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520강/521강) 미움, 사랑의 매 260721
520강 음성
521강 음성
520강-YouTube강의(미움 창세기 4:5)20260721-이 근호 목사
제520강, ‘미움’. 사람은 남한테 잘해주려고 해요. 내가 잘해주면 상대방도 나한테 잘해주거든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네가 남한테 대접하라. 그러면 너와 그 사람 사이는 좋은 관계가 된다. 좋은 관계가 되면 우리 본인들의 삶은 골치가 덜 아프겠죠. 평온할 테니까. 나의 적을 해소시켰으니까. 이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니까 나는 행복이 될 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남한테 미움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요. 오늘 520강 제목이 <미움>이란 말이죠. 미움을 안 받고 싶어요. 만약에 남한테 미움을 받게 되면, 그 관계 회복하는 데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돼요. 상대방이 나한테 편하게 좋게 이야기하게 되면 굳이 용을 안 쓰고 애를 안 써도 좋은 관계 유지되니까 저쪽에서 나를 공격하거나 해코지할 수 있는 확률이 적어지겠죠. 그게 편안함이잖아요. “나는 너 만나면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것 같아.” 이런 거.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너를 만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행복을 느껴.” 신자 불신자 관계없이 다 그걸 원할 겁니다.
사람들은 주위에 친구들이 많고 친구들이 본인한테 잘해주게 되면 상당히 부럽죠. “야, 너 좋아하는 사람 굉장히 많네?” 그럼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네가 그 사람들에게 미움을 안 받고 그렇게 편안하게 잘 지내느냐?” 이렇게 질문한단 말이죠. 묻는 사람의 전제가 뭐냐 하면 ‘인간의 행복이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을 때 행복은 극으로 높아진다.’ 상식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예수님은 행복했습니까? 다른 말로 할게요. 예수님은 누구한테도 미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다 사랑받았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기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 미움 받아서 결정 났어요.
그 이유가 창세기 4장 5-6절에 나옵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가인이 뭐 때문에 화가 났어요. 왜 화가 났느냐 하면,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고 동생의 제사를 받았다. 내 제사 안 받고 동생 제사 받는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가인이 간파한 거예요. 내가 조작한, 내가 상상한 신 같으면 뭐 내가 만들었으니까, 현실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아벨 본인도 안 만들었고, 동생이 만든 신도 아니고, 내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동생도 제사 드리고 나도 제사 드리는데,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동생이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 이미 결정권이 넘어가 있어요. 넘어간 순간, 인간은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날아간 거예요. 날아가 버렸습니다. 주님의 판정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거냐, 미움받을 거냐가 결정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생의 제사를 받았습니다. 가인이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동생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렇게 이해했고, 가인 본인의 제사는 안 받았다. ‘아, 이게 미움이구나.’ “나 너하고 안 놀아. 너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하고 하나님께서 가인을 내칠 때에, 우리가 가인의 입장과 심정으로 돌아가 봅시다. 분명히 딱 깨놓고 이야기해봅시다. 가인이 화가 났겠습니까, 안 났겠습니까?
세상에서 누구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까이기 전에 내 쪽에서 까면 그만이에요. ‘그래, 잘났다. 나도 너와 상대 안 해.’ 이럴 것 같으면 여전히 내 운명의 결정권은 내가 갖고 있어요. 한두 사람 미워한다 해서 그거 뭐 신경 쓸 거 아니에요. 또 다른 사람 사귀면 되니까.
그런데 가인이 근원적인 화를 낸 것은, 자기의 운명은 내가 만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엄연히 계신 그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절당한 것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가인은 가인의 자기 인생을 계속 믿고, 자기 인생을 살피고, 자기 인생을 붙들고 살 수 있는 그 모든 취지가 한꺼번에 다 날아갔죠. 내가 나를 못 붙드는데, 하나님이 안 붙드는데 내가 붙든들 결과는 뻔하죠.
그러면 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나를 내친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인이 하나님을 안 믿은 게 아니에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니고, 철석같이 신뢰하고 믿고 제사를 드렸는데, 누가 누구를 미워했어요? 하나님이 자기 정성과 제사를 안 받았잖아요. ‘나 너 밉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가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됩니까? ‘나를 미워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이니까 존중합니다. 미워하는 것도 주님의 뜻이니까 뜻 그대로 수용해서 주님의 결정에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가인과 아벨 둘의 아버지가 아담이잖아요. 아담의 속성에서 이질적인 두 개의 대립된 성격이 나왔다는 말은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런 자’가 아담의 죄를 통해서 계속 후손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니까, 절대자니까, 창조주니까, 심판주니까 무조건 고맙습니다.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인간류가 등장했다는 것을 가인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간단해요. “나는 사랑할 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한다.”는 그 결정을 어떤 자가 감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을 누가 감사하겠어요? 하나님과 통하는 쪽에서 감사하겠죠.
지금 예수님은 사람에게 배척받았어요. 사람에게 배척받았다 하는 것은, 나도 사람 중에 포함되어 있잖아요. 우리도 예수님을 배척해야 돼요. 늘 나를 좋아하고 행복하고 내가 늘 잘 살게 되면 우리는 배척 안합니다. 왜? 나는 내 인생 내가 끝까지 쥐고 싶어서.
그런데 아벨은 어떻게 했어요? 아벨은 결정권이 하나님 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미워하든 사랑하든 그것은 순전히 일방적인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그 뜻을 존중하고 그 뜻이 나한테 도달되기를 바랍니다.” 끝.
이런 사람… 목사님, 과연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있지요.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하나님이면 다냐? 내 인생 어떻게 되는데?’ 그러한 가인의 생각이 보편적이에요. 모든 인간에게 마귀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다 깔려있습니다. 그런 자로부터 아벨 같은 사람은 미움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겁니다. 그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와 같은 노선을 유지한다는 것.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결정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한테 미움 받는 것을 너무 겁내지 마시고요. 하나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것, 주님이 흘리신 피를 아버지가 받았다는 것,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는 그 피를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나도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가뿐하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521강-YouTube강의(사랑의 매 사무엘하 7:14)20260721-이 근호 목사
제521강, ‘매’. ‘맴매’할 때 그 매. 성경을 보면 매에 대해 언급된 구절이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옵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 구절입니다.
여기에 막대기 나오고 채찍 나오죠. 뭐 잘했다고 상 주려고 막대기 들고 채찍 든 거 아니죠. 때리기 위해서, ‘너 말 잘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야?’ 때리기 위해서 든 막대기와 채찍입니다. ‘하나님의 막대기가 몇 미터입니까? 재질은 단단합니까? 나무로 만들었어요, 철로 만들었어요, 고무로 만들었어요?’ 보통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여기 막대기가 뭐냐 하면 사람 막대기에요, 사람 막대기.
‘사람 막대기가 실제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생각할 수 있는데, 일어났습니다. 일어나고 있고요. 이사야 10장 24-25절에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대상이 ‘나의 백성’이에요.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찌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했어요.
아까 읽었던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었으면 아들답게 내가 대우하겠다. 아들답게 대우한다는 말은 “아들다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가차없이 막대기와 채찍까지 동원할 수 있는 아버지다. 하나님 아버지다.” 그런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굉장히 자비롭고 어질고 뭐든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여, 우리를 때리지 마시고. 때리면 아파요. 사랑을 해주세요.” 할 때, 주님께서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네가 아는 사랑이 아니고 사전에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모든 게 사랑”이겠죠. 따라서 네가 안 맞으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들이라는 그 직함, 아들이라는 그 의미를 챙기기 위해서 아들답지 못할 시에는 사정없이 때려서 뭐만 드러내겠어요?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드러내는 거예요. 매를 때려서라도. 그러면 매를 맞는 아들은 상당히 힘들어하겠죠. 그런데 히브리서 12장 8절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아들의 원형이 뭐냐? 무엇을 가지고 아들이라고 하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아버지께 버림받고 아버지께 버림받은 상태에서 다시 아버지로부터 살림을 받는 것이 아들입니다.
아들은 어떤 절차가 있어야 되는데, 아버지께 버림받았어요. 아버지께. 아버지께 버림받고, 그리고 아버지께 되찾아짐을 당해요. 예수님한테는 그게 성립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서. 그리고 사흘 만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부활시켰어요. 맞죠?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알아서 하나님을 버려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되찾아짐을 받는데… ‘버림받는다. 되찾아줄게.’ 이것이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이미 알고 있는 관계인데, 인간들은 아예 자기에게서 하나님을 지워버려요. 하나님 없는 곳으로 내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 쉽게 말해서, ‘아버지와 나와 이제는 관계 끊읍시다. 돈만 주시면 이제는 아버지하고 빠이빠이입니다. 내 자립만 열심히 해야지.’ 자립하겠다는 인간의 인생 목적이 뭐에요? 아버지하고 빠이빠이하기 위해서, 이제는 하나님 없이 내 인생 나의 든든함으로 살아가겠다는 그러한 각오.
아주 대놓고 아버지하고 관계 끝났습니다. 말은 안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 나 안 들을란다 하는 식으로 아버지의 그 모든 영향력에서 도주하죠. 오직 내 것은 내가 알아서 내 마음에 드는 내 인생으로 굳세게 살겠다 하는 일념으로.
그런데 하나님께서 흉년을 준비해놓고 돈 다 떨어지게 했고, 그래도 아들은 버티죠.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이 꼴로 못 간다. 성공해서 가야된다.’ 성공하려고 애를 썼는데 하다하다 안될 때, 비로소 인간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거예요. 애초부터. 그냥 허세 부렸지,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하고 아버지 앞에서 잘난 체했지, 사실은 돈 떨어지고 친구 떨어지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닐 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었죠. 그렇게 만들 때, 더 이상 나의 자립심, 내 힘으로 성공하겠다는 그 포부, 그러한 기대, 목적… 아무것도 아닌 자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지, 그런 근사한 목적을 갖다 붙여서 ‘오, 나 스스로 되네?’ 이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갈 기회가 없는 자들이 하는 짓이죠.
하나님께서 탕자를 볼 때 ‘성공하면 받아줄게.’라는 그런 조건을 걸었습니까? ‘너 인간답게 살면 받아줄게.’ 그랬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그걸 요구했어요? ‘음, 제대로 하네. 그때 받아줄게.’ 이렇게 하십니까?
탕자 비유가 왜 있습니까? 세상에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잖아요.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형이 참다 참다 못해서 아버지한테 고발하죠. 형은 꼭 마귀 같아요. “저거 뭐 있다고 잔치를 베풉니까?” 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돌아올 때, 주께서는 “딱 그거지. 딱 바로 그거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아버지 쪽에서 일방적으로 너에게 퍼부어주는 모든 잔치와 가락지와 모든 혜택은 너한테 고스란히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너에게 간직되게 되고 영원토록 아버지께 고마워할 거잖아.” 바로 너와 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세계가 아니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세계가 천국이에요. 우리는 내 좋아하는 세계에 미쳐가지고 그냥 ‘뭐 아버지 하나님 믿습니다.’ 대충 다리 걸쳐놨는데, 사실은 다리 걸친 게 아니고 독립선언 한 거죠. 하루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내 인생은 어떻게 나에게 기쁜 인생이 될까?’ 그것밖에 생각 안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뭐 걸쳤다고 뭐 된 양 여깁니까? 뭐 걸쳐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잃어버려도 너무나 마땅한 하나님의 깊이 있는 조치였습니다. 자, 매라 하는 것은 사랑의 매인 것을 이제 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