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 덩어리 260823
언약 덩어리(야고보서 4:13-14)
안개
2026년 8월 23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4:13-14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은 안개’마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허무한 존재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쉽게 생각하면서, “그래 내가 안개 같다는 것은 실은 나도 사전에 알았지. 이제사 하나님과 내가 마음이 통하네”라고 여길겁니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안개’란 야고보서 4:13를 통해서 들어서야 하는 내용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빼고 바로 ‘인생은 안개’라고 말씀을 하시면 안될까요? 뭐가 누락되게 되지요? 뭐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안개’ 자체에 대해 곡해하고 있는 의식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시비거는 바는 ‘도시에 나가서 이득을 보겠다’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나 내일이나’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오늘이나 내일은 와야만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내일을 보낼 그 어떤 자격이나 권리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과거는 주님의 과거요 성도에게 있어 미래는 주님의 현재입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안개’라고 하시는 것은 중성, 중립에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6-7) 안개가 자욱한 상황 속에서 출현된 것은 사람이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간격으로 생겨난 등장한 인간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차이가 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시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인간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나무로 인해 생명과 죽음과 분리됩니다. 이러한 분리는 이미 창세기 1:2-6에; 벌써 나와 있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이 나눔은 어디까지 이어져 최종점에 도달하느냐 하며는 십자가입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즉 아버지와 아들의 영벌어짐이 보입니다.
단지 땅의 육신을 입었다고 해서, 그리고 그 육신이 짊어질 죄가 있다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벌어졌습니다. 구분되고 나뉘어집니다. 이 나누어짐은 창세기 2:7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는 원칙 안에 고이 담겨 있는 법칙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피조세계는 엄연히 다르다를 분명히 하면서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3::22-24이 성립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드리어 언약이 주어지는데 그 언약은 내용은 복과 저주와 나뉘어진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 따라 그 자손들은 언약이 자아내는 새로운 현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은 강제로 애굽에서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출 3:6)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는 ‘안개’의 의미가 단순히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시편 137:1-4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는 언약을 살아 나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개인적 인생이 허망하게 죽는다고 해서 ‘언약 같다’는 게 아닙니다. 언약의 개입으로 인간의 중성성(=안개성)은 그 안에서 새로운 사실이 나옵니다. 그것은 언약이 자아내는 대립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죽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언약을 활성화시켜서 기어이 모든 것은 지옥과 천국으로 양분화시키고 마시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산 나무를 태우면 재가 됩니다. 하지만 그 중간에 공기를 차단하고 가마 안에서 태우면 숯이 됩니다.
이 숯은 다시 불붙이는 강렬한 에너지가 나옵니다. 복음적으로 말해서 어떤 인간에게 언약이 들어 있으면 언약이 그 고유한 에너지를 발휘해서 저주와 복이라는 대립성을 방출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이 들어 있지 않는 자는 그야말로 재와 같은 존재입니다. 사도 애고보는 철저하게 이런 자를 배격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13를 거론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착함과 윤리와 도덕으로 천국을 찾아나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마저 실패한 시도입니다. 하나님과 복과 저주 사이에 간격을 두신 이유는 그동안 인간을 지배한 악마는 결국에는 천국에서 돌아서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여서 도시에 나가 장사해서 이윤을 남기겠다는 자들은 바로 그 자기 사랑으로 인해 주님의 사랑을 막고 있는 자입니다. 우리 안에 진정 살아 있는 것은 언약이어야 하지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창세기 2:7의 창조 법칙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성령 주입으로 나타납니다.
이들만큼은 지옥도 알고 천국도 아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어디에 정신팔렸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안목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야고보서 4장 13-14절(언약덩어리) 26082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4장 13-14절입니다.
야고보서 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안개니라”에 동의가 돼요. ‘그래. 인생은 살다 다 죽고 없어지면 있던 그 현장이 사라지면 끝난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이 말만 하면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 얼추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말을 믿겠습니다.”
그런데 ‘안개’라는 말을 하면서 무엇과 대비를 시키느냐 하면, 13절과 대비시켜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이를 보리라, 이익을 본다는 뜻이거든요. “…하는 자들아 너희는 안개니라.”
14절 말씀, 안개라는 말은 흔쾌히 동의하고 싶은데 13절 말씀은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고 여기서 사람들은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죽으면 안개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동안 우리는 놀까요? 안개 되기 위해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뭐라도 해야죠. 이익을 봐야죠, 장사를 해야죠, 사업을 해야죠. 가족은 뭐 먹고 삽니까?” 13절에 대해서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13절, 14절 다 합쳐서 믿을 거냐, 아니면 13절 건너뛰고 14절, “안개니라”만 동의할 것이냐? 하나님 말씀에서 우리가 골라잡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안개하고 사도가 말하는 안개의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겁니다. 13절에 동의하지 않으면 14절의 “너희는 안개니라”에 대해서 합치된 의미를 너희는 가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야고보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가 그렇습니다만, 말씀 전할 때는 아주 결사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주 애를 쓰고 있어요. “제발 좀…, 믿음도 없으면서, 성령도 없으면서 구원에 날름 욕심내지 말아주세요.” 이런 조로 이야기를 해요. 더 쉽게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래도 믿을 거냐?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는데! 아, 참 그래도 하나님 안 버리네. 대단하다, 여러분들!” 이런 식이에요.
어느 도시에 가서 취직해서 돈 벌겠다든지 사업해서 돈 벌겠다는데 그걸 지적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할 일이 없잖아요, 할 일이. 그러면 살면서 손해만 볼까요? “이익을 보려는 자들아” 이렇게 책망을 한다면 가게 문 열고 손해만 옴팍 보면서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일까요? 그러니까 이 사도의 말은 인간 측에 다가가 이렇게 설명하고 저렇게 설명해도 도대체 납득을 못 하는 거예요. 동의할 수가 없는 요소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는 이렇게 14절의 “너희는 안개니라”만 했으면 아무 문제 없이 그냥 믿을 건데 괜히 13절을 넣어서,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괜히 다 헛짓이라는 이런 이야기를 해서 하나님, 천국, 거의 다 가까이 왔는데 탈락을 시키는 이런 작업을 왜 하느냐? 사도는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왜 사랑이냐 하면, 사도는 인생을 다 끝낸 사람이, 더는 자기 인생에 일체 미련이 없는 사람이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에게 당부하는 식으로 이 말씀을 주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쉽죠. 비행기를 타고 있어요. 그런데 3천 미터 공중을 날다가 사고 나서 추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1살이나 2살쯤 되는 아이와 여행하다가 60초 내외로 다 죽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마침 어떤 사람이 개인용 낙하산을 준비했다고 칩시다. 비행기 타는데 낙하산은 왜 들고 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고 날 줄 알고 개인용 낙하산을 들고 탔다고 칩시다. 그 낙하산은 1인용이에요. 두 사람은 안 되고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는 그 낙하산인데 자기 애는 갓난아이니까 별로 무게가 많이 안 나가니까 자기 아이를 그 사람에게 부탁합니다.
“나는 죽는 것이 뻔하지만 당신 가슴팍에 내 아이를 품어서 살릴 수는 없겠습니까?” 그 사람이 불쌍히 여겨 “그러면 작은 아이니까 받아주겠습니다.” 하고 품속에 집어넣었어요. 그때 엄마가 아이한테 하는 말이 “아가야! 우리는 여기서 헤어지자.” 엄마의 그 행동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합니까? 그게 바로 사랑이죠.
사랑은 뭐냐? 내가 죽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살릴 사람을 살리겠다는 애틋함, 그게 고스란히 담겨 있을 때 그게 사랑입니다. “아가야, 잘 가!” “엄마 잘 있어!” 잘 있기는 뭘 잘있어요? 비행기 떨어지면 죽는데요. 애는 모르지요. “너는 나하고 여기서 헤어지자.” 헤어지는 마당에 사도 야고보는 우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발 너희들은 좀 살아라. 제발 부탁하는데 너희만큼은 천국 좀 가줘. 그러나 ‘1년 동안 유하며 장사해서 이익을 보리라.’ 거기에 신경 쓰는 그런 인간들은 천국에서 안 받아줘.”
천국에서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가 사랑이에요, 그게. 그게 사랑이라고요. 그래 놓고 13-14절,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이걸 약간 풀이해서 설명하면 ‘나의 과거는 주님의 과거고 나의 미래는 주님의 현재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야고보의 말은 바꿔치기 해야 돼요.
그 아이가 얼마 전까지 엄마 품에 있었잖아요? 바꿔치기 해야 돼요. 엄마 품에 있다가 생명을 주는 사람 품에 안겼잖아요. 바꿔치기 하면서 아이의 시간도 같이 바뀌고, 공간도 같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이 세상에서 천국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나중에 안개가 되는 게 아니라, 지금 자기가 안개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을 아무리 상상해도 가짜 천국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야고보에 의하면 진짜 천국을 누가 가로막는가? 13절이 가로막죠. 오늘 몇 번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사도 야고보는 여기서 ‘장사해서 이이를 보리라’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걸 문제 삼지 않아요.
이걸 문제 삼지 않는다면 여러분 마음이 많이 편해졌죠. ‘아이고 큰일날 뻔했다. 난 또 취직해서 장사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 그러면 지옥 가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치 내가 생각하는 시간이 계속 허락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인식 자체가 천국에서 인정하지 않는 인간에서 나오는 시간관이라는 거죠.
천국의 시간관은 ‘나의 과거는 주님의 과거일 뿐이고, 나의 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주님께 내 존재가 넘어간 이상 주님이 현재 상황에서 일으키는 일들의 연속이지 나의 미래,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서 장사해서 이이를 보리라, 그건 사도 야고보의 시선에서 보면, ‘이게 아직도 자기 시간을 따로 갖고 있고 그게 유지되고 있구나’라고 지금 지적해 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야고보에게는 사랑이고요. 더 나아가서 야고보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데요, 인간의 사랑은 뭐냐 하면 그게 소유용이기 때문에 그래요. ‘일 년 동안 장사하며 이익을 보리라. 그 이익은 손대지 마, 내 거야”라는 소유욕. 자기 소유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이여, 나한테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내일이고 모레고 저한테 시간을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하는 그 주인 의식, 이런 주인 의식이 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이 된다는 거죠.
인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소유 의식인데, 그 소유의식은 일단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데서 나옵니다. 내 것을 내가 꽉 쥐고 있는 그러한 양상. 그렇다면 그렇게 나를 꽉 쥐고, 내가 나를 못 놓는 가운데 꽉 쥐고 살아가는 나에 대해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합니다. “너 누군지 모르지? 넌 안개야”라고 지적하는 거예요.
“너 하나님 안 믿지, 그지? 너 하나님 안 믿지? 하나님 사랑도 안 믿지? 넌 너만 믿지? 우리 여기서 헤어질까?” 이런 식으로 결사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떼어 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사도 야고보, 그것이 바로 사도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랑은 없습니다. 이건 사도 야고보뿐만이 아니라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예요.
요한1서 4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요한 1서 4장 9절에서 우리에게 확 다가오는 게 있죠? ‘독생자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했다’는 말은 뭐냐? 현재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은 죽은 상태라고 보는 거예요.
“너 죽어있어”라는 말을 길게 하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딱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너 죽었어.” “저 태어난지 60년이나 되었는데요?” “넌 60년 동안 죽어있어.” “전 40인데요.” “40년 동안 죽어있다니까?” “전 초등학교 1학년인데요.” “7살까지 죽어있다니까.” 죽어있어요. 죽어있을 때나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는 게 비로소 의미가 사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죽어있기 때문에 이 명약을 먹으라는 뜻이에요. ‘말씀을 먹어라.’ 말씀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교회 만들 생각만 하고 있어요, 참. 물론 목사가 그렇게 유도를 하지만. 그다음에 나오는 요한 1서 4장 10절이 뭐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난 너 알거든? 넌 너만 사랑하거든? 내 말 틀렸어, 안 틀렸어? 틀리지 않았지? 넌 너만 꽉 쥐고 있지? 너 자신을 소유한 소유욕을 넌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잖아. 그러니까 넌 사랑을 몰라. 네가 사랑을 막고 있어.” 이런 뜻이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아닙니다. 저희는 주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되묻겠습니까? “잠깐 나와 봐. 너 나한테 화목제물이 되겠어, 안 되겠어?” 우리는 ‘엄마야’하고 도망치기 바쁘죠. 사랑하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교회 나왔는데 주께서 “잠깐만 볼게. 너 좀 죽자, 날 위해서.” 그러면 화들짝 놀라면서 ‘다른 교회 가야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래서 복음을 듣고 좋아하고 복음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요, 그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대~단한 사람이에요. ‘대’자와 ‘단’자 사이를 길게 끌어야 돼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사도가 들었으면 “이래도 안 나가? 아, 고집 세다. 이래도 교회 계속 나올 거야, 정말? 이제 대충 정리하시지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도의 성령 받은 관점에 의하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야고보는 이 13절, 14절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주는 사랑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은 사람에게 “내가 주님을 알거든? 알려줄까, 말까? 알려줄까 말까? 알려줄까? 알려줄게. 넌 안개니라.” 이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안개 “살다, 살다 다 살고 난 뒤에 안개처럼 사라질 겁니다.” 이런 식의 안개? 그 안개가 성경에 나온 안개가 아니에요. 그건 지금 또 안개 되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기 소유욕, 자기 사랑의 연장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의 안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좀 어렵게 표현할게요. 성경에서 안개라고 하는 것은, ‘중립성’ 그리고 ‘중성성’ 이렇게 표현이 됩니다.
창세기 2장 6절에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안개라고 하는 것은 중립성, 중성성,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나중에 설명 끝나면 중립성이 뭔지 중성성이 뭔지 다 아시게 될 거예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가벼운 문제 하나 던집니다. 숯과 재의 차이점이 뭐냐? 이거 뭐 가볍기도 한데 무겁죠. 숯하고 재하고 차이점이 뭐죠?
둘 다 시커멓죠. 그러면 똑같잖아요. 둘 다 죽은 것처럼 보이죠. 똑같잖아요. 나무는 살아서 줄기가 자라고 키도 크고 꽃도 피고 하는데 숯과 재의 특징은 스톱이 되어 있어요, 스톱이, 정지가 되어 있어요. 죽은 물질로 보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숯은 불을 갖다 붙이면 야, 이게 불이 피어나네요? 그런데 재는 아무리 토치로 불을 붙여봐도 불이 안 붙어요.
죽음에도 차이가 나는가? 죽음에도 차이가 있는 거예요. 숯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나무를 산소와 차단된 채 태워요. 400도에서 700도까지 해서 태우는데 공기, 산소죠, 공기를 차단한다는 말은, 굴(숯가마)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열을 가하면 나무가 타면서 재가 되는 게 아니고 숯이 돼요. 수분이 달아나고 여러 물질이 증발되면서 남는 것은 탄소 응축체, 탄소만 응축이 되어 있어요. 나중에 그 숯으로 바비큐 해 먹습니다. 특히 바비큐는 고등어가 맛있어요. 숯불 피워서 잔잔해질 때 돼지고기 목살 바비큐 해 먹을 때, 분명히 죽었는데 죽은 숯에서 아주 강렬한 열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창세기 2장 6절에서 안개라는 말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정황을 표현하고 있어요. ‘이 세상은 다 안개였다. 안개로 촉촉하게 젖어 있다.’ 그런데 드디어 이 창세기 2장 7절에 누가 나오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흙에서 만들었으니까 결국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데 안개라는 그 점을 감안해서, 안개라는 환경이 먼저 장만되어 있고 그 위에 흙이 있는데 그 흙에서 난데없이 없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께서 생기를 집어넣을 때 산 사람이, -‘생령’이란 ‘산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하나의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그렇게 표현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했던 이 창조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이걸 어디에 담아 두느냐 하면, 인간이 범죄하고 –인간이 범죄 할 줄 알았지요- 난 뒤에 죽고, 죽고, 죽을 줄만 알았지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흙에 생기를 불어넣고, -신약으로 말하면 성령을 불어넣는 거예요. 시편 104편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살린다고 되어 있어요- 성령을 집어넣고 생기를 집어넣는 그 법칙을 어디에 따로 보관을 해놨어요.
외장하드, 컴퓨터 내부에 들어 있는 것 말고 따로 외부에 저장하는 저장 장소에 이 인간 창조의 법칙을 딱 담아두는데 그게 나중에 나타난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나타나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또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안개와 시편 137편과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까? 그 질문을 하려면 시편 137편이 뭔지 알아야 되기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시편 137편 1-4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이게 시편 137편 1-4절의 내용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포로 잡혀갔는데 포로 잡은 자들이 자기의 성과를 으스대기 위해서 “야, 우리 마르둑 신한테 여호와가 완전히 패배하기 전에 여호와에게 배웠던 찬송가 한 번 해봐. 여기 기타 있는데 기타 들고 옛날 여호와 땅에서 살았을 때 불렀던 노래 한 번 불러봐.” 하고 조롱 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포로 잡힌 거예요. 사로잡힌 이스라엘에 대해서 북한의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이 이야기한 그 ‘가긍한 처지’ 가련하고 불쌍한 것, 이렇게 조롱하듯이 ‘아유, 가엾어라. 이 불쌍한 것.’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이거하고 안개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무슨 관계가 있지요?
야고보는 지금 우리보고 안개라면서요? 우리는 안개라고 하니까 ‘살다 콱 죽으면 안개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럴 것 같으면 이 두꺼운 구약 성경이 왜 필요해요? 살다가 죽으면 안개가 되고 흙이 되는데요. 안개와 시편 137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있다가 바빌론이라는 제국에 사로잡혀서 그 땅에서 이런 조롱을 받는다. 오 여호와여. 여호와의 노래 내용대로 언제 다 이뤄주실 겁니까?’ 뭐 그런 식의 내용이, 어차피 안개가 될 건데 구약의 이 시편이, 하나님의 예언이 왜 필요하냐 그 말입니다. 이게 제 질문이에요.
사람들이 개인적인 신상, 사적인 인생 ‘아이고, 힘든 인생 살다가 죽으면 천당 가겠지.’ 하고 사적으로만 꽂혀서 자꾸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안개니라, 잘 나왔다. 맞습니다. 우리가 안개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그럴 것 같으면 구약 성경 전체의 이 두꺼운 구속사, 이 역사가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개인적인 팔자 타령하는 그것도 자기 사랑 아닙니까?
<오디세이> 영화를 보면 거기 사이렌 sailen이라는 어떤 요상한 요정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를 언제 부르느냐 하면, 어떤 선박이 그 해협을 지나갈 때마다 불러요. 그 노래는 인간이 견딜 수 없어요. 너무나 유혹적이라서. 그래서 선원이 정신없이 배를 그쪽으로 몰고 가면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요정이 흐뭇해하는 거예요. 아주 나쁘죠.
오디세이는 영웅입니다. 희대의 영웅. 오디세이는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자기만 빼고 선원들 귀에 밀랍(파라핀)을 꼭꼭 채웁니다. 파라핀을 채워서 그 소리가 선원들에게 안 들리게 해놓고 자기는 방향을 잡아야 하니까 중앙에 있는 돛대에 자신을 꽁꽁 묶어놓으라고 했어요. 영화를 봐야 이게 실감이 나는데요. “어떤 경우에도 나를 풀어주지 말라.”
드디어 세이렌의 그 해협을 지나갈 때 이것은 인간이 참을 수 없는, 인간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유혹이라서 몸부림을 쳐요. 하지만 약속대로 오디세이를 돛대에서 안 풀어줘요. 그래서 그 해햅을 무사히 지나가서 선원들이 다 살았는데 또 성질 급한 선원이 ‘이게 무슨 노래인가?’ 싶어서 들으면서 자기 힘으로 견뎌보겠다고 밀랍을 뺐다가 물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는 장면도 있어요.
자 이건 신화입니다. 신화는 ‘여러분들도 하면 할 수 있습니다’라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게 신화에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할 수 없어요. 인간은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면 바벨론에 포로 잡혔다는 말은 뭐냐?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될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가 잡혔다는 말은, 바빌론이라는 그 제국이 뿜어내는 그 유혹,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그 유혹을 너희들이 견디고 견뎌도 결국 견딜 수 없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빌론에 포로 잡히게 했던 겁니다.
오늘 야고보서 4장 13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 말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바빌론에서 추진하는 모든 경제 체제에 대해 이해 못 할 이스라엘 사람들 아무도 없었습니다. 명목상 여호와 믿는데 여호와는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해도 먹지도 않고, 오직 바빌론처럼 살자고 그들은 그 유혹에 끌려서 따라가다가, -왕부터 따라 했어요, 왕부터. 왕부터 따라 하니까 백성들 다 따라가다가- 결국 자기가 사모하는 그 제국에 포로 잡혀 왔습니다.
그래서 시편 137편에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사로잡혔다는 말을 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사로잡혔다는 말은 하나님이 들었으면 분노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로잡혔던 자를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해방 시켰잖아요. 끄집어내 줬잖아요. 그런데 시편 137편에 보니까 도로 사로잡혔어요, 세상에!
1절에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로잡혀서 이제는 울어도 소용없죠. 사로잡혔으니까. 3절에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온갖 모욕과 모독감을 다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지금부터 한 번 풀어봅시다. 모욕감을 당한다, 하나님 믿다가 된통 당해서 모욕감을 느끼며 거기서 늘 울면서 지낸다. 이게 안개입니까? 안개 아니죠. 자기가 현실을 생으로 온몸으로 느끼고 있죠. 절대로 안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4장 14절에서 ‘너희는 안개’라고 했어요. 여기서 우리는 뭐가 빠져야 되느냐 하면, 스스로 우리가 ‘나중에 죽으면 재가 되겠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죽어서 안개만 되면 되잖아’라고 하는 데 아니에요.
우리가 죽는데 두 종류가 있어요. 천국에 가기 위해 죽는 죽음의 절차가 따로 있는데 그 죽음의 절차는 십자가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은 당사자가 천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국을 만든 당사자의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그 코스, 천국을 만드신 당사자가 이 땅에서 죽는 그 죽음의 코스에 접어들어야 거기서 우리는 천국 가면서 사도 야고보처럼 “너희는 안개니라” 라는 중성적인 발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더 어렵게 됐는데 이야기가 어렵게 된 것은 뭐냐? ‘살다 힘들면 나중에 자살하든지 늙어 죽으면 그만이잖아’라는 죽음은 천국에서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요. 왜 모르느냐? 자기 사랑에 미쳐있으니까, 내 것에 미쳐있으니까, 자기 이익에 미쳐있으니까 주님의 사랑이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방법은 뭐냐?
방법은 언약이 다가가는 거예요. 언약이 다가가게 되면 우리는 ‘재’가 아니라 ‘숯’이 되는 거예요. 숯이 되기 때문에 우리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현실로 나타날 그 불이 붙을 탄소 에너지는 남는 거예요. “이 숯 같은 인간…”, 욕하는 거 아닙니다! “이 숯 같은 인간 불 한 번 붙여줄까?” 주께서 말씀으로 불을 붙여 버리면 우리 안에 탈 수 있는 생명의 에너지가 불타오르는 여지가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여지가!
누구한테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요, 특히 출애굽기 3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언약을 집어넣을 자를, 불 붙일 자를 찾기 위해 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 만날 때 떨기나무에서 만난 거예요.
떨기나무가 타는데 재가 되질 않아요. 그냥 산채로 불만 붙어 있어요. 희한해요. 살아있는데 불이 붙어 있어요. 마치 죽은 숯에서 벌건 불꽃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이겁니다. “네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일체 묻지 않겠다. 다만 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찾는다.”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죽은 것은 맞는데 ‘네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네 속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네 눈에는 안 보이는데 주님은 보여요, 살아 있는 게. 어떤 모임에서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교사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분은 경찰 이야기도 하는 분이 있고,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은 군대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성경에 군인이 나옵니다. 공직의 군인, 공직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못하잖아요. 군인이 나오는데 그 군인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천국에 합격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요즘으로 하면 중대장, 백부장이에요.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 군대 생활 어떻게 했어?”라는 것을 묻지 않아요. 묻지 않고 “이 예수님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만 찾아요.
그 백부장이 고백하기를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하니까 예수님께서 현재 ‘지옥 간다, 천국 간다’ 하는 사람들 다 쫓아내고 ‘이 믿음만이 천국의 본 자손이 될 믿음이다’라고 아주 꼭 집어서, 딱 집어서 이야기해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0-12).
군대 생활을 어떻게 하고, 공직 생활이나 교사 생활 어떻게 했는지 그런 거 안 물어요. 이 예수에 대해서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거예요. 살리고 죽이고 그것은 주님한테 달렸잖아요. 바로 그 믿음을 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네가 두 달이나 뒤 석 달 뒤에 장사 좀 해볼래?” 그것도 주님한테 달렸죠. 바로 그런 고백을 원하는 거예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간단하죠. 천국 가는 믿음이 대단히 간단하죠. 과거에 교사 생활했어요? 그거 본인 과거 아닙니다. 주님의 과거에요. 과거에 장사 좀 했습니까? 여러분의 과거 아닙니다. 주님이 장사케 하신 거예요. 장사를 했느냐, 뭘 했느냐를 묻지 않아요. 노래방을 했는지 꽃 장사를 했는지 묻지 않고, 꽃 장사를 하면서 노래방을 하면서 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이 말입니다.
이제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범죄할 줄 아시고 창조할 때의 원칙을 외장하드에 따로 보관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분리, 격리시키는 거예요. 흙과 그리고 인간과 격리를 시켜 놓은 거예요. 창세기 1장 4-7절에 보면,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여기 ‘나누사’라는 말이 나와요. 나누는 거예요.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궁창 아래와 궁창 위의 물로 나누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 나눌 의사가 없으면 아예 창조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중성이고 중립이고 구분이 되지 않는 거예요.
구분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날과 날을 구분하기 위해서 빛부터 먼저 나누었죠. 빛이 있으면 낮이고 어두우면 밤이라고 해서 벌써 나누는 거예요. 나누고, 나누고, 나누면서 나누는데 이 나누는 것이 어디까지 도착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27장 46절까지 나눠집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나 사도들은 놀라운 발언을 해요. 세상에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는 바로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미리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성경 해석이 어느 지경까지 이르러야 그게 가능하죠? 어느 지경까지라고 할 것도 없어요. 성령 받으면 다 알아요. 왜냐하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이 왔고, 성령이 옴으로서 십자가를 몰랐을 때 우리가 성경을 봤을 때의 의식과 그 간격이 벌어지는 거예요, 간격.
그 간격은 의도적이에요. 선과 악의 간격을 벌려 놓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다고 해놓고는 창세기 2장에 와서 남자와 여자의 간격을 만들어요. 남자 여자로 왜 만드느냐? 제가 수련회 때 이야기했던가요? 남자 여자 말고 왜 중성은 없는가? 인간들의 머리로서는 아직도 이걸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 인간은 중성이 없느냐? 왜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뿐인가? 왜 중성이 없는가? 세상에서는 이 복음을 비난합니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지점은 왜 없는가? 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닌 중간 지역은 왜 없는가? 중간 지역은 임시적이죠. 선악과 따먹기 전에 임시적으로 해놓은 거죠.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간 지역은 왜 없는가?
인간들이 자기를 사랑해서 윤리와 도덕으로 만들어놨어요.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간 지역은 얼추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셨는데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심으로써 복과 저주라는 대립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수련회 창세기 할 때 제가 언급을 했어요. 저주 아니면 복, 복이 아니면 저주, 이것은 지난 시간에도 했습니다. 염소 아니면 양, 양이 아니면 염소에요. 양도 아니고 염소도 아니고 임시거처, 그런 건 없어요. 임시거처가 우리한테 허용된 적이 없다니까요?
‘천국 갈까, 지옥 갈까?’ 그걸 우리한테 묻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지역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어요. ‘애굽이냐,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이냐?’ 둘중에 하나라고요. ‘바빌론이냐, 바빌론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느냐?’ 둘 중에 하나지 중간 지역은 없습니다. 안개는 그냥 중간 지역이에요, 중성적이에요.
“너희는 안개니라.” 무슨 뜻입니까? 언약이 작동하게 되면 그 중간 지역은 복과 저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함으로써 아버지와 피조 세계는 벌어졌고, 이 벌어진 간격을 메꿀 재주가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 간격을 돌파할 수가 없어요. 왜 간격을 만들어놨는가? 악마가 따라와도 따라오지 못하고 뒤돌아 가게 만들기 위해서 한 거예요. 이게 선악과 심어놓은 이유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라고 할 때 뱀이 작용했잖아요. 뱀을 왜 낙원에 집어넣어서 그런 사달을 일으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한 거예요. 마귀가 에덴동산까지 찾아오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만들어서 인간을 빼내 가도록 주께서 허락하신 것은, 뱀으로 하여금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하는 거예요. 그게 간격이에요. 간격은 뱀에 속한 인간이 아무리 성경 보고 종교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 간격을 내가 돌파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뒤에서 종교 생활하라고 부추기고 ‘너 참 착하다. 윤리 도덕적이다.’ 아무리 부추겨도 그 갭을 건너갈 수가 없어요.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갭이 있어서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 나는 여기서 건너갈 수 없고, 너는 거기서 건너올 수 없는 거예요.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친구가 나오는데 그 세친구가 아주 흥미로워요. 다니엘 세친구가 어디에 들어갔느냐 하면 불 속에 들어갔지요. 불 속에 들어갔는데 그들을 불 속에 집어넣은 그 인간은 불속에 못 들어옵니다. 들어왔다가는 다 타죽어요, 타 죽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살아 있거나 불 속에 들어가거나 항상 그들은 하나님이 언약적으로 다루시는 불이에요.
주님께서 이 죽은, 숯같이 시커먼 숯 같은 인간, -안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욕한다고 할 거예요- 숯 같은 인간에 언약으로 불을 지펴 버려요. 언약으로 불을 지피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대립구조가 나와요, 대립구조. 그 간격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오는데 그 간격은 아무도 없어요.
없는데 주님만이 그 간격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일을 십자가로부터 새로 시작해서 십자가의 생명이 들어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창세기 2장 7절, 성령을 줌으로써 흙같은 존재가 살아 있는 생명이 되게 하는 그 법칙을 예수님께서 사용해 버린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언약 덩어리에요, 복음 덩어리. 다른 말로는 숯덩어리.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했는가를 일절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지펴서 복음의 불꽃이 나오도록 했는가, 그것만 찾는 거예요, 그것만, 그것만 찾는 겁니다. “너 안개다!” 이 말은요, “너 어때?” 네가, 그 중간 간격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나왔기 때문에 네가 양쪽 강변을 다 알 것 아닙니까. 이쪽은 천국이고, 이쪽은 지옥이고.
그러니까 지옥에 있는 우리를 언약이 와서 건져내게 되면 “너는 안개니라”라는 말이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내가 사랑했다”라는 말로 이해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내 시간이 없지.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한다고? 아, 그때 그런 생각 많이 했다 정말. 그래서 내 재산 불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지금 그 이야기가 야고보서 4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5장에 가면 부자 이야기가 나와요.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약 5:1).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이미 너는 이 세상의 강변을 떠났잖아.” 그 간격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왔는데 그 새로운 피조물은 사이 존재, 사이, 영어로 between, 이쪽과 저쪽 사이를 다 볼 수 있는 안 목을 가진 존재, 두 번째 예수, 세 번째 예수, 예수님의 반복이 살아 있고 작용하는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로 주께서 언약의 백성, 성도를 언약으로 다루었다는 말이지요.
이제 다시 한번 여러분이 이해를 했는지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안개하고 시편 137편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간 대 인간으로 다룬 것이 아니고 언약 대상으로 삼은 거예요.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했지요. 이스라엘은 탈출할 때 자기들은 “살았다” 했거든요. 지금 너희들이 살았다는 것은 주님에게는 없어요. “너희 속에 내가 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거기에 살아 있어. 그 언약을 불피우겠고 현실로 만들겠다”라는 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말려들었어요. 완전히 말려들었습니다. 이 언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 그 말을 베드로전서 4장 7-8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가야, 네가 무슨 상황인지 너는 모르겠지만 우리 여기서 작별 인사하자. 너 살리고 나는 몇 초 후에 추락하는 이 비행기와 함께 죽는다. 하지만 너는 이 아저씨와 함께 그 품속에서 영생 얻어라.” 이게 사랑이라 했잖아요. 그 사랑이 오늘 본문이고 또 베드로전서 4장 8절의 이야기에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과거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것은 네 과거가 아니야. 네 인생 아니었어. 그것은 사랑이었어.” 사랑에서 사랑으로 이끄는 거예요. 사람을 죽이고 십자가에 달린 그 강도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게 뭐 ‘죄지어도 되겠네’ 그런 뜻으로 이해할 사항입니까?
숯 같은 우리에게 언약이 들어 있는 거예요. 탄소 에너지, 복음의 에너지가 담겨 있으니까 주께서 우리를 아직도 주님 떠난 이 세상에 남겨두고 계속해서 이 육신 가지고 양쪽, 무엇이 저주며 무엇이 축복인지를 양쪽 다를 보여주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게 하는 거예요. 이거 뭐 설교 듣고 복음 들어도 소용없어요. 밖에 나가면 또 ‘무슨 장사를 할까?’ 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떠났던, 우리가 떠났던 장소예요, 강변입니다. 이쪽 강변은 천국이고요. 천국의 안목을 가졌기에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요, 충분히 이해하지요! 바벨론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요. 자기 사랑에 미쳐서 살아가는 것.
그러나 우리는 현재 그 세계에 포로 된 상태, 구약에서는 울고 있지만 우리는 웃고 있지요. 포로된 채 웃고 있어요. 그들은 지옥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옥 만드는데. 갑자기 편해지지 않습니까? 공직에 있으면서 국가 시책에, 대통령 지시에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인간은 지옥을, 내가 떠난 지옥을 만들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싱긋이 웃으면서 협조하라는데 뭐 사는 게 별로 어렵지 않지요.
‘잘 먹고 잘살아라. 이 지옥 갈 인간들아!’ 이 세상은 나중에 결국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저주의 바다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흔쾌히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 참으로 큰 사랑을 주셨는데 그 사랑을 바벨론 생활한다고 다 막아버렸습니다. 남한테 기죽지 않기 위해서, 남한테 사람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 더욱더 꽉 쥐기 위해서. 그걸 사는 보람으로 여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면서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을 다 같이 말할 수 있는 주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