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빨랫줄 요한일서 5:20 260709
서울강의20260709a 요한일서 5장 20절(예수님의 빨랫줄)-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5장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여기서 갑자기 구역이 두 구역으로 나누어졌죠. “하나님께 속”한 그룹, 그리고 뒤쪽에는 “온 세상은 악한 자”의 것이다. 우리는 여기(한 동그라미) 있고-주님과 더불어 우리, 온 세상은 저기(따로 떨어진 동그라미)-악한 자와 더불어 그들, 이렇게 두 구역으로 나눈 게 아닙니다. 이렇게 구역으로 나누면 안돼요.
왜냐하면, ‘온 세상’이라 했거든요. 온 세상. ‘악한 자’를 ‘그들’이라 하면 이건 온 세상이 아니잖아요. ‘온 세상’이란 모조리 다, 영어로 하면 all, 전부가 악한 자라 해야 되죠. 그래서 이런 동그라미는 여기서 잘못된 동그라미입니다. 이 동그라미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렇게 해야 되겠죠. 지우고요. 일단 출발은 ‘온 세상’(큰 동그라미)입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 지배받고 있죠. 여기서 이 큰 동그라미 안에 들어있는데 따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함’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온 세상 안에서 이렇게 따로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작은 동그라미-우리는 하나님께 속한다, 이것은 온 세상에 예속되지 않는데, 포함되게 되어 있죠. 예속은 안 되는데, 포함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강물이 있는데, 달빛이 비춘다. 온 세상은 강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달은 어디 있느냐 하면, 온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저 위에 달이 떠 있죠. 그런데 달빛은 강물에 비추죠.
온 세상은 온 세상대로 견지하고 유지가 되면서 거기에 온 세상에 포함되지 않는 달빛이 온 세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온 세상 안에 속한(belong to) 게 아니고, 온 세상에 어쩔 수 없이 포함이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온 세상은 포함된 그런 사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으니까 틱틱거리면서 어떻게 해야 돼요? 자꾸 추방해야 되겠죠.
바로 이러한 요한일서 5장의 원리, 성경의 모든 원리는 어떤 분이 하신 일을 그대로 글로 옮긴 거예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 허락도 없이 이 세상에 그냥 나타났어요. 나타날 때, 그 분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죠? 이 땅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없죠.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고, 이 땅에 없죠.
없음, 없는 분이에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으니까 남편이 부재하다 하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남편 없이 태어난 분이 이 땅에 와버렸다 이 말이죠. 그럼 이건 섞인 거죠. 섞였으니까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미 온 세상에 속한, 육에 속한, 육신의 부모가 있는 인간은 이 섞여있는 예수님 쪽으로 건너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요.
일단은 이게 불가능해요. 육에 속한 자가 주님께 합류하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불가능해요. 가능치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는 악한 자에 속할 수밖에 없죠, 육이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까 (육과) 같이 섞일 수 없어요. 달빛이 비친 그 부분에 다른 옆에 있는 물을 아무리 튕겨봤자 달빛이 없어지거나 취소되지 않죠. 반영되니까. 비춰버리니까.
그걸 ‘형상’이라 하잖아요. 주님의 형상이 있는 곳에 인간의 육의 형상이 훼방을 놔도 그 달빛은 계속해서 유지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노동해서 얻은 게 아니고 외재적이거든요. 외부에서 준 형상이기 때문에 그 형상을 담고 있는 물방울조차 그 형상을 지울 길이 있어요, 없어요? 지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을 생명 받은 자가 훼손하거나 취소하거나 할 수 있는 재주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냥 늘 계시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의 형상을 내가 소유하려고 할 때, 그게 소유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어떻게 주님이 우리 소유가 됩니까? 안되죠.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그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으면서 하나님 쪽에서 그 사람을 소유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거예요. 적어볼까요? ‘구원이란, 소유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그 인간을 소유함으로써 성사시킨다.’ 좀 이해되시죠? 선악과 따먹은 자는 생명을 소유할 수 없어요. 소유할 수 없는데, 생명은 선악과 따먹은 자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선악과 따먹은 자가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소유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는 구원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정하지 않느냐 하면, 우리는 악한 자에 속한다는 이 원칙이 계속 유지되어야 되기 때문에요. 악한 자가 생명 얻어버리면 착한 자 됩니까?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악한 자는 끝까지 악해야 돼요. 생명이 있을 동안에 끝까지 죄를 지어야 되죠. 끝까지 죄를 짓고 죄를 나타내야 돼요. 그게 우리 할 일이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많이 기대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아직 건강하기 때문에 죄를 많이 지을 수가 있습니다. 아파 드러누워서 침대에 엎어져 있으면서 정신적으로 죄짓는 것 말고. 요양병원에 있으면서 짓는 죄 말고, 사회 나가서 온천지 싸대가면서 죄짓는 것은 주께서 뜻이 있어서 허락을 하신 거예요. 관절이 아픈데 어딜 돌아다녀요? 관절이 아파서 지하철도 못 타고 계단도 못 올라가는데. 지어봐야 자기 집구석에서 죄짓지, 밖에 나가서 공원에서 죄짓고 그런 건 못하잖아요.
할 수만 있거든 죄를 지음으로써 내 생명과 내가 주님을 소유할 수 없음을 늘 드러내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범죄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의해서 특히 산상설교에 비춰보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 죄 아닌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산상설교 같은 경우에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일을… 오른 눈을 빼버리라는 게 말이 돼요? 극단적인 예를 드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우리를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영역이 있잖아요. 너는 이 영역에서 네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고 너는 기껏해야 네가 속해있던 영역, 네가 태어난 영역, 네가 자라난 영역, 네가 공부했던 영역, 네가 취직했던 영역, 네가 시집가고 장가갔던 영역, 그 영역을 죄의 모습으로 드러내도록 주께서 그 자리를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 인생 자체가.
그렇다면 오늘 주제를 여기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악한 자에게 속한 우리에게 주님의 형상이 임했으면 이제 우리에게 할 일이 있는데, 악한 자의 지배를 우리를 통해서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에 한해서만 나는 원래 악한 자에 속했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이제는 세상에 떠벌일 수 있는 힘이 발생됩니다.
지가 잘났다는 것과 다르죠. ‘나는 잘났다.’가 아니라, ‘나 죄 안 짓는다.’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죄 짓고 있습니다.’를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께서 주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 할 일이 그렇게 힘든 게 아니고 재밌어요. 재밌고 즐겁다고요. 나만 쓰레긴가? 뭘 잘난 체해? 똑같은데. 전부다 시체 옷 입혀놓은 건데. 옷만 벗기면 시체로 드러나는데. 그렇게 될 때 이 악한 자가 가지고 있는 무기가 선악지식이거든요. ‘똑바로 해.’ 이거잖아요. ‘인간이 인간다워야지. 짐승도 아니고 말이야.’ 이게 선악지식이라고요, 선악지식.
선악지식이 노리는 점은 뭐냐? 우리의 육신은 못 노려요. 육신은 주께서 잡고 있기 때문에 못 노리는데, 주께서 허락하지도 않는 악마가 하나의 추적 장치를 달아놓은 게 있어요. 악마가 선악지식을 하면서 추적 장치도 같이 발생을 시켜놨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아입니다, 자아. 나. ‘나’라는 말이 좀 어려우면 아주 알기 쉽게 말하겠습니다. 글자 하나만 더 들어가면 돼요. ‘내 것’. 악마는 선악과를 가지고 내 것을 겨냥하면서 공격해옵니다.
내 것 중에 뭐가 있어요? 물론 사물이나 재산도 내 것, 부동산도 내 것이지만, 내 것이라 하는 것은 나의 위신과 체면, 내 자존심, 나의 명예, 나의 영광성 그런 거죠. 요한복음 12장에 그 이야기를 가득 써놨어요. 12장 43절,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거 뭐 딱이죠. 인간은 각자마다 자기를 빛내려고 하잖아요.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냐 하면 항상 자기 채점, 자기 점검에 나서요.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나의 의는 그 양이 어느 정도일까? 망가지고 망가져도 아직도 남아있는, 내가 남한테 내세울 수 있는,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의 의. 남들한테 빼앗기고 남들한테 욕 얻어먹어도 그래도 나만이 알고 있는 ‘나는 이 맛에 산다’는 자기 잘남의 요소는?’
항상 점검해요. 배가 열두 척 남았는지 항상 점검한다고요. 마치 옛날 할머니들 쌈짓돈 같아요. 없다, 없다 하면서 계속 파고 파도 쌈지 주머니에서 돈 나와요. 돈 나온다고요. 인간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쓰레기입니다.’ 해도 계속 나와요. 계속. ‘그래도 나는 쓰레기라고 아니까 의인이다.’ 끊임없이 자기 의가 남아있는 걸 누가 아느냐 하면 인간보다 더 똑똑한 마귀가 알고 있죠. 흔들기 들어갑니다, 마귀가. 흔들기.
어떤 청년이 은행에 돈 빌려서 6억을 가지고 SK하이닉스 반도체에다 몰빵을 했어요. 다 날렸어요. 2주 동안 다 날렸어요. 이렇게 떨어질 줄 몰랐다는 거예요. 12000 고점 찍는다 했는데 7600이 되어서 다 날렸어요. 그런 사람 방송에 나왔어요. 그 사람이 어떻겠어요?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합니까? 안하죠. ‘뭐 좋은 경험했다.’ 생각해요.
인간은 꼬깃꼬깃 자기의 선악이 있어요. 내가 선악을 안다는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마저 떨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밥입니다. 누구의 밥이요? 악한 자의 밥이니까 온 세상은 누구의 지배하에 있습니까? 악한 자에 속한 이게 바로 현실이에요, 현실. 현실적으로 수입이 얼마냐 그게 아니고 이게 현실이에요.
내가 못났다,가 현실이 아니라 내가 잘났다,가 현실이 아니라 누구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는 게 현실입니다. 누구라고 지칭할지는 모르겠는데 날마다 쫓기고 시달리고 뭔가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느끼는 그게 현실이에요. 그 현실에 대해 약간의 신경을 쓰는 학문이 바로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이에요.
정신분석에 관한 건데요. 여기에 대해서 어제 수요일에 약간 언급은 했어요. 과학 이야기를 했는데, 과학자들이 열심히 탐구하는 것, ‘저 별이 뭐냐?’, ‘이 기술을 어떻게 하면 여기서 획기적인 신약이 개발되느냐?’, 안 그러면 ‘스스로 갈 수 있는 자동차를 어떻게 인공지능과 결합해서 만들어내느냐?’ 과학자들이 뭔가 자꾸 연구하고 발명하고 이러죠.
그건 자기가 주체고 만들어진 물건은 객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 객체를 나누는 거예요. 그런 과학하는 사람들을 정신분석학자들은 정신병이라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없어야 될 게 생겼다는 거예요. 그게 ‘주체’라는 겁니다. 주체는 발명품이 아니에요.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에요. 자율자동차가 아니고, 주체는 없는 거예요. 없는데 지금 있다고 시작한 게 지금 정신병의 시작이라는 거예요. 없는데.
책은 있지만 주체는 없잖아요. 책은 있지만 주체는 없죠? 없는데 “책 가져와.”하면 “어? 내 건데?” 내 거라 하잖아요. 갑자기 내 것이 생겨요. 내 것이라는 게 생겼단 말이죠. 그런데 정직하게 바라봅시다. 자연세계에서 자연세계가 우리한테 주체를 허락했습니까? 허락한 적 있어요?
별이 “○○야, 너는 훌륭한 사람이다.” 별이 그런 계시를 내려줍니까? 달이 그런 계시를 내려줘요? 달과 별은 자기 운동하기 바빠요. 지금 자기 일이 바쁘지, 누굴 관여 못해요. 들에 핀 코스모스가 “아저씨, 아저씨 살 좀 빼야 되겠어요.” 뭐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코스모스는 지금 그런 데 관심도 없어요. 자연 어디를 가도 주체라는 게 없습니다!
자연에 주체가 없잖아요. 자연에 있는 건 뭡니까? 육이죠. 육체가 있죠, 육체. 주체가 있는 게 아니고 육체가 있다니까요. 우리는 육체가 있잖아요. 늙어 죽어가지만 육체가 있잖아요. 육체에다가 마귀가 추적기를 달아놓은 게 뭐냐 하면, 주체, 자아 추적기를 달아버린 거예요. 자연에 속했는데, 자연스럽지가 못해요.
어떤 애가 일곱 살 때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 그럼 해와 달과 별이 막 애곡합니까? “아이고, 걔는 서른까지 살아야지…” 뭐 이렇게 애곡합니까? 우는 건 누구만 울어요? 같은 인간들과 부모만 울죠. 애가 안됐다고 하죠.
그러나 애가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애가 무거운 물체에 깔려서 숨을 못 쉬었다. 숨을 못 쉬면 애 시신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죠. 그래서 자연은 새로운 자연 들어왔다고 대환영 파티하고 이럽니까?
자연의 특징은 굉장히 무심해요. 무심(無心)인데 이걸 정확히 말해서 ‘평화’로다. 자연은 평안해요. 이걸 문자 써서 표현하면 ‘오뉴월의 개 팔자’. 개가 부정선거 때문에 데모하고 이럽니까? 이런 거 없죠. 개가 윤석열 재판에 관여하고 이런 게 있습니까? 이란의 개는 잠 잘 자고 있어요. 가자 지역의 개도 잘 자고 있고. 먹을 거 안 주면 죽으면 그만이고. 배짱도 그런 배짱 없잖아요.
호들갑을 떠는 건 누구에요? 인간만 호들갑 떨죠. 그러니까 인간은 뭐보다 못하다? 개보다 못하다. 인간은 개보다 못한 거예요. “아니야, 인간은 존엄해.” 누가 이야기했어요? 악마는 선악가지고 인간을 조종하잖아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네가 알고 있는 선악지식은 네가 신이 될 수 있는 필수요건인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더 열심히 악을 버리고 열심히 선한 쪽으로 살아야 그게 사람다운 사람 사는 거야.”라고 누가 그렇게 독촉을 해요? 빚쟁이 하듯이. 빚쟁이가 정확한 거예요. 계속 빚쟁이가 선을, 선을 자꾸 요구하는 겁니다.
그 점을 하나님이 다 아시잖아요. 아시고 율법을 보내셨죠. 로마서 7장에서는 간단합니다. 네가 바르게 살려고 백날 애써도 너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너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정도가 아니고 율법의 요구를 거역하는 요소가 네 안에 이미 들어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선악 중에 선 빼놓고 나머지가 악,이 아니고, ‘선+악=악’ 이것이 주님의 해석이란 말이죠.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양심이 있다는 자체가 악이에요. 그거는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아니면 알 자가 없어요.
그냥 내가 나한테 맡겨버리면 ‘그래도 착했잖아. 그래도 남은 도와줬잖아. 이번 일로 약간 실수해서 교도소 갔지만, 평소에 내가 내 친구한테 얼마나 잘한다고. 술 사주고.’ 자기는 양심껏 친구를 위해서 우정을 표했다는 거예요. 그럼 그 우정은 어디에 남아요? 내 선한 창고에 고스란히 남는 거예요.
딸이 “아빠, 이거 이거 해줘.”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아빠가, “무슨 권리로?” “나 그동안 애 안 먹였잖아.” “그게 무슨 말인데?” “나 착한 딸이잖아.” 착한 딸이라는 거예요. 그럴 땐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착해서 평안하냐?” ‘평안하뇨?’ 물어보세요. “평안해?” “나는 착한데 외부에서 안 알아줘서 내가 힘들어.” 이렇게 한다고요.
나는 착한데, 착함에 대한 합당하고 정당한 대우를 못 받고 있어서 나는 괴롭다 이 말이죠. “그럼 누가 나쁜데? 너는 안 나쁜데 누가 나쁘지?” 나의 가치를 안 알아준 그 사람들이 나쁘죠. 그 사람들이 나쁘다는 거예요. 그럼 너의 대책은? 없죠. 대책은 없어요. 대책은 없으니 어떻게 살아야 돼요? “그냥 이대로 착하게 살래.” “끝은?” “몰라.” 결국 긴긴 대화의 끝은 뭐냐? “몰라.” 어떻게 살지는 몰라.
“아빠, 어떻게 살지 가르쳐줘.”, “목사님,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지 가르쳐주세요.” 거기에 대한 정확한 답은 “네가 없는데? 너라는 게 아예 없는데. 하나님이 너라는 걸 아예 만들어준 적이 없는데.” 너, 주체, 자아를 만들어준 적이 없어요. 자아는 세트에요.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같이 세트로 생긴 거예요.
그래서 자아는 반드시 무엇이 있을 때 등장하느냐? 잘났을 때, 자기 영광이 있을 때 자아가 더욱 더 확 올라오죠. 여러분, 술 먹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소주 먹고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라오죠. 상상만 하세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되듯이 착한 일만 하면 자아가 확 올라와요. 딸이 뭐 좀 성공하면 아버지가 확 올라와요. 자식이 공부 잘하면 자아가 싹 올라오고요. 어쩌다 주식 좀 올라가지고 ‘아빠, 차 사줄까?’ 이렇게 나오면 확 올라와요.
전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어떠냐? 악마스러워요. 인간 온 세상이 악마스러워요. 자연스럽지 않고 악마스러워요. 해와 달과 별은 지금 주님의 지시 따른다고 바빠요. 참새도 마찬가지고 들풀도 마찬가지고. 주일 설교 때 그랬어요. 왜 우리는 참새가 되지 못하고 들풀이 되지 못하는가? 무엇이 그렇게 방해하느냐 이 말이죠.
평화? 행복? 자유? 가까운 데 봐라! 들풀, 참새 봐. 일부러 또 자연인 한다고 산에 가서 방송 나오고 난 뒤에 문 닫고 도로 땅으로 내려오지 말고. 인간 자체가 이미 악한 자의 종이 되었어요. 악한 자의 종이 되었어요, 인간 자체가. 모든 인간은 악한 자의 종이고 그게 육에서 나온 건데요. 육 자체, 아빠 엄마에게서 자식으로 태어난 그게 잘못이에요. 아담과 하와의 육에서 태어난 그 DNA 자체가 잘못이에요. 잘못입니다.
그럼 예수님처럼 아빠 없이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야 그것이 바로 악한 자에 속하지 않죠. 악한 자가 인간을 장악했잖아요. 그럼 악한 자에 포함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 되면 되잖아요. 그 아이디어가 괜찮죠? 괜찮지 않습니까? 육에서 태어나서 문제가 된다면, 육에서 태어난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태어나면 안 될까요? 그 대신 조건은 뭐냐? 육에서 태어난 걸 죽이고. 육에서 난 것을 없애버리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면 어때요? 그러면 범죄한 아담이 갖고 있던 한계를 처음부터 벗어날 수 있겠죠.
그래서 오늘 강의는 ‘자아를 없애고 어떻게 새로운 자아관계, 주체관계를 형성하는가? 그 방법은 뭐냐?’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일단 자아는 없애야 돼요. 없애는 방법이 뭐냐? 아까 여기 토마토 있느냐고 그냥 물어봤는데요. 없을 줄 알고 물어봤어요. 토마토가 있다 치고요. 토마토를 두 손으로 쥐고 양옆으로 꾹 압축하게 되면 토마토 알맹이가 밑으로 툭 떨어지겠죠, 질펀하게. 책상 다 버릴 거예요.
토마토의 양쪽을 쥐고 누르면 알맹이가 툭 떨어지겠죠. 떨어진 것이 바로 인간에게 자아가 되는 거예요. 압축이 뭐냐? 꾹 누른 양손 중 한쪽을 시작지점, 다른 한쪽을 끝지점이라 하고 압력을 가하면 으깨지겠죠. 으깨져서 툭 빠져버리고 껍질만 딱 들어붙죠. 토마토 먹으면서 이런 경험 많잖아요. 토마토 한 개 먹는다고 온 손 다 버리고….
시작과 끝, 알파요 오메가로 우리 자아를 양쪽에서 밀어붙이는 거예요. 밀어붙이면 시작도 주님이고 끝도 주님이죠. 주님께서 작용해버리면 시작과 끝을 수용하고 받아줄 수 있는 자아는 주님의 일이 감당됩니까? 감당 못하죠. 감당 못하면 주의 일에 누가 배제되어야 돼요? 누가 빠져야 돼요? 내가 빠져버려야 되죠. 자아를 그렇게 빼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일이 된다면. 그게 로마서 11장 35절, 36절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갈 때, 지금 뭐를 빼라는 거예요? 자아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죠. 한 것도 없는 게 왜 주의 일에 얼쩡댑니까? 내가 아침에 뭘 먹었다. 그거 무슨 일이에요? 내 일이에요, 주의 일이에요? 주의 일인데 거기에 내가 뭐 요리를 잘했네, 왜 끼어드냐 이 말이죠.
그 점을 토마토로 이야기 안했지만, 사도 바울은 다른 걸로 이야기했어요. 1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렇게 했어요.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진실로, “아멘” ‘진실로’라는 뜻이에요, 아멘.
그러니까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 여기 ‘누가’라는 자리에 들어갈 인간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지요. 없으면 없는 거예요. 자아가 없는 거예요. 주의 일에는 자아가 필요치 않은 거예요. 주의 일에.
우리가 고민한다는 것은, 누가 나를 지적해서 그래요. 손가락으로 지적해서 그래요. 주님이 지적합니까, 악마가 지적한 거예요? 악마가 지적한 거예요. 뭘 겨냥해서? “너 선악 알잖아. 선이 뭔지 악이 뭔지 알잖아. 그러니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란 말이야. 그건 네가 잘하는 거고, 그건 이미 네가 익히 알고 있는 거다.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인생 살아.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너 천국에 받아줘.”
이거 지금 누가 내뱉는 보이스에요? 보이스 피싱 정도가 아니에요. 누구 보이스에요, 이게? 누구 보이스입니까? 악마의 보이스잖아요. 악마의 보이스인데, 이게 마귀의 목소리인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보조 맞춰가며 시달리고 있다는 거예요. 이거 뭐 자기 즐기는 거예요, 뭐에요? 악마한테 시달리는 그것도 취미입니까?
힘든 건 누가 힘드냐? 본인이 힘든 거예요. 왜 본인이 힘드냐? 자꾸만 마귀와 한통속 되어서 이야기하고 주고받으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내 것 돌아와요, 내 것. ‘아, 내 것 만드는데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노? 내가 되고 싶은 나인데… 아휴,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차라리 자살해버리자.’ 이런 거. 내 인생이 내 것이라는 거예요. 내 것. 마귀한테 옴팍 속았어요. 속았습니다.
그런데 자식만 속은 게 아니고, 부모도 같이 속았어요. “얘야, 힘내야지. 어떻게든 일어서라.” 말씀은 또 성경말씀 있는 대로 다 동원해가지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라.” 여덟 번째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요? 아홉 번째 일어납니까?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분량을 확 늘여버려요. 일곱 번에 일흔 번, 490번 하고 난 뒤에 다시 질문하라는 거예요. 모든 원인은 내 것이 있다는 데에 이유가 있어요. 내 것이 있다는 데에. 문제는 내 것을 내가 없앨 수 있는 재주가 없는 거예요.
그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입니다. 5장 19절. 온 세상은 악한 자의 것이죠. 악한 자의 지배, 악한 자 소속입니다. 여기 ‘온 세상’이니까 이 안에 있는 인간들 중 하나라도 예외 될 자가 있다, 없다? 아무도 없어요. 모세든 엘리야든 마리아든 어떤 자도 모든 인간은 온 세상에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라는 자아성과 주체성을,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이미 선악지식으로 제대로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자아라는 것을 인간에게 동반해서 형성시켰어요. 그래서 자식을 낳고 육에서 육을 낳아도 이것은 면제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 온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다른 저 곳에 계신 분이 오셔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죠. 뭐가 빠졌어요? 아빠가 없죠. 육은 육이지만 아빠 없는 육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투입했어요. ‘반(半)인간인가? 이분의 일 인간인가? 온전한 인간인가? 온전한 육인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쨌든 간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럼 온 세계에 속하지 않는 그 분이 온 세계에 쑥 들어와버린 거예요. 어느 설교에서 이것을 ‘잠입’이라 했는데요. 이 속에 들어와버렸어요. 들어오니까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도 없죠. 모든 인간은 다 권세로 잡았는데 쑥 들어온 이 예수님은 악마가 다스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분은 인간이에요. 육신을 갖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온 세상에 두 종류의 육신이 생겼어요. 하나는 성령에 의해서,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받을 때 비둘기 같이 성령이 왔죠.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 두 부류가 발생되는 겁니다. 생겨났죠, 성령 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 때문에 온 세상 이쪽은 ‘악하다’, ‘정말 악하다’를 성령을 받은 주님께서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정죄가 가능한 거예요.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시범이에요. 주님께서 오시고 할 일 다 마치시고 다시 아버지 쪽으로 가셨잖아요. 영광된 육신으로 갔죠. 여기서 성립된 게 있어요. 코스. 코스는 빨간 걸로 표시할게요. 이 코스가 구원코스입니다. 이 코스대로 밟으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자, 이 코스대로 밟은 사람이 과연 있는지? 있어요.
마태복음 8장 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지금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천국에 있는 믿음을 확실하게 주께서 제시했다는 사실이에요.
“네 믿음이 옳은지 어떻게 알아? 내 믿음 옳은지 어떻게 알아? 아무도 몰라.” 이게 아니고, “네 믿음 너는 옳다고 하지? 내가 보기엔 아니야. 내 믿음이 더 좋아.” “아니야…” 서로서로 백 명이 지 믿음 자랑해봐야 이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이라고 딱 집을 수가 없잖아요, 인간 대 인간은.
그런데 예수님께서 “딱 이 믿음이 천국에 간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믿음 아니면 모두 불합격이라는 뜻이에요. 어쨌든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의 전형적인 스탠다드(기준)가 나왔다는 이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그럼 백부장이 뭐라고 이야기했기에 주께 이렇게 칭찬을 받았는가? 9절에 보면,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나이다” 여기서 백부장은 주님 앞에서 자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아가 없어요. 질문을 다시 합시다. 자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것이 없어요.
주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수용체로서의 자기만 있을 뿐이지, 내 것이 따로 없다니까요! 내 것이 없으니까 악마가 뭐를 공격 못해요? 내 것이 있을 때 “똑바로 살란 말이야. 인간답게 살아. 성경말씀은 폼이야? 착하라고 하면 착하게 바르게 살아. 성경말씀 지켜야지.” 악마가 이렇게 되는데, 내 것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과녁이 없어요, 과녁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표적을 빗나가다)가 어떻고 하는데, 아니 과녁 자체가 없는데 무슨 하마르티아에요?
표적이 없는데요. 악마의 모든 화살이… 중국 영화에 보면 수만 개의 화살이 공중에서 시커멓게 날아오잖아요. 시커멓게 날아와도 그거 맞을 상대가 없는데요. 선악체계를 안 가졌으니까. 전에는 내가 선악체계를 갖고 있었는데, 거기서 벗어나버렸어요.
선악체계라는 것은 내 자아를 내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될 조건 하에 선악체계가 주어진 거예요. 마귀하고 언약적으로 체결되어서. “네가 신이 되려면 이거 지켜야 된다.” “오케이. 내가 신되기 위해서 선악체계 중에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할게.” 지금 이런 조건 하에 계약을 한 거예요. 그런데 내가 없어버리면? 내가 없으면 마귀가 화살을 수만 개 쏘는데 도착지점이 없죠.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예수님 것만 남아있고 내 것은 없으니까 선악가지고 예수님 쏠 겁니까? 어떻게 할 거예요? 예수님은 이미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잖아요. 그러니까 그 화살이 소용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지난달에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한테는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그다음 뭡니까?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지키는 자가 하나님이 내 것 지킨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죠. 그 근거가 뭐냐? 바로 마태복음 8장 9절,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 내게 있어서 내 일은 아예 애초부터 없고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주의 일입니다.” 이만한 믿음이, 세상에! 믿는 자들이 집합한 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 말이죠. 이게 천국이다.
걱정할 나가 없어졌어요. 전에는 걱정거리라고 생각했는데, 걱정거리를 분해해보니까 시작과 끝을 다 아시고 그 시작과 끝을 함축해서 압축해서 우리 안에 알려주기 위해서 집어넣는 그 일이 우리는 걱정거리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그 빨랫줄 있잖아요. 빨랫줄 하나가 나한테 척 담긴 거예요.
그럼 빨랫줄이기 때문에 빨랫줄을 따라가면 뭐가 나와요? 처음부터 주님이 알파로 계시고, 이쪽 따라가면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이루었다.’가 되니까 빨랫줄에 걸쳐 있는 우리는, 주의 일이 나의 일을 추방시켜서 주의 일에 합류시킨 거죠. 정말 주의 일에 감전당했어요. 찌릿찌릿 감전당한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성령이 오기까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때까지 주님은 이 땅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온갖 고생고생 다 했죠. 악마에게 온갖 수모를 다 당했죠. 육신으로 주께서 그러한 시험도 받으시고 다 했잖아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는 그런 고백을 했던 백부장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육신을 버릴 때까지는 주님이 겪었던 그 코스대로 밟아나가야 돼요. 그래서 저는 그림을 이렇게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흔히 매일같이 생각하는 영역, 그 다음에 말씀의 영역, ‘말씀이 어떻게 활동하는가?’
차이점 대번 나죠.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누가 부각됩니까? 나. 목사님, 나 어떻게 살아야 돼요? 아빠, 나 어떻게 살아? ‘나’가 있죠. 말씀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말씀이 어떻게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잖아요. 육신으로 오신 것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육신을 가진 인간들을 자기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 나부터 말씀세계까지 어떤 코스를 밟는가를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신 거예요. 말씀을 통해서.
백부장도 그렇고. 계속 군데군데마다 내게 속한 사람은 어떤 고백이 나오는데 그 고백이 너도 나올 수 있는가 한번 보라는 거예요. 그런 고백했다고 백부장이 갑자기 재벌 되고 그런 거 없죠? 그렇다고 백부장이 소령에서 떨어져서 대위로 제대하고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나 그것조차도 백부장은 뭐로 봅니까? 주님의 빨랫줄이에요. 주님의 빨랫줄 매듭에 자기가 이미 들어가 있는 거예요. 고무줄 놀이할 때 흔들어지는 고무줄 안에 자기가 이미 포함되어 있단 말이죠.
그게 천국에 가는 믿음이에요. 그 외에 다른 믿음은 천국에 못 갑니다. 지옥 갑니다. 확실하게 이해해야 돼요. 자아가 소실되지 않는 믿음은 지옥 가고, 자아가 소실된 믿음은 천국 가는 거예요. 문제는 그 자아를 소실하는 방법은 우리에rps 없다는 거예요! 없는데, 말씀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말씀은 활동하는데, 어떻게 활동하는가? 육신에 의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말씀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이 코스를 밟아왔다는 거죠. 그 밟아온 코스를 우리가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코스와 일치되는지를 한번 검토해보자는 거예요.
밟아온 코스가 마태, 마가, 누가복음. 요한복음도 일단 포함되겠죠. 이 이야기,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함축해서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일서.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짓지 않는다.’ 너무나 단출하게 함축해서 결론부터 제시했어요. 따라서 이러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우리가 두 번째 시간에 봐야 돼요. 이걸 어떻게 보느냐? 구약을 봐야 돼요.
미리 이야기합니다. 구약에서 무슨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 어떻게 나가 없어지고 주의 말씀이 되느냐?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성소. 성전 개념이에요, 성전 개념. To be continued, 두 번째 시간에 계속합니다.
서울강의20260709b 요한일서 5장 20절(예수님의 빨랫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해서 그건 나도 생각하고 너도 생각하고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나라는 것이 중심에 이미 꽉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그다음부터 하나님이든 복음이든 십자가든 율법이든 간에 내 자리를 후쳐 내질 않아요. 마치 나는 돌비석 같아요, 돌비석. 우뚝 솟은 돌비석. 나는 요지부동이에요.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팔루스(phallus, 남근상)’라고 합니다. 팔루스라 하는 것은, 내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자리가 탐나는 거예요, 자식은. 아버지가 훌륭하거나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아버지 그 자리가 탐이 나는 거예요. 실제로 아버지가 잘난 체하고 어른 행세 안 해도 그 자식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그 자리를 탐내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위가 아버지가 내세우는 권위가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권위가 모여서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부부끼리 실컷 싸움하고 난 뒤에 자식이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면서 엄마 편든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여보, 이거 드세요.” 그게 훌륭한 아버지라서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그 가정의 최고 남성 자리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무의식적으로.
그게 국가적으로는 왕의 자리를 원하고 있고 대통령 자리를 원하고 있고 최고의 자리를 원하고 있으면서, 그 원하는 자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고개 숙이고 복종할 마음 자세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요지부동으로 흔들림이 없어져야 자기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돌비석 자리거든요. 내 무의식이. 내 무의식에서 아버지를 신봉하니까, 진짜 있는 아버지 말고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자기가 상상해서 만들어내요. 그 아버지를 만들어냈죠. 잘 들으세요. 있지도 않은 훌륭한 아버지를 만들어냈죠. 대체로 현실의 아버지와 차이가 나요. 어쨌든 아버지는 이러해야 된다는 기대치를 만들어놓고 내가 그 아버지 자리를 탐내요. 이게 확고합니다, 인간은. 이게 확고해요.
날 때부터 병자, 환자에요. 아버지를 이용해서 뭘 노린다? 자기 자리, 자기의 가치 확보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이걸 조작해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무의식이니까 감추고 있죠. 감추고 있으면서 남한테 잘해주고 ‘뭘 도와드릴까요?’ 종인 척 이렇게 행세를 한다고요. 겸손한 척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회에 나오게 되면 결국 사회에서 ‘너 월급 좀 더 줄까?’ 아니면 ‘네가 대장질할래?’하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선택지를 통해서 인간은 자기 무의식, 본색이 사회를 통해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여기 나온 ‘Eres tu(그대는)’이라는 노래입니다.
첫 번째 노래, ‘Eres tu(그대는)’, 두 번째 노래가 ‘서울 이곳은’, 세 번째 노래가 ‘By the light of the silvery moon(은빛 달빛 따라서)’에요. 하면서 말씀에 접근한다고 제가 일방적으로 생각해봤어요. ‘Eres tu(그대는)’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Eres tu(그대는)]
Mocedades(1973)
Como una promesa, eres tú, eres tú.
그대는 나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
Como una mañana de verano
어느 여름날 아침처럼
Como una sonrisa, eres tú, eres tú.
그대는 나에게 미소를 주는 사람
Así, así, eres tú.
그런 사람이 바로 그대입니다
Toda mi esperanza, eres tú, eres tú.
그대는 나의 모든 희망
그대는 □해놓고, 여름날 아침. 그대는 나에게 미소 주는 사람. 그대는 나의 모든 희망,….
Como lluvia fresca en mis manos
내 두 손에 고인 신선한 빗물과 같은 사람
como fuerte brisa, eres tú, eres tú.
그대는 시원한 산들바람과 같은 사람
Así, así, eres tú.
그런 사람이 바로 그대입니다
Eres tú como el agua de mi fuente
그대는 내 마음의 샘물 같은 사람
Eres tú el fuego de mi hogar
그대는 벽난로의 불꽃 같아요
Eres tú como el fuego de mi hoguera
그대는 벽난로의 타오르는 불꽃 (나를 외롭게 하지 않는 모닥불)
Eres tu el trigo de mi pan
그대는 빵의 밀알 같은 사람
Como mi poema, eres tú, eres tú.
그대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사람
Como una guitarra en la noche,
밤에 울리는 기타소리와 같은 사람
Todo mi horizonte eres tú, eres tú.
당신은 내 마음의 지평선과 같은 사람 (나의 희망이 된단 말이죠.)
Así, así, eres tú.
그런 사람이 바로 그대입니다
…
그다음에는 같은 거니까 넘어갑시다. 이렇게 나를 생각해줄 사람을 내가 찾고 있는 거예요. 본인은 요지부동 변하지 말아야 됩니다. ‘니 나한테 반했나?’ 하는 말처럼 이 □에 해당되는… 항상 나는 이 빈자리를 비워놓고 이 정도로 나를 칭송하는 자를 사회에서 찾고자 하는 거예요.
이 전체를 사랑이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규정해요, 사람들은.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아니면 결혼 안하겠어!’ <나는 솔로> 백번 나가도 그런 남자, 그런 여자를 찾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없으면 나 됨을 포기해야 되잖아요.
인간은 포기라는 걸 몰라요. 내가 이미 돌부처처럼 돌비석처럼 확고하기 때문에 포기하려면 ‘너 그 자리 치워.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뭐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것을 일단 내가 수용안하고요. 두 번째로, 정말 누가 와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잠시 내 자리를 대여해주고 빌려주지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으로 인하여 나라는 게 새롭게 규정된다니까요. ‘나는 주님 보시기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래. 그래서 나는 대단해.’
이 병을 어떻게 고칩니까? 못 고쳐요. 고칠 수가 없어요. 교회에서 ‘나는 부족합니다.’ 해놓고 사회에서 누가 ‘Eres tu’에 나오는 가사처럼 해주면요. 푹 빠지죠. 푹 빠집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나한테 이런 대우해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준비자세가 되어 있어요.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니까요.
그래서 이 사회는 모두가 이러한, 나를 사랑해주고 칭찬해주고 나를 보살펴주고 보듬어주는 그런 사람을 서로 찾기를 바라는 사회. 그걸 한마디로 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해답은 이미 본인의 존재에서 나왔어요. ‘나를 위해주는 사람 같으면 나는 좋겠습니다. 심지어 그게 삼위일체든 예수든 하나님이든 나를 위한다면 내가 믿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빠, 예수님이 누구야?” “왜?” “믿을 용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진짜 나한테 잘해줘? 그럼 믿을게. 안 믿는 것보단 나으니까. 손해 안 나니까. 하나라도 다리 걸치는 게 나으니까.”
전부다 이야기가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이 세상은 나에게 뭘 해줄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낌없이 그 사람에게 해줄 거야.’라는 거래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걸 위해서 사람들은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쓸쓸하고 허전한 촌에 있기보다는 어디로 갑니까? 서울로 가는 거죠, 서울.
‘서울 이곳은’ 가사 봅시다. 한 걸음 더 나가는 거죠, 서울. 서울 갔는데 잔뜩 기대를 했어요. 기대 없이 간 게 아니고, ‘남의 종이 되어야지.’ 이래서 간 게 아니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내가 원하는 직장을 얻고 사람들에게 사람처럼 취급받는 그걸 목표로 갔는데 어떻게 돼요? ‘아무래도!’ 갑자기 고함쳐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서울 이곳은]
장철웅(1994)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외로움에 길들여진 후로
차라리 혼자가 마음 편한 것을
‘외로움에 길들여’졌다는 이것, 줄 그어놔야 돼요. 정말 이겁니다.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외로웠어요. 자기밖에 모르니까. 이젠 내가 원하는, 내가 필요한 것을 준다면 나는 그들과 사귈 용의가 있다. 이러면 안 외롭습니까? 잘해줄 때까지만 안 외로운데, 그 사람이 떨어져 나갈까봐 벌벌 떨고 긴장되어 있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언제 나 배신 때리고 가지 않을까? 만나도 문제고, 헤어져도 문제고요. 차라리 혼자 살까, 저 바다에 누워서? 외로운 물새 될까? 세상에 나오는 모든 노래, 가사 있는 모든 유행가 노래가 전부다 서울의 달 이 노래 하나로 함축이 되어 있어요. 아까 Eres tu 그거하고요.
어쩌면 너는 아직도 이해 못 하지
내가 너를 모르는 것처럼
언제나 선택이란 둘 중에 하나
아닌데요. 선택이란 둘 중에 하나가 아니에요. 둘 중에 하나라는 걸 지켜보는 제3의 초과적 눈이 있어요. ‘너는 어떤 선택을 해도 그것은 시작도 아니고 끝점도 아니다. 알파도 아니고 오메가도 아니다. 그건 너의 일이야.’ 그걸 지켜보는 눈.
연인 또는 타인 뿐인 걸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나의 슬픔을
시도해 봐도 안 되는 모양이죠.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나의 슬픔을’. 그걸 또 위로해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합니까?
무심하게 바라만 보는 너~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자포자기해요.
처음으로 난 돌아가야겠어
힘든 건 모두 다 다를 게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뿐이야
휴식 잘~ 되겠다. 미련 남아서 휴식이 되겠어요? 안돼요. 그다음에 끝까지 자기 의 있잖아요. 나 너 이해할 줄 아는 괜찮은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나는 나 할 도리 다했어. 나는 냉정하게 안했어. 나는 너한테 미안한 감정을 가질 정도로 나는 너를 깊이 생각해줬어. 그러니까 너무 욕하지 마.’ 결국 미안하다는 것은 상대방한테 미안한 게 아니고, 욕하지 말라는 사전 방어태세죠. 아이고, 얍삽해라. 그다음에 뭡니까? 또 되지도 않는, 성사될 수 없는 부질없는 허세를 던집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휴식이란 그런 거니까
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져
너를 다시 만나면 좋을 거야
이 노래 들을만하죠, 가사가. 그러니까 이 노래가 나 좋아하는 사람 찾아가다가 이건 완전 사달 났죠. 작살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촌으로 갈까요, 다시 도시로 서울로 기어 올라올까요? 또 기어 올라옵니다. 삼세판이네 하면서 미련이 남아서. 한번 유혹의 맛을 봤으면 촌에 가서 참는 것도 힘들어요. 다시 도시로 와서 얻어터지고 또 촌에 내려가요.
이러다가 자기 세월 다 보내는 거예요. 나중에 그러다 청춘 다 지나가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늙은 것 때문에 첫사랑 상대방한테 못 나타납니다. 성형수술을 하든지 무슨 조치를 하지 않는 한. 자기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그냥 지켜나 볼게’ 이런 식으로 또 나가요. 아휴, 인생사는 게요, 전부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 돌아오는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세 번째 노래를 한번 보겠습니다.
[ By the light of the silvery moon ]
Ann Breen
I was strolling down the glen
난 골짜기를 산책하며 내려오고 있었네
When I spied a fair young man
내 눈에 멋진 젊은 남자를 보았어요
He was asking a favour of the moon
그는 달님께 소원을 빌고 있었죠
원래 Ann Breen이라는 가수가 찬송가 가락을 많이 이용해서 노래를 부른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달님께’라고 하지만 이것은 세상을 향하여 하는 거고, 실제로는 ‘주님께 소원을 빌었다’ 이렇게 보면 돼요.
Ah but yet he was so young
우리는 아직 순진하고 어리지만
And we were both as one
우리는 모두 하나처럼 느껴졌어요
Neath bright silvery of the moon
밝은 은빛 달빛 아래에서
So shine on silvery light
은빛 달빛이여 비춰주소서
Shine on through the night
밤새도록 비추소서
이제는 주님께서 자기를 축복하라고 이렇게 한 거죠.
The nightingales are singing there sweet song
나이팅게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오네
For there’s not a time so sweet
이보다 더 달콤한 시간은 없어요
As when two lovers meet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는 것처럼
Neath the bright silvery light of the moon
밝은 은빛 달빛 아래서
He gave to me a ring
그는 내게 반지를 선물로 주었어요
둘이 잘 성사가 되는 것 같아요. 축하할 일이죠.
We named our wedding day
우리의 결혼식 날을 정했어요
We planned on being married in the spring
우리는 봄에 결혼하기로 했었죠
Ah now he is dead
하지만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어요
And lying in his grave
그는 무덤 속에 누워있어요
이것 때문에 내가 이 노래를 채택한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의 영역에 접근하게 되면 말씀의 영역은 죽지 아니하면 말씀 영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지금 들어가기 전까지는, 죽기 전까지는 굉장히 행복했어요. 행복하다는 것은 어느 노선의 연속입니까?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공 달성이 코앞에 이르렀다는 거예요. 그런데 2번도 능가했어요. 서로 마음이 합쳐져서 한마음, 한몸이 되었으니까 2번도 넘어갔는데, 드디어 이제 내가 이렇게 살 거라고 남한테 자랑질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었는데요. 3번에 들어오기 직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무덤 속에 누워있어요.
Neath bright silvery of the moon
밝은 은빛 달빛 아래에서
So shine on silvery light
은빛 달빛이여 비춰주소서
Shine on through the night
밤새도록 비추소서
The nightingales are singing there sweet song
나이팅게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오네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는 무덤에 있는데 그 무덤 위에서, 주여. 은총의 빛을 비춰주소서.
For there’s not a time so sweet
이보다 더 달콤한 시간은 없어요
As when two lovers meet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는 것처럼
Neath the bright silvery light of the moon
밝은 은빛 달빛 아래서
그러니까 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시 어디로 돌아갑니까? 절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 전에는 내 것, 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죽고 보니까 정신이 번쩍 들죠. 내가 누구를 만난다 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는 거예요. 여기서는 달빛, 주의 일이다.
그럼 어떻게 돼요? 침착하게 다시 내 것 같은 것은 아예 없음을 알아야죠. 죽음을 통해서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주의 일이라는 거죠. 앞의 두 노래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세 번째 노래만 맛보기로 듣겠습니다. 찬송가 가락이 아주 명랑해요.
만약에 이 사람이 말씀의 영역에 오지 않은 사람 같으면 울고불고 다 집어치우고 진짜 목숨 끊고 난리 났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뭐가 중요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라는 그것은 인간이 못 만들어내요. 주께서 말씀의 영역에 그걸 원칙으로 세워놓고 자기 사람들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하는 상황과 사건을 그 사람 인생 속에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파요 오메가가 먼저에요. 하나의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백년의 짧은 과정이잖아요. 알파요 오메가로 압력을 가해 압축해버리면 거기서 큰 사건이든 무슨 사건이든 자아가 알맹이처럼 쑥 빠져버리고 우리는 그냥 주님의 빨랫줄처럼 거기에 하나로 포함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 때에 내린 결론이라면, 그럼 구약 때, 그리고 중간에 있는 산상설교 그것도 마찬가지지만, 산상설교, 마태, 마가, 누가복음 다 구약에 바탕을 두지 않습니까. 그럼 구약 때부터 이런 결론이 이미 있었단 말인가? 있었어요.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이스라엘에게만 만들어진 게 있어요. 이스라엘에게만. 보통 인간들이 뭘 만들 때 어느 민족이든 얼추 비슷한 걸 다 만들어요. 그런데 다른 민족은 절대로 못 만들고 이스라엘만을 위해서 만들고 생겨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언약궤는 모세와 하나님이 단독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이 땅에서 생겨나지 않는 물건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고 성령 받은 그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 언약궤가 만들어졌잖아요. 언약궤가 바라보는 방향이 있어요. 그게 뭐냐? 동쪽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동쪽을 이야기하려 해요.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언약궤를 구획하는 이 지역을 성소라 하는데요. 성소의 서쪽, 막혀있습니다. 북쪽, 문이 없어요. 남쪽, 문이 없습니다. 유일한 문은 동쪽에 있고 동쪽에만 문이 열려있습니다. 동쪽으로 개방되어 있어요.
그러면 언약궤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는 장소잖아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언약궤 중심으로 인간을 만난다. 또는 하나님이 언약궤 중심으로 이 땅에서 일을 하시려고 하신다.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원래 성소에 있는 것은 못 들어오게 하려는 거예요. 못 들어오는데 한쪽 문은 열어놓은 거예요. 어느 쪽이냐? 동쪽입니다. 동쪽을 지향한다, 동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동쪽에서 누가 오신다는 거예요. 동쪽을 통해서 누가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동쪽은 어떤 동쪽이냐 하면, 가인이 범죄하고 난 뒤에 에덴의 동쪽 땅에 도시를 세웠거든요. 에덴의 동쪽입니다. 가인 또는 아담, 하와 이쪽은 어디서 쫓겨났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동쪽 편에 거주하게 되었거든요. 에덴의 동쪽이죠. 그 동쪽을 통해서 누군가 오셔서 언약궤 완성하시고 어디로 빠져나가는가? 동쪽으로 빠져나가요. 왜? 유일하게 개방된 곳이니까요. 이게 에스겔 43장 1-4절에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성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자아를 없앨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요. ‘어떻게 자아를 없애고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믿음을 부여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을 성전 방식으로서 해결합니다. 구약에는 성전의 존재로서 해결의 근거가 생긴단 말이죠. 에스겔 43장 1-4절,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서부터 옵니까? “동편에서부터” 오죠. 동편에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의 영광.
나중에 여기에 누가 오느냐 하면 성전 지어놓고 왕이 들어와요. 44장에 보면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왜냐?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되어 있죠.
뭐와 뭐의 결합입니까? 하나님이 왔던 길에 누구만이 합류할 자격이 있다? 왕. 다윗 언약에 의한 왕입니다. 들어오는 왕, 오시는 분은 동편에서부터 언약궤를 바라보고 하나님 일을 벌이잖아요. 이렇게 해서 언약궤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요. 못 들어간다는 말은 ‘나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하는 나 있잖아요, 나는 철저하게 배제당한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 내가 끼어들면 안돼요. 내가 끼어들면 안 되는데, 내가 끼어들지 않는 그 코스에 누가 끼어든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끼어들어요. 하나님이 직접 끼어든 자리에 하나님을 대리한 분이 어떤 직위를 갖고 있다? 이건 신하도 아니고 왕. 왕이 오시는데 그 왕이 동쪽 편으로 왔는데 왕이 하시는 일은 놀랍게도 희생제물이 되는 거예요. 죽으러 오신 거예요.
아까 사랑하는 남자가 서로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그 남자에게 무슨 사고가 났는지 하여튼 무덤 속에 있죠. 이 노래를 부를 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내 건데… 내 남자, 내 것 아닙니까! 내 것이 죽었어요. 차라리 나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지 않았지만 죽은 걸로 착각해서 죽었잖아요.『로미오와 줄리엣』셰익스피어 작품도 내 것을 잃었을 때의 비탄, 아픔 이런 주제란 말이죠. 그게 사랑이다.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자기 자신, 내 것을 사랑하면서 그게 무슨 사랑이에요. 그래서 철저하게 인간 것은 모조리 빼는 거예요. 인간들은 빼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언약궤는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이 던진 율법에 의해서 생겨난 게 언약궤이고, 언약궤의 취지는 언약궤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취지가 완성되는 겁니다. 완성이 되는데 그 구체화된 인물이 등장하고 그게 왕이란 말이죠.
그 왕과 언약궤의 만남. 뭐 언약궤 들고 튑니까, 뭡니까? 왜 왕이 언약궤를 만납니까? 아까 이야기했죠. 왜 만납니까? 죽기 위해서. 다윗의 언약으로 오신 다윗의 자손이 죽습니다. 자, 여기서 잠시 첫째 시간에 한 것을 연관시켜봅시다. 복습해볼게요. 천국에 가는 믿음은 있다, 없다? 있다. 어떤 믿음이어야 되는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 믿음이 있으니까 천국 간다는 바리새인들 다 쫓아내고 이 사람을 천국에 집어넣죠, 예수님이. 마태복음 그 뒤에 나오죠. 바리새인들 쫓아내고 이 믿음 있는 사람만 소복이 천국을 차지해요. 그 외에는 천국에 못 가요. 그러면 그걸 보고 우리는 ‘나 그런 믿음 가질래.’ 대번 이렇게 나오죠. 또 또 가지는 거예요. 또 내 것 만드는 거예요. 그 믿음을 내 것으로.
그러나 백부장에 있어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한 거예요. 내 구원인데, 내가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결정권에 누가 관여 못 한다고요? 내가 관여 못해요. 그럼 누가 관여하는가? 주께서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고 들어가지 마라하면 안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주제파악이 된 겁니다, 내가.
그런데 그 주제파악이 되는 시선 있잖아요. 안목. 안목 그게 믿음의 관계 때문에 그래요. 주님과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내 안목 철회하고 주님의 안목으로 나를 늘 바라보는 그 안목을 같이 공유하기 때문에,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알아서 하셨겠지, 뭐. 주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지 않겠나. 다 알아서 한단 말이죠. 제대로 다 하신다 이 말입니다. 자연스럽죠.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내 것에 있으니까. 어떻게든 주님께서 나와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알아서 하시면 된다 이 말이죠. 왜냐? 그분이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라는 알맹이는 빠져나가야 돼요. 바로 그 사실, 천국 가는 믿음을 발견했어요.
그다음 문제가 뭐냐? 주께서 왜 나에게 이런 믿음을 주셨는지? 주께서 어떤 취지로 주셨는지? 그 주님이 무슨 일을 했는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해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안목을 갖추게 되었는지?
나한테 없는 안목. 주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세상에 대한 안목을 갖추시고 “너는 나 시키는 대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면 되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오케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갖게 되셨습니까?” 그 문제잖아요.
그 문제에 대해서 마태복음 26장에 나옵니다. 지금부터 약간 어려워요. 어렵기 때문에 제가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보기 전에 이 그림부터 보겠습니다. ‘나’가 있다. 항상 인간은 나부터 출발해요. 내 것부터 출발해요. ‘나’가 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 아직 나는 그대로 살아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할 때 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예수님도 살아있어요. 그리고 이것을 계획하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 아버지다. 이렇게 되는 거죠. 나가 있을 때.
그런데 ‘내가 예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 아니죠. 아까 했죠. ‘나’가 살아있는 한 주의 일에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했습니다.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산상설교를 주신 거예요. 산상설교를 하니까 우리는 지키고 싶죠. 그런데 로마서 7장에 보니까 우리 속에 어떤 걸 지켜도 우리는 선악체제가 동원되기 때문에 선하고 싶어도 내 안에 악이 그 선을 이긴다는 내용이 있어요. 로마서 7장의 내용을 우리는 미처 몰랐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 믿고 싶어요.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고 싶은데, 예수 믿는 것이 악이다 이 말이죠. 왜? 내가 안 죽으니까.
‘믿는 것도 주께서 믿게 하시면 믿습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게 아니고, ‘내가 반드시 기필코 예수 당신 믿어가지고 이 나를, 이 땅에서 고생한 나를 죽어서는 호강시키겠다.’는 야심 있잖아요. 그 야심을 인간이 스스로 무슨 재주로 포기합니까? 권사님, 포기했습니까? 포기했어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 다니면서 목사 설교하는 것 몇 마디만 딱 들어도 아, 이 목사가 뭘 시도하는지를 대번 간파가 되죠. “여러분들 애써서 기도해서 성령 충만 받아서 그래서 예수 믿어서 같이 천국 갑시다. 천국에는 맨션 아파트가 있는데 처소가 마련되어 있답니다. 갑시다. 그건 기본이고, 이 땅에서 복도 받아야 되죠.”
목사가 지금 노리는 게 뭐냐 하면 그야말로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 그걸 계속해서 시도하는 거예요. 그래야 종교 사업이 되니까요. 안 그러면 사업이 안 되니까요. 이걸 뭐로 바꿔야 되느냐? 하나님이 바깥에 있잖아요. 실재로는 어떻게 돼요, 이 그림이?
나와 예수님과 하나님이 이 공간, 원 안에, 바깥은 없고 이 안에 하나의 원으로 전환되고 말아요. 예수님-하나님-(나). 지금 요한일서 다 끝나가지만 이게 요한일서 1장 3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아멘이죠. 예수님-하나님-(나)가 하나의 원으로 연결된 그림이잖아요. 하나님이 바깥 큰 원에 있고, 작은 원 안에서 예수님과 내가 따로 있는 이 그림 아니죠. 하나님이 지켜보는 안에서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이 그림 아니죠. 이건 사귀는 거 아닙니다. 얻을 거 얻어내겠다는 야심이에요. 그게 아니고, 사귄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나’가 있는 한 사귐이 돼요, 안돼요? 안돼요. 내가 돌부처니까. 사귐의 원형은 뭐냐? 아버지와 예수님이 어떻게 사귀느냐로 내가 바뀌어져야 되겠죠.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와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이야기했다고요. 하나. 자기가 하나님이냐 해가면서 유대인들이 난리 났죠.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말을 주께서 언급하신 이유는 이것이 내게 대한 사항이 아니고, 장차 내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같이 주어지기 때문이에요. 요한복음 14장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과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성도가 전부다 한 처소를 이루어요. 그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 해요. 전부 한 처소를 이룬다고요. 사귐이 돼요, 사귐이.
예수님이 아버지와 사귈 때 그 내용은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시면서 아까 백부장의 믿음과 얼마나 같은지 여러분들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6장 38-39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벌써 자기부정 나오죠, 자기부정. 내 뜻이 묵살된다 이 말입니다. 내 뜻은 완전히 아버지 뜻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백부장의 믿음이죠.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할 때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 뜻은 이건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죠. 그게 뭐냐? 38절,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취지가 같아요. 요한복음이나 겟세마네 기도나.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은 뭐냐? 사람까지 우리 사귐에 넣어라, 이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놀랍지 않습니까? 원래 이 나라가 인간 나라, 에덴동산이 아니에요. 우리가 가는 곳은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사귀는 하나님 나라에 가요. 무슨 자격으로? 없지요. 뭐 믿는 자격으로 가면 안돼요? 안돼요. 자격이 없어요. 없는데, 주께서 까라하면 까서 가는 거예요. 주께서 그냥 넣어주신 거예요, 그냥.
그 순간에 뭐가 탈락해요? 나의 결정, 나의 뜻, 나의 선택. 아까 노래 가사 중에 ‘언제나 선택은 둘 중에 하나’랬는데 둘 중에 하나 아닙니다! 나는 선택권이 없어요. 이게 바로 선택론이잖아요. 나는 선택권이 없어요.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선택대로 그냥 아버지와 아들이 알아서 우리를 그 선택에 집어넣어준 거예요.
그래서 생명책 이름이 뭐냐? 나의 생명책이 아니에요. 누구의 생명책입니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등록된 사람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강제로 납치당한 거예요. ‘아이고, 불쌍해라.’ 불쌍한 게 아니고, 영광스럽죠. 강제로 초청 정도가 아니고, 강제로 군대 입대했어요. 영장 받고. 영장 받고 갔는데, 그게 처음 자리가 아니고 끝자리에요. 처음에는 아담인데 끝에는 천국이죠.
그 천국에 일방적으로 넣었다는 그것이 압축해서 사건이 되어가지고 우리의 일상에 매일같이 터지는 거예요. “너 구원 받았잖아. 무슨 욕심을 내? 주께서 불러서 천국 넣어줬잖아. 뭐? 곗돈 떼먹고 도망갔다고? 괜찮아! 그런다고 구원 취소되는 거 아니야. 그 곗돈 떼먹고 도망가라고 누가 했는 줄 알아? 내가 했어, 내가. 내가 했다고. 네가 진짜 어느 것에 진지한지, 어느 것이 소중한지 알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일부러 사건 만들었다고.”
아이고, 네가 요즘 남자 사귀나? 둘이 결혼을 약속했다고? 그런데 남편이 곧 죽었네. 그럼 남편 어디 있어요? 무덤에 있어요. 주의 은총이 무덤 위를 비추소서. 자기도 곧 죽으니까. 자기도 늙어 죽잖아요.
예수님과 원 안에 연결될 때 이 ‘나’는 빈자리에요. 자리가 비어있어요. 자리를 비우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셔서 일방적으로 아버지하고 예수님이 알고 있는 사람을 이 빈자리에 채워서 이 사귐의 순환구조, 순환사슬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게 남아있어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뜻을 이룰 때, 그게 마태복음 26장에 나옵니다. 26장 26-28절까지,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누구 몸이라고요? 내 몸.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누구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죠.
우리는 배제당합니다. 우리 뭐 순교당하고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배제당해요. 동일한 살과 동일한 피로 구성되면 그것은 한 몸입니다. 한 몸이라 하는 것은 피부가 다른 이질적인 남의 살점이 붙으면 그건 같은 몸이 아니에요. 그리고 동일한 피가 흘러야 돼요. 동일한 피. 머리에서 발끝까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잖아요. 머리에서 흘러내린 그 피가 우리의 말초신경까지 퍼지는 거예요. 살과 피, 이것이 바로 언약 사건입니다. 사건의 특징은 바람 같아서 이게 반복이 돼요, 반복이. 반복이 된다고요. 다 이루심이 반복이 돼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동쪽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언약궤를 향하여 갑니다. 그게 히브리서에 잘 나와 있어요. 옛날에는 모형과 그림자였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 되고 제물 되고 성전이 돼서 들어갑니다. 그러면 휘장이 찢어지면서 하늘이 열린 거예요.
그러면 동쪽에서 메시아가 온다, 이건 구약이죠. 신약은 뭐냐? 동쪽 그 자체가 되신 분이 인물이 되어서 오시는 거예요. 언약궤가 바라보는 천국, 그 동쪽 자체가 인물이 돼요. 인격이 된다고요. 그 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동쪽이에요.
구약을 실제로 봅시다. 에스겔 10장 19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하나님의 천사들, 그룹들이 성전의 어느 쪽에 머물고 있습니까? 동쪽에 머물고 있죠.
11장 23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
하나님의 신이 성전 동쪽에 있다가 빠져나가요. 빠져나간 성전은 어떻게 되는가? 스가랴에 보면 사람 손으로 지은 것도 아니고 능으로 지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신으로 지은 성전이 옵니다. 성전이 오니까 사람들 이미지가 ‘야, 괜찮은 영광인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요한복음 2장에 보니까 “내가 곧 성전이다. 46년 만에 지은 저 건물을 헐고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제자들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예수님 자신이 사흘 만에 살아난 그 인격 자체가 성전인 줄 알았죠. 성전은 뭐냐? 언약궤인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하도록 주의 조치가 다 끝난 거예요. 조치를 한 게 아니고, 조치가 이미 손 털고 끝났기 때문에,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오신 겁니다.
에베소서 2장 끝에 여러분 잘 아는 거니까 봅시다. 22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처소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고 되어 있죠.
자, 이제 마지막 남은 겁니다. 다 좋은데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모른다 이 말이죠. 딱 깨놓고 말해서 ‘복음은 복음이고 나는 내 것은 못 놓겠습니다. 야무지게 나는 이 땅에서 사람 구실하고 살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그런 나를 주께서 어떻게 주의 말씀의 세계, 성전 안으로 집어넣는가?
아까 영역, 영토를 다시 그리겠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가 들어가죠. 뒤에 뭐가 있습니까? ‘살’려고 하죠. 나는 어떻게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이 육신 되신 분은 “아버지여 나는 어떻게 죽을 것입니까?” 했죠. 이게 말씀의 영역이죠.
따라서 말씀의 영역은 멈추지 않아요. 활동은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창세전에 시작과 끝 지점에서 압박을 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나는 나밖에 모르는 세계로 찾아가요. 찾아가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말씀이 공격을 해버려요. 공격을 해버리면 우리를 주님의 새 언약, 살과 피, 약속이죠, 약속이 ‘나’를 교체하고, ‘살 것인가’를 죽음+부활로 교체해버려요, 말씀이.
이걸 어제 수요설교 때 쉬운 예라고 들은 게 차에 기름 대신 넣어주는 거예요. 차 기름 넣어주면서 내 차 가지고 가면 안 되죠. 내가 기름 넣어줄 저 차를 타고 가야 돼요. 아버지가 되어서 딸 차에 기름을 넣어준다 하면, 내 차 버리고 딸의 차를 가지고 가서 거기서 기름을 풍텅풍텅 넣어주잖아요.
주님께서 나밖에 모르는 것에다가 셀프로 그냥 공짜로 생명을 가득 채워주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와의 약속한 것을 집어넣는데, 집어넣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으면 결과가 뭐냐? ‘역시 나는 고물차구나.’ 내가 나한테 미련 둘 일은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내게 있는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죽은 목숨보다 중요한 생명을 주께서 주셨다.’가 돼요. 왜? 나는 내 일을 못 버리니까.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죠? 여기서 결국 성령의 열매란, 감사와 고마움으로 나와요. 매사에.
나는 내 일을 못 버렸는데, 내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 일로 집어들어가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얼마나 잘 되든 간에 일체 그걸 인정하지 않고 “내가 준 생명 잘 있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끝으로 이 문장 쓰고 마치겠습니다. ‘누가 사랑과 은혜를 이길 것인가?’ 선악 따지지 말고. 선악은 이미 있는 거고요. 고물차에 이미 있는 거고. 그거 말고 선악이 없는 은혜와 사랑을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저 범사에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안에 어떤 일이 있든 교회에 무슨 일이 있든 그것마저 주의 은혜고 사랑인 것을 왜 우리가 진작 몰랐습니까. 이제는 내 안목으로 나와 세상과 주님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안목으로 다시 우리를 바라보면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주의 일이므로 이제부터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찬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