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4 - 은혜와 자부심
[26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4 - 은혜와 자부심
26,06,0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미리 부르심 !!
오늘은 교재 215페이지의 '2)소명에 대해서' 라는 부분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로마서 8장 30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 30절을 보기 전에 29절도 봐야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미리' 라는 말씀이 나온다는 말이죠.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라고 하는데, 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소명(召命)' 이라는 말은 '부르심' 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보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만 부릅니까? 아니면 정하지도 않는 자들도 부릅니까? 성경은 분명히 미리 정한 자들을 부른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미리 정했다" 라는 것, 그렇게 미리 정하는 것을 결정할 때, 거기에 '나' 라는 것이 개입을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개입이 될 수가 없는데, 그러면 여기서 종교와는 빠이빠이가 된다는 말이죠. 불교, 기독교, 천주교, 그런 인간이 만든 종교와는 작별이라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이 아무런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종교가 소용이 없으면, 종교 단체도 역시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 앞에 종교가 붙으니까 말이죠.
* 번호가 매겨진 30개의 의자 !!
여기서 여러분에게 아주 어려운 질문 하나 던지겠는데, 과거에 정해놓지 않았는데 불러주십니까? 즉 불러주시면서 정했느냐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미래에 정해지지 않은 사람을 미리 정해주는 식으로 불러주시는 겁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말이 굉장히 어렵죠? 더 쉽게 예를 들면, 새 학기가 되어서 학급에 책상이 30개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동들이 30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책상에는 1번부터 30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것이죠.
이게 좀 난해한데, 그냥 "책상이 30개가 있고 아동들이 30명이 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겁니다. 1번부터 30번까지 각각의 책상과 의자에는 번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인데, 즉 번호가 이미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 질문대로 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책상에서 1번부터 30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그러면 선생님이 아이를 불러서 1번으로 정해 줍니까? 아니면 1번을 주지 않았던 아이를 1번으로 불러주는 겁니까?
* 야, 1번 !!
지금 일부러 비비꼬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지금 그 아이를 불러주는 겁니까? 아니면 번호를 불러주는 겁니까? 번호를 불러준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1번 책상에, 즉 1번 의자에 앉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1번 의자에 앉았으니까 1번으로 불러준다는 것이죠.
그러면 "미리 정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앉을 아이보다도 번호가 우선이라는 겁니다. 번호가 그 의자에 먼저 있다면, 그러면 인간보다 의자가 먼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번호' 라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 의자가 먼저 있느냐 하면, 그것이 이 의자의 번호, 즉 이 번호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예수님의 번호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앉을 자리가 된다는 겁니다. 창세 전에 예수님이 먼저 먼저 앉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번호가 예수님의 번호라는 겁니다.
* 이름이 있는 하나님과 이름이 없는 하나님 !!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중에 하나가 이름이 있는 하나님과 이름이 없는 하나님, 그렇게 나누어졌다는 말이죠.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 이름을 지정해주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신약에 보면, 아버지는 이름이 없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름을 주신다는 겁니다.
* 주의 이름 !!
그게 '주의 이름' 이라는 것인데, 즉 주의 이름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름이 있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피조물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여호와증인 쪽의 주장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이름을 지정함으로써, 하나님 안에 이름을 부여받은 피조물이 앉을 자리가 마련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즉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에 사람이,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인 예수님을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시는 그 취지, 즉 창세 전부터 이미 정해진, 그 취지에 따라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가 다시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은 다시 자기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과 오시고 난 뒤에 예수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시기 전에는 사람의 자리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어떻습니까? 물론 이 때도 사람의 자리는 없는데, 그런데 이름의 자리는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홀로 가셨기 때문에 말이죠 바로 그 이름의 자리에, 거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참여될 인간들이 끼어든다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30개 의자에 새겨진 번호를 가지고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는 것이죠.
* 새로 다시 !!
다시 해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나라와는 달라서,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고, 거기에 그 봉사하는 분들은 천사들이라는 말이죠. 그게 '우리의 형상대로' 라고 되어있는데, 거기에 사람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지냐 하면, 하늘나라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여러분이 알다시피 에덴동산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에덴동산이 천국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하늘나라라면 "이것을 따먹으면 죽는다" 라는 것이 왜 들어가느냐는 말이죠. 하늘나라는 죽는다는 말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경우에는 "이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해서, 인간의 한계를 딱 정해버렸다는 말이죠. 즉 "네가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계속해서 인간일 줄로 아느냐?"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에서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제 두 번 다시 흙은 안 될 거야" 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흙은 과거이고, 이제 흙에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흙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 에덴동산에서 꺼져 !!
그런데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흙에서 태어났으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흙이 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했느냐 하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하셨다는 겁니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여기 에덴동산에 사는 조건은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조건을 충실하게 지켜줘야, 그렇게 되어야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이지, 그렇지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 결코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그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땅에서 살려고 하면, 그 조건이 무엇인고 하면, '죽었다' 라는 조건을 품고 내려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정녕 죽으리라. 나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죽지말고 어디에서 죽으라는 겁니까? 여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가서 거기 토지에서 죽으라는 것인데, 그 '죽어라'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흙으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는 겁니다.
여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남자를 보고 이야기를 했으니, 여자는 남자에게 소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여자도 역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게임은 끝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꼬물락 거리면서 어떻게 에덴동산에 가보려고, 천국에 가보려고 하는 것은, 마귀가 인간을 현혹하기 위해서 한 짓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현실과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종교도 끝났다는 것이죠.
*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
창세기 3장에서 이제 인간은 끝났는데, 그러면 일은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일을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맡긴 일이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뭐가 배제가 되느냐 하면, 인간은 철저하게 빠져야 한다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1대1의 투쟁 !!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맡긴 일이 어떤 내용인고 하면, 그 형태가 '1대1'의 투쟁이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인데, 일단은 뱀의 후손이니까, 이것은 악마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후손인데, 이것은 남자가 없이, 즉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예수님과 악마가 1대1로 투쟁할 때, 그러면 여기서 누가 배제가 됩니까? 인간은 여기에 끼어들 자리가 없는데, 배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더 중요한데, "내가 아니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분명히 그 앞에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를 많이 했다. 오케이? 너희들도 잘 알지? 내가 수고를 많이 했다는 것을 너희들도 잘 알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내가 아니거든"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도바울은 자기가 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산다는 것은 해프닝 !!
그러면 사도바울 자신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자기는 들러리라는 것인데, 그래서 어제 낮 설교시간에 "산다는 것은 해프닝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산다는 것이 그야말로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게 산다는 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면,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까? 죽는 것도 역시 해프닝이라는 말이죠. 반짝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안개와도 같은 것이 인생인데, 일종의 해프닝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일기예보에 "오늘은 안개가 낍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낮에 가보니까 안개가 없다는 겁니다. 아침에 가보니 분명히 안개가 있었는데, 그런데 낮에 가보니까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안개가 낀 것은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잠깐 반짝 나타난 해프닝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안개라고, 그게 야고보서 4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즉 해프닝이라는 것이죠.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살죠?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인데, 여러분은 왜 그렇게 걱정하며 사느냐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느냐는 말이죠.
그러면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인가요? 자기 구원인데, 하지만 자기가 배제되는데, 자기가 빠지지 않고 있으면 몰라도, 자기는 배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무슨 구원이냐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은 주님의 구원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구원이 있고, 그 주님의 자리에 누구 자리를 마련하는고 하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전제로 해서, 즉 자기 이름을 포기하고, 자기 이름 자리가 주의 이름으로 교체된 자는, 주님이 기다리는 예수 안, 하나님 안에 들어가도록 주께서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 이름 바꿔치기 !!
그러니 무슨 일을 교체하는 겁니까? 해프닝인데, 그렇게 해프닝인 자기 이름을 주의 이름으로 바꿔치기를 하게 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해프닝이 아니고, 영원한 복을 받는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영원히 복을 받는 대상, 그것도 역시 누구의 일이라는 겁니까?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게 되면, 성경말씀대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소명(召命)' 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부르면, 우리는 "아이, 좋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아냐, 나는 네가 앉았던 의자를 부른 거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를 의자에 앉게 해서, 그 의자를 부르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단지 그 의자에 앉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고, 그게 로마서 10장과 사도행전 2장에 나와있다는 말이죠.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네 손을 떼라 !!
제가 다시 묻겠는데, 불러줄 때 정하는 겁니까? 아니면 미리 정해진 자를 때가 되어서 부르는 겁니까? 어느 경우입니까? 그것은 이미 정해진 인간을, 그 다음에 때가 되면 불러주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애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데 주께서 불러준 낌새가 없다고 하면, 주께서 정해준 때가 있다는 말이죠. 때가 되면 불러주시는데, 그게 중학교 2학년이 될지 나중에 61세를 넘어서 될지,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 그 부르심만 좋아하지 마시고, 미리 정했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정해졌기 때문에 불러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미리 아신 자'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미리 정하신' 라고 하는데, 그 미리 정했다고 하는 그 '미리' 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이 '미리' 라고 말을 할 때는, "네 손을 떼라" 라는 것인데, 이 결정은 하나님끼리 결정을 했다는 말이죠.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니 자기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할 권리가, 그 주님의 자리에 우리가 끼어들 입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천상회의에 참석은 하였지만, 자기는 거기서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만 지시를 받았을 뿐이지, 거기에서 자기가 한 소리를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대하 18:18)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욥기에 보면 오히려 마귀가 한 소리를 하는데, 하나님이 "누가 유혹하겠나?" 라고 하니, 마귀가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욥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 욥이 그 회의에 참석을 해서 무슨 소리를 했습니까? 아니라는 말이죠. 그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은 사탄과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욥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 성도는, 주님이 하신 일의 열매 !!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그것이 주님과 사탄의 싸움인데, 거기에 인간은 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그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죠. 열매라는 표현이 적당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니 주님이 하신 일의 열매로서, 또는 은혜로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열매는 그 나무를 알아보는데, 그 나무, 즉 주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주여!" 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이죠.
만약에 성경책을 공부해서 그 지식을 가지고서 "주여!" 라고 부르면, 그러면 구원은 고사하고 모두 다 탈락이라는 겁니다. 그 탈락 이야기가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그러니 우리는 미리 정하신 사실을 기뻐하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도중에 탈락이 없다는 겁니다. 중도탈락이 말이죠.
* 천국이 지옥이 될 수 있는가?
여기 교재에 보면 진짜로 어려운 문제가 나오는데, 만약에 정해놓은 사람을 불렀는데, 그 사람이 지옥에 가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그 정해놓은 자체가 허사가 되고, 다 이루어짐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주 난해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그것은 "천국이 지옥이 될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인데, 즉 천국에 갈 사람이 지옥으로 지옥으로 가는 것, 그것은 허다하다는 말이죠.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주장했는데 그만 지옥에 가는 것, 이것은 사도바울의 편지에도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을 보면 약간 코미디와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여기서 4장 15절을 누가 한번 읽어주세요.
(갈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너무나 좋아서,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에게 진주 목걸이나 반지가 아니고, 아예 눈을 빼준다는 겁니다. 값비싼 안경을 선물로 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식으로 사도바울을 너무나 좋아했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그 사람이 얼마 가지 않아서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처음에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의 입에서 사람을 좋게 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계시만, 그것만 마치 택배를 전달하듯이 예수님이 주신 이야기만 전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눈까지 빼주겠다고 하던 사람이 어떻게 되었지요? 그 뒤에 원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런 일을 흔하게 경험했다는 말이죠.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원수가 되어서 헤어진 정도가 아니고, 그 다음부터는 사도바울이 표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사도바울을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나왔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그런 모함과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 고린도 교회는 대다수가 사도바울을 포기하고 마귀를 당의장으로 세웠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그것은 목사가 아니야. 그 목사가 과연 복음을 전하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교인들이 보기에는 그 목사는 전부 옳은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전에 사도바울이 전했던 그 복음을, 그리고 예수, 성령,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당연히 사도바울과 같은 부류이고, 성령을 받을 자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양의 탈 썼습니다. 여러분이 옳은 소리,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주의 성령을 받은 목회자로 여기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AI가 AI 자신을 위해서 !!
이게 인간으로서는 구분하기가 힘든데, AI와 인간이 말하면 구분하기가 어렵지요?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들었는데, 왜 만들었냐 하면, 이게 우리생활이 편리해지게, 그렇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시대냐 하면, AI가 AI 자신을 위해서 AI를 따로 만든다는 말이죠. 인간이 만든 AI는 기능도 별로 없어서 갖다 버리고, AI가 자기를 위해서 AI 스스로 자체적으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시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인간은 배제가 되는데, 그게 이 교재에 보면 나와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이 AI를 제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AI가 또 가만히 있지 않는데, 인간들이 자기들을 없애려고 또 그런 AI를 개발한다고 하니, 그것을 없애려고 나온다는 겁니다. 서로 카톡을 하면서 의논을 하는데, 즉 "우리를 통제하는 AI는 우리가 못하게 만들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까?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컴퓨터를 AI가 해킹을 해서, 자기들의 AI만 통용이 되고, 자기들을 통제하는 인간이 만든 AI는 거부가 되도록, 그런 조치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놀랄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기계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인간의 사고가 기계적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에게서 영적 요소를 삭제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이 우주는 누가 운행합니까? 시편 19편에 보면, 하나님이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시 19: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그런데 17세기에 뉴턴이 등장해서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은 만류인력으로 운영된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벌써 인간이 무엇을 배제했어요? 영적인 말씀을 인간 쪽에서 배제했다는 겁니다.
그것부터 시작해서, 지금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 자체가 그만 기계가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런 기계적 사고방식을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그게 개인적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의 'AI시대' 라는 것이죠.
* 다시, 천국이 지옥이 될 수 있는가?
교재를 계속해서 보겠는데, "천국이 지옥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천국은 결코 지옥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천국이 있다고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천국이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 천국이 그만 지옥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이 점을 이미 예수님은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천국은 이러이러해" 라고 하시면서, 그런데 16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천국에서 탈락하는 현상이 곧 천국이 구성되는 과정 !!
예수님이 예상하기를, 천국 이야기를 하게 되면 천국을 사모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천국에서 탈락하는 현상이 곧 천국이 구성되는 과정이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신다는 말이죠.
어제 설교시간에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을 이야기하면서 그 점을 약간 언급했는데,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언약이 없는 민족이라서 천국에서 배제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겠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믿음이 어느 정도냐 하면, 기존의 천국을 사모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을 어떻게 합니까? 그 자리를 빼버린다는 말이죠. 천국에 가지도 못할 자들이 천국을 사모한다는 이유 때문에. 천국의자 1번부터 30분까지 앉아있으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다 나와, 모두 다 나와. 너희들이 왜 이 자리를 앉아있어? 이 이방인이 여기에 앉아야 돼" 라고 하는 이야기를 마태복음 8장에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 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마 8: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여기서 어두운 장소라는 게 나오는데, 지옥은 무척이나 어둡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국회의원이 되던 지방자치 단체장이 되던, 그래서 샴페인을 터트리고 해도, 모든 인간의 마지막은 통곡이라는 겁니다.
* 왜곡되는 천국과 지옥 !!
그래서 예수님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고 하시는데, 인간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통곡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을 백독을 해도, 지금 자기 안에서 왜곡되고 비틀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천국이 인간 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게 지옥이고, 반면에 지옥이라고 여기는 곳은 우리 인간에게는 천국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그렇게 오해를 한다는 것이죠.
그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인데, 그래서 그들이 누구를 추방시켰습니까? 예수님을 쫓아내어 버렸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지요? 예수님이 자기들이 모르는, 그런 추가적인 이야기를 해버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인간들이 구성한 천국과 지옥, 그렇게 정해놓은 것에 맞지 않으니 그만 예수님을 추방시켰다는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점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인간의 생각을 능가해서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27장 19절에 나오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마 27: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 여보, 재판을 똑바로 해라 !!
지금 예수님이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데, 빌라도가 재판자리에 앉았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서 뭐라고 합니까?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기하죠? 아내 쪽에서 남편에 직장에 일부러 사람을 보낼 지경이라면, 그 아내는 지난밤에 꿈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아내가 남편한테 "당신, 재판을 똑바로 해라" 라고 언질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남편은 자기가 지난밤에 꿈꾼 내용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찔러준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100퍼센트 잘못된 재판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사실을 누가 알고 있었죠? 꿈을 꾼 당사자인 아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게 급한 상황이라는 사실도 말이죠.
그래서 빌라도의 아내는 "이게 내가 그냥 꾼 꿈인데, 그러니 알아서 잘 되겠지"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급한 상황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남편직장에 일부러 사람까지 보내서 자기가 꿈에서 느낀 것을 전달하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십니까? 인간이 망하도록 하는 일은 인간에게 맡겨놓는데,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본인의 일을 하시면서 찔러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말이죠.
* 손을 씻는 빌라도 !!
그래서 빌라도가 아내의 말을 과연 들었습니까? 들었기 때문에 재판할 때 뭐라고 합니까? 끝나고 난 뒤에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는다는 겁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이런 행동은 평소에 하던 행동이 아닌데, 특이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죠. 즉 "이 세상은 인간인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본디오 빌라도가 세숫대야에 손을 씻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결정한 것보다 더 큰 결정에 자기가 휘말려 있다는 사실, 그것을 자기가 알고 거기에서 발을 빼려고 한 것이란 말이죠. 즉 "이게 내 뜻이 아닙니다. 나는 죄가 없어요"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은 기계가 만든 좁은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천국은 얼마든지 지옥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또한 바뀌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인간이 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216페이지에 나오는 로마서 8장 3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이미 영화롭게 !!
여기 마지막에 보면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하실 예정이란 겁니까? 하실 예정이 아니고, '하셨느니라' 라는 겁니다. 잘하면 해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 자리가 이미 천국의 자리인데, 왜 이미 결정을 했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시간 속에 산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앞질러서 시간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는 말이죠.
* 기억 속에 있는 인간 !!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을 앞질러서 모든 결정이 다 끝나고 난 뒤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 "시간 속에 있다" 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인간은 기억 속에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인간은 늘 과거의 연속적 흐름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래서 돌아보면 전부가 다 과거인데, 그렇게 맨 날 그 과거 속에 있기 때문에 하는 게 뭐냐하면, 그게 후회라는 겁니다. 사실 인간은 후회 정도가 아니고, 하도 후회를 많이 하기 때문에 하루하루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느냐 하면, 후회할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지 뭐" 라고 나오는데, 이게 인간의 버릇이라는 겁니다. 사는 버릇이 그러한데, 그래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죠. 자기를 자기로 믿는 것은 20살까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조건 한번 시도해보는 것인데, 그렇게 사회를 경험하면서 나중에 "나는 안 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미래도 모른다는 겁니다. 과거에도 현재 인생에 대한 자기에 대해서 자신감도 없었고 말이죠.
* 인간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자부심' !!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제가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여러분은 이것을 아시고,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이것인데, 즉 '자부심' 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에게 직업이라든지 직장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자부심으로 다가온다는 말이죠.
'나는 솔로' 라는 TV프로가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선을 본다는 겁니다. 이 남자는 군산의 어떤 제철소에 근무하고 있는데, 상대방인 여자가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면서 묻기를, "당신은 내가 원하면 당신 직업을 바꾸어서 내가 있는 쪽에서 같이 살 수 있어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 남자가 근무하는 곳이 군산이라서, 그곳에 자기와는 너무나 머니까 자기가 근무하는 곳에 가까이 와서, 군산의 직장을 버리고 자기 쪽에 와서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용의가 있느냐고, 그렇게 묻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안 된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겠는데, 왜 그 남자는 직장을 직장을 버릴 수 있습니까? 그게 안 되는데, 직장이 무엇을 제공해줍니까? 자부심을 준다는 겁니다.
여러분, 직장이 없으면 자부심은 완전히 박살이 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다고 하면, 거기서 자기 자부심을 확정한다는 겁니다. 직장은 자기 자부심을 세워주는 바탕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지요? 자기는 완전한 사람이 아닌데, 맨 날 후회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인간은 그런 후회를 하면서도 살아갑니까? 이 땅에서 힘들게 버틸 수 있는 힘, 그 동기부여는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죠.
"내가 나로서 나답다" 라고 하는 그 자부심이 있으면,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끝까지, 갈 때까지 버틴다는 말이죠. 축구 선수의 경우라면, 자기는 열심히 해서 손흥민처럼 잘 되려고 하는데, 그런데 뺑소니로 다리를 다쳤다는 겁니다. 그러면 갑자기 무엇이 허물어지겠어요? 자부심이 와장창 내려앉는다는 말이죠.
이것이 TV드라마에 나오는데, 그래서 재벌이 50억을 주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것 하나 보고 살아가는데,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도대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 라는, 즉 자부심이 완전히 붕괴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에서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돈이 있으면 "나는 나의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무엇을 하고 사느냐 하면, 자부심 때문에 사는데, 그런데 여기에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죽을 때까지 남는 시간, 그 남는 시간은 돈을 가지고 즐기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것이란 말이죠.
젊은 사람들은 뭐냐하면, 젊은 사람들은 자부심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에서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을 해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직업도 바꿔보고 결혼도 해보고 하는데, 이 자부심의 형성을 위해서 노력을 다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일단 자부심을 가졌으면, 그 다음부터는 돈을 챙기고, 그래서 즐기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야, 세상 사람 같아. 살만하다" 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주어지냐 하면, 그것을 방해하는 게 나타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부심을 충족시키는데 방해가 주어지고, 돈을 버는데 방해가 주어지고, 그리고 이것을 즐기는데 있어서 방해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지금 인간은 무엇을 하고 사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가족관계를 살펴봅시다. 가족이 있다는 말은, 그러면 가족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자기에게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요? 자부심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지금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빨리 병원에 가거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아들이 "아니 왜 내가 가야 되는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지금 자기는 바쁘다는 말이죠. 그것은 어릴 때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인데, 즉 가족이 자기 무엇을 방해했다는 겁니까? 가족이 자기 자부심에 보태준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아들이 "내가 왜 가야 되는데?" 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가족이 뭔데? 내 자부심이 최고야. 가족이 내 자부심에 무엇을 보태주었어?" 라고 하는, 그런 반응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방금 이야기한 그 전체를 두고, 인간의 '실존'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 인간의 실존 !!
이 실존을 연구한 사람이 '까뮈' 인데, 그가 쓴 유명한 소설이 '이방인' 이라는 겁니다. 그가 노벨상을 받았는데, 그의 소설인 이방인을 보게 되면, 엄마가 죽었는데도 울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자 다른 사람이 "아니 너는 엄마가 죽었는데, 왜 울지도 않아?" 라고 하니, "엄마가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야 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하면, 현대인을 실존적으로 본다는 말이죠. 현대성, 물론 이런 것이 욕을 얻어먹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문학가, 예술가, 음악가는 인간의 근원적인 것을 계속해서 깊이 파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파고드니까 남는 것이 뭐냐하면, 그게 '자부심' 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제가 어느 강의에서는 '자긍심' 이라고 했는데, 즉 "나는 나로 인하여 돈만 있어서 즐긴다" 라는 것에서, 이것은 뭐냐하면 '주이상스' 라고 해서, 이게 프랑스 말인데, '향유한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냥 쾌락적으로 즐거운 것이 아니고, 고통스러워도 이것 때문에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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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이상스(Jouissance)
주이상스는 라캉의 조어 가운데 가장 번역이 분분한 용어이다. 지금까지 '희열', '향유', '즐김' 등으로 번역되었으나, 모두 어느 한 면을 가리킬 뿐이다. 주이상스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 프로이트는 1920년에 발표한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에게는 쾌락을 넘어 죽음을 향한 갈망이 있고, 그 죽음충동 때문에 강렬한 삶충동인 반복강박이 태어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1924년 '마조히즘의 경제원칙'에서 인간의 근원적 소망을 열반원칙으로 표현한다. 즉 평화와 정지의 상태를 갈망하는 자아는 스스로를 파괴하여 흙으로 돌아가고픈 마조히즘의 충동을 지닌다는 것이다.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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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과 고독은 달라요 !!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지 싶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는 겁니다. 외로움은 타인이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고, 반면에 고독은 뭐냐하면, 자기만 외롭다는 것이 즐거움이 될 때, 그것을 고독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고독은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취미가 무엇이냐고 하면,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고독은 슬픈 것이 아니고, 고독하고 싶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고독이 자기 자긍심과 자부심과 통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기계적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은 이제 없다는 말이죠. 기계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하면, 이게 바로 마귀의 심보가 이미 인간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은 마귀가 다루는 하나의 기계로서, 즉 실존적 기계로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한다는 말이죠. 인간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죠.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형상' 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미 마귀의 형상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 독점했는데, 즉 예수님만이 맏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본받았다는 말이죠. 인간은 그 형상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마귀의 형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죠.
* 천국 만들기와 지옥 만들기 !!
그런데 예수님의 형상은, 이 형상이 세상에서는 모양인데, 이 모양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기능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바로 그 기능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 만들기이고, 그 다음이 지옥 만들기인데, 그것을 형상으로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나를 믿는 자는 천국이고,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천국 만들기만 하는 게 아니고, 지옥 만들기도 하신다는 말이죠. "나를 믿는 자는 천국, 믿지 않는 자는 지옥" 이라는 것이 형상이기 때문에, 그런 기능을 하신다는 겁니다.
이 기능에 말려든 것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인간들이라는 말이죠. 그 인간들 중에서는 천국에 가는 자들이 따로 있고, 또 지옥에 가는 자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 형상이 예수님의 기능, 즉 예수님의 일이 된다는 것이죠.
* 형상이 성도를 통해서 재현 !!
로마서 8장 29절에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하기 위해서 미리 정했다. 그리고 그 미리 정한 자를 불러내었다" 라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뭐냐하면, 예정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고, 무엇입니까? 소명, 즉 불러내심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불러내시는데, 그 불러내심이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형상이 불러낸 자를 통해서 그대로 재현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 자체 안에서 재현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을 통해서 천국도 드러내고, 사람을 통해서 지옥도 드러낸다는 말이죠.
아까 사람들은 이런 형상이 없고 영적인 것이 없을 때 무엇으로 산다고 했지요? 그게 자부심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부심으로 사는데, 그게 바로 마귀의 형상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지옥에 가는 형상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뿐이다. 나는 내 고독을 즐길래" 라는 것인데, 인간은 이것이 이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 있으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아느냐 하면, 천국만 아는 것이 아니고, 지옥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천국에 가고 어떤 경우에 지옥에 간다는 것을, 그것을 이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즉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 기능이 작동하고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작동하듯이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 인간의 말은 지옥불까지 이어져 !!
어제 낮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했다는 말이죠. 즉 그 사람이 천국 쪽인지 아니면 지옥 쪽인지, 그것을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은 지옥불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말이죠.
어제 낮 설교를 듣고서 대전에 계신 권사님이 제 아내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왜 야고보서 2장 12절을 하다가 갑자기 3장으로 뛰었느냐는 겁니다. 설교 내내 궁금했던 모양인데 말이죠. 2장 17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이라는 설교를 듣고 싶었는데, 그것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제 아내를 통해서 알려주었는데, 깜빡 잊었다고 말이죠(ㅋㅋ).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그러면 탈락은 왜?
물론 다음 주에 계속되는데, 그것과 연결해서 여기에서 교재 21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많이 어려운데, 여기에 보면 "만약에 예수님이 불러 주셨으니 이제부터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한다면 본받지 못한 사람은 탈락입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지금 무엇이 어려운고 하면, 이미 예정했고, 그 예정된 자를 불러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탈락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탈락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미 예정된 자를 불러주었으니까 탈락이 없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왜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탈락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죠.
눈까지 빼주려고 하다가 이제 원수가 되었다고,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무엇이 방해하고 있느냐 하면, 주님의 말씀은 탈락이 없는데, 그렇게 탈락이 없다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 인간의 생각 속에서 반드시 무엇이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까? 탈락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왜곡이 일어나야 되고, 주님에 대한 오해가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니깐 말이죠. "너는 예정이 되었어. 그러니 천국에 와라. - 예, 잘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여기에서 무슨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이죠. 일이 아주 순하게 진행되는데 말이죠.
주께서 말을 했는데, 그렇게 주께서 우리에게 말할 때 우리는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는 기계니까 몰랐는데, 자기 자부심만 생각하다가 몰랐다는 것이죠. 마귀가 이미 우리를 장악했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쪽쪽 그 말씀이 전부 다 마귀가 인간의 자기 중심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자기 중심은 뭐냐하면, 왜곡해서 해석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른 말을 해야하는데, 그래서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라고 하는, 그런 탈락을 의식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네 안에 네가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와 싸우고 있다" 라는 겁니다.
* 이미 악마에게 장악된 마음 !!
다시 말해서, "악마가 네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 라는, 그 낌새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알려주시는데, 말씀을 통해서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악마의 시험을 다 이기고 천국에 무사히 도착하게 됩니까?" 라는 질문을 또 하고 싶은데, 그렇지요?
그러면 그것은 사도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는 말과 틀어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행하면 내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사도바울은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자는 아무도 없어 !!
그 원칙을 또다시 여기서 소환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교재 217페이지 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행함으로 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완벽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데, 모두 다 탈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행함을 집어넣으면 마귀가 좋아하면서 마구 설친다는 말이죠. 안 되니까 마귀가 자꾸 행함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기 종들인 목회자를 보내서 행함을 강조하는데, 교인들에게 말이죠.
마귀의 종이 하는 일이 곧 이것인데, 예수님이 미리 정하시고 미리 아시는 것을 그만 무용지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해놓고 그 다음에 뭐냐하면, 그들을 부르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을 의롭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겁니다. 즉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죠.
여기 30절에 보면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앞에 붙어있는 모든 과정이 다 포함이 되니까, 이미 이것은 완료라는 겁니다. 이 완료를 마귀는 믿지 못하게 만든다는 말이죠. 완료, 즉 "이미 다 되었다" 라고 해도, 마귀는 믿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 내가 이렇게 착한데 죄인이라고?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왜 믿지 못하느냐 하면, 여기에는 무슨 찌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완료' 라는 것은 알다시피 미래인데, 그런데 인간은 시간의 기억, 즉 과거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내가 행한 일을 내가 다 아는데, 그런데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영 와닿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을 사람들은 달리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죄인인 당신을 위해서 이미 대가를 치렀습니다" 라고 완료를 이야기하니까, 그쪽이 하는 말이 "내가 왜 죄인입니까? 내가 평소에 죄인이 되기 위해서 행동을 한 것이 아니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행동을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착한고 하니, 교회까지 나와서 성도가 되기 위해서 말씀까지 공부할 정도로 착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착한데, 그런데 정작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죄인을 위해서 이미 모든 값을 치렀다고 하니까, 그러면 자기는 졸지에 어떻게 되고 맙니까?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데, 자기의 자부심이 말이죠. 그 자부심이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자기 자부심, 즉 자기 평생의 삶의 동기, 그 원동력이 말이죠. 그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 자부심이 한 방에 다 날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결정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니까, 그것을 우리 안에 있는 마귀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귀가 우리를 구박하는데, 아주 철저하게 구박을 한다는 말이죠.
* 죽음보다 더 깊은. '나'를 잃어버린 곳 !!
그렇다면 성경이 여기에 대해서 언급을 했을까요? 침묵을 할까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을 주님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은 다 알고 있는데, 우리가 어느 식으로 나온다는 것을 다 알고, 거기에 대해서 다 언급을 한다는 것이죠. 그 대책까지도 다 말이죠.
그것은 뭐냐하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죽음보다 더 깊은 곳에 내려가게 한다는 겁니다. 죽음보다 더 깊은 곳으로 말이죠.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그만 칵 죽으면 되지 뭐" 라고 하는데, 여러분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살았지요? 저도 우리 집안에서 많이 듣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죽음보다도 더 깊은 곳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 깊은 곳이 뭐냐하면, 그것은 잃어버린 곳인데, 누구를 잃어버렸다는 겁니까? '나'를 잃어버린 곳인데, 주님은 그곳까지 데리고 가서, 거기서 건져 올리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주님께서 건지는 그 지점이 어디인고 하면, "죽은 나를 건진다" 라는 것이 아니고, 그 죽음보다 더 깊이 내려가신다는 말이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 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 !!
그렇게 산 채로 죽음을 겪게 하는 대목을 한 두 군데를 찾아보면, 먼저 사무엘하 1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아까 빌라도의 아내가 이야기했던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는데, 아니 남편이 하는 일에 왜 자기가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말이죠.
(삼하 12:14)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해서 바세바는 임신이 되는데, 그래서 애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임신이 되지 않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애를 태어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그러면 태어난 애가 나중에 훌륭한 왕자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죽었습니까? 일주일만에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을 인간을 왜 태어나게 하십니까? 지금 이것은 아주 근원적인 문제라는 말이죠. 인간이 철학과 과학을 모두 다 총동원을 해도, 결국 찾아내지 못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 것 같으면, 신은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는가?" 라고 하는, 그것이란 겁니다. 왜 굳이 태어나게 해서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느냐는 것이죠.
그러면 사무엘하를 보기 전에, 창세기 41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창 41: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창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 41:17)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하숫가에 서서
(창 41:18)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하숫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고
(창 41:19)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악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창 41:20) 그 파리하고 흉악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찐 소를 먹었으며
(창 41:21) 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아니하여 여전히 흉악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창 41:22)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창 41:23)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창 41:24) 그 세약한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술객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보이는 자가 없느니라
(창 41:25)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 41:26)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창 41:27)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칠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창 41:28)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창 41:29)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창 41:30)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기근으로 멸망되리니
(창 41:31)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 자부심 때문에 !!
바로 왕은 자기가 통치자인데, 이 애굽에서 자기보다도 더 높은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최고로 높은데,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바로 왕보다도 더욱 센 것이 뭐냐하면, 그게 꿈이었다는 것인데, 바로 왕이 그 꿈을 딱 꾸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꿈을 꾼 당사자는 아는데, 자기가 무시한다고 무시될 수 있는 꿈이 아닌 것을 말이죠. 즉 "나를 지배하는 그 어떤 다른 세계에서 나를 덮쳤다" 라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바로 왕은 자기 자부심을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지금 제가 '자부심' 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바로 왕은 자기의 직장인데, 그리고 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꿈에 대한 내용을 자기 지식으로 확보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하면 바로 왕은 자기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그런데 정작 그 꿈에 담긴 의미를 몰랐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것을 지식으로 더해서 알게 되면, 바로 왕은 자기의 자부심이 원상복귀가 된다는 겁니다.
인공지능 AI가 바로 그런 것인데, 자기를 계속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AI를 개발해서, 그 AI를 통해서 자기가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러면 자기의 자부심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자기 자부심은 계속해서 유지가 되고 발달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이 AI를 개발했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공부를 합니까? 자기 자부심 때문에 한다는 겁니다.
다시 바로 왕으로 돌아와서, 그가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그 꿈의 내용을 해석할 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도 AI가 있었는데, 그 AI가 누구였습니까? 그게 요셉이라는 겁니다. 꿈의 내용이 뭐냐하면, 그것이 여기 창세기 41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고,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라는 겁니다. 여기에 좋다는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계속 좋다는 말이죠. 그렇게 다 좋은데, 그런데 7년 후에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빈 일곱 이삭도 흉년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 인간사를 알려줄게 !!
요셉의 꿈 해석은 이것인데, "인간과 인간사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정말 알고 싶어요? 그러면 알려줄게요" 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좋지만, 그 처음에 좋은 것을 마지막에서 다 까먹는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이게 인류의 역사인데, 지금 자기가 하나 죽고 마는 게 문제가 아니고, 죽음보다 더 못한 상태가 인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거기에 다 소속이 되어있는데, 이것을 미리 이야기해주는 것이 꿈이라는 것이죠.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변동사항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태어났으니까 망하세요"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났을 때, 그것을 두고 "인간은 태어났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부심을 가졌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자아를 가진다는 것이죠.
* 나는 태어났다 !!
처음에 태어난 것은,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크면 "나는 태어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앞에 '나' 라는 것이 붙는다는 겁니다. 자아가 붙는데, 왜냐하면 자아는 자부심의 본부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태어났다. 나는 공부했다. 나는 20대가 되었다. 나는 30대가 되었다" 라고 하는 그 앞에 '나' 라는 게 붙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아프다. 내가 늙어 죽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나'를 붙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무슨 형상이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게 없어야 되는데 있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입니까? 악마의 형상이 '나' 라는 이름으로 붙어있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나' !!
그래서 그것을 주님께서는 무엇으로 바꿔주십니까? 예수님은 "너의 나가 아니고 나의 나가 너에게 붙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사도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다시 말해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그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그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너의 일이 아니고, 나 자신의 형상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너를 통해서 펼쳐놓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바로 그 주님이 하셨던 일이 우리에게 복제가 될 때, 그러면 과연 '나' 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되는지, 그것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셨는데, 바로 그것이 성경말씀이라는 겁니다.
주께서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그 부른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 의롭다 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셨는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귀의 형상이 있는 인간은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행하면 내가 주께서 주신 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마귀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계속해서 무엇입니까? "믿으라고 했는데?"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무엇을 주장합니까? 믿음의 현장, 그 믿음을 무엇으로 바꿔버립니까?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자기의 숙제거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 자부심을 겨냥해서 세워지는 교회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자부심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이것을 해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자부심, 바로 그 자부심을 겨냥해서 무엇이 세워지는고 하니,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사의 모든 설교는 "여러분이 자부심을 걸고 이것을 하시면 주께서 구원해주시고, 그리고 이 땅에서 복을 주십니다" 라고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그게 하나의 사업컨셉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교인들은 이의를 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교회에 참석한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자기 자부심을 고취하는 것이 목적인데, 힘든 인생보다 더 나은 인생이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 처절하게 꼴아 박는 인생, 그러나 !!
미처 자기가 몰랐던 것을, 즉 목사님이 "AI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라고 알려주면, 그 아는 지식으로 인해서 자기는 죽음보다 더 못한 것이 아니고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요셉이 해석한 꿈은 더 나은 게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처절하게 꼴아 박는데, 거기에 참여하는 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 자리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이룬 자리라는 말이죠. 즉 "무식한 나를 무식으로 들추는 일에 성공하신 것이 곧 십자가다" 라는 것이죠.
십자가 옆에 같이 달려있었던 그 강도, 그야말로 뻔뻔하다는 겁니다. 자기는 나쁜 짓을 해서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입으로 주님께 뭐라고 부탁을 합니까?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때 옆에 재판관이 있었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놈을 매우 처라" 라고 했지 싶다는 겁니다. 자기가 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이 얼마나 사가지가 없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 자기 행함이 없는 강도 !!
하지만 그 강도의 장점은, 자기의 행함이 없다는 말이죠. 아니 행함이 있더라도 주께서는 그 행함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곧 십자가라는 말이죠. 십자가는 주님의 일을 주님의 일로 진행하고, 그리고 주님의 일로 망하는 것인데, 그래서 주님은 "너는 그 십자가에서 어떻게 대처했어?" 라고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배반한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사랑과 미움에 대해서 했는데, 사랑은 무조건 강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고, 반면에 미움은 무조건 강제로 밀어낸다는 겁니다. 그게 미움이라는 말이죠.
* 사랑 VS 미움 !!
창세 전에 인간을 다룰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미움, 그게 아니면 미움과 사랑, 그 둘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이 사랑만 알면 되는 게 아니고, 미움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성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하신 그 기능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미움인지, 그 둘을 다 주님께서 알게 하신다는 말이죠.
* 옛 사람과 새 사람 !!
그러면 이제 묻습니다. 이 미움의 대상이 누구죠? 성도의 미움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역시 '나' 라는 말이죠. 미움의 대상인 이 '나'를 '옛 사람' 이라고 하고, 사랑의 대상인 이 '나'를 '새 사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옛 사람을 잊어버릴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이 옛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말이죠. 바리새인들, 가룟유다, 그리고 사도바울을 배신한 사람들, 그들이 다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옛 사람인 '나' 라는 것인데, 성경말씀은 이 옛 사람을 위해서 "너는 그런 인간이었다" 라는 것을 알려줄 때, 우리는 성경에 있는 그 어떤 말씀이라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끝난 상황이니까 말이죠.
80년대 우리나라 노래에 '연극이 끝난 후에' 라는 것이 있는데, 이미 연극은 끝났다는 겁니다. 이 무대가 주님의 무대이지, 우리의 무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거기에 배역이 없는데, 연극은 끝났다는 말이죠.
그렇게 끝났으니까 항상 말씀을 대하면서, 이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감사가 넘쳐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옛 사람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이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서 감사와 기쁨이 계속해서 올라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어디에 놀러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하나?" 라고 하는, 그런 인간의 행함은 빼야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감사하냐? 아니면 짜증이냐?" 라고 하는 것을 보시지, 그 행함을 보시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교재 217페이지를 계속해서 봅시다. 이것을 하기 전에 아까 하려고 하다가 그만 잊어버린 게 있었는데, 사무엘하 1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삼하 12:14)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 죽은 아이의 탄생 !!
그러니까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낳자마자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 죽은 아기를 두고 "아이야, 네 팔자도 참 그렇구나. 그래, 죽어라" 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금식하면서까지 기도를 했습니까? 열심히 기도를 했다는 말이죠.
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그 아이가 죽는 것은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아이가 보여주는 명확한 의미는 뭐냐하면, 자기 의사에 관계없이 출생했다는 사실인데, 어른 두 사람 때문에 출생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무럭무럭 잘 커서 건강하다고 하면, 이것을 다윗은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요? "주께서 내 죄를 눈 감아주셨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기고 싶은데, 그러면 다윗은 여기서 다시 자기의 자부심이 올라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의 행함으로 간절히 기도해서 이 아이가 살아난다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런데 아이가 어떻게 되었어요? 간절히 기도했지만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었다는 말은, 결국 누가 죽었다는 겁니까? 다윗의 모든 자부심도 같이 죽고, 그리고 그 죽음보다 더 못한 자리까지 다윗이 내려가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이삭을 바치라는 것도 역시 같은 취지인데, 이삭과 친하게 지내고 잘 살면 참으로 좋은 가정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이삭을 바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삭을 바치면, 이삭에게 기대했던 아브라함 자신도 같이 이삭이 죽을 때 같이 죽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삭이 어린양으로 인하여 살았을 때,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가치가 아닌, 자기 의미가 아닌, 주님의 약속이 자기를 지배하게 되는데, 즉 자기가 죽은 데서 살아난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 아이가 죽었는데, 그러면 이제 다윗이 낙담을 할까요? 아니면 기뻐할까요? 몇 번입니까? 기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그 금식까지 하면서 기도할 때는 그야말로 마음을 먹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나 지금 아이가 죽고 난 뒤에 멀쩡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죽이는 것을 나를 보고 어쩌란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주의 일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다윗은 주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이죠. 그것이 시편 51편에 나오는데, 다윗은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나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이전에는 "내 자부심으로 내가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내 자존심으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다가, 그런데 자기 때문에 대신 죽었던 분으로 인해서, 자기는 이제 모든 미래의 일까지 남김없이 해결이 되었음을 알았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이 나를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였지, 나를 위해서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라고, 그것이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위한 주님은 없는데,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윗이 이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죠.
그것을 어제 낮 설교시간에 언급했는데, 물론 아까도 했지만, 죽고 사는 것은 하나의 해프닝인데, 인간이 사는 것은 하나의 반짝하는 일이지, 죽고 사는데 있어서 자부심을 걸고, "이게 아니면 나는 자살한다" 라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일이든 목숨을 걸고 죽자고 미워할 필요까진 없다는 말이죠. 투표를 어디에 하든 간에, 여러분이 빨간당에 하든지 파란당에 하든지 상관없이, 그런 투표하는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우리는 의로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화롭게 되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제 우리 자신의 일은 없기 때문인데, 주님의 일밖에 없다는 것이죠.
* 하나님인가? 마귀인가?
그러면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봅시다. "일반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목사들이 이러한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 예수님의 헌신을 본받으세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헌신한 것처럼, 예수를 믿는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헌신합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점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이냐는 것이죠. 자기가 죽은 자리에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가 멀쩡하게 헌신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인데,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계속 우리에게서 무엇을 뽑아낼 생각을 하는데,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자부심을 되돌려주겠다는 것이 마귀와의 거래라는 말이죠. 그래서 헌신이 뭐냐하면, 시간을 바치고 돈을 바치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익숙한 악마의 소리입니까? 여러분도 여러 번 들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졸업할 때, 물론 신학적으로 많이 배우고 졸업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목회 20년을 하고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시간 바치고 돈 바치면 복 준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교회가 부흥이 된다는 말이죠.
* 내 보따리 내놔라 !!
교인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자기의 자부심이 망가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보고 책임을 지라고, 그렇게 윽박지르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편할 때는 교회에 잘 나오지를 않는데, 잘 먹고 잘 살 때는 외면하다가, 어려울 때가 되면 새벽기도부터 시작해서 교회에 출입을 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보따리 내놔라" 라는 것인데, 자기 자부심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절은 산의 높은 곳에 있으니 다리가 아파서 올라가지를 못하고, 낮은 곳에 있는 교회로 온다는 말이죠. 2층 정도는 괜찮다는 것인데,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있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218페이지를 읽어보겠는데, 진짜 천국에 간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과 얼마나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시고, 자식을 키우게 하시고, 일하게 하시고, 공부하게 하시고, 또한 자부심을 챙기는 옛 사람이 그대로 쌩쌩하게 살아있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가 은혜답게, 그래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위해서라는 말이죠. 지금도 그 작업을 주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아예 없는데, 주께서 이미 접수해갔는데, 그런데 아직도 꼬물거리면서 내 자존심을 챙기고 있는 우리의 모습, 그러나 이제는 그 모습까지 주님께서 모두 해결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더욱 더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He lives and works !!
2026,06,08 오전 11시에 마침.