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대신 영생260906
돈 대신 영생(야고보서 5:1)
돈 대신 생명
2026년 9월 6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5:1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부자라고 여기는 자들만 들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은 부자를 지향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이 부자에게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 즉 “울고 통곡하라”를 평소의 소망으로 삼을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나 돈 많이 벌어서 실컷 울고 통곡해야지”를 꿈으로 품고 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울고 통곡’의 세계가 바로 지옥입니다. 즉 인간들은 지옥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인생 사는 것을 보면 모조리 ‘지옥에 적합한 삶의 방식’으로 취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율성’입니다. 인간들은 ‘내가 있음’을 ‘나에게 자율의지, 자율성이 있음’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은 세 가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행복’, 두 번째로 ‘희망’, 세 번재로 ‘내 가족 챙기기’입니다. ‘내 가족’이란 유전자 공유률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50%, 손자와의 사이에는 25%, 사촌 간의 사이에는 유전자 공유률로서는 25%이지만 근친도에 있어서는 12.5%입니다. 두 개의 조상 유전자가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내 가족 챙기기는 곧 자기 사랑의 확장입니다. 나의 것, 즉 나의 유전자가 그들에게 약간이나마 지분이 있으면 나는 다수의 친척과 일가를 통해서 불멸성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가 친척 가족을 보면서 “나는 살아 있다”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인간의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없는 존재’입니다. 존재이긴 존재이지만 없음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개입니다. ‘있다고 여겨지다가 어느새 없어지는 것이 안개요 곧 인생’입니다. 왜 하나님 관점에서는 인간이 없는 존재일까요? 그것은 인간을 위한 시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돈 벌어서 살고자 한다는 것은 ‘내가 살 수 있는 시간을 미리 돈 주고 사 놓은 시도’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잠시 멈춤)”(시 39:5-5)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4-10) 마치 인간들의 척추 구조에서 뼈와 뼈 사이에 연골이 끼어 있는 것처럼 시간이 있다가 사건이 만들이고서는 시간이 빠져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남아 있는 것은 사건과 사건이 겹쳐져서 납작하게 압축된 구조입니다. 그 시간이 빠져나간 자리에 인간의 기억이 들어와서 그것이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곧 빠짝 마른 뼈 구조요 죽음 형태입니다. 원래 인간은 죽음이 지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합니다.
자신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손을 쓸 수가 없으며 정답도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될 수 있는 대로 멀찍이 밀어놓고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눈 감고 아웅하는 식입니다. 전면적인 부정성 속에서 개인적인 긍정성은 근본적으로 문제해결이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자율성이 살아 있는 것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고 우깁니다.
지옥이란 바로 이 자율성이 갇힌 상태에 살아 있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지옥에서 할 말이 많습니다. 자신이 이왕 죽은 몸이지만 아직 죽지 않고 세상에 살아 있는 동생들이 자신이 있는 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죽은 거지를 다시 살려서 세상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눅 16:28)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이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영생을 주실 자들이 그들 가운데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2-3)
여기서 영생을 주시는 방식이 나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영생을 제공하는 권한이 주시는 방식입니다. 즉 사람들이 영생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위반하지 않다고 다 지켰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안한 하나의 개인적으로 특화된 말씀을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1-22)
즉 영생받지 못할 자는 그 어떤 식으로도 배제하십니다. 그 대신 영생 얻을 자에게는 ‘죄사함’이라는 방식 안에서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즉 지나간 빠진 시간을 문제삼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죽은 자를 향하여 선언하시는 식으로 생명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요 11:43) 이런 방식을 일반화 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이로서 자율성 대신 주님의 말씀이 나오면 영생 얻은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없애는 것이 곧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으로 이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0강-야고보서 5장 1절(돈 대신 생명) 26090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1절입니다.
야고보서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들으라 부한 자들아”인데, 부자인데 왜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을까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부자는, 돈은 모든 것을 보상하고 어떤 최종적인 나의 위로는 부자예요. 돈만 있으면,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았든 돈만 있으면 그게 위로가 돼요. 그래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최고 경지에 다 올라간 거예요. 더 이상 남에게 잔소리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 저렇게 사는 거야, 잘 못 살았어, 모든 이 잔소리는 뭐냐? 우리가 아직 덜 부자 되었다는 거예요. 남에게 그렇게 부러운 대상이 못 되고 있다는 겁니다. 부자가 되면 남한테 명령하는 자리이지 명령받을 자리는 아니에요. 아쉬운 게 없는데 왜 명령을 듣고 지시를 받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들으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누구한테요? “부한 자들아.” 그런데 이 “들으라 부한 자들아”라고 되어 있을 때, 이 말씀은 스스로 부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 부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야고보서 5장 1절을 “그냥 지나가실게요” 하고 안 들어도 그만 아닐까요?
“들으라 부한 자들아.”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들어야 될 말씀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딱 집어서 “부한 자들아!” 해서 “다른 사람들은 듣지 마. 부한 자들만 들어.” 그러면 이 성경에서 이거 우리는 다 지워버려야 되나요? 부한 자들만 들어야 하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전국의 개인택시 하는 사람들 들으라!”라고 하면 택시 운전 안 하는 다른 사람들은 들을 필요 없어요. “전국에 김밥 장사하는 사람들 들으세요!”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들을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들으라. 부한 자들아”라고 하는 이 말씀이 부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들어야 되는 말씀으로 이렇게 야고보서 5장 1절에 나와 있다면, 이 말은 다른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부자 되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꼭 부자가 되어야 부자가 아니라 “부자를 향하여, 부자 되기 위해서 자기를 채찍질해 가면서 인생의 목표를 부자 되는 데 세우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아, 똑바로 들어!”
들어야 될 그 이유가 뭐냐? 결과가 이미 나왔다는 거예요.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통곡하라고 했으니까 이 명령어, “들으라.” “예. 듣겠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부한 자들아.” “예,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무슨 말인데요? 내가 들을 준비 됐어요. 뭡니까?” “통곡하라.”
미쳤어요? 부자인데 왜 통곡을 해요? ‘통곡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부한 자들아. 너희들이 현재는 여유 있게 살아도 나중에 통곡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통곡하라. ‘내가 왜 이런 저주를 받았는가? 내 팔자가 왜 부자로 살 팔자냐?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통곡하라”는 거예요. “울고 통곡하라.”
사는 목적이 부자 되는 걸 목표로 하고, 실제로 인생 살면서 얼추 부자가 되었다고 자부했으면 이제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여유롭게 돈 쓰는 재미, 즐기는 재미, 여유 있는 인생만 남아있는데 울고 통곡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그런 상황, 그런 현실이잖아요. 그런데 사도는 말하기를, 통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통곡하기 위해 억지로 부자 되었습니까? 통곡을 목표로 해서 돈 모았습니까? ‘오늘도 돈 모아야지. 그래서 나중에 통곡해야지.’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까? 부한 자들에게 이 말씀은 튕겨져 나올 말이에요. ‘웃기네.’ 하고 튕겨져 나오죠. 이 말씀이 부한 자들에게 튕겨서 반발을 일으킬 말씀이라면, 지금 아직 부자는커녕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자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겠어요, 튕겨져 나가겠습니까?
여러분, 돈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잖아요. 돈이 좋다는 말은 단순히 돈이 좋다는 게 아니라, 내가 좋은 게 있다는 것이 내 인생에, 그야말로 찌질한 인생에 보람과 희망을 주잖아요. ‘내가 돈 벌고야 말리라’ 이것이, 지금의 현실은 찌질하지만 그 찌질함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준다고요.
“부자 돼서 뭐 하려고?” “기뻐할 거야.” ‘세상 사람들아, 다 봐. 너희들 나 다 무시했지? 내가 돈 벌 줄 몰랐지? 나 부자 됐어. 너희가 나 시시하게 봤잖아. 나 그런 존재 아니야. 나 이렇게 대단한 존재야.’ 남들 앞에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그런 자신감과 자존감은 돈이 받쳐주는 거예요.
돈이 없으면 남 앞에 나설 수도 없고, 나서도 이건 남 잘된 거나 들어주면서 약만 오를 뿐이고 열등감에 잡힐 뿐이에요. ‘남을 만나더라도 돈 벌 때까지 잠시 보류하다가 돈 좀 벌게 되면 친구 만나야지.’ 이게 우리 인생의 작전 아닙니까? 내 가치, 내 의미를 내보이는 유일한 희망이잖아요.
돈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돈이 좋은 이유가 남들 앞에 나설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희망, 꿈, 사람이 희망 없이 어떻게 살아요? 꿈이 없이 어떻게 삽니까? 행복? 말로만 되는 게 아니죠. 돈이 받쳐줄 때 행복이죠. 누구 위해서 사는데요? 자기 가족을 위해서 살죠.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율성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고, 이 자율성이 기대하는 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행복, 하나는 희망, 하나는 자기 가족 지키기. 자기 가족을 내 손으로 지켰다는 자부심, 내 노력 여하에 따라서 내가 머리 쓰기 따라서 이런 희망, 행복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단 말이죠. 그게 나니까, 이게 없으면 내가 아니니까요. 이 자율성이 나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누가 반박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반박해 보세요, 반박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단정합니다. 단연코 말합니다. “너희들 천국 가기 싫지, 그렇지?” 왜냐하면 자율성의 세계가 지옥입니다. 자율성의 세계가 지옥이에요. 지옥 가서 사는 사람이요. 지옥 가서도 행복을 포기를 안 합니다. 그리고 자기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요.
물이 없다? 누구보고 물 가져오라고 시키는 데가 지옥이에요. 그리고 지옥 가서도 자기 가족을 챙길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지옥 간 부자가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과 주고받고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미 지옥 가서 버린 몸인데 아직 죽지 않고 세상에 남아있는 내 동생들은 어쨌거나 내가 있는 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좀 조치를 해주옵소서.”
“조치를 어떻게 하는데?” “죽은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봐, 부활이 있잖아. 그러니까 이 세상이 다가 아니야. 죽어서 가는 곳이 따로 있어.”라고 해달라는 거예요. “이미 죽어본 적이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내 동생들에게 찾아가서 ‘형님은 이 지옥 와 있지만 너희는 나 있는 곳에 오지 말라고 너희 형이 전달하란다. 이것이 형이 마지막 남길 수 있는 동생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이렇게 해주세요”(눅 16:28)라는 거예요.
왜 자기 가족입니까? 왜 남의 가족은 안 살리고 자기 가족 챙깁니까? 근친도(近親度) 때문에 그래요. 근친도라는 것은 유전자 보유율인데 자식은 부모의 50%, 손자는 25%, 증손자는 12.5% 갖고 있어요. 그런데 유전자 보유율하고 근친도는 좀 달라요. 근친도는 조상이 다르다는 조건을 내 걸어야 됩니다. 그러면 사촌이 12.5%가 돼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갖고 있던 유전자 일부를 -유전자가 나의 일부 아닙니까, 세포니까- 전부 나눠준다는 거예요. 많이 나눠준 곳에 정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내 걸 50% 갖고 있으니까요. 손자는 25%. 그러니까 손자가 안 귀여울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나의 확장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나중에 0.0001%도 누군가 나가 있겠죠. 인생은, 인간은 불멸의 존재라고 유전자가 정리해 주는 거예요. 내 것이 0.0001%라도 지분이 들어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유전자의 근친도도 모르고 ‘내 가족은 정이 있으니까.’ 정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 것이 있으니까 내 걸 다시 회수해서 좋아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자기 사랑을 포기할까요? 그걸 보면 참 희한한 게 있어요. 그러면 남편과 아내 사이는 근친도가 얼마입니까? 거의 제로입니다, 제로! 사랑할 턱이 없죠.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니까요. 필요할 때만 옆에 붙어있는 거죠. 일종의 사업이니까요.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현재)가 이야기한 이 근친도 이야기, 그리고 행복 이야기, 그리고 희망, 희망은 모든 철학에서 다 이야기하고요, 이런 철학 이야기의 이 모든 것의 기초가 어디서 나오느냐? ‘나는 살아있다. 나의 자율성이 살아있다.’ 내가 만약에 감옥에 간다면 나는 살아있어도 죽은 거예요. 왜? 자율성이 없으니까요. 스케줄을 나라가 정하니까요.
내가 살아있다는 건 내 자유의지가 살아있고 자율성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곳은 어디라 했어요? 내가 영원토록 살아있는 곳은 바로 지옥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은 가라고 해도 안 갑니다. 벌써, 살아있을 때부터 지옥에 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자율성을 발휘해서 아까 말한 행복, 두 번째는 희망, 세 번째는 내 가족 챙기기, 이 세 가지는 내가 있는 한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들으라 부한 자들아”라고 사도 야고보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야고보 4장에 보면 나오죠.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 생명은 무엇이뇨’라는 질문 자체가 상당히 진지하죠. ‘돈 얼마 갖고 있어?’ 지금 이걸 묻는 게 아니에요.
‘너의 목숨은 무엇이냐? 나는 아는데 너희는 모르고 있지?’ 이런 뜻이에요. “너의 목숨은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여기 ‘안개’ 앞에 형용사 하나 붙이세요. ‘없어지는’. 안개가 ‘있다’가 아니고, 안개는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잠시 보여주는 물방울 조각조각이 안개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없다’에요. 인간은 없다.
거울 보면 보이잖아요? 그건 잠시 나타난 안개 조각이죠. 아침에 피어나는데 낮 되면 다 없어지는 안개, 없다. 그러니까 “들으라 부한 자들아”가 부자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없는데 자꾸 있는 것처럼 왜 자꾸 오해하느냐’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네가 없는데 왜 자꾸 네가 살아있다고 우기느냐?’ 하는 그 이야기에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도도 마찬가지고, 성경적 견해에 의하면 사람들이 사는 것은 죽음 문제를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그러한 형편이에요. 자꾸 죽음을 밀어내는 식으로 문제 해결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을 때 부자라고 하지만 실제로 보면 제일 중요한 문제를 안 건드리고 있는 거예요. 자신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손 쓸지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게 없는데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나오는 파탄이죠. 뭔가 오해로 인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네팔에서 빙하로 인한 산사태와 더불어서 홍수가 났잖아요. 수천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없어요. 시신이 없는데 장례를 치릅니다. 방법은 뭐냐? 인형을 만들어서 불에 태움으로서 8일 만에 장례를 치러요. 이게 힌두교 예법입니다. “시신을 8일 동안 못 찾거든 인형을 만들어서 불태워서 장례를 치르라”라고 한 거예요.
‘8일 만에 시신 못 찾거든 인형 만들어서 장례 치르라’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오죠.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 정답이 없어요. 그러면 자기 죽음은요? ‘그건 나중에 가서, 나중에 요양 병원에 가서 알아보자.’ 자꾸 미뤄놓는 거예요. 이것은 비겁한 겁니다. 전면적인 부정성 속에 사적인 긍정성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안 돼요. 그냥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입니다.
눈 감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들으라 부한 자들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구절과 관련해서 이것이 의미가 있느냐 하면, 요한복음 17장 2절에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어요.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준다는 거예요. 너한테 지금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영생이 있고 없고’가 너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는 거예요. 가장 기본적인 문제,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이 영생. 생명나무에서 영생을 못 따먹도록 했잖아요.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게 막아놨단 말이죠.
선악과 따먹고 자기 잘난체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따먹은 즉시 끊어서, 선악과는 따먹었지만 생명나무는 못 따먹게, 영생을 받지 못하게 조치하셨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2절에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영생을 주시려고 저를 이렇게 보내셨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영생 이야기가 예수님 입에서 처음 흘러나온 거예요. ‘아, 영생을 주시는구나. 그러면 중요한 것은 영생을 받는 자가 누굴까?’ ‘부자가 있구나. 부자가 누굴까?’ 지금 관심사가, ‘우리나라 재벌 순위가 몇 등인가, 나는 몇 등이지?’ 이게 아니라, ‘성경에 영생을 주는 자가 따로 있다? 그러면 영생을 받을 자가 누구냐?’ 그 질문이 탁 튀어나와야죠. 당연하게 튀어나오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준다.’ 이 말이지요. 주고 안 주고 그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결정을 한 거예요. 우리가 결정한 게 아니고, 받는 쪽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고 주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데, 이제 궁금한 것은 ‘누구에게 영생이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안 주어지느냐?’ 그게 문제잖아요?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어떤 가정에서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혼자 일했다’라고 하니까 질문하시는 분이 아주 예리한 질문을 하세요. ‘혼자 일하지 말고 두 분이 일하시지 왜 예수님 혼자만 일하시느냐?’ 그 이야기를 했어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그런 질문을 해서 답변하시는 분도 깜짝 놀랐을 거예요. 그 이유가 신명기 29장 29절에 나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오묘한 일은,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데 그 오묘한 일을 하신 하나님 한 분과, 그 오묘한 일을 지상에서 행사하고 적용하고 실천하시는 분은 한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따로 있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말씀으로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3절에,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내가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나타난 것을 똑같이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이 관찰하는 것과, 인간의 관찰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알아서 나타나게 하신 일이 동일한 의미로 우리에게 통합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관찰은 자기 자율성에 의해 하게 되고, 그것을 관성계 또는 관찰계 또는 기준계, 좌표계, 물리학에서는 그렇게 설명해요. 관성계, 좌표계, 그리고 기준계, 상대성 원리 이야기할 때 나오는 용어입니다.
인간이 보는 기준에는 내 인생이라는 그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어떻게 다루냐 하면, 그 시간을 뽑아내요. 척추를 보면 뼈들이 있잖아요. 뼈와 뼈 사이에 연골이 끼워져 있죠. 허리 디스크 앓는 사람들은 병원에 다니면서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연골이 빠져나오면 어떻게 돼요? 위에 있는 뼈와 아래에 있는 뼈가 딱 부딪혀서 중력에 의해 신경이 눌리니까 굉장히 아프지요. 누워 있지도 못하고.
시간은 뭐냐? 사건과 사건 사이에 들어있는 연골 같아서 이걸 빠뜨려요. 그러면 인간에게 남아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에요. 사건, 사건이 빠진 자리에 인간의 기억이 들어가고, 그 기억은 시간이 빠진 자리기 때문에 인간의 환상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인생은 뭐냐? 디스크 같으면 뼈와 뼈 사이 연골이 빠진 상태, 연골이 쏙쏙 계속 빠져나가고 사건으로만 기억하고 또 사건, 사건…, 이게 압축이 되고 중첩이 되고 압력을 받아서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는 것.
이것에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저는 이걸 깻잎김치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깻잎김치 알죠? 경상도 음식인데 –다른 곳에서는 잘 안 먹는다고 하는데- 그 깻잎을 조선간장 진간장 다 보태서 절여놓으면 얼른 보면 몇 장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밥 한 그릇 다 먹어요. 한 꺼풀 한 꺼풀 계속 나와요. 인생은, 시간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게 시편에 나와요. 시편 39편 5-6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잠시 멈춤).”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하는 거예요. 시간이 빠져나가니까 없는 거죠. 시간은 빠져나가고 추억만 있고, 이게 인생이잖아요.
시편 90편 4-9절인데 좀 길더라도 여러분이 좀 인내해 주시기바랍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인생은 한순간이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는 길고 긴 것 같이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시간이 빠져나가니까 이것은 없는 거예요. 이것은 안개인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평생 살면서 죄 지은 것은 어떻게 됩니까?” 인생 자체가 없는데 죄 자체가 있을 리가 있어요? 인생 자체가 없는데 죄가 있을 리가 없죠.
성경에 ‘없다’에 대해서 가장 명쾌하게 언급한 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끌고 와요. 끌고 누구한테 왔느냐? 예수님한테 왔습니다. 그전까지는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 하는 바리새인과의 대화가 있었다면 그건 인간과 인간의 대화고요, 이제 인간과 대화는 끝났어요.
인간들은 돌려보내고 이제는 그 여자와 예수님만, 하나님만이 대화합니다.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널 죄 있다고 하는 인간들이 어디 갔느냐?” 물어요. 판사인 우리 예수님이 피고인 여자보고 묻습니다. “네가 죄 있다고 한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여자가 답변합니다. “없나이다”(요 8:11). 없습니다.
그들도 없고 나도 없는 거예요. 주께서 인간 자체를 없다고 보는 거예요. 부자가 되든 가난한 자가 되든 “부한 자들아” 다른 말로 하면 “가난한 자들아, 부자 되고 싶어 환장한 인간들아.” 너희는 평생을 살면서 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몰랐어요. 왜? 남들의 관점과 나의 관점, 자율성의 관점만 알았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들어본 적도 없어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주의 말씀은 이미 이야기했어요. “주님, 저 어떻게 됩니까?” “없어! 없다니까, 너는?” “저, 부자인데요?” “그러면 넌 통곡할 거야. 너는 울 거야. 내가 없다면 네가 없는 거지, 네가 돈이 있다고 해서 있다고 우기느냐?”
마가복음 10장에 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마태복음 19장에 의하면 부자 청년이에요.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왔는데 그냥 한 번 알아보려고 온 게 아니에요. 무릎을 꿇었어요. 아주 진지해요, 나름대로.
돈은 있는데 영생은 없다, 이 말이거든요. 돈은 있으니까 됐고, 이제 없는게 뭐가 없느냐 하면, 영생이 없어요. 자기도 생각해 봤잖아요. ‘돈은 좀 있는데, 돈이 있어도 죽으면 그만인데…’ 죽고 난 뒤의 문제가 살짝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있을 때는 돈으로 해결이 다 됐으니까 별 관계가 없는데, 죽고 난 뒤가 확정이 되지 않았으니까, 아까 말한 그 자기 행복과 꿈과 자기 가족에 대해서 지장이 있으니 이걸 확실히 하기 위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아주 겸손한 자세로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대해서 제 답변이나 성경의 답변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와서 “내가 돈은 많은데 죽고 난 뒤에 지옥 갈 까봐 걱정됩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딱 물었을 때 여러분들이 먼저 답변해 보세요. 어떻게 답변해야 합니까?
그 답변이 요한복음 17장 2-3절에 보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자, 정답이 나왔어요. 정답을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 권세가 있는데, 예수님의 권세는 저 인간이 내 앞에서 언젠가는 무릎 꿇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그러한 사건까지, 그런 일까지도 주께서 다 조종하고 있다는 그 힘을 예수님께 전부 다 일임했던 거예요. 그래서 영생을 주고 안 주고는 누구 마음대로냐? 달라고 해서 주는 게 아니에요.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주님 맘대로예요. 이게 정답이에요.
우리는 영생을 달라고 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노트가 비어 있다고 해서 이 노트에 아름다운 시가 나오게 해달라고, 빈 노트가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그냥 주께서 빈 노트에 쓰는 데로 쓰이면 돼요. ‘영생’이라고 쓰면 영생이고 ‘지옥’이라고 쓰면 지옥이고, 그런 거예요. 그만한 권세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만 주셨단 말입니다.
어떻게, 만족스러운 정답이 되셨습니까? 막 되게 만족스러워서 좋습니까? 이 부자 청년이 말하기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켰다는 거예요. 마가복음 10장 19-20절에,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주님께서 먼저 율법 다 지켰냐고 물어보니까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 그다음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빠이빠이 했습니다. 그것도 슬픔을 가지고 빠이빠이 했습니다. 이유는 뭐냐? 그 이유는, 내 시간이 있다는 거예요, 내 시간. 인간은 시간이 없어요. 인생은 시간이 빠져나가면서 죽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집어넣어 준 것을 도로 회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벌써 오는 것부터 잘 못 됐어요. ‘지금은 괜찮은데 죽고 난 뒤에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자기만의 시간,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내 소유의 시간이 따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치명적인 오판이었습니다. 자 이런 부자 청년의 오판…, 그는 근심해서 갔어요. 영생은 없어요. 끝났어요.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말씀에 같이 참여하려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돈에 미쳐 환장했는지 그것부터 따져야겠죠.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파푸아뉴기니 주민들이 –옛날에 그랬어요,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가? 바닷가에 가면 고등어가 많이 있어요. 고등어가 바다에 많이 있어도 세 마리를 잡아요. 식구가 함께 먹고 그다음 날 또 고등어 세 마리를 잡아요.
그런데 어느 날 호주의 어선이 와서 고등어 1톤을 잡아갔습니다. 그다음 날 파푸아뉴기니 주민이 바다에 가보니 고등어가 없어요. 여러분, 호주의 어선이 파푸아뉴기니 해변까지 올라와서 고등어 1톤을 잡아 만선의 기쁨을 갖고 돌아갈 때 아빠를 맞이하는 단란한 가정을 한 번 연상해 보세요. 연상이 잘 안되거든 생성형 A.I에 이미지 달라고 하면 나와요.
배에 가득 찬 고등어 1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 그 아빠를 반기는 단란하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아빠, 우리 살았어.” “그래, 이제 걱정하지 마. 대학까지 공부시켜 줄게. 이 고등어 팔아서 네 휴대폰도 바꿔줄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게 어부의 소망 아닙니까? 이게 가족 챙기기 아니에요? 이게 행복이고 이게 어디서 나옵니까? 자율성 아닙니까. 이걸 왜 놓쳐요, 이걸 왜 빼요, 인생에서? 이거 없이는 못 사는데, 이게 전부인데.
그런데 파푸아뉴기니 주민 집은 지금 굶어죽게 생겼어요. 부(富)라는 것이 뭐냐? 돈이라는 것은 뭐냐? 골고루 남에게 돌아가야 될 그 여분의 재물을 내가 강탈한 게 그게 부(富)입니다. 1700년대나 1800년대 초반에 인디언들이 살 때 미국의 버펄로 숫자가 4천에서 5천만 마리가 있었어요. 그랬다가 1880년대 후반의 개척 시대에는 그 숫자가 200여 마리 밖에 남지 않았어요. 다 잡아 죽였어요.
인디언은 어떻게 해왔는가? 인디언은 신 앞에 인간이나 버펄로나 다 같은 피조물로서 형제처럼 살아왔어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밀려오면서 ‘형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전부 다 가져갔어요. 그래서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라는 학자가 말하기를 ‘나라가 부강하는 방법은 분업’이라 했습니다. 혼자서 작업하지 말고 나눠서 하면 된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분업이 국가의 부를 일으킨다.’
마르크스는, ‘분업을 하니 노동자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못 느낀다. 따라서 엎어버려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서 일하는 자가 모든 재물을 다 가져야 한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어쨌든 간에 인간이 아는 상식에서 부는 뭐냐? 나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아까 호주 어선의 예를 들었지요? 제대로 노동 했잖아요, 제대로.
그러면 노동하지 않더라도 그냥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8절에,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공짜로 살려는 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가난이 벼슬입니까?
아무것도 주지 말라. 뭐냐? 노동을 하게 해서, 일하고 돈 버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너희를 죽이겠다는 거예요. 시간을 빼서 죽이겠다는 겁니다. 왜 죽이는가? 이 땅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우리가 살 수 없는 땅이라는 거예요. 그걸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 땅에서 인간은 살려고 애를 쓰니까 인간의 인식 자체가 하나님의 인식하고는 정반대로 대조가 된 거예요.
‘살 필요가 없는데 왜 사느냐? 그래도 살고 싶거든 실컷 일하다 나중에 늙어 죽어라.’ 그런 거지요. 시편 52편 6-7절에, “이 사람(부자)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돈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이유가 없다고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 돈 있는데 왜 하나님을 믿어요? 돈이 없으니까 ‘좀 도와주기라도 할까?’ 싶어서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간절히 기도하잖아요. 돈이 있는데 왜 교회 나옵니까? 돈 있는데 교회 나온 것은 놀러 나온 거지요. 성경에서는 이게 맞는데, 문제는 부자들에게는 이 성경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온다는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도 귀에 안 들어오고요.
서울 큰 교회 가보세요. 재벌들, 부자들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가 설교해도 귀에 안 들어와요. 돈 있는데요, 뭐. 예배 중에 갑자기 전화 와서 재정에 문제 생겼다고 하면 ‘알았어, 알았어. 예배 시간인데 지금 금방 갈 게’ 하고 그것 처리하러 가지요. 인간은 돈에 이끌려서 살아가지, 하나님에 이끌려 살지 않아요. 참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네.
사람이 돈 보고 살지 어디 하나님 보고 삽니까? 심지어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서로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거예요. 뻔한 이야기를! 성경에서 뭐라고 해도 ‘니 캐라’ 그것은 관계없어요. ‘지금 나는 고등어 안 잡는데요?’ 고등어 안 잡아도, 이 시대는 돈이 노동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시대예요.
그 시대가 뭐냐? 그것이 자본주의 시대에요. 19세기에 어떤 수학자가 공식을 만들었어요. 바슐리에(Louis Bachelier, 1870~1946) 공식이에요. 이 수학자의 그 아이디어는 BC 600년경 탈레스라는 철학자가 한 행동에서 나왔습니다. 옛날이야기지요. 이 사람이 쓱 둘러보니까 올리브 농사가 풍년이 들 것 같아요. 그래서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올가을에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를 좀 빌립시다” 해서 미리 빌려놓는 거예요.
그래서 탈레스는 기계를 빌리는 권리를 미리 가졌잖아요. 가을 되니까 탈레스가 본대로 풍년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가 모자라요. 그럴 때 탈레스는 기계 자체를 산 것이 아니고 기계를 쓸 수 있는 그 권리를 사용한 거예요. 내가 어느 시간대에 사용하거나 살 수 있는 그 권리를 미리 앞당겨서 사놓는 이것이 돈 버는 방법이 된 거예요.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그 권리를 미리 확보해 놨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계 어딨어?” 할 때 “내가 그 권리를 너에게 팔게” 그렇게 팔아서 그 권리를 사고파는 차익 때문에 탈레스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바슐리에라는 수학자가 그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공식을 만들었어요. 주식을 미래에 살 수 있는 그 권리를 돈 주고 사는거예요.
그것을 콜옵션(Call Option, *금융 시장에서 정해진 미래의 시점에 특정 자산을 미리 정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리이고 풋옵션 Put Option은 특정 주식이나 자산을 미래의 만기일에 미리 정한 가격 –행사가격- 으로 팔 수 있는 권리)이라 합니다. 권리를 사는 거예요. 권리를 사놓고 나중에 값이 내려가게 되면 안 사고 포기하면 되고, 값이 올라가면 이미 권리를 갖고 있으니까 사면 그게 이익이 되잖아요. 여기에 무슨 노동이 필요합니까?
공매도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주식을 빌려서 나중에 주식값이 내려갈 때 되파는 이것이 공매도에요.(공매도 Short Selling 는 말 그대로 없는(空) 주식을 판다(賣)는 뜻으로, 주가 하락이 예상될 때 주식을 빌려서 판 뒤 주가가 떨어지면 싸게 사서 되갚아 차익을 남기는 투자 기법.) 공매도라는 이것은 직접 주식을 사고파는 거지만 옵션이라는 것은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만 사는 거예요.
여기에 대한 공식의 기준은 뭐냐? 주식이 올라갈 경우 50퍼센트, 내려갈 경우 50퍼센트 해서 공식을 만들었는데 바슐리에 공식과 거기서 더 발달 된 블랙(Fischer Black, 1938~1995)과 숄츠(Myron Scholes, 1941-현재) 공식은 녹취(첨부파일 참고)에서 나올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회사 다녀서 돈 버는 시기는 끝났다는 거예요. 회사 다니면서 사장 눈치 보면서 옵션이 어떠니 이런 것을 해야 하고, 또 A.I한테 물어가면서 투자를 해야 해요. 헤지펀드(Hedge Fund)라고 해서 보험처럼 들어놓는 그런 것도 있고요. 그래서 오늘날 펀드나 주식을 해야 돈을 벌지 취직해서 월급이나 받아서는 돈을 못 버는 시대가 된 거예요.
이것은 서로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다들 그렇게 하고 있지요? 표정들 보니 안 하고 있구나…. 지금 우리 사는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사는 이야기.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것은 죽고 나서나 신경 쓸 문제지 지금 살아 있을 때는 내 자율성, 내 행복, 남의 행복이 아니라 내 행복, 내 희망….
‘돈을 2십억 벌었다. 그만둔다.’ 미쳤어요? 250억, 3백억, 희망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요. 희망이 없으면 살 에너지가 안 나와요. 그리고 그거 다 누구한테 쓴다? 내 새끼, 내 가족, 내 근친에게 써도 아까운 그 돈 내 가족에게만 쓰고. 인생은 뭐냐? 그게 사는 재미지 뭐 다른 걸 왜 물어요? 그게 전부인데요.
끝으로 요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던 나사로 가족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중에서 나사로가 죽었어요. 시간이 홀라당 다 빠진 거예요. 나사로에 개입된 시간은 다 빠졌어요. 그래서 죽었어요. 시간 빠져서 죽은 것도 모르고 그 가족들은 몸이 아파서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아파서 죽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빠져서 죽는 거예요.
죽은 지 며칠 되었는가? 나흘 되었어요. “가자!” 유대인들은 “끝났어, 끝났어! 이미 죽은 사람이고 벌써 다 끝났는데, 가기는 뭘 가? 아직 안 죽었을 때는 고쳐줄 수가 있는데 이미 죽었잖아. 죽었으면 끝났지 뭘 가자는 거야?” 그래도 갔습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얼마나 주님한테 대들었는지 몰라요. “오빠 살아 있을 때 잘 해주시지 죽고 난 뒤에 당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요 11:32).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42-43절에,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시간의 완성되시는 주님이 “내가 너에게 영생을 부여할 테니까 나와, 인간아!” 그 말씀을 부여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사로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하나님의 영생을 부여하는 것, 성경 말씀을 부여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영생을 얻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 사람 속에서 말씀이 나오면 영생 얻은 것이고 말씀이 안 나오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 자율성밖에 안 나와요.
에베소서 5장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보통 죽었으면 말을 안 건네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간을 죽은 자로 보기 때문에 말씀으로 말을 건넨다고요, 말을! 하나님은 인간을 보기를 시체로 보는 거예요.
검은 시체, 누런 시체, 하얀 시체, 시체로 보는 거예요. “시체야! 죽은 자야! 내 잠자는 자야, 내 말 들어라.” 말씀이 들어온 자는 살고, 말씀이 안 들어온 자는 죽는다, 죽어 있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돈에 미쳐있으니, 펀드에 미쳐있으니 뭐 이 말이 들어올 리가 없지요.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안에 죽은 나를 살리시는,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취지에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부자 되려고 애쓰는 자들아. 부자 못되어서 환장한 자들아. 부자인 자들아. 부자가 그렇게도 부러운 자들아. 내가 말씀을 전하는데 영생이나 받아라.” 이런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평소에 사는 것처럼 고요~하게 삽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삽니다. 죽음은 밀어내고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야무지게 사는 것처럼 삽니다. 주여, 일찍이 저희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영생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