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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연결 시편 71:20 260713설교시편

20260713a 부산강의 : [시편]87(71:20)-연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71편, 1절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그렇게 돼 있지요. 주님께 피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내가 수치가 없어졌다. 부끄러움이 없어졌다. 이걸 신약시대의 표현대로 한다면 로마서 1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렇게 돼 있지요.

이 구약적 표현, 시편 71편의 표현은 내가, 여기 ‘나’가 있어요. 구약적 표현으로 나는 수치덩어리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존재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구약의 시편 71편은 뭐냐 하면 주께, 그다음에 피하니,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나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강의 초반이니까 어려운 것 후딱 해버려야 되지요.

수치 안에서 수치 없는, 부끄러움이 없는 내가 새롭게 창조된다. 내가 수치를 안고 있으면 수치 놔두고 나만 빠지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수치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어요. 수치에서 내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수치가 없어지면 나도 같이 없어져요. 내 자체가 수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제는 안 부끄러울래, 이런 건 없어요. 그냥 부끄러움의 그 본질과 정체를 알고 거기에 함몰돼야 돼요.

이 수치스럽다는 이것을 사람들은 가끔은 부끄러울 때가 있지요.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늘 부끄러운 건 아니에요. 이렇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이건 너무나 세상적인 해석입니다. 우리는 수치덩어리라고 제가 표현했잖아요. 수치덩어리는 우리가 수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가끔 수치스럽고 다른 데는 자랑스럽다, 이런 해석은 이미 성경이 시작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수치스럽기 위해서는 나를 없애고 거기다 육체, 또는 육신으로 가라치우면 이게 해석이 돼요. 나의 육신은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부끄러운 모습으로 함몰, 무너져 내리지요. 이것이 전도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전도서 1장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했는데 전도서 12장에 보면 우리 인간을 표현할 때 그야말로 수치덩어리가 그대로 나와요.

전도서 12장에 이게 청년의 때가 지나고 노년의 때가 되었습니다. 그럼 물어봅니다. 청년의 때를 쏙 빼서 그게 납니까, 노년의 때를 쏙 그게 납니까? 노년의 때죠. 흐르니까. 흘러가니까. 시간은 우리의 본 모습을 놓치지 않습니다. 중요할 땐 좀 적으세요. 시간은 우리가 꼬깃꼬깃 감추었던 나의 수치덩어리를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나를 포장을 하고 억지로 감춰요.

관습의 옷에 우리 자신을 안 들키기 위해서 감췄는데 시간이 손을 풀지요. “하하하하 안 부끄러워? 손 좀 볼까?” 해서 써놓은 게 전도서 12장이에요. 중력에 의해서 우리의 신체가 지진이 일어날 때 무너뜨리지요. 베네수엘라 지진 일어날 때 7층, 8층 아파트가 무너지지요. 와르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 무너집니다. 그 무너진 그 용어를 제가 이렇게 중요한 용어가 때문에 크게 쓰겠어요. ‘사물’이에요.

사물은 뭐예요? 사물이란 표현을 한 이유가 뭐냐? 물체죠. 물체가 돼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걸 저는 사물로 표현하고 싶어요. 왜 사물로 표현하느냐 하면 사물에 두 종류가 있어서 그래요. 첫째는, 말 없는 사물.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은 말이 없어요. 도자기, 에어컨 말이 없잖아요.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물이 있어요.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결국은 사물의 덩어리, 무너진 아파트처럼 함몰된.

제가 중력에 의해서 무너진다 했지요. 성경에서는 시간에 의해서 무너져요. 시간에 의해서 무너지면 입, 코, 눈, 귀, 가슴, 엉덩이고 전부 다 없어요. 구분이 없어요. 다 무너지니까. 먼지만 풀썩 일어나니까 사물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 육체가 사물이 되어서 무너지게 되면 그동안 평생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버티던 나가 어떻게 돼요? 애당초 나라는 것이 비현실적이다,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제 밝혀집니다. 나라는 환상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물과 더불어 나타나는 아우라, 또는 달무리. 없는데 억지 부려서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게 바로 나였다.

사실은 인간에게는 나라 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한데 있다는 것은 뭐만 있어요? 육체와 육신뿐이지요. 그러면 육체와 육신 자체가 수치가 성립 안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 보세요. 해와 달과 별이 수치를 느낍니까? 들풀과 참새가 수치를 느낄까요? 참새가 옷 안 입었다고 부끄러움 타는 이런 참새 봤어요? 나도 옷 한 벌 해 입을까, 이런 것 봤습니까? 없지요. 강아지도 안 그래요. 옷 입혀달라고 그런 것 없어요. 강아지는 옷 벗는 게 나아요. 더운데 옷 입혀서 힘들어요.

사물이 사물다워야 되는데 그 사물이 뭘 하느냐 하면 말을 하는 거예요.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말을 한다는. 말하는 사물, 이게 뭐냐 하면 주체,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자아, 또는 나가 되는 거예요. 결국은 무너져서 한줌의 재가 될 뿐인데 왜 그리 말이 많은지…. 그 말은 실체가 없어요. 그냥 아우라에서 나온 거예요. 자아라는 아우라에서 나온 거라는.

그러니까 아우라가 나오니까 인간이 자기 둘러친 거예요, 아우리가. 주체가 나의 육체를 둘러치니까 그때부터는 안의 신체는 어떻게 돼요? 시간에 따라서 무너져가면서도 자아는 안 그런 척, 대단히 귀티 나는 교양스러운 척 그걸 뭐로 때웁니까? 말발로 다 때우는 거예요. 기도발로 채우고 말발로 다 하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합니까, 저는 어떻게 합니까?’ 저가 없는데 계속 자기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걱정하든 말든 주님께서는 중력과 시간에 의해서 차분하게 무너뜨리는 작업에 쉼이 없고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요. 나 멋있지,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저렇게 해도 그 3초 내에 이미 늙었어요. 가리고 가려도 수치를 가릴 수가 없어요. 부끄러움을. 그러니까 원래 육신은 함몰된 게 안 부끄러운데 누가 부끄럽습니까? 주체가, 허상인 아우라, 둘레, 또는 테두리, 육신을 둘러싸고 귀신처럼 자꾸 유령처럼 둘러싸고 있는 나, 이것이 바로 수치를 가중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흙을 흙이라 하지 않고 뭔가 버틴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주체, 주체가 뭘 한다 했습니까? 말을 함으로써 이게 내 말이 돼요. 나라는 게 있고 거기서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나를 하나님께서 육신을 차분하게 그냥 허물게 하면서 이 나, 이게 어디서 나왔지? 우리는 규명하지 않아요. 주님은 이게 출처가 수상하다고 조사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 조사에 들어가요.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8장인가 거기 보면, 주께서 먼저 이야기하시는 대목이 나오는 데요. 이걸 일반화시키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청년이 있었잖아요. 그때 누가복음에 보면(눅8:26~39) 달리 표현되는데 이런 표현이 나와요. 주께서 우리보고 하시는 말이 있어요. 주님이 주체가 있기 때문에 말할 자격이 있지요. 우리는 말할 자격도 없으면서 다들 말을 해요.

그때 주께서 우리에게 말하시는 유일한 말이 뭐냐? “너, 누구냐?” 무시무시한 말씀이에요. “저 이근호인데요.” “이근호 말고 진짜 네 이름 대.” 그럼 뭐라 합니까? 답변은, 난 군대입니다, 군대. 나는 귀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과 상대 안 해요.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상대해요? 뱀의 후손과 악마와 상대하죠.

이미 인간은 악마가 쥐고 있기 때문에 자아가 발생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의식되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의 인간은 나라는 걸 의식할 필요조차 없던 거예요. 그저 주는 대로 살면 그만이에요. 해와 달과 들풀과 참새 보세요. 그 이름 누가 지었어요? 그 이름은 아담이 지었잖아요. 그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리해서 이름을 부름으로서 너는 내 수하다, 내 밑에 종속됐다는 걸 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인 거예요.

그런데 이미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의 자아는 하나님께 속한 자아가 아니고 어디에 속했습니까? 악마한테 속했지요. 하나님은 저걸 따먹는 날에는 네가 죽는다고 했을 때 거기에 대해서 악마는 어떻게 했습니까? 반대했지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네가 뭐가 된다? “신이 된다.” 이렇게 하면서 자아 형성되었고, 그 자아가 실제로 죽어가는 게 현실이에요. 그렇잖아요. 안 죽습니까? 안 늙습니까? 우리가 늙는다는 게 현실이잖아요.

이 현실을 집행, 버티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뭐가? 비록 내 몸은 늙어도 나도 한 고집한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 억지, “나 늙어가는 게 좋아” 이거는 뭡니까? 자기 자신의 현실을 인정한다는 거거든요. “나 망가지는 데 그게 너무 기분 좋아.” 여러분들이 사람을 만날 때 이런 사람을 만나세요. 딴 사람 만나지 말고 이 사람만 만나세요.

기뻐하는 사람만 만나세요. 연애를 하든 결혼대상자를 만나든 솔로에 나가든 항상 어떤 사람만? 기뻐하는 사람만 만나세요. 지가 망가졌든 몸이 아프든 어떤 경우든 간에 기뻐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이 로마서에서 어떤 사람이 기뻐합니까? 내가 수치라는 걸 알고, 이 수치와 무관한 내가 부끄러움과 무관한 새로운 나를 주께서 이 수치스러운 육체에 대해서 새로운 자아를 주님 쪽에서 제공했다.

그러니까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고 이제는 부끄러움 없는 너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그 작업으로 덮인 사람을 만나세요. 기뻐하지 않거든 만나지 마세요. 그래서 성도가 만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요. 이 세상이 억지고 버텨서 전부 다 인상이 무섭고 긴장된 상태기 때문에 기쁨이 없어 진리로 자유함이 없어요, 그냥. 자기 방어책으로 완전 무장했기 때문에 지 갑옷에 지가 눌려 살아요. 자기가 지키는 갑옷에.

그럼 기뻐하는 사람의 반대말이 뭘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보통 기뻐하는 사람의 반대는 슬퍼하는 사람으로 보잖아요. 아닙니다. 기쁨의 반대말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기뻐하는 사람은 만나고 뭐는 만나지 마라? 야심가는 만나지 마세요. 노리는 사람은 만나지 마세요. 이 야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물이 있는데 인간은 사물입니다. 인간은 사물인데 사물이 아닌 걸로 티내기 위해서 여기 자아, 나라는 환상으로 테두리 칩니다. 이게 아까 자아라 했지요.

인간은 육신이 있습니다. 육신을 뭐로 테두리 친다? 자아로 테두리 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육신은 무너지게 돼 있어요. 근데 무너지면 그냥 무너지면 되는데 테두리 때문에 수치를 느껴요.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시간이 와서 하나님께서 시간대로 죽이는데 몸 아픈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뭐냐? 원래 내 모습이 이 모습이 아닌데, 감추려고 하는 거예요.

그때 주님 뭐라 하느냐? “누구냐, 너?” “내가 지칭한 너 말고 따로 부끄럽다는, 늙고 아프고 죽는 것, 무너진 걸 부끄럽게 느끼는 너 누구야?” 이 말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에요. 마귀 나와, 이 말이에요. 그 뒤에 마귀 나와. 자아는 마귀에 속한 거예요. 자아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선악의 힘입니다. 선과 악의 지식의 힘이 그동안 무너져내려가는 육신을 평생토록 이걸 안 들키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버티기에 들어간 거예요.

그걸 아까 뭐라 했습니까? 두 자로 ‘야심’, 세 자로 하는 ‘야심가’ 내가 꾸며낸 근사한 것, 내가 꾸며낸 멋있는 것 그걸 대인관계에 자랑질하기 위해서 내놓는 어떤 밑천 같은 거예요. 내 아는 사람 가운데 의사들 많다. 그 모습을 보고 주님은 뭐라고 책망하는 줄 알아요? “너는 무너져가는 게 무슨 말을 해. 너는 사물이야.” 사물은 말할 자격도 없어요. 해와 달과 별을 보세요. 말하든가요?

인간은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무섭게 여기고. 그래서 인간들의 환상, 선과 악의 지식의 힘으로 있는 자아는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내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 듣는 별이 신경질 냅니다. 사물에서 사물로 가요.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여보, 먼저 죽어서 별이 되었구나.” 별이 그만 성질이 나서, 그냥 곱게 죽어. 어디 끼어들려하지 말고. 그게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뉴스에 보니까 진짜 아내가 남편 사랑하는 게 나왔어요. 세르비아 부부인데 그리스에서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 엔진의 부속품 조각이 깨져서 마침 비행기 유리창을 깨버렸어요. 창문이 깨지니까 창가에 앉아있던 남편이 어깨까지 빨려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 빠지지 말라고 5분 동안 붙들고 있었던 거예요. 최고에요. 그게 아내 사랑 아닙니까.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남편이 비행기 바깥으로 빠져나가는데 그걸 왜 붙듭니까? 그걸 주일 낮 설교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영토, 누구 영토? 내 영토기 때문에. 나의 영토. 네가 있어줘야 그동안 살아왔던 영토의 관습에 맞아요. 혼자 있는 것보다 같이 있는 게 영토에 맞아요. 아파트도 공동명의로 했으니까. 5분 동안 붙들고 있어 보세요. 그전에 부부싸움 많이 해도 막상 남편이 비행기 바깥으로 떨어지니까 이게 붙들 수밖에 없어요. 아마 다른 남자 같으면 2분 붙들다 놨을 거예요. 힘 빠져서.

이게 바로 우리의 육신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그냥 환상의 자아가 아니라 환상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악마는 실제로 힘이 있는데 뭐냐? 내 수치를 가리는 쪽으로 계속해서 그동안 평생토록 나에게 힘으로 지배하고 영향력을 주고 왔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무엇을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아아,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에요?

자기를 부인하고, 그다음에 제일 인간들이 무섭고 부끄럽게 여기는 건 뭡니까? 자기의 죽음이죠. 자기의 죽음을 챙기고 자기 십자가 지고. 십자가 죽음이니까 부끄러운 죽음이죠. 자기의 부끄러움을 챙기고 그 보따리 챙기고, 그다음에 뭘 따르라? 나를 따르라. 이게 시편 71편에 나오는 주께 의지한다는 것의 신약시대의 버전이죠.

시편 71편에 인간은 수치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나한테 수치스러운 건 빼고, 빼버리면 나는 괜찮은 나가 돼버리죠. 그 나를 어떻게 구원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래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건 오해지요, 오해. 자아라 하는 것은 육신이 먼저 생기고 자아는 나중에 생긴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자아를 동시에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은 그냥 육신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육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육신의 카운트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 있네, 하나. 너 있네, 둘. 이게 아니고 둘이 뭐가 된다?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둘이 뭐가 돼요? 둘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에 나오는 성령이 있는 교회는 숫자가 얼마에요? 숫자가 천 명이 되던 십사만사천이 되던 많더라도 그 교회는 몇 개에요? 하나에요. 코고 눈이고 그냥 하나덩어리에요.

교회에서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숫자 세다 혼난 사람 있지요, 구약에서. 다윗이잖아요. 왕이 백성들의 숫자를 센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성경에 보면 마귀가 그렇게 했어요. 마귀는 개별자로 보잖아요. 왕 본인이 하나, 내 부하 두 명 있다면 1, 2, 3, 셋 이러잖아요. 그게 아니고 왕이든 부하든 백성이든 전부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의 이스라엘, 하나의 언약에 종속된 언약의 하나 단위성에 그냥 하나 됨을 위해서 동원된 것이지 하나 말고 둘, 셋 이런 건 없습니다.

오병이어 할 때 처음에 떡 주인이 누구에요? 어린아이죠. 어린아이가 몇 명입니까? 두세 명의 어린아이가 줬습니까? 아니지요. 몇 명이에요? 하나지요. 하난데 남성만 몇 명 먹였어요? 오천 명이죠. 그 도시락은 하나 먹이기 위해서 하나 됨을 위해서 집에서 싼 도시락이잖아요. 그 도시락을 예수님한테 주니까 그땐 어떻게 됐어요? 오천 명이 먹었잖아요.

그런데 오천 명이 먹고 배부를 때 그 떡을 누구한테 가져오라고 합니까? 주님한테 가져오라는 거예요. 왜? 그 하나지만 인간의 하나가 어디서 전환됐어요. 예수님이라는 하나, 한분에게 전이되면서 예수님에게 하나에서 발생된 다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공히 나눠졌다면 그들은 ‘열두 명이 먹었습니다’가 아니라 전부 다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말의 표현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교회 현상이에요.

나는 옛날엔 부끄러웠는데 안 부끄럽다. 니가 안 부끄러운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안 부끄럽지요. 말 똑바로 해야 돼요. 예수님이 안 부끄러운 거예요. 왜? 예수님께 소속돼 있으니까. 전에는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잘 나간다고. 니가 잘 나가는 게 없어요. 왜 자꾸 단독자고 개별자로 빠집니까. 내가 잘 나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부끄러움 없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거예요. 몸이 아프든 뭐든 돈이 있든 없든 그 부끄러워도 주님이 부끄러워야지 왜 자격도 없는 내가 부끄러워합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 누가복음 15장에. 탕자가 집 나갔다가 돌아왔잖아요. 첫째 아들이 부끄러워했어요. “동생 저거, 저거 재산 다 날리고….” 동생이나 아들이나 돈 받고 나갈 때는 자기밖에 생각 안 했어요. 자기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왜 돌아왔지요? 자기가 부끄러운 존재라는 걸 처음엔 몰랐어요. 나가보니까 부끄러웠잖아요. 근데 돌아오기는 왜 기어 돌아옵니까?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카운트를 할 때 나 하나, 형 하나, 아버지 하나 이게 아니고 돌아올 때는 자기가 카운트 할, 나는 나라고 할 이름이나 자격조차 없었고 애초부터 아버지 것이에요. 아버지 것이기에 아버지 것으로 돌아온 거예요. 고무줄 잡아당겼다 놔버리니까 도로 시작점으로 온 거예요. 그래서 오늘 시편 71편의 내용은 바로 이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육체는 시작과 끝이 하나의 특화된 육체에다가 담는데 쓰임을 받았던 자가 시편 71편의 고백하는 사람이죠. 시작은 누가 하죠? 하나님이 하시죠. 끝은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죠. 시작과 끝이 여러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에게 지목해서 특화시켜서 시작과 끝은 거기다가 압축시켜 담아버렸을 때 나오는 내용이 시편 71편이에요.

그러면 시편 71편은 신약에서 누굴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야기죠.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니까. 나는 시작이요 끝이다. 나한텐 시작도 담겼고 끝도 담겨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러냐? 인간은 중간에 잠시 등장했다가 소멸돼버리는 거예요. 그 표현을 뭐라 하느냐 하면 현상이에요. 뭐는 아니다? 본질이 아니에요. 그냥 현상이에요. 우린 그냥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자꾸 악마가 우리를 특화시켜서 ‘네가 신이 된다’ 했지요. 현상인 주제에 갑자기 뭐가 됐어요? 본질이 된 거예요. 현상이라 하는 것은 사나 죽으나 주님을 드러내는 현상에 불과한데 자기가 신이 되고 만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내가 본질이 아닌데 본질 행세하는 게 문제잖아요. 본질을 현상으로 돌릴 때 뭐로 돌리느냐? 바로 시간으로 돌리는 거예요. 무슨 시간? 처음 시간, 끝 시간으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일반인들은 시간 지나면 어떻게 되겠어요? 육체가 함몰되어 죽으면 끝이잖아요. 그러나 특화된 시편 71편의 주인공한테는 네가 살다 그냥 죽어, 이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살아가면서 심지어 늙어 백수가 될 때까지 그 시작과 끝의 압축된 내용이 계속해서 특화되어서 하나님의 계시로 다뤄지는 겁니다. 한 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시편 71편 6절.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감사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예수님에게 이미 예수님이 잉태할 때부터 아버지의 아들로 성령이 잉태했잖아요. 시편 71편이 현실화되니까 예수님으로 되지요. 특화됐으니까.

변화산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을 대놓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차별화시켰어요. 뭐냐 하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어요(마17:5).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특화시키는 겁니다. 차별화하는 거예요. 너희는 어떻게 살라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쉽게 말해서 “너? 네 말 듣지 마. 네 자아의 말 듣지 마. 그건 귀신이야.”

너에게서 나오는 것은 너의 수치를 가리는 위장하는 그런 것만 나와요. 선악 지식이 있으니까. 좀 착해서 자랑질하고, ‘착하면 설마 나를 지옥 보내겠어, 이렇게 착한데.’ 그런 짓하지 마. 그게 마귀가 원하는 거잖아요.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요. 아까 이야기했죠. “누구냐, 너?”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인 누구냐, 너. <올드보이> 그 영화에 보면 그런 대목 나오잖아요.

우리가 지금 마귀의 올드보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맨날 ‘누구냐, 너’ 물을까 싶어서 나 이런 인간이다, 그 마음 준비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버티는 거예요. 버틸 때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육신도 고달프지만 그 무너져가는 육신 지킨다고 우리 자아 관리하는 것도 참 고달프기 짝이 없어요. 어제 주일날 표현처럼 인생사는 게 지긋지긋해요. 산다는 게. 우리의 육신은 우리를 괴롭히는 고문장비에요. 가만있는 데 아파. 관절이 안 좋아. 어쩌라고, 어쩌라고. 계단을 못 올라가는데. 무너져 내리는데.

이게 바로 이미 주께서 시간을 가지고 우리의 원래 본질은 그냥 사물이에요. 사물인데 말이 그렇게 많아. 그게 나라는 아우라를 성립한 거예요. 그래서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 아예 뭘 줄입니까? 합죽이가 되죠. 거기다가 입에다가 뭘 집어넣는다? 재를 입에다 집어넣죠. 재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원래 죽으면 재 되잖아요. 그 죄를 일찌감치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 요리가 뭐냐? 고추튀김요리. 고추 잘라서 돼지고기 다진 것하고 집어넣어서 완전히 재 덩어리, 말장난이 되는 것 같은데…. 죄인이 무슨 덩어리? 죄인이 재 덩어리. 이게 김수희 노래가 나와요. 할 말을 잊었지만은~, 할 말이 없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할 말이 없어요. 자기의 본질을. 그러니까 시편 71편 언약이 작동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설 때에 할 말을 잊어버리지요.

그리고 시편 71편에 모든 언약이 응축된 것이 뭐냐 하면 피 흘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죠. 그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리죠. 그리고 그게 열두 제자, 한 제자는 배신했으니까 빠지고, 열한 제자. 열두 제자와 만찬에서 네 것 챙기지 말고 내 피를 마셔라. 이거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몸의 일부다.

그러면 그것 먹으면 우리는 내 몸 날아가고 누구 몸 돼요? 예수님의 몸으로 형상이 바꿔지지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우리의 살점이 닿았던 그 살점이 십자가 살점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살이 들어왔다면 그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면 우리 몸은 어떻게 돼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서 같이 영광스런 몸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계약입니다. 집 계약할 때 그게 계약서에요. 언약이 계약서라니까요. 너는 내 몸 같이 되리라는 계약서입니다.

그 계약을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현재 있는 무너져가는 이 육신이 왜, 우리한테는 필요 없어요. 왜 주님한테 늙어가는 육신도 꼬박꼬박 그게 그렇게 소중하고 필요한지 이제 아는 거예요. 돌리도, 이 말이죠. 내 거다. 썩어가는 육신을 네 거라고 한탄하지 말고 그 육신 내가 써먹을게. 그러면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기쁘지요. 기쁜 사람까지 이야기해야 돼. 밥 먹으러 갈 때도 기쁜 사람을 만나야 돼요.

아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기쁨의 반대가 뭐라고요? 야심가. 꿍꿍이 야심이 있어. 야심가와 기쁨이 잘 구분이 안 돼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인간은 촉이 있습니다. 딴 건 구분 못해도 그거는 귀신 같이 구분합니다. “저게, 저게 노리는구나. 투자하면 이자 30%준다고? 우리를 기쁘게 한다고? 야심가 저거….”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사 가서 어느 교회에 간다면, “목사님, 어느 교회가 좋습니까?” 본인이 설교 들어보세요. 목사에게서 뭐가 안 나오면 그 교회 괜찮아요? 야심이 안 나오면 그 교회 괜찮아요. 야심이 나오면 그 교회 가면 안 돼요. 그런 질문하는 사람 많이 있어요. 모임에 가면. 전 인천인데요, 어떤 교회 가면 됩니까? 그 질문을 내가 수백 번 들었어요. 딱 두 가지 조건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나 사기꾼입니다.
두 번째, 나는 내 교회를 없앨 작정입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하는 목사 찾아가면 돼요. 지금 뭐 있어요? 첫 번째 없고 두 번째 없어도 나는 뭐다? 나 기쁩니다. 왜? 나는 무너져야 될 수치덩어리기 때문에. 이 두 가지면 돼요.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안 된다? 이건 목사 아니고 무슨 가입니까? 야심가에요.

자, 그러면 성경에서 인간의, 다시 정리하면, 자아는 왜 있느냐? 내 수치를 감추고 그게 안 들키게 하기 위해서 자아가 작동한다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이 야심을 꺾어버리고 수치를 드러낼 때 가장 궁극적인 수치의 모습이 민수기 16장에 나와요. 성경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얼마나 하나님이 친절하신지 수치의 끝을 보여주십니다. 민수기 16장 31절에서 33절이요. 누가 읽어볼까요?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냥 죽을 때 교통사고로 죽고 이러면 별거 아닌데 이게 구체적입니다.

우리가 땅을 의지하잖아요. 땅을 왜 의지하느냐? 이게 싱크홀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단단하다. 이거는 땅이 무너져 죽을 일은 없다, 라고 여겼는데 이 땅이 지진으로 무너진 게 아니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우리의 본질에 부합되는 식으로 땅이 나의 명령대로 수행중이라는 것을 겹쳐서 보여주는 거예요. 네 꼴, 네 본모습에 대해서 땅이 어떻게 너의 수치대로 대접하는지 보라. 땅이 갈라지지요.

그런데 죽어서 갈라집니까, 산채로 갈라집니까? 산채로 갈라지지요. 그러니까 음부에 산채로 묻어버리죠. 주님은 사채업자보다 더 해요. 돈 안 갚으면 묻어버리죠. 그냥 묻어버려요. 이게 인간이 지옥 가는 절차입니다. 땅은 묻으면 숨을 못 쉬지만 지옥은 그 인간들을 자기의 회원들을 받아들이면서 안 죽어요.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사는 부자가 진짜 미치고 환장하는 게 이게 죽으면 속 편해요. 죽으면 뜨거운지 시원하지 알 수가 없잖아요. 안 죽어요, 이게. 안 죽는다니까요. 수치 자체를 뿜어내면서 안 죽어요. 부끄러움을 그대로 마음껏 발휘하면서 안 죽어요. 세계에서 제일 심한 욕이 뭐냐? “너, 안 죽어.” 자식들은 이게 큰 욕인지도 모르고 아버지 아플 때, “아버지 더 사셔야 됩니다.” 아버지가 머리에 수건 두르고 아프다가 화가 나서 “안 죽는다는 게 제일 수치야. 아예 욕을 해, 욕을.”

여러분, 인간이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배후에 악마가 계속 살려내는 식으로 악마를 살리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악마와 계약을 맺은 상태에요. 죽으면 좋지요, 정말. 세상 사람들 말처럼 그냥 죽는 게 아니죠. 어떻게? 눈감고 칵 죽으면 그만이죠. 진짜 그러고 싶어요, 우리도. 안 죽는다니까. 산채로.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죽지만 하나 안 죽는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 안 죽고, 악마가 안 죽어요. 안 죽고 안 죽는 사람의 전쟁에 말려든 거예요. 둘 다 안 죽어요. 겸해서 우리도 안 죽어요.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습니까, 미칠 지경이에요.

이게 민수기의 현실이잖아요. 그렇지요? 우리는 민수기 16장 빼놓고 다른 현실을 생각하면 안 돼요. 학교에서 배운 현실은 현실이 아닙니다. 성경을 집어넣은 현실이어야 돼요. 사람은 죽지요.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현실이잖아요. 성도는 뭐냐 하면 세상이 가르치는 것 말고 세상의 핵심을 그걸 포함시켜서 세상을 다시 보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핵심을 집어넣고 봐야 돼.

그러면 제가 이래 이야기하게 되면 목사님, 이런 마음가짐을 줄곧 계속 갖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생각이 들지요. 어림도 없는 소리에요. 지금 육체가 있을 때는 그냥 육체대로 가야 돼요. 육체 근처에 무엇이 자꾸 얼른거려요.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아우라, 자아가 있잖아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집에 밑반찬으로 단무지, 양파 나오지요. 단무지, 양파에 뭘 칩니까? 식초 치지요. 식초 치고 난 뒤에 얼만 안 있어 날아가 버려요. 우리의 육신에다가 주님께서 성령이란 초를 치면 그게 얼마 못 가요. 날아갑니다. 왜 날아가야 되느냐? 우리의 육신만 있으면 주께 구원되는데 이 육신을 누가 아직까지 죽을 때까지 장악하고 있느냐 하면 마귀가 장악하고 있어요.

마귀가 기쁜 소리를 자꾸 집어넣어요. “너 이제 은혜 받았지, 구원받았지. 그럼 이제는 구원받은 걸 자랑질해야지.” 갑자기 식초를 자랑해야 될 걸 단무지를 자랑해버려요. 믿음 있는 나를 자랑해버려요. 식초는 벌써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귀를 사용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에 뭘 심어 넣어요? 가시. 무슨 가시입니까? 악마의 가시를 거기다 꽂아 넣는 이유는, 사도라는 것, 믿음 좋은 내가 믿음의 대상에서 빼내기 위해서 악마를 사용하는 거예요. 믿는 내가 자랑이 될 수가 없다는 것. 아무리 믿어도 내 자아로 나타난 원래의 육신은 시간 따라 계속해서 무너져 내려야 되는 거예요.

그게 오늘 시편 71편에 뭐냐 하면 1절에 “주께 피하노니” 한 번 피합니까, 두 번 피합니까? 이게 한 번 피하는 게 아니고 시편 71편 1절은 우리가 육체에 남아 있는 한 수시로 일 있을 때마다 계속 유효하게 우리에게 식초처럼 뿌려져야 되는 거예요. 로마서 1장 16절이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게 복음 믿으면 그 구절 없애버릴까요? 아닙니다. 수시로, 수시로 로마서 1장 16절 그것이 계속해서 성경 전체가 작동을 해줘야 돼요.

따라서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서울강의에서 나의 영토가 아니고 어디로 옮긴다? 말씀이 작동하는 말씀의 영토로 옮겨버리면 말씀은 수시로 식초처럼 우리에게 뿌려져야 된다 이 말이죠. 나의 영토에서 말씀의 영토로 옮겨지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말씀이 그동안 자아 역할 했던 그 역할을 누가 감당한다? “자아 이리 와, 자아 이리 와.” 또 말씀을 뿌리고, 뿌리고. 이 귀신아. 너 벌써 구원받았어, 하고 말씀으로 주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20260713b 부산강의 : [시편]87(71:20)-연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6절을 제가 더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그다음에 9절에 보면,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그렇게 돼 있지요. 그다음에 18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특화되었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께서 나를 갖고 사용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를. 나를 사용할 때 그다음에 그러면 늙어 죽었잖아요. 20절 보세요.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그러니까 6절, 9절, 그다음에 18절, 20절을 하나의 드라마로 엮어서 나타난 인물은? 보통 인물은 20절 빼놓고 6절, 9절, 18절은 난 그렇게 살았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날 인도했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서 다 걸려 넘어갑니까? 20절. 죽었는데 살아났다는 말을 하려면 진짜 죽었는데 살아난 뒤에 이 이야기를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20절에 보면 이 고백하는 사람은 아예 이거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장담을 해버려요.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부러운 거죠. 맨날 죽어봤나 하는데 안 죽어 봐도 안다는 거예요. 도대체 무엇을 믿고 또 어떤 근거에 의해서 안 죽어도 자신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그 근거를 제시하라. 이게 굉장히 우리한테는 궁금증이 되겠지요.

그리고 이 궁금증을 그대로 아까 로마서 1장을 봅시다. 로마서 1장도 마찬가지에요.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렇게 나오면, “목사님, 그것 내가 스물네 살 믿었어요.” 그러면 또 이야기하니까 “내가 지금 장로 되어 육십이 살인데 지금도 믿고 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죽고 난 뒤에는?” “그건 몰라요.” 그것 모르면 헛방이지 뭐.

지금은 인간은 어디에 막혀 있느냐 하면 “그래, 그래. 맞아, 맞아. 내가 믿을게.” 믿는데 믿는 주체가 있잖아요. 믿는 주체는 계속 내 육신과 함께 있다고 우기니까 육신은 지금 함몰돼 가는데 이놈의 주체는 안 무너져. 같이 무너져야 되는데 원래 실상 없으면 허상도 같이 무너져야지요. 당연히 무너져야 되지요. 우리는 갈 때까지 우리가 가지 못하는 데까지 선을 넘어서 가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고 인식 있을 때까지만 머뭇거리는 거예요.

마태복음 3장 9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이런 말했어요. 너희들이 하나님 백성이라고 지금 우기고 오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네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주께선 돌들이라도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한다. 세례 요한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돌이 아브라함 자손, 아까 이 돌은 사물이라. 인간은 사물 되는 걸 기피해요. 이걸 거부해요. 왜 기피할까요? 내가 돌 되면 뭐가 날아가요? 자아가 날아가거든요. 자아에 뭐가 살려있습니까? ‘나는 믿었습니다. 나는 소망했습니다. 주님께 충성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가 자아가 날아가면 자아 안의 내용물도 같이 날아가죠.

이게 무서운 거예요. 자아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구원받아? 주님은 어딜 주목합니까? 자아 없더라도 네가 죽어가는 육신이 있잖아. 나 육신과 상대할 거야. 거기서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주님께 충성했다고 정보가 내장돼 있는 자아를 들고나가려하니까 주님께서는 안 받고 죽은 육체를 받아버려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어요. 죽었는데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의 죽은 육체에 그대로 작열해서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려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제자들에게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야기를 믿었습니까? 육신이 믿어야 되는데 자아가 믿어버렸어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

“내가 죽기까지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자아가 믿어버렸다고, 자아가 믿으니까 주께서 자아의 한계에 대해서 지적했어요. 베드로 네가 나를 죽더라도 따라간다고 자아가 주장하는 모양인데 너는 무슨 요소를 빠뜨렸느냐 하면 귀신, 마귀를 빠뜨려버린 거예요. 지금 마귀가 널 노리고 삼키려고 했다. 네 자아가 얼마나 악마의 위력 앞에 허접스럽고 아무것도 아닌 걸 내가 보여줄까? “너는 세 번씩이나 날 부인할 것이다.”

그럼 베드로는 어떠해야 돼요? 그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쉬운 문제에요, 따지고 보면. 여러분이 베드로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맞습니다. 제가 세 번 부인합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참 쉽지요. 누가 그걸 방해합니까? 내 안에 있는 악마가 방해하는 거예요. 아아, 지독한 악마. 육신은 주님이 다뤄서 흙이 되어가고 있는데 악마는 말리고 있어요.

아까 되게 아프다는 무슨 수술? 어깨 석회 제거수술. 하여튼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어느 병원이 용하고, 어디 해야 돈 적게 들고, 빨리 완쾌해서 내가 이 정도라고 자랑질하는 자아로 거듭나느냐, 그것만 신경 쓰지요. 그런데 그래도 우리가 구원받는데 걱정 안 하는 것은 바로 자아가 누굴 믿기 때문에? 예수 믿기 때문에. 마귀가 웃어요. 내가 웃는 게 아닙니다. 마귀가 같잖아서 웃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나의 영역, 자아의 영역에서 뭐로 옮겨야 돼요? 말씀의 영역으로 옮기면 우리는 단무지에요. 그냥 뭣도 몰라. 말씀을 백날 알아도 기억 잘 못해요. 그런데 왜? 식초가 날아가니까. 나는 기억하는데 내 속에 들었던 복음의 기쁨은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까 베드로가 하는 방법은 뭐였어요? “예. 세 번씩 부인합니다.” 말을 베드로가 못해요? 베드로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악마가 떨어져나가야 그런 능력이 나오거든요. 성령이 와서 악마를 꽁꽁 묶어놓고 우리를 성령에 예속한 종으로 삼아버리면 성령께서 하는 것은, 이 근래에 자주 이야기하는데, 성령께서는 일이 다 벌어지고 난 뒤에 추후에 효과를 줘요.

성령이 오게 되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지요. 와서 주님이 약속한 것은 너희들이 약속을 안 지켜도 믿는다고 이야기 안 해도 네가 믿는 걸 들어내고 내 믿음을 너에게 집어넣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아, 주께서 찾아와서 구원하시는구나.” 그리고 내가 찾은 것은 전부 다 하늘나라에서 접수를 안 해줘요. 받지를 않아요.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을 안 받아요. 나를 안 받아주시는 이게 복이에요.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니까.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까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거든요. 그 이야기 듣는 순간 인간은 자아가 작동해요. 저 복음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할 수 있습니까? 뭐 기도합니까, 뭐합니까? 뭐 이렇게 자꾸 하는데 들음에서 믿음이 생겨난다고 하는데 계속 들으면 믿음 생길까요? 도대체 얼마나 해야 되겠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빈터에요, 빈터.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 와서 “아버지, 죽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좋은 관을 마련했습니다.” 그럼 내가 그 관을 보자. 보니까 그 관에 뭐가 있습니까, 비어있습니까? 비어있지요. 어제 오후 설교 때 팝송 제목 하나 소개한 것 있지요.

내게 가장 필요할 때 너는 떠나버렸다는. 너는 떠났다는 건 괄호지만 가장 필요할 때. 그걸 설명하면서 주님은 우리가 가장 필요할 때 주님께서 응답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와 이바구할 마음이 없어요. 우리와 주님과 무슨 이야기됩니까. 입을 다물어야 되는데 죄를 처리해야 되는데 대화를 해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장자 이야기에 나오는데 어떤 중이 도 닦기 위해서 배를 몰고 호수에 나가서 묵상하고 있는데 뭔가 명상을 깨버렸어요. 어떤 배가 와서 자기 배를 쳐버렸어요. 치니까 자기가 며칠 동안 명상한 것 다 날아갔어요. 득도를 못했어요.

대전강의에서 했잖아요. 득도를 하려면 뭘 해야 한다 했어요? “지랄 맞은 여편네와 살아봐야지.”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 아닙니까. 오나라가 이야기한 대사. 너 득도 못해. 내려와. 안 내려오면 라이터로 절에 불질러버린다고. 나랑 살아야 득도해. 득도하기 위해서 혼자 배를 타고 있는데 뭐가 와서 쳐버리니 화가 났지요. 눈을 뜨면서 도대체 여기 사람 있는 줄 몰랐느냐, 왜 배를 들이대느냐? 보니까 그 배가 빈 배에요.

이 공터, 내 관의 내가 예상하는 모든 것은 나의 옮길 자리에 없습니다. 십자가와 우리하고 단절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 자아가 살아 있으면 뭐라 합니까? “나 십자가 믿어야지. 십자가 믿는 게 구원의 능력이니까 그 믿음 내가 소지하고 가져가야지.” 만약에 그 십자가 능력이 인간의 소유가 돼버리면 인간의 육체는 허물어지고, 허물어지면 뭐도 허물어져요? 자아도 허물어져서 나중에 치매 걸려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심방 갔는데 오십 년 권사님인데 예수 이야기하니까 하지 말래. 그럼 뭐하나? 나훈아 노래 이야기하라는. 심방 가서 현장에 내가 있었다니까. 인간의 두뇌 가운데서 예수 이야기는 장기기억에서 빠져있어요. 장기기억은 나훈아에요. <청춘을 돌려다오>하는 것.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내가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지식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그럼 어떻게 되느냐? 베드로 하면 돼요. 내가 십자가 믿는 것이 뭐다? 죄라고 하면 돼. 내가 십자가 믿고 예수 믿는 게 죄라고 인정하면 되지요. 그건 어떤 경우에 발생합니까? 나는 나를 빈터로 여기고 빈터에 내가 예상한 것은 전혀 없어요. 전혀 없는데 현재 내 자아에, 보통 우리는 육신에 자아가 있잖아요. 마귀가 준 자아가 있잖아요.

주께서는 자아를 이미 일찍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자아를 빈터로 만들었어요. 빈 관으로 만들고 그 비어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주님 자신의 성과를 거기다 채우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두 자로 ‘은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은사 어떤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보겠습니다. 은사가 어떤 것인지 공백을 만들어요. 빈터를 만든다고요. 빈터를 만드는 방법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4절까지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누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어떤 경우를 당해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겁니까? 사랑이죠. 그러니까 내가 하는 사랑은 사랑이다, 아니다? 아니지요. 그거는 자아에서 나온 거죠. 내 사랑은 내가 설교하고 강의하는 이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그 위력이 어디서 온다? “너는 사랑만 있으면 돼….” 뒤에 오렌지C나 비타민C를 집어넣어야 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제가 보이스피싱한테 이천 만원 당했습니다.” “이 C 이천 만원? 아무것도 아니야.” 뭐만 있으면? 사랑만 있으면. 그래서 소중한 것은 사랑이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소중하지 않아요.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그 소중한 것 앞에서 스스로 자아의 내재성을 소멸한다 했잖아요. 그다음 계속 봅시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고” 이건 뭐 이명박인가?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누가 아무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찍으세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고” 아프리카에 우물 파주고 해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게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 수가 없어요. 사랑이 오게 되면 바꿔치기, 바꿔치기, 바꿔치기. 관에 누어있는 내 모습, 일어나. 관의 내 모습을 치워버리고 관은 비어있는 관. 그 비어있는 관에 주께서 채우고 문 닫고 열면 주의 지체로 부활됩니다. 주의 형상으로 부활돼요. 마치 붕어빵 찍어내듯이.

그럼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 그렇게 귀한데 복음을 내 것 만드는 방법은, ①복음을 믿는다. ②복음을 배운다. ③복음을 삼킨다. 어느 게 정답이냐고 묻는 게 아니고 여기 정답이 있습니까? 없지요. 앞에 ‘내가’ 있어서 없어요.

미국에 어떤 도둑이 보석상에서 주인 안 볼 때 다이아를 자기 몸에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다이아가 자기 것 됩니까? 그 사람의 계획은 뭐냐? 다이아가 나중에 대변에 섞여 나올 거지요. 그 대변을 버리지 않고 다이아만 건지겠다는 거예요. 문제는 복음이 연결되게 되면 복음을 가질 내가 없어져요. 복음은 계속해서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몸의 대변이 될지언정 내 복음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질문에 답변하세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있는 음식은? ①배고플 때 먹는 음식. ②최고의 요리사의 정성어린 음식, “오, 공기가 다르네?” 했던 에드워드 리 요리사, 경주APEC 2025 KOREA 정상 만찬 총괄셰프. ③남이 먹던 음식 짜투리. 이중에 정답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④남이 먹다가 버린 음식을 주어먹는 개. 몇 번입니까? 4번이 정답이죠. 지금 1번, 2번, 3번이 정답이 왜 안 되느냐 하면 먹는 내가 개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이게 안 귀한 거예요. 나중에 식사하러 간다면 에브리바디 뭐가 돼야 돼요? 개가 돼야 돼요.

어제 주일날 설교하는데 애들한테 약간 심한 말을 했어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갈 때 거기에 굶주린 사자가 있었다.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되지. 그러나 다니엘 사자 굴 들어가기 전에 주변에 다니엘을 잡아먹는 사자들이 득시글했다. 너희들도(초등학교 1, 2학년) 이 세상이 전부 다 너희를 잡아먹는 사자는 좀 비현실적이지만 개, 개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근데 다니엘은 그 중에서 살았다. 너희들도 개들 가운데서 살게 된다. 주께서 살게 해줬다. 기도합시다. 참.

이렇게 볼 때 결국 이 말씀을 우리에게 준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천국 가는 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요소들이 주님의 눈에는 보이고 우리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 거예요. 씨 뿌리는 비유할 때 네 번째 옥토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요소가 있었던가요? 사탄이 와서 말씀을 집어먹고, 돌짝밭의 돌들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세 번째는 뭡니까? 세상에 비싼 가방과 화려함과 뭐 온갖 사치가 주의 열매를 막고.

그러니까 세상은 무조건 옥토 됨을 막고, 막고, 막고. 왜? 세상은 가라지만 뿌려져 있기 때문에. 가라지 세상이거든요. 그 가운데 우리는 의미를 통용했고, 거기서 어떤 삶의 보람과 희망은 거기다 걸었고, 그러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스스로 자립하는데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랬던 자들이 열두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영을 보거든요. 악마가 너로 하여금 기어이 뭘 못 믿게 한다? 네 힘으로 예수 나를 못 믿게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결국은 악마가 너를 체포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몰라? 안 돼? 닭 울거든 알아차려라. 닭은 사물이거든요. 사물은 주의 말 듣고 말할 줄 아는, 닭은 말을 못해요. 꼬꼬댁 울기만 하잖아요. 말을 못해서 울기만 하는 그 사물을 동원해서 말할 줄 아는 베드로, 내가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다는 그 말 전체가 닭의 말도 안 되는 소리보다 훨씬 더 가치 없는 소리에요.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이런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삼켜도 안 돼, 공부해도 안 돼,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으신다면 이것은 이렇게 쓰면 돼요. ‘연결’ 주께서 우리의 추잡한 몸을 예수님께서 연결시켜줘요. 물이 매개 분자로서 활용이 잘하는 이유가 다른 물체와 연결이 잘 돼요. 그걸 물에 녹는다고 이야기하거든요. 탄소도 마찬가지고. 탄소도 팔이 네 개가 되어 여러 물체와 연결이 잘 되기 때문에 탄소가 있음으로서 이 세상의 생명체가 성립이 돼요. 연결하면 돼요.

연결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예가 바둑판이에요. 바둑판에 하얀 돌과 그다음에 까만 돌이에요. 돌이니까 그 자체는 사물이니까 뭐가 없다? 주체가 없어요. 돌 자체가 생각해서 두는 게 아닙니다. 19줄X19줄 361개의 점 위에서 하나의 돌이 놓이고, 또 돌이 놓이고, 돌이 놓여요. 이 바둑이 주는 이미지가 뭐냐 하면 이 돌이 놓일 때 이 돌은 옆에 친구 돌이 놓이는 순간 이때 바둑판의 상태, 상황은 돌이 하나 놓일 때마다 재편돼요. 다시 재편된다고요.

이게 가인의 후예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인간의 문명을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두 명이 있을 때의 세상과 세 명이 있는 세상은 두 명이 있을 때는 상상도 못한 세 명이 추가됨으로서 새로운 세계관이 펼쳐집니다. 네 명이 되면 세 명씩 펼쳐집니다. 이게 바둑게임입니다. 바둑돌이 하나 놓일 때마다 처음 놓였던 바둑판이 125번째 두는 바둑알로 인하여 바둑알의 운명이 결정되는 거예요. 126번째 돌을 두면 죽었다가 살아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집단 구성적 상황이에요. 이게 바로 사회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예를 들었지만 우크라이나에 어떤 청년이 살고 있는데 자기의 소박한 꿈이 있어요. 아버지의 대를 따라서 훌륭한 시계 조립하는 장인이 되어서 내가 이 땅에서 기능인으로 살겠다고 했는데 통지서가 날아와요. 러시아가 쳐들어왔다. 군에 입대해. 어떻게 돼요? 나는 어릴 때부터 소박한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는데 입대통지서가 날아와 버려요.

이거는 북한도 마찬가지에요. 북한의 청년이 있으면 뭔가 자기 꿈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라에서 차출해서 너는 러시아 가서 드론이나 맞아 죽어라. 최전방 방패막이로 죽으니까. 자기 의지입니까? 바둑알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은 결코 내 의지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지 내가 내 원대로 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세상을 뭐냐 하면 이 세상이라 하지 않고 이 세대라고 해요. 전부 다 집단적 표현이에요. 이 세대는 개개인이 어떻게 되겠다고 노력해봤자 흔들리면 전체가 같이 흔들리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 바둑에 어떤 바둑돌이 놓일 때 네 개가 있었어요. 바둑게임이 뭐냐 하면 다른 팀, 다른 하얀 돌이 이걸 둘러싸게 되면 여기는 다 잡혀서 빈터가 공백이 되게 돼 있어요. 이걸 바둑에서 죽었다 해요.

평생 살았는데 평생 살아서 시간과 시간이 모여서 점점 더 내가 원하는 자아가 돼 가는데 어느 날 코로나 걸려서 어릴 때부터 백수 될 때까지 이어져, 이어져 어느 학교, 어느 대학교, 누구와 결혼하고, 누가 아파트 사고 하여튼 이어져온 모든 것이 육십 얼마 때 코로나 걸려서 이 모든 것이 뭐가 돼요? 무효가 돼버리죠. 결국은 죽기 위해서 차곡차곡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다음에 바둑 두는 사람이 죽게 된 이것의 포위망을 뚫고 다른 연결된 흑백 돌들과 연결시켜버리면 죽었다고 여겼던 내가 새로운 돌의 연속으로 인하여 어떻게 돼요? 내가 살았어요. 살아버렸어요. 이 앞의 것을 총회라고 해요. 히브리서 12장의 총회. 하나님의 이스라엘 속에 이방인인 내가 걸려드니까 이스라엘이 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살고, 이스라엘의 왕 되신 분이 누구냐? 죽었다고 사흘 만에 살아난 예수님이 사니까 내가 어떻게 돼요? 죽었던 대마가 살아나버렸어요. 그러면 바둑에 승리자 돼버려요.

까만 돌은 마귀, 흰 돌은 예수님이라 본다면 그 싸움에서 이미 건졌지요. 건져내고 쓴 기록이 뭐냐? 요한계시록이에요. 이 도구 이름이 뭡니까? 농사짓는 사람이 칼날이 있어서 흙을 고르고 긁어낼 때 쓰는 쇠스랑이라 합니까? 요한계시록에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일곱 교회를 가진 쇠스랑이 등장해요. 이거는 누가 쓰느냐? 일곱 별 쥔 예수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일곱 별은 흩어지지 않아요. 이게 예수님과 더불어 단일체로 교회마다 전부 다 갈아버리죠.

여러분, 백조의 호수 발레 할 때 흰옷 입고 여자 무용수들이 군무할 때 혼자 옮깁니까, 짝을 지어 옮깁니까? 짝을 지어 옮기죠. 무대 다니면서. 이게 일곱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의 특징은 전부 다 유령이에요. 이미 이 땅에서 죽은 자를 주님께서 찾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일곱의 특징은 뭐냐? 시간이 없어요. 시간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시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오늘 시편 71편에 나오는 어릴 때부터 백수가 되고 해놓고, 그다음에 내가 죽더라도 달리 살리시리라고 돼 있지요. 그러면 그것이 하나의 인물 속에 함축이 돼 있으면 어떻게 돼요? 함축이 됐으면 그 사람의 인생에는 뭐가 날아가요? 어릴 때부터 하는 것이 이미 죽음을 통해서 살아났으면 그걸 뒤돌아보면 뭡니까? 시간이라 하는 것은 내 시간은 없고 말씀으로 완성한 그 내용만 담겨있겠지요.

그래서 오늘 제가 복사해온 노래 가사를 봅시다. 설명해드릴게요. 첫 번째, Glen Campbel의 [Time]

Some people run 어떤 사람은 뛰어가고
Some people crawl 어떤 사람은 기어가기도 하죠
Some people don’t even at all 어떤 사람은 아예 움직이지 않아요
Some roads lead forward 어떤 길은 앞으로 나아가고
Some roads lead back 어떤 길은 뒤로 돌아가게 만들어요
Some roads are bathed in light and 어떤 길은 하얗게 빛나고
Some wrapped in fearful black 어떤 길은 어둠에 뒤덮여 있어요
Some peaple never get and 어떤 사람은 주기만하고
Some never give 어떤 사람은 받기만 하죠
Some peaple never die and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하고
Some never live 어떤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죠
Some folks treat me mean 어떤 사람은 나를 싫어하고
Some treat me kind 어떤 사람은 나를 좋아하죠
Most folks just go their way and 대부분 사람은 자기 길을 갈 뿐
Don’t pay me any mind 나에게는 관심도 없지요
Time oh good good time 아, 좋았던 시절은
Where and you go 모두 어디로 가 버렸는지 …
Time oh good good time 아, 좋았던 시절은
Where did you go 모두 어디로 가 버렸는지 …
Sometimes I’m not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Sometimes my face is cold and 어떤 때는 얼굴이 차가울 때도 있고
Sometimes it’s hot 뜨거울 때도 있어요
At sunset I laugh 해가 질 무렵에는 웃었고
Sunrise I cry 해가 뜰 무렵에는 울었죠
At midnight I’m in between and 한 밤중에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죠
I’m wondering why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Time oh good good time 아, 좋았던 시절은
Where did you go 모두 어디로 가 버렸는지 …
Time oh good good time 아, 좋았던 시절은
Where did you go 모두 어디로 가 버렸는지 …

어떤 사람은 뛰어가고, 어떤 사람은 기어가고, 어떤 사람은 움직이지 않아요. 어떤 사람, 어떤 사람 나오지요. 제가 이 노래 가사를 고른 이유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만 하려고 한 게 아니고, 그다음에 뭐냐? Sometimes, 제목이 Time이에요. 처음에는 뭐가 나왔습니까? 어떤 인간이 나왔지요. 후반에 어떤 시간이 나오죠.

자, 인간 자체가 환경입니까, 시간이 환경이에요? 어느 환경이 우월한 환경이에요? 시간이죠, 시간. 그게 바로 전도서 3장에 나옵니다. 3장 볼까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여기서 뭐가 날아가 버려요? 인간의 자기 의지, 감정 다 날아가죠. 인간의 감정, 의지 그걸 뭐가 지배해요? 때. 웃을 때, 울 때, 헤어질 때, 있을 때. 전부 다 때가 뭘 지배해요? 시간이 지배한다고.

대중가요에 <창밖의 여자>인가, 커피를 시켜놨는데 그 사람 만나려고 다방에 앉았는데 때가 지나매 그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내용이에요. 창가에 걸린 꽃잎이 마를 때까지, 양인자 씨가 작사한 노래가 있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하는 <그 겨울의 찻집>이 있어요. 그 가사 내용에 보면 차는 식었어요. 그 사람은 안 와요.

결국은 거기서 주도한 것은 뭡니까?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이 안 와요.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지배합니까? 남는 것은 나의 의도도 다 무너지고 그 사람의 의도도 무너지고, 남는 것은 시간이 남겠지요. 인간은 이렇게 시간에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도 그렇게 여기 도 그렇고 처음에는 인간이 주인공이었는데….

여기 계속 봅시다. 어떤 사람은 뒤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앞으로 가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주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받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하고, 어떤 사람은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를 싫어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좋아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길을 갈 뿐 나에게는 관심도 없고.

일단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보잖아요. 우리 흔히 쉽게 생각하면 세상사 사람 관계잖아요. 그런데

Sometimes I’m not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Sometimes my face is cold and 어떤 때는 얼굴이 차가울 때도 있고
Sometimes it’s hot 뜨거울 때도 있어요.

갑자기 내게 주도권이 있다가 그 주도권을 누구한테 넘겨줍니까? 때한테 넘겨주는 것, 이게 Time이란 노래에요. 그리고

Where did you go 다 어디로 갔지?

어디로 가도 사람은 없어져도 뭐는 있다? 시간이 거기에 현장에 있잖아요.

Time oh good good time 아, 좋았던 시절은
Where did you go 모두 어디로 가 버렸는지

이 노래 이렇게 끝나요. 유명한 노래였어요. 어디로 갔느냐? 사람은 가도 무엇은 남는다? 시간은 남는다. 그 제목이 Time이에요. 그러면 이 Time을 채울 길이 없을 것 아닙니까? 왜? 없으니까. 이 비슷한 노래를 이렇게 <오월의 첫날>(First of May)이란 노래의 가사를 찾아봤어요.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내가 어릴 때 크리스마스트리가 무척 커보였어요.

그렇지요. 어릴 때. 또 때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가 되면 어릴 때가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약간 컸잖아요. 크면 초등학교 5학년이 인생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중학교 1학년이면 1학년이 전부인 줄 알고. 인간은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지금 육십이 됐으면 육십이 인생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We used to laugh while others used to play
남들 놀 때 우리도 함께 웃곤 했죠.(놀면서 웃었다 이 말이에요)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이유는 묻지 나한테 마세요. 그저 그런 세월이었어요.

그때 놀면서 웃었지, 묻지 마세요. 우리는 그때가 전부였으니까. 그때가 전부에요, 인간은. 왜 우리가 추억이 좋고, 과거에 흘러간 시간이, 이렇게 구름 낀 날이나 비 올 때나 과거의 생각에 잠깁니까? 그것은 우리가 시간이 정지될 때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요. 왜? stable하니까 안정되니까. 사람이 안정되면 행복을 느껴요.

그래서 부부와 여행 갈 때 뭐냐? 옛날에 신혼여행 갔을 때나 그때 우리는 참 좋았어. 왜 좋으냐? 철이 없었으니까 좋은 거예요. 그때가 전부인 줄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단칸방에 있어도 행복했던 이유가, 단칸방 아니라도 좋았어요. 그때가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이 노래의 핵심이 그거였어요.

Some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그 자리는 누가 채우겠지요.

이게 아까 Time할 때는 뭡니까? 시간만 남고 인간은 모조리 다 그 때만 남고 다 날아가지요. 그런데 이 노래는 비록 시간은 지나도 어릴 때 크리스마스트리가 왜 크지, 라고 했던 그 시절을 누구 바턴을 이어 대를 잇습니까? 철딱서니 없는 나보다 뒤에 태어난 아이들이 크리스마스트리의 키 큰 것을 보고 하하 호호 까불고 놀았던, 우리가 옛날에 이미 겪었던 일이 전부인 줄 알고 놀던 어린아이들이 또 내 뒤 때를 채운다는 거예요. 여기서 시간 위주가 아니고 인간 위주겠지요.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이제 우리도 컸어요. 크리스마스트리도 작아 보이고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그 시절에 대해서 당신은 묻지 않지만 우리의 사랑은 죽지 않을 거예요.
To kiss and cry, "Come, first of May"
키스와 더불어 “오라, 오월의 첫날이여”라고 눈물짓겠지요.

키스하면서 왜 울어요? 감격스러워서 우는 거죠. 왜? 이제 우리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니까. 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모든 동화는 뭐로 끝납니까? 그래서 둘이 뭐했다? 행복하게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마귀는 뭐만 방해하면 돼요? 결혼식만 조지면 돼요. 안 돼, 하고 나오는 빌런. 그런데 살아보니까 결혼식이 전부였어요? 이혼을 위한 결혼이 아니었던가요?

The apple tree that grew for you and me
저 사과나무는 우리가 같이 자랐어요.

노래 두 개를 왜 하느냐 하면 시편 71편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죽었던 우리를 살려줄 때 그 주님이 왜 우리를 살려주는 지까지 71편에 기록돼 있습니다. 내가 뭔데 살려줘요? 질문을 그렇게 가져가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의지하오니 살려주옵소서.” 아니. 우리가 알지 못하고 예상 못한 건데 의지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6장 33절에 나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뭘 자주 빼먹느냐 하면 그를 지우고 그의 지를 지워버려요. 그러면 우린 어디 갑니까? 천국 못 가서 환장했어. 나라, 천국과 하나님의 의에 간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우리가 예상한 그 천국은 못 갑니다. 가서도 안 되지요. 주께서 가는 것은 그의 나라고 그의 의에 가요.

우리가 선악체제할 때 선을 뭐로 봅니까? 의로운 걸 보죠. 그거는 천국에서 안 받아줘요. 의로운 나를 천국에서 안 받아준다고요. 내 의를 안 받고, 네 의 말고 그의 의 내놔라. 그의 의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만 주어지는 데요. 내가 행함으로선 그의 의를 따라 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죄인이고 모든 것이 죄니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의인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내놓는 의는 죄의 일종이기 때문에 안 받아줍니다. 선악체제에 속하기 때문에 안 받아줘요.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어떻게? 식초처럼 하루치. 우리를 그의 나라에 가기 전에 관에다가 옮겨가야 돼요. 내 관을 주께서 이미 없어진 빈 관을 대동하고 그다음에 내 썩은 육체를 주님의 빈 관에다 옮겨버리면 그 관 자체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로 만들어낸 제작한 관이 돼요. 이게 예수 안, 이게 십자가 안, 성령 안입니다.

이렇게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어떻게 판별하느냐? 바로 십자가를 자랑해요.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관을 자랑해요. 같이 나를 주와 함께 죽은 자로 만들게 하시는 그 주님의 능력을 감사하지요. 나를 살게 하는 능력을 감사하는 게 아니고 내가 교체해서 주와 함께 죽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그래서 계속 봅시다. 제일 마지막에 보면,

Some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누군가 그 지난 자리를 채울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시간에게 하지 않고 나는 떠나도 내 후손들은 살아남으면 되잖아, 하는 그런 식이에요. 그런데 시편 71편에서는 내 자리가 하나님의 그의 의의 자리에요. 그러니까 시편에서 주인공이 난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여기 24절에, “내 혀도 종일토록” 뭐가 나온다? 주의 의가 나오잖아요.

다시 말해서 여기서 마지막으로 물을 것은, 내 의가 왜 안 나오지? 난 주님 의지했는데, 주님을 믿는데 왜 내 의가 안 나옵니까? 믿게 하셨기 때문에 연결시켜준 거예요. 내가 떠났다 치고 내 자리를 누가 채워줬어요? 내 후손이 채워진 게 아니고 주님이, 두 번째 아담이 내 자리를 채우고 거기서 주님의 의가 나라고 주님의 나라가 나오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뭐만 자랑합니까? 내 건 자랑 안 하죠. 주님의 의와 주님의 나라가 자랑이 된 겁니다.

그 날이 내가 죽었던 내 자아와 주께서 함께 죽었던 첫날이 되겠지요. 오월인지 유월인지 그건 뭐 모르겠는데. 그래서 이 노래를 잠시 들어봅시다. 오월의 첫날을……. 들어보니 기억나요? 여기까지. 나머진 여러분이 다 들어볼 거니까.

이제 정리해봅시다. 시편, 나를 죽은 데까지 살리는 것은 나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깔아놓은 주님의 관, 아버지께 인정받은 자기 의, 그것 자랑질 하시려고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신약에는 우리를 사용했고, 구약에는 오늘 시편 71편의 주인공을 특화시켜서 “내가 평생토록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이 고백이 성령께서 고대로 가져가서 너도 그렇게 살라고 우리로 하여금 주의 십자가만 자랑토록 이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때 우리 속에서 말씀의 영토가 되는 거예요. 나의 영토가 아니고 말씀이 이동한 영토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토록 세상 속에 살려면 세상의 의미만 가득 축적하면서 그 속에서 버티기에 일관되게 살았습니다. 피곤한 것은 우리만 피곤하고 긴장되고 슬프고 짜증나고 그게 우리의 하루일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여기 시편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기쁘고 또 기쁘고 수시로 기뻐하면서 주께 감사할 수 있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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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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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