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41강(사기캐릭터), 복음이냐교회냐 11강(사람 없는 곳) 260720
보이스피싱이후 동영상
대전-신명기(41강) 18:19(사기캐릭터) 260720-이근호 목사
자, 시작합시다. 어쨌든 아시겠지요? 새로운 감사를 주시려고,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온 모든 것에 대해서, 그동안 한 번도 보이스피싱 안 걸린 것에 대해서 또다시 다 주님의 조치였다는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힘들겠지만…. 또 하나는 ‘이렇게 더러운 세상에서 빨리 데려가 주시옵소서.’ 그것도 아울러 보너스로 챙겨주시는 거죠(대전강의, ‘보이스피싱이후’ 영상참조).
신명기 18장 11절에 보면,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진언자, 신접한 자, 박수, 초혼자’ 그것이 나와 있죠. 생각해 보면 그것이 등장하는 게 이상하죠.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상한 게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중 하나가 이겁니다.
논리로 한번 적어볼게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신다. 시편 121편 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너를 지키신다’라고 되어 있죠. 첫 번째 논리입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지키신다’라고 하면, ‘신접한 자, 박수무당, 다른 신, 사술, 우상’ 이걸 굳이 우리에게 언급할 이유가 없잖아요. 알아서 지켜주잖아요, 알아서. ‘보이스피싱을 주의하라’,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주의하라’가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지켜주시면 안 됩니까? 그 이유를 설명해 드려야죠, 제가. 우리가 바로 신접한 자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주께서 신접한 자, 박수무당 이런 걸 언급하는 것은, ‘이런 자는 하나님께서 배제한다’라는 그런 종류잖아요, 그런 종류 아닙니까. 그것에서 start, 그것에서 출발하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출발하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고, 그 정도로?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지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저희는 그런 거 싫어합니다. 점치는 거, 무당, 그리고 또 다른 선지자, 이방 신….”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건져내신 분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홍해 건너고 난 뒤에 찬양까지 하면서 전체가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은 용사시고 이번 전쟁에서의 승자는, 모든 공로는 주의 이름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지금 찬양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상, 이런 거는 이제는 우리는 bye~ bye~ bye~’, 빠이빠이 한 거예요. Good bye! 한 거예요.
했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성경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거쳐서 약속의 땅에 갔을 때 그 이스라엘, 그렇게 다짐했던 이스라엘 어떻게 됐습니까? 완전히 온 천지가 우상이었죠. 열왕기상, 열왕기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 이런 사람들. 옛날에 주께서 신명기 때 광야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라는 것은 한번 지나가면 끝나는 게 아니고 다시 그때 그러한 주의, 그러한 당부, 그것이 ‘우리가 지켰으니까 그냥 넘어갑시다’가 아니라, 지나간 일기장이 아니고, 지금의 이 현재 상황에서 그때 준 말씀이 우리한테 딱 합당하다는 사실을 발견케 하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10-11절, 이걸 제가 말씀드립니다. 베드로전서 이곳 밑에 한 칸 비워두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께 해당됩니다. 비어 있는 이 아래 칸은 우리 자신들,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선지자는 껍데기입니다. 구약에 그렇게 많은 선지자가 나타나는데, 그 안에 누가 미리 들어있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들어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예수님의 고난받음과 고난 후에 영광 받음을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미리 다 발언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첫 번째, 베드로전서 1장 10절, 예수님께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예수님에 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언급하셨다는 뜻이죠? 그 뜻이 맞잖아요, 그죠? 그러면 아래 빈칸, 우리 인간들 칸을 봅시다. 예수님은 그렇다 칩시다. 우리 인간은요, 인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율법에서 지적하는 게, 태어난 우리에게 그대로 어떻게 돼요? 다 상기용으로, 반복용으로,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인간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줬겠어요, 안 알려줬겠어요? 어떻습니까? 알려줬겠죠. 누구를 대비해서? 누구와 대비되면서? 예수님과 대비되면서.
그러니까 “목사님, 왜 이런 이야기 합니까?” 물으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 하셨거든요. “내가 죽는 것은 너희와 함께 죽는 것이고, 내가 사는 것은 너희와 함께 사는 것이다. 오케이?” 그때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는 건방지게 ‘오케이’ 하면 안 되고 “아멘” 해야 돼요. “아멘!”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구원’에 관해서…. 자, 구원이 뭐냐? 예수님이 하신 일에 여기 ‘인간’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인간, 인간의 속성, 옛날부터 우리는 마귀의 지시대로 움직였다는 그 선지자의 내용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배재한 내용이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일까요? 그게 아니면 우리 인간은 이해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이, 예수님의 하실 일에 포함이 돼 있을까요, 안 되어 있을까요?
포함이 돼 있겠죠. 포함이 된 그 내용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심이라는 그 취지를 위해서 우리 안에, ‘이렇게 허접스러운 인간을 내가 건진다.’ 할 때 그때 쓰는 용어가 뭐냐 하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 어때요?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구원은 누구 몫, 누가 알아서 다 했다? 주님이 알아서 다 했어요, 주님이 알아서.
그래서 주님이 알아서 다 해놓고 그다음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해 주죠. 마치 장차 올 예수님이, 자기 앞서 온 선지자에게 통보를 하는 거예요.
“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네 이야기 아닌 것을 네가 알고 있지?”
“예.”
“그럼, 누구 이야기지?”
“오실 메시아 이야기입니다.”
“오케이!”
오실 그 메시아가 앞당겨서 자기의 영을, 자기 오기 수천 년 전의 선지자에게 미리 당겼듯이, 이제는 예수님이 다 이룬 상태에서 옛날 선지자에게 주신 그 영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주께서 통보하는 영, 전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영을 우리에게 줘버리면 우리는 ‘구원받아야지’가 아니라 뭐가 됩니까? ‘구원되었구나. 끝났네, 끝났어.’ 끝났으니까 신접한 자, 박수, 초혼자, 이런 자, 그런 자에게 말려든 자가 바로 우리,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었어요.
‘우리가 그딴 거 의지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습니다’를 그걸 고백하는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 “나 안 죽였어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이거는 변명입니다. 안 돼요! 예수님을 죽였던 그자와 우리, 후에 태어날 우리들과 동류(同類)가 돼요. 같은 ‘류’가 되는 겁니다, 같은 ‘류’가.
그러면 예수님을 죽였던 그 유대인들은 무엇을 사모하는가? 예루살렘을 유지하고, 율법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고, 그들은 또 오실 메시아를 고대했죠,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했던 그들, 마태복음 23장 봅시다. 15절과 16절을 보고 37절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평가는 예수님 평가지, 예수님 외의 다른 사람 평가입니까? 제자들의 평가입니까? 아니죠. 제자들은 이런 평가를 바리새인에게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들이 지금 남 평가할 입장 아니거든요. ‘예수님 따라다니니까 구원받는다’는 입장이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이런 이야기하는지 납득이 안 돼요.
‘그냥 우리만 데려가세요. 이쪽저쪽 간섭하지 말고. 주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선택했다면서요. 그럼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른 종류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주님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제자들하고 버림받은 그들 바리새인하고 다른 종류라고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했겠어요? 똑같아요, 똑같아요. 그런데 제자들은 눈에 보이니까, 우리는 예수님하고 한패 먹었으니까 우리는 이제는 됐다는 거예요. 하이고, 이것 참, 같잖아서, 말도 안 되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계속해서 하는 그 종교단체, ‘예루살렘 있고, 여호와 믿고 율법 믿고, 세 가지 요소로 종교를 만들자.’ 그래서 만든 종교가 유대인 종교예요. 여호와 믿고, 예루살렘 성전 있고, 그리고 율법이 있고 이 세 가지. 성전이 있다는 말은 ‘이게 우리의 상상이 아니고 실제로 성전이 있고, 전통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성전이 있으니, 누가 뭐래도 우리 믿음이 이건 완벽하다. 이 종교, 우리의 유대교라고 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건 하나님께서 인정해 줬다.’ 철석같이 믿었죠.
그래서 그들은 뭐냐 하면, 그들은 본격적으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선교죠, 교인 하나 얻기 위하여 다니면서 뒷자금 대주고 후원금 대주면서,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한 명을 드디어 유대교로 전도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5절 끝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더욱더 뭐 한다? ‘지옥 자식 만든다.’
그리고 제가 추가해서 말씀드리면, 이것이 그 당시 유대인에게만 국한되는 행위다, 아니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동류, 같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성질내는 게 똑같아요. 16절, “화 있을찐저 소경 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계속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종교를 지켜야 하나님 뜻에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열심 내서, 그들이 집중해서 종교를 얼마나 치밀하고 세밀하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해 왔는가를 예수님께서 쭈욱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때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었어요. ‘맨날 남의 이야기 말고 우리 이야기만 합시다’ 그랬죠.
마태복음 23장 37절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여기 호칭을 뭐라 합니까? 예루살렘아, 호칭이 이렇게 돼 있죠. 우리가 이 점도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예루살렘은 지역 이름이에요, 지역. 대구, 대전…, 지역 이름이에요. 지역 이름, 공간의 어느 특정 지역입니다. 그런데 뒤에 “~야,” 또는 “~아”라고 불렀어요. 그럼 예루살렘은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집단적인, 곧 인물들의 집단이 돼요, 집단.
인격체, 인격체처럼 그렇게 말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뭐냐? 어렵게 말씀드립니다. 인물들이 모이면, 너와 나 모이면 이게 뭐로 다루어지느냐 하면 사물로, 물체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사물이라는 말로 용어를 굳이 쓰는 이유가, (지금 조시면 안 됩니다, 지금 상당히 어려운 거 하는데, 안 됩니다) 인간은 대상을 보면서, 언어(이름)를 붙여서 ‘사물화시킨다’ 이 말입니다, 사물화시킨다.
그러면 언어로 인하여 그 사물을 인간이 죽여버리는 거예요. 인간이 그 사물을 죽여야 유일하게 안 죽는 나는 안 죽는 것으로 남아 있고 사물은, 죽은 사물은 내 말에 의해서, 이름 지음에 의해서 죽은 그 사물은 내 소유로 ‘꼼짝 마라’가 되는 겁니다. 이 사물에 누가 걸려들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걸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이 뭐가 되느냐 하면 내 소유가 되고, 내가 다루면 얼마든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 되는 겁니다. 이게 언어, 이름은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거예요. 하나님이 스스로 이름을 가지고 인간에게 찾아왔어요. 이 점, 인간들이 이런 짓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는가? 악마가 생각하지 못한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겁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악마는 선/악이죠. 선 1, 악 1, 합치면 몇 개 됩니까? 2가 됩니다. 제가 아까 미리 와서 식사하는 분에게 언급했는데, 어제 오후 설교 제목이 <세 명의 아기>죠. 1+1, 1(알곡), 1(가라지), 알곡/가라지를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것은 미지의 제 3의 존재죠. 어떤 인간도 ‘알곡’으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못 해요. 어떤 인간도 ‘가라지’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못 해요.
왜냐하면 태어날 때 ‘알곡이다/가라지다’가 되어버리면 내가 내 인생을 이만큼 건사하기 위해서 애썼던 나의 노동과 나의 애씀이 다 날아가요. ‘너는 알곡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듣는 알곡이 기분 나빠요. 왜? 내가 나를 위하여 노동한 게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에. 파쇄되기 때문에. 보이스피싱 왔을 때, 그 부고장 누르려다가 마지막에 안 눌렀을 때 그 모든 공로와 영광은 누가 받습니까?
내가 받죠. 역시 내 인생 이만큼이라도 건지는 것은 내가 너무나 지혜롭게 잘 처신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1과 1 그 사이에서 막 반대편을 봐요. 반대편을 보면서 저것만 아니면 ‘나’가 되는 거예요. 저쪽만 아니면 나는 그럴듯한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라 하는 것은 마태복음 14장 24-29절, 그 본문은 심기를 알곡으로 심었고, 심기를 가라지로 심은 거예요. ‘입 다물어라.’ 이 말이죠.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씨앗 자체가, -인간은 안 달라져요- 이미 확정된 씨앗은 확정된 결과로 반드시, 필히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 1과 1, 선/악은 악마가 인간을 자기 수하에 장악하는 필살기였습니다. 이것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알곡/가라지, 제3의 요소, 그걸 정하는 나, 그것이 ‘세 명의 아기’ 아닙니까?
‘아기로 태어났다.’ 하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어른으로 상대하는 것은 초월자예요. 영적, 곧 뱀과 관련하는 것은 아기 아담이 아닙니다. 아기 이브가 아니고, 어른 아담이에요. 창조할 때는 어른으로 태어났어요. 그 뒤에 아기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디에 종속된다? 이미 어른이 된, –베려버린 어른이지만- 어쨌든 간에 ‘아담과 하와’라는 어른에 의해서 종속된 겁니다.
아기로 태어나기 전부터 아담 보고 “나는 선악과 빼고 만드세요.” 이렇게 따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요. 그 어른의 연속적인 아기로 태어난 거예요. 아기의 운명은 이미 조상에 의해서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되어 버렸어요. 부모 보고 “왜 부모님은 재벌이 아니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합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그거는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처음부터 인간은 태어날 때 아기로 태어나는 겁니다. 악마는 이미 그 선조 아담을 버려놨잖아요. 아담과 하와를 아주 버려놨죠. 악마는 걱정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위인이 태어나봤자 그 아버지 밖으로 못 벗어나니까. 그게 뭐냐? 봉쇄된 집합, 통조림, 그게 통조림이에요.
통조림 안에 흔들리는 소리 나죠? 용각산은 소리가 안 나요. 그 나머지는 소리가 나요.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이란 전쟁…, 소리가 나는데, 백날 나봤자 그 통조림, 그 철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악마는 뭐냐? 악마는 편안~해요.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악마는 걱정 없는데, 하나님께서 악마가 상상도 못 한 일을 저질러 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하여 희생하셨다.’ 이 아이디어, 이거는 마귀가 죽었다 깨나도 생각 못 한 겁니다. 왜? 마귀는 ‘선한 것은 선한 것이고, 이미 범죄 하여 죄지은 것은 죄지은 것이다.’ 악마 입장에서 ‘인간, 네 인생은 조졌어, 끝났어! 네 잘못이 아니야.’
조상이 잘못한 것이 그 조상 밑에 있는…, 명란 알 있잖아요. 그 안에 바글바글 있지요. 명란 알같이 이미 그 안에 박혀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운명에서, 이 저주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다는 점, 그 점에서 악마는 아주 고소해합니다. 자기는 이미 베린 몸이거든요. “예수여, 우리를 아주 작살내러 오셨습니까?” 하지요.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악마는 자기가 멸망될 걸 이미 알아요. ‘나만 죽을 수 없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의 이런 아이디어, “내가 있잖아! 내가 희생하면 되잖아!”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희생자인데…, 아니 인공지능을 만든 개발자가 그 인공지능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어요? 인공지능 감동할걸? “주여, 믿습니다.” 이럴까요, 인공지능이? 그런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만드신 분은 만들어진 것을 자기 뜻대로 조정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같은 피조물인 사탄이 이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옳고 그른 거,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악한 것은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끝! 선하다/악하다, 1+1=2, 끝! 끝났어요. 제3의 요소가 나올 건덕지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해서, 뭘 희생해서? 선과 악의 심판 기능을 희생해서, 그 심판을 본인이 본인에게 심판을 가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새로운 잉여분, 그 잉여의 값을 가지고 제공하는 거예요. 자, 정리합시다.
심판은 반드시 값을 치뤄야 한다, 심판은! 내가 준 하늘의 모든 햇빛과 공기…, 공짜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혹은 별이 뜨고 하는 것은 다 토대가 어디냐 하면,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십자가에서. 유대인들은 뭐로 봅니까? 하나님이 사랑해서 창조했다고 보죠, 창세기 1장에.
신약은 뭐라고 합니까? 그 모든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창조가 나왔다. 신약의 복음이, 신약의 복음이 그래요. 그걸 좀 자세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새로운 시공간의 해석을 가지고, 짊어지고 이 땅에 나타났다.’ 그래서 안양강의에서 그런 얘기 했죠. 설명이 우리를 치료한다고요, 설명이. 설명이 우리를 치료한다.
보이스피싱, 나 힘들었다. 이거는 내가 아는 설명이죠. 새로운 설명은 뭐냐? 지난날, 보이스피싱 안 걸린 것도 다 누구의 값없는 은혜였다? 주님의 은혜였다. 이게 위로가 되는지 아닌지는 나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새로운 설명이 “아, 자존심 상해! 내 생돈 나갔다. 내 노동, 내 땀 이거 누가 보상할 거야!!” 고함지르는 나, 이걸 흰 눈처럼 덮어버리죠.
“내 본전 한 번 찾아봐? 불평해? 내가 준 본전 한번 찾아봐? 코로나 걸릴 때 걸렸어, 안 걸렸어?” 이거부터 시작해서 추적, “계좌 추적 다 들어간다? 발걸음 셀 때,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 나오고 안 나오고, 그거 누가 다 한 줄 알아?”
그거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의 값없음을 위해서 주께서 값을 따지신다.’ 이거예요, 십자가의 값없음을 위해서. 유대인들에게 “저 종교 만들었잖아.” 그걸 왜 언급합니까?
‘앞으로 내가 너를 위해서, 하나님이 너를 위해 희생을 치를 건데 희생의 그 값을 너희들이 성령을 통해서 받고 난 후에, 그때 유대인들에게 공격했던 그 공격, 그 공격을 왜 너희에게는 안 하는지’를 한번 보라고요. 똑같은 인간인데, 인간은 안 변하거든요, 똑같은 인간인데.
그러니까 바리새인에게 했던 그 공격은, 사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한 공격이라고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후에 되돌아서서 이걸 알았기 때문에 마태복음 23장에 쓰인 거예요. ‘우리가 철도 없이 이것이 다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태복음 24장 봅시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제자들에게 성전이 보이죠. 눈이 있으니까 보이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있음으로써 아직도 이 우주가 존속된다는 신학을 갖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할 때 언젠가는 멸망하는데 그 전에 할 일이 뭐냐? ‘성전에서 제사하는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그다음에 약속대로 우리 여호와를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킨다.’ 이 신학이었던 겁니다, 이 신학. 특히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잖아요.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어요. 사두개인들하고 달라요.
그 부활의 세계, 죽고 난 뒤의 세계까지 아울러서 그들의 중심은 뭐냐? 열왕기상 8장에 근거해서 ‘성전을 사모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없어지고 다윗의 백성으로서 영원하다.’ 열왕기상 8장을 기억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해석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어요. 유대인의 한계가 곧 우리의 한계지요.
‘성경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했기 때문에, 예정했기 때문에 무조건 살린다.’ 그들의 신학은 곧 인간이, 아담의 죄가 갖고 있던 이성의 한계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 내놓습니다. 그다음에 마태복음 24장 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인자가 임할 때 깨닫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성령 받은 제자들은, 그들은 깨달았을 게 아니냐?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하고 틀리네요. 인자가 올 때까지는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는데 미리 성령을 받은 제자들, 특히 마태복음이니까 마태도 마찬가지지요, 마태가 이 복음을 쓸 때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썼지 않았겠습니까?
심지어 요한복음이나 이런데 보면 예수님께서 ‘46년 지은 이 성전이 무너진다.’ 할 때 스스로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할 때까지 성전이 예수님 몸인 것을 알지 못했다’라는 말을 요한복음 2장에서 썼잖아요.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그렇게 썼다는 말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2장을 쓸 때 본인은 이제 알았다는 말입니까, 몰랐다는 말입니까? 이제는, 이제는 알았다는 말이지요, 이제는 알았다. 이제는 알았으면,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이게 틀린 말이 아닌가?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36절 보면,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주님께서 이 열두제자 말고 사도바울에게도 성령을 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이유가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이것도 두껍기는 하지만 사실은 신약성경의 많은 대목이 사도바울의 편지로 되어 있지요.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이 대목을, –주의 뜻이지요-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사도바울의 핵심은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사건에 품어진, 포함이 된 성령 받은 성도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 골로새서 3장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땅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은 이미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땅으로 말하자면, 그 범위를 땅으로 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었다.
그러면 우리는 대번에 하는 소리가 “안 죽었는데?” 이렇게 하잖아요. “안 죽었는데?” 네 관점 말고, ‘너 지금 몸 있고 눈 있지? 네 관점 말고 그 관점을 하늘에서 보는 관점과 땅에서 보는 관점으로 나눠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땅에 속한 자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미 죽었다. 이런 이야기가 사도바울의 편지에 굉장히 많아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자꾸 과거시제를 사용해요. 이미 끝났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늘의 관점이 살아 있으니까, “너 성령 받았어, 안 받았어? 받았지. 받았으면 살아 있는 하늘의 관점 가지고 너를 객관화 시키고 너를 대상화 시켜서 너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상을 바라보면 좋겠다. 왜? 너는 계시를 전해야 할 선지자기 때문에. 성도 자체가 선지자기 때문에.”
‘지금 내가 구원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남겨준 이 몸을 통해서 뭘 뿜어낼 것인가?’ 여기에 신경 쓰라는 거예요. 그러면 신약 때 선지자는 누굽니까?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할 때 선지자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접한 자, 박수, 초혼자, 무당들, 우리도 싫어하는 그런 사람들이 구약의 환경이고 신약의 환경에서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 이런 자들은 누굴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 안 받은 자 전부 다를 말하지요, 전부 다!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는 자는 전부 다가 여호와나 예수님 부를 때 뭡니까? 무당 찾듯이 부를 수밖에 없지요. ‘주여, 저 앞으로의 신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거 물을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날에 혼인을 시켜야 딸이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왜? 살아 있으니까.
성경에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고 결정을 했는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 결정을 못 받아들이지요. 못 받아들이니까 그냥 ‘예수 믿고 교회 다녀서 나중에 죽으면 구원받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 이것은 무슨 세계입니까? 살아 있는 내가 꿈꾸는 환상이에요, 환상. 사물이잖아요. ‘사물+그 무엇’, 이게 뭐냐 하면, 환상이에요.
사물은 환상을 꿈으로 빚어내고 있다는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사물은 물체니까 안 줘요. 그런데 사물이 뿜어낸 환상을 향하여 주께서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공격하지요. ‘사물+환상’, 이것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해당돼요, 해당 됩니다. 여러분, 광야라는 곳은 머물 곳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뭐냐? 광야에서 뭘 하겠어요? ‘HOPE’ 영화제목인데 이게 뭡니까? ‘호포항’에서 일어난 일인데 나홍진 감독의 영화지요. 이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도저히 이 영화평을 못 하게 만들면서 허접한, 전혀 영웅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성질이나 부리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대사라고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욕설밖에 안 나와요. 대사라고 별로 칠 것도 없이 욕만 나와요.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 가지고 장난을 쳐버려요. 장난을 친다는 말은 뒤에 따로 숨겨놓은 것이 있다는 거예요. 숨겨놓은 게 그 영화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영화 대사에 박아놨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걸 딱 박아놨어요.
이 ‘희망’, 숨어 있는 것이 나타남, 이것을 영화의 마지막에 보여주는데, 외계인의 모선이 구름 속에 숨어 있다가 그게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면서 어떤 깊은 산골, 호포항 그 마을 첩첩산중 근처, 고속도로 있는 근처 산중에서 여기 모선이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요.
그게 제가 보기에는 요한계시록 12장 9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이게 영화 주제에요. 이게 모선이요, 땅에서 활동하는 그 외계인들이 하늘 외계에서 와서 잠시 머무는 그 모선이 처박혀서, 외계인이 말합니다.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네.”
돌아갈 데가 없다는 거예요. 나홍진 감독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외계인한테 포로 잡혀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외계인하고 싸우는데 싸움이 안 돼요. 인간이 막 작살나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오기라는 것이 있어요. 가오(かお)가 있어요. 가오, 추잡스런 그 가오. 영화 보셨어요? 안 보셨지요? 가오가 있거든요. 그게 있어가지고 외계인이 치니까 “네가 뭔데 우리 인간을 쳐?”
동네 예비군 8명이 있는데 그 8명이 전부 다 60이 넘었어요. 60년대 경찰서 파출소장은 걱정이 돼서, -거기 나오는 주인공이 황정민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도망이나 치고 그저 허둥지둥해요. 변변치 않은 인물들, 영웅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건드리면 인간도 가만있지 않고 분노를 일으킨다.’ 그렇게 되거든요. 양쪽 다 분노와 분노의 격돌이에요. 반발과 반발의 격돌.
나홍진 감독에 의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다 뭐다? ‘이 세상은 다 마귀 새끼들이고 마귀한테 정신이 다 사로잡힌 인간들이다, 끝!’ 그거예요. ‘너 영화 평하려면 해봐라. 죽어도 평 못해.’ 숨어 있는 것, 잘될 것이라고 희망 걸어놨지요. 그것도 속임수예요. 추잡한 인간들밖에 없는데 무슨 희망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희망을 걸지 맙시다. 그러니까 믿지 맙시다. 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에 여기 인간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홍진 감독은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어떤 비평가는 시비를 거는 거예요. “종교가 많은데 왜 자꾸 성경 이야기를 하느냐?” 인터뷰에서 그래요. “여호와가 대빵이거든. 신중의 최고 신이거든.” ‘외계인인 악마를 거론해서, 신나게 추격하는 재미를 보면서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복음을 스며들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도를 감독이 갖고 있습니다. 상당히 용감한 시도에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명기 18장 광야에서, 약속의 땅이라는 희망을 얻었어요. 약속의 땅이라는 희망을 얻으면서 신명기 18:10-11에서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고 하고, 특히 18장 1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아, “내가 선지자를 보내는데, ‘선지자 너나 나나 똑같은 주제에 네가 뭐 안다고?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들을게’라는 이 정도로는 안 되고, 선지자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말할 때 그 말을 안 듣는다면…” 어떻게 된다?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하는 것은 ‘희망이 있나? 그러면 희망대로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가 과연 희망을 가질 입장, 그런 주제가 되느냐?’라는 것을 ‘내가 준 선지자나 계명을 통해서 너희를 점검해야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심사(審査)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 우리를 구원했대. 너무 좋아요. 진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우리를 약속의 땅에 넣어줄 거죠??”
서울말, 표준말로 “넣어줄 거죠?” 주께서 “심사(審査) 해보고!” “무슨 심사(審査)요? 그러면 그냥은 안 넣어준다는 말이지요?” “내가 선지자를 보낼 텐데 선지자의 말을 듣든지, 아니라면 너희는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겁니다. 신명기 18장 22절을 봅시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뭐까지 알뜰살뜰하게 챙기느냐 하면,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작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까 본 시편 121편처럼 좀 지켜주고 그런 자는 안 나타나게 하면 되는데 꼭 이렇게 혼란케 하셔요. ‘악한 선지자가 나타났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하면 압니까?’ 하고 신약의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어요.
연구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저주받는 자는 무조건 뭐가 돼요? 선지자가 아니죠. 그런데 저주받는 것 중에도 특히 나무에 달려 죽어 저주받은 자는 백 프로 뭐가 아니다? 요거, 요즘 젊은 애들 하는 용어로 ‘사기캐’다, ‘사기캐릭터’의 준말이죠. 이거 가짜다, 나무에 달려서 저주받은 자는.
그러면 저주받았다, 안 받았다는 것은 뭐로 평가하는가? 나무에 달렸는데, 죽을 뻔했는데 하늘의 천사가 찾아와서 살려줬다면 그것은 진짜 선지자죠. 그런데 죽는다, 죽는다, 확인 사살 해보니 진짜 죽었어요. 그러면 뭡니까? 나무에 달려서, 그다음에 진짜 죽었으니까 ‘우리의 판단은 옳았다.’ 우리의 판단이 옳았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가 이뤄놓은 유대교는 진짜 하나님께서 땅, 땅, 땅! 진짜 이것은 구원받은 코스 맞다’라고 인정해 준 바가 되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중대한 결심과 결정적 사건에 맞닥뜨리게 된 거예요. 예수를 죽였는데 과연 예수님 말대로 살아나는지, 아니면 예수님 죽기 직전에 천사가 내려오는지 지켜보자는 거예요. 아무도 안 왔어요. 지켜본 그중에 누가 지켜본 줄 알아요? 제자들도 지켜봤어요. 없어요. 시마이, “끝났다. 다 고기나 잡으러 가자”(요 21:3). 다 흩어졌습니다.
원래 인간으로 돌아갔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하나의 해프닝이었습니다. 하나의 해프닝이었어요. 끝났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던 두 제자도 엠마오로 내려갔어요. 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말을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인 줄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인간 쪽에서 납득이 되어서 말씀대로 알고 있는 모든 해석과 설명은 철저하게 카바, 배제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십자가를 진 거예요.
왜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배제합니까?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마귀가 있기 때문에, 마귀의 생각은 섞여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이성적 판단은 뒤에 마귀의 손아귀에서 마귀가 허락한 이성이에요. 마귀가 허락한 진리 체제에요. 선악 체제, 제3의 요소를 생각 못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이것도 선악이니까.
어떤 집사님이 가훈을 정했어요. 제가 적어볼게요. “빨리 알아서 빨리빨리 망하자.” 이게 뭡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왜 보이스피싱을 백번 당해도 싼지…, 보이스피싱에 대해서 몰랐는데 이제 새롭게 알았지요. 아, ‘하나님은 왜 내 것 건드립니까?’ 살짝 기분 나쁘지요. ‘살짝 하나님께 순간적으로 오만할 뻔했습니다.’
주께서 “이제 너 자신을 알았느냐?” 이제 뭐가 남았어요? ‘망했다’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 가지고 장난 좀 쳤다.” 이미 죽어버린, 그리고 생명을 얻어버린 그 죽은 자를 주께서 이렇게 활용해 주시니, 그점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십분 쉽시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1강) 갈1:4(사람 없는 곳) 20260720 (강의: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복음이냐 교회냐』 129페이지에 제목은 <7강. 종말이란>. ‘종말’하면 서글픈 생각이 들죠. 서글픈 생각이 들면서 인간들이 보유하고 있는,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여분,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아는 것 말고 더 여분의 시간이 종말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아는 시간 말고, ‘저기 어디 낭떠러지가 있는 것 같아.’ 뭐 이런 거요. ‘우리가 아는 지평선 말고 지평선 너머에 또 다른 여분이 있는데 그쪽이 종말이 아니겠는가?’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있는 시간+공간/ 사람이 없는 시간+공간. 사람들은 생각할 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예 없는 걸로 간주해요. 사람이 없으니까 아예 없는 걸로 간주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은 그냥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회체 안에서 사람이라는 것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회. 가정도 사회잖아요. 그리고 학교도 사회고 친구들 사회, 사회를 전제로 해서 이게 사람 살만한 곳이라는 전제가 있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 간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죽음이라고 간주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14장에 문둥병 걸린 사람은 어디 가서 살죠? 진 밖에 나가 살죠. 진 밖에 나가 살면 어떻게 돼요? 그것은 사회가 형성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체제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진 밖에서 목숨부지하고 있더라도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내가 산다.’는 말의 진짜 표현은 ‘내가 속한 사회가 건실하다. 잘 유지된다. 건실하고 좋은 사회다.’ 이러면 덩달아 우리는 거기에 포함되어서 ‘내가 제대로 살아있다’가 성립돼요, 인간은. 그러니까 그 사회가 졸지에 달라지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겠죠.
그래서 종교라 하는 것은 그동안 정들었던 사회를 떠나서 사람 살지 않는 곳에 갈 때, 대우를 해줘서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끼리 모인 곳에 잘 합류하라고 옛날부터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모든 민족마다 공통적으로 조상 제사가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같이 살았던 사람에 대한 배려.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저 하늘의 별이 되어서 편안히 쉬세요, 어머니.’ 이런 것처럼.
상당히 비(非)실제적이고 비유적으로, 시적으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실상은 그게 아니지만 우리 살아있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상의 일부를 할애해서 ‘저 별나라, 하늘나라는 좋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방송에서 보면 보통 “어머님 일찍 돌아가셔서 섭섭하겠습니다. 자, 지금 하늘에서 어머니가 지켜보신다 치고 어머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시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내가 있지 않은 공간은 사실 나쁜 공간이고 없어져야 될 공간이고 별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 공간으로 간주해요. 그 중심에 누가 있어요? 내가 있어요. 내가. 그래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던 거예요.
사람은, 사람이 없는 공간보다도 사람이 있는 공간 안에서 이러한 종교 같은 것을 의미 있게 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의 말씀을 제가 말씀드리고 여러분께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신약에서 두 군데 찾아봅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자, 여기서 ‘믿음, 믿는 세계, 믿음의 세계’는 무엇과 반대가 되느냐?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익히 아는 그 세계는 아니다. 그러면 믿음은? 믿음이 진리고 진짜라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진짜 진리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겠지요. 진리의 반대말이 거짓이잖아요. 모든 사람이 익히 동의하는 것은 스스로 거짓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이 돼요.
이런 내용은 무슨 뜻인가? “빠져나올 거야, 말 거야?” 이 이야기를 묻는 겁니다. 거짓된 세계인데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잖아요. 그 믿음은 언어를 통해서 믿을만한 의미만 소통되고 믿지 못하는 것은 탈락이에요. 뭐 귀신이 있다, 이런 것은 다 탈락이에요. 수능 시험에 ‘귀신은 키가 몇 cm 됩니까?’ 이런 것은 시험 안 쳐요. ‘아인슈타인이 발명한 것은?’ 이런 건 시험에 나오는데, ‘귀신이 주장한 내용을 쓰세요.’ 이런 건 안 나온다고요.
왜? 인간세계에서 믿을만한 것은 인간세계 자체적으로 사회에서 이미 확정 시켜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용납되고 이런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라고 확정을 시켜놓고, ‘거기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이런 것까지도 이 세상은 인정 안 해요. 수능시험을 쳐요. 시험 치는 내용 자체가 ‘앞으로 이 인간이 고등학교 졸업해서 이 사회에 같이 흡수 통합하고 협력이 가능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수능시험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계속 남을 거냐, 아니면 우리 사회에서 적대적인 세력이 될 것이냐’를 수능시험으로 판가름하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는 말씀을 전제로 할 때, 복음이라는 게 뭐냐? 더 나아간다면, 모든 사람들이 독려하고 격려하고 ‘힘내라 힘! 파이팅, 파이팅! 잘해라, 잘해라’ 하는 것은 믿음을 돕는 거예요, 믿음을 방해하는 거예요? 믿음을 방해하는 거죠, 격려해주는 것은. 심지어 배려해주고 동정하는 것.
“우리 인간들끼리 합의한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은 일체 필요 없음을 너 동의하냐?”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이럴 때 복음, 다시 말하면 기쁜 소식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여러분 한번 만들어보세요.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이런 인간들에게 성경책을 한 권씩 다 줬습니다. 다 주고 난 뒤에, 그 성경책을 통해서 통합된 의견을 한번 끄집어내보자. 이런 실험을 이미 AI를 통해서 했어요. 전에도 얘기했듯이 불경도 성경도 AI가 다 통독하게 했어요. 보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은 뭐냐?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거예요.
AI가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만 알았을까요, 아니면 성경책을 직접 다 봤을까요? AI가 성경책을 직접 다 보고 불경책 직접 다 봤죠. 내놓는 결론은, 사랑이다. 그게 사랑이에요? 뭡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부합됩니까? 안되죠. 인간들이 내린 결론은 사랑이기 때문에.
AI가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을 봤죠?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그 AI도 알겠죠? 아는데 사랑이라는 말을 왜 끄집어냈는가? 알면서도 왜 끄집어냈을까요? 그것은 AI한테 요구를 한 그들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AI한테 질문을 한 자가 모든 사람들이에요. 모든 자에서 시작한 것이 모든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초반에 다시 한번 어려운 것 합니다. 들어보면 논리가 참 간단해요. 로마서 11장 36절을 제가 써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 돌아간다.” 주(主)→ 주(主)→ 주(主). 이거 아시죠? 그런데 문제는 이 주가 인간들에게 죽은 자라는 사실이에요.
인간들이 주님을 죽임으로써 산 자가 누가 돼요? 산 자는 인간들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사회는 살아있죠. 사회는 살아있으니까 뭐가 살아있어요? 그동안 인간이 만들었던 법률, 제도, 관습 이 모든 것도 다 살아있겠죠. 인간의 제도와 법률과 관습이 살아있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로마서 이런 데 보면 인간의 혈육적 관계가 살아있는 거예요.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니까요. 가정이 모여서 이웃이 되고 이웃이 모여서 사회가 되니까. 가장 기본 unit, 단위가 가정이잖아요. 가정은 혈육에서 나온 겁니다.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부모가 살아있는 애 낳지, 죽은 부모가 살아있는 애를 낳을 수 있습니까? 부모가 없는데 어떻게 애를 낳아요? 부모가 살아계셔서 애를 낳잖아요.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는데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 살아있는 인간이 죽였던 주님으로부터 모든 게 나와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께로 나온다면 이 코스, 이 노선은 철저하게 인간사회에서 알지 못하는 숨겨진 노선이 되겠죠. 그렇죠?
인간은 인간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데 인간 노선에서 주님의 노선으로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어떻게 건너가죠? 건너갈 수가 없죠. 죽여 버렸으니까요! 왜 죽였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님을 죽였잖아요. 그땐 주님인 줄 모르고, 예수님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오는 것도 몰라요.
왜 살아있는 사회를 공격하느냐는 말이죠. 이 공동체를 왜 공격하냔 말이에요. 이 공동체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됐는데. 왜 한 개인이 나서서 “너희들 마귀 자식이다.”… 그거는 살려두면 안되죠. 죽여야 되죠. 원수를 죽여야 본인이 살아있음이 더욱 더 확증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내부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이거잖아요. 어쨌든 살아있는 것을 더욱 더 살게 만들자. 튼튼하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오래오래 길게 살고. 길게 살고 싶어요?
성경에서는, 모든 일은 죽은 자로부터해서 죽은 자가 이끌어낸 현실인데요.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끼리 협력해서 현실을 만들었다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하죠. 문제는 인간 노선에서 주의 노선으로 건너갈 다리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 무슨 단어가 나오냐? ‘종말’이 나오는 거예요, 종말. 이 종말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옛날에 <아들과 딸> 드라마에 나오는 종말이, 김치공장 사업을 한다는 종말이가 떠올라요. 왜 이름이 ‘종말’인가? 딸 그만 낳으라고, 마지막이라고, 아주 극단적으로 네가 만약 딸이면 세상 끝낸다는 식으로 이름을 ‘종말’이라고 지었잖아요.
종말을 주의 노선에 집어넣어요. 주님 보기에 주님을 대적하는 이런 세계에 대해서 주께서는 방치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합당한 것은 종말입니다. 김치 공장하는 종말이 아니고. 그냥 모든 것을 싸그리 다 끝내버립니다.
끝낼 때에, 아까 공간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있는 공간과 사람이 없는 공간이죠. 그럼 종말을 현실화시킬 때 거기는 찾는 이가 없게 만들어요. 인간세계에서 문둥병 걸리면 문둥병자를 사람 없는 곳으로 보낼 때, 같은 사회에 있는 인간들은 문둥병 걸린 사람을 뭐로 보느냐? ‘저건 개인적으로 종말이야.’ 왜? 인간사회에서 격리되어서 사니까 그건 종말이에요.
그럼 주님께서는 7월 10일 속죄일에 염소 두 마리 잡게 해요.(레 16장) 한 마리는 잡고 한 마리는 어떻게 하느냐? 아사셀 염소라 해서 광야에 보냅니다. 뭐를 지고? 죄를 지고 광야에 보내죠. 죄. 훠이훠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
그 종말에 누가 기다리는가? 죄를 졌던 그 염소를 처리하는, 사람은 없지만 염소를 처리해서 죽여버려서 죄를 없애는 심판하는 하나님, 자비하는 하나님 말고 심판하는 하나님이 광야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처리하면 그 염소를 보낸 우리들은 이제 1년 동안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대속죄일에 아사셀 염소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왔던 겁니다.
죄 짊어지고 광야에 나간다? 광야 같은 경우에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7절)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그건 왕궁에 있지. 그런데 왜 사람 없는 곳에 네가 굳이 시선을 돌리느냐?” 여기서, 이미 죽은 장소에서 죽음의 소리, 심판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죽음의 소리, 심판의 소리. 아무도 없는 데서, 죽은 장소에서 이게 들려오죠. 이 소리를 들으면 된다는 거예요.
흔히 사는 데 바빠서 ‘어떻게 사는가?’ 같은 인간들의 소리만 쭉 듣다가 죽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어린 사무엘에게 엘리 제사장의 목소리로, 목소리 분석하면 분명히 엘리 제사장 목소리에요, “사무엘아” 불렀던 것과 같아요. 어린 사무엘을 불렀단 말이죠. 어린 사무엘이니까, 철이 없으니까, 목소리가 그 목소리니까요, 제사장한테 가서 “저를 불렀죠?” 무려 네 번 불렀어요. “불렀죠?” “안 불렀다.”
이것은 어린 사무엘을 깨우치는 게 아니고,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을 깨우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에 소리해야 되는데 엘리 제사장을 비껴서 사무엘에게 그 소리가 들렸다는 말은, 나중에 사무엘이 커서 어느 집안, 어느 혈육, 어떤 사회공동체를 제거하느냐? 엘리 계통을 저주로써 제거해버립니다. 제거하는데, 제거하는 방법은? 블레셋 나라를 통해서 제거해버리죠. 여호와가 없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블레셋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제거해버려요.
지금 제가 종말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사기 9장 한번 봅시다. 사사기 9장 23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양쪽 다 나빠요, 양쪽 다. 악을 처단하는데 누구를 동원한다? 양발치기로 양쪽 다 악신이 임해서 자기들끼리 붙어가지고 둘 다 없애게 만드는 거예요. 어느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우리 사회가 잘 먹고 잘사느냐?’ 그것만이 약속이 아니고, 악한 신이 등장했을 때 악한 신을 주께서 활용해주신다는 겁니다. 악한 신은 저리 가,가 아니라 악한 신을 불러서 악한 신에 든 자를 악한 신이 스스로 파괴시키고 무너지도록 하는 조치를 내리시는 거예요.
이 아비멜렉, 세겜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악한 사람이 되었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제가 말씀드리면, 기드온이 워낙 유명하니까 아버지의 명예와 명성, 권력을 인수인계 받아가지고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으면서 ‘나 왕 될래. 왜? 왕족이니까.’ 기드온은 왕 될 마음이 없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왕인데 불쑥 여기 왕이 등장한 거예요. 왕이 등장해서 동생 70명을 다 죽였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그리운 것은 ‘사람 없이 하나님만 만나면 이것으로 족합니다.’가 아니라, ‘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같이 뭉쳐서 다니는 인간사회공동체, 전통 있고 역사 있는 사회공동체가 사람 사는 데에 딱입니다.’ 이걸 인간들이 원하고 있어요.
같은 사람한테 많이 치일 건데…. 치이더라도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는 일이 있더라도 외로운 것보다는 낫다는 거예요. 쓸쓸한 것보다는 낫다. 나쁜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남편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우는 거예요. 그 우는 내용을 들어보면 이래요. “아이고, 이 나쁜 놈아, 나쁜 놈아.” 그렇게 나쁠 것 같으면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될 건데, 왜 나를 놔두고 네가 그냥 가냐는 거예요. 네가 나빠야 누가 천사가 돼요? 내가 천사임이 계속 확인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딸 시집보낼 때 친정엄마가 빈 말을 하죠. “네가 없으니 내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면 딸이 또 그래요. 효도 캐릭터 한다고 “엄마 그동안 고생 많이 했지? 엄마, 내가 효도할게.” 효도한다 해놓고 맨날 애 맡기고는 지는 쉬고 친정엄마는 부엌에서 일하게 만들고… 지나간 것은~ 끝났어요. 지나간 말로 끝났어요. 어울려야 되고, 같이 친근해야 되고. 그게 행복이고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은 인간사회 모습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종말이라는 것은 일체 사람이 없고 그 사람을 심판하는 하나님만 있는 그 상태가 종말이에요. 뭐 세상 끝 낭떠러지, 그런 게 아니고. 없는 게 아니고. 사람 빼고 갑시다. 사람 없이 정작 우리가 누구를 상대해야 되고 누구의 소리를 들어야 되는가? 그 광야에서 죽음의 소리 담당을 누가 했느냐 하면 세례 요한이 담당했어요. 세례 요한이 남긴 광야의 소리를 누가 인수인계하는가? 예수님께서 인수인계해요. 예수님께서 인수인계하면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서 오느냐?” 이것은 마태복음 3장에서 말하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쪽에서 오느냐? 동쪽이냐, 서쪽이냐, 북쪽이냐, 남쪽이냐? 광야에서 오죠. 왜? 광야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이 없는 곳인데 거기 가면 사람은 죽는 곳인데 그 광야에서 인간 사는 동네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이 세례 요한의 계시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을 가지고 오신다. 성령 받은 사람은 알곡, 불 받은 사람은 쭉정이. 내 뒤에 이런 분이 오신다.” 세례 요한이 정확하게 이야기했죠.
그런데 문제는 정확히 이야기한 그 분이 어떤 현상을 보면서 실제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께서 정확히 성령과 불로서 오는 것을 자기가 목격하고 싶은데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거예요. 성령과 불로써 심판한다는 이 분.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있어 메시아는 뭐냐? 심판하는 하나님이에요. 심판하는 하나님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심판이라 하는 것은… 성령이 와야 알곡이 되는데 어떤 자에게 성령을 주는가? 나름 착해야 성령이 온다는 거예요, 착해야. 이게 구약의 여파에요. 가진 자는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군인들은 자기 월급으로 충족하고, 인간이 할 도리를 다 하는 것. 특히 인간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물세례를 받는데, 이 물세례의 기능이 뭐냐? ‘나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표시를 하는 회개의 세례에요. 회개를 해야 주께서 장차 “오, 회개하고 평소에 착했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이 말이지? 그럼 성령 줄게.” 이런 절차를 밟는다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아는 메시아는 그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착하고 자시고 관계없이 성령이 이방인에게 어떻게 옵니까? 그냥 오죠. 순서가 어떻게 돼요? 성령부터 먼저 오고,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돼요? ‘내가 받을 만한 존재가 못되는구나.’가 하나님을 흡족케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일 처음에 본 것처럼 인간의 공동체, 사회공동체, 인간이 주고받는 언어의 의미 안에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없습니다.
자, 그러면 중간에 뭔가 과정 하나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을 그냥 인수인계하니까 뭔가 빠졌어요. 물세례 받고 성령세례 받아야 되는데, 그럼 물세례 안 받으면 성령세례 안 오냐? 이런 문제 때문에. 그리고 계속 착한 일을 안 하면 안 되느냐? 착한 일의 끝은 어디입니까? 무한이죠. 무한.
여기서 약간 어려운 것 들어갑니다.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내가 있다.’ 그다음 문제, ‘어떻게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사는데?’ 물으면 세 번째가 나옵니다. 이건 광주강의 때 했는데요. 개인(個人)과 가산(可算), 계산. 산(算), 헤아린다, 셈한다. 무엇을 셈하는데? 착한 것은 카운트해서 불러들이고 악한 것은 카운트해서 제거하죠.
하루 일과를 정리할 때 ‘오늘은 착한 일 몇 가지? 세 가지. 나쁜 일은 몇 가지? 두 가지. 휴우, 3 빼기 2는 그래도 남는 장사.’ 카운트를 하는 거예요, 카운트를. 교회 늦게 왔다. 그러면 천 원 할 거를 천 원 한 장 더 보태서 이천 원 하죠. 내가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계산하는 거예요.
그럼 세례 요한처럼 산다는 말은, 현재 지금까지 내가 착한 일한 것과 앞으로 얼마나 더 착한 일해야 되는가? 지금 착한 일이냐, 나쁜 일이냐를 계속 계산하고 있겠죠. 계산하는 존재. 셈하는 존재. 이걸 ‘유한(有限)’이라 해요, 유한. 한계가 있는 존재. 유한이에요. 지금 제가 수학하고 있는 거예요. 유한은 무엇을 지향한다? 무엇을 바라본다? 무한을 지향한다.
지향할 때 여기서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왜? 카운트가 되니까. 1,2,3,4,…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백칠십두 마리 하고 잤잖아요. 그 다음날 백칠십세 마리,… 카운트가 되면서 어디에 접근해요? 무한으로 접근하는 것, 이거 마귀가 시킨 거예요, 마귀가. 이게 아주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지난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처음에 그랬죠. “주님, 앞으로 잘할게요.”라고 했을 때 주께서의 답변은 뭡니까? “누구냐, 너?” 주님은 시간을 삭제해버려요. ‘앞으로’, 뭡니까? 여분이 남아있죠, 앞으로. ‘종말에는’ 주의할게요, 종말. 인간이 생각하는 종말은 뭡니까? 앞으로 남아있는 빈 시간을 이야기하죠. 아직까지 도달하지 않은 빈 시간이 종말이죠.
여기 교재 129페이지에 [다니엘 12장 13절을 읽어보면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구약적 표현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 앞으로 종말 때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종말 때가 되어도 소용없는 게, 종말 때에 진입을 하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종말 아닐 때 내가 나를 건사하고 지켜왔던 그 카운트하던 습성이 종말 때도 가동될까요, 안 될까요? 되죠. 주여, 종말을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대표적인 것이, ‘도적같이 온다는데 그럼 깨어 있다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잠시 눈 부쳐도 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서 지혜로운 여자가 등을 준비했죠. 등 준비했고요, 거기에 기름 만땅이었잖아요. 그게 시간이 없어진 거예요. 시간이 없어졌죠. 종말은 있는 시간 끝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있는 걸 없는 해석과 설명으로 심판하는 거예요! 덮쳐오는 거예요.
저주받은 문둥병자를 광야에 보낼 때 하나님의 자비로 심판받을 자에게 자비가 덮치면 분명히 문둥병으로 광야에서 홀로 죽어야 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다 나았어요. 이게 하나님의 자비라. 자비가 있기 때문에 다시 공동체에 합류할 때는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나았다고 희생, 자비에 대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 14장, 15장에 쭉 나와요.
주님께서 자비로 십자가에서 대속했다는 말은 뭡니까? 종말이 우리를 덮쳤다는 말이에요. 뭐로? 내가 대신 지불했다는 걸로. 하나님은 누구다? 심판주다. 심판주에게 심판이 끝난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심판될까봐 벌벌 떨지 말고. 심판이 끝났어요. 심판이 끝났는데 끝나고 난 뒤에 심판의 합격통지서가 나한테 날아왔다면, 날아온 이것은 뭡니까? 내 시간에 주님의 심판이 끝난 이후에 종말의 시간이 나에게 덮친 순간이 되겠죠.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
그 복음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1장을 봅시다. 잠깰 겸 다 같이 읽어봅시다. 1장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맨 마지막 단어 뭡니까? “아멘.”
‘아멘’은 어제 낮 설교에서 주님의 절차라 했죠. 주님의 노선. 끝난 노선. 다 완성하신 노선, 아멘. 그 노선에 우리가 놓여있을 때만 아멘이라고 영광과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어요. 끝났네요.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주님의 노선에 있다는 이것이 늘 새록새록 끝났음을 확인할 뿐이죠. 끝났음을 확인할 뿐이에요.
여기에 ‘세대’라는 단어가 나와요. 세대는 모든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압축하게 되면 세대가 돼요. 어제 오후설교에서 후딱 이야기하고 후딱 끝난 문장이 하나 있어요. ‘패턴 뒤에 패턴’, 기억납니까? 하도 빨리 지나가서. 기억 안 나죠. 녹취 보면 나올 거예요. 패턴 뒤에 패턴.
세상에 얼룩무늬, 패턴들이 있잖아요. 패턴을 찾습니다. 인간들은 찾고 있는데, 패턴 뒤에 패턴은 뭐냐? 마지막 최종 패턴, 패턴 뒤에 패턴이라는 말은 확정된 패턴이거든요. 고정불변의 패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카운트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성도는 착한 일, 안 착한 일 선악체계를 카운트할 필요가 없고 뭐만 찾으면 되느냐? 확정된 패턴, 숨어있는 확정된 패턴을 내 인생을 통해서 얼룩덜룩한 무늬를 찾는 거예요.
물 위에 기름이 뜨면 기름은 고정적이지 않죠. 번지는 기름 무늬가 거의 1초도 안돼서 늘상 변하잖아요. ‘나는 이거다. 나는 이런 인간이다.’ 거기에 기름을 부어버리면, 그러니까 하늘의 패턴을 부어버리면 ‘나는 이렇다’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냥 성경대로 하면 패턴 뒤의 패턴 입장에서 ‘나는 그냥 죄인 중에 괴수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럼 ‘죄인 중에 괴수다’ 그것만 반복하면 됩니까? 일상생활을 살아야 될 게 아닙니까. 살게 되면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처럼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살아있어서 벌이시는 패턴이 나오게 하려 하심이라.’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바람 같은 성령을 통해서 우겨쌈으로 성령을 뒤집어쓰면 우리는 하나의 얇은 비닐막 같은 패턴이 어른거리는 스크린처럼 그렇게 쓰여지는 거예요. 어디로 튈지 나도 몰라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어디로 튀든 그 책임이 나한텐 없어요.
영화 상영할 때 영사기에서 스크린 화면에 쏘잖아요. 그러면 화면에 이미지들이 어른거리면서 나타나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 보면서 너무 성질났어. 세상에, 불쌍한 여자를 막 때리고 쫓아내고 남편이라는 작자가 그런 짓했어요. 그러니까 성질 난 어떤 사람이 칼 들고 스크린을 찢어버린 거예요. 이 바보 같은 짓을 누가 했느냐? 가룟 유다가 했어요. 그게 자살 아닙니까. 얼룩덜룩한 그림자일 뿐인데.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 있어요. 둘이 고등학교 동창인데 하나는 대기업에 취직했어요. 하나는 대기업 취업자리가 너무 어려워서 중소기업을 갔는데, 그 대기업에서 보너스로 8억을 받았어요. 대기업에서 연봉 5천 받고 나는 중소기업에서 3천 받았다 이러면 친구를 죽일 마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뭐 SK에서 삼성에서 데모 비슷한 거 하다가 8억을 받았다니까 3천 받는 게 화딱지가 확 올라오는 거예요.
이것은 뭘 몰라서 그러는 것인가?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여기 인간이 있는데, 위에 태양이 있죠. 태양은 불변이죠. 태양이 그림자를 비춰요. 그림자를 비추면 아침 10시, 오후 12시, 오후 1시 그림자가 다 다르겠죠. 주님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주님 자신의 패턴, 그림자를 비춰버리면, 어떤 사람은 대기업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중소기업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시집갈 수도 있고 안 갈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있더란 말이죠.
같은 성령 받은 성도라면 ‘너는 키 큰 패턴이구나. 나는 키 작은 패턴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될 터인데, ‘너는 8억 보너스 받고, 나는 연봉 3천 받고.’ 그렇게 생각하면 될 터인데, ‘나 너하고 말 안 해. 너 만나면 왠지 짜증이 나.’ 그런데 그 대기업간 여자 친구가 대기업 SK가니까 남편은 또 의사를 만났네?
자기는? 가오가 있지. 가오 있어가지고, 안해. 결혼 안해. <나는 솔로> 세 번 나갔는데 다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끝내버렸어요. 가오가 있으니까. 남자 6~7명 나와가지고 처음에는 희망이 확 올라왔죠. 일곱 사람 중에 하나는 마음에 들겠지. 처음에는 그 중에 네 명이 마음에 들어, 첫 날에는. 두 번째 날 미팅 끝나고 난 뒤에는 두 명 남아. 그런데 다른 여자 참석자가 그걸 또 낚아챘어. 한 명은 해도 안 되지만, 처음에 부린 가오가 있어서 마지막 날에 이야기합니다. “선택하겠습니까?”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또 다시 온 솔로가 있어요. 안 된 사람 모아서 또 특집 방송하는 게 있어요. 그걸 또 넷플릭스에서 틀어줘요.
성령 받았다는 말은, 우리는 그냥 사용당하는 거예요. 키가 크니 뭐 결혼을 하니 안하니 남편이 누구니 연봉이 얼마니. 그냥 우리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거든요. 이걸 다른 고상한 말로 ‘우리는 다 유한한 존재다.’ 이 말입니다. 유한한 존재에요. 유한한 존재에게 종말의 영이 와버리면 분명히 나타난 것은 유한한 그림자인데 우리의 본 패턴은 무한에 속해요. 구원받은 자가 되는 거예요.
구원받았다는 근거를 대라. 갈라디아서 1장 4절. 시간이 얼마 흐르든 관계없어요. 수천 년이 흘러도 이미 통째를 하나의 세대로 간주해서 이 세대 앞에 뭐가 붙어요. 어떤 세대다? 악한 세대다. 악한 세대라는 것이 인간이 분석해서 악한 세대가 안 나타나요. 악한 세대는 어떤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최종 패턴 되신 확정된 예수님을 누가 죽였어요? 아까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체, 인간의 혈육공동체가 죽였어요. 왜? 의미가 안 통한다는 것 때문에.
인간 속에서는 믿음이 안 나와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은 없습니다. 그들이 죽였어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답변할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매달려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누가 귀한 분이고 누가 소중한 거예요? 지지난 낮 설교에 소중한 것, 소중하지 않은 것 이야기했잖아요. 누가 소중한 거예요? 주님이 소중하죠. 그러면 우리는 안 소중하죠.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드라빔이 강렬한지 주님을 어떤 식으로 길들였냐 하면 “나 삐칠 테니까 주님이 잡으려면 잡아봐라-!” 이런 식이라고요, 우리의 모든 일상이. 잡으려면 잡아봐라.
말씀이 있다면 내빼기 바빠요, 말씀 없는 곳으로. 그런데 억지로 말씀을 못 피하게 되면 못 피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포획’이라고 해요, 포획. 포획당하면 우리가 주님 품에서 도망치려는 속셈을 교묘하게 숨기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상 이야기해버려요, 예의상.
그래서 어제 낮에 액자 하나 만들라 했죠? ‘주님,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게 도주하는 거예요. 도주하는 것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이니까 덮쳐서 낚아채는 방법으로 끄집어내십니다. 그것조차도 희생이에요.
그게 누가복음 15장에 나와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내시면서 주께서 어떻게 표현하시는 줄 알아요? 저가 회개했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돼요? 주님께서 포획해놓고 그것을 “네가 회개했다.”고 해요. 회개.
아…. 그러니까 이미 용서받아놓고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죠. 회개하는 것도, 심지어 믿는 것도 다 주님의 홀로 하신 일이죠. 그러면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에 종말을 집어넣으면, 이미 너는 사랑한 자로 사랑을 들고 우리를 포획하러 오시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을 들고.
“여기에 네가 딱이야. 너는 여기서 딱이야. 이 말씀이 너한테는 딱이야.”하면서 찾아와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맞습니다.” 사랑으로 낙점을 찍어버려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을 사랑의 열매로, 결과로 낙점 찍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도망치면서도 도망치지 못하는 주의 말썽꾸러기인데, 그 ‘말썽꾸러기’를 약간 바꿔서 ‘말씀꾸러기’. 말장난이 좀 심하지만, 주님의 말씀꾸러기. 특징은 뭡니까? 도망치기. 수련회 오라고 해도 오지도 않고. 하여튼 인간들끼리 행복을 논하고 자기 가족끼리 놀러가는 것에 아주 최적화된 우리, 이 말썽꾸러기를, 하나님이 대신 희생하셔서 말씀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의 자랑거리로 삼으시는 이 은혜-.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부지런하신 하나님. 그러나 세상적인 거기에 습성화되어있고 무장되어있고 우리 인간들끼리 노는 것이 더 즐거운 우리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여기에 이미 우리를 죽여놓고 살아있는 우리를 가지고 죽어있는 우리를 위해서 이미 값을 다 치렀다는 소식과 더불어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니 항상 이 은혜를 늘 생각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20260720 보이스피싱 이후(예비 강의)-이 근호 목사
이제 제가 말씀드릴게요. 주님의 스케줄은 뭐냐 하면, 그림으로 설명하면 제일 쉽습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아는 세계가 이만큼(면적A)이에요. 주께서 스케줄을 실행하면 A를 넓혀버려요.
그런데 그동안 내가 면적A만큼 안 것이 무엇이 작동한 결과였나 하면, 이것은 나한테 이익되는 것, 이것은 나한테 불리한 것을 집사님이 그동안 조정해왔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순수하게 나한테 손해 안 되는 범위, 이것은 내 것!’이라고 딱 소유됐거든요. 그러니까 남이 보이스피싱 당하든 말든 난 몰라. 이것만 안전빵이면 돼요. 내 것만 아무 문제없으면 난 행복해요.
주님의 스케줄이 지금 이 지옥 안에서 나의 행복을 위한 천국, 또는 드라빔-내가 하나님 잘 믿고 나 혼자 행복하면 오케이-을 어떻게 하느냐?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스케줄, 언약이죠, 언약은 내가 조치한 이 조치의 장벽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려요. 허물어버려요. 그러면 면적A 쪽에서 ‘들어오지 마. 이건 내 거야.’하는 그 내 것이 소용없이 되도록 외부의 침투를 받으면서 ‘아, 내가 이 세상에 지옥 속에 살고 있구나.’
다시 말해서 결론은 뭐냐?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 이제는 없기. 다 주님의 관리 하에 주님께 쓰여지라고 나한테 허용한 거예요. 방금 보이스피싱 하나 들어왔죠? 내일 되면 열두 개 들어옵니다. 이걸 전체적으로 ‘우발성’이라 하는 겁니다.
내 것은 ‘필연성’이에요. 어제 오후설교에 나왔죠, 필연성. ‘내 것은 내가 안심할 수 있어. 왜? 이건 내 세상이니까. 나는 이 안에서 죽을 때까지 행복할래.’라는 자기만의 우상성이죠. 이 필연성이 우발성으로 인하여 해체되어야 되죠. 오후설교 때 이야기했어요, 구름 떠오르는 이야기. 해체되어야 돼요.
아, 내 게 없구나. 보이스피싱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 접속되도록 조치를 했구나. 나는 그 가운데서 화들짝 놀라면서 보이스피싱 당할 때 그 순간의 심정은… 이건 말 안 해도 알아요.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이럴 것 같으면 태어나지 말게 하지, 왜 태어나게 해서 민증 바꾸는 수고를 이 더운데, 땡볕에 그런 수고를 왜 하게 하십니까! 진짜 하나님 정말 저한테 이러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
그 순간 뭐가 날아갔어요? 범사에 감사가 한순간에 다 날아가버렸죠. 내 안에 있을 때나 감사, 감사하다가 보이스피싱 한방에 다 날아가죠.
그래서 확대한 범위 내에서 성경을 다시 보고 주님의 스케줄을 다시 대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내가 지켰다.’가 아니라, ‘나는 내 것 하나도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자다.’ 그래서 결론은, 나는 개코도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불평, 불만만 나올 뿐이지. 내가 인생에서 한 짓거리는, 어제 낮 설교에서 했듯이 평생 열심히 사는데 문제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야, 보통 문제 아니죠? 그렇다면 시작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