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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빈 노트260830우리교회야고보서

빈 노트(야고보서 4:15-17)

빈 노트

2026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4:15-17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피조물이란 당연히 자기 고유의 권한이 없어야 하고 그 자리에 창조주의 권한으로만 꽉차 들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같이 피조물인 악마가 이미 손을 봤습니다. 인간을 자신의 영원히 협박과 지배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악마는 인간에게 자율성과 자기 판단성에 철저하게 매이게 했습니다.

즉 “나는 ∼자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은 인간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스스로 구성하도록 조치한 겁니다. 이것이 마귀가 인간을 다루는데 효력있는 이유는, 인간은 결코 자신이 정상적인 존재가 아닌 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부적으로 자신이 정상이라는 점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장치를 지니고 다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궁극적으로 자기를 다 비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율성과 자기 판단권한이 한시도 쉬지 않고 내부적으로 가동되는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은 악마의 밥’이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도 자기 평가의 결과가 좋게 보이도록 쉬지 않고 자기 변명과 자기 관리에 게으려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놓고 자신이 자기를 평가하는 조건으로서 붙들고 삽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인간은 곧 안개’라고 말입니다. 이 조건에 부합되기 위해 사도가 실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공식입니다. ‘나-(빼기)나=안개’ 이것은 ‘자랑-(빼기)-자랑=안개’가 됩니다.

이 공식에 다음과 같은 공식이 덧붙이게 됩니다. ‘안개+주님의 의=천국 백성’이 공식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에게 들어붙어 있는 ‘자랑’, 곧 ‘자기 의’를 무산시키는 활동을 하십니다. 그 방법은 바로 ‘기록’입니다. 누가복음 10:18-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 ‘기록’이 나옵니다. 의미있고 효력 있는 ‘기록’은 모두 예수님에게 속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 즉 예수님에게 기록된 것만이 유효합니다. 이 유효한 기록이 안개가 되어버린 자에게 새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안개+하나님의 의=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자기 의’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주목하셨습니다. 그것이 자기 노동입니다. 이 노동에는 신체적 노동만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노동,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실천되는 모든 것도 다‘노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만이 행한 노동이 어떻게 천국로 가로막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1, 10-12)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을 골고루 주시되, 나중 온 자부터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늦게 포도원 노동에 참여한 자들에게 줍니다. 제일 나중에 사람은 품삯에 대해서 일체 말을 못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1시간만 일하고 하루치 임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에 와서 1시간만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은 자는 앞에서 불평을 벌리는 선배 일꾼들을 보고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이 정당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님의 이야기는 맨 먼저 온 일꾼에게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분명 하루 품삯으로 계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맺어집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4-16)

즉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은 원래의 정상인이 아님을 밝히시면서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내고는 주님의 고유 권한임을 알리십니다. 이점에 대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만이 황공하고 고마워하게 느낄 것입니다. 출애굽기 19: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과연 이 말씀에 동의할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들은 분명 애굽에서 나오면서까지 불이 불어터도록 걷고 또 걸어서 이곳 시내산 밑까지 왔습니다. 독수리 날개 위에 올라타서 편안이 온 기억이 그들에게 없습니다. 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지막 때에, 모든 예언과 계시의 내용이 모두 드 드러났을 때에, ‘회개’하는 자만이 구원이 되는데, ‘회개’란 새로운 공간 환경 속에서 회전이 성립되는 자를 말합니다. 마치 전자 렌지 안에서 접시 안의 음식이 접시와 함께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환경이 죄인인 인간을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되면 ‘회개’란 하나님께 기쁨이요 성도 본인에게 ‘감동’입니다. 이 감동이 생기는 조건 하에 인간의 자기 자랑은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갑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이 땅에서의 성도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이유와 취지를 압니다.

악마가 지독하게 인간의 정신을 물로 놔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자평(自評)하게 만들어서 쓸쓸하게 유도합니다. 자랑거리를 늘어 놓을 타인이 없으면 우울증 걸러 자결로 이어지게 됩니다. 누가 천국갈까요? 사나 죽으나 언약안(아브라함 품 안)에 있던 거지 나사로 같은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홀로 살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의와 자랑을 없애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야고보서 4장 15-17절(빈 노트) 26083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4장 15-17절입니다.

야고보서 4:15-17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여기 15절에 ‘너희’라고 하는 것은 14절에, 인간은 이미 안개라는 것을 지정해 놓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안개라고 여기는 자에게 이 말씀이 유효하고, 그 외에는 이 말씀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죠. 안개기 때문에 너희는 안개다운 말을 해야 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이라고 되어 있어요, ‘주의 뜻이면.’

이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일단 일차적으로 인간이 인간에서 안개로 바뀌어야 하고, 그다음에 안개에다가 주님의 뜻이 손을 봐요. 주님의 뜻이 손을 보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이 이미 안개 입장에서는 생각할 권한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에게서 손을 떼라는 겁니다.

나 빼기 나는 안개(나-나=안개), 하나의 수학 공식처럼 하면 나 빼기 나는 안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어떻게 빼는지 사도 야고보가 친절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16절에 보면,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공식 다시 들어갑니다. 자랑 빼기 자랑은 안개(자랑-자랑=안개). 안개되기 쉽죠? 참 쉽죠.

다른 교회 다니는 분인데 어떤 분이 자기가 ‘잡사’라는 거예요. 난 집사가 아니고 ‘잡사’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잡사가 아니고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일 party, 생일 파티를 하잖아요. 날 때부터 자랑질이에요, 날 때부터. ‘잡사’면서도 그 교회 계속 다니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이유는 첫 번째로 자랑거리가 확보되어 있을 때, 두 번째는 내 자랑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때, 그럴 경우에만 사람은 대인 관계에 나섭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랑거리가 없으면 집구석에 박히죠. 밖에 못 나옵니다.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그 자랑이 어디서 받쳐주느냐? 13절에 나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그러니까 모든 자랑거리의 밑에서 받쳐주는 것은 ‘돈’입니다, 돈이에요! 돈 없으면 부끄러워서 교회 못 나오죠. 돈 좀 있으면 기운 차려서 힘내서 나오죠. 왜? 자랑이니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대화 안에는 무엇이 실려있느냐? 돈 힘이 실려있어요. 뭔가 남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너 아직도 살 만 하구나. 집에 돈푼이나 있구나.’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도 야고보가 얼마나 인간을 예리하게 보는지요. 안개에 불과한데, 안개로 돌아서야 되는데 인간은 안개가 되지 않고 자아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또 친절하게 이 자아가 그대로 있는 것을 17절에 의해서 이걸 안개로 어떻게 바꾸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안개, 안개, 안개…, 나오다가 아직도 자기가 안개인 것을, 다시 말해서 중성적이고 중립적인 그것을 포기 못 하고 있다는 이 말이죠. 중성적이고 중립적인 그것을 포기 못 하게 되면 자기가 사람이라고 우기거든요.

“네가 사람이야?” “네. 사람이에요.” “사람 같으면 선이 뭔지 악이 뭔지 네가 알긴 알지?” “알죠.”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그런데 선을 알면서도 그걸 할 줄 모르니 네가 바로 죄다”라는 말씀을 줘요. 사도 야고보가 왜 우리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제가 설명을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안개는 중성적이거든요. 내가 관여를 하지 못해요. 그래서 나에서 나를 뺍니다. 나를 빼는데 아, 이게 버티고 안 빠지잖아요. 그래서 뭘 공략하느냐 하면, “너 자랑질하지, 그렇지?” 그러면 우리는 “난 자랑질 안 했는데?” 이래요. “너 돈 때문에 살잖아. 돈 힘 때문에 네가 오늘도 살아 있잖아. ‘어느 도시에 가서 내가 이익을 보리라.’ 모든 활동의 근거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거잖아, 돈 벌기 위해서! 그게 결국 네 자랑이 되는 거야.”

자랑이 되니까 네가 본디 안개라는 사실을 그 자랑으로 덮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돈 자랑 안 하고, 내 존재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러면 이제 얼추 사도님이 이야기한 안개답죠? 그렇죠?” 하고 들이밀면 사도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돈 포기 하고, 자랑질을 공개적으로 안 하고, 겸손을 떤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너에게 남아있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자기 의예요, 자기의. 왜 인간은 자기 의를 자꾸 붙들고 있느냐 하면, 자기 의가 나오는 그 정신적 구조가 선악을 아는 지식에서 나왔거든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누가 심어 줬느냐 하면, 안개 같은 인간에게 악마가 와서 심은 거예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인 이유가 바로 선과 악…, 선과 악이라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나를 평가한다는 거죠, 내가 평가한다는 겁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것까지 통틀어서 손을 대는 거예요. 선과 악을 안다는 것.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어디까지 우리를 몰아세우느냐 하면, “좀 너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다오.” 자꾸 자기가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행동을 조심해서 행동해요. 왜? 나는 정상이니까 정상인 인간에 흠집이 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내가 선과 악을 안다는 티를 내는 거고, 거기서 자기 의가 생산되는 거예요. 인간은 조그마한 자랑거리라도 있으면 그걸 주워 모으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조그마한 자랑거리만 있어도. 가정에 조그마한 자랑거리가 있어도 그걸 다 주워 모아요.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내가 주워 모았던 자기 의가 자기 자신을 심리적으로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압박하고 있는지…, 바보 같아요. 나의 의, 나의 자랑을 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을 공갈 협박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한테? 마귀한테요.

마귀가 인간에게 선악을 집어넣은 이유가, 악마의 협박 대상이 되라고, ‘인간은 내 밥이야.’ 그것에 말려든 거예요, 말려든 겁니다.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을 통해 정리한 것의 기초가 되는 율법의 말씀들이 구약 여러 군데에 보면 많이 있어요. 시편 49편 6-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 할 것임이라.”

구원하지 못한다. 무슨 뜻인지 딱 오죠? 돈 있다고, 돈 자식한테 물려준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많지만 유난히 좋아하는 구절들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도행전 3장 5-6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앉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었어요.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찾아왔죠.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끝났죠. ‘네가 원하는 거? 내가 죽어도 안 줄 거거든. 네가 하나님한테 원하는 거? 하나님은 죽어도 너한테 원하는 걸 주지 않아. 왜? 넌 네 자랑거리를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자랑거리가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안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사람 구실하는 그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빨은 뽑아도 자기 의는 못 뽑아요. 뽑히질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걸 알고, -성령 받았으니 도사 아닙니까?- 그걸 알고, ‘내게 있는 것을 주는데 넌 은과 금으로 살고 싶지? 나는 은과 금 없이 살아.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줄게.’ 이게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네팔에서 빙하로 인하여 홍수가 갑자기 일어나서 밑에 있는 마을을 싹쓸이했잖아요. 언론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자기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산 밑의 주민이 옷이고 뭐고 범벅이 되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옥수수, 그리고 나의 밭, 내가 했던 찻집 다 잃고 남은 것은 저와 이 옷 –런닝구도 없고 걸치고 있는 셔츠 하나- 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그걸 보면서 ‘아니! 당신은 자기의 의가 남아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가도 몇 년 살다가 또 튀어나오는 흉악범들, 이건 나라 법으로도 할 수가 없죠. 유부녀 킬러가 와서, 킹피셔가 와서 그걸 총으로 쏴버려요. 그러면 죄가 없어집니까? 그래도 죄는 없어지지 않아요. 자기 의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아요. 이걸 악마가 알지요. 가룟 유다로 하여금 결국은 자기 의를, 마지막 남은 내 것을 챙기기 위해 서슴지 않고 자살해 버리게 하잖아요.

돈이 있다고 우울증이 없는 게 아니에요. 우울증은 뭐냐 하면, 내 자랑거리를 자랑질할 수 있는 그런 마음 느긋한 타인이 없어서 그래요, 남이 없어서. 대화할 남이 없다고요. 대화할 수 있으면 내 자랑거리를, 그 썰을 푸는데 ‘나는 이렇게 잘났고, 나는 이렇게 정당할 권리가 있다’라는 그것을 푸는데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자동적으로 우울증이 오지요.

근본적인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태어나면서 정상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그걸 안 받아들이냐는 말이죠. 성경에서는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정상인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왜 우리는 성경을 거부하고 자꾸 남들을 봐요? 남들을 보면 남들도 우리 자신을 둘러봐요. 그러니까 집단적으로 모두 다 어리둥절해요.

60, 70, 80을 살았는데 세상이 뭔지, 내가 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은 매사에 자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에, ‘내가 미쳤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그 일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연세가 들어서 자기 위신 보전할 생각하지 말고요. ‘아, 이 정도로 내가 돌았구나.’ 그걸 아는 일을 찾으세요. 할 일 많습니다. 지하실에서 팔공산 늑대 보시거든 신고하시고요. 장로님이 팔공산 늑대 봤다고 해서 처음엔 진짜 늑대가 팔공산에서 내려온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차 뒤에 ‘나는 차를 난폭하게 몰기 때문에 팔공산 늑대입니다’라고 붙여놓은 거예요.

본인을 왜 자꾸 보전하려고 합니까? 정상이 아닌데요. 성경 야고보에서, 인간은 안개거든요. 중성적이고, 중립적이라 하는 이것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천국 가고 지옥 가는 이것은, 정상이 아닌 우리한테는 물어보지도 않아요. 정상도 아닌데 그걸 왜 물어봐요? 주께서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알아서 한다고 하시고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인간은 하나의 안개라고 보고, 거기에 하나님 말씀으로 기록을 해요.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네팔 홍수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히말라야산맥의 빙하가 녹으면서 정상 입구에 인공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호수가 생겼어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언약의 샘을 마련했어요, 언약의 샘. 언약의 샘이 마련되고 그 샘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오면서 산 밑에 있는 네팔 주민들에게 선지자를 보내 계속 이야기했어요.

“넌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너희들에겐 결국 멸망의 때가 온다.” 하고 시냇물처럼 흘러서 시냇물도 아니고 강물도 아닌 게 그렇게 흘러 내려와서 주민들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그 말이죠. 했는데 때가 되매 정상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만든 언약의 댐이 터져버렸어요. 터지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새로운 시공간이 따로 있어요.

산 밑에 있는 인간들이 자기 위주로 ‘난 정상이야. 난 바르게 살 자유가 있어.’ 뭐 이런 거, 그 시간과 공간을 일방적으로 위에서 덮쳐버린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종말이라고 해요, 종말. “종말이 온다고 내가 했어, 안 했어? 했어, 안 했어?”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이걸 말로 하는 것보다, 시편 1편에 보면 나와요. 시편 1편 1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벌써 복 있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리고 악인이 따로 있다고요. 그리고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선지자의 말씀을 진실로 묵상한다는 이런 이야기고요. 그 다음엔 5-6절에,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게 시냇물처럼 솔솔 선지자를 통해 줬는데 인간들이 개무시 했잖아요. ‘실제로 그럴까?’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댐이 터지면서 그 댐을 구성하고 있던 하나님의 언약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버리시는 그 아버지와 버림받는 예수님의 댐이 어디까지 밀려왔느냐? 땅에까지 밀려온 거예요.

땅까지 밀려와서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드디어 인간들이 사는 시공간에 공개됐어요. ‘나는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혼자 일했다고 하는데 혼자 일한 게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계속 일하고 있었어요. 문제는 한 분이 안 보인다는 뜻이고 예수님만 보이기 때문에 한 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두 분이 짝을 이뤄서 하는 일이에요.

그 시공간이 밀려오니까 십자가가 곧 종말이에요. 인간의 시공간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도 그 내용이 나오는데 10장 17절에 제자들이 뭐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합니다!”하는데 이것도 자랑질이에요. 하여튼 인간은 자기가 정상이 아니면서도 자랑할 건 다 끌어모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내가 봤다”(눅 10:18)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but!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기록’이에요, 기록. 누가복음 18장 31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 예언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임한다. 네팔 땅의 주민들은 위에 자연적으로 생긴 댐이 있는 줄 몰랐죠. 그게 무너져서 덮친다는 것,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도시 문명을 없앤다는 사실을 몰랐죠. 자기는 도시 문명을 이루면서, 주민 자치를 이루면서 모두가 서로를 보며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정상인데 살기 왜 힘들지?’ 그 영문을 몰라요. 어리둥절하다니까요, 어리둥절! 여러분이 교회 밖에서 사람 만나보세요. 해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냥 꾸역꾸역 살 뿐이죠. ‘나는 정상이다, 나는 정상이다. 나는 문제없다, 나는 하자 없다.’ ‘나는 안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없습니다.

옛날에, 1970년대에 나온 가수가 있어요.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온 가수 이름이 유미리인데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가 뭐냐 하면, <젊음의 노트>에요. 그 노래 가사에 보면 “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이 ‘빈 노트’에. 안개니까 중성적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기록된 것은 예수님에게만 기록되어 있어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의 시간과 공간 안에 자기가 이루었던 것을 성도에게 기록할 거예요. 안개에다 그걸 담아버릴 거예요. 담아버리면 성도는 더 이상 내가 정상이라는 자기 세계, 자아 자체가 빼기(-) 당하는 겁니다. 모든 기록된 것이 예수님께 기록됐다면 예수님이 내 자아를 대체하는 자아가 돼요, 대체하는 자아.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이렇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저한테 묻기를,

“목사님!”
“예.”
“지상에는 ‘나’가 있죠?”
“‘나’가 있죠.”
“그러면 천국에 ‘나’가 있죠?”
“‘나’가 있지요.”
“그러면 지상의 그 ‘나’와 천국의 그 ‘나’가 다릅니까, 같습니까?” 하는 그 질문.

여러분이 혹시 그 질문을 평소에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까? 하도 질문을 안 하니 제가 대신해서 합니다. 질문조차 만들어 내야 해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릅니까? 아니면 과연 같은 겁니까?” 그 질문. 그 질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회개하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얻는다”(행 2:38).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회개가 뭐냐 하면, 회전이에요, 회전, 회전하라. 어떻게 회전하느냐 하면, 기존의 시공간 말고 예수님의 시공간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회개에 대해서 제가 보기에 적절한 예는, 바로 전자레인지 안에서 돌아가는 접시, 그 접시 위에 놓인 치킨이나 빵 조각 이런 것, 옥수수를 데울 때 새로운 시공간 안에서 접시 안에 담겨 뺑뺑 돕니다. 회전하는 거예요. 회개, 회개…, 에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회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장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기뻐하느냐?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되죠. 그런데 죄인은 없어요. 죄인은 이제 있질 않거든요. 전부 자기가 정상인데 무슨 죄인이 있어요? 정상이니까 죄인이 없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죄인을 만드는 겁니다. 심지어 야고보 같은 경우엔 이 죄인을 만들기 위해서 야고보서 3장 6절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인간의 말이 지옥 불에서 나온다, ‘당신이 말하는 건 지옥에서 말하는 지옥불 같은 거야’라고 듣는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야고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내부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면 이걸 죄로 들춰낼 수가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설교 들으면 갑자기 우리가 죄인인 줄을 압니까?”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럴 줄 알고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고보는 말씀으로 죄인 만든다고 하는데 로마서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제가 말씀을 들은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죄인 의식이 없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돼요? “30년 말씀을 들었는데 나 죄인 느낌 없는데?”

그러면 시마이, 소용이 없잖아요. “말씀으로 공략해서 죄인인 걸 고백할 때 십자가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딱 마음을 잡아놨는데 ‘말씀 들었는데 뭐? 나 죄인 아닌데? 죄인 느낌이 안 오는데?’ 이러면 그 전략 다 망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0장 1절에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국은…”

이 말은 뭐냐 하면, 수요일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천국에 쓸모 있는 인간과 천국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주께서는 구분 짓기 위해 이 마지막 때 댐이 터지듯이 ‘내가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라는 그 십자가 이야기를 전한 거예요. 천국에 쓸모 있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그걸 설명하면서 포도원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포도원의 일꾼 네 명을 뽑는데 한꺼번에 뽑지 않았어요. 순서를 정했어요. 아침 10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퇴근 시간 한 시간 전 5시에 일꾼을 뽑았습니다. 자 누가 천국에 쓸모 있느냐, 누가 천국을 천국답게 하는 그런 자아냐, 그런 인간 존재냐? 그걸 뽑을 때 지옥에 적합한 사람, 지옥에 쓸모 있는 사람, 지옥에 합당한 사람부터 먼저 언급해요.

그게 오전 10시, 12시,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이에요. 마태복음 20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중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하고 임금을 받는데 먼저 온 사람들, 오전 10시, 12시,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이 반항, 반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의 값을 받는데 저 사람은 놀면서 하루치 품삯 다 받았잖아요”라고 할 때 이게 바로 지옥에 적합한 사람이에요. 천국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아요. 마태복음 20장 8절에 보면,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니 그들이 그걸 봤겠죠. ‘야, 한 시간 일했는데 하루 품삯? 그러면 아침부터 왔으니 나는 열흘 치 품삯?’ 이렇게 계산했는데 그게 아니라 똑같이 준 거예요, 똑같이. 안개가 중성성이고, 안개가 중립성이라는 것, 아무런 가치와 권한이 빈 노트에는 없어요.

이 빈 노트의 믿음을 잘 보여줘서 천국에 살아있으면서 이미 합격한 자가 백부장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마 8:9). 왜? 자기는 빈 노트이니까요. 그리고 모든 말씀은 말씀을 이룬 분이 주께서 나에게 새기거든요. 나한테 새긴다고요. 새길 권한은 주님한테 있지, 정상도 아닌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에요.

제발 자기를 평하지 마세요. 평론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서 알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게 마귀인데요. 마귀는 항상 인간 자아의 행함에 대해 스스로 자기가 평하도록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네가 생각해 봐. 그거 잘못한 거 맞잖아?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생각해 봐. 네가 나쁜 게 맞지?’

나이가 90이고, 100이 되도 물고 안 놔줘요. 끝까지 갑니다. ‘인간이 어디 그렇게 살 수 있나? 네가 생각해도 너무 심하다 싶지?’ 아, 집요해요, 집요해, 이거는! ‘네가 선악을 알잖아. 그러면 네가 착한 사람이어야지. 짐승 아니지? 인간이지? 그럼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착한 사람!’

또 ‘네가 돈 벌었다고? 네가 애써서 노동해서 벌었잖아. 네가 노동해서 번 거니까 돈 번 거 자랑해도 돼. 왜? 네가 땀 흘려서 네가 힘들게 번 돈이니까 너의 의의, 너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내세울 만해.’ 이 세계가 바로 악마의 세계, 인간세계, 산 밑의 네팔 세계에요, 이게!

그런데 네팔 주민들 옥수수밭 다 날아가고, 하던 찻집 다 날아가니까 이제는 살아도 사는 게 못 되죠. 뭐 가진 게 있어야죠. 사람이 돈이 없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동창생을 만나고, 친척을 만나고, 가족을 만나고, 자식을 만나고, 부모를 만나도 돈 없으면 용서가 안 돼요. 좀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하는 거 적어놓으세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보상이 되고 위로가 돼요, 돈만 있으면!

그래서 젊은 애들이 철이 들어서 결혼을 안 해요. 돈부터 벌고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철이 들어서. 돈이, 돈이 내가 사람으로 살게 만드는 보람이 된다는 것, 여러분이 거기서 발을 빼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악마의 이빨 자국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거 아니에요? ‘돈 없으면 인간이 아닌 거 너 알지? 쪼다도 아니고 돈을 왜 뺏겨?’ 이런 거요.

바로 ‘천국에 쓸모 있는 인간을 모집한다’는 주님의 뜻은 모르고 이 땅에서 내가 스스로 자평하기를 ‘이만하면 인간이잖아. 이만하면 내가 사람 구실하잖아.’ 이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걸 붙들고. 흩어진 이스라엘이 되기 전의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나오게 했는지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 갑자기 독수리 날개가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희가 애굽에서 나와서 지금 시내산 밑에 올 때까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왔다는 거예요. 이건 생뚱맞은 이야기예요. 그들은 걸어서 왔어요. 버스도 안 탔어요. 힘들게, 힘들게 광야를 지나 왔다고요. 독수리는 구경도 못 했어요. 날개가 어디 있어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를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왔다. 따라서 내가 이 독수리 날개라는 새로운 시공간을 계속 유지하는 조건하에 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 독수리 날개가 뭐냐?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에 업혀서 날아왔다는 뜻입니다. 언약 안의 시공간은요,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알려질 시공간이기 때문에 지상의 인간들은 그냥 인간들이 물리적으로 아는 시공간 그게 전부에요.

그게 전부니까 자기는 거기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서 땅 사고 부동산 모으고, 당연히 자기가 노동해서 얻은 거니까 그게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고, 이 자랑거리가 있는 한 나의 의가 확보되고 나도 남들에게 말할 자격이 있죠. 돈깨나 있으니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돈도 없는 게 말하는 것은 사기꾼이든지, 아니면 열등감이든지 둘 중 하나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에 먼저 온 선배들,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이 사람들이 그런 불만을 털어놓을 때 한 데나리온 받은 사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것은 미안하고 황공한 마음이겠죠. 왜? 포도원 주인에게 따지는 그들이 너무나 정당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일했으니까 한 시간 일한 나보다 품삯을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세상에선 너무나 정당하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못 하겠죠. 미안하고 황공하죠.

이 미안하고 황공한 마음, 이게 바로 천국에 쓸모 있는 인간입니다. 그 외에는 아니에요. 수십 년, 30년 40년 성경 말씀 들어도 내가 죄인인 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뭐냐? 성경 말씀을 들어도 한 번도 주님한테 미안하고 황공한 마음이 없어서 그래요. ‘미안합니다. 왜 저한테 이런 말씀을 주시는지요? 그냥 지옥 보내시죠. 난 나밖에 모르고 내 자랑만 늘어놓는데요, 내 단도리만 하고요.’ 나도 얼추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걸 남들에게 말할 때마다 그게 섞여서 나오잖아요, 섞여서!

자, 아까 그 질문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 땅에서의 ‘나’와 천국에서의 ‘나’가 동일하냐?” 정답은 동일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거지 나사로’에 나와요. 부자하고 대비가 되는, 부자가 사는 집 앞에서 빌어먹는 거지 나사로는 살아 있을 때부터 아브라함 품에 있었습니다. 단독적으로 ‘나’가 존재한 적이 없어요. 살아 있을 때도 아브라함 품에서 거지로 살다가 죽어서는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언약은 뭐냐? 새로운 시공간이에요. 그게 회개입니다. 빈 노트에, ‘나’라는 빈 노트에, 처음부터 안개 같은 빈 노트에다, 지금껏 살아온 것이 주님이 기록한 거예요. 이것을 새삼 알게 된 거예요, 새삼. 성령을 통해서 새삼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스스로 인생 ‘잘 살았다, 못 살았다’를 자평할 수 있는 권한이 내게 없다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잘했다, 못했다’ 자평을 못 하니까 악마가 손을 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성도가 가는 길에 악마가 따라오다가 결국은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길로 가야 된다고요. 끝까지 따라와서 악마가 물고 늘어지게 하면 안 되지요. ‘아이고, 재미없어’하고 그냥 되돌아 가는 거지요. 악마가 인간에게 자기의, 그리고 자기 자랑을 집어넣어서 세상 사는 재미를 느끼게 했습니다. 인간은 그 재미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돈을 계속 끌어모습니다.

남들 좋다는 것, 내가 부러운 것을 다 해봐요. 그러나 그 사람은 로마서 8장 33-34절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악마가 선악과를 심어놓고 계속해서 인간을 자평하게 만들어서 죽을 때까지 물어뜯으면서 안 놓고 셰퍼드도 그런 셰퍼드가 없습니다. 설교 듣고 돌아서면 셰퍼드가 또 달려들어요. ‘너 오늘 교회 갔어, 안 갔어?’ 또 달려듭니다. ‘안 갔어? 안 갔으면 이번 주 벌 받을 줄 알아라.’ 계속해요. 이것은 …, 내가 나를 자꾸 수습하고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니까 마귀의 밥이 된 겁니다. 자진해서 마귀의 밥이 된 거예요.

그냥 안개만 되면 되는데, 그냥 빈 노트면 되는데.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나를 돌볼까?’ 이러고 살아요. ‘내 자랑거리도 없는데 남한테 눈에 띄면 안 되지’ 이러고 산다고요. ‘고맙고, 감사하고, 황공합니다.’ 이런 마음이 없어요. 자꾸 혼자 살아요. 혼자 관리하고, 혼자 측정하고.

그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주께서 이런 선언을 해요. 16절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내린 결론이 이건데, 뭐냐 하면 천국은 없어요. 없는데 지옥, 지옥 속에서 천국을 끄집어내면서 천국 되게 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찾아와서.

그러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천국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잘못이에요. “지옥이 무엇입니까?”를 물어야 해요. “지옥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인간세계 자체가 지옥이에요. 왜? 거기는 자기 자랑거리로 널부러지기 때문에, 자랑거리로 서로 환장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넘쳐나요, 자랑거리로 넘쳐납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지으면서 남들이 좋다는 것은 다 끄집어냈어요. 젊은 부부인데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은 적어도 골프는 쳐야 한다. 그래서 지하 1층에 골프연습장을 집어넣어요. 그리고 노래방을 설치합니다. 1층, 2층, 3층, 또 고기는 구워 먹어야지요. 3층 테라스에는 고기 굽는 시설 해놨습니다. 또 애들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3층에 애들 도서관을 만들어놔요.

또 2층에는 손님들 용 게스트룸까지 만들어놨어요. 1층에는 부부 공동 공간인데 거기에 수천만 원짜리 오디오를 설치해 놨습니다. 그래서 동탄에서 그 매물이 45억 5천만 원에 나왔어요. 그거 팔고 외국으로 이사 간답니다. 지하에 차고가 있는데 이름이 차고가 아니에요. 주차장으로 되어 있어요. 왜? 왜 그런 짓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33-34절을 몰라서 그래요. 다시 말해서 내가 원하는 예수가 있었어요. 내가 원하는 그런 예수는 없어요. 그것은 악마가 만들어 낸 예수예요. 주님은 이 땅에 버림받으러 왔어요. 저주받은 분입니다. 저주받은 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랑 빼기 자랑은 안개(자랑-자랑=안개), 그다음에 공식 하나 더, 안개 더하기 예수님의 의가 의(안개+예수님의 의=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공식 두 개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머리 안 좋은 사람은 두 개 다 못 외운다고 할 텐데요, 자아에서 자아를 빼요. ‘나’는 자랑거리가 되니까 자랑거리에서 자랑거리를 빼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우리의 계획 –우리의 계획은 시공간에서 형성되거든요- 시공간에서 형성되는 모든 우리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예수님의 계획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의 시공간의 계획은 뭐냐? 내가 악마의 표적이 되어서 악마의 먹잇감이 되는 게 우리의 계획이에요. 미국으로 이민 가봐야 또 따라옵니다. 그거 뭐 소용없어요. 메달 따고 성공해도 계속 따라옵니다. 끝까지 따라와요. 자기 의가 있는데, 악마가 자기 의를 심어놨는데 악마가 안 따라올 수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말씀을 통해서 이 야고보서 같은 경우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오늘 본문이 있잖아요. 이 본문이, 성경책에만 붙어 있지 말고 이 본문이 붕 떠서 이 안개에 붙습니다. 붙게 되면 우리는 안개인데 안개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야고보서 5장 13-17절을 탑재하고 있는 그러한 안개로 사용하는 거예요.

지킬 게 없지요. 왜? 이 말씀은 주께서 다 지켰으니까. 다 지켰기 때문에 우리는 안개가 되고, 우리는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리라’라는 것을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되지요. 나중 된 것이 먼저 된다는 거예요. 완전히 망해버린 자가 천국에 가요. 한 시간 일해놓고 하루치 다 받는 이 엄청난 혜택을 입은 이러한 은혜를 여러분 어쩔 거예요?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방금 제가 이야기해 드린 것이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하고 죽 나오는데 4-5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이게 뭐냐 하면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중성이고 무성이기에 내게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게 없기 때문에,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면 되거든요. 내게 없게 만드는 이게 사랑이잖아요, 사랑! 여러분, 사랑하지 않거든 움직이지 마세요. 사랑하지 않은 채 움직이면 사달 나요. 부부간에 대화할 때 사랑하지 않거든 말하지 마세요. 그게 잔소리로 들립니다. 사랑하지 않거든 행동하지 마세요.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자랑할 것밖에 없는데 백날 겸손을 떨어도 결국 남는 것은 ‘너 나한테 얼마 가져갔는데?’ 결국은 뭐냐? 얼마 빼앗겼다, 얼마 얻었다는 이것이 자평(自評) 아닙니까? 스스로 자기를 평하는 거잖아요. ‘나 이번 달에 성공했어.’ 또는 ‘나 이번 달에 실패했어요.’ 여러분, 안개라 하는 것은 액체 같지요? 하지만 기체입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어요. 기체를 놔뒀을 때 그 기체는 시간 따라서 어떤 모양새로 확산되느냐? 통계학에서 ‘정규분포곡선을 그린다.’ 중앙이 볼록하게 봉우리 진 모양이고 밑에는 없는 거예요. 평균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인 종(bell) 모양을 띄는그래프, 중앙이 볼록하고 밑에는 없는 모양의 그래프.

주식시장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투자할 때 시간에 따른 변화의 모양새는 표준모형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물리학의 기체 분포 곡선하고 같아요. 인간은 자기 하나 똑똑하게 굴어도 결국에는 표준모형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에요. ‘더 벌어야지. 그래서 성공해야지. 그리고 자랑해야지.’

여러분,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자랑한다는 그것을 또 자랑해요. 그래서 제가 또 신경을 써서 찬송가 509장 가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겠습니다.

1절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
후렴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이렇게 나오는데 만졌다가 떼면 또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이 가사의 문제점은, 뭘 ‘만져라’가 아니고, 우리는 이미 거지 나사로처럼 십자가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죄함이 없어요. 마귀는 주님의 희생이 들어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거든요. 우리는 십자가를 발견하려면 내가 정상이 아닌 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시면 여러분의 황공함과 미안함이 감사로 바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태어나면서 우리 자신이 정상인 줄 알았습니다.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별문제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무 상관 없이, 이제는 십자가 믿는 것도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지독한 우리의 의, ‘이 의가, 내가 주님에게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 되는 나인 것’을 새삼 아는 감동에 휩쓸리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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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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