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명기 40강(꿈과 예언), 복음이냐 교회냐10강(성령의 공유성) 260622설교신명기

동영상 전반부

동영상 후반부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0강) 엡2:21(성령의 공유성) 전반부 20260622 (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전반부 강의를 새로 하겠습니다. 전반부 강의 파일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우리교회에서 다시 하겠습니다.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교재 『복음이냐 교회냐』이 교재 120페이지부터 해야 되는데 125페이지부터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씀 나오죠. [선지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선지자는 대신 죽으심과 희생의 면면을 보이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 둘씩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선지자들 자신은 절대 선지자 노릇을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무리 선지자가 고생을 하고 노력을 해도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그 일에 본인들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철칙이고 원칙이고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그 믿음 속에도 이 철칙이 계속 유지되어야 되고 지속되어야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신들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주님께서 선지자 인생을 일방적으로 만들어나갔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나 선지자들도 그들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 자기 뜻대로 원대로 할 수 없잖아요. 열두 제자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요. 만약에 자기 뜻대로 된다, 이것은 뭐 문제 있는 거죠.

오늘날 성도도 자기의 뜻대로 뭔가 된다면 자기를 쥐어박아야 돼요. 쉽게 말해서 ‘주님, 저를 아주 버리시려고 작정을 했는지. 왜 내 뜻대로 되는 겁니까?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아까 우리 집사님이 수박 사왔잖아요. 수박 사왔는데 수박 깨보니까 맛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되겠죠. ‘주님, 저는 맛없는 수박을 원했는데, 왜 이렇게 수박이 단 거예요? 왜 제 소원대로 안 되는 겁니까?’하고 자기를 쥐어박아야 되는 겁니다.

사실은 선지자들이 지냈던 시대에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 예언이 주어졌습니다. 정치적 상황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예언적인 선지자 일을 하면서도 내 목숨은 목숨대로 따로 거뜬하게 부지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물론 선지자나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근원적으로 갖고 있던 우리 뜻이잖아요.

그런데 그 뜻대로 안 해주는 겁니다. 왜냐? 예수 그리스도만 예언대로 실시해야 되기 때문에 어림도 없죠. 우리 자신이 우리의 뜻이 있다는 것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에 결국 신약 시대에서 십자가 사건을 밑에 깔고 보세요. 그러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쪽으로 주께서 홀로 일하신다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래서 125페이지 제일 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지자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것들만 이야기해요.] 그 뒤에 이어서 보면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곧 망하겠다.’ 이런 소리는 선지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이 하는 거예요.]

나라가 망하든 나라가 잘되든, 오직 선지자 입장은 내가 성취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세상 돌아가는 모든 말씀과 미래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주신 겁니다. 따라서 정치가 잘되든 못되든 그것에 따라서 물론 해석은 낼 수 있는데, 그 해석이 선지자 본인의 그 시대에 한계 된 해석이죠.

그래서 선지자의 예언의 해석은 미래로 지연되어서, 예수님께서 미리 선지자에게 주었던 예언이 예수님께 어떻게 달성되는가? 그 점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자기 의견이 있고 자기 해석이 있더라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대로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그것을 선지자들은 미리 그 시대에 실습하게 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자기 의견을 내세울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선지자가 메시아는 아니잖아요. 메시아는 나중에 있고, 그 메시아가 홀로 이룰 일에 대해서 선지자에게 미리 앞당겨준 거예요. 따라서 선지자의 자기 해석, 그리고 선지자의 예언을 듣는 인간들의 자기 해석, 오늘날 식으로 한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 간에 그 말씀을 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 성도가 나름대로의 자기 해석을 내리기 마련입니다.

그 자기 해석이 결국 주님의 홀로 이루었던 그 주님 해석에 어떤 식으로도 방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 그 차이를 항상 발생시키면서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같이 대화하죠. 두 명의 선지자와 그리고 그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예언의 성취자가 한 자리에서 대화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는 알아요. 우리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의 별세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게 125페이지에 나오는 선지자 이야기를 보고 난 뒤에 다시 120페이지로 돌아가 봅시다. 120페이지 중간 즈음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이들을 ‘두 증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줄에 [이 종들이 미움 받고 죽는 현장이 애굽이고 소돔이며,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있는 현장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1장에 그 대목이 나와 있어요.

11장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고, 그러한 사건 앞에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어디가요? 소돔이고 애굽이고. (8절,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럼 소돔과 애굽은 뭐냐? 두 증인이 예언대로 외치다가 죽었던 그곳이 소돔이 되고 애굽이 되고 십자가 못 박히신 곳이 되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의 소돔이라는 특정 지역, 애굽이라는 특정 나라가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한계 내에 그 해석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해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죠. 진짜 인간들의 해석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난 뒤에 주어진 그 해석의 차이, 그 차이를 아는 자가 바로 이 시대의 선지자요, 성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요한계시록 11장을 방금 제가 잠시 언급했는데,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해석이 상당히 어려워요, 이런 점에서. 항상 말씀보고 우리 해석을 하는데, 그 해석과 주님의 홀로 이루었던 해석과의 격차가 있거든요. 그 격차를 우리 쪽에서 인위적으로 줄일 수는 없어요. 차이는 있는데 그 격차를 건너갈 수는 없다 이 말이죠.

그 이유가 요한계시록에 어떤 집약 같은 게 있기 때문이에요. 파리바게트에 팔고 있는 빵 중에서 페스추리처럼 겹겹이 얇은 빵 층이 있는 빵이 있거든요. 인간의 힘줄 층처럼 얇은 밀가루 층이 겹겹이 쌓이면서 씹을 때 부드러운 맛을 내는 빵이 있습니다. 의사가 수술할 때 근육 층 하나하나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떼어내야 되겠죠. 층층이 이렇게 겹쳐 있으니까요.

요한계시록은 신약에 예수님의 이루심의 의미를 담고 구약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예언들이 촘촘히 겹쳐져 있어요. 그 겹쳐진 것을 하나 둘씩 떼어낼 때마다 거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나옵니다. 십자가 사건이 거기서 나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만 나오면서 누구도 덩달아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한 악마의 취지도 같이 나오죠. 악마의 활동도 같이 나오죠. 예수님과 악마의 취지를 같이 보여주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이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인데, 말씀이 이렇게 촘촘히 겹쳐져 있어요. 이 a, b, c, d, e, f, 한 꺼풀 한 꺼풀 뗄 때마다 겹 사이에 십자가 사건, 예수님의 죽으심+악마의 본색, 정체, 활동이 여기서 나옵니다. 나오면서 이 성령의 해석에 누구를 참여시키느냐? 오늘날 선지자, 성도를 참여시키면 성도의 모든 활동, 성도의 모든 생각들이 결국 성도의 선지자적인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악마의 권세를, 성도를 통해 드러내게 하는 그러한 방법을 성령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사용하시는 거예요.

인간의 해석이 왜 성경을 해석할 수 없었느냐? 바리새인들이 해석자들 아닙니까. 왜 해석을 못하느냐? 인간이 아무리 날뛰어도 인간은 보이지 않는 악마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어요. 못 이기죠. 못 이기니까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한 몫한 겁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절에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어린 양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한테 지시받는 이 천사들이 주님한테 철저하게 움직임을 조종당하는 하나의 기계 같은 거예요. 물론 천사 하나하나는 분명히 따로 구분되어 있어요. 구분되어 있는데 그 천사가 어떤 기능 면에서 자기 고유의 기능을 따로 생각 못해요. 따로 생각하면 그것은 마귀 쪽에 속한 타락한 천사겠죠.

주님께 속한 천사들은 분명히 존재 하나하나가 있지만 그 기능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공유’라고 이야기할게요. 공유. 공유의 반대말은 ‘개별(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유난히도 ‘아멘’이라는 말씀이 1장부터 많이 나와요. 1장 7절에도 “…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3장 14절 같은 경우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그리고 요한계시록 제일 마지막에 뭐로 끝나느냐? “아멘”으로 끝나요.

이 ‘아멘’이라는 말은 “인간이 개입하나 개입 안하나, 인간이 신경 쓰나 안 쓰나 관계없이 진실로 모든 일은 그렇게 되기로 확정적입니다. 진실로 외친 말씀대로 그렇게 되어갈 뿐입니다.”라는 고백이에요. 동의하는 거죠. 주님이 계획 잡은 대로 아멘, 아멘, 아멘의 연속. 그러합니다, 그러합니다, 그러합니다의 연속이죠.

고린도후서 1장에서도 이 말씀이 나와요.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한다. 주께서 일을 벌이시고, 그 결과물로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진실로 그러합니다.”하고 “아멘” 되는 거예요.

그런 순간 우리 고유성은 천사를 닮았다고 할 수 있어요. 천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출현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새로운 시공간을 옴팍 뒤집어쓰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가 개인적 삶에 어떤 경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이 벌이는 일과 우리가 생각하는 일과의 격차가 신약 성경에서는 주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이게 사라져요.

사라지는 그 결과가 뭐냐? 아멘. 진실로 그러합니다. 시작도 아멘, 중간도 아멘, 끝도 아멘. 아멘의 연속이에요.

이 말씀을 가지고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 말고 그냥 일반적인 인간으로 개인적으로 해버리면, 인간들은 정말 감사의 아멘이 안 나오죠. 개별자의 티를 확확 냅니다. 지금 월드컵하고 있잖아요. 만약에 일본이 한국을 4대 0으로 이겼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이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까? 아~ 대한민국! 하면서 광란의 거리행진을 하겠어요? 안 그러겠죠. 그게 바로 개별적인 세상 해석을 따로 챙기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이게 월드컵뿐 아니고 개인적인 개인사도 마찬가지죠.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늘 주님 안에서 아멘, 아멘, 기쁨의 아멘이 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되어가는 일을 보고 이걸 아멘할지, 노멘할지를 자꾸 재는 경향이 있어요. 개별자 의식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선지자가 오늘날 성도라 했잖아요. 성도가 됨으로서 성도 뒤에 각 사람… 저는 성도를 이렇게 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있잖아요. 있으면 각 사람 뒤에 뭔가 끈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끈.

그래서 성도님께서 찾아왔다고 뭐라고 한다면, 제가 그렇게 지시는 하지 않지만 ‘잠깐만 돌아보세요. 오? 성령의 끈이 있네!’ 다시 말해서, 이 끈은 개별자가 자기 성경 해석해서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신앙 생활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천사에게 일 시키듯이 공유적인 지시와 명령을 성령을 통해 할당한 거예요.

(각 성도마다) 성령의 끈, 성령의 끈, 성령의 끈,… 함부로 할 수가 없지요. 주님과 이미 끈으로서 연결되어 있고 연락이 되어 있는 사람보고 목사가 됐건 누가 됐건 함부로 할 수 없어요, 그 분에 대해서. 그 분이 잘못 해석한다면, 주께서 잘못했다는 것을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어떤 변화가 주어지고 그 사람이 어떻게 인도받는가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주님의 몫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지금 남자, 여자 성도 다섯 명이 있다고 봅시다. 우리 보기에는 저 분은 남자, 저 분은 여자로 보잖아요. 그러나 끈을 두고 봅시다. 끈을 보게 되면 그것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에요.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이것을 이번 여름 수련회 교재 중에 제가 썼습니다. […여성은 비(非)전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인간이 아는 전체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여러분들은 생각할 거예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이 때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그 아이가 어떤 요구를 하고 엄마한테 뭘 말할 때, ‘이거 사줘, 저거 사줘.’라고 하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야, 얘가 자기밖에 모르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러나 그 생각도 사실은 틀린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아이가 나중에 점점 커서 가정을 벗어나 학교라는 사회와 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이미 아이 때부터 그런 현상이 있어요. 티니핑 사 달라 할 때, 그 ‘티니핑’이라는 단어도 의미가 어디서 나온 거예요? 기존에 자기 바깥에 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 공유가 무슨 공유죠?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나름대로의 공유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꾸 개인 위주로 살지만 아무리 개인 위주로 산다고 해도 그 사람이 생각한 그 모든 의미는 이 악마의 권세 안에서 벌써 기성세대로부터, 그리고 같은 세대로부터 유포됐던 의미를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골라가지고 이것은 나의 세계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결과에요.

인간은 공유 아닌 적이 없어요. 공유인데 공유된 것을 끄집어내놓고 또 개별자로 살아가요. ‘저거 사줘, 이거 사줘’하는 그 항목, 리스트가 어디서 나왔어요? 이미 기존 세상에서 출몰하고 있는 의미들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공무원 시험 쳤는데 네 번 떨어졌어요. 그다음부터 집 바깥에 안 나옵니다. 셀프감옥을 스스로 만드니까 부모는 안타까워서 밑에다가 음식을 집어넣어줘요. 그러면서도 안 나옵니다. 일종의 자폐 증세를 보이죠.

그러면 걔는 방안에 갇혀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이 있다는 거예요. I have a dream. 그 꿈은 어떤 꿈이냐 하면 바로 ‘스스로 자기가 구겨진다, 압축된다.’ 개별자에서 점점 더 개별자로 폐쇄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어요. 단단해지죠. 그러니까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방어하는 것밖에 남질 않아요.

아까 이야기했던 부분, 요한계시록 6장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6장 다시 보면 8절에,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청황색 말, 아주 흉측하게 생겼겠죠.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 땅에서 늙어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현상 같은 것은 인간 자기가 해석한 거고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해석이 마감된 최종 해답지를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을 보니까,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주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의 활동으로 인하여 인간은 죽고, 죽고 난 뒤에는 음부, 죽은 자가 집결되어 있는 그 장소에 모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는 과정 속에서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그 과정에서 고요하게 조용스레 죽는 것이 아니고 전쟁과 그리고 전염병과 앞에 보면 다른 천사가 하듯이 가뭄과 경제난과 경쟁-산다고 얼마나 애를 쓰겠습니까-과 이런 것들이 범람하는 가운데서 조여지는 거예요.

어디를 향하여? 네 명의 천사 작용에 의해서 인간은 서서히 쭈그러지는, 그것도 비참하게 저주 속에서 쭈그러지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면서 인간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17절 예언들이 아직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다는 거예요.

17-19절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이것이, 저주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예언은 아직도 계속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0강) 엡2:21(성령의 공유성) 후반부 20260622 (강의: 이근호 목사)

제가 어느 강의에선가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는 있으나, 어머니라 하는 것은 엄마의 body, 몸이 있잖아요. 인간의 몸은 개별자, 자아를 부여받기 때문에 내 생각이 자식한테 전달 안 됩니다. 이게 몸의 한계에요. 육의 한계에요.

그래서 자식한테 잘해준다, 잘해준다 백날 해도 자식은 엄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식의 body는 따로 놀기 때문에 엄마를 이용할 뿐이지. 엄마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엄마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가 없거든요. 엄마의 사랑이 욕심일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엄마가 바깥에 나가 노동해서 돈을 벌잖아요. 돈을 벌 때 그 돈을 어디다 허비하느냐? 가정이라는 환상, 가족을 위해서 바깥에서 어떤 수모와 욕설을 듣더라도 인내하면서요, 내 자식만 잘된다면 이까짓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해서 그야말로 옛날에 반티 장사해서 돈벌어가지고 자식 대학 보내려고 다 했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육과 육 사이에는 전달이 안돼요. 전달이 안 되는데, 엄마는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내 몸 위주가 아니고 자식만 잘된다면 되겠다 하죠. 인간의 몸은 그래서 부서지긴 부서지는데, 부서진 그것이 자식에게 효과 있습니까, 없어요? 어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불가능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우리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하늘의 예루살렘밖에 없어요. 예루살렘은 공유자니까. 개별자가 아니고, 공유에요. 그게 이 땅에 성령을 통해서 온 거예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요한계시록은 조금 이따 보고요. 요한일서 4장 보겠습니다. 4장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사랑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는가? 요한일서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도의 존재 이유가 사랑 따라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이미 이 땅의 성도로서 목적이 하나로 확정되어버렸어요. 아까 끈이라 했죠, 끈. 성도끼리 만날 때 끈을 보잖아요. 그 사람 보면 그냥 육으로 보고 마는 건데 그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거고, 성령 받은 사람은 ‘뒤로 돌아봐요, 뭐가 있는지? 어? 성령의 끈이 있네!’

주님과의 연결점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 공유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목숨 못 바쳐서 환장한 집단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보고 하라 하면 우리는 일체 못합니다. 못하고, 또 해서도 안돼요. 왜냐하면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은 진실한 분이죠. 하나님이 진실한 분이라면 누가 거짓말쟁이가 돼요?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된다는 그 논리란 말이죠.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된다는 그 논리에 의하면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다는 것이 천하의 거짓말이다 이거에요. 그러니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범죄한 자에요. 범죄한 자인데, 우리가 우리를 해석할 때 내가 항상 범죄했다는 것을 못 받아들여요. 우리는 개별자로 놀기 때문에.

주께서 지금 바쁩니다. 개별자밖에 모르는 인간을 천국의 공유자로 바꾸는 그 방법을 주께서 실시한다고 애를 먹어요. 지금 카메라 안돼서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이게 공유가 안돼서 그래요. 공유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에베소서 2장 21-22절, 성전이 지어져간다는 거예요. 처소가 지어져간다. 어디 안에서? 성령 안에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처소가 지어져간다 할 때 뭐가 빠져나가느냐 하면 ‘나는 육이다’가 빠져나가 버려요. 육을 육이 다루면 안돼요. 육을 성령이 다루어버리면, 육은 하나의 성전 벽돌로 성령께서 다루시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보다 먼저 자신의 육체가 돌로 다루어졌던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베드로전서와 시편 118편 22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했죠. 그러면 건축자들이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뭘 건축하겠다는 말이에요? 성전 짓는 자들이죠. 성전을 짓는데, 그들은 성전을 지으면서 자기가 육이라는 걸 모르죠.

육이면서도 육인 줄 모르는 그런 엉터리 해석을 하면서 성경에 있는 성전을 지어나가겠다는 자들에 의해서 누가 필연적으로 탈락이 되었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쓸모없다고 탈락된 거예요. 쓸모없다고. 육과 육이 모여서 성전을 짓는 데에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탈락된 자가 탈락되어서 버려진 돌로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부터 성전의 건축이 시작되는 겁니다.

집 짓는 시뮬레이션 보면, 건물 기초공사부터 해서 완공까지 진행과정을 빠르게 보여주는 동영상 같은 것이 올라오잖아요, AI로. 주께서 자기가 계실 곳인 성전을 자기가 그렇게 지어버리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 한번 볼까요?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께서 모세하고 단독으로 만납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모세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자기 동포 히브리인들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쳐 죽이고, 그때가 나이 사십인데 도망치듯이 나와서 팔십 대까지 양치고 있었던 거예요. 양치는 그 근처 모리아 산에 떨기나무가 있었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서 주와 대화하는 그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모세가 애굽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에 의해 모세가 강제로 애굽으로 갑니다. 그럼 모세가 뭐가 되느냐? 이런 선지자가 없다는 평을 민수기에서 들어요. “내가 선지자 하나를 뽑아서 너희들에게 파견시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단독으로 개별자로 하나님과 모세가 만났는데, 가서 하는 일을 보니까 공유해야 될 백성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하는 일이 뭐냐? 11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누가 가요? 모세가 가죠. 그러나 사실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해 미리 앞당겨 보여준 하나의 sign(신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단독이지만, 와서는 공유자를 만드는 거예요. 집단을 만드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이십니까?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내 속에서 개별자적 해석은 용납이 안 되고, 공유적 해석-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던 그것을 같이 나누어 누리는 공유적 해석이 끈을 통해서 전달돼요.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끈을 통해 전달된단 말이죠.

그렇다면 아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에 대한 이 해석, 요한일서 3장 16절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 나올 수 있죠. 개별자인 내가 하느냐, 공유자에 포함된 내가 하느냐가 있겠죠.

공유자인 내가 해버리면,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고 주께서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해주십니다. 그럼 ‘나는 목숨 바쳐서 사랑했습니다.’라는 해석이 우리 입에서 나오면 안돼요. 왜냐하면 나는 못하니까. 그런데 받은 쪽에서 해요. “야, 세상에, 내가 목숨도 안 아끼고 나를 사랑했구나.” 그때 뭐라고 합니까? “언제? 내가 미쳤어? 왜 내가 너한테 해줘?” “저런, 겸손 봐라.”

“이게 겸손이 아니야. 진짜 나는 몰라! 네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네가 배고플 때 먹을 것 주었고, 그것은 나하고 전혀 상관없어. 나는 나 챙기기만도 바빠, 지금.” 이렇게 나오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그래, 너는 지옥가라.” 합니까, 어떻게 합니까? “먼저 된 자가 역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구나.”

나는 그게 아닌데. “오후 5시에 일 시작해서 6시, 한 시간 만에 퇴근했는데 왜 하루 품삯을 나한테 주십니까?”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이 “저 겸손 떠는 것 봐. 겸손 떨어서 천당 가려고…” 그게 아닌데! 바로 받은 쪽에서 고백함으로써 그게 나의 개별성을 작살냅니다. 나의 개별성을.

엄마가 자식한테 고생고생해서 다 해주는데 자식은 그걸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이 눈물 흘리면서 “내가 이제 압니다. 엄마가 평생 동안 나 위해서 고생하고, 엄마는 원피스 하나 못 사 입고 예쁜 옷도 못 입고 살아온 걸 이제 압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만 하면 안 되고 옆에 수표 있잖아요, 두둑하게 봉투에 넣어서 이렇게 해야 격식이 맞아요. 그냥 입 싹 닦고 수박 한 덩이 들고 오지 말고. 현찰 넣어서, 안 그러면 아파트 하나 해주든지.

어쨌든 간에 자식이 이렇게 나올 때, 부모 마음은 뭐냐? ‘보람이 있다’ 이렇게 나옵니까? 그건 육이에요. “정말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할 때 감격하죠. 자식이 전도되기를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은 개별적인 나의 해석입니다.

자, 이제 요한계시록이 풀릴 거예요. 일은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해요. 일은 천사가 합니다. 전염병이든 뭐든 천사가 AI 같아요. 아무 감정도 없이 그냥 일해요. 주께서 시킨 대로 일하는데 현실 꼬라지는 전염병 퍼지고 서로 죽이고 난리도 아니죠.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11장. 그것 때문에 125페이지를 언급한 거예요. 11장 3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개별자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고생해야 될 근무시간까지 누가 정해요? 이것은 본인이 못 정합니다. 주 52시간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계시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이 한마디로 함축이 돼요.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성도=□’, 네모에 뭐가 들어갑니까? ‘천사’다. 다른 말로 하면, ‘기계’다. ‘성도=천사(또는 기계)’. 울고불고 기쁘다, 좋다, 나는 내 뜻대로 했다, 일체 이런 소리가 안 나오죠.

AI 전문가들이 늘 이야기해요. 제발 AI하고 대화할 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리하지 말라고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기계보고 쓸데없는 소리하면 누가 손해 보느냐? AI를 굴리는 그 회사에 전기가 더 소모된다는 거예요. 전기 값만 더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계처럼 다뤄야지, 인간처럼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이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기계가 누구냐 하면 성도입니다. 성도가 하지도 않았는데 성도보고 ‘고맙다, 감사하다’ 하면 안돼요. 성도는 끈이 있어요. 누구보고 감사해야 돼요? 공유된 자, 누구입니까? 성령을 기름 부은 자, 같은 성전 안에서 같이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 가동되는 그 시스템 안에서 자기는 그냥 주께서 주신 상황 따라서 끈의 본성대로, 계시가 흘러나오는 본성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남들은 뭐 난리도 아니죠.

“어째서 한 골 넣었습니까, 체코전에서?” “공이 그냥 날아왔네요.” 이뿐이죠. “손흥민은 왜 한 골도 못 넣었습니까?” “공이 안 날아오니까 못 넣었죠.”

이럴 때 나의 해석에서 벗어나고 개별자에서 벗어나요. 자기 좁은 세계에서 벗어납니다. 공유된 세계에 일은 주님이 하고, 천사보고 시킨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이 활동합니까, 밧모섬에 귀양 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귀양 가 있잖아요. 아무것도 못해요. 아무것도 못하는데 현실은 잘 돌아갑니다. 참 잘 돌아가요.

이것을 기본 해석으로 보고 11장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세요. 11장 4절에,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죠. 두 촛대가 뭐로 바뀌었다? 두 증인으로 바뀐 겁니다. 촛대라 할 때, 요한계시록 1장에서 촛대는 누굴 이야기합니까? 촛대는 예수님과 함께 공유되어 있는 그 성전 앞에 있고, 주님은 그 촛대 사이를 돌아다니죠.

그 촛대 가지가 몇 개에요? 일곱 개. 그러니까 전체 교회는 몇 개? 일곱 개. 여섯 교회는 안돼요. 다섯 교회는 안 됩니다. 일곱 교회가 있어야 돌아다님이 완성이 되니까요. 그러니까 손가락 여섯 개, 발가락 여섯 개 이게 괴물이에요.(삼하 21: 20, 대상 20:6) 24개 하면 안 됩니다. 다섯 개씩 20개 되어야지, 24개 있으면 안돼요.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괴물입니다.

여기서 5절에 보면 5절 말씀이 뒤에 말씀과 안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5절이 뭐냐?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래놓고 죽기는 누가 죽었어요? 이 대목을 보면 두 증인이 안 죽죠. 멀쩡하죠. 그런데 그 뒤에 보면 누가 죽어요? 두 증인이 죽어요.

죽었는데 그 죽음이 생명이에요! 죽었는데, 개별자 인간이 개별자 두 증인을 죽였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두 증인은 공유된 생명 안에서 공유된 것으로 살았다’는 티를 낸 것이 되고 죽였던 그들은 공유된 생명에서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살아도 죽은 것이라는, 생명과 죽음의 두 개념을 두 증인을 통해서 밝히 확정시켜 주는 그 기능에 두 증인이 동원된 거예요. 이게 말씀이에요.

네가 산다는 것과 내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다르고, 네가 죽었다는 의미와 내가 죽었다는 의미가 다른 거예요. 49제한다고 돈까지 갖다 바치는데, 그들이 말하는 공유된 죽음은 뭡니까? 그쪽 세계에 공유된 죽음은 자아 이상, 자기 잘남을 유지하는데 통용되는 개념을 그들은 뽑아서 ‘나 너하고 같은 한 편이니까 놀아줘.’ 하는 거예요.

엄마도 못하면서 엄마 되기 위해서 그 엄마는 자식의 존재가 필요했고, 자식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기의 노동의 대가가 사랑이라는 보상으로 넉넉하게 자기 세계를 구성한 거예요. ‘거봐. 내 자식 잘 키워놓은 것 봐라. 내가 고생한 걸 알잖아. 아, 난 너 볼 때마다 보람을 느껴. 보람을 느낀다고.’

보람을 느껴봐야 자식이 잠을 재워줍니까. 자식이 잠 안 재워주고 새로운 이불이 잠재워주는데. 새 이불이 보람이죠. 그런 분이 있어요. 새 이불 덮고 잘 잔다는 분 있어요. 결국은 이불 덮을 때마다 “자식 아무 소용없다.” 이 말을 하는데, 그 말 하자마자 자식이 새 이불 들고 왔을 때 “역시 자식은 잘 키워보면 다 대가가 오게 되어 있어.” 이런다고요.

모든 해석이 누구 해석이에요? 개별자 나의 세계를 자기 기쁨으로 채우기 위한 자기 해석이잖아요. 우리에게 육이 있다는 걸 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점에 대한 해답이 로마서 14장 11절에 나와요.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게 공유 아닙니까, 이게 공유! 이게 공유거든요, 로마서 14장 11절. 10절이 뭐냐? 같은 형제끼리 비방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는 뒤에 끈이 있다는 거예요, 공유된 끈이. 주께서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이것에 대해서 더 분명한, 여러분이 잘 아는 대목을 봅시다. 빌립보서 2장 10절. 보면 아, 그 말씀이구나 생각날 거예요. 10절, 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공유죠. 따라서 이 말씀은 끈이 있는 사람에게만 무슨 뜻인지 의미가 납득되죠. 그렇다면 제가 두 번째 시간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 개인적으로 울고 웃고 승리했다, 이겼다, 졌다, 절망한다, 낙담한다, 아니야 난 안 돼, 인간 안 돼, 패배감 이것이 주님의 이루심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죠. 따져 보니까 좋다, 나쁘다, 나는 가치 있어, 가치 없어 하는 이 모든 게 너무 개별적 의식이었던 겁니다. 내가 나를 항상 잘못된 방법으로 해석해온 겁니다.

요한계시록 마저 하고 마치겠습니다. 11장 아까 그 문제. 분명히 죽는 것은 선지자를 죽인 쪽이 죽어야 되는데 그다음 보면… 처음에 6절에 잘 나왔어요.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엘리야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전부다 겁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적이 있죠. 짐승이 올라와서 어떻게 했어요? 7절에, 두 증인을 이겼어요. 그리고 이기는 데서 끝난 게 아니라 저희를 죽였어요.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그다음에 8절에 보니까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그러니까 소돔, 애굽 다 알죠. ‘소돔, 애굽’ 구약에 박혀있는 개념, 이스라엘 개별자에 박혀있는 개념을 뽑아서 마지막 최후에 온 우주의 개념으로 공유화시켜버리는 거예요.

무엇이 소돔이냐, 무엇이 애굽이냐? 동시에, 무엇이 십자가냐? 십자가 달린 분 예수님은 개별자인데 그 개별자가 마지막 때에 주님의 천사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개별자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택한 백성한테는 공유적 십자가로 나타나시는 거예요. 두 증인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이 아직 남아있는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들이 외치게 하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특정 지역이 아니고 현재 이 아~ 대한민국이 소돔과 고모라에요. 지금 월드컵 한다고 바빠요. 월드컵 하면 그냥 하는 줄 알아요? 기도 막 해요. 주여, 대한민국 32강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박힐 때 그들이 몇일 동안 목도하는가?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리고 두 선지자가 땅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 땅에 거하는 자들이 서로 선물을 보내고 자축하고 있죠.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그런데 삼일 반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11절, 저희들이 죽었어요, 살았어요? 생기가 들어가니까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12절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 말았어요.

전체 역사가 성도의 공유적 행위 안에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압축이 되어 있죠. 딱 압축이 된 거예요. 압축이 되면서 천사의 일을 하고 그게 한 꺼풀 벗겨지니까 이미 시작하고 마감이 된 인류의 역사가 그들 안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핵이 두 명의 성도를 통해서 전부다 공개되고요. 그다음 13절에, 멸망하고 말았더라.

세상에, 두 명의 선지자가 사태를 정상으로 돌리니까 그다음에 세상은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님께 대드는 지옥이구나. 지옥은 불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옥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단어와 의미를 서로 힘을 합쳐서 그걸 공유하면서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그 공간,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안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그것을 한꺼번에 알게 하옵소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좋아들하고, 때로는 낙망하고, 절망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무서워하지만, 그것조차도 주께서 성령의 끈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는 기계로 다루어지는 주의 일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0강) 엡2:21(성령의 공유성)20260622 (강의: 이근호 목사)

(음성 녹취 전체입니다.)

오늘 이 강의는 교재『복음이냐 교회냐』 125페이지부터 잠시 하고 120페이지로 돌아올게요. 125페이지 잠시 보겠습니다. 아래 문단입니다. [선지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선지자는 대신 죽으심과 희생의 면면을 보이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 둘씩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선지자들 자신은 절대 선지자 노릇을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 자신은 절대 선지자 노릇을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모든 일은 예수님 홀로 해야 돼요. 이것은 신앙의 철칙입니다, 신앙의 철칙.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에 내 믿는 행위가 끼어들면 안돼요.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선지자가 성도거든요.

성도는 결코 본인이 원하는 인생길 가는 것을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거든 자기 자신을 쥐어박아야 돼요. ‘주님, 저를 아주 버리시려고 작정을 했는지… 왜 내 뜻대로 됩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맛없는 수박을 원했건만 왜 이렇게 단 거예요, 이게? 제가 그렇게 미워요? 왜 제 소원대로 되게 하십니까?’

그다음에 [그리고 선지자의 모든 말이 다 계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이거…선지자가 하는 모든 말이 다 계시가 되지 않는다는 무슨 뜻이냐 하면, 선지자가 그 시대에 계시를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이렇구나. 이게 계시구나. 정치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거든요. 잘못된 해석이잖아요. 그런데 계시를 전하는 선지자 본인도 그 해석이 잘못된 해석인지를 몰라요.

인간 해석은 용납이 안 됩니다. 모든 고민과 걱정이 자기가 자기를 해석해서 나온 거예요. 본인이 해석 안하면 되는데 계속 해석을 하기 마련이에요, 계속. ‘인간이 어떤 해석을 한다’ 이것은 계시 해석일 수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현실상 해석,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해석을 인간이 하는 거예요. 당연히 할 수밖에 없죠. 적응해서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해석할 수밖에 없죠.

해석하고 난 뒤에 결론은 뭐냐? ‘이러면 난 곤란한데.’, ‘이러면 난 너무 기쁜데.’ 아니, ‘좋다, 기쁘다’를 누릴 자격이 우리한테 없어요. 없는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즐거워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자기 해석을 하는 한계입니다. 주께서는 예언된 계시를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기존에 인간들이 만들어낼 해석을 미리 아시고 그걸 끄집어내고 그걸 제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예언은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해석이거든요. 되니까 기쁘잖아요. 기쁜 이것도 해석이에요. 기쁘니까 그 순간 뭐를 삭제 못시키느냐 하면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삭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 갑시다. 잘 됐습니다. 이걸로 갑시다. 주식 9000, 좋아! 9000 찍고 12000 갑시다!’ 뭐 이런 거. 뜻대로 되었으니까.

그래서 여기 125페이지 마지막에 보면 […선지자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것들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렇게 선지자가 이야기해놓고 선지자 본인도 이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125페이지에 나오는 구약 선지자와 이제 120페이지에서 설명할 신약의 선지자, 예언자들의 차이를 이 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120페이지에 나오는 신약의 선지자로서 제가 예를 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120페이지 중간에 나오죠.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이들을 ‘두 증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입니다. 요한계시록 그 구절은 항상 난해해요.

요한계시록의 성경 해석이 어려운 것은 ‘집약’ 때문입니다. 집약, 압축이 되어 있어요. 집약,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함축이 되어 있습니다. 함축, 집약. 뭉쳐져 있어요. 파리바게트 빵 중에서도 밀가루 층이 이루어져서 겹쳐져 있는 페스추리처럼 수술할 때 의사가 근육층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떼어내야 되잖아요.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것은 한층 두층 조심스럽게 떼내야 돼요. 층이 층층이 있는데 이 층이 섞이지 않게 하나씩 떼어내야 된다고요.

이걸 떼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성경구절을 예수님 자신의 사건으로 붙일 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것이 한 덩어리져 있기 때문에 이걸 떼내야 돼요.

그럼 원칙을 봅시다. 뭐가 나온다고요, 해석하면서? 죽으심이 나오죠. 누가 죽였습니까? 악마가 죽였죠. 그럼 해석이 됐죠. 요한계시록 해석은 무엇의 정체, 무엇의 실재를 드러낸다? 악마가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 악마를 인간이 이겼어요, 못 이겨요? 못 이겼죠. 못 이겼으니까 인간들이 합치해서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지금은 악마가 한 것에 대해서 누가 나서느냐? 요한계시록 6장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절을 보면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어린 양이 나오죠. 누구죠? 예수님이죠. 그다음에 ‘네 생물’, 천사들이죠. 사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사람 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계셔서 일을 누구보고 시켜요? 천사보고 시켜요, 인간보고 시킵니까? 천사보고 시켜요. 왜? 인간은 뭐하는데? 인간은 마귀의 권세 아래 꼼짝 못하고 있어요. 꼼짝 못하고 있다고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인간은 당하기만 하니까 인간, 성도에게는 아픔과 고통이 있겠죠. 당하기만 하니까 앞에서 시위하든지 데모하는 게 아니고, 호소를 하죠. 하나님보고 호소를 하게 되면 호소한 것이 향로에 담긴다 했죠. 아까 민수기 16장, 향로. 향로 엎어버리니까 지옥 불이 나오는 거예요, 지옥 불.

언어가 쏟아지면 두 가지 결과가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천국이 나오는 언어, ‘아멘’, 또는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말은 잘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되었다’는 거예요. ‘이미 진실합니다.’ “동의해?” 동의할 때 “아멘” 해요. 이미 되어진 것이 페스추리처럼 접혀진 것이 펼쳐지기만 하면 돼요. 펼쳐지지기만 하면 됩니다.

펼쳐지면서 뭐가 나와요? 계속해서 한 꺼풀씩 펼쳐질 때마다, 아멘, 또 아멘. 아멘. 주께서 계획 잡은 대로 빈틈없이 아멘. 진실로 그러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같은 경우에 “…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19-20절) 그 고백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웃고 울고 즐기고 할 때, 웃고 울고 즐기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접혀진 예언대로 펼쳐지는 결과일 뿐입니다. 좋다, 나쁘다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논할 수 없지요.

언어에서 천국이 나오고, 또 하나의 언어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옥이 나옵니다. 천국에서는 찬양이 나오고, 지옥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까 질문 형성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노골적인 반발이죠. 율법이 진리잖아요. 진리가 왔음에도 안 봐요. 과학이 진리로 대체되어버렸죠. 코로나 약이 진리로 대체되고.

일본하고 한국하고 월드컵 축구한다면 누가 이겨야 진리입니까? 일본이 한국을 4대 0으로 이기면 이게 진리입니까? 막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몰라가지고 ‘대~한민국’하면서 광란의 기쁨을 표현하겠습니까? 안하죠.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진리에 대해서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요새 잘 쓰는 말로 ‘개별자’라 하고, 선지자는 개별자 버리고 ‘공유자’로 등장합니다. 공유자. 뭘 공유하느냐?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성령님을 공유해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을 공유한다’ 같은 말입니다. 성령님을 공유해버리면 개별적인 기쁨과 즐거움보다도 더 위층에서, 더 총괄적인 층에서 어떤 일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그 점을 공유하는 것, 그게 바로 구약 선지자와는 다른 신약의 기름 부은 성도들에게 표출되는 성령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뭡니까? ‘나밖에 모르는 개별자가 어떻게 공유자가 되느냐?’ 오늘 강의는 진도 이렇게 나가면 되는 거예요. 개별자가 아니고 공유되어 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어렵죠? 그러니까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끈’. 각 사람마다 뒤에 끈이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남자, 여자 성도 다섯 명이 있다고 봅시다. 우리는 남자, 여자, 남자, 여자 이렇게 보지만,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공유된 끈이 있어요. 끈. 이번 수련회 교재 보신 적 있습니까? 여성에 대해서 언급한 게 있죠. 여성은 전체가 아니고 ‘비(非)전체’라는 말이 나와요.

[…남성이 의미의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은 비(非)전체에 해당한다. 그런 남성의 조건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의미를 잃을 때, 비로소 여성의 본래성이 드러난다.…] (2026 여름 수련회 <그리스도 안의 창세기> 교재 中)

‘교재에 굳이 이 말을 써야만 했었습니까?’ 할 수도 있는데, 비(非)전체라는 말을 굳이 해야 될 이유는 수련회에 나옵니다. 그 단어를 굳이 그렇게 써야 될 이유가 있어요. 누구 괴롭히려고 쓴 게 아닙니다. 그걸 안 씀으로써 자기 세계가 좁아지는 것이 철회되어야 돼요. 인간이 자꾸 자기 세계가 좁아지는 이유는, 개인이 이미 해석이 끝나버린, 해석이 끝나서 자신만만한 단어만 구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도를 아십니까’도 그렇고 여호와의 증인들 특징이 그거잖아요. 자기 해석이 끝나버린 단어, 그것만 자신 있으니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참 답답한 거예요.

용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직장 생활 속에서 자주 쓰는 용어가 툭툭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자기 직업이 뭔지, 직장이 뭔지. 그게 공유가 안 되잖아요. 자기 직업이 전공이니까 개별자로 머물게 되는데, 개별자로 머물면 안 되잖아요.

개별자에서 공유자로 교체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온 단어에 대해서 얇은 막으로 겹쳐진 빵처럼 겹쳐진 그것을 풀어내는 가운데서 그 의미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악마의 설침을 같이 경유하면서 새롭게 단어가 이해되어야 돼요. 그러면 악마가 설쳐댔을 때 나오는 단어가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단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어려운 교재도 풀릴 거예요, 지금 제가 설명하게 되면. 특별히 여러분에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밖에 모른다.’ 맞는 말이죠. 어린 아이는 자기밖에 몰라요,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 애가 커가면서 엄마, 아빠한테 뭔가 자꾸 사 달라 해요. 그 행위는 자기밖에 모르는 행위에요.

그런데 뭘 사 달라고 할 때, 그 항목, 리스트에 해당되는 단어 있잖아요, 그 단어는 어디서 배웠느냐? 그거 어디서 갖고 온 거예요? ‘이거 사줘, 저거 사줘’할 때, 티니핑- 무슨핑 할 때, 그 단어를 어디서 가져왔느냐? 이미 공유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단어에서 개별자로서 용납이 안돼요.

만약에 거기서 단어 몰라서 친구 간에 무슨 단어냐 물으면 안 놀아줘요. 안 놀아주면 탈락이죠. 탈락이면 이미 그 사람은 주체가 성립 안 되기 때문에 이상 자아, 자기는 뭐 되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 방해받아요? 자아 이상이 안돼요. 나 저거 되고 싶은데 친구들이 막아서버려요. 그럴 때는 자연인 되든지 집구석에 박혀 있든지. 밖에 나갈 수 없는 거예요.

공무원 시험 네 번 떨어지고 그다음부터는 집 밖에 안 나와요. 그냥 자체적으로 감옥 생활하면서 엄마가 방문 밑으로 밥만 집어넣어주죠. 왜 자기 폐쇄, 자폐증의 증세를 보이느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묻지요. 사랑이 뭔데? 내가 갖고 있는 내 마음에 아무도 동조를 안 해주니까 공유가 안돼요.

그렇다면 네가 갖고 싶다고 한 단어가 어디 있냐? 현재 떠돌아다니는 저것을 함께 갖고 있으면 쟤들이 나를 친구로 받아줘요. 그러면 나의 공유가 확장되면서 내 세계가 넓혀지면서 내가 되고 싶은 목표가 생겨버리죠. ‘I have a dream~’ 내가 꿈을 꿀 수 있는, 숨 쉴 만한 공간이 형성된 거예요. 나 저거 될래.

촌에 있는 아버지가 “야, 너 그렇게 방황하지 말고 내가 하던 일 받아라.” 자식이, “아버지,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서 독립할게요.” “얘, 와서 묵이나 갈아라.” “아닙니다. 나는 세공해야 되고, 내가 요식업을 했기 때문에 요식업을 해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7년 동안 하고 싶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한 <인간극장>이에요. “촌에 와서, 충청도 공주에서 묵 갈아라.”

세상 분석하는 거 쉽죠? 무지무지 쉬워요. 기존에 날아다니는 가운데서 자기 어릴 때 자기가 꿈꾸던 꿈이 있으면 그걸 낚아채서 그 노선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너 정창래 노선이야? 이재명 노선이야? 이런 거 있잖아요. 문재인 노선이야? 이런 거. 그거 한다고 청춘 다 보내요. 세월 다 보낸다고요.

자기 증인이죠. 자기 개별자죠.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이 문제가 비현실이 아니에요. 너무나 철저하게 현실적이에요. 내 세계가 너무 좁다보니까. 한번 적어볼게요. ‘자꾸만 내 세계, 세상이 좁아져요.’ 같은 말, ‘자꾸만 내가 구사하는 용어가 한정적이에요.’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을 대라면 이게 바로 전도하는 사람들이에요.

전도하는 사람들의 단어가 어디서 나옵니까? 성경에서 나오죠. 해석해보세요. 다른 성경구절로 설명하죠. 그럼 구사하는 단어가 어때요? 폐쇄적이죠.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만 구사해요. 신학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교인들과 목사들 자기끼리 아는 단어들만 주고받아요. ‘I have a dream~’ 이런 거 몰라요. 하여튼 그런 건 세속적인 거예요. 거룩한 것은 성경에만 나와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했던 거예요. 사실 그들은 성경 말씀보다도 로마 권력에 더 치중했지만, 일반 교인들은 무식해서 오직 말씀만 생각하는 사람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자기 생각이 좁아지죠. 좁아지면 그 후유증이 뭐냐? 갈수록 철저한 자기 방어가 돼요. 자기 방어가 되니까 압력이 바깥에서 자기를 더 압축하죠. 그럼 어떻게 돼요? 찌그러지겠죠. 찌그러지니까 점점 더 자기가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도망하는 데에 거기에 신경을 쓰는 겁니다.

그것이 어제 낮 설교에서 A4용지(벽)에 사람 모양을 만들어서 한 이유에요. 결국 막다른 길에 뭐가 나옵니까? 철저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육이죠. 자기 의가 나오죠.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그 나라 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한번 봅시다. 여기에 어린 양이 계시고 천사가 네 명 나옵니다. 네 존재가 나오죠. 6장 8절,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땅의 짐승들을 죽이는 거예요. 이것이 네 번째 말, 청황색 말이 나오는 겁니다.

자, 눈에 보입니까, 지금? 천사가 눈에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이는데 희한하게 천사가 설쳐대서 남긴 결과, 이 현실을 우리가 알아요, 몰라요? 알죠. 전염병이잖아요. 전염병. ‘검과 흉년과 사망’, 전염병이죠. 그리고 우리는 모르는데 ‘땅의 짐승’, 악마가 설쳐대고 악마의 졸개들이 설쳐대는 그것들. 이렇게 되면 개별자로서 자폐적인, 자기의 세계가 전부라고 아는 그 바깥에 지금 누구하고 누가 싸워요? 악마와 천사와 마지막 결전이 된통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 세계에 그냥 파묻혀 있는 거예요. 자기 세계에 푹 파묻혀 있는 거예요. 그 세계밖에 몰라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를 봅시다. 분명히 자기가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욕망으로서 돈 있으면 살 수 있는 것들이 날아다니죠. 자, 돈 있어서 샀습니다. 사서 어디로 가져와요? 그걸 공유합니까, 자기만 즐깁니까? 자기만 즐기죠. 가족이고 뭐고 간에 갈수록 자기밖에 몰라요, 이 자본주의가.

제가 어느 강의에선가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는 있으나, 어머니라 하는 것은 엄마의 body, 몸이 있잖아요. 인간의 몸은 개별자, 자아를 부여받기 때문에 내 생각이 자식한테 전달 안 됩니다. 이게 몸의 한계에요. 육의 한계에요.

그래서 자식한테 잘해준다, 잘해준다 백날 해도 자식은 엄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식의 body는 따로 놀기 때문에 엄마를 이용할 뿐이지. 엄마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엄마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가 없거든요. 엄마의 사랑이 욕심일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엄마가 바깥에 나가 노동해서 돈을 벌잖아요. 돈을 벌 때 그 돈을 어디다 허비하느냐? 가정이라는 환상, 가족을 위해서 바깥에서 어떤 수모와 욕설을 듣더라도 인내하면서요, 내 자식만 잘된다면 이까짓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해서 그야말로 옛날에 반티 장사해서 돈벌어가지고 자식 대학 보내려고 다 했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육과 육 사이에는 전달이 안돼요. 전달이 안 되는데, 엄마는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내 몸 위주가 아니고 자식만 잘된다면 되겠다 하죠. 인간의 몸은 그래서 부서지긴 부서지는데, 부서진 그것이 자식에게 효과 있습니까, 없어요? 어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불가능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우리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하늘의 예루살렘밖에 없어요. 예루살렘은 공유자니까. 개별자가 아니고, 공유에요. 그게 이 땅에 성령을 통해서 온 거예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요한계시록은 조금 이따 보고요. 요한일서 4장 보겠습니다. 4장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사랑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는가? 요한일서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도의 존재 이유가 사랑 따라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이미 이 땅의 성도로서 목적이 하나로 확정되어버렸어요. 아까 끈이라 했죠, 끈. 성도끼리 만날 때 끈을 보잖아요. 그 사람 보면 그냥 육으로 보고 마는 건데 그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거고, 성령 받은 사람은 ‘뒤로 돌아봐요, 뭐가 있는지? 어? 성령의 끈이 있네!’

주님과의 연결점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 공유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목숨 못 바쳐서 환장한 집단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보고 하라 하면 우리는 일체 못합니다. 못하고, 또 해서도 안돼요. 왜냐하면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은 진실한 분이죠. 하나님이 진실한 분이라면 누가 거짓말쟁이가 돼요?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된다는 그 논리란 말이죠.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된다는 그 논리에 의하면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다는 것이 천하의 거짓말이다 이거에요. 그러니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범죄한 자에요. 범죄한 자인데, 우리가 우리를 해석할 때 내가 항상 범죄했다는 것을 못 받아들여요. 우리는 개별자로 놀기 때문에.

주께서 지금 바쁩니다. 개별자밖에 모르는 인간을 천국의 공유자로 바꾸는 그 방법을 주께서 실시한다고 애를 먹어요. 지금 카메라 안돼서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이게 공유가 안돼서 그래요. 공유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에베소서 2장 21-22절, 성전이 지어져간다는 거예요. 처소가 지어져간다. 어디 안에서? 성령 안에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처소가 지어져간다 할 때 뭐가 빠져나가느냐 하면 ‘나는 육이다’가 빠져나가 버려요. 육을 육이 다루면 안돼요. 육을 성령이 다루어버리면, 육은 하나의 성전 벽돌로 성령께서 다루시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보다 먼저 자신의 육체가 돌로 다루어졌던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베드로전서와 시편 118편 22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했죠. 그러면 건축자들이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뭘 건축하겠다는 말이에요? 성전 짓는 자들이죠. 성전을 짓는데, 그들은 성전을 지으면서 자기가 육이라는 걸 모르죠.

육이면서도 육인 줄 모르는 그런 엉터리 해석을 하면서 성경에 있는 성전을 지어나가겠다는 자들에 의해서 누가 필연적으로 탈락이 되었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쓸모없다고 탈락된 거예요. 쓸모없다고. 육과 육이 모여서 성전을 짓는 데에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탈락된 자가 탈락되어서 버려진 돌로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부터 성전의 건축이 시작되는 겁니다.

집 짓는 시뮬레이션 보면, 건물 기초공사부터 해서 완공까지 진행과정을 빠르게 보여주는 동영상 같은 것이 올라오잖아요, AI로. 주께서 자기가 계실 곳인 성전을 자기가 그렇게 지어버리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 한번 볼까요?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께서 모세하고 단독으로 만납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모세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자기 동포 히브리인들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쳐 죽이고, 그때가 나이 사십인데 도망치듯이 나와서 팔십 대까지 양치고 있었던 거예요. 양치는 그 근처 모리아 산에 떨기나무가 있었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서 주와 대화하는 그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모세가 애굽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에 의해 모세가 강제로 애굽으로 갑니다. 그럼 모세가 뭐가 되느냐? 이런 선지자가 없다는 평을 민수기에서 들어요. “내가 선지자 하나를 뽑아서 너희들에게 파견시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단독으로 개별자로 하나님과 모세가 만났는데, 가서 하는 일을 보니까 공유해야 될 백성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하는 일이 뭐냐? 11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누가 가요? 모세가 가죠. 그러나 사실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해 미리 앞당겨 보여준 하나의 sign(신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단독이지만, 와서는 공유자를 만드는 거예요. 집단을 만드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이십니까?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내 속에서 개별자적 해석은 용납이 안 되고, 공유적 해석-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던 그것을 같이 나누어 누리는 공유적 해석이 끈을 통해서 전달돼요.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끈을 통해 전달된단 말이죠.

그렇다면 아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에 대한 이 해석, 요한일서 3장 16절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 나올 수 있죠. 개별자인 내가 하느냐, 공유자에 포함된 내가 하느냐가 있겠죠.

공유자인 내가 해버리면,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고 주께서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해주십니다. 그럼 ‘나는 목숨 바쳐서 사랑했습니다.’라는 해석이 우리 입에서 나오면 안돼요. 왜냐하면 나는 못하니까. 그런데 받은 쪽에서 해요. “야, 세상에, 내가 목숨도 안 아끼고 나를 사랑했구나.” 그때 뭐라고 합니까? “언제? 내가 미쳤어? 왜 내가 너한테 해줘?” “저런, 겸손 봐라.”

“이게 겸손이 아니야. 진짜 나는 몰라! 네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네가 배고플 때 먹을 것 주었고, 그것은 나하고 전혀 상관없어. 나는 나 챙기기만도 바빠, 지금.” 이렇게 나오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그래, 너는 지옥가라.” 합니까, 어떻게 합니까? “먼저 된 자가 역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구나.”

나는 그게 아닌데. “오후 5시에 일 시작해서 6시, 한 시간 만에 퇴근했는데 왜 하루 품삯을 나한테 주십니까?”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이 “저 겸손 떠는 것 봐. 겸손 떨어서 천당 가려고…” 그게 아닌데! 바로 받은 쪽에서 고백함으로써 그게 나의 개별성을 작살냅니다. 나의 개별성을.

엄마가 자식한테 고생고생해서 다 해주는데 자식은 그걸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이 눈물 흘리면서 “내가 이제 압니다. 엄마가 평생 동안 나 위해서 고생하고, 엄마는 원피스 하나 못 사 입고 예쁜 옷도 못 입고 살아온 걸 이제 압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만 하면 안 되고 옆에 수표 있잖아요, 두둑하게 봉투에 넣어서 이렇게 해야 격식이 맞아요. 그냥 입 싹 닦고 수박 한 덩이 들고 오지 말고. 현찰 넣어서, 안 그러면 아파트 하나 해주든지.

어쨌든 간에 자식이 이렇게 나올 때, 부모 마음은 뭐냐? ‘보람이 있다’ 이렇게 나옵니까? 그건 육이에요. “정말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할 때 감격하죠. 자식이 전도되기를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은 개별적인 나의 해석입니다.

자, 이제 요한계시록이 풀릴 거예요. 일은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해요. 일은 천사가 합니다. 전염병이든 뭐든 천사가 AI 같아요. 아무 감정도 없이 그냥 일해요. 주께서 시킨 대로 일하는데 현실 꼬라지는 전염병 퍼지고 서로 죽이고 난리도 아니죠.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11장. 그것 때문에 125페이지를 언급한 거예요. 11장 3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개별자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고생해야 될 근무시간까지 누가 정해요? 이것은 본인이 못 정합니다. 주 52시간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계시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이 한마디로 함축이 돼요.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성도=□’, 네모에 뭐가 들어갑니까? ‘천사’다. 다른 말로 하면, ‘기계’다. ‘성도=천사(또는 기계)’. 울고불고 기쁘다, 좋다, 나는 내 뜻대로 했다, 일체 이런 소리가 안 나오죠.

AI 전문가들이 늘 이야기해요. 제발 AI하고 대화할 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리하지 말라고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기계보고 쓸데없는 소리하면 누가 손해 보느냐? AI를 굴리는 그 회사에 전기가 더 소모된다는 거예요. 전기 값만 더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계처럼 다뤄야지, 인간처럼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이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기계가 누구냐 하면 성도입니다. 성도가 하지도 않았는데 성도보고 ‘고맙다, 감사하다’ 하면 안돼요. 성도는 끈이 있어요. 누구보고 감사해야 돼요? 공유된 자, 누구입니까? 성령을 기름 부은 자, 같은 성전 안에서 같이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 가동되는 그 시스템 안에서 자기는 그냥 주께서 주신 상황 따라서 끈의 본성대로, 계시가 흘러나오는 본성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남들은 뭐 난리도 아니죠.

“어째서 한 골 넣었습니까, 체코전에서?” “공이 그냥 날아왔네요.” 이뿐이죠. “손흥민은 왜 한 골도 못 넣었습니까?” “공이 안 날아오니까 못 넣었죠.”

이럴 때 나의 해석에서 벗어나고 개별자에서 벗어나요. 자기 좁은 세계에서 벗어납니다. 공유된 세계에 일은 주님이 하고, 천사보고 시킨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이 활동합니까, 밧모섬에 귀양 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귀양 가 있잖아요. 아무것도 못해요. 아무것도 못하는데 현실은 잘 돌아갑니다. 참 잘 돌아가요.

이것을 기본 해석으로 보고 11장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세요. 11장 4절에,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죠. 두 촛대가 뭐로 바뀌었다? 두 증인으로 바뀐 겁니다. 촛대라 할 때, 요한계시록 1장에서 촛대는 누굴 이야기합니까? 촛대는 예수님과 함께 공유되어 있는 그 성전 앞에 있고, 주님은 그 촛대 사이를 돌아다니죠.

그 촛대 가지가 몇 개에요? 일곱 개. 그러니까 전체 교회는 몇 개? 일곱 개. 여섯 교회는 안돼요. 다섯 교회는 안 됩니다. 일곱 교회가 있어야 돌아다님이 완성이 되니까요. 그러니까 손가락 여섯 개, 발가락 여섯 개 이게 괴물이에요.(삼하 21: 20, 대상 20:6) 24개 하면 안 됩니다. 다섯 개씩 20개 되어야지, 24개 있으면 안돼요.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괴물입니다.

여기서 5절에 보면 5절 말씀이 뒤에 말씀과 안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5절이 뭐냐?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래놓고 죽기는 누가 죽었어요? 이 대목을 보면 두 증인이 안 죽죠. 멀쩡하죠. 그런데 그 뒤에 보면 누가 죽어요? 두 증인이 죽어요.

죽었는데 그 죽음이 생명이에요! 죽었는데, 개별자 인간이 개별자 두 증인을 죽였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두 증인은 공유된 생명 안에서 공유된 것으로 살았다’는 티를 낸 것이 되고 죽였던 그들은 공유된 생명에서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살아도 죽은 것이라는, 생명과 죽음의 두 개념을 두 증인을 통해서 밝히 확정시켜 주는 그 기능에 두 증인이 동원된 거예요. 이게 말씀이에요.

네가 산다는 것과 내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다르고, 네가 죽었다는 의미와 내가 죽었다는 의미가 다른 거예요. 49제한다고 돈까지 갖다 바치는데, 그들이 말하는 공유된 죽음은 뭡니까? 그쪽 세계에 공유된 죽음은 자아 이상, 자기 잘남을 유지하는데 통용되는 개념을 그들은 뽑아서 ‘나 너하고 같은 한 편이니까 놀아줘.’ 하는 거예요.

엄마도 못하면서 엄마 되기 위해서 그 엄마는 자식의 존재가 필요했고, 자식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기의 노동의 대가가 사랑이라는 보상으로 넉넉하게 자기 세계를 구성한 거예요. ‘거봐. 내 자식 잘 키워놓은 것 봐라. 내가 고생한 걸 알잖아. 아, 난 너 볼 때마다 보람을 느껴. 보람을 느낀다고.’

보람을 느껴봐야 자식이 잠을 재워줍니까. 자식이 잠 안 재워주고 새로운 이불이 잠재워주는데. 새 이불이 보람이죠. 그런 분이 있어요. 새 이불 덮고 잘 잔다는 분 있어요. 결국은 이불 덮을 때마다 “자식 아무 소용없다.” 이 말을 하는데, 그 말 하자마자 자식이 새 이불 들고 왔을 때 “역시 자식은 잘 키워보면 다 대가가 오게 되어 있어.” 이런다고요.

모든 해석이 누구 해석이에요? 개별자 나의 세계를 자기 기쁨으로 채우기 위한 자기 해석이잖아요. 우리에게 육이 있다는 걸 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점에 대한 해답이 로마서 14장 11절에 나와요.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게 공유 아닙니까, 이게 공유! 이게 공유거든요, 로마서 14장 11절. 10절이 뭐냐? 같은 형제끼리 비방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는 뒤에 끈이 있다는 거예요, 공유된 끈이. 주께서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이것에 대해서 더 분명한, 여러분이 잘 아는 대목을 봅시다. 빌립보서 2장 10절. 보면 아, 그 말씀이구나 생각날 거예요. 10절, 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공유죠. 따라서 이 말씀은 끈이 있는 사람에게만 무슨 뜻인지 의미가 납득되죠. 그렇다면 제가 두 번째 시간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 개인적으로 울고 웃고 승리했다, 이겼다, 졌다, 절망한다, 낙담한다, 아니야 난 안 돼, 인간 안 돼, 패배감 이것이 주님의 이루심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죠. 따져 보니까 좋다, 나쁘다, 나는 가치 있어, 가치 없어 하는 이 모든 게 너무 개별적 의식이었던 겁니다. 내가 나를 항상 잘못된 방법으로 해석해온 겁니다.

요한계시록 마저 하고 마치겠습니다. 11장 아까 그 문제. 분명히 죽는 것은 선지자를 죽인 쪽이 죽어야 되는데 그다음 보면… 처음에 6절에 잘 나왔어요.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엘리야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전부다 겁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적이 있죠. 짐승이 올라와서 어떻게 했어요? 7절에, 두 증인을 이겼어요. 그리고 이기는 데서 끝난 게 아니라 저희를 죽였어요.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그다음에 8절에 보니까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그러니까 소돔, 애굽 다 알죠. ‘소돔, 애굽’ 구약에 박혀있는 개념, 이스라엘 개별자에 박혀있는 개념을 뽑아서 마지막 최후에 온 우주의 개념으로 공유화시켜버리는 거예요.

무엇이 소돔이냐, 무엇이 애굽이냐? 동시에, 무엇이 십자가냐? 십자가 달린 분 예수님은 개별자인데 그 개별자가 마지막 때에 주님의 천사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개별자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택한 백성한테는 공유적 십자가로 나타나시는 거예요. 두 증인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이 아직 남아있는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들이 외치게 하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특정 지역이 아니고 현재 이 아~ 대한민국이 소돔과 고모라에요. 지금 월드컵 한다고 바빠요. 월드컵 하면 그냥 하는 줄 알아요? 기도 막 해요. 주여, 대한민국 32강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박힐 때 그들이 몇일 동안 목도하는가?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리고 두 선지자가 땅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 땅에 거하는 자들이 서로 선물을 보내고 자축하고 있죠.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그런데 삼일 반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11절, 저희들이 죽었어요, 살았어요? 생기가 들어가니까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12절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 말았어요.

전체 역사가 성도의 공유적 행위 안에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압축이 되어 있죠. 딱 압축이 된 거예요. 압축이 되면서 천사의 일을 하고 그게 한 꺼풀 벗겨지니까 이미 시작하고 마감이 된 인류의 역사가 그들 안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핵이 두 명의 성도를 통해서 전부다 공개되고요. 그다음 13절에, 멸망하고 말았더라.

세상에, 두 명의 선지자가 사태를 정상으로 돌리니까 그다음에 세상은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님께 대드는 지옥이구나. 지옥은 불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옥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단어와 의미를 서로 힘을 합쳐서 그걸 공유하면서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그 공간,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안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그것을 한꺼번에 알게 하옵소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좋아들하고, 때로는 낙망하고, 절망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무서워하지만, 그것조차도 주께서 성령의 끈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는 기계로 다루어지는 주의 일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신명기(40강) 18장 9절(꿈과 예언), 20260622-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8장 9절, 약간은 난해한 뜻이 있을 건데 그러나 우리가 필히 알아야 돼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 들어가거든…” 그다음에 “너는”,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죠? 그다음에 “그 민족”이죠. 우리가 이 ‘그 민족’에 해당돼요. 그 민족, 이방 민족. 우리가 이스라엘 아닙니다. 그 민족에 해당돼요. 그 민족 -기생 라합이 있던 그 여리고 성의 민족이라고 보면 돼요- 에 해당되고 그 앞에 ‘이스라엘이 있다.’ 이 말이죠.

우리는 그 이스라엘 속에서 보는 게 아니고, ‘그 민족’에서 출발해서 ‘이스라엘’에 속해 놓고, 그 이스라엘 자리에 위치해서 다시 한번 전에 있던 이 고향 민족, 동족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게 하는 식으로 이 성경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빠이빠이 할 수 없어요. 우리 육신이 있는 한, 육신이 이 민족 속에 살고 있는 한 헤어질 수는 없고 관점만 다르면 돼요. 관점만 바뀌면 돼요.

전에는 이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이 부럽다.’ 이거였는데 이제는 ‘흩어진 이스라엘’이 되어서 ‘이 민족’을 바라보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봐서 이 민족에는, 그 민족에는 뭐가 없었냐 하면 성령이 없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흩어진 이스라엘에는 뭐가 있습니까?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성령을 소유했다.’ 안 됩니다. ‘소유 당했다.’ 맞습니다. 소유 당한 거예요. 성령 앞에 우리가 소유 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성령이 보고 싶습니다.’ 그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지금껏 우리는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습니다.’ 했죠. ‘성령을 보고 싶습니다. 성령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 발상을 우리는 해본 적이 없는데 성경은 그 발상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모스 5장 4절과 5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다음에 뭐냐 하면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 찾아봐~라.” 이렇게 된 거예요. 날 잡아봐~라, 숨바꼭질을 하시면서 ‘찾아라.’ 그러면 사람들이 ‘찾지 뭐.’ 어디에? 여호와께 제사하는 그 집회 장소, 예배드리는 곳, 그런 곳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해왔기 때문에 그곳에 찾아가죠. ‘내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지만 집회 벌이는, 예배하고 있는 그 장소에는 가겠지.’

그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영국 성공회, 동방 정교회, 카톨릭. 이 카톨릭, 동방 정교회, 영국 성공회 특징이 있어요. 예배드리는 데 2시간 걸립니다, 예배드리는데. 이 천주교보다 성공회 이쪽이 더 심해요. 제가 옛날 목사 될 때 나하고 교제하던 분이 루터교였어요, 루터교. 아, 궁금하죠.

천주교도 공부하고 이것저것 얼추 공부했지만 루터교는 공부할 수 없었는데, 루터교의 그분과 서로 연락이 되었고 ‘우리는 이렇게 예배드린다’고 얘기해 줬어요. 영국 성공회에 대해서는 공부하고 파악은 했지만, 2시간 반 동안 무슨 짓 하면서 그 시간을 그만큼 보내는지, 그 현장에 가서 내가 거기 참석할 기회는 아직 없었어요. 천주교야 뭐, 우리 고모가 맨날 장례식 하면서 뭘 들고 있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체험을 했지만.

고정된 장소에서 안 하는 짓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거기에 강제로 소환된다는 식의 발상. 그게 뭐지요, 푸틴이 믿는 종교가 뭐예요? 러시아…? 예, ‘러시아 정교회’죠. 2시간 반 동안 해요. 애초에 그리스 정교회 그 동네, 그래서 그들이 일어서고 앉고, 앉았다가 일어서고. 성공회는 일어서고 앉을 것도 없어요. 아예 서서 해요, 2시간 동안.

그런데 영국, 미국의 청년들이 그곳으로 많이 간다는 거예요. 종교,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거예요. 일종의 자기 도전이죠. 장거리 가서 아무것도 없이 하는 그것도 자기 도전이잖아요. 그거 하는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종교단체에 참여해서 안 쉬고 2시간 버티는 그것도 일종의 모험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찾아라.” 아모스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찾습니까, 못 찾습니까? 못 찾아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그다음에 여러분 다 아는 유명한 말씀이에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왜 아모스로 하여금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느냐 하면, 그들은 말씀을 찾는데 이게 음흉한 노림수가 있어요. ‘말씀을 찾으면 지금보다 월수입이 더 증가하겠다’는 노림수가 있어요. 돈이 있으면 행복해지겠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말씀을 찾는 거예요. 그 말씀을 찾는 방법이 길갈이었고 아까 나온 브엘세바, 벧엘, 그런 거예요.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 만나서 줄 것은 주고, 받아낼 것은 받아내겠다.’ 그 당시 아모스 시대의 의식이나, 오늘날 의식이나 차이점 없죠.

그러면 오늘날 의식은 뭐냐? 찾아라, 뭘? 성령이 어떻게 일하는 곳을 찾아라! 이거는 찾으란 말이에요. 못 찾는단 말입니까? 찾을 수 없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바람 같아서 잡을 수가 없어요, 바람 같아서! 인간에게 잡히지를 않아요. 그걸 ‘사건’이라고 합니다. ‘존재’는 ‘사건’을 포착을 할 수 없어요. 왜? 존재의 자기 뿌리를 스스로 뽑아낼 수가 없기 때문에. 참, 무 뿌리는 뽑아낼 수 있습니다.

존재가 안 뽑히니까 모든 각양 좋은 것은 어디로 다시 소환되겠습니까? go home, 내 존재로 돌아오겠지요. 이게 노림수잖아요. 이게 노림수라고요. 이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실패, 그리고 오늘 나오는 그 민족, 그 민족도 실패, 둘 다 존재를 뿌리에 두고, 박아 놓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실패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숨바꼭질을 계속하고 계세요. “날 찾아봐~라, 날 잡아봐~라!” ‘날 잡아봐라.’ 할 때는 반드시 너의 실패의 자리에서만 보이는 분,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성령님이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비로소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미 사전에 성령께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이 어려워요. 보통 예수님을 존재로 보잖아요. ‘저기 계시다’로 보잖아요. 요한일서에서는 이게 인간들의 한계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저기 계신 분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전에 나는 ‘여기 계신다, 또는 존재한다’라는 인식이 이미 갖추어졌기 때문에 ‘나처럼 저기 계시네’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게 누구 실패냐면 열두 제자의 실패였어요. 열두 제자가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함께 있다’ 했는데 본인은 몰랐죠. ‘예수님이 여기 있다, 여기 계시다’가 성립되려면 이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를 옳은 사실로 인정해야 이게 나와요. 그러니까 주님이 떠난다고 얘기하니까 베드로가 ‘우리를 여기 두고 어디로 가시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이야기를 했죠.

요한일서에서 이 점을 한꺼번에 지적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물과 성령과 피’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존재를 설명해야 되는데 요한일서는 예수님이 예수님 되기 위해서, 적 그리스도가 아닌 진짜 그리스도의 특징은 뭐냐? 물과 피와 성령, 그리고 이 세 개를 뭐라고 하냐면 ‘셋은 하나’라 했어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그러면 ‘예수님의 물과 피는 하나’라 했으니까 예수님의 물과 피를 흘린 것은 누구의 역할이었다? 우리보다 예수님께 누가 먼저 왔어요? 예수님께 성령이 먼저 왔죠.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 왔지요. 존재로 계신 분, 존재로 계신 분에게 성령이 먼저 임하는 걸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이 순서 안 밟으면 너는 주님이 먼저 가 계신 곳에 합류하지 못한다.’ 이걸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일서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어느 정도로 우리를 괴롭히느냐? 이렇게 괴롭혀요.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분을 우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르잖아요. 그 ‘보이지 않는 분이 안 보이는 데 있다’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요한일서에는 ‘성령이 오면 된다’는 거예요. 참, 이거 환장할 지경이에요. 이게 믿으라는 이야기예요, 믿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믿음은 네 소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성령이 와야 믿어지니까! 또, 또 성령을 동원해요. 그러면 성령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면 됩니까? 요한1서 4장에 성령이 오면 사랑한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를 보세요. 우리의 질문은 반드시 우리의 존재를 근거로 해서 ‘내 존재가 얼마나 잘 될까’를 염두에 두고 자꾸 어떤 형식, 질문 형식이 돼요, 질문 형식.

하나님께서 이 질문 형식을 자꾸 배척하는 이유는 이 마귀가 하나님을 공격할 때 하는 버릇이 뭐냐? 꼭 신을 향하여 질문을 해요, 꼭 질문을 한다고. 그게 물리학의 역사예요. ‘요래 해볼까, 저래 해볼까?’ 그게 생물학의 역사고, 철학의 역사고. 어떻게 하면? 진실이 뭐냐? 진리가 뭐냐? 계속 질문을 하는데 기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해답을 안 주니까 갈릴레오는 실험해야 되고, 뉴턴도 실험해야 되고, 아인슈타인은 사고실험 해야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어떤 결과를 낼 때 이게 진리다, 이렇게 되거든요. 이게 학문이고, 그게 기술이고, 그게 AI가 나오게 되는 결론이에요.

페니실린 실험할 때 2만 번 실험했잖아요, 페니실린. 그 약에 맞는 거. 3500번의 실험을 해서 나온 게 뭐냐? 필라멘트 나왔어요. 에디슨의 전구 연구예요. 이거 뭐 사람 머리카락 갖고 해봤다가 대나무 줄기 갖고 해봤다가…, 3500번. 그 조수들 애 먹었어요. 월급도 별로 안 주면서 이렇게 해봤다고요. 왜 그렇게 합니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내가 궁금해 미치겠다는 거예요. 궁금해 미치겠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 없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내 존재의 뿌리로부터 시작하겠다는 거예요. 우리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요? “인간들아, 너희들 질문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잘 가르쳤었습니다. 이게 인간은 존재, 자기 존재의 뿌리로 소환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돼요.

자, 주께서는 질문을 못 하게 만들어요. 못 하게 하고, 질문을 하든 뭘 하든 관계없이 예수님이 알아서 대표로 해버려요. 대표로 하고, 질문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으로 완전히 끝났죠.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은 뭐가 돼요? 진짜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을 전부 자기한테 가져오니까 진짜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그렇게 예수님만 이스라엘 되죠.

이게 요한복음 1장 51절에 나옵니다. ‘인자의 머리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했잖아요. 그게 원래 이스라엘인 야곱,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인데 그걸 주님이 자기 사건으로 가져와 버리죠. ‘나만 이스라엘이다.’ 예수님만 이스라엘 되니까 나머지는 이스라엘 아니죠. 유대 나라는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아비는 마귀’(요 8:44)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성령을 줘버리면 여기서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뭐냐? 율법에 의하면 ‘그 민족’이 돼요. 이방 민족이 돼요. 성령이 오면 이 둘 다를 버리지 말고 이 둘의 차이를, 이 간격을 확보하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들의 육은 살고자 하는데 주께서는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그 차이.

진도 나가기 전에 어제 오후 설교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했는데 그거 약간 마저 하겠어요. ‘나봇’이라는 이 사람, 나봇이라는 이 사람이 포도원을 지켰다. 왜 지켰느냐? ‘포도원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내가 지킬 사명이 있다.’ 그래서 ‘이 땅은 사고파는 그런 대상이 안 됩니다.’ 했잖아요.

그런데 이걸 바꿔야 돼요. 포도원이라는 이 땅, 주님이 이 땅을 위해서, 땅이 누구를 지키느냐? 나봇을 지켜요. 나봇을 지키는 이유가, 나봇을 뭘 지킨다는 말인가?어제 오후에 잠시 이야기했죠. 사태가 정상으로 돌아가면…, 그다음에 뭡니까? 모든 것이 보인다. 비정상적인 나라에서 이 사태가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누가 희생이 돼야 돼요. 나봇이 희생이 돼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사태가 정상으로 되는 이걸 원합니다. 나봇이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나봇은 영광스럽게도, 영광스럽게도 땅이, 포도원의 땅이 조상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땅 상속분, -이걸 기업이라 해요- 그 상속분이, 나봇으로 하여금 그 시대의 그 사태가, ‘이래야 정상입니다’를 보여주는 일에 철저하게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봇을 철저하게 사용하신 거예요.

이것을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은 이거예요. ‘지금 남 탓할 게 아니고 너나 잘하세요!’ 하는 그러한 느낌이 오는 거예요. 엘리야는 철이 없어가지고 ‘나 혼자뿐입니다.’ 하고, 남은 7,000명이 있는 걸 몰랐잖아요. 나봇은 진짜 혼자뿐이었어요. 주께서는 지금 사태가, 진짜 제대로 된 사태가 어떤 사태냐를 알려주면 그걸로 손 털어버려요. 나봇이 죽든 말든!

그런데 그거 하기 위해서 나봇이 땅을 지키는 게 아니라 땅이 나봇으로 하여금 그 시대에 주님의, 여호와의 증인 노릇 하기를 제대로 시킨 거예요, 제대로. 그러면 이게 뭐냐? 오늘날 성도의 사명이잖아요. 남 탓, 남 욕하지 말고 ‘혼자서도 잘해요!’ 혼자,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뭘?” 무엇이 진실인지를 드러내는데 숫자, 쪽수가 아무 소용이 없지요. 쪽수면 850대 1? 아니에요! 1 대 1이었어요. 이세벨과 엘리야, 1 대 1이었습니다!

우리의 할 일, 사명, ‘주께서 어떻게 쓰시는가?’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그 기쁨의 순간인 거예요. ‘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한 게 아니고, 예쁜 원피스 입으라고 살리려고 한 게 아니고 원피스를 입든 말든 아예 진리를 위해서 우리를 제대로 죽이려고 하는구나.’ 세상에, 여기에 아다리가 되어 걸려든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얼마나 고마운지!

‘혼자서도 잘해요.’ 혼자서 하는 것 있지요. 혼자서 조물락대면서 하는 애들의 레고 놀이 작업. 남 더럽다 하지 말고 ‘너는 진리에 의해서 죽는 것을 소원하고 있느냐?’ 지금 그걸 물으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다음에 나온 거 보세요. 이제 우리는 위치가 어디라고 했습니까? ‘그 민족’이죠.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이 뭘 하는가? 한번 보세요.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했잖아요. 여러분, 이제 알았죠. 여기 용납 안 한 사람, 누구밖에 없었다?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야 됩니까? 이런 것을 원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해요? 빨리 찾아가야 되죠.

이게 이방인적인 내 모습이니까, 아닌 척할 게 아니라! 우리 위치가 출발을 이방인으로 해 줘야 해요, 이방인으로. 그래서 뭐 자기가 신접한 자가 누굽니까, 박수가 누굽니까, 초혼자가…, 그런 것은 뭐 주석 보면 잘 나와 있고요. 이방인이 상식적으로 점이나 치고 이런 것을 원했다면, 그러면 점 안 치는 우리는 행운을 기대 안 하는 사람입니까? 그렇게 되면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여기 초혼자나 박수가 있다. 그런데 ‘나는 점 안 칩니다, 사주 안 봅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예수님 빼놓고 다 똑같아’라는 거죠. 그 점을 알기 위해서 제가 유튜브 하나를 보고, 6분짜리인데 그 대사를 일일이 한번 적어 봤어요. 유튜브 제목이, 이것은 제목을 적어놔야 해요. 여러분이 나중에 봐야 되기 때문에. 제목이 길어요. 이거 치면 나올 거예요. <사랑 버리고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된 박해준>, 이게 제목이에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 그 결정적 대목이 나오는데 이걸 여기서 틀기는 그렇고, 대사를 한번 적어봤습니다. 처음에 술집 여인으로 배역을 맡은 ‘오나라’가 나와요. 그 얼굴 인상, 머리 모양부터, 옷차림부터, 드라마 술집 주인으로서 너무나 적절하게 연기한 ‘오나라’라는 그 배우가 라이터를 탁 켜요. 라이터를 켜 보면서 장면이 바뀌면서 절에 갑니다. 라이터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 시험하는데 이게 중국산인지 모르겠지만 잘돼요.

장면이 바뀌고 첫 장면이 설법 시간이에요. 50대쯤 된 어떤 남자가 머리를 깎고 중이 돼서 옷을 입고 설법을 시작해요. 앞에 불자들이 앉아 있는데 “날이 춥죠? 여기 산속이라 더 추워요. 이 추운 날 여기에 왜 오셨죠?” 하면서 이제 설법을 시작해요. 아주머니들이 “좋은 말씀 들으러 왔지요”라고 해요. 또 어떤 남자는 “성불하러요.” 또 다른 여자는 “마음공부 하러 왔습니다.”

스님이 듣고 있다가 “그런데 왜 그걸 공부해요? 다들 마음 있잖아요. 근데 그걸 왜 공부해요?” 그리고 설법을 해요. “세상 사람들은 밖에 있는 것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밖에 있는 것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법하고 있는데 가끔은 뭐냐, 오나라가 심각하게 뒤에 딱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줘요. ‘놀고 있네.’ 이런 거죠.

“우리 불자들은 이것이 망상이라 하는 것을 인정하고 여기 온 겁니다. 내심외경(內心外境), ‘내 속에 있는 것을 밖에서 본다.’ 이것이 진짜라는 것을 인정하고 여기 앉아 있는 겁니다. 인간은 다 열망하는 것을 보게 돼 있습니다. 내 속에서 보고 싶은 걸 밖에서 찾아서 보게 됩니다. 내 마음이 좋으면 밖에 싫은 게 하나도 없어요.” 설법을 계속해요.

“제가 옛날에 마음이 아주 죽겠어서 보음사 토굴에서 3일 밤낮을 기도하고 있었는데, 저도 그때 처음 경험했는데 그냥 마음이 풀렸어요. 밖에 싫은 게 하나도 없어요. 염소 새끼도 이뻐서 한참을 쳐다보고, 풀때기도 이쁘고 그냥 다 이뻐요. 싫은 게 없어요.” 해놓고 “성불하십시오” 하면 교인들이, 불자들이 스님 앞에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해요. 그다음에 이제 장면 바뀌면서 설교는 끝났어요.

이제 절 바깥에서 대웅전 앞에서 따로 만났어요. 오나라가 스님 따로 만나서 대사를 칩니다. “나 온몸이 다 아파. 안 아픈 데가 없어. 아침에 눈 떠지는 게 싫고 눈 감으면 눈물부터 나. 네가 오면 안 아플 것 같아. 그러니까 와, 그만 와, 그만 와. 나 혼자 늙어 죽기 싫어.” 이렇게 하니까 그 옛날 30년 전의 그 남자 친구 박해준이가 “밥 먹자, 가자.” 이렇게 해요.

그때 오나라가 약이 올라서, “염소 새끼도 사랑하고 풀때기도 사랑하면서 나는 왜 안 사랑해? 너 여기서 득도(得度) 못해!” 이게 결정적인 거예요. “너 여기서 득도 못 해. 나같이 지랄맞은 여편네랑 살아봐야 득도하지, 이런 산골에 처박혀서는 득도 못 해. 내려와! 여기 확 다 불 질러버리기 전에 내려와!” 해놓고 혼자서 흑흑흑 울고 갑니다.

그때 그다음에 심수봉 노래가 흘러나와요. <백만 송이 장미>(1997) 그 노래가 흘러나와요. 노래는 심수봉이 아니라 이선균이 부르는 노래로 나와요.

<백만 송이 장미>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내가 지금 연기를 못해서 실감이 안 나는데, 유튜브 한번 찾아보세요. 이게 바로 신접한 여인이고, 이게 진혼자고, 초혼자요, 이게 요술 하는 자, 무당입니다. 그들은 이런 무당들의 생산자고, 소비자는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들이에요, 우리 자신들.

청년 시절에 헤어졌다가 중년 돼서 만난 그 둘 사이에 30년 세월이 사라지고 난 뒤에, 술집 여자로서 그 힘든 것을 이겨내는 것은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 남자가 나한테 돌아올 수 있지 않겠느냐, ‘언젠가는’ 하는 그 바람. 그래서 ‘라이터 잘 켜지는가?’ 한번 시험해 본 거예요, 불 확 질러버리려고. 이 노래하고는 다른 거지만 비슷한 내용이 있어요.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지금도 못 잊었다면
거짓이라 말하겠지만
이렇게 당신을 그리워하며
헤매이고 있어요
한적한 그 길목에서
밤 깊은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남겨둔 이야기들이
나를 다시 불러요
당신은 행복을 위하여
돌아서야 했나요

내 모든 꿈들은 사라져
갔어도 바람이 불면
저 창문가에서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우리가 헤어진 것은
운명인 줄 알고 있지만
이 세상 어딘가 당신이 있어
기다림이 있어요
당신은 행복을 위하여
돌아서야 했나요
내 모든 꿈들은 사라져
갔어도 바람이 불면
저 창문가에서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우리가 헤어진 것은
운명인 줄 알고 있지만
이 세상 어딘가 당신이 있어
기다림이 있어요

<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1990), 신정숙 노래. 이렇게 들어보니까 여러분들이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결국은 우리가 누구와 헤어지지 못해요? 나랑 헤어지지 못해요, 나랑 헤어지질 못합니다. 내게 허락도 없이 쑥 들어와서 나에게 사랑만 남기는 그 타인을 내가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죠. 그런데 내가 존재의 뿌리를 가지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하면 돼요, 안 돼요? 이게 안 돼요.

사람이 복음을 들어도 왜 못 믿고 사랑으로 응답해도 왜 못 믿는가? 본인하고 헤어지지를 못해서 그래요. 이것은 내 심보가 나빠서가 아니라, 복음이 싫어서가 아니고, 예수님이 미워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나의 조건이 있어요. 내가 나를 떠날 수 없다는 것, 차라리 모든 것을 내가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을 생각하면 자꾸 뭐가 생각나느냐?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이 생각납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할 때 그냥 잘 먹고 잘살다가 자살한 것이 아니고, 스승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랑을 어떻게 처우했습니까? 자기 속의 마귀로 인하여 어떻게 했어요? 스승을 팔아넘겼잖아요. 팔아넘기고 돌이켜 보니까 누가 나빠요? 내가 나빠요. 내가 나쁜 그 죄책감을 어떻게라도 감당해야 했어요. 그래서 자살했어요.

어제 낮 설교에 뭐라고 했습니까? 지옥이라 하는 것은 뭐가 안 되는 사람만 지옥 간다? 맞아요. 탕감이 안 돼요, 탕감이. 우리는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바르게 살려고 해요. 인간답게 살려고 해요. 양심대로 살려고 해요. 탕감은 싫어요. 왜? 내 인생인데 누가 해결해요? 내 짐은 끝까지 누가 책임져야 해요? 내가 책임지고 싶은 거예요.

이게 마귀가 심어놓은 악마의 양심입니다. 양심은 악마에게만 적절해요. 도저히 자기와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거 나눠주세요. 이 타이밍에 이거 나갑니다. 이 가사를 왜 나눠주느냐 하면, 이것과 이것을 우리가 구분을 좀 해야 해요. ‘꿈과 예언’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꿈 없는 사람은 없어요. 꿈은 너무 지독해서 이불 덮고 눕자마자, 잠자고 있는 그동안에도 뭐가 떠 오르지요? 꿈을 꿔요.

기억이 안 나는 것은 꿈을 안 꾸는 것이 아니에요. 기억이 안 나는 것 뿐이지 인간은 누구든지 하루에 서너 번은 꿈을 꿉니다. 그것을 뇌과학자들이 REM(Rapid Eye Movement sleep)이라고 하는 거예요. 꿈꾸는 시간. 왜 REM이 있느냐? REM이 일어나는 이유,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꿈을 꾸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구의 자전 때문에 꿈을 꾼다는 거예요.

지구가 도니까 우리의 두뇌 세포도 돌지요. 그런데 잠잘 때는 세포가 활동을 안 하기 때문에 섬세한 지구 자전을 느끼게 되면, 언어는 발설을 못 하면서 낮에 봤던 그 동영상들이 자기 혼자 돌아다니면서 꿈이 돼요. 꿈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 지구의 자전 때문에. 그런데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것까지 이야기해야 해요. 지구는 왜 자전하는가? 그것부터 이야기해야 해요.

여기서 진도가 그것까지 나가면 안 되겠지요? ‘꿈과 예언’의 차이는 뭐냐 하면, 예언은 자기 부정이 돼요. 꿈의 특징은 뭐냐? 자기 부정이 안 돼요. 자기 사랑을 더 심화시키지요. 자, 가사(ABBA, I Have a Dream, 1979)를 한 번 봅시다.

나는 꿈을 꿔요, 부를 노래를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무엇이든지 이겨내게 도와줄 노래를 불러요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자기 꿈이 노래로 나왔다 그 말이거든요.

동화 속의 경이로움을 본다면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실패하더라도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어요.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여기에 미래가 나와요. 그다음에 뭐가 나와요? 난 뭘 믿는다고?

난 천사들을 믿어요
(I believe in angels)

여기까지 하고 이것을 함축해 보겠습니다. 꿈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본인의 현실을 본인이 떠나지 않아요. 나를 떠나서 천사가 사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천사가 와서 좀 도와주세요. 이게 꿈이에요. 꿈이 뭐냐 하면, 내가 예상 못한 행운을 내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내가 모르는 다른 존재의 초월적인 능력, –여기서는 천사가 되겠지요– ‘천사가 와서 도와주세요’ 하는 거예요.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가 있다고 믿어요)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내가 보는 모든 것 속에 좋은 것이 있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야, 이러면 주식 대박 나겠다’라는 꿈이 있더라도 그 꿈은 영 불안하다는 거예요. 누가 와서, 초월적인 존재가 와서 협조해 주면 완벽에 완벽을 기할 수 있겠다는 뜻이에요.

내게 맞는 시간이 올 때를 알 때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다음 가사에서 ‘stream’ 작은 냇가, 조그마한 냇가지요.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나는 시냇물을 건널 거예요, 나에게는 꿈이 있으니까)

‘강’이라고 하면 너무 엄청나고, 작은 시냇물, 이것은 뭐냐? ‘아, 요거 잘 만하면 되겠네’라는 작은 희망 같은 것. 왜냐하면 천사를 모시려 할 때 너무 욕심부리면 안 되잖아요. 혹시 천사가 너무 욕심 많다고 안 오면 안 되니까요. 어른이 되어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어린애 때는 심각한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보면 그게 소박하고 작은 문제잖아요, 동화의 세계니까. 그렇게 어린애의 세계로 돌아가서 ‘나 이 정도로 겸손해요. 천사님, 무시하지 말고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아바라는 그룹이 부른 거예요.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이런 식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To help me through reality
(현실을 헤쳐 나가게 도와주는 꿈이에요)

아까 나왔지요? 꿈은 특징이 뭐냐? 첫 번째, 나를 부정 못 한다. 두 번째 뭐냐? 나는 현실을 떠나지 못한다. 이게 꿈이에요, 꿈. 그리고 이 꿈은 세 번째로, 이 꿈은 사춘기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20대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부터 생겨왔다? 어릴 때부터 동화일 때부터. 차라리 더 노골적으로, 태어나면서 꿈이 나를 만들었다고 보면 돼요.

꿈이, 환상fantasy이 나를 만들었다. 내가 만들지 않는 이상을 가지고 ‘이상 자아’라 하고요, 이것은 어릴 때 상상하는 세계입니다. ‘내가 저것이 되고 싶어’하는 것, 이것은 이 현실 세계에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서 살면서 가지는 꿈 그것을 ‘자아 이상’이라고 합니다. ‘나 저거 될래.’ 내가 이 사회에 안 나갔으면 몰랐을 것들.

7살짜리 애가 “나는 중고차 안 탈래. 나는 새 차 탈래”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지요. 그런데 커서 사회에 나가면 차 여러 종류를 보게 되죠. “너는 중고차 사라. 엄마의 부탁이다. 맨날 직장이나 바꾸면서…, 중고차나 사서 타!” “안 해. 나 새 차 살래.” “아, 골치아파.” 누구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 뒤에 중요한 가사가 나와요.

And my destination makes it worth the while
(그리고 나의 목적지는 그 여정을 가치 있게 만들어요)

그 여정을 뭐 있게 만든다? 가치 있게 만든다. 야, 우리가 꿈을 꾸는 본색이 나왔지요? 자, 꿈을 꾸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가치 있다? 꿈을 꾸는 당사자가 누구예요? 나지요. ‘나’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해서 나는 꿈을 꾼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모르고 있지요? 이 사람은 꿈이 나를 만든 것을 모르고 ‘내가 꿈을 꾼 대로 천사가 약간만 도와준다면 나는…’ 뭐가 된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다음에 뭡니까?

어둠 속을 헤치며 아직 한 걸음 더 나아가요
(Pushing through the darkness still another mile)

자, 복음을 아는 우리 입장에서는 ‘불신자들이, 이방인들이 이렇게 하는구나’라고 하지만, 내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물론 불신자 공격해도 돼요, 맞아요. 맞는데 언제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후딱 어디로 돌아가요? 바로 이 가사의 세계로 어느새 벌써 돌아와 있어요. ‘나는 꿈이 있어요. 내 딸, 내 애 키우는 꿈이 있어요.’ 또 ‘좀 내 몸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그 꿈이 있어요.’

그 꿈이 바로 이 꿈이에요. “I have a dream!” 그 꿈이라니까요. 후딱 다시 내 존재 옆으로 돌아와 있다고요. 아까 뭡니까? “성령이 보고 싶어요.” 그거 아니에요, 지금. ‘나 편하면 좋아요.’ 거기로 돌아온다고요. 계속 봅시다.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요)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내가 보는 모든 것에 뭔가 좋은 것이 있어요)

꿈이라 하는 것은, 항상 슬픈 것은 꿈꾸지 않아요. 뭔가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거지요.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요)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내게 딱 맞는 시간이 온 것을 알 때)

이 점을 보면서 전도서 3장을 찾아봅시다. 주님께서, 성령께서 활동하면서 얼마나 수시로 사태를 일으켜서 우리를 엿 먹이는가를 봅시다. 1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그 목적과 기한을 이루기 위해서 뭐가 준비되어 있어요? ‘때’가 준비되어 있어요. 2절입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뽑힐 때가 있으며’ 우리는 좀 안 뽑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심어서 뽑힌다. 뭐 머리 빠지는 사람 이야기인가요? 다음 3절 보세요.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세울 때가 있고 그다음에 무슨 때? 헐 때가 있고. 같은 말이에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4-8).

이때를 누가 장악하고 있어요? 신약의 성령님이 장악하고 있다. 성령님은 바람같이 사건을 일으키잖아요. 나봇 같은 경우에 죽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아니지요. 권력자가 밭 팔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출세시켜 줄게. 횡재한 거야 너. 포도원 팔아!” 이것을 나봇이 은근히 기다렸습니까, 자기 신앙 자랑하려고? 아닙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주께서 하셨고 신약에서는 누가 한다?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모스 이야기가, “너희들이 지금 네 존재를 위해서 돈이 없다, 수입이 없다, 양식이 없다고 한다고?” 기근이 아니고 뭐가 없어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신약대로 하면 “성령이 없어서 네가 항상 불안불안하다.” 그 말이에요.

자, 예언은 뭐냐 하면, 예언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그러나 꿈은 스스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 계속 억지로라도 꿈이 나에게서 일어나는 것, 그게 꿈입니다. 여러분이 이 노래를 다 알지만 혹시나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을 위해서 한번 짧게 들어보겠습니다. 간만 봅시다. 전주만 나와도 알잖아요.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여기까지, 여러분이 다 잘 아는 노래기 때문에 알아서 들으시면 됩니다.

다시 신명기를 봅시다, 신명기 18장…. 이렇게 보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이방 민족의 특징, 풍습을 따르지 말라’가 아니라 너 존재 자체가 예수님 보기에 뭐냐? 이미 출발점이 너는 어쩔 수 없이 뭐다? 이방인이다,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다. 이방인들은 예언을 싫어하지요. 이스라엘이 예언을 뭘로 바꿨어요?

약속의 땅 있겠다. 자기가 살아 있겠다. 예언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는 그런 예언으로 곡해해서 해석해 버린 거예요. 인간의 타고난 마귀 본성이지요. 교회 와서 설교 들을 때 이렇게 하잖아요. 예언을 옴팍 받았던 주님은 죽었잖아요. 살해를 당했는데 인간은 여기서 꿈을 꾸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의 덕을 보겠다고! 꿈을 꾸고 있다고요.

그런데 ‘아바’ 그룹이 불렀던 이 ‘꿈’같은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준 셈입니다. 그래서 이 첫 시간 강의를 우리가 끝내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랑이라는 것. 사랑이라 할 때 여러분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잘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게 인간의 타고난 품성에서 나오지 않고 왜 선물이어야 하는가?

인간은 ‘천사의 말을 하고, 구제하고 방언하면,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이것을 분리시켜요. “구제하고, 도와주고, 착한 일 많이 하고, 지식적으로 완벽한 지식을 말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너희는 사랑으로 보이느냐? 사랑은 따로 있어.”

사랑은 뭐냐 하면, ‘네 목숨을 요청한다’는 거예요. 내 목숨을. 하도 우리가 나한테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니까 ‘사랑은 자기 유익을 찾지 않는다.’ 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칠 지경이에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떤 일을 해도 마지막에 계산하잖아요. 그런데 아까 했잖아요. 주님께서 탕감할 때 계산합니까? 탕감받고 또 계산하는 사람은 저주받았잖아요. 마태복음에 나오지요. ‘야, 탕감받았다. 그러면 나는…’(마 18:23-34). 이렇게 계산하는 거예요.

탕감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탕감이 용서잖아요. 용서는 우리가 분량을 가지고, 양을 가지고 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용서는! 어제 오후에 이야기했지만 용서는 이미 그냥 와버렸어요. 용서는 이미 투입되었고 대기하고 있고, 죄만 지으면 용서받은 우리가 용서를 알면서, 거기서 ‘아멘! 감사’로 찬양으로 나올 수 있도록 용서가 먼저 주어지고, 그 용서에 입각해서 우리는 죄를 짓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성령 안에서’를 다른 말로 하면, 예언 안에서, 이 율법서 안에서의 예언인 거예요. 사랑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랑은 아주 참혹해요. 왜? 안 떨어지려는 내 목숨을 강제로 떼 내니까 얼마나 우리가 발악을 하겠습니까? ‘좀더 내 꿈 꾸고 가겠습니다’ 이런 거, ‘저 여자만큼은 살려주시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임재범이 부른 이런 거요.

사랑은 가혹해요. 참 가혹해요. 십자가에서 어떻게 할 수만 있거든…, 겟세마네에서 주님 기도할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런데 ‘안된다고요? 안 돼요, 정말? 아버지, 안 돼요?’ 그러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랑은 가혹하게 우리의 목숨을 나에게서 떼 냅니다. 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가 붙드는 나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하는 차원에서 ‘봐주기 없기.’ 강제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성령이 주신 주의 완성된 것을 집어넣고, 그리고 우리가 붙드는 내 목숨을 강제로 앗아가는 방식으로 성령께서 하시고, 그다음에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라고 하는 거예요.

너희는 여호와께 뭐 하라? 찬양하라. 시편의 제일 마지막 대목이 그거예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대목이 그거예요. ‘아멘, 할렐루야’예요. 중간에도 계속 ‘아멘, 할렐루야’가 나와요. 찬양하는 것,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성령으로 인하여 미리 당겨서 ‘할렐루야’를 미리 외칩시다. 진짜 ‘할렐루야!’다, 정말!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