주어진 새로운 언약은 지금껏 내가 이스라엘에게 계시를 전하고 말씀을 전했던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고 내 책임을 넘어선 다른 분의 소관이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이 물었어요. “너, 같이 바벨론에 가자. 잘 대우해 줄게.” 안 갑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어디서 죽는가, 애굽에서 죽어요.
분명히 바벨론에 가지고 했는데 자기는 사양합니다. 자기는 이 시대, 약속의 땅에서 백성들이 망했다는 이 시대의 역할을 충실하고 그걸로 자기 역할은 다 한 거예요. 자기 역할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우는 선지자, 슬픔의 선지자,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통곡도 많이 했어요. 통곡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통곡하면서 쓴 책이 무슨 책일까요? 예레미야 슬픈 노래, 예레미야의 애가에요. 예레미야 애가가 있습니다.
슬픈 이유가 뭐냐, 내가 잘못했다가 슬픈 게 아니고 왜 이 백성들은 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 지독하게 말씀을 안 듣는다. 쉽게 말해서 어떻게 인간 말은 곧이 곧대로 잘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은 어떻게 그렇게 거부성, 반발성이 그렇게 내부에서 올라오느냐, 탄식하지요.
여러분, 탄식에 대해서 신약 때에도 탄식하는 분이 계십니다. 인간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탄식하시지요. 로마서8장에 나오지요. 우리가 기도께나 한다 하니까 성령께서 참 같찮아가지고 “니가 기도를 해? 지금 알아? 뭐 안다는 거야 뭐야? 알고 기도하는 거야?” 8장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니, 기도할 줄 모르지? 내가 한 수 가르쳐줄게.” 이게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고.
탄식으로 대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고, 이 철딱서니 없는 것” 단순히 모른다가 아니라 “아, 조금만 알려주면 똑똑해져가지고 기도 제대로 한다.” 이게 아니라 알려줘도 성령님이 보기에는 탄식만 나오는 그러한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그것을 연약한 자라고 그렇게 아예 성령께서 아예 맥이는 겁니다.
“니는 제발 니 자신을 주제파악을 좀 해줘. 니가 뭐 성경공부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그러면 성령은 왜 왔는데?” 성령이 왜 왔어요? 성령이 오신 이유는 우리가 뭘 안다. 이 정도 신학을 했으면 뭘 좀 내 힘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이 사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같찮은 짓인지. 오늘 좋은 문장 단어 하나 나왔습니다. 벌써. 같찮은 짓입니다. 같찮은 짓이에요.
“하나님이여, 이렇게 열심히 섬기는데 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같찮은 것!” Everybody! 시작! “같찮은 것! 아이고, 참, 놀고 있다. 니가 인생을 알고, 니가 인생을 알면 얼마나 알아?” “집 바치고 뭐 바치고 했습니다. 교회 교육관 짓는데 재산 다 바치고 부흥회 손 들 때 손 다 들고, 방언 랄랄라...다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분명히 우리 아들 군에 가면 후방에 빠진다고 했는데 왜 전방으로 빠집니까? 어찌 이런 일이?” “같찮은 것!” 한심스러운 일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목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준 목표는 이겁니다. “이 한심스러운 나” 한심스러울수록 주께서는 기뻐해요. 기뻐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한심스러우냐 하면 예수 믿지 않는 정도까지 한심스러워야 돼요. 왜? 불신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갑자기 여러분들이 희망이 확 생기지요. ‘야, 그거는 내가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건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지요. 남 따라서 믿음 좋은 사람 되려고 애쓰는 게 얼마나 그게 같찮은 짓인지. 오늘 제목으로 이게 확 들어오네. ‘같찮은’
예레미야는 울기는 우는데 해답이 없어요. 이게 예레미야 선지자의 특징이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는데, 마태복음 16장 잠시 볼까요. 마태복음16장14절, 13절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자,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표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자지 중에 한 사람. 특징이 뭐냐 하면, 상당히 뭔가 그런 것 같은데 상당히 일반인과는 차별되는 영적인 거 같은데 뭐는 빠졌다? 해답은 없다.
그 글 쓴 사람은 그 설교는 듣기는 들어보자. 듣기는 들어보는데 내 몸을 바칠 정도, 내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이게 바로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이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랬었어요.
제자들도 일반적인 예수님을 좋게 보는 쪽. 그것도 예수님을 나쁘게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좋게 보는 쪽에 제자들도 그만그만한 동일한 평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묻는 거예요. “그래, 좋아. 좋아.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여기서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경험담을 자기 고백을 한 게 아니에요. 베드로는 성령께서 그 순간 베드로에게 임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딱 그 이야기 듣고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유명한 말 있지요. 이걸 알게 한 것은 너가 아니다. 너는 혈육이라는 말이에요. 너가 아니야.
이 말은 “니가 그런 고백한다고 해서 나를 제대로 알고 고백했다고 나는 받지 않겠다.” 한심스럽고 같찮은 것은 여전해요. 나중에 베드로가 3번 부인하잖아요. 나중에 할 것도 없이 나중에 돌아서서 뭡니까? “예수님, 제가 나서서 예수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하니까 “이 사탄아! 물러가라.” 대번 딱 나오지요.
그래서 이 예레미야나 베드로 같은 경우에 우리가 여기서 내릴 결론은 간단해요.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빠져나갈 방법은 방도는 없다. 그 없음을 증명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세상의 의식과 사고방식에서 자기 사상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은 인간에게는 애시당초 없다는 거예요.
구원은 순전히 주님의 일방적인 잡아당겨주는 뽑아주는 능력이지 거기에 주님의 하는 말에 맞장쳐서 같이 동의한다는 그러한 협동과 협력에 의해서 구원되지는 않습니다. 구원되지 않아요.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봅시다. 바벨론이 보호하는 거죠. “70년 있다가 다시 이 땅으로 돌려보낼게. 70년 있다가 돌려보낼게.” 아, 이게 예레미야 수준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예레미야 수준. 예레미야의 그런 수준.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우리 백성들이 못나서 포로 잡혀갔다. 그 정도 수준에서의 70년의 이해는 다시 돌아온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 70년이 다니엘에 가게 되면 예레미야보다 더 나아가는 70년에서 70이레로 변해요. 수준이 예레미야 수준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해답을 갖고 있어요. 이 땅. 돌아갈 땅, 그 땅은 땅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될 약속의 땅에 최종 목적지 그 땅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애굽에서의 약속의 땅 할 때는 약속의 땅이 이 땅이 영원히 살 땅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니엘의 70이레. 70년이 70이레로 바뀌어요. 70이레의 입장에서는 애굽도 아니고, 약속의 땅도 아니고, 바벨론도 아니고, 이 땅 위에 있는 다른 땅. 중첩된 구조의 땅. 중첩된 구조의 땅이었습니다.
구약의 이 땅에 누가 함께 이스라엘을 이끌어 왔는가 하면, 여호와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했어요. 하나님의 이름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마구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이라는 그 조건하에서만 활동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신약에 오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님의 조건은 뭐냐, 새로운 언약이라는 새로운 범주. 새로운 범위 한에서 활동을 하는 거예요. 그 새언약을 바로 예레미야 31장에서 언급했어요. 예레미야31장 한 번 봅시다.
예레미야31장31~34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거기서 스톱! 애굽 땅에서 내던 것과 같다? 안 같다? 같지 않다. 이미 애굽에서 맺었던 언약은 인간들이 우상 숭배해서 다 날려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날려 보낼 때 그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그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에요. 그럼 오늘날 우리는 아담의 후손 아닙니까? 똑같잖아요. 머리 검은 짐승 집에서 키우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달라지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 안 돼요. 왜? 아담의 죄가 우리 안에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을 정도로 작동을 하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야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고 바르게 살고 싶지요.
그러나 항상 수시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충동이 우리의 본모습을 차지해서 이게 행동으로 나와버려요. 이게 바로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대구강의에서 언급했는데요. 사도 바울은 참 편리하다. 왜? 죄지은 건 내가 아니고 이 죄다. 얼마나 이게 변명하고 뻔뻔스럽기도 하고 그렇지요. “이거 내가 한 게 아니야! 내 안에 죄가 한 거야!” 100% 없어요. 내 안에 죄가 한 거예요. 죄가. “너만 그래.” “다들 그래.” “왜?”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니까.”
동일한 아담의 자손이 언약을 배려먹었잖아요. 못 지켰지요. 그러니까 그들을 탓할 수 없는 게 신약에 있는 우리도 그때 언약을 파기시킨 그 인간하고 똑같은 인간이에요. 우리의 속성이. 그 인간 본질이 어디 가요? 거기서 거기지 뭐.
이방 민족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인간은 다 동질이에요. 한 아담에서 나온 동질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을 바꿔야 됩니까? 언약을 바꿔야 합니까? 인간을 바꾸는 게 아니고 언약을 바꿔버리지요. 이걸 제가 울산강의에서 제목이 뭐였습니까? <절반+절반>. 절반의 책임마저 안 지고 도망갔다. 흔적이라는 채유나의 노래 연거푸 했잖아요. 아버지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절반의 책임을 예수님이 지시고 하나님의 목숨으로.
계속 읽어보세요.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스톱! 나는 뭐 김종인 권사님만 성경 잘 읽는 줄 알았더니 새로운 두각을 나타낸 분이 등장해가지고. 아이고, 잘해서 감사합니다.
이건 뭐냐,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게 애굽에서 왔던 이 언약으로 백성되는데 실패했잖아요. 실패했기 때문에 새 언약은 뭐냐 하면, 이 실패를 딛고 강제조치로 내 백성을 만드는 언약. 아하~, 감사함이 이를데 없지요. 강제조치에요. 강제.
이 강제조치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택함. 선택함이라는 것은 생물학에서 나온 단어에요. 선택함이라. 이걸 할 거냐, 저걸 할 거냐, 인생을 살면서 빨간 선을 끊을 것인가, 파란 선을 끊을 것인가, 이 남자하고 결혼할까, 저 남자하고 결혼할까,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갈까, 중간에 군에 갈까 하는 것. 이과로 갈까, 문과로 갈까, 삼성갈까, LG갈까, SK갈까, 그거는 상당히 둘 다 합격될 경우에 기분 좋은 이야기죠. 이런 압력이지요. 스트레스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스트레스가.
우리가 어떤 점에서 선택을 하는 그걸로 인하여 선택행위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이 인생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주께서 벗어나게 해요.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선택해야 되는 고통이에요. 선택해야 될 고통.
주님 뜻은 뭐냐, “선택은 내가 알아서 할게. 니는 공짜로 받기만 해라.” 이러한 언약이 들어갑니다. 믿거나 말거나요. 믿거나 말거나. 바지를 팔까, 남방을 팔까, 이러한 선택. 이게 선택이 강제조치에요.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이 강제조치를 실제로 역사로 표현한 나라가 뭐냐, 바로 바사나라에요. 바사나라는 바벨론 그 이후의 나라. 이 왕이 고레스입니다. 고레스. 이건 이사야에 나와요. 그래서 이사야는 고레스를 기름 부은 자, 메시아로 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보호한다고 해서 “내가 약속의 땅에서 죄 지어가지고 이방민족에게 당해가지고 고생 많지. 일단 숨 돌리고 다시 약속의 땅에 가라.” 이게 아니고, 그게 보호가 아니고, 영원한 보호. 영원히 지켜주심. 영원한 보호에요. 니는 백날 돌아와야 인간 안 될 게 뻔해. 다 들통났기 때문에 주께서는 자기 백성 만드는데 있어서의 영원한 보호가 필요하다. 탕! 탕! 탕! 선언해버립니다.
그럼 영원한 보호가 뭐냐, 약속의 땅 지형적인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약속이라는 약속의 땅에 마련되었지요. 그 하늘나라의 약속의 땅은 어떻게 있느냐, 없어요. 없는데 약속하신 예수님이 새로운 시.공간을 끌고 이 땅에 와서 이 땅에서 새언약을 이루어요.
방금 읽었던 우리 집사님이 잘 읽었던 새 언약을 주께서 여럿이 이룬 게 아닙니다. 홀로 이루어요. 혼자. 혼자 이룸으로서 없는 나라가 생기는데, 그 없는 나라가 뭐냐, 약속의 땅이에요. 하늘에 있는 약속의 땅이에요. 그 약속의 땅, 천국은 다른 말로 뭐냐, 새 언약이 완성된 공간, 환경, 그게 약속의 땅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우리가 생각한 우리 인식의 한도내에 “나 여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좋아.”라고 했던 그들이 강제조치에 의해서 무조건 끌고 가듯이 바벨론에 끌고 갔잖아요. 끌고 가듯이 주께서 “나, 이 땅이 좋아. 나, 안 갈래. 나 좀 나 지금 죽기싫어.” 강제조치로 주께서는 천국으로 집어넣습니다.
그중에 사례가 되는 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 집사. 돌에 맞아 죽잖아요.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 집사의 유언은 자기 걱정 안 하고, 땅에 있는 사람을 걱정하고 있어요. “우리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자기 걱정 안 해요. 왜?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임해가지고 새언약 속에 있기 때문에.
이미 새언약의 조롱박, 새장 있지요. 새언약이라는 새장에 갇힌 채로 죽을 때는 요걸 딱 들으면 되니까. 살아있을 때부터 예수 안에 있다가 죽고 난 뒤에 영원히 예수 안에 영원히 사는 거예요.
빌립보서1장에 사도바울의 고백이 그겁니다.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내 몸을 떠나서 이 더러운 누더기같은 몸을 떠나서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된 옷으로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게 내 소원이다.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게 내 소원이다. 빌립보서1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고, 고린도후서5장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바로 그런 신약의 새언약에서 보여주는 그런 내용을 위해서 예레미야라는 자기 일종의 한계를 갖고 있지요. “지금의 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까지 왔는데 너희는 왜 독하게 말을 듣지 않아? 응? 정말 너희 나빠!” 라고 외쳐야 될 그 역할을 예레미야가 제대로 충실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 예레미야의 선지자가 이렇게 등장해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인간은 고쳐 쓰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성경공부를 수십년해도 인간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다만 바뀐 적이 없는 성경 공부를 왜 하느냐, 내가 같찮고 한심스럽다는 것을 더 깊이 하는 거예요.
신명기8장에서 말하기를 만나를 먹이는 이유가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만나를 먹였다고 했어요. 내가 해서 가는 천국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소망, 사랑, 믿음도 내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께서 거절하십니다.
주님의 소망, 주님의 믿음,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내 것과 내가 행한 것과 주님의 행한 것이 그 충돌하는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저를 제대로 충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십자가로 감사하는 겁니다. 십자가로.
조그만 티코차를 타고 다니는데 큰 트럭이 와서 박아버린다. “왜 박았어?” “일부러 박았어.” “왜?” “니가 얼마나 같찮은지 알려주기 위해서.” 나는 내 인생이 완전히 졸지에 찌그러진 거예요. 어떻게 뭐 대충 수리해서 다시 고쳐 쓸 인생이 못 돼요. “주님! 이거 책임지세요.” “고치지 마! 그 모습이 나는 너무 좋다~ 사진 한 번 찍을까, 찰칵!” 망가진 모습, 망가진 나의 초상화, 망가진 나의 여권 사진. 주께서 제일 기뻐하십니다.
망가지는 거 일부러 또 망가지지 마세요. 뭐 입술에다가 성형해가지고 입술 뒤집어써가지고 이거 째고 내리고, 올리고 내리고 펴고, 뼈대 고치고 그런 식으로 하면 선풍기 아줌마가 되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 하니까 자기 부인한다고 일부러 또 고생하고 기도원에 가고 저 아프가니스탄 이상한 나라에 선교하러 가고 북한 가고 무슨 짓이에요? 그게.
자진해서 고난받고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가끔은 금식하세요. 어떤 금식? 간식을 빼는 금식. 세끼는 먹되 아침 점심 사이 간식은 집어넣지 말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전에 했지요. 밥 먹어가면서 금식하라고. 밥 먹어가면서 금식하는 게 바로 식사 기도하는 거예요. “오늘도 안 주셔도 되는데 이렇게 주셔서 주의 일하게 하옵소서.” “주여, 이렇게 귀한 음식 주셔서.” 주께서 “왜? 그러면 음식 가져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금식하는 마음. 그래서 이 예레미야의 마음이에요. 내라도 이 백성의 아픔을 내라도 감당해야지. 그러니까 예레미야와 비슷한 사람이 세례요한하고 좀 비슷하지요. 알아서 광야에 살고,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시니까.
이제 보호라는 걸 잊지 마시고. 교재 한 번 봅시다.
살아 있는 자가 자기 죽음으로 전환되는 과정,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빠져나가는 과정. 이것은 이를 위하여 문자적 율법이 실제 현실 적용으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상황. 이건 뭐냐, 예레미야가 외쳤던 그 예언에 대해서 약속의 땅의 백성들이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거부했지요. 지도층부터 거부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을 외쳤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거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살아있다고 우기는 그들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벌은 부동산 다 날아가고 포로 잡혀가잖아요. 다시 노예가 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보호지만 끌려가는 모습은 처참한 모습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땅을 살 것을 권해요. 그때 땅 보러 다니는 게 아니고 조카가 와가지고 “아재요, 땅 사세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땅을 사서 땅값이 얼마냐 하면, 예레미야가 조카의 밭을 삽니다. 예레미야 32장6절에서 15절, 17세겔(408만원 정도). 예레미야32장9절에 아나돗의 땅을 사요.
그런데 지금 전쟁이 일어나서 있는 땅도 소유주도 없고, 소유주도 아예 뿌리 뽑혀서 무뿌리 뽑히듯이 가버렸는데 땅은 정복자의 땅이 돼요. 자기 땅이 날아가고 없어요. 북한의 인민군 왔을 때 서울 정복할 때 서울의 자기 땅이 있어요? 전부 다 공출이지요. 전부 다 공출이고. 주인들은 피난 가서 다 도망가 버리고.
그런데 예레미야한테는 땅을 사라는 거예요. 느헤미야7장27절과 에스라2장23절에 보면 아나돗 사람들이 돌아오는데 128명이 돌아와요. 그들이 돌아올 때, 돌아오면서 70년 만에 이 예레미야가 땅을 사고 땅의 증서를 토기에다가 집어넣습니다. 예레미야32장14절, 15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예레미야에게 이런 계시를 하니까 예레미야는 뭡니까? 약속의 땅이 현재 사는 땅이 약속의 땅이 된다고 생각한 거, 그게 예레미야의 한계지요. 다니엘은 그리 보지 않았어요. 다니엘은 이 땅 자체가 멸망이에요. 이 땅 자체가.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노아 홍수가 나기 전까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살았지요. 자, 땅 매매를 했다 칩시다. 1주일 뒤에 홍수가 나는데 7일 전에 땅을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면 소유는 내 소유가 되잖아요. 그때 홍수가 났을 때 그 소유자 어떻게 돼요? 땅 자체가 없어요. 땅 자체가.
그리고 땅 주인은 어디가 있지요? 물에 빠져서 퍼덕이고 있는데요. 파닥거리고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노아 때까지의 인간사회에서 소통되는 언약은 인간들의 약속은 노아언약에 의해서 완전히 다 뒤집어지고 다 소멸해 버리는 거예요. 그때 하는 일이 뭐냐, 바로 7이라는 숫자로 이야기해요. 7.
노아 홍수 때 난 7은 어디에 붙느냐 하면, 정결한 짐승은 7쌍이에요. 그렇지 않은 쌍은 2쌍이지요. 2쌍은 아담과 하와. 옛날 창조 때 아담과 하와가 쌍을 맺었잖아요. 번식을 위해서 2쌍이 있으면 되지요.
그러나 정결한 것은 7쌍이 있어야 돼요. 7쌍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기존의 창조 7일 만에 창조한 건 없애버리고 이 7쌍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내가 기획했다. 내가 꾸몄다는 이야기입니다. 땅 주인도 물에 빠지고, 땅도 없고, 그런데 예레미야는 어떻게 됐느냐, 예레미야가 조카의 땅을 사면서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70년의 약속은 모든 게 소멸되어도 이 약속은 니가 토기 안에 거기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토기 안에 들어있는 존재의 내용은 이 땅은 우리 예레미야가 산 땅. 우리 예레미야의 집안의 땅이다. 이러면 그 땅이 천국입니까? 아닙니까? 이 땅이 하나님 나라에요? 아니에요? 나라 아니지요. 왜? 새언약의 완성자는 예레미야가 아니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공부하고 예레미야의 언약을 생각하되, 어디까지나 그것은 새언약과 대비하기 위해서. 새언약의 완성과 기존의 언약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시도하는 자들의 그 나약함, 모자람, 미흡함,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요.
첫째시간을 마치면서 그 점을 잠깐 언급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첫 번째, 기존의 언약은 내가 살아야 내가 기어이 살아야 내가 구원받는다,에 관한 언약이에요. 기존의 언약은. 두 번째, 새언약은 내가 죽어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언약.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일단 내가 살아서 내가 뭘 하면 됩니까?” 가 시발점이에요. 시작점이 되지요. 고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혹시 누구 설교 들을 때나 출발점이 2번인지, 1번인지 구분해 보세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마음을 낮추면 구원을 맞습니다.” 이거 1번이에요? 2번이에요? 1번이지요. 기어이 안 죽어. 독하게 안 죽어요. 하여튼.
“마음은 낮출 대로 낮출 테니까 진짜 십일조하고 선고하고 봉사 다 할 테니까 저 좀 구원해주세요.” 요거 1번이에요. 구약의 미흡한 인간들의 의식의 한계입니다. 2번은 “군소리하지 말고 그냥 죽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다 한다.” 2번이지요. 1번에서 2번으로 옮기는 그 옮기는 지점에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전하는 모든 말씀은 심하게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나무라는 일을 하는 거예요. 꾸중하고 나무라고, 꾸중하고 나무라고, 계속하는 거예요. 나무라고 꾸중하는 것뿐이에요.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까 예레미야31장33절 새언약있잖아요. 새언약은 외치지만 새언약의 내용이 뭔지 구체적으로 예레미야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흐릿하게만 이야기하지, 구체적으로 이사야53장처럼 나의 찔림은 너희 허물로 인함이라. 이런 거 없어요. 책망하기 바빠요. 물론 본인 뜻이 아니고요.
그 책망으로 하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레미야의 내용을 여러분이 읽어보시면 시간의 진전이 없어요. 제자리 뛰기에요.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가 총 몇 장이냐 하면, 잔소리가 52장까지 잔소리 하고 있어요. 52장까지 계속 잔소리하고 있어요.
그 잔소리가 어떤 내용으로 되어있는지는 요거는 10분 쉬고. 10분 쉬고 난 뒤에 어떤 잔소리를 하는가, 잔소리 들을 준비를 하시고 10분 쉬시기 바랍니다.
안양20260910b렘31장33절(보호를 위한 선지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3페이지의 그 하나부터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띠>. 예레미야13장7절,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더라” 이리 되어있어요. 유브라데강은 위에 있어요. 약속의 땅, 이스라엘 땅 그 위쪽에 현재 이라크 땅에 티그리스강 유브라데강 지금 이라크지역 또는 현재 튀르키예 지역인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지시해서 가서 예레미야가 있던 그 허리띠를 새로 장만해가지고 그 띠를 선지자가 맬 때는 멀쩡하지요. 그다음에 그 띠를 벗어서 강가 은밀한 곳에 바위에 홈이진 곳에 그 띠를 놓아라.
그다음의 지시가 뭐냐 하면, 다시 니가 감춘, 아무한테 들키지 말고 남들에게 공개하지 말고, 너만 아는 장소에 했다가 다시 감추었던 것을 파서 그 띠가 어떻게 됐는가를 봐라. 보니까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더라. 라고 13장7절에 나와있지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런 이야기를 시키는 것은 예레미야의 몸이 뭐냐, 선지자에요. 선지자거든요. 이 선지자의 몸에 뭐가 붙어있는가, 띠는 이걸 단단히 선지자를 고정시키는 띠입니다. 띠가 선지자를 벗어나니까 어떻게 되었다? 썩었다.
그러면 선지자를 하나님이라고 보고 그 띠는 하나님 말씀과 율법을 그게 붙어있을 때나 멀쩡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인데, 너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니까 너희들은 썩어버렸다. 너희가 썩었다는 것을 어디서 확인하는가, 유브라데스강에서 너희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유브라데스강까지 가려면 포로잡혀가야 되는데요. 바벨론 나라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만 전한 게 아니에요. 띠가지고 어디에 가서 띠를 감추고 나중에 파고 다시 보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하나의 인간 그 인간 선지자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를 처음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자, 예레미야1장 다시 1페이지로 돌아와서. <예레미야가 미리 본 것> 예레미야1장13절,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이게 첫 번째 말씀은 아니에요. 다시 내게 말씀이 임했으니까. 이 전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예레미야의 운명에 관한 건데, 1장2절에,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임했어요. 임하고 첫 번째 준 내용이 1장 5절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하기를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초장부터 듣자마자 우네요.)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역시 이런 고백을 예레미야 말고 또 누가 했지요?
시내산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이 모세 찾아올 때, 모세가 똑같은 이야기를 한 거예요. 모세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 나이에 내가 뭘 합니까? 나이가 80되어서 뭘 해요. 뭘 할 수 있습니까? 총대를 맬 수 있습니까? 뭘 할까요? 트럼프는 80돼도 뭘 하긴 하더만. 못하지요.
예레미야1장8절,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두려워 말라 말이 나온 것은 니가 감당못할 자들로 두려움이 너한테 엄습한다는 뜻이고, 너를 구원한다는 말은 너는 이들과 함께 같이 살 그러한 종류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구원을 하려면 누가 시합해서 누가 이기나, 지나 그리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그 종자 자체를 따로 딱 구별하고, 구별했음을 부각시키는 게 구원이에요. 가라지는 가라지. 알곡은 알곡이고 이건 가라지를 심고, 알곡을 심은 것은 이건 주께서 허락해서 심어놓은 거예요.
가라지는 마귀가 심었고, 알곡은 주님이 심었는데 이건 중도에 인간이 바르게 산다고 해서 이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아요. 운명 바꾸는 것은 오디세이 그것이나 지가 그런 짓을 하는 거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인간은 바뀌지 않아요. “그럼 바뀌지 않으면 맘대로 살면 되겠네.” 문제는 니 운명이 뭔지를 니가 모른다는 뜻이에요.
“나, 택함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살 거야.” 그건 니가 생각한 운명이고, 택하던 안 택하던 그건 니 소관아니고 니가 스스로 택했다고 장담하고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왜 이리 나오느냐 말이지요.
운명이라 하는 것은요, 끝까지 인간 손에 넘기지 않습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왜냐하면 자아는 자아의 주도권을 가질 자격이 못 되어서 그래요. 자아는 자아값을 해야 돼요. 무지몽매한 값을 할 뿐이지, 그런 무지몽매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거예요.
구원한다. 그럼 예레미야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 신난다!” 이게 아니에요.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너가 이 사람과 달리 네가 이 사람 가운데 따로 뽑아내어서 건져줄게.” 이 말에 예레미야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동의 못 합니다. 동의를 할 수 없어요.
이게 어제 수요일에 했지요. 대구강의에서도 했지만. 인간은 자아에서 자아를 뽑아내지 못한다. 자아(1)에서 자아(2)를 뽑아내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자아(2)가 존재하지 않아요. 곧 죽어도 내가 나에요. 내가 알고 있는 나 말고 다른 나는 알고싶지도 않고 그걸 설정하는 것도 싫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아는 나. 나 이거 붙들고 가겠다. 그래서 뽑아낼 필요가 없지요.
뽑아내는 것은 구원이잖아요. 구원은 주님 몫이지, 인간 몫이 아니에요. 내가 죽어서 천국가는 것은 이 자아(1)이 하는 쓰잘데기 쓸데없는 환상입니다. 자아(2)가 구원받는 거예요. 자아(2). 자아(1)은 아니에요. 자아(1)은 죽어야 되고, 자아(2)는 죽음을 근거로 자아(2)는 주께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주어집니다. 새로운 피조물.
나의 근거는 아담이고, 새로운 피조물의 근거는 아담이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몸의 지체로서 새로 만드는 거예요. 신상. 새로운 제품이지 요거해주고 저거해주고 자꾸 집 짓는데 컨셉 집어넣고 옵션 깔고 이러면 안돼요. 안돼요. 1층에는 뭐하고 2층에는 뭐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주는대로 먹어. 주는대로.
천국은 주님이 혼자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요구사항이 개입된 장소는 아닙니다. 홍수 때 비올 때 요렇게 비오고 저쪽에는 좀 덜 오고. 하나님 비 오더라도 저쪽은 우리 친정집이니까 비 적게 오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싹 까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도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천사를 유월절 천사를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봤잖아요. 일 잘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안 바랐으면 어떻게 된다? 가차 없이 깔끔하게 다 죽여버렸어요. “제는 뭐 친구 사이인데. 저는 부모 공경하기 때문에, 쟤는 군에도 안 갔는데.” 이런 거 안 봐줍니다. 그냥 다 죽여버려요. 뭐가 없으면? 보혈의 피가 없으면 다 죽여버립니다. 아~ 일 잘해요. 일 참 잘합니다. 언약 보고 구원하지. 니 자녀 보고 구원하지 않는다.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이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예레미야에서 구원이야기 들으니까 이거 자기 일도 아니지요. 자기는 그냥 남들처럼 살고 싶어요. 생뚱맞게 구원받는다 하니까 자기 인생은 조졌다. 이런 뜻이겠지요. 여러분들도 구원을 아니까 이런 느낌 안 들던가요? “나는 구원받았어. 지금.” 이런 느낌입니까. 그런 느낌하면 안 돼요. 나를 완전히 인간 조져 놓겠다는 이 말이에요. 내 인생을.
구원하는 것은 지금의 나가 아니니까. 그리스도 안의 나를 구원하잖아요. 십자가에 죽었다는 조건하에 십자가 안에 죽은 그 나를 구원한다고요.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잘못 알았으면 그 잘못 안 걸 잘못이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간에 구원은 누구 몫이다? 예레미야 본인이 원했던 바가 아니고 주님이 원하는 바다. 그리고 난 뒤에 일방적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는데 예레미야가 군데 군데 탄식과 싫은 소리를 합니다. “나, 이럴 것 같으면 나 안할랍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세가 여러 번, 모세가 습관적으로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정말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아서 이런 백성하고 같이 안 있을랍니다.
그래서 성질나서 바위 2번 치고. 약속의 땅 못 보고. 주께서 따로 모세를 건지지요. 끓는 가마인데 벌겋지요. 지옥 같아요. 끓는 가마니까 지옥 같아요. 저주가 포함된 가마솥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건드리면 되겠다 싶은데, 이 끓는 가마가 어떻게 돼요? 이미 북쪽에서 기울어졌다. 이스라엘의 북쪽이 어디입니까? 바벨론이지요.
바벨론 쪽에서 이미 기울어졌어요. 기울어졌으니까 거기에 들어있는 저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쏟아지면 어디로 쏟아지겠어요? 북쪽에서 남쪽으로 쏟아지는데 남쪽이 어느 나라입니까? 유다나라겠지요. 요아스에서 시드기야까지 활동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그 유다나라지요.
그렇게 딱 정해놓고, 너희는 이제 망한다. 해놓고, 망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게 선지자가 하는 일이에요. 예레미야가. 2장3절에. “그 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농사를 누가 짓졌다는 말입니까? 농사꾼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농사를 지었다 말이지요. 요한복음15장에 나오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포도나무를 누가 재배하는 거예요? 누가 심고 누가 재배하고 누가 열매를 기대하는 겁니까? 하나님이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백성들은 뭐가 돼요? 포도나무에 대한 열매이고.
가지에 붙어있지 않는 열매는 불에 태워버리지요. 불에 태워버려요. 가차 없습니다. 일을 시원하게 하십니다. 믿으세요. 우리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 시원하게 하십니다.
마태복음7장19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찍혀 불에 던지운다. 시원하지요. 요새 아침 저녁으로만 시원한 게 아니에요. 말씀은 더 시원합니다. 그걸 앗쌀하다. 앗쌀하게 깔끔하게. 열매 없는 것은 지옥 불.
제 아내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제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니까 같은 동창들이 나이 70 넘은 동창들이 모임에서 이야기하다가 제 아내가 목사 부인인 걸 알고 그들은 불교를 믿는 거예요. “너희 하나님도 대자대비하시지?” 이리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제 아내가 “우리 하나님은 무지, 무지 무서운데.” 이리 이야기했답니다. 그 무서움이 음식의 뒤끝 없는 깔끔한 맛을 제공합니다. 뭐냐 하면 인간이 지저분하게 “하나님! 하나님!” 얼굴 찡그려가면서 폼 내면서 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원칙대로 모든 것을 끝내버립니다.
그다음에 봅시다. <백성이 잘못> 렘2장13~14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물을 다른 원천이 아닌 엉뚱한 데서 물을 길어서 약속의 땅에서 살려고 한다. 약속의 땅은 주인이 누구냐, 주인이 하나님이고 그들은 하나의 거기에 월세도 안 내고 그냥 살고있는 사람이 이스라엘이에요. 품꾼으로.
하나님 일에 참여하는 조건하에 그들은 그들이 생산한 얼마를 먹고 살았던 거예요. 자기가 땅 주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걸 기업이라 하지요. 땅의 상속분. 그것도 품꾼이니까. 임대차 계약해서 산 거예요.
그런데 그 땅이 자기 땅도 아닌데 엉뚱한 주인도 아닌데 주인을 불러와가지고 거기다가 물을 만들어서 그것 가지고 농사짓는다고 하니까 주께서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는 거예요.
5장1절, <하나님의 장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이건 아브라함 기도와 비슷하지요.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멸망하지 않겠다.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에요.
왜 이렇게 진리와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진리를 찾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멸망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없다는 말은 이 예루사렘 성은 하나님께서 멸망하기로 이미 작심하고 바벨론 군대를 불러다가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자, 왜 사람들은 진리를 찾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는 전두환의 흉내를 내야 돼요. 본인이! 본인이! 본인이 뭡니까? 본인이 진리이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지난 낮 설교에서 자율성이라고 했지요. 자율성. 자율성이 살아있는 곳이 지옥이에요.
자율성은 3가지로 나눈다고 했지요. 하나는 행복, 하나는 소망, 또 하나는 자기 근친도. 자기 유전자가 많이 있는 순서대로 챙기기. 자기 가족 챙기기. 그런데 그 설교하면서 불쑥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왜 부모는 유전자가 없는데 왜 살지요? 해놓고는 답을 못 내렸어요. 설교의 주제가 그게 답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했지요. 서로 동업하려고 산다. 돈 문제입니다. 돈.
혼자 노동하는 것보다도 한쪽은 애 놓고, 한쪽은 노동하는 것이 내 DNA 유전하는데 유리한 조건이기 때문에. “아이고, 집 하나 건졌으면 됐지. 뭐.” 그러면 됐지. 여기서 갈 데 없으면 안 되잖아요.
예루살렘에는 반드시 뭐만 찾는 사람만 사는 곳이 예루살렘에 거주 조건이다? 뭐만 찾는 사람? 의와 진리를 찾는 사람. 그럼 진리는 어디 있습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 바꾸어 이야기하면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습니다.” 찾는 세상이 무슨 세상? 하늘나라 천국. 면류관도 주님한테 반납하지요. 어렵지 않고 간단한 문제지요. 그걸 하기 위해서 지상에 그 진리를 진리답게 하기 위해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다음에 <인간들의 장담>. 렘5장12절,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 계시지 아니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 않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죽을 때 한 이야기에요. 그렇게 하나님 팔아먹으면서 장사해 놓고, “나는 잘 모르겠다.” 끝에 가서 고백을 하는 거예요. 큰 교회 목사들 대부분 다 그럴걸요.
인간은 안 달라지지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학을 하고 뭘 해도 그건 하나의 자기의 직업의 일종이지요. “직업 없고 돈 없고 아무것도 없고 내가 남한테 교도소가고 온갖 사람이 손가락질한다 하더라도 이거 다 하나님이 하셨지요? 그죠?” 이렇게 인정할 수 있는 인간. 그게 하나님께 고백하는 거예요. 그게 성경에 나오지요. 그게 뭐냐, 강도. 십자가 밑의 강도.
나의 인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살인강도로 “나는 모가지 날아가게 됐고, 모가지가 아니고 완전히 집안 우사스럽게 벌거벗고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거 주께서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저 생각해 주세요.” “니가 나와 함께 오늘 밤에 천국에 갈 것이다.” 깔끔하지요. 하나님 일하시는 것. 깔끔해요.
인간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비로서 인정하지 말래도 인정해요.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이 하셨죠?” 그거 하나 믿고 평생을 나락에 빠져도 히죽 히죽 웃을 사람이 성도에요.
그다음에 2페이지. 1페이지는 정말 무서운 하나님이시다. 정말. 2페이지에 <하나님의 조치>.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렘5장19절 끝에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뭐하리라? 섬기리라. 너희는 결국 포로잡혀 간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계속 잔소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예레미야는 이걸 듣고 해결할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다.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알려준 대로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합니다.
<인간들의 실수>. 렘5장24절~25절,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막는 요소가 너희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사람이 자기 일에 몰두하면요, 하나님 말씀이 안 들어와요. 이거 당연한 겁니다. 그게 야고보서1장15절에 나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지요. 욕심이 강렬하게 작동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말씀 설교하고 아무리 성경 봐도 안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바로 그걸 경유해야 돼요. 그걸 거쳐야 돼요.
그다음에 <기이한 현상>. 렘5장30절~31절,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그다음에 나머지는 우리가 안 봤다 치고, 빈칸으로 남겨두고 여러분보고 기괴하고 놀라운 일에 거기다가 빈칸에 적어 놓으라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적겠습니까?
네팔의 홍수, 기름값 상승. 북한에서 핵 보유했다고 우긴다. 이런 거. 경상도 사람은 뭐가 기괴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재판받을 죄수가 대통령 됐다는 사실. 무슨 이런 일이. 지금 구치소에 있을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버렸어요. 이걸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에요. 그래서 제가 조건을 달았지요. 갱상도 사람. 갱상도 사람.
그런데 그 빈칸을 딱 뜯어봅시다. 뭐가 나옵니까?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뭐다?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이 자기 권력을 다스리며 더 놀라운 사실은 내 백성은 그것을 뭐로 여기니? 기쁘게 여기니 결국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이게 또 잔소리가 시작됐어요. 잔소리가 시작되는 거예요.
백성하고 선지자하고 다 한 통속이다.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모든 말을 할 때, 전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두 번째 계속해서 내 입을 통해서 말씀을 전한다. 이 두개의 전제가 있어요. 두 개의 전제가.
적어볼게요. 예레미야의 전제가 뭡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살펴보신다. 두 번째는 계속해서 뭘 한다? 말씀을 전한다. 왜? 본인이 선지자니까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여기 있잖아.” 이런 전제로 보니까 기괴하고 놀라운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반대 현상은 경상도 말로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게 나한테 표준말이니까 할 수 없어요. “니가 캐라.” 의성말로 바꿀게요. “니가 지껄여라.” 의성 사람한테는 이게 욕이 아니에요. 평소 가족끼리 쓰는 말이에요. 놀리지요. 많이 지껄여라. 이 말이잖아요. 이걸 경상도 쪽으로 하면 더 깊은 쪽으로 하면, “캐라. 말을 많이 해라. 내가 듣는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기괴하고 놀라운 거예요.
선지자가 없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게 아니에요. 일어났는데 관심이 없어요. 이게 바로 선지자 눈에 희귀하고 놀라운 현상이다, 이 말이지요. 이유가 나와요. 마음의 할례에요.
<마음 할례의 중요성> 렘6장10절~11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렘 6:10-11/4:4/9:26)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아니하니, 할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할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할례라 하는 것은 더러운 껍질로 덮혀있는 게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이고, 그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분리시켜 내는 것이 할례지요. 육의 더러움을.
그러니까 더러운 육을 그냥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으니까 귀가. 그러니까 말해도 말씀이 안 들리는 정도가 아니지요. 그다음에 보게 되면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에게는 뭐로 여긴다? 그들이 자신에게 뭐로 여기고? 욕하는 걸로 느껴지고 이를 즐겨하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분노가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로다. 이 역할을 실제적인 역사적 역할을 누가 합니까?
이게 바로 바벨론의 잔혹한 바벨론의 맹렬한 군사들이에요. 원래 바벨론이 예루살렘이 항복하면 그렇게 화를 안 내는데 예루살렘이 아직도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지켜주니까 안 망한다. 하니까 더 정복자의 약을 올린 거예요.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이성이 나갈 정도로 아이고 어른이고 다 죽여버렸어요. 구원받는데 아이 따로 어른 따로 없고 따로 없습니다. 아이라고 봐주고 이런 거 없어요. 깔끔합니다.
자, 그 원인을 조사하는데, <무익한 거짓말>. 렘7장10절, “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이게 바로 성전에 이야기합니다. 그전에 예레미야7장 앞에 보면,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고 3번 이야기해요. 7장4절,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그 다음에 뭐라고 해요?)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걸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교회다.”라는 말을 믿지 말라. 절간이다. 인간의 행함이 들어간 것은 무조건 절간이에요. 갓바위에요. 믿지 말라.
그다음에 7장 16절,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렘 7:16/11:14) 기도해도 안 듣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8장11절에 보면, <대충 위안>.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대충, 그냥 성의 없이 뜻이에요.)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처방전을 대충 해주는 거예요.
그다음에 <진정한 자랑>. 진정한 자랑이라고 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잔소리에 해당돼요. 렘9장23절, 24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걸 신약에 오면 뭘 자랑하라?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십자가만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주께서는 자기희생으로 구체적인 희생으로 이야기했지, 말로만 사랑한다. 대자대비한다. 그런 거 없습니다. 자기를 죽였어요. 죄인을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을 한 구체적인 업적이 실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천주교 십자가는 뭐냐, 예수님의 몸이 달려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처럼 예수님처럼 우리가 본을 본받자.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자. 이런 식이라. 따라가서 구원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주께서 값을 치렀기 때문에 구원받지, 누가 예수님처럼 삽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저주 근거>. 예루살렘만 저주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약속의 땅에 있던 이 백성들이 어디로 이사를 가지요? 이방나라로 이사를 가지요. 그러면 유다와 북이스라엘 유다를 저주 했던 그 언약이 이동하는 셈이 돼요. 이동해버리면 다른 이방 민족에도 말씀을 여호와를 안 믿으면 그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격적으로 저주받는 시대가 찾아오는 거예요. 하나의 저주의 불씨가 하나님에 의해서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유대인에 의한 소극적인 전도, 선교가 되지요.
우리는 망했다. 그게 선교가 되지요. 여호와가 우리를 망하게 했다. 를 이게 사도행전에 보면 나와요. 이게 복음의 내용으로 포함이 됩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렘 10:25)
그다음에 <언약의 중요성>. 예레미야11장. “내가 옛날에 애굽 때, 그때, 저주 받는다고 했잖아. 과연 너희가 내 말을 안 듣고 이방 우상 섬겼으니까 너희가 저주 받는 거야.” 그 이야기. 아까 이야기한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이야기.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날이 그것을 증거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렘 11:3-5, 8/14:21)
그다음에 <불가능한 선(善)>. 렘13장23절,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흑인이 갑자기 백인 될 수 있어요? 그건 병 들린 거지요. 마이클 잭슨처럼. 표범이 그 반점이 변해요? 반점 없는 표범은 그건 표범이 아니고 그건 뭡니까? 시나소니쯤 되겠지요. 표범 자체가 아니지요. 반점이 있어 줘야 표범의 본질이지요.
이거는 안 되는 일이거든요. 안 되는 것을 이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게 만약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수준은 어느 수준이냐 하면 악을 행하는 너희가 선을 행하는 그 정도다. 말을 어렵게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희가 만약에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한다면 이건 횡재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따라서 “니가 한 게 아니지.” 이런 뜻이지요.
그다음에 <복도 빌지 말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렘 14:11)
그다음에 <거짓 선지자의 한계와 예레미야의 눈물>. 우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 한 번 봅시다. 렘14장.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한다.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마음으로 자기 마음으로 속인다. 그러니까 칼과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다. 너는 이를 위해서 내 눈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밤낮으로 울고 하는데 내 딸 내 백성이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는 선지자 됐어요.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오늘날도 거짓 선지자가 복음을 빙자해서 뭐 이렇게 좋게, 좋게, 거짓 예언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럼 거짓 예언이 이다, 아니다,를 판정할 수 있는 판정의 근거는 뭡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할 때 어떻게 구분합니까?
여러분이 설교자라면 거짓 선지자 될 수는 없잖습니까. 그건 갈라디아서1장10절에 이미 나와 있어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 좋게 하지 않았는가, 너희들이 가해자라는 거예요. 피해자는 주님이고. 몇 퍼센트? 100%. 100% 가해자.
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죄 때문에 미리 가져갔으니까. 가해자를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뭐가? 십자가가. 내가 가해자로 만드는 근거는 십자가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십자가를 사랑한다. 나는 십자가 없이는 못 살겠다. 이게 뭡니까? 내가 하나님을 죽인 가해자라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나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겠다. 이게 성도 아닙니까. 성도에요.
자, 하나님의 심정 봅시다. <하나님의 심정>. 렘15장1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쫓아내라는 주께서 쫓아내시겠지요.
그다음에 예레미야의 구원에 대해서. <예레미야의 구원>. 예레미야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욥처럼 힘들어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진다.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렘15장16절~ 21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절,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절,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19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 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절,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
그다음에 <사람 믿지 말라>. 렘17장5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사람 믿는 그도 저주받고, 나를 믿으라 하는 그 인간도 저주받고, 그러니까 이건 목사를 믿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30년 동안 복음 전했다. 전했겠지요. 맞아요. 전했어요. 그런데 30년 그다음 주일날 전하지 않는다면 전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복음과 복음가지고 사람관계 해야지 한동안 우리 같이 계 모임하고 성경공부 같이했고 30년동안 같이 했다고 그거 다 지난간 일입니다. 늘 복음으로만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복음만 하는데 그게 뭐냐, “나는 니보다 더 쪼다다.” 하는 거.
<공격받는 예레미야>. 말씀 전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거예요. 공격 받으니까 예레미야가 이렇게 합니다. 주께서 다 아시지요. 다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레미야가 또 자기 처지를 한탄합니다. 내가 안 할라 했는데 주께서 자꾸 구원해가지고 했는데, 전하니까 그들이 자꾸 나보고 욕한다 해가지고 나를 공격합니다. 너무나 슬퍼요. 그 이야기에요.
얼마나 진실합니까. 얼마나 진실한 선지자입니까. 렘18장18절,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그다음에 누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했는가, <하나님 회의>. 회의에 참석도 안하고 선지자 노릇하고. 신약에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가 곧 선지자 노릇하고 있어요.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 23:18,22,32)
70년 이야기 아까 했고요. <진노의 잔>. 렘25장15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렘 25:15/마 26:39) 그래서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에스겔이나 이런데 보면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주변나라에도 저주를 선포해요. 두꺼운 선지자들 보면 다 그래요.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왜그러느냐 하면, 유대인을 이용하는 겁니다. 유대인이 이방 우상을 섬겨서 이동을 시킬 때, 전세계로 퍼지면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여호와를 모르는 자, 주의 이름을 모르는 자에게 저주가 임한다. 했지요. 주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 원칙이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전 세계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이 지구의 멸망을 촉구하는 그러한 시발점으로 유대나라를 사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방아쇠를 당긴다고요. 그래서 유다나라 망하면 종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세상은 다 종말 할 거니까.
<여호와의 새 일>. 렘31장22절,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 31:22/계 12:5) 예레미야는 이 말을 하면서 이 말의 실체는 요한계시록12장5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걸 이야기해요.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 그냥 자식이 아니고 남자. 아들. 이건 이사야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이 대목이지요.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다 같은 선지자에요. 하나님의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다음에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겁니다. <정신 못차리는 유대 여인들>.
이게 뭐냐하면, 이 말이에요. 우리가 하늘의 여신한테 분향할 때는 만사가 형통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 여신한테 분향하고 섬기는 걸 폐한 후에는 모든 것이 우리가 하는 뜻대로 안되더라 이 말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의 뜻은 뭐냐, “망해야 복이지. 그래야 복을 받지. 그래야 니가 니 자신의 주제파악이 되지.”
그런데 여인들이 그런 소리를 하면서 짜증을 내면서 “우리가 이렇게 하늘 여신에게 바칠 때 나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고 우리 남편 허락없이 한 건 아니다. 다 우리 집안을 대표해서 내가 했다고, 갓바위에 내가 빌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핑계라고. 무슨 큰일 했다. 하지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리 돼요.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렘 44:17-19)
마지막에 <스스로 뽑고 세우시는 하나님>. 렘45장4절,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이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냐 하면, 바로 예레미야가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너무 탄식하고 너무 아파하니까 “네 하나님이 원래 그래. 내가 세운 것도 뽑아.” 왜그러느냐 하면, 인간하고 상대했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율법을 줬어요. 율법은 무슨 언약이냐 하면, 율법은 모세언약이지요. 모세언약에 니가 지키면 복을 받지만, 못 지키면 뭐 받는다? 저주받는다.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저주를 집어넣었어요. 이것은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할 때, 생명나무는 따먹는 것은 좋은데, 선악과 따먹는 것은 주의해야 된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니가 정녕 죽으리라. 율법의 저주이야기와 선악과의 죽으리라, 하는 이유가 이 땅에 있는 창조가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함이에요. 하나님을 위함입니다. 인간은 마귀와 한 통속되고 난 뒤에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자꾸 자기 위주로 된 것은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죽으리라. 저주 이야기를 이렇게 하심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은 이런 저주, 정녕 죽으리라가 이미 넘어선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넘어서 버렸어요. 만약에 예를 들어서 천국에 선악과 나무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게 천국생활이겠습니까? 이건 스트레스 받을 나라에요. 스트레스 받지요. 왜? 항상 죽으리라가 전제되어 있으니까.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저주가 전제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저주 없고 정녕 죽으리라가 없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죽으면 돼요. 뭘 지켜서 내 것 되겠다는 주체가 날아가면 돼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오라. 이 말은 주님의 십자가와 지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되면 저 십자가는 주님도 죽이는 십자가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도 하나님에게 죽은 걸로 해달라고 아버지께 요청하는 십자가가 주님 지신 십자가에요.
몸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게 주님의 십자가 지신 덕분이에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십자가가 일으키는 여파. 파급된 현상이 이 세상 일어난 모든 일입니다.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만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 그 선언을 바로 성령을 받는 사람만이 알아요.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알기 때문에 4페이지 그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4페이지에 사람 믿지 말라는 것을 그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 렘17장5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여전히 예레미야에서 저주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지요. 그러면 이렇게 사람 믿지 않고 권력을 삼지 않고 주님께 떠나지 않은 사람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을 받은 거예요.
십자가 졌다는 그 정보와 그 의미가 여기에 도달되는 사람. 여기에 이미 도착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 어떻게 아느냐, 반드시 옛사람을 거쳐서 알아야 돼요. 그냥 알면 지식이고. 알아도 돌아서면 다 까먹고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요. 돌아가는데 돌아가면서 항상 ‘참 내가 이미 죽었잖아. 내가 이게 무슨 짓이야? 이미 죽었는데. 주님께서 내 안에 살지. 내가 사는 게 아닌데.’ 라는 것은 어떤 사람은 7년5개월만에 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15년3개월만에 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3시간마다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6일만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사건이 터져야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그것은 나도 모르지요. 주께서 알아서 하시고. 어쨌든 돌아온다는 것. 돌아온다고요. 다시 나의 본래대로 돌아올 때, 지난 거 잊어버릴 때도 큰 감동과 감격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우리에게 옛사람, 옛 성품 남아있는 것을 이제는 도리어 고맙게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야 반복해서 복음을 십자가를 사랑하고, 반복해서 주의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마다 주께 더욱더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