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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그냥 타 260909우리교회열왕기하

그냥 타(열왕기하 13:10-19)

그냥 타

2026년 9월 9일 열왕기하 13:10-19

(13:10) 유다 왕 요아스의 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을 치리하며
(13:1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였더라
(13:12)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3:13) 요아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위에 앉으니라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13:15)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13:16)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13:17)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13:18)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13: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예외없이 자기 좋아라고 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아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16년 동안이나 자신을 우상시하면서도 땅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땅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난데없이 자꾸만 아람 나라가 쳐들어 옵니다. 그 아람나라에 조공 바치는 것도 이력이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은 주변 이방민족으로부터 숱한 조공을 받아왔습니다. 다윗 때부터 시작해서 솔로몬 시대에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방 나라가 어딜 감히 이스라엘을 통치를 벗어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고 순전히 인간들의 노력과 지혜와 단결력에 의존하면서 나라를 꾸려 가는 민족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유지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겨나게 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이 유지되는 원칙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유지되는 원칙이 뭘까요? 먼저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내린 약속이 있습니다. “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 15:1-7)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먼저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아브라함의 방패라고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을 앞장 세워 세상을 향해 전쟁을 벌리시겠다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전쟁’의 결과 둘이 나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 자손들’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땅에서 거주할 때는 필히 하나님께서 전쟁하시는 방식에 따라야 합니다. 아브라함말고 그 이후에 나타난 또 하나의 전쟁 원칙이 나옵니다. 그 원칙은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출 15:3-6)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고 ‘주의 오른손’이 나옵니다. 그 이후에 전쟁의 원칙은 시편에 빈번하게 나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시 71:2)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시 144:1-2) 즉 약속의 땅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주의 얼굴, 주의 이름, 방패, 주의 의, 주의 오른손, 오른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집약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등장하는 아람군대와 요시아와 엘리사의 관계는 ‘예수님의 몸통’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고 받는 말과 움직임이 예수님의 몸 안에서 통용되는 예언의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의 말도 예외가 아닙니다.

“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왕하 13:25) 그렇다면 요아스 왕과 엘리사 간에 주고받는 그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를 보는 걸까요?

엘리사는 요아스 왕의 손을 곱게 잡고 창문을 열고 아람쪽을 향하여 화살을 쏘개 합니다. 이는 약속의 땅 쪽에서 본디의 원칙대로 이방민족인 아람 나라를 처리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동안 요아스 왕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민족 내부가 제대로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원칙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지금 엘리사 선지자는 곧 죽고자 합니다. 요아스 입장에서 어떻게든 선지자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왕하 13:14) 이것은 열왕기하 2:11-12에서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보고 한 말입니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즉 지금 엘리야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설교 본문에서는 엘리사 선지자가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노선은 어떻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입니다. 약속의 땅 원칙대로 하나님의 가치를 지키는 방법을 예언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의, 오른손의 능력’이 전부 ‘죽음’을 통해서 성립되는 겁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왕하 13:21) 이는 곧 이방민족이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 ‘이스라엘를 위한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의 적이었던 겁니다. 적, 곧 아람 민족을 향해 쏘아대었던 화살은 이스라엘 이 땅을 치고 또 쳐야했던 겁니다.

인간은 날때부터 자신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자기를 벗어날 수가 없어 자기에게 도움되고 유리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그런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예언을 위해 자기 백성을 사용하신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평생에 걸쳐 합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염려하고 때로는 걱정하고 절망하면서 하나님에게 매달립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죄사함이었고, 하나님의 의였고 영생입니다. 이 모든 능력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에서 비롯된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서 자신을 영웅시하거나 자존심이나 책임감에 매몰되어 거기에 중독되어 삽니다.

‘승천한 엘리야-죽은 엘리사’에 걸쳐서 형성된 노선이 바로 죽은 자로 살리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인 조건입니다. 이 구원열차에 올라타야 합니다. 거기에 보혈의 피가 있고 죄 사함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명이 아닌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2강-열왕기하 13장 10-19절(그냥 타) 26090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3장 10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3:10-19

“유다 왕 요아스의 삼십 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륙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였더라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아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위에 앉으니라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게? 엘리사가 늙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요아스왕은 남쪽의 요아스가 아니고 북쪽의 요아스에요. 이름이 똑같아요. 북쪽의 요아스 왕이 평생 왕위에 있으면서 우상을 섬기고, 우상 섬기던 조상의 본을 따르면서 그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오늘 본문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유다 왕 요아스의 삼십 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륙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였더라”(왕하 13:11-12).

16년 동안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결국은 죽었는데 요아스왕이 죽기 전에 죽어가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왔습니다.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선지자를 향하여 나의 군대가 되어달라는 거지요. 열왕기하 13장 7절에 보면, 아람왕이 와서 이스라엘의 병사를 얼마까지 축소시켰느냐 하면,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 자기 아버지 대에 아람 나라에 형편없이 지배를 받았다는 말이지요. 마치 우리나라가 36년 동안 일제 시대에 지배를 받은 것과 같지요.

그때 우리나라 경찰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경찰은 고위 간부가 될 수가 없고, 고위 간부 자리는 누가 쥐고 있는가? 일본인이 경찰의 고위 간부를 하면서 예속되어 지배받는 나라의 주민들을 다스리려면 그쪽 경찰을 뽑아야 하잖아요.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서 나까무라 순사, 이런 식으로 해서 한국인은 한국 경찰이 다뤘듯이 그 정도, 딱 그 정도를 남겨둔 거예요.

아람 나라에 예속되었으니까, 종이 되었으니까요. 요새 말로는 그것을 식민지라 하지요. 식민 국가의 서글픈 형편, 요아스왕이 있지만 그게 왕이겠어요? 아람 나라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지요, 다 빼앗겼으니까. 그래서 이 요아스가 뭘 생각했느냐? 옛날에 잘나갔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에 꼼짝도 못 했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거예요.

다윗 때는 주변이 다 ‘꼼짝 마라’였습니다. 다윗이 오히려 주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지요. 거기서 1년마다 공물을 바치도록 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형편은 참 서글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사 선지자마저 죽을 형편에 놓였으니까, 병사들도 없겠다, 선지자도 죽을 판에 뭐라고 하느냐?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마지막 남은 우리의 군사력이 되셨던 분이 이렇게 가십니까?’ 하고 서글퍼하는 거예요. 선지자를 보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는 군대용어로 대치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은 엘리야한테도 있었어요. 열왕기하 2장 11-12절에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회리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이것, 동영상 이미지로 생각해 보세요. 땅에서 회리바람, 소용돌이 바람이 불었습니다. 소용돌이 바람이 불었는데, 엘리사와 엘리야 중에서 엘리야의 몸만 감고 위로 올라가니까 거기에 뭐가 대기 되어 있었는가? 불수레와 불말이 대기되어 있으면서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지요.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면서 하늘에서 대기하고 있던 불수레를 엘리야가 타고 홀연히 엘리사의 시선에서 떠납니다.

그때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이스라엘을 지켜줬던 우리의 군대였습니다.’ 존재 자체가 막강한 국방력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러고 난 뒤에 엘리사도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잡고 물을 치니까 물이 갈라졌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켰던 그 군대가 이제는 어디로 인수인계되었는가? 엘리야에서 그 제자인 엘리사로 인수인계된 거예요.

이걸 누가 아느냐? 요아스왕이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엘리사가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이거 어쩌면 좋지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지켜주심이 보장되던 그 사람이 이제는 운명하시고 그 나라를 떠납니다. 그래서 요아스가 걱정이 되어서 찾아오니까 그때 엘리사가 힘이 없이 죽어가면서도 “요아스 왕이여, 활과 화살을 준비하세요.” “준비했습니다.” 엘리사가 요아스왕의 손을 잡습니다. “내가 왕의 손을 잡고 인도하는 그 방향대로 잡아보세요.” “방향 잡았습니다.”

“자, 그쪽방향에서 아람 나라가 쳐들어옵니다.” 요아스는 걱정이 되지요. 왜? 군사가 하나도 없는데 뭘 얻고자 또 쳐들어오는 거예요. 깡패가 돈 뜯으러 오는 것처럼 또 찾아오는 거예요. 엘리사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 힘을 다해서 “왕이여, 이쪽이 저 아람(지금의 시리아)이 쳐들어오는 방향입니다. 자,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합니다. 쏘세요!”

지금 아람 나라 쳐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쏘기 전에 먼저 창을 열어야 하지요. 창을 열고 아람 쪽 허공을 향하여 활을 쐈습니다. 그리고 “자, 이번에는 화살을 취해서 이 땅을 칩니다. 땅을 치는 거예요, 임금님! 치세요!” 땅을 쳤어요. 한번, 두 번, 세 번, 세 번 쳤어요. 요아스왕이 화살로 세 번 땅을 치니까 갑자기 돌아가시기 직전에 있는 엘리사가 화를 벌컥 냅니다. “왜 세 번만 쳤습니까? 대여섯 번 쳐야 제대로 아람 나라를 꼼짝 못하게 칠 수 있었는데 왜 세 번만 쳤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번만 치리이다.”(왕하 13:18-19).

이 대목을 보면서, 지금 요아스 왕이 선지자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어요. 시키는 대로 했어요. 아쉬우니까, 마지막 선지자가 떠나고 있으니까. 치라고 해서 그대로 쳤어요, 세 번을. 그러면 세 번 친 것 가지고 노하지 마시고 처음부터 “왕이여, 대여섯 번은 치셔야 합니다. 세 번 치고 그만두기 있기, 없기? 없기!” 이랬으면 왕이 몇 번 쳤겠어요?

다섯 번, 여섯 번 쳤을 거예요. 몇 번 치라는 말이 없이 그냥 치라 했는데 세 번 쳤더니만 화를 벌컥 내면서 “왜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을 안칩니까? 그렇게 했으면 아람 나라를 제대로 밟았을 것인데 당신은 결국 세 번밖에 못 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즉에 이야기를 해주지요. 말도 잘 듣는데 진즉 이야기하지.

왜 세 번 치고 난 뒤에 화를 벌컥 내고 다섯 번 여섯 번 쳐야 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했을까요? 우리가 이 본문 보면서 등장인물, 엘리사, 요아스, 아람, 이 셋만 뽑아봅시다. 아람 나라, 요아스, 그리고 엘리사 이 셋의 존재가 보여주는 것은 뭐냐 하면…, 훌쩍 뛰어넘어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훌쩍 논리를 뛰어넘어서.

그게 ‘그리스도의 몸통’입니다. 예수님의 몸통이에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몸통이에요. 그 근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열왕기하 13장 25절에 나옵니다.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아까 본 열왕기하 13장 18-19절에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여기서 세 번만 쳤다는 그 이야기가 그냥 인간 대 인간, 남자 대 남자로 해본 소리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25절에 보니까 실제로 현실화되었어요. 북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를 딱 세 번만 이겼어요.

이것은 뭐냐? 예언입니다, 예언!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예언이고,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세 번 치는 그 요아스 왕도 본의 아니게 본인도 의식한 적도 없이 엘리사의 예언의 말씀에 끼어든 거예요, 합류된 겁니다. 합류되어서 그 결과가 아람 나라를 세 번씩이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걸 제가 ‘그리스도 몸통’이라고 표현하느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요, 그냥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 그 예언대로만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예언한 것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말씀하신 그 바깥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지 않아요.

왜 예수님이 몸통이냐 하면, 아람 나라도 마찬가지고, 요아스도 마찬가지고, 엘리사도 마찬가지고, -물론 그 당시에는 메시아가 없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통 안에서 그들 세 그룹의 존재자가 전쟁을 벌이고, 예언을 하고, 활을 쏘고, 화살로 땅을 세 번 치는 이 모든 움직임이 장차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서 하실 그 모든 일의 예언의 말씀’이라는 뜻에서 제가 이 세 존재가 그리스도의 몸통 안에서 움직이는 메아리 같은 예언들인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예언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자신이 하신 것을 예언하기 위해서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러면 화살 쏘고 세 번 쳤는데 세 번 쳤다고 나무라면서 ‘대여섯 번 쳤으면 아람 나라를 제대로 밟았을 것’이라는 이것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거지요. 이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관계를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이 땅, 땅이거든요.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창문을 열고 활을 쏘는데 창문을 열었다는 것은 밖이니까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 민족을 보고 활을 쐈는데 왜 화살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을 세 번이나 치라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쏘세요, 쏘세요, 쏘세요, 해서 대여섯 번 쐈으면 제대로 멸망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스라엘 땅을 치고 또 치고 쳤느냐는 거예요. 그것도 세 번만 쳤다고 나무라면서 대여섯 번 쳤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런 겁니다. 왜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 자기 땅을 쳤는데 왜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오느냐는 그 말이에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네팔에 간 남편이 지금 행방불명이다. 그래서 유족들이 네팔까지 갔잖아요. 거기 가서 수색에 조언도 하고 그러고 있는데 어떤 아내가 가슴을 한번, 두 번, 세 번 쳤다 합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색대가 “대여섯 번 치지 왜 세 번만 칩니까?” 그러면 “진즉 알려주시지.” 그래서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치니까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다.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여러분이 구약 성경 전체를 생각해 보세요. 제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땅은, 이스라엘이 점유한 약속의 땅은 아람 나라 같은 이방 나라가 넘볼 땅이 아니에요. 애초부터 넘볼 수가 없고 넘보기는커녕 ‘어떻게 좀 쳐들어가 볼까?’ 하는 그 정도도 아니고 그들 이방 나라는 이스라엘의 속국이어야 해요.

아람 나라는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습니다. 속국인데 그 아람 나라가 여호아하스, 요아스의 아버지 때 곡물이고 뭐고 다 가져갔잖아요. 그리고 군사력을 제로로 만들어놨잖아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아람 나라가 문제입니까, 이스라엘이 문제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까 본문 봤지요. 요아스왕이 16년 동안 무슨 짓 했습니까?

여호와 안 섬기고 이방 우상 섬기는 악을 행했다고 했지요. 그러면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람 나라에 문제가 있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잖아요. 그런데 요아스는 몰라요. 그걸 모른다고요! 애초부터 이방 나라는 감히 하나님이 계시는 이스라엘 땅을 넘볼 수도 없어요.

그런데 요아스는 이제 엘리사가 죽을 때가 되니까 “선지자님, 빨리 기도해서 우리 좀 도와달라고 해주세요.” 하고 찾아온 거예요. 아주 애타는 마음으로. 그런데 요아스의 이 사고방식도 잘못되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은 그 땅,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지켜야 돼요.

자꾸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교회 나오는 교인들도 이점을 좀 아셔야 돼요. “사는 게 힘듭니다.” 그러면 대번에 하나님이 물어요. “사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지금 너한테 어려움을 주는 그 사람이 문제야, 네가 문제야? 네가 문제야!”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착실하게 사는데 저쪽에서….”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이제 네가 뭐가 문제인지 알려줘? 알려줄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 살아야 돼요. 지난번에 했는데, 성도는 약속의 땅에 살아요. 약속의 땅은 뭐냐? 약속이 나오는 데예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약속에 뿌리를 박아야 되는데 어디다 뿌리를 박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다가 뿌리를 박고, 자기 자신이 안전빵으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

평생동안, 평생동안 자기 좋은 쪽으로 사는 거예요. 바닥을 훑어봐도 약속이 없어요. 자기뿐이에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거예요. 그래 놓고 어려움이 오니까 하나님이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겠습니까? 그 교인 불러서 “네 집 아파트 창문 열어라.” “예” “누가 너를 힘들게 하더냐?” “밑의 층에서 힘들게 합니다.” “그래? 활 내놔라.”

애들 노는 장난감 뿅뿅이 활 있잖아요. “아래층 향해서 화살을 쏴라. 그리고 화살 가져와!” 그냥 쏘기만 하면 이것은 무당 짓이에요. 장희빈이 황후를 죽이기 위해서 짚으로 인형 만들어서 쏘세요, 슈슈슈, 하고 쐈잖아요. 흑마술 하듯이. 주님께서는 “화살 가져와. 그리고 너를 쳐! 적을 친 그 화살을 가지고 너를 쳐라, 너를, 너 자신을 치라고!”

“어떻게요?” “쳐 봐!” 틱, 틱, 틱, 세 번. “죽으라고 쳐, 죽으라고! 죽으라고 쳐! 다 네 탓이야.” “내 탓이라고 하면 잘됩니까?” “이거 봐, 이거 봐. 또 결론은 네가 잘되는 거잖아. 지금 네가 잘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나고, 하나님이 증거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알려지기 위해서 네가 뽑혀서 그나마 예수님과 관계를 맺은 거야. 그런데 아직도 너는 ‘이렇게 하면 내가 잘됩니까?’ 끝에 ‘내가 잘된다’는 그것이 왜 나오느냐, 왜?”

요아스왕은 자기의 죄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그리고 아람 나라가 쳐들어온 그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친다는 그것도 몰라요. 이 본문이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정리해 봅시다.

1.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논리를 따라오세요. 2.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 민족과 싸우게 했다. 3.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싸울 때 뭐 가지고 싸웠어요? 여러분이 구약 보면 이방 민족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싸우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시편 20편 7절에,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다시 읽을게요. “어떤 사람은 병거” 무기지요,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의 이 이야기가 어떤 원칙이냐?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가 갈라졌잖아요. 홍해가 갈라졌을 그때 모세의 누나가 찬양을 선도했는데 그 찬양 가운데 나오는 게 뭐냐? ‘여호와는 우리 용사시고 여호와 이름으로 이겼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시편 44편 3절에,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이 되도록 이스라엘 민족을 백성으로 삼았는데 그 백성이 나가서 다른 이방 민족과 싸울 때 그들의 노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팔과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승리했다는 겁니다. 이것도 바로 출애굽기 15장 홍해가 갈라졌을 때 나온 그 대목이에요.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다음에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오른손으로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그 이야기, 사도행전의 베드로 설교에 나와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주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거예요. 시편 144편 1-2절에 보면,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하나만 더요. 시편 71편 2절에 보면,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31편 1절에도,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 1. 하나님이 요새고 방패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자신의 오른손, 오른팔, 얼굴의 빛으로 건지신다. 3. 하나님은 주의 이름으로 구원한다. 4. 하나님의 주의 의로 구원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이 네 가지가 나오는데 이 네 가지 특징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일체 인간들이 사용하는 전쟁방식은 다 빠지지요.

인간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다 빠집니다. 인간들이 ‘전쟁은 이렇게 해야 해’라는 것은 왜 의도적으로 다 빠지느냐? 그게 안 빠지면요, 그것은 천국이 인간의 나라가 돼요. 주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약속의 나라가 아니에요. 그냥 인간 나라의 재탕이에요.

사사기 초반부터 중반부의 흐름을 제가 아주 짧게, 후딱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사기 3장 8절에,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이 8년 동안 –약속의 땅인데요- 지배받았어요. 사사기 3장 12-14절에, 모압왕 에글론에게 18년 동안 지배받았어요. 사사기 4장 2-3절에, 가나안 땅 야빈에게 이십 년 지배받았습니다. 사사기 6장 1-6절에, 미디안에게 7년 동안 지배받았어요. 사사기 10장 7-8절에, 암몬 자손에게 18년 동안 지배받았어요. 사사기 13장 1절에,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지배받았어요. 종으로 지배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는 원칙이 있는데요. 첫 번째, 우상숭배를 했다.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겼다. 두 번째, 하나님이 진노했다. 세 번째, 이방 민족이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약속의 땅 이스라엘을 압제했다. 네 번째, 이스라엘이 견디다 견디다 못견뎌가지고 –할 도리는 다했겠죠- 부르짖었다. 다섯 번째, 사사를 내세웠다. 여섯 번째, 사사한테 성신이 임해서 구원하셨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뭐냐? 다시 범죄 했다, 다시 범죄 했다.

기적과 기적을 주니 뭐합니까? 기드온의 300명 군사가 와서 나라를 건져내니 뭐합니까? 다시 범죄 하는데요. 성경에서 구원의 원칙은 이겁니다. ‘종이 되지 아니한 사람은 구원을 모른다.’

그래서 사사기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이방 민족에게 종이 되는,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그러한 경험을 겪게 하시고 그 틈새 틈새마다 –사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성신 받은 사사, 그러니까 사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신이 임하니까 성신에 의해서 그때마다, 그 틈새마다 그들을 잠시 잠깐씩 구원하신 거예요.

종이 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뭐냐? 부르짖음이에요. 그전에 그들이 할 도리를 안 했겠어요? 칼과 병거도 준비해 보고, 외교정책도 해보고, 공물도 바쳐보고, 뇌물도 바쳐보고, 다 했는데 안 돼요. 결국은 안 돼, 안 돼, 안 돼! 그래서 뭐냐? ‘주님이여, 도와주소서!’ 하니까, -심지어 ‘입다’는 깡패였습니다- 깡패 같은 인간에게 성신이 임해요. 그래서 ‘저 인간이 우리를 구원해?’ 이랬는데 성신이 임하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했어요.

애굽의 종에서, 하나님께서 유월절로 해서 약속의 땅까지 끄집어낼 때 그 출애굽 원칙을 그대로, 약속의 땅에 그들이 사는 한 되풀이해서 적용시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종이었습니다. 국가의 종이 아니고, 이방 민족의 종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종이에요.

돌아서면 우상 섬기고, 돌아서면 우상 섬긴다는 말은, 그 우상이 뭐냐? 그 우상이 나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이거 못 고칩니다. 고칠 수가 없어요. 여호와든 예수든 삼위일체든 뭐 이름 대봐야 소용없어요. ‘나는 나를 위해서’가 꿈쩍도 안 해요. 꿈쩍도 안 한다고요. ‘약속’을 위해서 있어야 할 우리가, ‘나’를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그래서 이름 바꾸라고 ‘주의 이름’으로 전쟁하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이제는 네 이름 없어. 내 이름에 예속된 거야.”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그러면 주의 이름이 무기네요. 그렇죠. 주의 이름이 무기인데, 주의 이름에 바주카포가 있어요, 기관단총 있어요, 원자폭탄이 있어요? 주의 이름이 무슨 무기가 됩니까?

아까 본 시편에 보니까 주의 이름에만 ‘주의 의(義)’가 있어요, 주의 의(義)! 죄사함이 있다고요, 죄사함! 죄인인데 죄 사해 줘버리면…,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인데, 어느 날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의로,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오른손으로,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의로 우리를 살리소서’ 이렇게 우리를 구원해버리면 우리는 죄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게 영생입니다. 여러분, 죄사함 받았어요? 죄사함 받고, 영생 받았는데 이 세상에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설쳐댑니까? 죄사함 받았으면 다 됐잖아요. 주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잡고 있잖아요. 영생 받았으면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화를 내죠? 왜 걱정하죠? 왜 분노하죠? 왜 염려하죠?

죄사함 받았다면서요? 영생 얻었다면서요? 왜 아직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재주를 부리려고 합니까? 여러분, 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특이한 전쟁이 벌어지는지 그 이유를 아셔야 해요. 왜 다른 나라 말고 이스라엘에게 특이한 전쟁, 칼이나 병거나 말로 이기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이기는 전쟁, 주의 의로 이기는 전쟁, 주님이 방패가 되시는 전쟁, 이런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함’이에요.

거기에 이스라엘이 말려든 거예요. 참 좋게 말려든 거죠. 영광스럽게 말려든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이스라엘에 아람 나라를 보낼 때,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에게 그냥 덮치는 겁니다. 덮치는데 누가 적이냐? 아람 나라가 적이 아니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이 요아스같은 이 인간이 적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을 하나님 땅으로 보고 싶은데, 요아스는 자꾸 자기 땅으로, 자기 부동산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가 화를 내면서 나무란 겁니다. 땅을 친다는 것은 이 땅이 하나님의 땅인데, 바로 당신이 이 땅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죠. 요아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됨을!

여러분, 네팔에 홍수 덮쳤잖아요. 엄청나게 밀려오죠. 전에도 예를 들었지만, 홍수가 났는데 거기서 ‘나는 한평생 이렇게 살았습니다, 옥수수밭을 갈았습니다, 찻집 했습니다…’ 홍수 앞에서 그런 사정은요 안 통해요. “홍수님, 잠시만요. 우리 집은 오지 마세요. 제가 평생 일군 밭인데 이거 놓치면 진짜 희망 없습니다.” 이게 홍수한테 통합니까?

누가 이사하는데 이삿짐센터에서 와서 아주 깔끔하게 이사를 해줬어요. 젊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덩치 큰 젊은 분이 와서 해줬어요. 이삿짐센터에서 깔끔하게 처리해 줬는데, 유월절 날,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하는 그 유월절 날 천사가 그날 밤에 사람들 죽이는데, 야~, 깔끔하게 일 마무리 잘했어요. 어린양의 피가 없는 쪽, 다 죽였어요. 이삿짐센터에도 그런 직원은 없어요. 정말 깔끔하게 정리했어요.

피가 없는 것은, 십자가 보혈의 피가 없는 것은 깔끔하게 다 죽여버렸습니다. 얼마나 깔끔합니까? 홍수가 왔는데, 덮칩니다. 홍수가 와서 덮칠 때 그때, 주님의 십자가의 그 심판이 덮칠 때 우리는 뭐냐? 엘리사가 지금 죽어가고 있잖아요, 엘리사가,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가 죽는다는 것은 자기 스승님, 엘리야 쪽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죽어서 올라가는 거예요, 죽어서!

그게 뭐냐? 오늘 본문 13장 21절 한번 보세요.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도둑이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선지자가 마병이에요. 이스라엘을 건지는 군사인데 그 마병이 죽었을 때, 우리는 그냥 ‘엘리사가 죽었다’ 하지 말고 엘리사가 죽은 그 시체에 어떤 사람이 닿자 이게 소생, 되살아났어요. 신약적으로 말하면 부활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노선이 뭐냐? 구원열차가 뭐냐 하면, 엘리야가 먼저 선점해서 위로 올라갔잖아요.

위로 올라가는 방법이 엘리사 쪽에서는, 엘리사가 죽는 그 취지에 합류하게 되면 엘리야가 먼저 간 그 하늘나라에 도달하는 그 구원열차에 동승할 수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엘리사, 엘리야의 이 요소를 품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약속의 땅이 구현되는 그 천국으로 올라가는 구원열차를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세상에서 홍수가 들이닥쳐도 진짜 죄사함받고 영생 얻는 사람은요, 이러면 돼요. 다른 사람에게, “그냥 타! 그냥 타라고!” ‘그냥 타’가 좀 길다 싶으면 “타!! 타!” 죄사함과 영생을 주는 그 보혈의 피가 묻혀있는 그 노선, 그 절차에 그냥 올라타! 인생이 어떠니, 이번에 용혜인이 어떻고, 장관이 어떻고, 호르무즈 해협이니 파병이니…, 그거 치우고, 껄떡대지 말고, 세상에서 무슨 자기 책임을 감당하니, 자존심이고 뭐고 그런 것은 네팔 홍수 지옥으로 가는 거기다가 자기 자존심도 책임감도 다 던져버리고,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그냥 타세요, 그냥 타세요!

타면, 그 십자가 피 앞에서 진짜 죽을 인간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거예요. 교묘하게 하나님 이용해서 행복하려는 나 위주의 이 인간, 이거는 화살 가지고 치고, 치고, 죽으라고 쳐도 모자랄 정도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는 그것을, 이 구약 엘리사를 통해서, 그리고 요아스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쓰잘데기 없는 것 가지고 분노하고, 화내고, 격분하고, 남 탓으로 돌리고 그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우리 주님 앞에서 행할 도리가 아닌 것을 제대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사함 해주시고, 천국 보내주시고, 영원히 영생을 주시는 주님 앞에 더 이상 화낼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올라타!”라고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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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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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