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준 260826
나의 기준(열왕기하 12:17-21)
나의 기준
2026년 8월 26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12:17-21
(12:17)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취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한고로
(12:18)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12:19)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것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2:20)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서 모반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저를 죽였고
(12:21) 저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이었더라 저는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마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야다 제사장이 130세로 죽고 난 뒤,(대하 24:15) 요아스 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방민족인 아람나라가 침범해서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빼앗겼으며 요아스 왕 본인은 신하들로부터 모반을 당해서 살해 당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바는 ‘성전’이 도로 훼손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 성전 중심의 정책을 버리도록 방백들로부터 압력을 받은 상황이 관련이 있습니다. “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대하 24:17-18)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즉 여호야다 제사장의 지시가 있을 때는 오로지 성전 관리에 집중했던 왕이 이제는 성전을 포기하려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준을 버린 겁니다. 반면에 요아스는 자신의 기준에 입각해서 살려합니다. 즉 자기에게 쓸모있는 인간이라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산다는 것은 ‘천국에서 쓸모있는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기준을 버린다는 것은 그저 여타의 모든 세상에서 사람들과 한통속으로 사는 것을 고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의 반응에 의미를 두면서 살고 싶은 겁니다.
이런 삶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느끼는 삶이겠습니까!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동안 억지로 하나님의 일을 했던 겁니다. 따라서 요아스의 이런 태도는 변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극히 정상적인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에게 편하게 적용되는 것은 자기가 만든 기준입니다.
이 자기를 위한 기준을 내부에 담은 채,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고된 일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 세계에서 ‘나의 기준’ 자체가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마땅하고 당연한 전형적인 삶입니다. 문제는 이런 자연스러움에 초를 치는 인사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에게 왕에게 바로 대놓고 무슨 말을 했는지 봅시다.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대하 24:20)
인간 세계에서 누가 우리들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만 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 됐어요!”하고 퉁명스럽게 피해버린 겁니다. 이미 모두들 자기 확고한 기준들에 준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기피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왕에게 이런 식으로 직언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태도와 다릅니다.
왜냐하면 왕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일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아스 왕은 방백들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성전을 버렸습니다. 방백들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입니다. 백성들은 이들의 가르침과 지도력을 신뢰하고 사회적으로 통합을 기대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개인과 개인 끼리의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왕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들을 지키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질서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가 왕을 보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고 선언해 버린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에게는 지상에 그 어떤 백성들의 호응과 전적인 지지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왕+방백+백성들 모두의 기준이 선지자 한 사람의 지적에 의해 무용지물이 된 겁니다.
따라서 왕+방백+백성들은 자신들의 기준을 사수하기 위해서 선지자에게 단호하고 명확한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조치가 바로 선지자를 돌로 살해하는 겁니다. 즉 최고 권력에 대하는 자는 단호하게 처벌해서 사회 기강을 확립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전체 이스라엘이 세운 기준이었습니다.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대하 24:21) 이때 선지자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 24:22)
그 다음에 나온 사태가 바로 아람나라의 침공이고 요아스 및 유다나라는 큰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아람 나라의 침공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에 내리기 위해 아람나라까지 동원하시면서 하나님의 본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인간들이 악한 짓을 하지 않도록 방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제대로 버려지지 아니하면 제대로 찾으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간의 기준을 벗어나 오로지 하나님의 기준 주입 방식입니다. 마치 탕자이기도 아버지께서 받아주시는 원칙입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1-24) 쉽게 말해서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저주받은 자에게는 저주를 복받을 자에게 복을 내리시는 일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시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돌아 맞아 죽고 아벨이 형 가인에게 맞아 죽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이 바로 ‘죄를 씻는 장치’로서의 성전 기능이 발현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소개하는 원칙도 이와 같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이해하는 자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이해하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이 사실은 하나님 입장에 전혀 문제되지 않고 정상이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다 선한 주님의 은혜인 줄 알아, 이 문제없음에 대해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0강-열왕기하 12장 17-21절(나의 기준) 2608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2장 17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2:17-21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취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한고로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것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서 모반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궁에서 저를 죽였고 저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이었더라 저는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마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지난 시간에, 요아스가 자신의 고모부 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지시에 잘 따라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부서진 성전을 수리하고 개선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성전의 가치를 주목하게 하는데 열심을 냈어요. 언제까지 말입니까?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여호야다가 죽기 전까지는.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고 난 뒤에 요아스가 어떻게 확 사람이 달라졌는지 그것은 이 열왕기하에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본 열왕기하 12장 16절에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라는 말을 통해서 여호야다 제사장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 성전과 거기에 종사하는 제사장들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4장 15절에,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세라”라고 나옵니다. 자 죽고 난 뒤에 그를 사람들이 다윗 성 열왕의 묘실에 장사했다고 했어요. “무리가 다윗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대하 24:15). 왕이 묻혀야 될 자리에 왕이 아닌 제사장이 열왕의 그 묘실에 장사했습니다.
그러면 왕이 되는 요아스는 어디에 묻혔는가? 요아스는 역대하 24장 25절 끝에 보면,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그 시대에 열왕의 묘실에는 여호야다가 이미 장사되었기 때문에 요아스는 왕 취급도 받지를 못하고 왕 값도 못 한 인간으로 그 시대 사람들이 분류해서 그가 죽었을 때 왕 아닌 자로서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그것은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때 하고, 여호야다가 죽고난 뒤에 요아스라는 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역대하 24장 16-18절에 보면,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요아스, 왜 그랬어, 왜? 왜 하나님 섬기다가 안 섬겼어? 좀 섬기지. 제사장 있을 때는 말을 잘 듣다가 죽고 난 뒤에는 왜 네 멋대로 했어? 참 안타깝다. 왕이지만 죽고 나서는 왕 취급도 못 받고 말았잖아.”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을 볼 때는요, 항상 그 입장을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보지 말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거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아요. 우리의 평소 마음 자세가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자세가 하나님 편에 서기보다는 하나님 없이 살고 싶은 그게 우리 내부에 무의식적으로 아주 강렬하거든요. 요아스가 하나님을 버렸다 하는데 요아스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지요. 뭐 믿어야 버림이 있는데 믿은 적이 없어요.
눈치코치 다 보고, 의리 찾고,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때는 여호야다의 그 은혜로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체면치레하듯이 그의 말을 들어줬는데, 여호야다가 죽고 난 뒤에는 자기도 좀 컸다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요아스는 하나님 믿는 척했다가 여호야다가 죽고 난 뒤에는 본래 인간의 본모습으로 돌아온 거예요. 인간의 본모습은 뭐냐? ‘하나님이 필요 없고,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산다.’ 이게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이것을 제가 간단하게 달리 정리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본모습은 자기가 살고 싶은 기준을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본인이. 인간이 ‘나는 이렇게 살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고 싶어.’ 하고 본인이 정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일은 어떤 경우라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경우는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기는 믿되 ‘나는 이렇게 살겠다’라는 자기 기준은 포기하지 않은채 그냥 타협조로, 또는 흥정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척을 한 그게 요아스였습니다. 요아스 이야기가 이렇게 나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이 요아스의 삶에서 벗어나서 다른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은 굉장히 단호합니다. 역대하 24장, 요아스가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재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7-18절에,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방백들이라 하는 것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에요. 그 나라의 엘리트들이지요. “임금이여, 여호와 섬기는 것도 좋지만 백성들의 자율성, 인간의 본성대로 행하고 싶은 그것을 너무 억압하지 말고 풀어줍시다. 어떤 종교를 믿든 그것은 자기 자유잖아요.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어야 그게 왕의 자리가 오래갑니다.” 사실은 왕의 자리가 오래 가는 것이 아니라 고의 관료층의 자리가 오래 가겠지요?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신하 여러분들 좋을 대로 하세요’라고 했다는 말은 요아스가 평소에 자기 기준을 고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역대하 24장 19절에 보면, “그러나…” 영어로 but이지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우리가 요아스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그것이 중요한 이유가 이거예요. 인간이 자기 기준으로 산다는 그것에 대해서 모든 백성들은 다 동조하고 동의해요. 똑같은 인간들이니까 “이제 우리 마음을 이해하시는군요. 임금님, 감사합니다. 임금님도 임금님 기분대로 살고 우리도 우리 기분대로 살겠습니다. 사람 사는 맛이 여기에 있지요”라고 본래의 인간성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에 초를 치는 자가 누구냐?
바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이 여기에 초를 치는 거예요. 선지자의 주장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쓸모 있느냐를 하나님이 찾는다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내세우는 기준은 자기가 편한 대로 살면 그만이에요.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 뭐 어쩌라고?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다들 그렇게 살아. 여기에 대해서 나는 절대적으로 양보 못 해. 나는 내 기준으로 살 거야. 오케이? 오케이!” 그런 거예요, 인간 세상은.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런데 초를 치고 나오는 이 선지자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본인이 본인에게 얼마나 쓸모 있느냐는 그 기준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그 인간이 얼마나 쓸모 있느냐의 그런 기준으로 사는 사람을 찾는다는 거예요. 모조리 탈락이지요. 모조리 탈락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탈락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내 기준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기분에 맞춰서 내가 내 기준을 포기한다? 그러면 내 영광 포기하고 다 포기, 포기, 다 포기잖아요. 다 포기예요. 자 그럴 때, 선지자가 그렇게 초를 치고 들어올 때 여러분 같으면 그 선지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권력을 가진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고 난 뒤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권력은 다 나한테 있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역대하 24장 20절에,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스가랴 선지자가 여기는 여호야다의 아들로 나오는데 사실은 아들이 아니고 손자에요.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여기 보면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라고 해서 스가랴 선지자의 아버지는 바가랴에요. 할아버지가 여호야다입니다. 이 여호야다는 그 출생이 솔로몬 때예요. 그 시대에 출생해서 130년 동안 산 거예요. 요아스 왕의 때까지. 그러니 요아스하고 80년도 더 차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가랴, 스가랴는 여호야다의 손자였지요. 손자라도 옛날에는 그 집안의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어쨌든간에 “하나님의 신이…”, 여기에는 아들로 되어 있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니 여호와도 너를 버린다.’ 이게 역대하 24장 20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아스가 어떻게 했느냐? 역대하 24장 21절에,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우리가 요아스처럼 왕이 아니고 일반사람들 같으면 친구가, 또는 어떤 사람이, 교회 다니는 신도가 “아저씨, 당신 맘대로 살면 안 되고 성경 기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서 쓸모 있지요”라고 한다면 돌로 쳐 죽이지는 않아요.
“아저씨, 그만하소. 내가 알아들었으니까, 내가 교회 갈지 말지를 알아서 판단하니까…” 경상도 말로 하면 “됐구마!” 오랜만에 듣지요? “됐구마! 알았어요, 알았어요. 1절만 하세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간섭하지 마세요.” 이러지 돌로 쳐 죽이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한테 “당신은 지옥에나 쓸모 있지 천국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고 하면 그걸…, 이재명 대통령 잘하는 것 있잖아요. 생중계.
TV 생중계로 현안 질의응답 할 때 어떤 공무원이 “이재명 당신 그렇게 해서는 지옥에나 적합하지, 천국에는 아무 쓸모 없다”라고 하면 이재명 대통령이 “그만하소. 내가 알아서 알게” 이 렇게 합니까, 아니면 돌로 쳐 죽여버려요? 김정은한테 그렇게 하면 대포로 쏘아죽일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단순히 인간 대 인간으로 ‘알았어요, 알았어’할 그 정도가 아니고, 인간 내가 현재 국가의 왕이 되는 권력 자체에 대해서 당신이 감히, 감히 나를 일개 인간으로 보고 –나는 왕인데 감히- 나를 모독한 거예요.
적어도 왕한테는요, 기침 소리도 내면 안 돼요. “누가 내 앞에서 기침 소리를 내었지?” 이것은 궁예가 그랬잖아요, 궁예. 죽였어요. 기침 소리 냈다고 죽였다고요. 김정은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다고 죽었어요, 그 사람. 고위 장군이. 자 그러니 여러분은 일반인이기 때문에 “아저씨, 그만하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렇게 되는데 만약 여러분이 왕이라면, 왕이고 지금 국민들에게 자기의 가오를, 자존심을 세우고 그것을 생중계로 TV로 방영되는 현장이라면, 어떤 사람이 나보고 “당신 그러면 아무짝도 쓸모없어. 지옥에나 가라.”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을 그냥 곱게 돌려보내겠습니까?
인간은 자기 기준으로 산다고 하지만 그 자기 기준은 타인들을 심하게 의식하는 데서 오는 인간들의 그 인식의 힘에 둘러싸인 그러한 ‘나’예요. 요아스가 그렇게 변하는 것은 뭐냐? 방백들이 그 당시 고위 관료직들이 압력을 넣은 거예요. 그러면 여호야다가 있을 때는 왜 그렇게 못했는가? 여호야다 선지자는 뭐냐?
“왕의 임무는 성전이 어떤 곳인가를 그 일이 왕의 일입니다.”
“성전이 뭔데?”
“성전은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장치입니다. 성전이 아닌 어떤 곳에서도 인간의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떤 민족도 죄를 씻어주는 그런 장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이스라엘에게 성전 주셔서 그래서 요아스 왕 당신은 내 말 듣고 성전 관리나 잘하세요. 왜? 성전 없는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는 눈치코치 다 보면서 성전을 관리했어요.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에게 월급 따박따박 주면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고 난 뒤에 성전은 바이바이, 예요. 그게 역대하 24장 18절에 나옵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방백들이, 그 당시 관료들이 노린 것은 뭐냐?
“이제 성전 버리고 삽시다, 성전 버리고. 성전에 언제까지 매일 겁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그러한 사실, 그러한 교리에 대해서 우리가 이제는 벗어납시다. 기준을 하나님 기준에 맞춰서 ‘너 죄인이다. 하나님 기준에 맞춰서 죄를 사하는 것은 이 성전뿐이다’라는 그 하나님의 기준 치우고 이제는 ‘내가 잘했다, 못했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스스로 결정하는 그런 나라가 한번 되어 봅시다. 오케이? 좋아요? 백성들이 그걸 다 원하고 있습니다.” “오케이, 좋아! 그렇다면 왕이지만 왕인 내가 백성들의 뜻을 따라야지.”
백성들 입장에서는, ‘임금이 자기 기준대로 산다면 좋다, 나도 내 기준대로 산다. 편하고 좋네. 여호와의 말씀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되고, 참 좋은 임금님이 되었네’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그런데 하나님이 계셨어요. 계셔서 하나님의 신이 선지자에게 임한 거예요. 선지자도 대세 따라서 그냥 조용하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관료들이 다 있는데 거기서 입을 벌려서 “하나님이 당신 버렸어요.” 다시 말해서 “당신, 천국 못가요!” 당, 신, 천, 국, 못, 가, 요. 일곱 글자에요.
생중계로 나가는데 거기서 “이재명 당신 지옥갑니다!” 이거 뭐 그렇게 이야기할 때 임금님이 가만있으면 쪼다 되지요, 바보 되지요? 얼마나 자기를 우습게 보겠습니까? 자기의 권력을 권력답게 단단히 하기 위해서 시범 조로 어떻게 해요? ‘저게 뭐 하나님 백을 믿고? 좋아. 하나님 백 믿는 자가 센지, 이 나라 왕인 내가 센지 당신이 백성들 보는 데서 이야기해. 나도 백성들 보는 데서 당신 돌로 쳐 죽인다.’ 그래서 돌로 쳐죽였어요.
이제 요아스의 심정을 여러분이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해야 돼요. 이유를 제가 말씀드립니다. 왜 요아스 편을 들고, 요아스 심정을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성경 전체가요, 버림을 받지 아니하면 찾음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를 경유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찾음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할 일인지를, 예상 밖의 축복인 것을 인간들은 감을 못 잡습니다.
버림을 받아봐야, 깔끔하게 버림받아 봐야 깔끔하게 찾음의 깔끔함에 충격적으로 우리는 감사합니다. 탕자가 되어봐야 아버지의 금가락지가 이렇게 좋은 것을 아는 거예요. 모든 것을 공짜로 용서해 주는 그 용서의 기쁨을, 감격을 천국에 가면서 내내 자기의 인생, 짜증 내지 않고 감격과 감격, 감사와 감사로 죄를 사해주는 그 장치, 그 성전의 고귀함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1-24).
그런데 지금 이 본문 내용이 뭐냐 하면, 왕, 고위직이지요, 방백, 고위층이지요, 이 고위층, 소의 국가의 지도자급에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서 개무시를 한다는 이것은, 모든 백성의 하나의 일관된, 합의된, 그들의 모든 뜻이 그 지도자층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줘요.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못 박혀 죽은 것이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는데?”라고 물으면
“그 당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면 또 묻지요. “그 당시 일반 민중들과 백성들은 뭐 하고 있었는가?” 데모했어요? 조용했어요. 조용했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혈서 쓰고 대들었는가? 안중근 의사처럼 권총 들고 쏘고 그랬는가? 제자들은 도망갔어요. 도망갈 때 그냥 도망간게 아니고 권력층을 의식하면서 베드로는 저주하면서 도망갔습니다.
이 말은 뭐냐? 권력층만 나무랄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한 통속이었다는 거예요. 똑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소통하고, 통용하고 있었다는 그 말입니다. 요아스가 버림받았다는 말은, ‘요아스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그가 그 백성들의 대표자로 버림받았다는 말은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은 다 하나님께 마땅히 버림받았던 그런 식으로 자기 기준에 의해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인간은 정신 차려봤자 자기 기준을 버릴 정도로 정신 차리는 인간은 없습니다. ‘앞으로 잘해야지. 벌 안 받도록 해야지.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벌받았으니 다시는 내가 벌 안 받도록 바르게 살아야지.’ 그것도 자기 기준이잖아요. 벌받기 싫어서 바르게 사는 것, 그거 자기 기준이에요. 하나님 기준 아닙니다.
하나님 기준이 뭔지 알아요? 알려드릴까요? 하나님 기준은 “깔끔하게 버림받아라. 내가 깔끔하게 건져줄게.” 이게 하나님의 기준이고 이게 천국에 쓸모 있는 인간이에요. 얼마나 인간들이 자기 기준에 입각해서 자기 잘남에 조바심을 내고, 간절할 정도로, 애처로울 정도로 자기 이미지 관리하고 있어요. 한순간도 자기 이미지 관리에서 긴장 푼 적이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여기 관원이 나와요. 지도층이지요? 지도층이 되어야 이념으로 밑의 사람들에게 사상을, 국민교육을 시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7절,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그 지혜 말고 전혀 그 인간들이 눈치도 코치도 못채는 비밀한 지혜가 있다는 말이지요.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문장, 요 문장,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요 문장을, 2027년도 수능 국어 시험에 이 문장을 띄워놓고 이 질문이 가능할 거예요. ‘십자가가 뭐냐?’ 이 세상 관원들이 하나도 알지 못했다는 이 말은, 태어나는 인간치고 인간이라면 십자가를 아는 자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대표자가, 인간의 이념을 쥐고 있는 자가 그 시대의 관원들이에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죄를 씻어주는 장치. 구약의 성전은 뭐냐? 죄를 씻어주는 장치. 솔로몬 시대에 태어났던 여호야다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죄를 씻어주는 장치를 보호하라고 왕과 그 관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공짜로 그들은 생존해 왔던 특수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가 평합니다. “자,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저에게 평가를 받으세요.” 하나님의 재판을 받으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당신들을 버렸습니다.” 이유가 뭐냐? “당신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들을 버렸습니다.” 그 소리 듣고 요아스 왕이 약이 올라서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 말을 하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 당신을 버리겠다. 돌려 쳐! 돌로 쳐!”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까 본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언한 것,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예언했으니까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이 심하게 박살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여러분, 하나를 더 보태세요. 예수님의 이 예언을 지금 예수님 시대 말고 요아스 시대에 이걸 앞당겨 적용을 시킵니다. 적용을 시키면 오늘 본문 열왕기하에 어떤 본문이 나오냐 하면은, 17절부터 본문 나옵니다.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18절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그러니까 그 전에 아하스 왕 이전에 선배들, 왕들이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성전에 바쳤던 모든 것들을 깔끔하게 다 긁어서, 금들을 긁어서 그 쳐들어왔던 아람 왕에게 바쳐버렸다. 다 바친 거예요.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그 아람 왕의 군대가 어지간히도 많은 숫자가 와서 요아스가 기가 팍 죽고, 그 뇌물, 예물을 갖다 바칠 수밖에 없었구나.’ 성전이 싫다니까, 요아스가 성전이 싫다잖아요, 성전을 버렸잖아요, 방백들의 말을 듣고. 그런 노래가 있죠. 라면만 먹던 아들이 어느 날 엄마한테 자장면 시켜달라고 졸랐어요. “엄마, 짜장면 좀 사주라.” 그런데 엄마가 비상금으로 짜장면 시켜 놓으니까 “엄마는 짜장면이 싫다고 그랬어요.” 지오디, 노래에 그런 게 있어요.
어머님께(지오디, 1999)
……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 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짜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사실은 싫은 게 아니고, 아들에게 양보하려고 본인이 싫다고 한 그건 모르고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라고 그랬는데, 요아스는 하나님의 성전이 싫다고 그러는 거예요. ‘성전을 싫어하니까 아람 왕이 큰 군대, 많은 군대를 데리고 유다 나라를 침범해 왔겠다.’ 이렇게 생각이 들죠. 아닙니다.
역대하 24장 24절에는,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하나님이 징벌하는 도구로써 적은 숫자로 쳐들어왔던 그 아람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징벌에 따라서 유다 나라를 징벌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의 손자를 죽였으니까 그 피로 인하여 자기도 부하에게 암살당해서 다윗성에 장사 되었죠(12:21). 내란이 일어나가지고 요하스 왕도 죽어요. 자, 여기서 이거 한번 생각해 보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해보는데, 여러분들도 이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범죄하기 전에 미리 조치하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 인간이 배신하고 범죄한다는 걸 아시면서도 왜 미리 조치하지 않는 건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는다는 걸 방치해 놓고, 왜 뒤늦게 찾아오시는 건가요?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제사를 받아놓고, 하나님이 거부한 형이 하나님의 제사를 드린 동생을 쳐 죽이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방관하시고 묵과하시다가 죽고 난 후에, –사람은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가인에게 찾아와서 나무라시는 이유가 뭡니까? 왜 일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스가랴가 그렇게 할 때, 요아스가 왜 스가랴의 말을 안 듣고 도리어 돌로 쳐 죽이게 해놓고는 뒤늦게 아람 나라 보내서 나라 엉망으로 만들고, 성전 금 다 벗겨가게 만들고, 요아스 왕은 내란에 의해서 죽게 만들고. 도대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이익은 뭘까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런 질문 자체, ‘하나님이 우리가 범죄하기 전에 미리 찾아와서 예방조치 하시면 좋겠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네 기준이다. 네 기준은 하늘나라에 아무짝도 쓸모없어서 하늘나라에서 취직이 안 된다.’ 안 받아준다는 겁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아요.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하면, 네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없다. 여러분, 이게 믿어집니까? 믿어지십니까?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안대요,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심지어 그 사람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칼이 와서 도살할 양같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롬 35-37) 점에서는 “뭐 문제 될 게 있어? 없잖아!” 오히려 우리한테 되묻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기준이었던 거예요.
우리에게 어떤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옛날에는 성전이고 지금은 십자가의 피로 그것을 다 없애주시는 그러한 관계에 놓여 있다면 뭐, 뭐, 뭐? 문젯거리가 뭔데?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문제없는데, 문제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기준을 자꾸 작동시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참…, 하나님 보시기에는 같잖은 짓이에요, 같잖은 짓입니다. 죄인 주제에 뭘 바르게 사는 게 있어요, 죄인 주제에. “가만있어. 내가 너로 하여금 죄인을 죄인 되게 해줄 테니까!”
여기서 말씀을 끝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요아스 왕은 방백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전을,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것을 이제는 그만두고 자기 기준에 입각해서 살고 싶었을까요? 백성들에게 그걸 권장했고, 마음껏 하나님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요아스 왕이 이스라엘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른 이방 민족의 왕이 아니고 이스라엘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요아스 왕을 통해서 ‘이런 인간들이 천국에 적합하지 않은, 천국에 아무 쓸모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께 버려져서 저주를 내립니다’라는 그러한 역할에 충실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천국에 적합하지 않은 자는 이런 경우가 적합지 않은 겁니다.’ 그 사실을 알려주는 데 있어서 뭐 문제가 되는 게 있어요? 없잖아요. 인간은 저주받을 자격을 논하기 전에 저주받아요. 요아스는 말씀에 의해서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저주를 받은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저주를 받았으니까, 요아스 왕을 통해서 사람이 뭐라고 구시렁구시렁 하든 간에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은 살아있다.’ 말씀 살아있으면 뭐 문제없잖아요.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죠.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 있어요. ‘늙기 전에 죽고 싶다.’ 여러분, 인간은 죽을 자격이 없습니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하세요. “가만히 있으세요. 말씀이 당신을 저주할 때까지 당신은 가만있으세요. 하나님이 말씀에 입각해서 알아서 죽이지, 당신이 죽고 싶다고 죽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은 말씀이 살아있는 한 아무 문제 없음을, 말씀을 믿는 신앙인에게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말씀의 입장에서 합력하여 그게 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우리 기준에 맞춰서 조심조심하면서 살아가는지.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하여 살고, 자기 딴에는 철저하고, 철저에 철저를 기한다 하면서 살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전혀 천국에 쓸모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을 이제는 발견하고, 이 발견하게 된 이것조차도 아무 문제 없는 주의 특별한 은혜인 것을, 사랑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